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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6) ─ 조선 출병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04|조회수901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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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타이지.


 천명제 누르하치의 사망 원인이 정말 원숭환의 공격 때문인지, 아니면 병으로 죽었는지야 모를 일이나 어찌되었건 그는 당시 68세의 고령으로, 자연사해도 이상하지 않을 나이였습니다. 물론 그런 고령에도 영원성 전투에서 직접 군사를 독려할만큼 강건하긴 했습니다만은, 그렇다고 쳐도 후계자를 정하지 않은것은 일반적인 기준에서 보면 뜻밖의 일입니다.


 하지만 누르하치의 성향 자체가 부족 공동체의 대표 격인 입장을 보였다고 친다면은 이상할 일이 아닙니다. 그는 여진족이 바닥의 바닥에 있을때 태어나, 이성량의 지원을 얻어내고 그에게 굽실거리며 기회를 엿보고 여진인들의 국가를 만들어냈습니다. 하루하루가 부족의 목숨을 담보로 한 사투와 전쟁의 나날이었고, 주위 관계도 이전부터 내려온 군신관계라기 보단 서로간의 친교로 이루어낸 협력적 관계에 가까웠을 것입니다.


 누르하치는 만주문자를 만들었고, 팔기제를 확립했으며, 후금을 세웠습니다. 명나라 군의 대군을 사르후에서 물리쳤고, 요동 방면에서 그들의 영향력을 거의 일소했습니다. 한 사람의 일생으로 이만 하면 족하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남은 일은 남은 사람들의 역할입니다. 


 태조 누르하치의 아들은 모두 16명. 그리고 현 시점에서 살아 있는 사람은 16명입니다. 장남이 사망했음으로, 가장 연장자였던 다이샨은 44세였으며 이미 많은 공을 전쟁터에서 세운 상태. 반면에 여덞째인 홍타이지는 35세였습니다. 하지만 후계자는 그의 차지였습니다.


 누르하치의 아들이 열 다섯이라고 했지만, 게중에 홍타이지의 어머니는 예허부 출신의 나라 씨 였고, 나라 씨는 여진인들 중에서도 명문족으로 통했습니다. 이러한 이유도 있고, 홍타이지도 누르하치 생전에 공을 세운 일도 있었고 해서 그가 후계자가 되었던 것 입니다. 그렇다면 다이샨 등은 반발하지 않았겠나, 하는 점이 궁금 할 수 있지만 이 초기의 만주족들은 상당히 독특한 면모가 있습니다. 누르하치 생전에 큰 공을 세운 이른바 사패륵(四貝勒), 혹은 사천왕이라는 집단이 있습니다. 첫번째가 대패륵 다이샨, 둘째가 누르하치의 조카인 이패륵 아민, 세번째가 누르하치의 다섯 번째 아들 삼패륵 망굴다이(莽古爾泰), 그리고 홍타이지가 사패륵입니다.


 그 중에 대패륵이자 영향력도 있는 다이샨은 홍타이지를 위협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신의 아들 요토(要土)와 함께 홍타이지를 오립하는 형태로 그를 밀어주었습니다. 다만 홍타이지 입장에서도 나름대로 적절히 조심하면서 그들을 대우했던 측면도 있습니다. 사천왕의 나머지 세명은 모두 홍타이지보다 나이가 많으니, 그를 군주로 인정한다고 쳐도 신하의 예를 갖추지는 않았습니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과정을 거쳐 홍타이지는 후금의 두번째 군주가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그를 천총제라고 부르겠습니다. 팔기 중에 천총제의 손에 있는 기는 2개였고, 다이샨은 정홍기, 아민은 양람기, 망굴다이는 정람기를 각각 지배했습니다. 팔기 중에 다섯개의 기가 사천왕의 손에 있고, 천총제를 제외한 나머지의 기를 각각 합치면 3개로 오히려 홍타이지보다 많은 상황이 됩니다. 따라서 홍타이지는 이들 원로들을 절대로 무시 할 수 없었습니다. 


 나머지 기는 아지게(阿濟格)와, 그리고 도르곤(多爾袞), 그리고 도도(多鐸)의 손에 들어갔습니다. 이들 세 명은 모두 효열무황후 우라나라 씨를 어머니로 하는 공동체 입니다. 하지만 그 당시 오직 아지게 만이 스무살을 넘겼고, 도르곤은 15살일 뿐이며, 도도의 경우에는 고작 13세이니 사천왕의 적수가 될리는 만무합니다. 


 즉위했다손 쳐도, 어디까지나 이것은 합의제. '군주' 라기 보단 '맹주'에 가까울 듯 합니다. 하지만 천총제는 아버지와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사람입니다. 그는 이상주의적인 면이 있고, 좀 더 그림을 크게 보는 능력이 있습니다. 천총제의 치세는 부족연합체인 후금이 중앙집권적 군주국가 청나라로 모습을 일신하는 과정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그의 행보를 살펴보면 여러가지로 이해가 가는 측면이 많습니다.


 


 천총제가 통지 체제를 정비하면서 사용하기에 적절했던 대상은 역시 종교가 괜찮은 선택이었습니다. 게중에서도 불교와 라마 불교가 당시 만주인들의 적성에 상당히 잘 들어맞았기에 이들을 주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불교에 대한 사랑은 여진인들에게 꽤 오래전부터 시작된 일로, 흑룡강 하류에 세워진 사찰들로 여진인들에게 영향력을 주었고, 또한 여진이 요동지역까지 진출하면서 중국 내의 불교와 접촉이 빈번해져 영향력은 더욱 막강해졌습니다. 


 불교에 대한 사랑도 천총제 이전 누르하치때부터 적극적인 부분이었습니다. 건주견문록, 즉 책중일록에서 조선 사람은 17세기 초 허투하라 지역을 방문해 누르하치를 직접 살펴보고 이런 묘사를 남겼습니다.


 "앉이 있을 때에는 항상 손에 염주를 쥐고, 이를 세고 있었다."


 실제적으로도, 천명제는 "어떤 사람도 사찰을 훼손해서는 안 된다. 이를 어길 시에는 보이는 즉시 잡아서 벌할 것이다." 라는 엄한 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훼손된 사찰에서 주춧돌을 훔쳐간 사람과 이를 잘 지키지 못한 승려를 벌하기도 했습니다. 천명제의 불교에 대한 태도는 물론 정치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그런면을 제외하더라도 본인 스스로도 볼교에 상당한 호감을 느꼈던 것은 분명합니다. 심지어 어느정도 불경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는 말을 남긴 적도 있습니다.


 "옛 불경에는 비록 많은 말들이 있지만,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는 말이 가장 중요한듯 싶구나. 내 생각에는 사람의 마음이 귀한 것은 그것이 바름에 있는 것이다. 여러 대신들은 친소와 가세를 가리지 말고(그 인물의) 마음 씀씀이를 보고 추천할 지어다."


 라며 신하들에게 인재등용의 원칙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또 천명제는 이런 말도 하였습니다.


 "부처님을 믿고, 이 생에 열심히 고행을 하면 복을 얻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내생에도 좋은 곳에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여러 신하들은 선행으로 복을 지어 아래로는 휘하의 백성을 훈육하고, 위로는 충성하고 자기의 직본에 충실하면 후세에도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리라. 또 하늘이 나에게 내린 국가통치의 일은 내가 열심히 도모하며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하고 하늘의 뜻에 부응하여 빈곤을 구제한다면, 국가는 태평해져서 큰 복을 받게 될 것이다."


 불교의 교리를 이용해서 신하들에게 선행을 베풀 것을 훈시하고 있는데, 만주인들에게 이미 불교가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것, 그리고 천명제 본인이 불교에 호감을 가지고 있고 그 이해에도 어느정도 소질을 보인것을 살펴 볼 수 있습니다. 


 천명제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천총제 홍타이지의 시대에도 불교는 우대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색채는 더욱더 정치적인것으로 짙어졌습니다. 본래 몽골인 등 초원의 사람들에게는 샤머니즘이 가장 기본적인 종교관입니다. 그런데 천총제는 재정적인 이유등으로 샤머니즘 제사를 금지하거나 제한하였는데, 반면에 불교에 대해서는 매우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불교 사원을 훼손하는 자들은 엄한 벌을 받았고, 스스로도 직접 사찰에 자주 찾아가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아직 남아있는 샤머니즘적인 요소에서도, 관제(關帝), 즉 중국의 무신 관우와 같은 요소가 스멀스멀 들어오기 시작합니다.(누르하치가 한인들과 교류해서 삼국연의와 수호지를 읽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천총제 3년부터 삼국지나 맹자, 육도 삼략과 자치통감 같은 한문 서적을 만주어로 번역하는 작업이 착수됩니다. '삼국지'가 아닌 '삼국연의'가 만주인들의 글자로 번역된것은 순치제 시절의 일인데, 만주어가 천명제 시절에 만들어진 글자라는 점을 생각하면 사실 삼국연의를 볼만한 사람들은 이전에도 많이들 보았을 것입니다. 여담으로 순치제는 관우를 충의신무관성대제(Zhongyi Shenwu Great Saintly Emperor Guan, 忠義神武關聖大帝)라고 칭합니다.


 관성대제는 도교뿐만 아니라 불교에서도 높은 대접을 받으니 포용도 한층 더 쉬운 일입니다. 관우라는 인물의 가장 큰 가치가 군주에 대한 충(忠)이라는것을 생각하면 이런 점도 알게 모르게 지배 체제에 도움이 될것입니다.


 또한 중국 불교와는 성격을 달리하는 또 다른 성격의 불교도 도입되기 시작하는데, 바로 서장의 라마 불교입니다. 라마 불교는 몽골 제국이 득세할 시절 크게 세를 확장시켰고 타타르 등지에도 알탄 칸 등으로 인해 널리 전래가 되어 있었는데, 만주에는 천명제 누르하치 이후 전래가 되었습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와 접촉하게 세력이 커지며 몽골의 부족과도 연맹을 맺게 되면서 생긴 일인데, 1621년 5월 그는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부족과 연맹을 맺기 위해 라마를 한명 초청했습니다. 연맹작업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독실한 불교 신자인 누르하치는 라마가 자리에 들어오자 직접 몸을 일으켜 그와 악수를 하고, 나란히 앉아 연회를 베푸는 등 매우 극진한 태도를 취합니다.


 이 사람은 요양 지역에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다음해에 죽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그 라마를 위해 성례한 장례를 치뤄주었고, 이 일을 바탕으로 라마 불교가 널리 퍼져 만주족 사회에서 최초로 라마사원 등이 세워지기도 합니다. 1625년 10월 이후에는 라마가 몽골 통치자의 학대를 피해 수많은 휘하를 이끌고 오는 일까지 있어 라마 불교는 더욱 전파가 됩니다.


 누르하치를 계승한 천총제는 라마 불교 역시 정책적인 도구로 쓸만하다고 여겨, 크게 지원하고 보호했습니다. 특히 1632년 몽고의 차하르(察哈爾)를 정복할 적에는 그곳에 있는 라마 사찰을 철저하게 보존하도록 엄명을 내렸고, 투항한 라마승이 금불상을 바치자 대규모 라마사원을 측조하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달라이라마 5세를 초청한 사례가 있습니다. 1639년에 천총제는 대규모 사절단을 서장으로 보내 달라이라마를 초청하였고, 3년 후에 달라이라마 5세는 직접 가진 않았지만 대규모의 인원을 파견해 극진한 대접을 받고 왔습니다.


 라마 불교에 대해 천총제가 이렇게 관심을 쏟은것은 이들이 서장, 몽고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몽골인들일 포용한 입장에서 공통적인 부분을 만드는 작업에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이 라마들은 명나라, 후금, 몽골을 자유자재로 활보하였기에 라마 승을 이용한 외교교섭이라는 특수한 역할도 기대되었습니다. 1628년 7월 몽골의 코르친 부에서 후금과 화의를 희망하였을때, 그들이 취한 행동은 라마승 4명을 파견한 일입니다. 차하르부도 비슷한 사례가 있으며, 명나라조차도 후금과 싸움 대신 외교적인 부분으로 이야기를 하려고 할때 라마승을 보낸 사례가 있습니다. 천총제 본인도 칼카부에서 라마승을 사신으로 보내자 대답의 형식으로 자신이 가장 신뢰하는 라마 승을 칼카부에 파견합니다.


 굳이 종교적인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서술한것은, 종교를 배경으로 하여 천총제가 지배 사상을 조절하고 통치 체제를 정비하는 작업을 간략하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소위 말하는 내부적인 정비에 대한 부분을 불교라는 대상을 바탕으로 하여 이야기를 했는데, 다음은 경제적인 부분 입니다.


 라마 승들이 활보하면서 벌인 작업에는 무역 활동도 있습니다. 명나라는 누르하치 시절에 교역 중단 명령을 내린적이 있습니다. 지금 후금은 명나라와 전쟁 중이니, 당연히 모든 교역 활동도 중지가 되었습니다. 이에 대해 천명제는 개간작업등을 실시하면서 자급자족 할 수 있는 체제를 만들어 버티려고 했지만, 문제는 그런 방법도 한계가 있었습니다. 만주 지역에서의 활동만으로 얻을 수 있는 물건은 한계가 있으며, 무엇보다 만주는 한참 팽창 성향을 보이느라 물자는 있어도 있어도 부족한 형편입니다.


 경제적인 면에서 천명제 누르하치 시절을 설명하면 채집-수렵 경제체제가 교역 중지를 통해 농업 경제로 전환해가는 과도기라고 짦게 설명 할 수 있습니다. 채집과 수렵은 한계가 있는 방법입니다. 또한 무엇보다 채집하고 수렵한 물품을 시장에 팔아야 더욱 큰 이윤을 남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명나라와의 무역 활동은 모조리 정지되었으니, 남은 방법은 농경지를 확대해 안정적인 농업 경제를 유지하는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천명제 당대에는 전쟁이 계속 되었던데다가, 여진과 한인의 공존 문제도 있고 수도도 요양에서 심양으로 옮겨가는등 여러모로 불확실한 면이 많아 농경에 집중하기가 힘들었습니다. 1625년 이래로 요동 한인 인구의 개편, 몽고의 귀속에 따른 대규모 인구 증가, 더구나 기상 악화까지 더해 흉작이 겹치면서 후금의 경제상황은 위풍당당한 군사적 면모와는 달리 꽤 곪아가고 있는 부분이 있었습니다.


 "나라가 굶주려 곡식 한 승(升)에 은 8량 값이나 되었다. 이 나라에 은은 많았으나 무역할 곳이 없어서 은의 값은 싸지고 여러가지 재화의 양은 비싸졌다. 좋은 말 한 필에 은 300량, 좋은 소 한 필에 은 100량, 무늬있는 비단 한 필에 은 150량, 도둑이 만연하여 사람을 죽이고 혼란스럽게 되었다."


 생각보다 꽤 심각한 모습입니다. 확실히 급격한 팽창은 어두운 부분을 가져옵니다. 이런 어려움 속에 영원성 전투까지 막 실패한 참이었기에, 무언가 해결할 돌파구가 필요했습니다. 


 1627년 즉위 직후 천총제는 원숭환에게 여러 차례 편지를 보내 막대한 양의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여기까진 흔한 으름장으로 여길만하나 몇달 후 곧 액수를 반으로까지 줄이면서 또다시 예물을 요구했습니다. 처음의 요구는 금 십만량, 은 백만량, 비단 백만필을 주고, 화의가 성립된 이후에는 금 일만량, 은 십만량, 비단 10만필 등을 바칠 것을 요구했으나, 이후 이런 소리를 공연히 덧붙였던 것입니다.


 "귀국이 (예물을 보내기에) 힘이 미치지 못한다고 한다면, 처음 화의를 맺는 예로서(예물 액수의) 반을 덜어도 됩니다."


 물론 원숭환이 이를 들을 인물이 아니었기에 공염불에 불과했습니다. 이는 명나라가 조공을 하라는 말이나 다를 바 없었고, 만약 후금이 진실로 평화를 원한다면 먼저 요동의 요새와 한인 포로들을 돌려 주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물론 천총제는 거절하였고 후금과 명의 강역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음을 설명했습니다.


 "당신은 또한 '후금의 칸은 굳은 마음으로 우리(명) 황제를 공경하고 성덕을 다하며 힘쓰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대 황제의 덕은 귀국이 선양하는 것이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이 어찌 관계할 수 있겠습니까. 귀국의 변경은 귀국이 다스리고 우리의 변경은 우리가 다스리는 것입니다. 귀국의 변경을 어찌 우리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천총제가 명나라의 교역이 다시 회복되기를 갈망했던 점은 분명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명이 만약 나의 말을 듣고 화의를 이루어 함께 태평을 이룬다면, 우리나라의 만주, 한인, 몽고는 마땅히 인삼을 채취하고 개발하여 명과 교역할 것이다. 우리나라에 부족한 것은 다만 비단일 뿐이다. 우리가 힘써 자원이 부유해진다면 비록 비단을 얻지 못해도 무엇이 문제이겠는가. 우리가 누차 말하여도 저들이 따르지 않으니, 어찌 내가 앉아서 기다리겠는가. 마땅히 군대를 가다듬어 서쪽으로 정벌을 나갈 것이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내용을 보면 화의에 대한 뜻을 은근히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요동의 관리들에게는 자신의 이름을 언급할 시에는 명나라 황제보다 한 글자 아래에, 명의 관리보다는 한 글자 위에 써줄 것을 스스로 요청하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뜻을 헤하려 天보다 明의 황제를 한 글자 내리고, 명 황제보다 우리를 한 글자 내리고, 우리보다 명의 관리들을 한 글자 내려서 썼습니다. 당신(관리)들을 우리와 대등하게 쓰면 그 편지를 우리는 받지 않을 것입니다."


 즉 최소한 이 당시에는 명나라 황실의 권위에 도전하는, 사생결단의 여지보단 독립적인 요동 국가로서 명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움직임이 있었고, 가장 큰 원인은 당장의 경제위기로 인한 교역의 필요성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여의치 않은 일이었고, 천총제에게는 다른 대안이 필요했습니다.


 그게 바로 조선입니다. 물론 조선 침공은 경제적인 이유 말고도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정치, 경제적인 부분에 이어 이번에는 군사적인 부분에 대해서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천총제가 조선에 눈을 돌린 가장 큰 이유는 모문룡의 존재입니다. 모문룡은 조선령에 속한 작은 섬 피도에 자리를 잡았는데, 이 곳은 황해 북부의 요동반도 연해를 따라 한반도 서해한에 이르는 연안항로의 주요 경유지 였을 뿐 아니라, 명달 당시 요동 육로가 막힌 조선과 명이 해상교통을 위한 필수 경유지 였습니다. 


 마침 모문룡으로서는 다행스럽게도, 조선에선 인조반정이 일어나며 정권이 바뀌었고 정통성 문제와 명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외교적 문제 때문에 인조 정권은 모문룡에게 강하게 나가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과도한 군량 요구를 해도 어느정도 들어줄 수 밖에 없던 처지입니다.


 사실 "후금을 후방에서 견제한다." 는 본래의 취지에서 따지자면 피도에 모문룡이 주둔하는것은 그리 좋지 못합니다. 일단 주요 전선에서 너무 멀어져 있는데다, 군사전략상 효용 가치가 떨어져 제대로 타격을 주려면 조금 더 후금과 가까운 위치로 바꿀 필요성이 제기되었으나 모문룡은 자신의 세력을 유지 할 수 있는 이 좋은 위치를 포기하고 싶지 않아 버티고 있었습니다. 조선으로부터 군수품을 조달받는데도 피도가 훨씬 좋은 곳이고 말입니다. 


 모문룡 집권 후기에 그의 세력은 병사 2만 8천에 마병이 3천여명, 대포까지 있었습니다. 이런 부대를 유지하는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모문룡은 인조 정권에 조선 서북방 일대에서 둔전을 경영해보겠다는 제안도 했지만, 대규모 명군이 조선 본토에 상륙하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인조는 소극적인 반응을 보였습니다. 


 날이 갈수록 이 목적이 불분명한 군사 집단은 더욱 행패를 부려 1626년 상반기에만 14만 석을 모문령 진영에 공급해주어야 했고, 절반은 제대로 값도 받지 못했습니다. 게다가 모문룡은 식량 조달이 원할하지 않으면 조선 서북 지역에 상륙하여 민가를 약탈하는 만행까지 벌였습니다.


 "소와 말을 약탈하고 집에 감춘 것까지 찾아내거 가져갔으므로, 모두 텅 비어 백성이 다 울부짖었다."


 심지어 군량을 제때 공급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서북지역 수령들이 모문령의 군대에 결박되어 구타당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러면서 모문룡군이 후금군과 싸우거나 한다면 그래도 참을 수 있겠지만, 모문룡은 엉뚱한 생각만을 하고 있으므로 전혀 도움이 되는것이 없었습니다. 사실 모문룡이 상륙해서 간혹 게릴라전을 벌이고, 심지어 사르허 성의 남문까지 진격한적도 있었지만 바로 퇴각해 버렸습니다. 아무래도 명나라 조정에 적당히 게릴라전을 벌이는 시늉만을 보이려 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뒤통수에 만이 넘는 병력이 주둔하고 있다는건 후금으로서는 걸치적거리는 일입니다. 게다가, 마침 조선은 이괄의 난(李适─亂)이 터졌고 그 잔당들의 보고를 들어 천총제는 조선의 정세에 대해 어느정도 정보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경제적인 부분도 더해져, 마침내 일이 터지게 되었습니다.


 설명은 길었지만 제1차 조선출병, 즉 정묘호란(丁卯胡亂)이 터진것은 홍타이지가 즉위한 이듬해 바로 1월입니다. 즉 그는 바로 행동에 들어갔습니다. 이 전쟁의 목적은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노골적으로 친명 정책을 보이는 인조 정권에 대한 경고, 둘째로 모문룡 세력의 처리, 셋째 조선과의 교역이나 정복 후의 세폐 등으로 인한 경제 위기 만회 등등 입니다.


 조선을 공격한 것은 아민의 양람기를 중심으로 한 부대였습니다. 정묘호란의 자세한 전황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겠습니다. 일단 아민이 철산에서 모문령의 군을 격파했다는 정도만 설명하겠고, 그 후의 모문룡의 이야기는 다음에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단 싸움이 끝났고 후금은 조선과 '형제의 나라' 로 동맹을 맺었습니다. 새로운 동맹국이 생겼다는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어, 당장 교역을 재개해 창고에서 썩어가는 물품들이나 부족한 필수품을들 들여오고, 또한 조선이 바치는 예물로 경제 위기에 대한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였습니다.


 확실히 1차 조선출병 이후에 인조 정권은 그전의 맹렬한 반만주적인 태도를 벌이고, 오히려 그 이전 광해군식 '현상 유지 정책' 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를테면, '인삼' 이라는 물건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겠습니다.


 요동 지역의 인삼은 예전부터 여진인들에게 큰 동무을 주었습니다. 인삼은 상업적으로 대단히 유용했고, 인삼이 많이 생산되는 지역에는 여진인뿐만 아니라 한인, 조선인까지 끼어들어 채취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후금이 성장하며 이 문제는 국제적인 문제까지 이어지게 됩니다.


이 분쟁은 매우 뿌리가 깊은것이라 이미 조선 세종 때부터 인삼을 캐는 중국인이나 여진인을 볼 경우, 처리하는 방법에 대해 논의한 부분이 있습니다. 당초에는 명과 여진, 조선이 서로 매우 모호한 경계를 보이며 '소란을 일으키지 않는 한' 큰 문제없이 묵과해나가는 방식으로 흘러갔지만, 16세기 이후로 조선 경내에 진입해서 채삼하는 야인들이 갈수록 늘어나 문제가 커졌습니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 방어적으로 일관했지만, "여진인들이 인삼을 캐러 왔다고 해도 함부로 죽여서는 안된다." 는 논의를 종종 벌였습니다. 이 말은 월경하는 야인들이 살해되는 케이스가 있다는것을 의미하기도 하빈다.




 누르하치가 서서히 세력을 잡고 기반을 키우면서, 여진인들은 조선 정부의 처벌에 대해 항의하기 시작합니다. 1592년, 조선과의 변경지역에서 인삼을 캐던 여진인들은 조선의 변방 장수에게 붙잡혀서 살해당해는데, 문제는 조선인 병사들이 여진인의 머리를 베고 가죽을 벗기는 등, 지나칠 정도로 가혹한 태도를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누르하치는 북경을 방문하고 돌아가던 조선인 사절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항의하는 태도를 보였고, 1595년 명나라 관원과 조선 측 인사가 함께 건주위의 수도를 방문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누르하치는 앞으로 조선 경내에 침입하는 여진인들을 철저히 단속할 것을 약속했습니다.


 다만 조건이 있었습니다.


 "앞으로 (여진인이)조선 영역을 침범했으나 조선에서 사살하지 않고 붙잡아 보내면, 우리가 극형으로 참하겠습니다. 만일 조선인이 우리 땅을 침범하여 우리가 붙잡아 보내면, 조선 역시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피차에 서로 원한이 없을 것입니다."


 천총제 시대에 이르고 정묘호란 이후에 천총제는 조선인이 후금 경내로 침입하는 문제에 대해 본격적으로 거론하기 시작합니다. 그는 1628년 양국의 백성이 사사로이 경계를 넘어 수렵하는것은 마땅히 엄금해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는데, 이에 대해 인조 정권은 마침내 후금 경내로 진입하는 조선인들을 직접 처벌해서, 1631년에는 월경한 조선인 두 사람이 후금 사람의 참관 하에 서울에서 참수되었습니다. 이런 면모로 보았을때, 정묘호란 이후에 인조 정권은 반만주적인 태도를 취해, 병자호란을 불러들였다 라는 인식과는 반대로, 상당히 여러 부분에서 후금에게 양보를 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인의 월경에 대한 부분에 대해 천총제는 계속해서 지적을 했는데, 문제는 이게 다른 문제와 항상 곁들여서 하는 식이었다는 것입니다. 천총제는 조선이 바치는 액수가 기대에 미치지 못해, 경제적 불안이 계속 가중되자 이에 대해 짜증스러워 했고, 월경 문제와 덧붙여 다른 문제들을 지적함으로서 조선을 난처하게 했습니다. 1630년대에 이르면 서로간에 오고가는 대부분의 내용이 월경 문제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수준이 됩니다.



“왕이 보낸 편지를 보니, 하늘을 두고 맹서한다고 말하였소. 그러나 내 생각에는 우리 두 나라가 우호를 맺은 이래 귀국(貴國)에서 백성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어 우리 국경에 들어와 해를 주었지, 우리 백성이 언제 지난 약속을 어기고 귀국 땅에 들어가 해를 끼친 적이 있었소? 귀국의 백성들이 또 우리 동쪽 변방에 도피하여 사는 백성들과 사사로이 모피를 무역했지, 우리 백성 중에 일찍이 이처럼 사사로이 장사를 하는 자가 있었소? 하늘을 두고 맹서한다는 말은 내가 말한다면 괜찮지만 왕이 말해서는 안 되오."



 급기야 천총제는 조선 변경민의 불법 인삼채취를 근절하기 위해, 월경 당사자 뿐만 아니라 해당지역의 관리들에게까지 처벌을 요구했는데, 아무리 인조정권이 대부분의 조건은 수용하는 형태로 간다 하더라도 이는 말도 안되는 소리입니다. 하지만 1635년 조선인 36명이 무더기로 압록강을 넘어 인삼을 캐다가 붙잡히는 상황이 벌어지자, 천총제는 조선 관리 세 명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고, 조선 조정의 관료들은 "이것은 관례가 아니다." 라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세 사람을 모두 처벌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양보에도 불구하고 천총제의 도발과 시비는 갈수록 억지스러워졌고, 나중에는 왜 후금 사람에게는 인삼을 9냥에 파는데, 한인들에게는 20냥을 지급하느냐에 대해서도 따졌습니다. 이에 인조는 체면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용서를 구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국경을 넘어가 삼을 캐는 것은 우리 백성들이 큰 이익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인데, 내가 진실로 가슴 아프게 여깁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다시 거듭 엄하게 단속하여 반드시 통렬하게 끊고야 말겠으니, 잠시 용서해 주면 다행이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월경 채삼으로 인해 잡혀간 조선인들을 구하기 위해 후금 사신에게 뇌물을 몰래 꽂아주는등 나름대로 최선은 다해보았으나, 월경하여 채삼하는 조선인에 대한 후금의 처벌은 더욱더 강화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최대한의 저자세와 양보 등에도 불구하고, 1636년 홍타이지가 마침내 청나라를 개국하고 진정한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기존의 어중간한 현상유지 정책은 모조리 쓸모가 없어졌고 조선은 명이냐, 청이냐 하는 완벽한 선택의 기로에 강제로 끌려나오고 말았습니다. 기존의 광해군이나 정묘호란 이후의 인조 정권 시절에는, 후금쪽에서는 불과 30년도 아직 지나지 않은 명과 조선의 재조지은(再造之恩) 등의 특수한 입장에 대해 그럭저럭 용인해 주는 태도를 취했으나, 청나라가 명실공히 개별적인 황제 국가가 됨으로서 이러한 입장은 더 이상 유지가 불가능해진 것입니다. 차라리 청군이 이 시점에 중국의 절반을 장악하고 있다면 또 모를 일이지만, 아직 청군이 산해관을 자력으로는 넘지도 못하는 이 시점에 이러한 선택은 조선에게 있어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게다가 어차피 정묘호란 이후의 범월, 속환, 교역, 세폐 등을 둘러싸고 누적되어 온 조선과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나라 입장에선 긴 말이 필요없이 이 방법이 가장 깔끔한 수단이었습니다. 

파일:인조의 항복.jpg


 파국을 막기 위한 조선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전쟁은 일어났습니다. 후금과 청나라의 경제적인 위기라는 측면에서, 그리고 그 돌파구가 조선과의 전쟁이라는 입장쪽에 손을 든다면, 결국 조선이 무엇을 하고 어떤 정책을 취하건 이러한 결과가 나올 수 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고 맙니다. 물론 이것이 무조건 옳은 시각은 아닐 수 있겠지만, 병자호란이 끝난 후 천총제는 명나라와의 관계 단절, 인질 문제등 정치적 군사적 문제 외에 경제 부분에 대해 매우 구체적인 요구 사항을 나열했습니다.


 가령 조선이 일본과의 무역을 이전의 관례대로 유지할 것을 허락하면서 금, 은, 표피, 차, 염료, 각종 종이, 면포, 그리고 쌀 등 온갖 생필품에 대해 자질구레할 정도로 목록과 수량을 지정하여 조선에 요구했습니다. 이는 실제적으로도 후금 ─ 청나라 정권이 이런 물품들에 대해 부족과 품귀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는 사례로 꼽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특이점이 있다면 천총제가 요구하는 공물 중에 인삼은 없었습니다. 본래 삼국시대, 고려시대부터 중국에 공물을 바칠 경우, 인삼을 중국 황제들에게 예물로 바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례적입니다. 오히려 후금을 방문하는 조선 사신에 대해 인삼을 선물로 주는 면모까지 보여주었는데, 보통 번왕들이 통치 지역에서의 고유하고 특색있는 물품을 조공품으로 바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점은 의미가 있습니다. 인삼은 더 이상 조선의 고유 물품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청나라의 물품일뿐이며, 조선인이 채삼을 하는것은 말할것도 없는 불법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병자호란 이후에 월경 채삼자들에 대한 처벌 수위는 당연히 더욱 높아졌습니다. 1640년 청의 용골대(Tatara Inggūldai)는 심양에 있는 소현 세자를 찾아와, 조선이 불법채삼자들을 철저히 단속하지 않는다고 비난하기까지 합니다. 불법 채삼자들은 잔혹하게 처형당하고, 해당 관리들도 몹쓸 꼴을 당하며 쫒겨나버렸습니다. 모호했던 요동 지역 인삼의 소유권에 대한 이 모습은, 조선과 청의 경계 설정과 달라진 청의 위상에 대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1627년부터 1640년 무렵까지 청의 동남부 방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물론 가장 큰 이야기가 될 것은 후금과 명의 관계입니다. 원숭환이라는 골치 아픈 존재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던 천총제는, 무언가 실마리를 잡고야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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