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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 ─ 이성량과 누르하치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29|조회수879 목록 댓글 1

상이 이르기를,


“이여송은 훌륭한 장수인가?”

하니, 윤두수가 답하기를 이러하였다.

“비록 이여송의 사람됨은 잘 알지 못하지만, 그의 아버지 이성량(李成梁)은 명장(名將)입니다.”
 조선왕조실록 ─ 선조 33권, 25년(1592 임진 / 명 만력(萬曆) 20년) 12월 23일(기유) 3번째기사


 

 이여송(李如松)은 우리에게도 매우 친숙한 인물입니다. 바로 임진왜란 당시 우리를 도와주기 위해 왔던 명나라의 장군으로, 심지어 거상이나 임진록같은 게임에도 등장해서 아주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다만 선조는 이여송이 온다는 말을 듣고 걱정하기를,


“그 사람은 단지 호(胡)를 방어할 줄만 알고 왜적과 싸우는 것은 익히지 않았다. 이 적을 북로(北虜) 보듯이 한다면 잘못이다.” 


 과연 선조의 식견대로 되어, 큰 도움을 준 명나라 남병에 비해 이여송의 중심이 되는 북병은 오히려 온갖 해악만을 끼치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이성량은 그러한 이여송의 아버지로, 요동의 실질적인 제왕으로 군림하던 인물. 자(字)는 여계(如契)이며 호(號)는 인성(引城)이고, 철령(鐵嶺) 사람으로 그 선조는 다름 아닌 조선 출신 이영(李英)입니다. 즉 선비족 출신, 돌궐족 출신 하듯이 말한다면 이성량은 다름아닌 조선족 출신이 됩니다. 그는 영용하고 강인하여, 장수의 자질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성량은 선조가 조선에서 넘어온 후, 계속 철령위의 첨사(僉事)를 세습하였는데, 위(衛)의 장관이 지휘사, 그 밑 차관이 지휘동지, 첨사가 그 밑의 직급이라고 한다면 하잘 것 없다고는 못해도 대단히 높다고도 말할 바 없는, 그런 자리입니다. 그리고 세습이라고 하지만, 상황을 보면 아버지의 직책을 이어받으려면 북경으로 가서 수속을 밞고 돈도 들었던 모양으로 보이며, 이성량의 대에 이르자 집안도 가난해져서 세습하여 직책에 오를 자금조차 없었습니다. 이에 이성량은 무려 40세가 될때까지 아무런 자리도 차지 하지 못했습니다.


 이때에 이르러 순안어사(巡按御史)가 그의 기량을 보고 인정하여 북경으로 데리고 왔고, 간신히 자리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후 공을 인정받아 요동 험산(險山)의 참장(參將)이 되었고, 1567년 토만(土蠻)이 영평(永平)을 침공하자 자원하여 나서 공을 세워 부총병이 되었고, 요양으로 이동했습니다. 이후 1570년 총병 왕치도(王治道)가 전사하자, 그 대신 도독첨사대리가 되었습니다.


 40세까지 아무런 재주도 발휘하지 못했던 이성량은, 한번 관직에 오르자 끊임없이 성과를 내고 승진하여 이미 이 시기에는 사단장에 해당하는 직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명나라 동북변에 한부(漢部), 태평부(泰平部), 타안부(朶顔部) 등 온갖 부족들이 난립하며 지난 10여년 동안 명나라의 많은 장수들이 사망했는데, 이성량이 군비를 갖추고 장교들을 선발하여 4만 군대를 갖추자 그 위용이 천지를 진동시켜 명군은 다시 싸울 의욕을 내게 되었습니다.


 다음해 5월, 토만은 대거 침공하여 명군이 막아내지 못하자, 이성량은 적의 본거지를 공격하여 수장들을 죽이고 500여명이 넘는 적군을 섬멸했습니다. 그 후에도 토만의 공격을 계속해서 막아내었고, 타안부가 4천기로 공격해오자 이 역시 저지해 내었습니다.


 이때 건주여진의 왕고가 명나라 군관 배승조(裵承祖)를 살해하자, 이성량은 나서서 왕고의 공격을 물리치고 무려 천여명이 넘는 적을 일거에 섬멸했습니다. 1575년에는 심지어 2만명이 넘는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화기를 이용해서 단박에 적을 깨부수기도 합니다.


 이미 이성량은 영원백(寧遠伯)이라는 직위를 가졌고, 셀수도 없을 정도로 엄청난 공훈을 끊임없이 올렸습니다. 1584년에는 여러 부족이 연합한, 무려 10만이나 되는 엄청난 군대를 격파해 내는 가공할 위업까지 세우기도 합니다. 


 이렇게 이성량의 동북변에 머문지 22년, 조정에 보낸 대승의 보고만 무려 10여 차례를 넘었고, 그를 따르는 장수들도 모두 높은 보상을 받았으며, 서달과 같은 개국의 시조들을 제외하고선 지난 200여년간 변경에서 이렇게 공을 세운 장수는 척계광(戚繼光)을 제외하면 없다시피 했습니다. 황제는 계속해서 이성량에게 어마어마한 재물들을 포상으로 주었고, 결국 이성량의 집안은 물론 그 하인들까지도 서로 재물을 가지고 있을 정도에 이릅니다.


 그러나 역전의 명장 이성량은, 신분이 높아지자 점점 사치스러워졌고, 승리를 거둘때마다 더욱 교만스러워 했습니다. 그럴만도 한것이, 이 지역에서 군자금, 말의 판매 차익, 소금에 대한 세금, 상금, 세비에 이르기까지 모든것은 이성량의 손아귀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즉 이성량은 이 지역의 실제적인 지배자이자, 제왕이었습니다.


 어마어마한 재물은 곧 국내외를 막론하고 뇌물로 뿌려졌고, 이렇게 되자 이성량의 공이 조작이 되어 보고가 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일어났습니다. 물론 이성량이 대단한 공훈을 세운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그 과정에서의 패전 등은 완전히 사라졌고 간혹 나타나는 실패들도 덮어졌습니다. 적군이 쳐들어오는데 막으러 나가지 않는것은 전략의 일환으로 꾸며졌으며, 양민을 죽인 경우에도 적의 수급으로 일이 바뀌어졌고, 항복한 자를 죽인 후에 승전했다고 보고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내부에서 이러한 비리를 보고하려고 하는 경우가 없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성량이 뿌린 막대한 뇌물로 인해, 이러한 움직임들도 모두 사전에 저지가 되었습니다. 이성량이 한번 실각이 된 바가 있었는데, 그러자 부하들이 서로 다투게 되면서 이 지역이 어지러워졌고, 76세가 된 이성량이 다시 복직하자 8년 동안 거의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이러니 이성량을 기용하지 않을수가 없습니다. 이 지역에선 이성량이 군주이자 황제이며 신 그 자체였던 것입니다.



 이성량은 여진인 왕고를 물리쳤는데, 왕고의 양아들 아타이(阿臺)는 하다부에서 아버지를 팔아넘겼다고 여기며 하다부와 대립하던 예허부와 손을 잡고 군대를 계속 동원했습니다. 이에 이성량은 하다부를 도아 아타이를 공격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휘말리고 말았습니다.


 교창가(覺昌安)는 누르하치의 할아버지가 되는 사람이고, 교창가의 손녀딸이 다름아닌 아타이의 아내였던 것입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교창가와 아버지 탁시는 이 싸움에서 명나라의 편을 들었는데, 이와는 별개로 할아버지는 손녀는 구하기 위해 아타이가 있는 성에 들어섰지만, 아타이가 딸을 내어주지 않아 억류당했고, 탁시 역시 따라 들어갔다가 억류 당했습니다. 그 직후 이성량은 화공을 구사했고, 아타이는 죽었으며 교창가와 탁시 역시 불에 타 죽었습니다.


 이에 관한 다른 이야기로는 손녀를 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타이에게 항복을 권유하러 들어갔다가 붙들렸고, 교창가는 불에 타 죽었으며, 탁시는 난입해 온 명군이 오인하여 죽여버렸다고 합니다. 1583년의 일이었습니다.


 누르하치의 할아버지, 그리고 아버지는 명나라를 위해 싸웠지만 개죽음을 당했습니다. 이를 의식했건 하지 않았건, 이성량은 25세의 장성한 청년, 누르하치에게 큰 빚을 진 셈입니다.


 여진족을 너무 잘게 분산시켜도 좋지 않고, 너무 한데 힘을 모으게 해도 좋지 않다. 가장 좋은것은 적절한 동맹을 하나 만들어 평정하게 하고, 적당히 뒤에서 컨트롤을 시키면서 조종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성량은 그걸 해낼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이성량의 눈에 들어온 사람이, 바로 이 누르하치였던 것입니다.


 다른 후보들도 이습니다. 우선 해서여진의 하다부. 하지만 여기는 내분이 일어나서 서로 지리멸렬 해졌습니다. 다음으로 예허부. 하지만 몽골계 여진인 예허부는 명나라에 대한 악감정이 너무 심했고, 하다부와는 서로 지겨울 정도로 싸움을 벌이던 지라 도저히 정세가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표적은 건주여진으로 바뀌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이성량의 조건에 아주 잘 맞는 청년입니다. 어리고, 똑똑하고, 할아버지나 아버지나 명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었습니다. 이성량은 누르하치에게 그들의 죽음에 대한 사과의 보상으로 30통의 칙서와 30필의 말을 주었습니다.


 청나라 태조의 첫 번째 군자금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목숨 값이었습니다.


 다시 이성량은 본인의 주선으로 누르하치가 명나라의 좌도독, 용호장군의 칭호를 받을 수 있게 해주었고, 800냥이라는 세폐도 주었습니다. 




 이러한 전폭적인 지원 아래, 누르하치는 차근차근 여러 준비를 마쳤습니다. 첫번째로는 건주여진의 통합으로, 만력 11년에 시작된 전쟁은 만력 17년(1589년)이 되서 끝나, 누르하치는 건주여진을 완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위업을 달성했습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해서여진과 겨루게 된 것입니다.


 앞서 여진에게 있어 교역은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이때 누르하치는 무순, 청하, 관전, 애양 등 네 곳의 관에서 명나라와 활발하게 통상을 하여 내실을 키웠습니다. 교역을 하는데 문제가 되는건 안전성이고, 이제 통합이 된 건주여진은 매우 안전했음으로 상품 유통은 아주 원활했습니다. 만력 19년 경에는 압록강로도 손에 넣어 조선과의 교역길 까지 열게 됩니다.


 반면에, 해서 여진은 예허부와 하다부의 오랜 대립으로 혼란스러웠고, 교역료는 폐쇄나 다름없이 되어버렸습니다. 진주, 모피, 인삼 등의 교역품이 건주를 경유하게 되면서 각지의 상인들이 건주에 몰려들었고, 해서여진 4부는 금세 위기에 봉착하게 됩니다.


 해서여진 중 가장 강력한 예허부가 앞장을 서서 나왔습니다. 예허부는 사자를 보내 누르하치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고, 이는 사실상 시비나 다를 바 없었지만 누르하치는 화를 내며 거절했습니다.


 "나는 곧 만주이며, 너는 곧 후룬이다. 너의 나라가 크다 해도, 내 어찌 취하겠는가? 내 나라가 넒다 하여도, 너 어찌 나누어 가질 수 있겠는가?"


 만주라는 단어의 어원에 관에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지만, 어찌되었건 누르하치는 이 당시부터 자신과, 자신의 세력을 일컫어 '만주'라고 하며 개별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즉 이 당시 누르하치에게 만주란 건주 5부족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허부와는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단호하게 거절하는 태도를 취했습니다. 여진족이 새로이 만주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순간입니다.


 누르하치가 무언가 이상하다는것은 모든 사람들이 알법했고, 공포심을 느낀 해서여진족은 변경의 각 집단에도 호소하여 누르하치가 말한 '만주'라는 괴물을 쳐부수려고 했습니다. 어느 순간 그들이 가지던 모든 이권 ─ 교역에 관한 부분도 저 만주라는 괴물이 집어 삼키고 있었습니다. 


 이리하여 모두의 이해관계가 절충된 끝에, 1593년 해서 4부족에 석백족(锡伯族)등이 포함된 9부의 연합군이 편성이 되었습니다. 그 숫자는 3만에 달했습니다.


 그러나, 이 '만주'라는 정체불명의 괴물은 상상보다도 더욱 공포스러운 적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9부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연합군에 가담했던 장백산의 주사리부(주셔리)와 눌은부(너연) 너머로 원정, 그 지역마저 모두 합병해 버린 것입니다.


 새롭게 깃발을 내건 만주의 기세는 꺼질 줄을 몰랐습니다. 이 시기, 누르하치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592년,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말한 야망으로 인하여, 20만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공,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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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8.02 이여송과 누르하치가 이런 관계였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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