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중화의 황혼]중화 제국의 마지막 황혼, 강건성세의 여명(14) ─ 만주 제일의 용사

작성자신불해|작성시간12.08.14|조회수787 목록 댓글 10

 탁 트인 대지, 평평한 모래밭, 강물 위로 펼쳐진 하늘

 하루에도 천 마리가 넘는 토끼와 꿩이
 사냥꾼에 에워싸여 쫓기다
 덫에 걸리는구나

 사방을 둘러보고, 팔을 쭉 뻗어
 무늬 새겨진 활을 쉬지 않고 쏜다
 때론 왼손으로, 떄론 오른손으로

 강희제 1695년 경



 어린 소년은 초목이 움트는 것을 보고 즐겼고, 다른 성이나 외국의 꽃과 묘목을 가져와 심기를 사랑했습니다. 사냥에 나서게 되는 날, 근어시위 아수모얼건은 대제국의 황제인 소년에게,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단호하게 잘못을 지적했고, 소년은 총이나 활로 수백마리의 사슴을 사냥하면서 자신의 취미와 육체를 다듬었습니다. 좀 더 나이가 찬 미래의 일이지만, 북변에서 태어나고 자란 어느 무관은 이 황제가 사슴을 엄청나게 많이 잡자, 마치 신과 같다고 감탄했습니다.


 장성한 소년─강희제는, 씩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짐은 종종 사슴들에게 고함쳐서 그들이 덫에 걸리게 만든다. 그 놈들을 많이 죽였다고 해서 신 같은 솜씨라고까지 할 수야 있겠는가?"


 그러나 이 소년 황제에게는 한가롭게 자신의 생활을 즐길만한 여유가 있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준비도 되지 못한 8살의 나이일 뿐이지만, 거대한 대제국의 신민들이 소년 황제의 결정 한번에 태평성대를 누릴 수도, 혹은 비참한 예전으로 돌아갈 수도 있습니다. 일단 소년이 할 수 있는것은 공부하는 일 외에는 도리가 없었습니다. 아무리 배우고 배워도 이렇게 큰 나라를 통치하기는 부족합니다. 어린 나이지만, 황제 스스로가 철학자이자 나라에서 제일가는 지식의 성찰을 가지고 있지 않는다면, 이 난국을 돌파하는것이 쉬운 일은 되지 못할 것입니다. 


 효장태후


 어린 황제의 교육은 효장태후의 몫이 되었고, 당초에는 효장태후의 시녀이자 충복인 소마라고(蘇麻羅故)가 황제를 돌보고 기초적인 교육시켰습니다. 그녀는 종종 중국 사극에서 효장태후의 심복으로 묘사가 되는데, 실제로도 강희 41년인 1702년에 사망했을때, 효장태후의 능인 소서능 옆에 묻힌 것으로만 보아도 보통 관계는 아니었습니다.


 아직 순치제가 살아 있던 시절, 1659년의 어느 날, 6살 짜리 꼬마였던 히오완예이는 형인 복전, 아우인 상녕과 함께 부왕인 순치제에게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아버지라고 하여도, 평소에는 얼굴 조차 보기 힘든 황제. 순치제는 이 날 따라 그들에게 앞으로의 포부를 물었습니다. 막내 상녕은 고작 3살이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고, 형 복전은 그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현명한 왕이 되겠습니다."


 히오완예이는 씩씩하게 자신있는 말투로 말했습니다.


 "아바마마를 본받아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입니다." 


 그런 히오완예이가 이제 황제가 되었습니다. 효장태후는 강희제가 아직 황제가 되기 이전부터 그를 가르켰으며, 정치적인 계산과 수완에 뛰어났고 풍부한 식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미래의 어느날, 강희제는 어린 시절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습니다.


 "짐은 어려서 걸음마를 배우고, 말문이 트일 때까지 조모로부터 먹는 것, 걸음걸이, 말하는 습관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교육 받았다. 혼자 있을 때에도 반드시 배운 그대로 행해야 했으며, 이를 어기면 엄한 벌을 받았다."


 자연히 황제가 된 후에도 효장태후는 강희제를 보좌했습니다. 그녀는 신하들에게는 선왕으로부터 받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한마음으로 어린 황제를 보좌할 것을 당부하고, 꼬마 강희제에게는 민심을 얻어야 나라를 얻을 수 있으며, 인자하고 겸허해야 하며, 신중해야 한다는 군주로서의 도리를 가르쳤습니다. 한번은 효장태후가 강희제에게 대신들 앞에서 자신이 바라는것을 이야기 하도록 했습니다. 강희제는 매우 공손한 태도로 신하들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온 나라가 태평하고, 백성들이 편하게 사는 것뿐입니다."


 대신들을 이를 보고, 이 꼬마 황제의 영민함과 고상한 기품을 칭찬했습니다. 프랑스 출신 예수회 선교사 조아심 부베(Joachim Bouvet, 1656.7.18 ~ 1730.6.28)는 강희제의 어린 시절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비범함이 엿보였다. 그래서 나이는 어렸지만, 그의 부친은 많은 황자들 중에서 그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했다. 머지않아 이 나이 어린 황태자는 단정한 품행으로 부왕의 선택이 정확했음을 증명해 보였다.


 그렇다면 효장태후의 어린 황제의 섭정 노릇을 했느냐. 분명 그녀는 상당한 입김이 있었지만, 수렴청정을 하진 않았습니다. 자신의 수렴청정이 손자의 황권 약화로 이어질 것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는 조모를 좋아하는 강희제 본인도 똑같은 생각이었습니다. 강희제는 역사책을 보면서 공부를 하다가, 한안제(漢安帝)가 집권했을 때 태후가 수렴청정을 한것을 사관(史官)이 높이 평가한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면서 중얼거렸습니다.


 "수렴청정이 나라의 복이 아닐진대, 이를 높이 평가한 것을 보면, 한 황실의 쇠락함이 바로 여기에서 시작된것이 분명하구나."


 그렇지만 누군가는 8살 짜리를 대신해 제국의 안정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 역할은 순치제가 붕어 직전 후사를 부탁한, 네 명의 보정대신(補政大臣), 그들이 바로 선대가 말한 의무, "함께 충성하고, 생사를 같이하며, 황제를 보위하고, 붕당을 만들지 않으며, 뇌물을 받지 않는" 임무를 부여받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맹세가 늘 그렇듯이, 심각한 갈등이 생기자 물거품이 되어버렸고, 오히려 어린 황제의 앞날을 어둡게 만드는데 일조했습니다.


 이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색니는 사망했고, 수크사하와 오배가 겨루며, 알필륭이 오배와 결탁했습니다. 셋 중 가장 위험한 인물은 두말할 것도 없는 오배입니다.


 

 오배는 만주 제일의 용사(满洲第一勇士)라고 종종 일컫어졌을 정도로 기골과 위상이 장대한 인물이었습니다. 본래 네명의 보정대신 중에서 오배는 서열이 가장 낮았지만, 오만하고 야심이 많은 그는 색니가 사망한 틈을 타 곧 보정권을 장악했고, 제멋대로 자신의 세력을 형성하여 심복을 요직에 앉히고 자신의 뜻에 반대하는 사람들은 가차 없이 몰아냈습니다.


 수크사하도 결국 오배에게 이겨내지 못하고 억울한 누명을 덮어 쓰고 처형당했습니다. 위세가 그 정도니, 꼬마 황제 정도는 오배에게 있어서 한 입에 잡아먹을 수 있을만큼 가소로운 존재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강희제는 즉위 6년이 지난 1667년부터 친정(親政)에 나섰지만, 여전히 열네 살의 소년에 불과했습니다. 누르하치, 홍타이지를 따라 만주를 누비며 격동의 세월을 견딘 무장인 오배, 그는 강희제가 있는 자리에서도 아랑 곧 하지 않고 대신들을 질책하며 호통을 치거나 큰 소리로 떠들어댔습니다.


 사실 오배가 수크사하를 처형할 것을 주장했을 때에도, 강희제는 이것이 억지에 불과하다는것은 알고 있었기에 허락하지 않고 버티려 했지만, 오배가 자신의 세력을 이용해 소년 황제를 압박하자 결국 버티지 못하고 양보를 얻어낸 것입니다. 강희제 본인이나, 효장태후나 오배의 갖가지악행을 알고 있었기에 꼭 제거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황실 조정의 대부분이 오배의 세력권 안에 있었기 때문에 이 일은 쉬운것이 아닙니다. 특히 오배는 황제와 가까운 요직에 치밀한 술수를 부려 놓았는데, 자신의 조카와 심복들을 심어 놓은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동생 목리마(穆理瑪)를 양황기 만주도통에 임명해 군권을 장악하게 했고, 대학사인 반포이선(班布爾善), 이부상서 아사합(阿思哈), 공부상서 마이새(馬邇賽), 일등시위 아남달(阿南達) 등이 모두 오배와 결탁한 세력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배를 제거하는 일은 극히 신중하고 치밀하게 진행되어야 했고, 조금이라도 새어나가거나 일이 서툴렀다가는 엄청난 혼란이 초대 될 것이 분명했습니다. 강희제는 오만방자한 오배를 견제하고 악행을 막으면서, 암암리에 치명적인 일격을 준비했습니다.


 강희 5년인 1666년. 이부의 관리들이 국사를 논의하는 자리에서, 오배의 패거리인 이부상서 아사합, 시랑 태필도 등은 오배가 미리 시킨 대로 제안 했습니다.


 "각 성의 총독과 순무가 관리하는 관아에, 중앙 관리를 파견해 감시하도록 합시다."


 그 중앙 관리가 어느쪽의 편일지는 뻔한 일입니다. 이때, 강직한 성격의 이부시랑 풍부(馮簿)가 떨치고 일어나서 반대하는 발언을 하게 됩니다.


 "총독과 순무, 이들은 모두 나라의 중신인데, 중신을 믿지 못하고 관리를 보내 감시한다면, 감시하도록 파견된 관리들이 너무 강한 권세를 가지게 되는것을 모르시오?"


 "뭐가 어쩌고 어째?"


 오배의 위세를 등에 엎은 태필도는 의기양양해서 오히려 버럭 화를 내며 소매를 걷어올리고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풍부는 태연하게 대꾸했습니다.


 "대신들끼리 논의하는 자리, 반대 의견이 있는것은 당연한 일이 아닌가? 옳고 그름은 황상꼐서 가리실 일, 어찌 혼자서만 옳다고 하시오?"


 이 논의는 강희제에게도 알려졌고, 강희제가 풍부의 손을 들어줌으로서 오배의 세력은 약간이나마 기세가 꺾이게 됩니다. 다음해인 1667년. 풍부는 좌도어사로 있을 무렵, 오배가 황제에게 보낸 상소문이 내각에 내려 보내졌고 절차를 거치고 있을때 갑자기 오배가 상소문의 일부를 고치겠다고 나섰습니다. 절차 상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풍부는 반대했고, 오배는 격노해서 풍부에게 죄를 물어야 한다고 이간질했습니다. 하지만 강희제는 풍부의 행동이 옳았다며 풍부를 두둔했고, 오히려 오배에게 상소문을 쓸 때는 신중을 기하라고 따끔하게 타일렀습니다.


 바로 그해, 내굉문원시독(內宏文院侍讀) 웅사이(熊賜履)가 소위 대청회전(大淸會典)의 편찬을 주장하면서, 조정에서 행정무원칙, 직무방기, 학교해이 등이 일어나고 있다며, 특히 "행정이 자주 바뀌고 법제가 정해지지 않은" 행정무원칙을 첫 번째 문제로 지적했습니다. 그는 행정에 원칙이 없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옛 제도를 참조하고, 현실을 고려하여, 회전을 완성케 하고 천하에 반포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웅사이는 회전을 편찬함으로서 행정을 법규에 따라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 건의는 사실 오배 세력에 대한 비판의 의미입니다.


 웅사이가 말한 행정의 난맥상, 관리의 나태, 교육의 태만은 나라가 잘못되고 있다는 비판이고, 그 비판의 화살을 맞아야 할 사람은 당연히 최고 권력자인 오배입니다. 이런 사실을 인지한 오보이는 매우 화가 나서 웅사이를 처벌해야 한다고 요청했습니다.


 "망령된 말을 한 죄입니다!"


 하지만 강희제는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의아한듯, 의사 표시를 했습니다.


 "국가의 일을 진술한 것인데, 어찌 그대와 관련이 있단 말인가?"


 웅사이가 처벌을 받지 않은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강희제의 나이를 생각하면, 이게 소년 황제의 개인적인 힘이라고 보기에는 약간 머뭇거려지는 부분이 있습니다. 여기서 생각해볼것은 조정에도 반 오배 세력이 이미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배가 너무 안하무인격으로 행동하고 마구잡이로 날뛰기에, 조정 내부에서도 그를 견제하는 세력이 어느정도 만만찮게 형성 되어 있었다는 이이야기입니다.


 강희제는 조심스레 오배를 견제하면서도, 겉으로는 오배를 매우 존중하는 체했습니다. 소년 황제의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오배도 마땅한 트집을 잡기가 힘들었습니다. 오배가 수크사하를 제거한 후 강희제는 오배와 알필륭을 일등공신으로 봉하고, 얼마 후 다시 태사(太師)로 봉했으며, 반포이선과 마이색의 관직을 승격시켜 주기도 했습니다.


 한번은 오배가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며칠 동안이나 조정에 나올 생각을 안했습니다. 만주 제일의 용사라고 불릴 만큼 강건한 사람이니, 이는 무언가 부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때 누군가가 조용히 강희제에게 귓뜸을 해주었는데, 놀랄만한 내용이었습니다. 오배가 집안에서 묘한 음모를 꾸미는듯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시 강희제는 호위대를 거느리고 오배의 집을 직접 찾아갔습니다. 황제의 어가가 오배의 집 앞에 다다를 무렵, 호위병 중 한명이 이 일을 미리 알리려고 하자, 강희제는 이를 저지하고 호위병들을 이끈채 직접 오배의 침소로 쳐들어갔습니다.


 오배는 깜짝 놀랐습니다. 황제가 이렇게 찾아올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인데, 주위에 호위병들이 칼까지 들이밀고 있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게 벌벌 떨고만 있는데 강희제는 유쾌하다는듯이 껄껄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칼을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은, 우리 만주인들의 풍습이거늘 무얼 그리 놀라시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안부를 전하고 돌아왔습니다. 별 일 아닌듯이 마무리 지었지만, 슬슬 움직일 시기가 무르익었습니다. 강희제는 황궁으로 돌아오자 마자 색니의 아들, 색액도(索額圖)를 불렀습니다.


 "바둑이나 한번 둡시다."


 말은 바둑 핑계였지만, 실제로는 오배를 죽일 방안에 대한 논의입니다.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강희제의 책략은 사전준비가 아주 치밀했습니다. 강희제는 우선 자신과 나이가 비스한 청년들을 은밀히 선발해, 동작이 재빠르고 무예가 뛰어난 호위병 배당아(拜唐阿)와 함께 무예를 수련하도록 했습니다. 오배가 풀어놓은 사람들이 이들의 대련을 지켜보았지만, 단지 어린 황제가 무술을 좋아해 함께 어울려 놀뿐이라고 여겨 별다른 주의는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부대의 비밀스런 이름은 바로 '선복영' 이었고, 황제의 특별군이었습니다. 1669년 5월 16일. 이 날은 오배가 황제를 알현하기로 되어있던 날입니다. 때가 되었음을 깨달은 강희제는 선복영들을 불러 모아 큰 소리로 물었습니다.


 "너희는 나의 신하이자……친구다! 나에게 복종할 것인가, 아니면 오배에게 복종할 것인가?"


 모두 우렁차게 대답했습니다.


 "오직, 황제 폐하에게만 복종할 것입니다!"


 강희제는 그들의 말을 듣고 오배의 악행을 일일히 거론한 뒤, 구체적인 행동 계획을 알리고 호위병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했습니다. 잠시 후 오배가 입궁했습니다. 강희제가 비밀리에 신호를 보내자, 호위병들은 삽시간에 달려가 오배를 두들겨 패고 그를 포박해 옥에 가두고, 지체하지 않고 일사불란하게 오배와 결탁한 관리들을 모조리 잡아다 처단을 시작했습니다.


 강희제는 강희제대로 급하게 곧바로 20여개에 이르는 오배의 죄상을 공개하고, 오배로 인해 억울하게 옥에 갇혀 있던 사람들도 풀어 주고 복직시켰습니다. 이 일은 그야말로 순식간에 이루어졌고, 그토록 강건해보이던 오배의 세력도 순식간에 소탕이 되어버렸습니다. 17살 짜리 소년이 멋지게 일을 해치운 것입니다.


 선교사 부베는, 어린 시절의 강희제에 대해서 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비록 나이는 어렸지만, 나라를 통치하고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서 보여 준 모든 것들이, 마치 수십 년간의 통치 경험을 가진 노련한 황제와도 같았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자우림 | 작성시간 12.08.15 이건 머....먼치킨 ㄷㄷ
  • 작성자데미르 카라한 | 작성시간 12.08.15 그런 오베였지만.. 공적을 인정받아서.. 죽지는 않았다고..
  • 작성자gksmf | 작성시간 12.08.15 어릴때부터 먼치킨이였남..
  • 작성자초절세미소년*^^* | 작성시간 12.08.16 보통 저런 경우 어지간한 왕조는 단명하는데ㅡㅡ;; 왕후장상의 씨는 따로 있는게 맞네요 정말 ㅎㅎ
  • 작성자kingrapter21 | 작성시간 12.08.16 대단하다 ㄷㄷㄷ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