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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2) ─ 남풍(南風)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12|조회수1,121 목록 댓글 5


 정성공

"천년이 지나도, 세상은 이 일을 이야기하리라."

─ 장황언(張煌言) 1620∼64



 순치제는 분명 청이 중원에 바로 입관한 혼란스러운 시기에, 정국의 주도자이자 급사했던 도르곤의 뒤를 이어 청조의 중국 지배에 대한 기반을 단단하게 굳이고 있었습니다. 황제라는 저울추에 그를 올려놓고 보면 분명 암(暗)이라는 글자보단 명(名)이라는 글자에 무게가 기울어질 것입니다. 수백만에 불과한 만주족이 갑자기 수억 중국인들의 지배자로 격상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순치제는 별다른 동요도 없이 침착하게 판도를 굳혔습니다.


 하지만, 순치제가 명군에 가깝다고 하는 일과는 별개로, 이 시기의 청나라가 과연 내외적 기반이 단단했나 하면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심지어 순치제가 죽고 강희제가 황제에 오른 시기에도 그렇습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 이 시기 청나라는 사방에 적을 두고 있습니다.


 우선 가장 큰 문제는 삼번입니다. 운남의 평서왕 오삼계, 광두의 평남왕 상가희, 푸젠의 정남왕 경계무. 오삼계는 만주족이 적시에 무정부상태의 중국에 진입할 수 있게 발판을 만들어준, 그야말로 최대의 협력자입니다. 게다가 이자성 군대를 물리치는것, 장헌충 군을 물리치는 데도 한몫을 했으며, 버마까지 추격하여 명나라 제국 최후의 불씨를 철저하게 밞아 꺼버린 인물이기도 합니다. 급기야 오삼계는 왕을 넘어 친왕(親王)에까지 이르렇는데, 오삼계가 물론 청나라 황족이 아니라는것을 생각하면 이는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오삼계를 비롯한 삼번은 지배지역에서 마음대로 관리를 임명하고 징세를 하였습니다. 이건 사실상의 반독립 세력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비록 오삼계 등이 최대의 협력자였다고 해도, 그들은 '한족' 입니다. 만주족 정권의 변방을 지키는, 강대한 군사력의 소유자들이 한족이다. 이는 시한폭탄이나 다를 바 없습니다. 


 


 동쪽의 정세도 심상치가 않습니다. 1649년 조선의 17대 국왕에 즉위한 인물은 효종(孝宗)이었고, 효종이 말하는 바는 다름 아닌 북벌, 즉 청나라에 대한 공세입니다. 이것이 양난으로 상황이 매우 어려워진 조선에 있어 현실성이 있는 이야기인가, 혹은 북벌을 이유로 삼은 효종 본인의 정치적 술수인가 하는 점은 물론 말들이 많겠고 관련된 논문도 많겠지만, 여기서 굳이 그 이야기를 길게 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중요한 점은 조선에서 분명 그런 움직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동방에서 최소한의 불온함은 느껴지고 있었습니다. 남방과 동방에서 그러한 점이 있다면, 북방의 정세는 어떠하였는가? 명나라는 북로(北虜)의 화를 계속해서 받았는데, 타타르와 오이라트라는, 원나라를 북방으로 밀어버리고 세워진 명나라의 입장에선 구시대 몽골의 시대착오적 망령으로 보일 세력에 끊임없이 시달리다가, 전혀 다른 퉁구스의 여진에게 최후의 화를 입었습니다. 


 그런데, 이 퉁구스 계통에게 다가오는 또 다른 북로(北虜)는 역시 전혀 상상하기 힘든 존재들이었습니다. 


러시아 제국의 위치


 1682년, 그러니 순치제가 사망하고 난 20여년은 뒤에,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Romanov dynasty)에 한명의 위대한 인물이 즉위하게 되니, 바로 표트르 대제(Peter the Great)의 출현입니다. 그러나 이복 누나 소피아가 스트렐치(Стрельцы́)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결국 소피아가 섭정을 맡는 식으로 일은 일단락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강희제 시절에 러시아와 벌어진 북방의 분쟁은 표트르 대제 보다는 소피아와 더 연관이 있을 것입니다.


 비록 그 유명한 네르친스크 조약등은 순치제가 죽고 수십년은 지난 뒤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하더라도, 로마노프 왕조와의 갈등 자체는 순치제 시절부터 싹이 보였습니다. 청에 중국에 입관하여 세력을 크게 떨치고 있다고 쳐도, 동북 지역은 만주족들의 고향입니다. 그런데 1630여년 무렵부터 러시아인들은 흑룡강 유역까지 남하하는 움직임을 보였고, 비로소 세상에 흑룡강이라는 강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 내었습니다. 이 땅은 그들이 탐욕을 낼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는 곳이었기에, 이들 러시아인들의 무단 침범과 노략질은 종종 이루어졌고 청 측의 입장에서 보자면 근방에 제멋대로 성곽을 짓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청은 흑룡강 유역에 살고 있던 각 민족들과 함께 군대를 일으켜 러시아에 저항했고, 순치 연간에는 그들과 군사적으로 실제적인 충돌을 벌이는데 이릅니다. 



 이 근방을 수색한 러시아 탐험가 하바로프(Yerofey Khabarov)


 순치제 시절부터 청은 러시아 세력들과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들이 송화강 유역까지 내려오려는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인데, 이 시기 청은 기본적인 무기의 위력 차이로 여러차례 난감한 상황에 처했으며, 결국 조선에 도움을 구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1654년 조선은 함경도 병마우후 변급에게 조총군 100명과 초관(哨官) 50여 명을 주어 지원군으로 파견하도록 하였고, 청군 3천여 명과 연합하여 7일만에 러시아 군을 패퇴시켰습니다. 그 후에 1658년에도 조선은 청군의 협조 요청에 혜산 첨사 신유에게 총군 200명과 초관 60여명을 파견하여 러시아군 270여명을 전사시켰습니다.

 일단 순치제 당시에야 일은 이런식으로 되었지만, 러시아 인들이 과연 가만히 있을지는 의문의 일이었습니다. 북방의 정세 역시 불안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Amurrivermap


 서북면에는 준가르의 가르단이라는 거물이 기지개를 펴고 있었는데, 이 이야기는 지금 하는것이 적절치 못하기에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서북방에서도 불온한 움직임은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위협을 합쳐도 당장 목전에 닥친 위협은 남방의 위협이 가장 가공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삼번을 일컫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보다 더 멀리, 바다에서부터 몰아쳐오는 거대한 바람이었습니다.



 


 정성공. 그는 아버지 정지룡의 세력을 모아 일종의 해상 군벌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직 기반이 취약하던 시점부터, 정성공은 광저우라는 대도시에 대한 공세를 보이기도 하고, 해안가 내륙 전지역을 타격하고 치고 빠지는 골치아픈 면모를 보였습니다. 아무리 청나라 만주족이 그동안 빠르게 적의 방식을 흡수하며 성장했다고 해도, 함대전 따위에 대한 지식은 그들에게 있어 전무한 것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들의 상대는 남중국해의 바다를 누구보다도 더 잘 꽤고 있는 무리들이었습니다.


 청나라에게 있어서, 그보다도 더 큰 문제는 연해의 한족들이 정성공에게 도움을 준다는 것입니다. 정성공이 이어받은 아버지 정지룡의 유산이 얼마나 막대한지, 사실상 정성공은 남중국해의 모든 운송과 교류를 통제하고 있었기에, 만일 정씨 일족에게 미움을 받는다면 그 사람은 뱃사람 노릇하기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정씨 가문을 도우면 만주족에게 명 황실을 돕는 범죄자로 여겨지고, 만주족을 지지한다면 바다에 나갈시 정씨 일족의 함대와 만나면 죽은 목숨이 되기에 연해 지역의 사람들은 엄청난 긴장감 속에서 지내야 했습니다. 참지 못하고 아예 혼란스러운 중국을 영원히 떠나 동남아시아나 필리핀, 대만 등지에 정착하기 위해 배를 타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때 그들이 타던 배도 물론 정씨 가문의 배로, 적법한 뱃삯을 내고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청나라가 손을 놓고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청나라 군대는 정성공의 본거지 하문을 급습하여 그에게 대타격을 입히기도 했습니다. 자신의 모든것을 잃을 뻔 하기도 한 정성공은, 그러나 놀라운 집념을 발휘해서 다시 이를 수복해내었습니다. 청나라 정부는 이 골치아픈 상대에게 적법한 권한을 부여하고, 그의 자체적인 세력도 합법적으로 유지 할 수 있게 해줄 터이니, 청나라에 항복을 권유했지만 정성공은 단칼에 거절했습니다. 


 청나라는 현재 자신들이 사로잡고 있는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을 이용해 그에게 회유 작업을 벌였습니다. 해징공(海澄公)의 작위와 공훈 교지를 전하고, 정성공을 따르는 자들이 정성공의 영토에서 거주하는것을 허락한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이 시점의 정성공은 해징을 장악했고, 정성공이 이 제안을 따른다면 더 이상의 파병은 없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만약 정성공이 이 시점에서 이를 수용한다면 정성공은 해징공이 될테고, 만주족은 귀찮은 싸움이 없을 테니 좋을것이고, 정지룡은 자유의 몸이 될 것이며, 정씨 가문은 하나가 되어 이전처럼 돌아가는 모두가 행복한 결말로 끝날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역으로 청나라 조정의 악행과 청군의 어리석음을 조롱하면서, 자신의 휘하 병력이 일본과 인도차이나 등지에서 엄청난 기세로 증원되고 있으며 숫자가 수십만에 달한다고 말했습니다. 정성공은, 마지막으로 조건을 내세우려면 해징공 따위가 아니라 3개 성을 관할하는 왕의 권한과 영토를 말했습니다.
 

 물론 청나라 조정은 이 따위 요구를 들어줄 생각이 없었고, 정성공 역시 들어주리라 기대하고 쓴 말은 아니었습니다. 정성공의 의도는 청나라에 모욕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정성공이 단박에 청측의 요구를 거절하지 않고 터무니없는 요구조건을 제시하면서, 약하게나마 협상의 기미를 보인 이유는 순전히 병력과 물자를 확보하기 위한 눈속임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청측에서는 정성공의 요구를 못들은척 무시하며 일방적으로 그를 해징공에 삼고자 관리를 보냈습니다. 순치제의 칙령은 정성공이 어찌 그렇게 아버지에게 무례할 수 있냐며 짐짓 꾸짖는 한편, 그전까지 생긴 트러블은 순전히 도르곤의 악행 때문이며 이제 도르곤도 죽고 없으니 정성공과 그의 추종자들에게 대사면을 내릴 것이라며 장황하게 말했습니다.




 "해안 지역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해도, 우리로서는 여전히 더욱 충실한 방어 조직이 필요하도다. 다른 자들을 찾기보다 그대가 이상적인 후보자라고 할 수 있지 않은가? 그대의 아비는 제 일가붙이에 대해 확신하고 있으며, 그래서 그대를 강력하게 천거했도다……그대는 그대의 적들을 죽이든 살리든 마음대로 해도 좋으며, 감찰과 해상 화물 징세의 권한을 행사하게 될 것이다…… 그대가 바다의 평화를 이룩해야 하리라! 그러니 그대는 우리의 명을 거역하지 말지어다."
 
 
 
 청나라의 조서는 정성공을 그들의 사략함대로 만들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계속 복주 지역에서 소규모 교전을 개시하며 복건 도독을 무시했습니다. 
 

 복건 도독은 정성공에게 '결국 절망적인 상황으로 끝날 수 밖에 없는' 현실을 환기시키면서, 만약 정성공이 군사적 도발을 계속한다면 조상들의 무덤이 무사하지 못할것이라고 넌지시 협박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고, 결국 정씨 집잔의 묘역은 파헤쳐졌습니다. 그리고 만주족 특사들이 정지룡의 정실 부인 안씨 부인과, 그녀의 아들이자 정성공의 이복 형제인 정세도, 정세음을 데리고 현장으로 도착했습니다. 변발을 하기만 한다면, 해징공에 봉하겠다는것입니다.
 
 
 정성공은 시니컬하게 대답했습니다.
 
 
 "과연, 누가 상상이나 할 법한 일인가? 내 조상의 무덤이 욕을 본 바로 직후에 대규모의 사절단이 비단을 잔뜩 짊어지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말이다. 내가 어찌 그 같은 제안을 거절 할 수 있겠는가? 나는 그대들을 기다릴 것이다. 선물은 조금이면 족하다."
 
 
 특사들은 화를 꾹꾹 눌러참으며 정성공에게 변발을 하고 오라고 통보했습니다. 그러면 해징공을 준다는 것입니다.물론 정성공은 변발 따윈 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정지룡이 북경에 머문지 10년이 가까워지자, 정성공이 도발을 하면 할수록 그들을 바라보는 주위의 눈초리는 견디기 힘든 수준이 되었습니다. 결국 정지룡의 아들이자 정성공의 이복 동생 정세도는 모든 절차를 무시하고 개인적으로 정성공을 만나러 와 무릎을 꿇고 흐느꼈습니다.
 
 
 "제발 만주족의 명을 받아들여주십시오. 가문의 안위를 지켜주십시오!"
 
 
 하지만 정성공은 격양된 감정으로 대응했습니다.
 
 
 "너 같은 아이가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것이냐, 후한 광무제야 예외일 것이다만은, 예로부터 변절하여 잘 된 사람이 있다더냐? 내가 덫에 빠져야 하느냐? 단지 내 아버지가 나보다 덫에 먼저 걸려들었다는 그 사실 하나 때문에 말이다! 매일 같이 나는 저들의 제안을 물리치고 있고, 네 아버지는 만주족들의 궁중에서 부귀영화를 누리고 계신다. 만약 내가 변발을 순순히 한다손 쳐도, 아버지이든 아들들이든 안전할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말아라! 그런 말은 더 이상 꺼내지도 말아라. 너는 나를 비정하다고 여기겠지만, 나는 너를 낳아주신 아버지를 잊은 지 오래되었다!"
 
 
 "이렇게 하기가 쉽겠느냐? 쉽겠느냐는 말이다!"
 
 
 결국 정세도는 한동안 머물다가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돌아갔습니다. 떠나기전 울면서 그는 말했습니다.
 
 
 "특사로 파견된 저희는 빈손으로 돌아가고, 저희들의 임무는 이것으로 끝입니다. 저희는 보고를 마치는 순간에 죽게 되겠지요."
 
 
 하지만 정성공은 여전히 얼음장같은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너희들이 무슨 말을 하고 무슨 짓을 하더라도 소용이 없다. 내 결심은 이미 섰으니, 그만 입을 다물어라."


 정지룡은 완전히 끝장이 나버렸고, 정성공은 여전히 청조에 대항하고 있는 상황. 이런 상황에서 정성공은 남명 영력제로부터 연평군왕(延平郡王)에 책봉하여 드디어 왕의 자리에까지 오르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또 다른 움직임을 보이던 것이 바타비아의 VOC,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입니다. 그들은 이 당시 대만을 장악하고 있었는데, 네덜란드인들의 가혹한 통치에 중국인들이 반발하며, 1652년 곽회일 등이 들고 일어섰지만 4천명 무렵의 봉기군은 머스킷 티어 앞에 무력하게 쓰러져서 네덜란드인들의 피해는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간혹 민족적 성향을 고취시키는 사람들은 정성공이 동족들이 당한 고통에 분통을 터뜨려 대만 공격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정성공은 전혀 관련이 없었고 만약 가능성이 있다손 치면 곽회일이 정지룡의 옛 동료였다는 몇몇 이야기 뿐인데, 정성공은 아버지와 그다지 화목한 사이는 못되는 편입니다.


 이 곽회일의 봉기 이후부터 VOC는 정성공이 대만을 공격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을 했습니다. 그들은 결론적으로 정성공은 청나라 정부에 패배할 수 밖에 없고, 그 경우 정성공의 잔존세력이 노릴곳이 대만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바타비아에 있는 VOC 본사의 이사회는 대만 총독에게 이런 서한을 보내며 주의를 당부했습니다.
 

 ─ 우리는 타타르인들에게 수차례 패배한……고위 관리 정성공에 대한 불안감을 아직 떨쳐버릴 수가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그가 궁극적으로 하문을 떠나 부하들을 데리고 보다 안전한 곳으로 이주할 수 밖에 없게 될 텐데, 십중팔구 대만이 그 목적지가 될 것입니다. 그곳의 비옥한 토양과 기타 여러 양호한 조건들에 대해서는 그도 우리 못지 않게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성공은 부하들의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습니다. 군율이 엄격한데다 부하들의 지지를 이끌어낼 수단도 별로 없어 부하들의 이탈이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자가 마침내 본국을 떠나야만 하는 상황을 맞게 되었을 때에는 그 자의 휘하에 남아 있는 부하도 얼마 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적어도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는 정성공이 대만에 발톱을 들이밀진 않았습니다. 그가 무슨 일을 벌이려 준비하고는 있었지만, 대만 정도의 스케일이 아니라 청나라와 중국 전체를 대상으로 한 일이었습니다. 그는 정씨 가문의 모든 선박을 불러모으면서, 지난 10년간 준비한 계획을 성사시키려 했던 것입니다.
     
 

 

 

 정성공은 북벌 계획을 준비중이었습니다. 그다지 숨기려고 하지도 않았는데, 사실 숨길수도 없었을 테지만 정성공은 대놓고 복건 총독에게 자신의 구상을 자랑스레 적어 보냈습니다. 그러면서 청나라 내륙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봉기와 자연 재해를 언급하며, 이런 '기이한 현상들'은 하늘이 침략자 만주족 정권에 노했다는 증거라고 말하면서 반격의 때가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가 자신만만하게 나올 법도 한것이, 1656년 5월 9일, 정성공은 만주족 장수 지두를 상대로 해 그를 대파했습니다. 지두는 함대를 이끌고 출항했으나, 갑자기 바람까지 정성공을 도와주어 패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로서는 바다의 여신이 자기를 도와준다고 믿을만 했습니다. 그런데 이 무렵 정지봉이 죽는 일이 생깁니다.

 

 

 시간은 점점 다가왔습니다. 10년동안의 교역과 군사활동은 오직 이 순간을 위한 기다림이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대규모 함대를 이끌고 복건 해안을 거슬러 올라가서, 인근 지역을 통과하여 양자강 하구에 다다르는 것이었습니다. 해안가에서 벌이는 소규모 전투를 벗어나, 단번에 중화제국의 심장부를 뒤흔들만할 가공할 계획이었던 것입니다.

 

 

 이 무렵 예전의 노왕 주이해도 정성공을 의지하기 위해 도착했었는데, 정성공은 그를 보호하는 조건으로 감국 칭호를 쓰지 말라고 요구했습니다. 노왕 정권 중에서는 주순수(朱舜水)라는 학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도 일본에 종종 건너가 원조를 청했습니다. 주순수는 일본에서 훨씬 잘 알려져있고 그곳의 철학 사상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친 인물로, 1982년 주순수 사후 300년이 되자 일본과 중국 모두에서 기념행사가 열린 바 있습니다.

 

 

 1658년 5월, 마침내 북벌군은 출정했습니다.

 

 

 그 규모는 무려 17만 5천여명. 선봉은 정성공이 가장 신뢰하는 장수인 감휘(甘輝)가 맞아 10,000명의 병사와 20척의 대형선, 30여척의 보급선을 거느렸으며, 우익은 마신(馬信)이 지휘하여 30척의 함선, 30척의 보급선, 20,000명의 병사를 지휘했습니다. 좌익 또한 똑같은 20,000명의 규모로, 만례(萬禮)가 지휘했습니다.



 


 이것만으로 5만 명의 규모가 되는데, 정성공 본인이 또한 120여척이 넘는 전함과 40,000명이 넘는 대부대를 이끌고 후미에 위치했습니다. 그리고 8천에서 1만명의 가량의 철인(鐵人)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철면을 쓰고 철갑옷, 철치마를 입고 철사슬로 고정하여, 얼굴은 단지 눈, 귀, 입, 코를 드러낼 뿐이라고 하였는데 아무래도 일본쪽 갑옷을 도입한것으로 보입니다. 거기다 정성공의 어린 시절 부터 그를 호위한 흑인 부대도 이에 포함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성공의 지난 10년이 만든 결실이었습니다. 군율은 엄중하여 살인, 간음, 민가르 파괴한 자, 밭 가는 소를 죽인 병사들은 모두 처형되었고 상관도 연좌되었습니다. 한편, 이러한 시기에 황오라는 인물이 정성공을 배신하여 만주족에 투항하는 일이 생깁니다. 신경이 쓰일 일이었지만, 정성공은 별다른 문제없이 진격하며, 장황언의 병력을 합류시켰습니다. 장황언 부대는 지난 10년간 복건 북쪽에서 만주족을 상대로 싸우던 저항 세력이었습니다. 둘은 힘을 합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때, 재앙이 찾아오게 됩니다. 양자강 하구로 가는 도중, 8월 무렵 양산(羊山)에 도착한 정성공 일행은 바다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이곳에 닻을 내렸습니다. 양산이란 이름에 걸맞게 사람들은 신의 은혜를 구하며 양을 풀어두었고, 양들은 섬에서 신성시 되면서 숫자가 상당했습니다. 그리고 마치 오디세우스의 이야기에서 키르케의 동물들에 손을 대었던 것처럼, 굶주린 선원들은 양들을 탐욕스럽게 바라보기 시작했습니다.

 

 

 매우 순진한 동물인 양을 잡는데는 별다른 노력이나 도구도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곧 섬은 사방에서 양을 굽는 냄새와 소리로 가득찼고, 몇몇 선원들은 이러한 만행을 보고 정성공을 찾아와서 따졌습니다.


 

"양산은 신성한 섬이지 보급품 기지가 아닙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옛 전설을 들먹이기도 했습니다.


 

 "이 바다에서는 용이 살고 있습니다. 꾸벅꾸벅 졸고는 있지만, 공물을 바치지 않고 양산에 정박하는것은 무례한 행위입니다. 그 용은 평화와 고요함을 좋아합니다."

 


 물론 정성공은 이런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진 않았습니다. 그리고, 재앙이 찾아오게 됩니다.

 

 

 이튿날 포구를 떠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바다의 여신 마조의 보호를 받는 정성공의 함대는 여신보다도 강대한 힘에 좌지우지되어, 전에 경험한 적 없던, 상상 할 수 있는 최악의 폭풍우를 만나게 됩니다. 마치 해룡의 분노와도 같은 파도는 갑판을 매섭게 때려 부수었고, 퍼붓는 폭우로 배를 조종 할 수 조차 없었습니다. 항해사들은 제멋대로 도리질 치는 배의 키를 붙잡고 안간힘을 썻지만, 앞이 분간되지 않아 방향을 잡을 수 없었습니다. 밀집되어 있던 선박들이 몇 차례 서로 충돌하는가 하면, 몇 척은 암초 근처로 쓸려가 좌초하기도 했습니다.

 

 

 광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성공은 사령선 뱃머리로 나가 하늘에 소리쳤습니다.

 


 "미천한 몸이지만, 이 몸은 명 왕조를 다시 일으켜 세워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소이다! 만약 하늘이 이 뜻을 받아주지 않겠다면, 차라리 나와 모든 함선을 격침시켜 버리시오!"

 

 

 정성공의 외침 때문은 아니겠지만 곧 폭풍우는 그쳤습니다. 그러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습니다.

 

 

 함대는 10여척을 잃었고, 싸움 한번 못해보고 무려 8,000명의 사망자를 내었습니다. 정성공의 친척과 인척만 231명이 죽었고, 난파선에선 간신히 살아남았지만 곧 해안가에서 만주족에 사로잡혀 그들의 노리개가 된 숫자만 900명이 넘었습니다. 보급선은 침몰했고, 정성공의 직계 가족들도 쓸려갔으며, 정성공의 후실도 폭풍우에 사라졌고, 무엇보다 정성공의 아들들 마저도 세 명이나 종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은 곧 발견이 되었습니다. 바다에서 시신이 발견된 것입니다. 정성공은 아이들을 해변에 묻었습니다.

 


 상상 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상황 속에서, 정성공은 한 번 크게 웃어버리고 맙니다. 그 모습을 보던 부관은 정성공의 웃음이 마치 벼랑 끝에 서 있던 사람과 같았다고 전했습니다. 

 


 싸움 한번 못한 상황에서 처절한 실패를 겪은 후, 정성공이 겪은 문제는 병사들의 사기 문제였습니다. 많은 병사들이 의욕을 상실한 상황이었기에 정성공은 부하들에게 이는 일시적인 차질일 뿐이며, 앞으로 한두 달간 해변에 고립되게 된 함대와 병력들을 재정비할것이라고 안심시켰습니다. 근처의 항구에 정성공의 군대는 상륙했고, 주민들은 열렬히 환영했습니다. 성대한 연회가 펼쳐졌는데, 아무래도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의도적으로 좋은 분위기를 연출하는 모양새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눈속임도 통하지 않고, 병사들 사이에선 더 이상 고생하기 싫다는 사람들이 나오면서 정성공은 청나라에 투항하거나 도망치는 병사들을 단속하느라 골머리를 썩혔습니다. 사실 정성공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싸움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잘 이해하지 못했고, 안정적인 수입원인 해안가 약탈, 해적질, 동남해와 일본 무역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지난번에 폭풍으로 쓸려서 죽어간건 그렇다고 쳐도, 사람들 눈에는 만주족 병사들의 창에 찔려 죽나 폭풍에 쓸려가나 그게 그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만주족 정권의 첩자들은 여러 공작을 펼쳤고, 정성공 부대 내에서는 투항자가 더 늘어나게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이전에 만주족 정권을 섬기다가 정성공에게 항복한 사람들이었고, 이제 다시 편을 갈아타는 것입니다. 의심병이 생긴 정성공은 자신의 휘하 장수들 중에서 만주족 휘하에서 온 인물들은 모두 해임했습니다. 전투 중에, 상대편 쪽으로 달려갈지도 모를 지휘관에게 함대를 맡길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이상한 분위기와 숨이 턱턱 막히는 강박증이 함대에 닥쳐왔습니다. 한 선장은 선원들에게 선박의 노를 모두 붉은 색으로 칠하라는 명령을 내렸는데, 이는 미신적인 요소와 함께 병사들이 가만히 할일 없이 있어 불안감이 더 증폭되지 않도록 할 일을 만들어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의심병이 도진 정성공은 이것이 청나라와 싸움이 벌어질 시 모종의 계략이 있는것 아닌가 하고 의심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증거가 불충분했는데, 정성공은 일단 그 선장을 해임시킵니다.

 

 

 그동안 잘 이용했던 현지 주민들이나 암시장 상인들의 정보 루트도 이제 믿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몇차례 잘못된 정보로 낭패를 보게 되자 ─ 이게 의도적이든 실수였든 간에 ─ 정성공은 복건 이북에서는 아무도 믿을 수 없다는것을 전제로 군사활동을 펼쳐나갔습니다. 적군은 멀리있고 쳐들어오려면 멀었다는 정보가 들어와도 계속 방비를 하고 있어야했기에 불안감은 계속해서 눌려왔습니다.

 

 

 점점 군율도 나빠지기 시작했습니다. 병사들이 약탈을 하고 다녔는데, 이는 정성공이 질색을 하는 일이지만 정성공의 부하 장수들이 허락한 것입니다. 사기가 낮아진 병사들을 진작시키는데는 이만한 방법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성공은 1658년 말까지 복건 북부에 다수의 지닞를 구축하는데 성공하였고, 북벌 시에 보급로 루트와 위급시에 바다로 돌아갈 수 있는 비상 탈출로등을 모두 확인하고 준비했습니다.

 

 

 재정비는 끝났고, 더 이상 머뭇대기에는 병사들의 사기도 걱정되는 상황. 정성공은 1659년 4월 무렵 함대를 양자강 하구로 총집결 시키며 다시 한번 작전 수행에 나섰습니다. 간부들을 불러 모은 정성공은 이 작전이 얼마나 중대시한가를 지휘관들에게 똑똑히 알렸습니다.

 


 "각 제독과 통진(統眞)은 지난 10여년 동안 온갖 고생을 다 겪었으나, 공명을 떨칠 사업은 바로 이번 일에 있다!"

 

 

 

 

 함대는 전진을 개시했습니다. 지난번의 악몽이 남은 양산 일대를 지났지만 바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잠잠했습니다. 정성공 함대는 장강 남안에 위치한 초산(焦山)에 상륙하여 엄숙하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나라의 역대 황제에게 지금부터 남경을 공략하겠다는 사실을 알린 것으로, 이른바 전승 기원인데 3일에 걸쳐 진행되었습니다.

 

 

 첫째 날, 정성공과 그의 측근들은 붉은색 옷을 입고 하늘에 제물을 올렸습니다. 둘째 날, 그들은 검정색 옷으로 갈아입고 대지를 향해 같은 의식을 거행했습니다. 마지막 날, 흰색 옷으로 갈아입은 그들은 명태조 홍무제 주원장을 위해 예를 올렸습니다. 전원이 하얀 옷을 입었고, 수백 척에 이르는 정성공 함대 모든 배의 돛에 흰색 깃발이 높이 걸렸으며, 갑판에도 흰색 깃발이 휘날렸습니다. 이 날을 본 목격자는 강이 한여름에 갑자기 눈으로 뒤덮인 듯 했다고 할 정도로 장관이었으며, 의식은 함대의 모든 병사들이 위대한 명태조의 이름을 세 차례 연호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수천명이 넘는 목소리가 한번에 명 왕조를 찬향하니, 사방이 눈물 바다가 되었습니다. 어찌보면 과거부터 자신이 꿈꾸웠던 광경이 현실로 된 모습을 본 정성공은 의식이 끝난 후에도 감정을 주체 못하고 눈물을 계속 흘렸다고 합니다. 그는 그날의 기분을 시로 남겼습니다

 


노랗게 물든 나뭇잎을 사이에 오래된 염원이 새겨져 있고

궁궐을 휘감든 가을바람은 차갑구나

참나무 껍질은 갈수록 두꺼워지고

무심한 새들은 돌아오는구나

 

잊혀진 묘비들이 땅 위에서 나뒹굴고

사당의 계단에는 이끼들이 잔뜩 끼어 있구나

찾는 이 하나 없는 이곳에

세상사 근심만이 돌아오는구나

 


 8월에 이를 무렵 정성공 함대는 다음 진격을 개시했습니다. 양자강 쪽에서 버티는 청군의 지휘관은 나명승(羅明昇)이라는 인물이었는데,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넒은 양자강의 강 유역 요지 곳곳에 군대를 배치했고, 남경에 가까운 상류에는 곤강룡(滾江龍)이라는 방어 시설을 설치했습니다. 15 킬로미터에 걸쳐 강 중간 중간에 솟아 있는 섬들 사이를 뗏목으로 연결한 댐이었습니다. 마치 강물 위에 세워진 만리장성과 같은 곤강룡의 곳곳에 요새가 들어서고 강 하류를 향해 대포가 배치되었습니다. 삼나무 목재로 만든 요새 기단들만 해도 각각 소총과 탄약으로 무장한 500여명의 병력을 지탱 할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크기였다고 합니다.

 


 정성공 함대의 가장 큰 전함도 왜소하게 보이게 하는 이 떠 있는 요새들은, 밑바닥에 흙과 바위를 실어 안정을 유지했고, 강에 닻을 내리고 거대한 쇠사슬로 서로를 연결시켰습니다.

 

 

 정성공의 부대에 합류하여 선봉에 선 장황언은 곤강룡과 대적하기 위해선 여러 방면에서 정밀한 공격을 가해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정성공을 진강(鎭江)을 노리기로 했습니다. 다만 진강은 상당히 강력한 요새 였습니다. 진강을 무력화 시켜야만 다른 요새들을 함대가 공격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정성공은 양동 작전을 기획합니다. 진강을 노리는 동시에 과주(瓜州)를 노리기로 한 것입니다. 이 두 요충지만 손에 넣는다면, 북경으로 곧장 이어진 대운하의 한쪽 끝을 확보하게 되어 북쪽에서 남경으로 보내는 모든 물자를 중간에서 차단이 가능하게 됩니다.

 

 

 공격의 주력인 함대 병력은 장황언의 부하들이 주축인 남군과, 정성군의 부하들이 주축인 북군으로 나누어졌습니다. 공격이 시작되었고, 함대는 적의 포병들을 고립시켜 재보급을 받지 못하게 하기 위해 포격을 가했습니다. 강 한가운데의 바지선들은 대포를 쏘면서 응사를 했지만, 정성공 함대에 큰 타격을 주는것은 어려웠습니다. 곧 만주족 대포의 탄약이 바닥이 난것입니다.

 

 

 함대는 진강을 통과해 곤강룡에 이르렀습니다. 선봉 선단이 바지선들을 공격하여 적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동안, 용감한 잠수부들은 댐 아래로 헤엄쳐 들어가 요새 기단을 연결하는 쇠사슬을 끊어 내었습니다.

 

 

 그 동안 양자강 남안에서 장황언 부대는 중무장한 진강 요새를 우회하여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정성공의 깃발을 높이 들고 현지의 호륙을 기대하며 내륙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에 32개 지역에서는 정성공에 충성을 맹세합니다.

 

 

적장 나명승은 강물 위의 한 기단으로 휘하 병사 500여명가 함께 내몰렸습니다. 탄약이 다 떨어지자 그들은 화살을 쏘면서 최후의 최후까지 저항했고, 정성공의 수군이 물밑듯이 기단으로 몰려들자 그들은 모두 장렬하게 전사하고 맙니다.

 

 

 다시 과주에서 정성공의 휘하 장수 마신과 주전빈이 선봉으로 나서 싸웠습니다. 주전빈은 강기슭에서 내달려 가파른 등성이를 넘고 사다리를 타고 직접 성벽으로 올라, 부상을 당하면서도 계속해서 부하들을 지휘했습니다. 곧 저 멀리 함대에서 싸움을 지켜보던 사람들에게도 과주성 위에 정씨 가문의 깃발이 올라가는 장면이 목격되었습니다. 주전빈은 5발이나 되는 화살을 맞았지만, 위풍 당당하게 서있었습니다.

 

 

 정성공이 대승을 거둔 것입니다.

 

 

 진강과 과주가 모두 정성공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남은것은 남경으로 걸어가기만 하면 될 일입니다. 정성공은 적장으로 주의좌라는 인물을 생포했는데, 주의좌는 정성공의 앞에서 목숨만 살려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는 유생으로 알려진 정성공의 효심에 호소했습니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 연로한 부모님을 돌볼 수 있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너 같은 반역도의 피로 어찌 내 칼을 더럽 힐 수 있겠느냐?"

 

 

 정성공은 그렇게 말하며 그에게 금 500냥을 주고 풀어주었는데, 아마도 다른 병사들의 투항을 기대한것으로 보이지만 부모님 드립을 쳤던 주의좌는 그 즉시 남경으로 달아나서 사태를 보고합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건, 정성공은 이 시점에서 성공적으로 양자강의 요충지를 장악하여 대운하를 차단한 상황이었습니다.





 보고를 들은 청나라 조정은 엄청난 충격으로 발칵 뒤집어 졌습니다. 21세의 순치제는 미친듯이 실성하며 소리를 쳤고, 자신이 직접 원군을 이끌고 남경으로 가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습니다. 순치제와 정성공의 대결이라면 상당한 구경거리가 되었겠지만, 효장문황후는 황제가 경솔한 언행을 한다면서 그를 진정시켰습니다. 순치제의 분노는 쉽게 가라 앉지 않아 그는 마구 칼부림을 하면서 황상을 내리쳐 산산조각 내었고, 아담 샬이 간신히 젊은 황제의 노기를 가라앉히는데 성공합니다.

 

 

 청조 입장에서 보면 이는 보통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소문은 일반 백성들 사이로 금세 퍼질테고, 그들의 동요가 전국에서 벌어지면 사태가 산불처럼 커질 가능성도 충분했습니다. 불분명한 이야기들이 나돌았고, 정성공의 30만 대군이 북경으로 운하를 타고 진격할 것이라는 식의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반면에 정성공의 부대는 의기양양했습니다. 드디어 사람들은 이 싸움이 무엇인가 기대해볼만 하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지난번 양산에서의 폭풍우 같은 것도 하늘이 기개있는 사나이들을 시험해보기 위한 시련 정도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양자강 상류와 내륙에서는 장황헌 부대가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현지 백성들도 움직일 기세였습니다.

 

 

 과주성이 함락되었음으로 양자강 북안이 확보되었습니다. 반대쪽 남안에는 진강이 있었고, 이곳도 정성공이 장악을 했습니다. 훗날의 이야기를 하자면 아편전쟁 당시 청나라는 진강이 무너지자 꼬리를 내린바 있습니다. 진강의 싸움에서는 청나라의 장수 관효충(管效忠)이 지키고 있었는데, 그들은 정성공의 철인부대의 상대가 되지 못했습니다.

 

 

 철인 부대는 일반 병사들에게는 신병이라고까지 불렸습니다. 철갑주 등을 차고 일본식으로 얼굴까지 온몸을 가른 그들은 부대 최전선에 배치되어 철벽과도 같이 적을 막아세웠고, 긴 창으로 무장해 기병들이 탄 말을 쓰러뜨렸습니다.

 

 

 입고 있는 갑주도 어마어마한 무게고, 무기도 상당한 무게, 거기다 당씨가 한 여름이었음을 감안하면 철인 부대의 구성원들이 얼마나 골라 모은 괴력의 사나이들인지 알법했습니다. 만주족 기병대는 철인부대에 달려들었지만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녹아내렸습니다. 그 뒤를 이어 정성공 부대의 기병대가 달려들어, 진강은 곧 대학살장으로 바뀌고 맙니다. 만주족 병사들은 서로 먼저 도망가려고 밀어내었고 이 과정에서 사상자가 무수하게 발생했습니다.

 

 

 정성공의 의도는 명확했습니다. 계속된 승리에 고취된 그는 양자강 상류로 진격하기를 원했는데, 그가 가장 신뢰하는 장수 감휘는 신중할것을 부탁했습니다.

 

 

"아군은 이미 대운하 남쪽에 요충지를 장악하여 만주족의 북쪽 중원로를 차단하게되었습니다. 남경으로 곧바로 진격하는 대신, 남경을 우회하여 내륙과 상류의 다른 도성들을 장악하고 남서쪽으로 진출하십시오. 그렇게 되면 아군은 적의 증원로뿐만 아니라 남경을 버티게 해주는 식량 보급로도 차단하게 됩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과도한 인명 손실 없이 남경을 포위하여 항복을 받아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전례를 따져보자면, 명태조 주원장은 지금의 남경인 집경을 공략하기전에 채석(采石), 우저(牛渚) 등을 먼저 공략한 전례가 있습니다.

 

 

 초전의 연승을 누리고는 있지만, 후방에 강력한 방어부대와 동맹 세력없이 너무 내륙 깊숙이 온것은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남경을 공략하는것이 중요하다고 여겼습니다.

 

 

 지금 백성들은 정성공 부대의 등장으로 술렁거리고 있습니다. 기세를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무언가 보여줄 필요가 있었고, 한족들이 많은 남경을 함락시킨다면 효과는 제대로일 것이라 여긴 것입니다. 또한 만주족 병사들이 적고 한족이 많은 남경의 특성상, 내부 도움도 기대해볼만 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남경에 입성해야 하오. 그렇지 않으면 우리 병사는 나이만 먹을 따름이지. 시류에 따라 우리에게 가세한 병력은 머뭇거리면 실망하고 우리를 저버릴 것이외다."

 


화살을 5발 맞으면서도 과주성을 함락시킨 주전빈이 이 계획에 대찬성했습니다.

 

 

 "우리는 지금과 같은 자신감을 십분 이용해야 합니다! 속전속결이야말로 최선의 방책이며, 더 머뭇거릴 시간도 없습니다!"

 


 이제 계획에 따라 85,000명이 넘는 대부대가 남경 코앞까지 다가오게 됩니다. 남경은 풍전등화에 놓였고, 정성공은 일생일대의 기회이자 전성기를 맞이한 무렵이었습니다. 그런데, 남경에 정성공이 살려준 주의좌가 있었습니다. 그는 남경 도독 낭정좌(郞廷佐)에게, 정성공의 최대 약점은 자만심이라고 말했습니다.

 

 

 낭정좌는 이 말을 듣고 정성공에게 항복할 의사가 있다는 말로 아첨을 하면서, 단지 두려운것은 세상의 이목이니 한달 가량의 말미를 주라고 말했습니다. 형식적으로라도 저항하는 시늉은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만주족 정권에서 일한 바에 따르면, 30일 정도를 버틴다면 만주족 정권도 북경에 있는 그들의 가족들을 해치지 않을것이라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여기서 정성공은, 그의 참모들과 동맹들을 경악시키고, 그리고 후대에 본인도 후회할만한 일생일대 최악의 선택을 하게 됩니다.

 

 

 30일 동안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남경의 항복을 기다린 것입니다.



 정성공은 한달만 기다리면 된다는 낭정좌의 말을 전했고, 감휘 등의 부하 장수들은 이에 격렬하게 항의했습니다.



 "구걸에 가까운 호소는 위장이며, 어떠한 담보도 없이 평화를 청하는 자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것, 손자병법에서도 그리 말하지 않습니까?"



 지금 남경은 원군을 기다리고 있으며, 시간이 갈수록 남경을 공략하는것은 어려워질것이라고 하며 그들은 정성공을 설득했습니다. 하지만, 정성공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가 남경 도독의 뻔히 보이는 거짓말을 진실로 믿었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입니다. 지난번에 정성공은 양자강 상류로 진격하겠다고 했는데, 이러한 판단은 자신의 발언과 완전히 배치되는 일입니다. 자기가 버티고 있으면 수 많은 남경 내의 한족들이 먼저 반응한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고, 과거에 남경에서 공부했던 경험 때문인지도 모를 일이고, 이 당시의 그는 이해할 수 없는 면모를 보여주었습니다. 혹자는 정성공이 자기 생일날에 맞춰서 남경을 함락시키려 했다고 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하릴없이 보름이 지났습니다.



 군사들의 기강은 점점 느슨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남경으로부터는 어떠한 저항의 낌새도 없었고, 정성공의 군사들은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고 조용하기만 한 성벽을 따분하게 지켜보았습니다. 경계 근무를 맡은 포위 병사들은 성 주변을 어슬렁 거리거나 성벽 앞의 커다란 해자에서 낚시를 하기까지 했습니다. 술병을 차고 보초를 서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급기야 맍족 진영으로 탈주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 일은 어려운것도 아니었습니다. 투항하는 자들은 그냥 걸어서 남경 안에 진입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항복한 사람 가운데 한 명은 정성공 부대에서 오랫동안 싸운 베테랑이었으나, 과주성 전투에서 현지의 소녀를 강간하려다가 정성공의 제지때문에 실패했고, 목이 잘려질 뻔했으나 그간의 공을 생각해서 군료를 대폭 깎는 수준에서 끝났습니다. 그는 성에 들어가 낭정좌에게 말했습니다.



 "정성공 군사들의 불안감이 날로 고조되고 있고, 기강은 풀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성공의 생일 축하연이 준비되고 있으니, 혹시 적의 기강이 해이해질 때를 기다린다면 그 날 밤이야말로 적기입니다."

 


 이러는 가운데 도성 후문까지 만주족의 원군이 도착했지만, 오히려 정성공은 기고만장하여 아무런 걱정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 많은 증원군이 오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하루면 그들을 몰살시키거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을 테고, 따라서 앞으로 많은 싸움을 하는 수고로움을 덜을 수 있을 것이다."

 


라는게 요지입니다. 하지만 부하 장수들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관운장과 비슷……한게 아니라 아예 똑같이 생긴 감휘 상. 관운장 닮았다면 대체로 평가가 좋다는 소리죠.

 

 

 

 정성공의 오랜 수하이자 벗이자 신뢰하는 동료인 감휘가 가장 먼저 인내심을 잃었습니다. 이때 만주족의 한 부대가 도성의 서문으로 나왔습니다. 도발을 일삼던 병사들은 곧 물러나 양군의 인명 피해는 거의 없었지만, 감휘는 만주족이 아군의 방어 능력을 시험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는 적군의 저런 태도를 이유로 들어 항복을 기대하면 안된다고 주장했고, 이는 타당한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귀신이라도 쒸였는지 정성공은 남경이 싸우지 않고 항복해올것이라고 철석같이 믿었습니다. 정성공은 감휘에게 진정하라고 당부하며, 만주족의 원군이 설사 당도하여 싸움이 벌어진다 해도 아군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항복을 안한다고 쳐도 이기는건 문제가 아니라고 본것입니다.



"우리가 저들에게 물리적으로 공격을 가할수는 있지만, 그 경우 저들의 마음까지 승복시키지는 못할걸세."

 


 감휘는 너무나 어이가 없고 화가 나서 뛰쳐나오고선 울화를 내뱉었습니다.

 


 "나는 두 번 다시 오늘 일을 입에 올리지 않으리라!"

 

 

 결국 감휘가 옳았습니다. 첩자들은 이미 정성공의 부하들 속에서 암약하고 있었습니다. 남경을 지키는 낭정좌는 현지 농부로 위장시킨 첩자를 포위대의 진지로 들여보내 술과 음식을 팔았습니다. 처음에야 당연히 쫒겨났지만, 포위가 길어지면서 군기가 느슨해지자 그들은 환영을 받는 존재로 바뀌고 맙니다. 식품을 파는 그들은 그 과정속에 정성공 군사들의 상태와 군수물자 보관소의 위치등을 주위 깊게 살필 수 있었습니다.

 

 

 이 원정 당시에는 일본에 원병을 구하러 가기도 했던 주순수도 종군 했었는데, 그는 당시 정성공 군대의 상태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작은 승리에 익숙해져, 상명을 따르지 않는다."

 

 

 정성공 군대의 취약성은 곧 증명이 되었습니다. 어느날 정오, 500여명의 만주족 병사가 난데없이 기습을 가하자 넒게 진지를 펼친 정성공 군대는 적의 공격 사실도 뒤늦게 깨닫고 우왕자왕했습니다. 500여명의 만주족 부대는 철수전에 정성공 부대의 1개 포위대를 궤멸시켰으며, 그보다도 더 심한 피해는 장작더미에 불이 옮겨붙으면서 발생했습니다. 정성공은 조금 뒤로 물러났습니다.

 

 

 진정한 역습은 다음날에 일어났습니다. 전날의 수백명 단위가 아니라 수천명이 넘는 정예병이 물밑듯이 튀어나왔고, 엄청난 함성 소리와 함께 대포를 쏘아댔습니다. 넋을 놓고 있던 정성공 부대는 바다처럼 쏟아지는 대포와 불화살 세례에 기겁을 하고 맙니다.

 

 

 동시에 정성공 진지내에 암약하던 첩자들도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빈 술항하리에 폭탄이 담겨져 있다가, 가장 큰 화약고에 폭발시키자 주변 일대는 물론 인근에 정박해 있던 선박까지 날아가버렸다고 합니다. 폭발 그 자체보다도, 앞뒤에서 공격을 받고 있다고 오해가 퍼져 군대의 상황은 더 말이 아니게 되었습니다.  승세를 깨달은 만주족 부대가 전력을 다해 공격하자 정성공 부대는 질서 있게 퇴각도 못하고 강을 따라 동쪽으로 달아났습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했습니다. 감휘, 만례, 장영, 임승, 진괴, 남연, 이필, 반경종 등 숱한 명장들도 어이없이 횡사해버리고 맙니다. 남경 강변에서 만주족 부대가 건져올린 시체만 4,500개구에 이르렀으니, 건져져지 못한 시체나 강에 빠지기전에 사망한 병사들, 뿔뿔이 흩어진 병사들을 모두 합치면 피해가 어마어마 했을 것입니다.

 

 

 퇴각한 병사들은 간신히 그 날밤에 진강에 도착했습니다. 진강은 주전빈이 지키고 있었는데, 용맹한 그였지만 지난번에 화살을 5발을 맞은 탓에 후방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입니다. 정성공은 부상자들 사이에서 감휘를 찾아 나섰다가, 그가 죽었다는 소리를 듣자 정말 때늦은 탄식을 했습니다.

 

 

 "내가 그의 말만 들었어도,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것이 아닌가!"

 

 

 그러나 이미 일어났습니다. 정성공은 다른곳을 무시하고 곧장 남경으로 진격하면서, 남경에서 시간만 끌어먹는 동시에, 점령했던 도성들에서 자신의 위치를 공고히 다지지도 못했습니다. 만약 그리했다면 패배는 일시적인 후퇴에 그쳤겠지만 지금은 다 틀린 일이었습니다.

 

 

 10년의 공업이 물거품이 된 순간입니다.

 

 

 달아나야 했습니다. 10년간 모은 정성공과 명 유신들의 군자금은 이미 바닥을 보였고, 곧 만주족의 부대가 밀려올테지만 진강을 지키기는건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격론 끝에 정성공의 함대는 해안으로 나가기로 했습니다. 바다로 나가면 여전히 정씨 가문은 가장 막강한 존재였습니다.

 

 

 문제는, 양자강 유역에 이르러 새로 정성공에 합류한 세력과 동맹들이었습니다. 그들로서는 당혹스러운 일이었고, 자신들을 버린다는 소리나 진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제발 머무르라고 애원했지만, 정성공은 부하 장수들을 새로 임명하며 진강을 떠날 채비를 했습니다. 위험한 후미는 용맹한 주전빈이 자원해서 맡아 부대를 지켰습니다. 정성공과 별개로 군대를 상류까지 밀고 올라간 장황언은 난감하게 되었습니다. 그후로도 그는 싸움을 계속하다가, 부하의 배신으로 처형당합니다.

 

 

 정성공은 퇴각중에 숭명도(崇明島)를 공략하려 했으나, 이미 기운이 떨어진 정성공 부대는 별다른 힘을 내지 못했습니다. 주전빈 조차도 훗날을 기약하자고 조언하자, 자신감이 떨어진 정성공은 동의하고는 하문으로 돌아갔습니다. 북벌 싸움은 이로서 완전 종료된 것입니다.



 

 정성공은 돌아온 즉시 영력제에게 연락을 취해 연평왕의 직에서 물러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일개 무장으로 남겠다고 하면서 말입니다. 또한 순치제에는 휴전을 시작하자고 서한을 보냈습니다. 일전에 청나라 사신들을 조롱하던 그의 태도도 대패끝에는 풀이 죽은것입니다.

 

 

 북경 조정은 물론 안심했지만, 휴전을 허락하지는 않았습니다. 정성공이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고 물론 휴전 서한만 봐도 이는 거짓이었지만, 굳이 청나라 조정은 이 소문을 부인하는 조치를 취하진 않았습니다. 순치제는 황실 일족중에 한명을 "토벌대장"으로 삼았습니다. 당시 정성공은 부하들의 탈영을 막기 위해 쩔절매던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청나라는 기괴하게도 만주족 함대를 구성하여 공략을 가했지만, 물론 상대가 될리가 없었습니다. 함대는 거의 전멸했고, 정성공은 상대방의 사령관에서 아녀자들이 사용하는 손수건에 모욕적인 글을 휘갈겨 써서 보냈습니다.

 

 

 "더 이상의 싸움을 그대가 원치 않는다면, 이 손수건이 필요할지도 모르겠지."

 

 

 허세를 부리고는 있었지만, 다음에도 이런 공격이 가해진다면 또 버틸 수 있을지는 의문이었습니다. 문제가 있었는데, 만주족 정권이 몇가지 새로운 계책을 부리는것 때문이었습니다. 계획을 낸 사람은, 본래 정성공 부대의 일원이다가 적에 항복한 황오였습니다.

 

 

 순치제는 이 배신자의 말을 곱씹었습니다. 그의 계획은 여러가지가 있었습니다.

 

 

 첫번째는 정지룡의 처형입니다. 황오는 정성공이 가문의 지원을 받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지룡을 처형하여 그가 정성공이나 정씨 일족과 연계될 기회를 완전히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두번째는, 더러운 술책이었는데 정성공이 조상들의 후광을 받지 못하도록 정씨 가문의 신산을 완전히 파괴해버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순치제 역시 저급한 술책이라고 생각하긴 했으나 준비는 하고 있었습니다.

 

 

 세번째는 투항자들에 대한 보상을 제도화하는것입니다. 투항자들에게 보상을 내리는것은 기존에도 하고 있던 일이지만, 황오는 이를 제도화 하여 과정을 효율적으로 진행하자고 진언했습니다. 또한 투항자들을 적극 기용하는 문제도 말했습니다. 지금까지는 투항자들을 그들이 힘을 못쓸 위치에 배치하여 위험성을 줄였지만 이는 비효율적인 일입니다. 이를테면 시랑, 전중국 최고 수준의 해군 대장인 그가 투항한지도 몇년이 지났지만 시랑은 아무것도 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정씨가문을 함대전으로 물리칠 인물이라면 청나라 전역에서 시랑밖에 없었습니다.

 

 

 

 네번째로, 정성공은 바다에 있지만, 그 힘을 유지시켜주는것은 어디까지나 육지입니다. 비밀 동맹 세력이 해안가에서 정성공에 지원을 하고 있었고, 이를 전면 차단해야 했습니다. 황오 자신이 정성공 부대에 있기에 사정에 밝았는데, 엄벌을 각오하면서까지 정씨 상단과 교역을 하려는 밀수꾼들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이를 막는 방법은 단 한가자입니다. 해안 지역의 모든 교역은 불법이므로, 범법자들은 모두 처형하면 됩니다. 범법자들을 고발하는 자는 범법 상인의 전재산을 가지게 되고, 해안 지역에서 배란 배는 모두 불살라 버리게 했습니다.

 

 

 마지막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어마어마한 계획이었습니다. 대청제국의 황제인 순치제조차 잠깐 머뭇거릴 만할 정도로 대담한 계획이었습니다.

 

 

 전 해안의 봉쇄. 바다 전체에 둘러지는 벽.

 

 

 광저우부터 시작하여, 해안선을 따라 북경 근처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모든 해안에서 주민들을 완전히 소개시키는 방안입니다. 바다에서 50km 이르기까지 육지의 어느 누구도 거주하지 못하게 하고, 이를 어기면 극형에 처하게 됩니다. 농부와 어부들은 모두 불과 며칠 내로 고향을 떠나야 하고, 그들이 살던 집은 무자비하게 박살하여 파괴시키는것입니다. 가옥과 헛간은 불에 타고, 곡식은 한 톨도 남김없이 치워지고, 배들은 모조리 바다 속으로 가라않지는 것입니다.

 

 

 어느 지역의 주민들은 이를 심각하게 여겨지 않았고, 칙령이 전달되는 과정에서 곡해가 생긴것이라 생각했으나 곧 횃불을 들고 온 병사들을 보자 경악하고 맙니다. 그들 모두가 집 밖으로 내몰렸고, 황오의 말 한마디로 수십만이 넘는 중국인들이 눈깜짝할 사이에 유민이되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를 감시했습니다. 한가족이 굶주리는 여승에게 식사를 대접했는데, 여승은 바다 출입이 금지 된 상황에서 해초가 음식으로 나오자 금화 20냥을 주지 않으면 금지 구역에 들어간 혐의로 고발하겠다고 협박했습니다. 이런 판국이자 해안가에서 모든 주민들이 사라졌고 오직 만주족의 순찰대만이 어슬렁 거릴 뿐이었습니다.

 

 

 해금령은 단기적으로 보면 정성공 부대에는 좋은 일이었습니다. 만주족 병사들이 모든것을 잿더미로 만들기전, 정성공 부대는 해안가에 자유로이 드나들어 텅빈 마을에서 물품을 싹쓸이 해갔습니다. 이런 말 같지도 않은 조치에 격분한 해안가 주민들이 정성공 부대에 합류하는 일도 많았습니다. 허나, 시간이 흐르자 물자 공급이 끊기고 영력제와의 연락도 어려워지면서 정성공은 곧 극심한 타격을 받게 됩니다. 다만, 대만을 이용한 루트의 무역로가 살아 있었습니다.

 

 

 해안가가 모조리 봉쇄된 상황에서, 정성공은 자신이 다시 대업을 이루려면 몇년이 걸릴지 짐작도 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해야했고, 대만은 또 그 계획을 실행시켜줄만한 자원이 있었습니다. 정성공이 대만을 진지하게 생각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제 정성공은 만주족과의 반청 투쟁에서 조금 궤도가 벗어나, VOC를 상대로 대만 수복에 나서게 됩니다. 이로 인해 전중국을 발칵 뒤집었던 소동은 진정이 되었습니다. 크나큰 문제를 저지한 순치제는, 이제 자신이 해야할 역사적인 사명은 거의 다 마쳤습니다. 



 아직 중국은 소란스럽고 내정과 외정 모두 어지럽긴 하나, 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사람은, 유례없는 한 명의 소년, 새로운 제국의 황제에게 남겨진 몫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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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사탕찌개 | 작성시간 12.08.12 청나라가 보면 볼수록 무자비하기는 하지만 또 그 능력은 중국의 여러 왕조들중에서 일품이기도 하군요. 재수없게 유럽이 제일 잘나갈 시기에 걸려서 마지막에 비참하게 망해서 그렇지...
  • 작성자Raon | 작성시간 12.08.12 좋은 글 잘 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2.08.12 쿨게이의 비참한 실패군요.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2.08.13 선리플 후감상.
  • 작성자북현무진 | 작성시간 12.08.14 쿨가이도 아니고 쿨게이가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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