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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2) ─ 팔기의 창설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7.30|조회수838 목록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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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92년 음력 4월 13일, 세상을 뒤덮을 듯한 함대가 부산 앞바다에 나타났습니다. 이 순간을 시작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은 그 7년간 수많은 고통, 아픔, 슬픔, 눈물과, 온갖 이야깃거리, 감동, 전설을 역사에 남겼습니다. 그 수많은 순간들을 대략적으로라도 이야기 하기 시작하게 되면, 가히 끝을 볼 수가 없을 것이기에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하고 넘어가고, 이 전쟁으로 인한 북방의 정세에만 영향을 주목하면,


 누르하치는 엄청난 기회를 손아귀에 쥐었습니다.


 이 미래의 청태조에게 또다른 희소식은, 1591년 11월, 어사 장학명(張鶴鳴)의 주청으로 요동의 황제, 이성량이 해임되었던 것입니다. 이성량이 열심히 뇌물을 먹인 유력자들이 조정을 떠난 탓에 아군이 일시적으로 없어졌던것이 원인이었는데, 영원백이라는 작위는 그대로 가지고 있었으나 다른 후임자들이 차례로 요동에 파견되었습니다. 


 물론 일이 이렇게 되었다고 해도 이성량의 엄청난 영향력은 요동에 분명히 남아 있었고, 후임자들은 그 영향력때문에 제대로 일도 하지 못했습니다. 더구나 이성량이 문제가 많은 사람이지만, 능력 하나 만큼은 천하의 명장이라 할만 합니다. 이성량이라는 큰 기둥을 뽑은 요동은 10년동안 군사 책임자가 8번이나 교체되는 파란을 일으켰습니다. 이성량은 한참 후인 1601년에 노령의 나이로 다시 복귀합니다.


 지금의 누르하치에게 있어서, 이성량은 너무나 버거운 상대입니다. 그는 요동에서 신이나 다름없었고, 이성량이 마음만 먹으면 누르하치를 개미 잡아 죽이듯 찍어 누르는것은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이성량이 어찌되었건 실무에서 잠시 손을 때는 모양새가 되었고, 저 멀리 남방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공함으로서 명나라의 시선은 완전히 그쪽에 고정되었습니다. 


 조선의 정곤수(鄭崑壽)가 1592년 12월 8일 명나라의 북경에 다녀온 후에 선조 임금에게 보고한 바에 의하면, 당시 북경은 발칵 뒤집어져서 원군 파병 문제에 대해 격론을 벌이고 있었습니다. 허홍강(許弘剛)은 "요동에서 막기만 하면 그만이다." 라고 하였고, 이는 비용적인 문제가 큽니다. 반면에 장동(張東)은 허홍강의 주장을 반박하면서 그르다고 하였고, 조선의 정곤수는 장동을 만나보기도 했습니다. 

Toyotomi hideyoshi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망과 이로 인해 벌어진 일은 당시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상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히데요시의 결정 때문에 정말 좋은 기회를 얻었습니다. 때마침 이성량도 개입 못할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9부 연합등을 물리치고 세력을 크게 확장시킬 절호의 찬스를 얻은 것입니다.


 이성량의 후임으로 온 사람들은 저마다 모두 일이 손에 안맞아 허둥대며 현지 사정 파악을 제대로 하는것도 힘들었고, 계속 교체가 되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이 기회에 자신의 세력, 즉 '만주'의 힘을 크게 늘리면서 해서4부를 지속적으로 압박했습니다. 히데요시가 야망을 버리지 않고 정유재란을 일으킬 당시에 해서 4부는 울며겨자먹기로 강대해져가는 만주와 화약을 맺었고, 전쟁이 끝나던 1599년에는 기어코 하다부가 만주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이 당시 누르하치는 무엇보다 명나라와 우호관계였습니다. 이성량이 밀어준 인물이 그입니다. 해서 4부를 굴복시켜도 명나라에 대한 반항이 아니게 되니, 저지할만한 세력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즈음, 하다부를 예허부가 충돌질했고, 하다부의 공격을 만주가 격파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때부터 명나라와 만주의 대립이 시작되었습니다.


 명나라의 사자는 누르하치를 힐문하기 위해 만주에 왔습니다. 슬슬 이쪽에서도, 누르하치가 너무 강대해져가는것에 대해선 경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르하치도 할말은 있었는데, 때마침 어려운 하다부를 예허부가 공격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서로 하다부를 공격한건 마찬가지니 저쪽을 힐문하라고 요청했지만, 명나라는 만주에 대한 경계심을 가지고 있어 그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허부에 조금 더 힘을 실어주었고, 자주 하던 방식대로 서로 싸워서 기를 꺾게 하려고 했습니다.


몽골 출신인 예허부가 명나라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는 했습니다. 하지만 사태가 이 지경인데 그러한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명나라의 도움을 받기로 했습니다. 이 즈음 하다부는 계속된 패배와 식량 부족으로 몹시 곤궁해져있어, 명나라에 도움을 구했지만 이미 예허부를 파트너로 선정한 명은 크게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다부는 결국 누르하치에 만주에게 항복하고 말았으니, 일의 전말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제 명나라와 만주는 서로 다른 길을 가야 합니다.


 본래대로라면 이성량이 고삐를 쥐고 누르하치라는 맹수를 적절히 조율해야만 합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번성했고, 특별한 기록은 없지만 누르하치가 이성량에게 잘 보이려 여러가지 행동을 취했을것이라 상상하는것은 그다지 무리라고 볼 수도 없는 일입니다. 또한 22년간 재임하며 이성량은 상당히 나타해졌고, 중간에 파면까지 당했으며 복귀했을때는 나이가 많았습니다. 


 누르하치는 기세를 타고 거침없이 성장세를 달렸습니다. 하다부에 이어 후이파부가 1607년에 멸망했고, 세키가하라 전투가 끝난 이 시점에 누르하치는 해서 4부 가운데 2부를 병합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6년 뒤인 1613년에 우라부가 멸망했습니다. 단순히 부 하나를 멸망시키는데 그런 시간이 든것이 아니라, 그러는 사이에도 만주는 내부적 역량이 차곡차곡 강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남은것은 오직 예허부 뿐. 예허부는 명나라에 도움을 요청했고, 이에 명나라는 유격 마시남(馬時楠) 주대기(周大較) 등에게 1천명을 주어 보내는등 공개적으로 누르하치의 반대편을 들기 시작했습니다. 아직 명나라와 싸우기엔 시기상조여서, 이때 누르하치는 일곱 개의 성 등을 함락시키고 일단 물러났습니다. 다른 이유들도 있었는데 1616년 정월, 누르하치가 드디어 가한, 즉 칸(Khan)의 자리에 오른것입니다.


 


 칸의 자리에 오르고, 명나라와 적대하게 된 누르하치. 만주라는 새로운 조직의 수장에 올라 더욱 확장해 나가야할 그에게는 여러가지 문제가 놓여 있었습니다. 우선, 한 다리 건너면 알고 있는 공동체 개념에서 벗어나 더 큰 조직을 꾸리는 일입니다.


 여진인들이 유목보다 오히려 사냥이나 교역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말은 했습니다. 사냥은 또한 일종의 군사훈련이나 다를바 없었고, 훗날의 강희제 등도 사냥을 군사훈련과 연결시키는 행보를 자주 보였습니다. 여진인들은 이렇게 보면 끊임없이 군사훈련을 하고 무기를 잘 다루는 존재들입니다. 이런 그들을 규율에 잘 복종시켜서, 단결시키면 일찍이 말한 '여진이 1만이 되면 천하가 이를 감당 할 수 없다.' 는 말이 빈말이 아니게 될 것입니다.


 여진말 중에 니루(niru)라는 것이 있고, 이는 본래 커다란 화살을 이르는 말입니다. 수렵 집단인 만큼 수렵에 참가하려면 정해져 있는 인원수가 있었고, 이 10명 정도의 집단을 지휘하는 사람을 니루에젠이라고 불렀습니다. 에젠은 주인이라는 말인데, 사냥시에 여러가지 독재적인 권한이 있었습니다. 만일 사냥시에 누군가가 함부로 움직이거나 해서 사냥감이 도망간다면 큰 타격입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누르하치는 수렵 단위였던 이 방식을 전투 단위로 바꾸었습니다. 300명을 1니루로 하였고, 다시 5개의 니루를 1잘란(甲喇), 5개의 잘란을 1구산(固山)으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구산이 의미하는 바가 바로 기(旗) 입니다. 즉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잘란 ─ 1500명
 1구산 ─ 7500명


 누르하치가 가한에 즉위할 당시 만주의 니루는 총 400개였고, 이는 대략 12만 정도가 됩니다. 그리고 여러 기를 두어 이를 색으로 나누어 구분했습니다. 사냥을 할때도 깃발을 사용했는데, 최초의 팔기인 4기(즉 이 시점에선 팔기라는 명칭이 아닌)는 황색, 남색, 홍색, 백색을 상징으로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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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황기(鑲黃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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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백기(鑲白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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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홍기(鑲紅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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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남기(鑲藍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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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황기(正黃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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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백기(正白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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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홍기(正紅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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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남기(正藍旗)



 자세히 보면, 테두리가 있는 깃발과 없는 깃발이 있습니다. 기존에 있던 남, 황, 백, 홍색 중에 홍기를 제외하곤 홍색으로 두르고, 홍색엔 하얀 테를 둘렀습니다. 누르하치는 이런 깃발을 사용해 만주족을 군사체제 국가로 만들었고, 이 팔기는 각각이 군단인 동시에 백성들의 소속집단이 되었습니다. 즉 만주족이란 예외없이 누구든 이 팔기의 일원으로 속해있다는 것입니다. 한족 사람들이 절강성 출신, 복건성 출신 등으로 구분한다면 만주족은 정황기 사람인가, 양람기 사람인가 하는 식으로 서로를 구분했습니다. 만주족을 일컫어 기인(旗人)이라고 하는건 이때문입니다.


 누르하치가 이런 체제를 선택한것은 만주족들이 개별적으로 전사이기도 하고, 또한 워낙 숫자가 적은지라 만주족 전체를 군사집단화 하지 않으면 버틸 수가 없기도 했습니다. 팔기에 대해서는 팔기통지(八旗通志)라는 기록이 있는데, 근세부터 근현대까지 존재했던 거대제국 청나라의 근간을 이루는 제도라는 점에 비하면 의외로 기원이나 여러가지 면에서 기록이 부실하고 명확하지 않은 부분들이 존재합니다.


 팔기통지에 따르면 누르하치 즉위 직전에 있던 400여 기루 중에 만주와 몽골의 기루는 308개, 몽골의 니루가 76개, 한군의 니루가 16개였습니다. 이는 상당히 재미있는 부분인데, 만주족과 몽골의 혼성 니루가 있고, 몽골인의 니루가 무려 76개나 되며, 한족 니루 또한 16개나 되는 숫자로 보면 5천명 가까이가 됩니다. 숫자가 적은 만주족 공동체에서 이는 매우 많은 숫자로, 이 정권은 여러가지로 기기묘묘 했습니다.


 누르하치의 정권이 이러했고, 누르하치 본인도 만주어, 한어, 몽골어등을 구사하던 국제적인 색깔을 보였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는 만주어는 있어도 그 글자는 없었습니다. 물론 금나라 시절 만들어진 여진 문자가 있긴 합니다. 하지만 당시의 문자란 결국 동아시아 문명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친 한자를 지나치게 의식해서 결국 이와 비슷해졌고, 만주족이 사용하는 여진말은 터키나 한국과 같은 우랄알타이계니 고립어인 한자와는 아예 성립할때부터 불편한 많이 많습니다. 거기다 금나라 문자 역시 금나라의 한화(漢化) 등으로 별로 쓰이지가 않아서 사용하기에 불편했습니다. 당장 금나라 문학들은 대부분 한자로 쓰여졌습니다.


 이러한 금나라 말을 공식문서로 쓰고는 있었지만, 애시당초에 그것은 만주족 내에서도 극소수나 쓸 수 있고, 또 쓴 사람이나 읽을 수 있는 문자이니 애시당초 쓸만한게 못 됩니다. 그래서 오히려 주로 사용되는건 몽골문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착안한 누르하치는 몽골문을 기반으로 해서 만주어를 표현하기 위해 새로운 문자의 작성을 명령했습니다. 쉬운일이 아니었습니다. 누르하치가 처음 이 쪽에 손을 댄것은 1599년 쯔음이니, 즉위하기 한참 전에도 이 문제를 고민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누르하치가 무언가 더 큰 어딘가를 보고 있는 느낌은 받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여러가지 일에 분주하던 누르하치는, 갑자기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됩니다. 명나라의 움직임은 분명 주목하고 있을테지만, 명은 군사 한명 파견하지 않고 누르하치에게 절대적인 타격을 가했습니다.


 교역 정지 명령. 하늘과 땅을 뒤덮는 100만 대군도, 가공할 화포도 아닌 단지 이 한장의 명령서로 인해, 누르하치는 엄청난 위기에 몰리고 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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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惡賭鬼 | 작성시간 12.07.31 음? 어떤 명령서이길래 누르하치가 위기에 몰리는걸까요? 처음 접하는 부분인지라 신기하고 기대될 따름입니다. 앞으로도 좋은 연재 부탁드려요^^
  • 작성자Z.W.P.A | 작성시간 12.07.31 팔기중엔 조선인들로 구성된 기도 존재했다고 하던데 조선팔기는 무슨기죠?
  • 답댓글 작성자어하라 | 작성시간 12.07.31 그러고 보니 조선 팔기군이 건륭제의 베트남 침공 때 박살나고 포로로 잡혀 베트남에서 집성촌을 이뤘다는 썰이 있던데....
  • 작성자이 지옥같은 행성 | 작성시간 12.07.31 으아니 절단마공! 빨리 올려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 작성자어하라 | 작성시간 12.08.01 거짓말안하고 임진왜란의 진정한 승리자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아이신교로 누르하치일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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