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5) ─ 16만 vs 2만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02|조회수902 목록 댓글 6



 천명제가 양호가 이끄는 명나라군을 물리친, 사르후 전투의 광풍이 불던 시기, 35세의 한 문인은 과거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습니다. 소부의 지현이라는 낮은 직책에 임명된 그 남자의 이름은 원숭환. 자(字)는 원소(元素)이고, 호(號)는 자여(自如) 였습니다. 광동성 사람이었던 이 문인은 전혀 뜻밖의 인물입니다.


 원숭환은 말했다시피 과거 급제까지 한 문인입니다. 하지만 묘하게도 병법이나 군사적인 문제에 관심이 많았는데, 어린 시절부터 여행을 좋아한데다가 일부러 퇴직한 병사들을 만나 변경의 정세가 어찌한지를 묻고, 친구들을 만나도 시를 짓거나 하는 일보다는 군사 전략에 관해 논의하기를 즐겨 했던 인물입니다. 이는 상당히 독특한 일로, 요즘 시대에 태어났다면 원숭환은 밀리터리 매니아였을 겁니다.


 이런 원숭한의 모습을 어사 후순(侯恂)이 눈여겨 보았습니다. 쓸만하다고 말입니다. 그리하여 병부(兵部) 직방사주사(職方司主事)가 되었는데, 이는 파격적인 발탁입니다. 


 당시가 바로 1622년으로, 왕화정과 웅정필이 그야말로 대패를 당했던 시점입니다. 원숭환 그렇게 불안정하던 시점에 홀로 적의 진영을 염탐하는 놀라운 일을 해냅니다. 그리고 대략의 사정을 파악하고 돌아와서 병부상서 손승종에게 이렇게 말을 올렸습니다.


 “군마와 경비만 주신다면 제가 요동 수비를 책임지겠습니다.”


 웅정필 마저도 저리 되었으니, 달리 믿을 사람도 없었기에 천계제는 원숭환에게 은 20만 냥을 내주면서 산해관 밖에 있는 명나라군을 통솔하게 했습니다. 산해관 밖에 이른 원숭환은 군민을 동원하여 높이 3장 2척, 넓이 2장의 성벽을 축조하고 각종 화포와 화기들을 배치했습니다. 병부상서 손승종도 몇 갈래 군대를 영원(寧遠) 부근의 금주, 송산 등지로 보내어 그곳을 지키는 한편 영원을 지원하게끔 하였습니다. 





 원숭환의 면밀한 계획으로 영원성의 축성됨으로서 명군은 산해관에서 100km 떨어진 지점까지 방어선을 확장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싸움도 면밀하게 분석했습니다. 지금까지 명군이 연전연패를 했던것은, 아무리 명군이 대군을 거느리고 있다해도, 후금군의 가공할 기동력 때문에 접전지역에서 계속 후금군의 숫자의 우위를 가져갔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명군은 소수로 다수와 겨룰 준비를 항상 하여야 합니다.


 방법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침 남방 포르투갈 사람들 통해 홍이포(紅夷砲)라는 신무기가 들어왔는데, 위력이 무시무시했습니다. 원숭환은 복건의 군 당국에 명하여 포르투갈의 대포를 동북방 최전선의 영원성까지 끌고 오게 했습니다. 머나먼 서양의 신무기가 극동의 괴물을 막아내기 위해 급파되어온 것입니다.


 원숭환, 그리고 손승종은 이렇게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정 내에서 환관 위충현이 전횡을 부려 손승종이 물러나버렸고, 자신의 일당인 고제(高第)를 요동에 보내어 군사를 지휘하게 했습니다. 무능하기 짝이 없는 고제는 산해관에 오자 장병들을 모아놓고, 후금의 군대가 강해서 산해관 밖은 지키기 어려우니 명나라군을 모두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키자고 주장했지만, 원숭환은 철수를 강력하게 반대했습니다. 고제는 원숭환을 설복시킬 방법이 없자 조금 양보하여, 원숭환이 지휘하는 군대만 영원에 남아 있게 했으며 다른 명나라군은 전부 다 산해관 안으로 철수시켰습니다.


 한편, 이 시기 천명제는 다시 한번 대군을 움직일 준비를 끝마친 상황이었습니다. 1626년, 그는 13만~16만에 이르는 엄청난 대군을 이끌고 남하하기 시작했습니다. 반면, 이에 대해 원숭환이 이끌고 있는 숫자는 고작 2만 이하. 숫자적으로 보면 가히 대적조차 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이였습니다. 산해관에 틀어박힌 고제는 전혀 지원을 해주지 않았기에, 원숭환은 2만 이하의 병력과 함께 동북 최전선의 영원성에서 외롭게 버텨야만 했습니다.


 천명제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를 기반으로 원숭환에게 항복을 하라는 권고문을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의 병력이 무려 30만에 이른다고 자랑을 했는데, 실제로는 그 정도는 아니었지만 숫자로는 상대조차 안되는 어마어마한 차이임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애시당초 천명제는 영원성 따위 보다야 그 뒤의 산해관에 마음이 더 가 있었을 것입니다. 일단 산해관을 점령해서 화북으로의 입구를 틀어잡고 있다면, 당장 관내 진입을 하지 않더라도 외교적인 부분에서 명에 굉장히 압박을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나는 병 30만으로 끌고 와서 이 성을 공격하겠다. 이는 필히 깨질 것이다. 너희 관리들이 만약 항복한다면 곧 고작(高爵)에 봉하겠다."


 하지만 원숭환은 항복 제의를 거절했습니다.


 "죽으면 죽었지 투항이 왠 말이냐?"


 원숭환은 장병들을 소집해 영원성과 목숨을 함께할 것을 다짐하며 결연한 의식으로 사기를 다잡았고, 성 밖의 백성들은 모두 영원성 내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그리고 성 주위를 모조리 초토화시켜 청야 작전을 벌였고, 성 내를 단단히 탐색하여 후금군의 밀정을 색출해 내었습니다.


 이런 모든 일련의 준비가 끝나고, 1619년 천명제가 이끄는 대군이 드디어 도착했습니다. 숫자적으로도 압도하고 있었고, 계속되는 승전으로 인해 군대의 사기도 절정에 다다른 상황. 한번의 싸움이면 이 가소로운 요새와 풋내기 지휘관이 언제나의 명군처럼 무너질것은 이치가 자명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절망적일것이 뻔한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그런데, 원숭환은 본인의 생각은 어떠했을까? 


    
파일:Ningyuan battle.jpg 


 원숭환이 문관 출신이라는것은 말 한 바가 있습니다. 또한 그는 용모가 사실은 추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옵니다. 천명제는 명나라 장수들에 대해서 연전연승을 했지만, 여러가지 면에서 호언장담을 좋아하고 무모한 수를 즐겨 쓴 이전의 명나라 장수들하고는 아예 모든 면에서 다른 사람입니다. 


 사르후 전투의 두송, 그리고 웅정필과 같이 있던 왕화정등은 모두 전투에서 위험수를 스스로 꺼내들었습니다. 성공한다면 큰 타격을 줄 수 있으나, 역으로 실패한다면 처절한 대패를 당할 수 밖에 없는 작전들. 2차 세계대전의 명장인 버나드 로 몽고메리가 고금의 전투에 관해 논한 책이 있습니다. 국내에도 나와 있고, 아마 서점에서 그 책을 보신 분들도 많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매우 큰 사이즈라 눈에 아주 잘 뜁니다.


 그 책에서 몽고메리는 로마의 영웅이자 불세출의 전술가인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오히려 비판하고 있습니다. 너무 무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책을 좋아하고 임기응변적인 면모를 보이는데, 위험부담이 아주 큽니다. 카이사르는 전쟁터에서의 무모함이 성공해서 영웅으로 남았는데, 만약 미끄러졌다면 어찌 되었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원숭환은 본래 군인이 아닙니다. 지금 군대를 지휘하고 있긴 하지만, 신출귀몰한 야전지휘관 같은 면모는 그의 일대기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말했다시피 오랜 시간 전부터 군대의 이론적인 면에 큰 관심을 가졌고, 무모하게도 직접 적을 살펴보기까지 하는등 여러 준비에도 정성을 기울였습니다. 그는 기책의 지휘관은 아닙니다. 그러나 온갖 방식으로 무대를 준비하고 판으로 적을 끌어들이는 면모는 있습니다. 원숭환은 준비를 다 마쳤습니다. 지금의 우리가 그의 속내를 알 도리는 없으나, 상상을 한다면 아마도 그는 두려움보다도 자신감이 더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천명제가 지금까지 물리친 명나라 장수들은 모두 야전지휘관 격인 인물 들입니다. 설사 계급이 그보다는 높은 위치에 있다고 쳐도 기질 자체들은 대부분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인 출신, '종이 위에서나 병법을 논할(紙上談兵)' 원숭환은 전혀 다른 적이었습니다. 


 영원성에 도착한 천명제가 본 것은, 믿을 수도 없을 정도로, 눈에 보이지도 않게 발사되는 불덩어리들이었습니다. 책상물림의 역습이었던 것입니다.


 후금군은 압도적인 숫자의 우위를 바탕으로 영원성을 포위하여 사방에서 달려들었습니다. 앞줄이 쓰러지면 바로 뒷줄이 그 자리를 채우는 파도와 같았습니다. 그때 준비되었던 홍이포가 사방을 향해 맹렬하게 불꽃을 내뿜자, 후금군은 추풍낙엽으로 나가떨어졌고 결국 퇴각했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끝날 것 같던 전투는 일단 하루를 넘겼습니다.


 이튿날, 싸움이 어려워 보이자 천명제는 직접 나와서 전투를 독려했습니다. 원숭환 역시 망원루에 올라 적의 동정을 살피면서 침착하게 싸움을 지휘했습니다. 두 걸물이 이렇게 직접 칼을 맞대지는 않았지만 사실상 진검 승부를 벌였는데, 후금군의 군대는 밀집되어 한곳을 집중공격했습니다. 그러한 때, 홍이포는 또다시 불을 뿜었습니다.


 파죽지세(破竹之勢). 추풍낙엽. 단 한발의 포격이 수백 명의 후금군에게 사상을 입혔습니다. 


 명군의 무기는 화기만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돌과 화살도 끝을 모르고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습니다. 2만 군대가 16만 군대를 밀어내는 데는 고작 이틀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이틀 동안의 공성전에서 후금 군의 유격 2명, 비어 2명, 500여명이 적에게 전혀 타격조차 주지 못하고 나가떨어졌습니다. 결국 후금군의 사기는 모조리 바닥이 났고, 천명제는 후퇴라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습니다. 16만의 군대가 후퇴를 시작하자, 2만의 군대는 이를 추격하여 30여리를 뒤쫒아 더욱더 커다란 타격을 주었습니다.



 16만과 2만. 이 싸움의 승자는 놀랍게도 2만이었던 것입니다.


 이 전투를 영원대첩(寧遠大捷), 혹은 영원성 전투라고도 하며, 패배만을 거듭하던 명은 드디어 후금에게 처음으로 적절한 반격을 날리게 되었습니다. 명나라 조정에선 이 승리에 열광하여 곧바로 원숭환을 병부시랑(兵部侍郎) 겸 요동순무(遼東巡撫)로 승진시켰습니다. 반면에 놀라운 패전을 당한 후금 쪽에서는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천명제는 매우 상심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짐은 25세부터 병을 일으켜, 정벌한 이래 싸워서 이기지 못한 적이 없으며, 공격하여 극복하지 못한 적이 없었다. 어찌, 이 영원 한 성을 끝내 떨어뜨리지 못하는가. 어찌,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기뻐하지 않기를 여러 날, 마침내 병에 걸려 죽었다고 합니다. 청나라의 기록에는 병이라고 기록되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영원성에 입은 포격으로 부상을 당해,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죽었다고 하는 말들도 있습니다.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서 일월록에서 인용한것에 따르면, 조선 역관(譯官) 한원(韓瑗)이 이때 마침 원숭환을 만나고 있었는데, 원숭환은 적군이 오는데도 태연하게 같이 병법을 논의하고 음식을 먹는가 하면, 후금의 대군이 오자 심지어 "적이 왔다." 하면서 빙그레 웃고는 적을 막아내었다고 합니다. 그다지 신빙성이 있다고는 할 수 없으나, 여기에서 묘사되는 대포의 위력이란 제법 그럴듯 합니다.


그날 밤 적이 외성(外城)에 들어왔는데, 대개 숭환이 미리 외성을 비워두고 적을 유인한 것이다. 적이 병력을 합쳐 성을 공격하자 또 대포를 쏘니 성 위에서 일시에 불을 켜 천지를 환히 비추고 화살과 돌을 함께 떨어뜨렸다. 싸움이 바야흐로 치열해지자 성 안에서 성첩(城堞) 사이마다 매우 크고 긴 나무궤를 성 밖으로 밀어 냈는데, 반은 성첩에 걸치고 반은 성 밖으로 내놓으니 궤 속에 실상 갑사(甲士)가 엎드려 있다가 궤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서 화살과 돌을 던졌다. 이렇게 여러 차례 거듭하다가 성 위에서 마른 풀과 기름과 솜 화약을 함께 던지니 얼마 후에 땅 속에 묻었던 포(砲)가 크게 폭발하여 성 밖에서 안팎으로 흙과 돌이 두루 날아 흩어졌다. 불빛 속에서 오랑캐들을 바라보니 무수한 인마(人馬)가 함께 하늘로 솟구쳤다가 어지럽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로써 적은 크게 꺾여 물러갔다.

 

 영원성 전투를 소위 말하는 대첩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입니다. 또한 적을 격멸시키는 대승이라고 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이 싸움에서 후금군의 손실은 천명을 넘지 않았고, 퇴각하면서 당한 피해를 합친다 해도 전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이 싸움에서 졌다고 해도 후금 군대는 여전히 세력이 강력하였고, 그들의 본거지에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처음으로 거둔 승리라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누르하치가 처음 군사를 떨치고 후금을 개국한 이래, 명군 계속해서 패배를 거듭하며 요동에서 주춤주춤 물러나고만 있었습니다. 그러한 후퇴가 산해관에 이를 지경이었는데, 영원성에서 이를 막아내면서 적의 맹공은 이제 저지가 되어버렸던 것입니다.


 또한 누르하치가 죽었습니다. 그게 병이건, 혹은 정말로 홍이포로 인한 부상 후유증이건, 68세나 되던 고령으로 인한 것이건, 이는 새로운 시대의 출현을 의미하는것 입니다. 천총제(天聰帝), 청태종, 홍타이지. 만주의 위업을 이루는것은 누르하치에게서 그의 어깨로 넘어갔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jyni | 작성시간 12.08.03 컬버린이죠. 당시의 캐논은 포신이 짧은 대신에 구경이 큰 포였고, 컬버린은 포신이 긴 대신 구경은 상대적으로 작은 포였을겁니다.
  • 답댓글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2.08.03 근데 홍이포 위력을 보면 효과가 컬버린 이상인 것 같기는 한데......
  • 작성자담쟁이 | 작성시간 12.08.03 밀덕 원숭환의 승리...
  • 작성자kingrapter21 | 작성시간 12.08.03 밀덕의 승리 ㅋㅋㅋㅋㅋ
  •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2.08.06 군사이론가가 백전노장을 이겼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