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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강의 군벌]최강의 군벌, 만주의 패왕 장작림(34) ─ 마지막 이야기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24|조회수893 목록 댓글 7



1910년 부터 중국에서 근무한 일본인들 중에, 사이토 소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훗날 사이토의 일기라는 것을 남겼는데, 글 내용에서 이러한 언급들이 있습니다.


 1928년 5월 25일
 마츠오카 만철 부사장과 국내의 공기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다. 장작림을 죽이느냐, 마느냐에 대하여 이야기했다. 만철 사장은 말이 없었다.

 1928년 5월 30일
 만철 사장이 왔다. 사령관과 회담을 했다고 했다. 민정당 역시 이 일을 알고 있었다. 이떄 일본은 반드시 만몽 문제를 해결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첫째, 장작림을 제거하도록 한다. 둘째, 그를 살려두어 괴뢰로 만든다. 셋째, 열국 세력이 만몽에 들어오도록 하여 기회 균등을 실현시킨다. 이런 것들이었으나 수상의 생각은 아직 결정한 것이 없는 듯 했다.

 사장의 생각은 장작림을 얼마간 살려두어 일을 하게 하려는 것 같았다. 사장이 말하길 마츠이 고문 역시 장작림을 얼마간 살려두자고 했고 마치노도 같은 의견이었다. 만일 일본의 이익을 위해서 그를 얼마간 살려둔다면 할 말이 없지만 불쌍하다는 이유로 장작림을 살려두면 일본은 아무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 사장은,

 '이 놈이 일을 잘 하고 말을 잘 듣는다면 살려두고 협조할 것'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것 같았다.

 1928년 6월 3일
 하다신지 소장이 말하길 21일 칙명의 내용이 담긴 전보를 발표하지 않았는데, 고모토(고모토 다이사쿠)가 들고 가버렸다고 했다. 또 모리오카가 말하길, 군 헌병대에서 장작림 살해 계획을 세웠는데, 고모토가 계획을 한 것 같다고 하였다. 오늘 총영사가 나한테 전보를 보내 주었다. 공사가 군 헌병대에서 장작림을 죽일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이 일기의 내용대로라면 고모토 다이사쿠가 일을 벌이기로 했고, 일본 고위층은 장작림 살해 모의를 사전부터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그전부터 일본의 동북 군정계는 "장작림이 일본에 대하여 고분고분 말을 잘 듣지 않으므로 기회를 보아 동삼성에서 장작림을 없애고 다른 인물로 대신하려 할 것이다." 라는 의견을 굳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장작림도 그런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하지만 명확한게 없으므로 반신반의 할 수 밖에 없었는데, 우선 안전을 위해서 원래는 승용차를 타고 나갈 생각이었습니다. 하지만 도로가 워낙 상태가 좋지 않아, 난색을 표시했고, 장작상과 오준승 등이 안전을 책임지고는 기차를 이용해 봉천으로 돌아가려고 했습니다.


 장작림이 봉천으로 돌아가기 며칠 전 봉천 헌병사령관은 일본 수비대가 황고둔역 부근의 노도구와 삼동교 주위를 밤낮 없이 보초를 서 행인 통행을 금지시키고 있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상부에 보고했으며 낌새가 이상하니 봉천으로의 귀환은 멀리 돌아서 오는것이 좋겠다고 권했습니다. 하지만 장작림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습니다.


 완전히 무방비를 취한것은 아니었고, 나름대로 위장술은 펼쳤습니다. 우선 봉천으로 돌아가는 시간을 연기했습니다. 원래는 6월 1일 봉천을 출발할 예정이었으나, 곧 다음날로 연기했습니다. 하지만 2일날 출발 차량에는 타지 않고, 오후 7시 쯤 자신의 다섯 째 부인인 수 부인 및 고용원들과 함께 열차에 올랐습니다. 출발 할때가 되어서 보니 3일 새벽 1시 10분 경이었습니다.


 1시 10분
 장작림은 대원수 제복을 입고, 허리에 단검을 찼습니다. 혈색 좋은 얼굴로 플랫폼에 올랐고, 수많은 환송객들이 나와 그를 환송했습니다. 북경의 원로들과 사회 유명인사, 실업계 대표 및 각국 대사관 등 외부 요인들이 있었습니다. 장학량, 양우정 등도 당연히 마중나와 대원수를 배웅했습니다.


 1시 15분
 열차가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사돈인 근은붕 등의 사람들과 장작림의 여섯째 부인, 그리고 셋째 아들 장학증과 주치의 두택선등이 올라탔습니다. 일본인 고문등도 탔습니다. 장작림이 탄 열차는 차 앞머리 부분을 포함하여 20량이었고, 차량 편성은 맨 앞 순서 대로 기관차 1량, 철갑차 1량, 삼등차 3량, 2등차 2량, 특등차 7량, 2등차 2량, 1등차 1량, 철갑차 1량, 화차 1량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장작림은 10번째 칸에 탔는데, 본래 서태후 전용 열차인 꽃차였으나 후에 개조를 했고, 차량 내부에는 큰 객실이 있었고 침대칸이 있었습니다. 소파와 마작을 두는 탁자 등도 있었습니다.


 수행원들은 분위기가 묘해 혹시나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개인적으로 반창고, 붕대, 과자등을 준비하여 비상 사태를 대비했습니다.


 6시 30분
 열차가 천진에 도착했습니다. 저옥박(褚玉璞), 감조새 등이 마중을 나왔고, 근운붕은 본래 장작림을 따라가려 했으나 일본 영사관에서 사람을 보내 근은붕과 상의할 일이 있다고 해서 차에서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일본인 고문등도 이 지점에서 내렸습니다.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천진에서 교통청장 상음괴가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열차가 다시 출발했습니다.



 상음괴의 모습



 오후 4시
 장작림 전용 열차가 산해관에 도착했습니다. 식당칸에서는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고, 요리사였던 박풍전은 동료 조연벽과 함께 정성 들여 6개 반찬과 한 가지 국을 준비했습니다. 고기와 가지볶음, 삶은 콩 요리, 채소 고기채볶음, 조기구이, 시금치 새우볶음, 매운 닭찜, 배춧국 등이 매뉴었습니다. 식사를 하고 장작림의 부인중에 한명인 마 부인이 말했습니다.


 "내일 아침밥은 집에서 먹을 수 있겠네요."


 장작림은 양치질을 하면서 투덜거렸습니다.


 "기차 위에서는 뭘 먹어도 맛이 별로고, 잠을 자도 영 잔 것 같지가 않아."


 오준승


 식사를 끝낼 때 쯤 되자 오준승이 차에 올라탔습니다. 본래 봉천에 있었던 오준승이지만, 장작림이 오는것에 맞춰서 산해관까지 미리 가서 그를 배웅하려고 나온 것입니다. 열차에서 장작림은 오준승을 반갑게 맞아들였고, 다시 상음괴 등과 함께 마작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밤11시
 전용 열차가 금주에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계속해서 새벽 동안 달렸고, 점점 새벽이 개여흘렀습니다. 마작을 하던 사람들도 지쳐서 흩어져 휴식을 취했습니다. 창빡을 보니 철로 양편으로 10여 보마다 초소가 있어서 보초들이 깔려 있었습니다.



 장경혜

 6월 4일 새벽
 열차가 황고둔역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는 장경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장경혜는 나머지 집안 식구들과 문무관원들은 봉천 신차역에 나와서 기다린다고 말했고, 열차에 올라탔습니다. 하지만 장작림과 같은 칸에 타지는 않았습니다. 전용 열차가 다시 출발했습니다.


 6월 4일 5시 23분
 장작림이 타고 있던 열차칸에는 장작림, 오준승, 교위처장 온수선 등이 탔습니다. 날이 꽤 서늘해서 오준승은 친절하게 말했습니다.


 "날씨가 차가운 데 옷을 더 껴입지 않겠습니까?"


 장작림은 손목 시계를 보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됐어. 곧 도착할 텐데 뭐."


 장작림이 그렇게 말하던 순간, 갑자기 큰 폭발음이 들려왔습니다. 불길이 솟아오르고 모래와 자갈이 날아들었고, 철로는 젓가럭처럼 휘어지며 요동을 쳤고 열자 전체가 진동하였습니다. 일부는 탈선을 하고 불이 붙었습니다.

 

 장작림이 타던 칸이 직격으로 당했습니다. 차체가 무려 10여미터나 솟오르고 바퀴 두 개만 달랑 남았습니다. 오준승은 머리에 쇳조각 파편이 박혀 현장에서 즉하했고, 여섯째 부인은 다리에 경상을 입고 온수선 역시 부상을 입었습니다. 하지만 온수선은 자기 부상은 개의치 않고 곧바로 장작림을 찾았습니다. 


 장작림은 아직 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목구멍에 깊은 구멍이 나있고 온 몸에 피를 뒤집어 쓰고 있었습니다. 내상이 어느정도나 될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온수선은 손수건을 꺼내 장작림의 상처를 동여맹흤십낟. 그리고 장학증과 함께 인사불성인 장작림을 들어서 신속히 원수부로 옮겼습니다.


 원수부 동원의 소청루에 도착한 일행은 1층에 있는 거실에 장작림을 급히 눕히고 구조 활동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성경시의원의 영국인 의사를 불러 필사적으로 구원을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상처가 너무 심해 신의가 오더라도 살릴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오전 9시
 계속된 치료 행위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고, 장작림은 더 버티지 못했습니다. 그의 나이 54세 였습니다. 장작림은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 전, 필사적으로 최후의 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상처가…너무 심하다……잘…못될 염려가 있으니……하…학량이를 빨리…봉천으로 오도록……해라!"


 시신은 원수부 동문에 있는 방에 일단 안치했습니다. 이 사건의 사망자는 20여명이었고, 부상자도 53명이나 되었습니다. 장경혜 등도 목 부상을 입었고, 일본인 고문 키카 세이야도 얼굴과 손 등에 경상을 입었습니다. 사건 발생 시각은 1928년 6월 4일 오전 5시 23분이었습니다. 사고가 발생한지 30분이 지났을 무렵, 봉천 교섭총서 일본과 과장 관경택은 일본 봉천 주재 부영사인 고노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했습니다.


 "일본인이 교차점 부근에서 장작림이 탑승한 전용 열차를 폭파시켰다!"


 "증거가 있습니까?"


 "증거는 더 조사해 보아야 하겠지만, 일본인이 관계된 것은 확실하다!"


 일본측은 증거 인멸을 위해 장작림이 아직 살아있던 8시 무렵 총영사관에서 사람을 보내 합동 조사를 제의했습니다. 그리고 이번 사건을 남방의 편의대(사복경찰)가 폭탄을 투척해서 벌인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장제스나 풍옥상 등이 일을 저질렀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관경택은 반발했습니다.


 "폭발이 맹렬한게, 절대 사람의 힘으로 던질 수 있는 종류가 아니다!'


 6월 10일, 일본의 우치다 영사는 타자된 일본어 보고서를 들고 관경택을 찾았고, 보고서에는 폭발 사고가 남방에서 보낸 편의대의 행위라고 되어있었고 합동 발표를 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관경택은 또 거절했습니다.


 "조사할 때 나는 이미 말씀 드린바 있습니다. 쌍방의 의견이 이렇게 분분한 데 그럴드한 공동 조사서는 만들어서 무엇 하겠습니까?"


 우치다 영사는 아예 노골적으로 공갈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만일 당신이 서명 날인을 하지 않으면 일본 군대는 당신을 그냥 두지 않을 것입니다. 당신에게는 좋을 게 하나도 없을텐데!"


 "장 대원수같이 위대한 인물도 폭발 사고로 다쳤는데, 나같이 하찮은 놈쯤이야, 마음대로 해보라고!"


 결국 우치다는 물러났고, 다음날 또 왔지만 역시 거절당했습니다.


 일본측의 그런 행위는 둘쨰치고, 중국 쪽에서는 자기들 나름대로 조사를 했습니다. 6월 5일 봉천 공병창은 러시아 기술자 로미도프와 다얼니 등 관련 전문가를 보내 관경택과 자세히 조사를 하였고 현장의 사진을 찍었습니다. 러시아 기술자들은 분석 결과를 내놓았습니다.


 첫째, 폭약량으로 폭발이 맹렬하였던 것을 분석하여 폭약량은 500내지 600파운드 정도로 초정되고 매설은 두 곳에 설치한것으로 조사되었습니다.


 둘째, 폭탄의 위치로 하나는 교동 남측 돌무더기 위며, 위의 철교 교각과 연결되도록 하였고 다른 하나는 교동 중간의 부교 북단이었습니다.


 셋째, 폭약의 설치 방향으로 폭약은 철교 위에 안치했습니다. 그리고 기술자의 솜씨가 분명했고, 모든 폭약의 매몰, 폭약 유도등은 폭파 기술에 이골이 난 전문 기술인들의 짓으로 결론이 났습니다. 남방인들이 했다는 일본측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었던 것입니다.


 일본 측이 주장하는 바는, 현장에 소위 남방 편의대원이라고 하는 두 사람의 시체가 있다는 것입니다. 관경택은 이 사체들도 면밀히 조사를 했는데, 상처 부위를 칼로 오려 낸 흔적이 있고, 몸에 모르핀 주사 바늘 자국이 많이 있는것으로 보아 정상인은 아니라고 판명내렸습니다. 그래서 남방 편의대원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관동군 측은 더욱 뻔뻔하게 사람을 보내 이렇게 주장할 뿐이었습니다.


 "관동군이 얻은 정보에 의하면 열차 폭발은 남방 간첩들의 소행임이 확실합니다. 실로 장작림 장군에게는 불행한 일입니다."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 모든 일을 기획한 인물입니다.


 폭발 사건 당시 상위였던 토우그는 심양 독립수비대 중대장으로 황고둔의 삼동교 부근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이 토우그가 고모토의 지시에 의해 열차 폭발 공작의 책임을 맡았고, 폭발 스위치를 누른것도 다름 아닌 그였습니다. 사건이 발생한지 20년 뒤에 토우그는 자백을 하였고, 고모토 역시 '나는 장작림을 살해하였다'는 자술서를 남겼습니다.


 고모토는 이전부터 장작림을 죽여 없애야 한다고 소리 높이던 인물로, 설사 나중에 누가 장작림을 대신한다고 해도 ─ 이를테면 장학량이 ─ 후임자는 더 다루기 어려운 인물일 수도 있다는것을 지적했습니다. 고모토의 계획은 장작림을 죽여 없애면 장학량이 날뛸테니 소요가 일어날테고, 그러면 일본은 치안 유지를 명분으로 봉군의 세력에 진입한 다음, 봉군의 무장을 해제하여 일거에 만주를 점령하여 실질적인 지배를 하자는것이 긔의 책략이었습니다.


 이 주장은 소장파 군인들의 지지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계획을 실행 하는데 앞서 지도를 보고 일을 꾸몄는데 거류하 위의 요하 대철교를 본래는 적합하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이 지역은 봉군이 많고 폭약 설치도 일주일이나 걸렸습니다. 그래서 만철선과 경봉선의 교차 지점이 제일 안전하고, 일본군이 움직여도 주목을 덜 끌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암살 방법에 있어서는 포탄으로 열차를 습격하는것과 열차를 폭약으로 폭파시키는 두 가지 안이 나왔습니다. 첫번째 방법을 사용한다면 일본인이 한 짓이라고 폭로되는것은 금방입니다. 그래서 두번째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처음 폭파로 장작림이 사망하지 않을 시에 대비해, 특수 부대 투입도 고려했습니다.


 조선 신의주에서 공병을 차출하였고, 전기로 점화시키는 500파운드 고성능 폭약 두 상자가 와서 작업을 시작했습니다. 작업은 6시간이 걸렸습니다.


 동시에 위장술도 준비했습니다. 고모토는 일본 낭인 아다치에게 중국인 3명의 송장을 부탁했고, 아다치는 중국의 실업 군인 유재명을 데려왔습니다. 일이 성사되면 2만원을 받기로 하고 즉석에서 2,000원을 주었습니다. 유재명은 아편 중독자인 떠돌이 무직자 3명을 데려왔는데 이름은 오귀생, 장문재, 사대명이었습니다. 한 사람 당 50원을 주고 목욕탕에 데려가 깨끗하게 씻기고 새 옷을 입히고는 술과 음식을 주었습니다. 그리고 6월 1일 새벽 1시 이들을 데리고 남만철로 육교 지점에 데려가서 죽였습니다. 몸에 나방과 관계가 있는 신분증을 넣는것은 기본입니다. 그런데 사대명은 어둠을 틈타 도망가 버렸습니다.


 사실 현장에 시체가 있었다고 말을 한것도 일본측이 먼저였습니다. 우치다 공사가 '이상한 시체가 있으니 같이 현장 검증을 해보자' 고 발언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가 보니 과연 두 사람의 시체가 있었는데, 연령은 30세 쯤 되보였고 주머니는 러시아제 폭탄과 편지 두 통이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국민혁명 관동 초무사 용지라는 말, 그리고 우측에 세로로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쑨원의 유언)는 말이 있었고 좌측에는 '동지여 노력을 경주하자'는 말이 있었습니다. 


 우치다 공사는 입에 침을 튀기면서 이것이야말로 남방 편의대원의 획책임이 분명하다고 주장했지만, 이미 중국 측 조사요원들은 이게 일본의 계략임을 파악했습니다. 하지만 일본 육군성은 일방적으로 편의대원이 일을 벌였고, 경비대가 그들을 사살했다고 보고해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고위급 인사들은 모두 모여 앞으로 입을 적당히 맞출것을 합의했습니다. 그리고 관련된 날조 보고를 계속해서 발표했습니다.


 "…4일 오전 3시 전후 신원이 의심스러운 중국인 세 명이 만철선 안으로 기어 들어왔다. 우리 감시병이 접근하여 누구냐고 물었을때, 그들은 폭탄을 투척했다. 그래서 우리 병사 두 명이 쫒아가 쏘았으나 한 명은 달아났다. 중국인 시체 검시 결과 두 개의 폭탄과 두 통의 서신이 발견되었다. 한 통은 개인 서신이었고, 다른 한 통은 국민군 관동 초무사 서신의 한 쪽이었다. 이것으로 볼 때 그들은 남방사복 경찰인 편의대원이라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습니다. 도망간 중국인 사대명이 봉천감옥에 와서, 자신을 감옥에 넣어달라고 한것입니다. 이유를 물으니 일본인들이 계속 추격을 해서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사대명은 진상을 상세하게 설명했는데, 복장이 살해된 두 사람과 동일했습니다.


 "우리들은 남만 철도역의 노동자들입니다. 먼저 우리들에게 머리를 깎게 하고 목욕을 시켰습니다. 그리고 내가 입고 있는 이 새옷과, 새 신발으 주고, 먹을것과 마실 것을 주었습니다. 며칠이 지나 어젯밤 갑자기 우리를 불러 남만철로 부근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그리고는 일본인이 '너희들 이제 가 봐!' 라고 했습니다. 나는 영문을 몰랐지만 일본 놈들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어서 경계를 했는데, 과연 얼마 후 일본 병사들이 오더니 일언반구 말도 없이 총검으로 사람을 찔렀습니다. 나는 일이 잘못 돌아가는것을 알고 걸음아 나 살려라 하고 죽을힘을 다해 시내 방향으로 뛰었습니다." 


 그리고 본래 고모토는 특수부대를 투입할 계획이었지만, 정작 사건이 터지고 보니 폭발의 위력이 고모토의 상상보다 컸기에 그는 특수부대는 투입하지 않았습니다. 장작림이 죽은 직후 고모토는 일본 낭인들에게 일본이 관리하는 만철 부속지에 폭탄을 던지게 하고 이것이 봉군의 소행이라고 날조를 했습니다. 물론 소란을 일으키기 위한 속셈이었는데, 소란이 벌어지면 관동군이 출병하여 일거에 동삼성을 제압하려는 교활한 의도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동북의 독군서 참모장이던 장식의, 봉천 성장 유상청 등은 매우 침착하게 대응해서, 봉군과 일본군의 사소한 출동은 있었지만 출병 구실을 낼 수 있을만한 수준은 못 되었습니다. 봉천 주재 일본 총영사 대리였던 모리시마 오이토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본래 폭발 사고로 장작림 한 사람만을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다. 주목적은 열차 폭발과 장작림의 사망으로 사회가 혼란되면 즉시 관동군을 출병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대규모의 무장 충돌을 야기시키고 무력으로 철저히 만주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 열차 폭발 사고 후 봉천 시내 일본 교민회 등 몇 군데에서 연속적으로 폭탄 투척 사건이 일어났지만 이것만 가지고는 일본출병의 구실이 되지 못하였다."


 장식의와 유상청은 냉정하고 침착하게 사태를 대응하면서, 서둘러 장학량에게 연락을 취하고 장작림의 상은 극비리에 치루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일은 장학량이 심양으로 올때까지의 시간을 버는 것입니다. 장작림이 사망한 6월 6일 봉천성 정부는 전문을 발표했습니다.


 "대원수께서 타고 오신 경봉행 열차가 황고둔 동쪽 남만철로 교량에서 폭발 사고를 당했다. 여러 사람이 다쳤는데 대원수 역시 가벼운 부상을 입었지만 생명에는 이상이 없다……."


 그리고 시내 역시 무슨 일이 있느냐는듯 평온하게 유지했습니다. 그러면서 대원수부 안에 일체의 방문객을 사절했고, 관련된 사람에게도 철저히 보안을 지킬것을 촉구했습니다. 장작림을 치료했던 영국인 의사에게는 간절하게 부탁했습니다.


 "이번 사건은 매우 중대합니다. 제발 비밀로 부쳐 주실것을 간절히 부탁드립니다."


 매우 의리가 있는 영국인 의사는 약속을 굳게 지켰습니다. 봉천 주재 영국 총영사가 사태를 캐물을 때도 대답을 하지 않고 다만 장작림은 부상을 입었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영국인 의사는 원장 자리에서 물러났습니다.


 주방에서는 무슨 일 있냐는듯 장작림의 식사를 계속 만들었고, 주치의도 계속 약을 짓고 처방전을 썻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일본의 염탐을 막기 위한 행위였습니다. 일본은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위문을 하러 왔다는 핑계를 대며 장작림을 염탐하려 했지만 모두 완곡하게 사절했습니다.


 장작림의 생사는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일본 고문 마치노는 유상청을 찾아와 사태를 물었지만, 유상청은 담담하게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대원수께서는 정신이 또렷하고 음식도 잘 잡수십니다."


 일본 총영사는 여자를 보내면 되지 않을까 하고 자신의 부인을 보내 탐지하도록 했습니다. 장작림의 부인인 수 부인은 머리를 산발한채 곡을 하고 있었는데, 방문 소식을 듣자 바로 세수를 하고 머리를 빗고 화장을 한 다음, 화려한 의복을 입고 아무 일도 없다는듯 응접실에 나가 샴페인을 따며 건배했스빈다.


 "대원수께서는 다치셔서 많이 놀라셨습니다. 지금 아편 흡입하는것을 도와드렸는데 막 잠이 드셨습니다. 오래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일본이 장작림의 죽음에 대한 실마리를 잡은것은 죽은지 4일이 지난 8일로, 공관 문 앞에서 향 피우는 냄새를 맡은것이 원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여인들이 상복을 입은 모습도 포착했지만, 아직 상을 치루는지 어쩌는지는 명확하게 보고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대략 그 즈음부터 민간에도 장작림 사망설이 나돌기 시작했습니다.


 
 장작림이 사고를 당하고 죽은 날짜는 6월 4일이고 음력으로는 4월 17일입니다. 그리고 이는 장학량의 음력 생일이었으며, 보통 중국인들은 음력으로 생일을 보냅니다. 즉 장작림이 사고를 당하고 있을때 장학량은 양우정, 손전방과 조촐하게 생일을 축하하는 자리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당시 장학량이 무얼 하고 있었느냐는 여러 가지 설들이 있습니다. 


 여하간에 그러던 중, 그는 갑자기 봉천에서 비밀 전보를 받았습니다. 대원수가 재난을 당했고, 속히 봉천으로 와 수습을 하라는 말이었습니다. 장학량은 즉시 사람들에게 대원수의 열차가 폭발 사고를 당해, 대원수가 부상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갑자기 이 이야기를 듣고 흥이 꺠져서 돌아갔고, 자리에 장학량과 유명구라는 사람이 남아 두 사람만 남게 되자 장학량은 울면서 낮게 말했습니다.


 "장군님이 가셨다!"


 하지만 장학량은 심정은 뒤로하고 아무런 내색도 안했기에, 3,4군단의 병사들은 대원수가 부상 당했다는 이야기들은 들었지만 죽었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습니다. 장학량은 그 즉시 3,4방면군을 철수하도록 하고, 양우정에게 전방 지휘권을 주고는 아무 비밀리에 봉천으로 귀환했습니다. 그런데 중간에 장종창이 출관을 하겠다면서 봉천성 동부 지역에 기반을 마란하려 이상한 짓을 하느라 군사력으로 누르는 바람에 8일이나 허비했습니다.


 이런저런 문제를 다 해결하자 시간은 6월 17일이었고, 장작림이 죽은 지도 꽤 시간이 흘렀습니다. 일본도 장학량이 어떻게 나올지에 신경을 곤두서는것은 당연한 일인지라, 장학량역은 열차 출발 전에 머리를 빡빡 밀고 상의를 회색빛 사병 복장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자리도 특등성이 아니라 사병들이 앉은 복잡한 중간 지역에 타서 자신을 수행하는 사람 두 명을 몰래 배치하여 보호하도록 했습니다.


 열차가 산해관에 도착해서 머물무렵, 갑자기 일본 헌병 세명이 오더니 조사를 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들은 담당자를 불러 꼬치꼬치 캐물었고, '이 열차에 장학량이 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담당자는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열차가 봉천에 도착하자 장학량은 사람을 시켜 주위를 염탐하도록 했고, 일부러 출구와 반대쪽으로 나가서 대기시켜놓은 자동차를 타고 원수부로 직행했습니다. 온몸에 재가 뭍은 모습이라, 처음 장학량을 본 장학량의 부인 우봉지는 누군지 몰라 깜짝 소리를 질렀습니다. 장학량은 세수를 하고 바로 장작림에게 곡을 올렸습니다.


 장학량이 도착하자 정국은 일거에 조용해졌습니다. 장학량은 장작림의 자리를 이어받으면서 공식적으로 장작림의 죽음을 선포하고, 규모가 크게 상을 열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와서 영정 앞에서 조문을 했고, 많은 관원들과 각국 주재 영사들이 고인을 위로했습니다. 88편의 제문 가운데 가장 첫번째 제문은 운명이 참 얄궇게도, 장작림의 숙적이었던 오패부가 수재 출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작성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오호라, 천하가 어지러워 민란이 도처에서 잇따르도다. 동북에 의로운 깃발이 있었으니 공은 한 몸 바쳐 국가의 동량이 되었도다. 공의 서거 소식을 듣고 강을 마주하고 서럽게 우노라. 공의 애석함뿐만아 아니고 국가의 애석함이다. 공의 소식을 듣고 청므에는 의심하였는데 슬프도다. 눈을 감으시고 이제 가시어 구경(사대부의 묘)에 한스럽게 누우시니, 이에 넋을 기리는 제를 올려 영령을 위로하노라. 오호, 애제라."


 그토록 싸웠던 인물들도 일이 이렇게 되자 추모하는 만련드릉르 보냈습니다. 먼저 단기서가 보낸 만련입니다.


 "만가를 부르노니, 옛 친구가 그리워, 슬픔에 젖노라. 신선의 마차에, 혼령의 깃대만 저 멀리 가물가물하네."


 조곤의 만련입니다.


 "개국의 공이 높은 천고의 영웅이여, 눈물짓는다. 한떄의 굳은 사귐, 영원히 전하노라."


 이종인의 만련입니다.


 "총리와 더불어 벗을 하며 뜻을 논했는데, 누군가 혜성에게 명하여 세월을 빼앗네. 중원의 많고 많은 일이 있어 힘써 막아 왔음을 생가갛네."


 이런저런 의식이 끝나고, 뒷일을 논의하기 위해 봉군의 수뇌들이 모였습니다. 처음에는 원로인 장작상이 후계로 거론되었고, 장작상이 자기는 그런 일을 맡을만하지 않다고 하여 장학량이 이 난국을 돌파할수 있다고 하여 장학량이 취임했습니다. 동북 지구는 아주 평온하게 세대 교체가 이루어졌는데, 물론 장학량도 나름대로 준비 되지 않은 상태에서 후계가 되며 여러가지 난국이 있었지만, 최소한 일본이 바라던 대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장작림 원수림


 
 장작림의 무덤은 장학량이 직접 자리를 둘러보며 골랐습니다. 원로인 장작상과 탕옥린, 풍수전문가들이 함께 했습니다. 장학량은 아내인 우봉지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곳이 좋군. 아버님이 잠들 만한 곳이야."


 또 수 부인에게 물었습니다.


 "다섯째 어머님, 어떻습니까?"


 "좋군. 아주 좋아요."


 본래대로라면 장작림의 묘는 릉(陵)이 되어야 했지만, 장학량이 "내 아버지가 황제가 아니니 림이라고 하자." 라고 해서 원수림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주변 인물에 대한 장작림의 평가와 주변 인물들의 장작림에 대한 평가

 청조 말 외무부 대신등을 지낸 조여림이 쓴 조여림 일생 회고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장씨의 키는 크지 않았다. 음성 역시 크지 않았다. 공손하여 유학자의 분위기가 있었고, 위풍당당한 무인의 모습은 아니었다. 몸은 북방인이나 얼굴 모습은 남방인이며, 장백산 출신의 남자 같지 않았다. 

 그가 최고로 숭배하는 사람은 원세개였다. 장작림은 이렇게 말했다. "원세개의 능력과 지략은 능히 중국을 통일할 만하다. 유감스럽게도 제제운동을 벌여 중도에서 죽고 말았다." 

 조이손에 대하여 말하였는데 이러했다.
 
 "기인 중에서 원대한 안목을 가진 자가 적었는데 아깝게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하였다.

 단기서에 대해서는 이러했다.

 "그는 비록 괴팍스러운 성질이 있지만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않았고 사람들을 성실하게 대했다. 애석하게도 서수쟁을 너무 믿었다. 서수쟁의 재주는 양우정을 능가히지만, 자신의 재주를 너무 믿고 과신하여 단기서에게 해가 되었다."

 "서세창은 포용력이 있지만 현대 정치에는 맞지 않았고그의 학문은 깊었지만 그 이론이 시대 흐름과 맞지 않았다. 그의 학문은 단점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학문 깊이를 모르므로 그를 이해하기 쉽지 않았다.

 여원홍에 대해서는 이러했다.

 "그는 평범한 인재다. 일시적 운세에 기대어 부총통까지 올라갔다. 여러 가지 의견을 마구 내놓아 정부 내 불화를 가져왔다.

 풍옥상에 대해서는 극도로 미워했다.

 "반복을 일삼는 소인이고, 오직 이만 도모하는 위정군자다. 이 사람은 위험하고 사기성이 있어 그와 함께 일을 하려면 아주 정말로 주의해야 한다."

 장씨는 동삼성에 앉아서 군대를 잘 단속하였고 재산을 늘리는 재주도 있었으며 국경을 보호하고 백성을 평얀하게 하여 인민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다. 더구나 일본인에 대하여는 안팎으로 강온의 방법을 사용해 관동군이 제 뜻을 펴지 못하게 하였다. 관동군 소장파들의 한이 뼈에 사무쳐 그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였다. 드디어 비상 수단으로 그를 죽게 했으니, 장씨 역시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산 일세의 영웅이었다."


 
 북경 정부 국무총리 등을 지낸 안혜경의 자서전에는 이러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의 공과 죄는 한마디로 평가하기 어렵다. 다만 사간들의 공정한 판단의 여지를 남겨 놓을 뿐이다. 그가 받은 교육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완전히 자기의 천부적 지혜와 능력에 따라 그가 죽기 전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그는 동삼성에 있는 동안 일본 군벌의 침략 아래서도 지방의 질서를 유지해 왔다. 그는 대처 능력이 일반 무인들과는 달랐다. 그의 약점은 중국의 일반 부인들이 공동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장씨에 대하여는 가혹한 지적은 할 수 없다."


 북경정부의 외교총장등을 지낸 고유균은 '민국 역사의 몇 가지 술회' 라는 기록에서 이렇게 언급했습니다.


 "장작림은 나에 대하여 매우 겸손했다. 나는 이것이 그의 특기라고 생각한다. 그는 교육을 받은 일이 없지만 부하들을 잘 통솔했다. 예를 들면 장종창은 그의 부하였다. 그는 장작림을 보면 90도 각도로 머리를 조아렸다. 장작림이 그에게 어떤 일을 하기를 요구하면 그는 바로 그 어떤 일을 했다. 매우 복종을 잘 했다. 장 대원수는 부하들의 기질을 아주 잘 알았다. 자기는 돈을 갖고 있지 않았지만 부하들의 주머니 사정에 대하여는 관대했다. 그리고 자기의 생활은 매우 단출했다."


 
 반대적인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오준승의 참모장이었던 유덕권이라는 사람이 쓴 책에는 이런 언급이 나옵니다. 양우정이 말하길 "장 대원수는 담이 작았다." 고 했으며 포귀경이 말하길 "장 원수는 5분을 같이 이야기하기가 힘든 사람." 이라고 하였으며, 왕영강은 "장 대원수는 질투가 심하며 신의가 없으며 끝내 큰 일을 이룬것이 하나도 없다." 고 했으며 원금개는 "장 원수는 일을 시작만 하지 결말이 없다." 고 했으며 오준승은 "장 순열사는 병사들만 좋아하지 장령들에게는 이간을 시켜 불화하게 한다." 고 했으며 강등선은 "장 원수의 모든것은 가식이다." 라고 했으며 이경림은 "장 순열사는 사람을 대할 때 진심으로 대하지 않는다. 조곤이 오패부를 대하는것 같지가 않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여기에 언급된 사람들은 모두 봉군의 가장 핵심격인 인물들입니다. 이 말대로라면 장작림은 최측근들에게 무시당했다는 것인데, 다만 여기에 대해서 어떤 시간, 지점, 배경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서 유덕권이 진짜로 그들과 이런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증명해볼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이 점은 고려해야 합니다.




 그때 그 사람들


 오패부는 장제스에 대항하여 군벌들이 일어나 반장 전쟁이 일어나자 재기를 꿈꾸지만, 제압당하고 장학량에게 의지하였습니다. 훗날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은 명망있는 오패부를 괴리정권의 수장으로 만들기 위해 그를 유혹했지만, 오패부는 매국적 제안을 단칼에 거절해서 일본의 미움을 샀습니다. 최후는 일본인이 운영하는 치괴의사에서 사망했는데, 의사가 일본군의 사주를 받고 암살했다는 의혹도 있습니다.



 조곤은 텐진에서 은거 생활을 했습니다. 중일전쟁 당시 일본은 명망이 깊던 조곤을 유혹해 괴뢰정부를 세우려고 했지만, 조곤은 매국적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단기서는 만주 사변이 일어나자 일본인과 모든 인연을 끊고 상하이로 떠났습니다. 불교에 심취했고, 1935년 국민정부위원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습니다.



손전방은 만주 사변이 일어나고 텐진에 머물렀습니다. 불경 읽기 등에 몰두하며 시간을 보냈으나, 과거 자신이 살해했던 산동군 출신의 시종빈의 딸, 시검교(施劍翹)에게 저격을 받고 사망했습니다.


염석산은 1930년 장제스에 대항하여 이른바 반장 전쟁을 일으키기도 했고, 그 후에도 독자적인 자치를 내세우며 산서의 제왕으로 오랫동안 군림했습니다. 1949년 3월 공산당이 들어서자 쫒겨났고, 대만으로 피해 1960년대에 사망했습니다.


 

풍옥상은 1930년 장제스에 대항하는 반장 전쟁을 일으키다 실패하여 제명당했습니다. 이후 항일전쟁 기간 동안 다시 복직했는데 공산당과 보조를 맞추었습니다. 국공합작 이후에는 국방최고위원장이 되었고, 1949년 흑해에서 배를 타고 가다 갑자기 선박에서 화재가 나서 사망했습니다.



양우정은 장작림 최고의 측근 답게 그 후에도 봉군에서 영향력이 막대했고, 이 때문에 동북의 군정대권을 놓고 장학량과 대립하다가 저격당해 사망했습니다.



장학량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유명합니다. 시안 사변을 위대한 애국심의 발로로 보는 사람도 있고, 쾌남아다운 결정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으며, 정치적인 술책이었다는 이야기도 있고, 자신의 세력을 보신하려는 움직임일 뿐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어찌 되었건 이에 대한 평가는 자신들이 생각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것은 역사적 인물로서의 의미가 끝난 후의 장학량입니다.



'중국의 붉은 별'에서 묘사하길 장학량은 아편쟁이였으며 마약도 상습적으로 복용했다가 후에 끊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장학량은 이런 점은 무색하게 매우 오래살았는데, 다만 대중들의 기억은 청년 장학량, 그리고 시안사건에서 끊겨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장학량은 그 후 수십년을 대만에서 살았습니다.


 중국의 붉은 별의 인물에 대한 약력을 보면 장학량이 명나라 역사를 열심히 연구하여 권위자가 되었다는 언급이 나옵니다. 1949년부터 시작한 연금은, 1990년 6월 1일이 되어서야 종료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저렇게 늙었습니다.


 맨 마지막 사진 장학량의 옆에 있는 사람의 이름은 곽태입니다. 그리고 그의 할아버지는 다름 아닌 곽송령입니다.


장학량 본인은 "군인으로서 죽어 마땅한 죄를 졌으나, 이 일에 대해서는 양심에 있어서 떳떳하다. 1936년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나는 주저 않고 다시 시안사건을 일으킬 것이다" 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서는 "장학량옹은 중국 현대사에서 가장 걸출한 인물의 하나"라고 전제하고 "북경당국은 그의 중국대륙방문을 대단히 환영한다" 는 식의 발표를 했습니다. 하지만 장학량은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면서 중국에는 가지 않았습니다.


장학량이 대만에 있을때 부탁으로 "아버지 묘소에 성묘좀 해주고, 대륙에 여정조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살아있는지 모르겠다." 라고 한적이 있습니다.


 1991년 3월 10일, 54년 만에 뉴욕에서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죠. 둘 다 할아버지가 되어서 말입니다.

 장학량은 2001년 사망했습니다. 그리고 대륙을 질타하던 군벌들의 시대는, 이제 온전히 역사의 영역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참조 서적

만주 군벌 장작림 - 쉬처
중국의 붉은 별
중화민국과 공산혁명
위대한 길- 한알의 불씨가 광야를 불사르다
현대 중국을 찾아서 - 조너선 스펜스
장학량정권연구
장제스의 일기를 읽다 - 레이 황
원세개 - 허우이제
중국의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 예용례
1920년대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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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kingrapter21 | 작성시간 12.07.25 오 드디어 끝났네요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 작성자James Lee | 작성시간 12.07.25 첫회부터 재미있게 잘 봤습니다.
  • 작성자번영 | 작성시간 12.07.25 잘봤습니다. 끝나다니 매우 섭섭해지네요
  • 작성자el5311 | 작성시간 12.07.25 정말 재밌게 봤습니다~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7.26 정말 재밌게 잘 봤습니다. 글을 너무ㅡ 잘 쓰셔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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