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폭격의 역사 (31) 독수리 깨어나다 -1- 선 라이징

작성자Venice의 선원|작성시간11.11.12|조회수628 목록 댓글 6

1941년 초 히틀러의 나치독일은 비록 영국항공전에서 영국에게 일격을 당했지만 유고슬라비아왕국과 그리스 왕국을 무력점령

 

하여 다시금 세계에 나치독일이 건재하다는것을 알리고 마침내 1941년 6월 히틀러는 꿈에도 그리던 소련침공을 실행합니다.

 

역사상 최대의 작전 바르바로사 작전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작전 상황도 독일군 뿐만아니라 다를 추축국 군대들도 이 작전에 참여했습니다-

 

소련은 기습으로 무너졌고, 초반에 어마어마한 손실을 거두게 됩니다. 이제 유럽 상황은 잠시 접고, 아시아 쪽으로 넘어가서

 

이번 연재의 주인공 미국이 제 2차대전에 참전하는 과정을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유럽에는 이탈리아가 있다면 아시아에는 일본이 있었습니다. 1800년대 말 메이지유신과 함게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근대화에

 

성공한 일본은 잇따른 전쟁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후 유일하게 열강대접을 받는 국가였습니다.

 

 

 

 

-청일전쟁, 러일전쟁의 승리로 일본은 확실히 열강의 일원으로 대접받게 됩니다-

 

러시아를 견제하려던 당시 초강대국 대영제국과 영일동맹을 맺고 있던 일본은 제 1차대전때 역시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

 

하여 독일의 중국거점인 산동반도의 칭다오를 점령하여 대륙의 교두보를 삼았습니다. 이렇게 승승장구하던 일본의 약진에

 

일본을 이용하여 러시아와 독일을 견제하던 영국과 미국의 심기를 건드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영국은 이제 극동에서의

 

러시아와 독일의 위협을 제거했으니 영일동맹의 지속성에 의구심을 품게되었고, 미국은 태평양의 패권을 노리고 있던차에

 

일본이 갑자기 경제적, 군사적으로 팽창하자 약간의 위협을 받게되었습니다. 한편 제 1차대전이 끝난 1921년 세계의 패권을

 

대영제국에게 넘겨받은 신흥패권국 미국은 비공식적으로 일본,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에 전후 세계 평화-라쓰고 미국의 패권을

 

위한-를 위한 군축회의를 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진통 끝에 영국 , 미국, 일본의 전함 비율이 5:5:3으로 결정되었고, 1902년

 

이후 계속되어오던 영일동맹도 종말을 고했습니다. 다만 이 시기에는 아직 항공모함이 제대로된 전력으로 취급받지 않았으므로

 

보조함으로 취급되어 이 회의결과에서 빠지게되었고, 이는 훗날 큰 차이로 나타났습니다.

 

한편 이 회의에서 보여진 영국과 미국의 의도에 일본은 강한 적개심을 품게되었고, 이를 굴욕적인 외교라 생각한 일본의 젊은

 

장교단은 가상의 적국을 이제 러시아가 아닌 미국으로 설정하게되는 결과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세계경제대공황이 휩쓸자 나름 아시아의 열강이었던 일본도 그 여파에서 벗어날수 없었고, 대규모 노동쟁의와 민주주의

 

투쟁이 있던 다이쇼 시대를 지나 일본도 점차 점차 군국주의의 길로 향하게됩니다.

 

 

-일본의 다이쇼 일왕의 모습 짦은 재위 기간을 가진 불쌍한 왕-

 

한편 세계대공황으로 마찬가지로 어려워진 상황을 타개하고자 미국, 영국, 일본은 1930년 다시 런던에 모여 군축을 논의했습니다.

 

이번 회의에서 영국과 미국은 다시 한번 실리를 챙겼지만 일본은 또 다시 좌절해야만 했습니다. 미국과 영국은 군축으로

 

재정적인 부담을 덜었지만 일본에서는 불만의 싹이 싹트고 있었지요. 일본의 여론은 영,미에 안좋은 감정을 보이기 시작했고,

 

제일 큰 피해를 입은 해군 내부에서는 일본 정부에 대한 불만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조약으로 그나마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해군 장교들이 이 조약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대부분 옷을 벗게 되었고, 해군의 분위기는 점차

 

광신적이고 군국주의 적인 장교들이 장악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 불만은 1932년 5.15사건으로 터지게 됩니다.

 

 

-5.15사건 당시 젊은 장교들에게 암살당한 당시 일본 수상 이누카이 츠요시-

 

일본 군부가 정치에 직접적으로 나서게 되고 그리고 치안유지법의 발효와 함께 일본의 정당정치가 종말을 고하게 됩니다. 그리고

 

군부는 세계대공황으로 어려워진 일본의 상황을 타개하고자 중국대륙과 동남아시아를 노리게되었고, 1931년 만주의 실권자

 

장작림을 제거하고 1932년 청나라의 마지막황제였던 부이를 내세워 괴뢰국 만주국을 중국 만주에 세우게됩니다. 한편 이러한

 

일련의 사건을 지켜보던 미국은 일본의 막나가는 행동을 제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먼저 장개석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국제연맹에 낸 '일본의 만주 점령 부당성'에 관해서 장개석의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결국 일본은 국제연맹을 탈퇴하면서

 

더욱더 막나가게되었죠. 그리고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건을 일으킨 일본은 대대적인 중국 침략에 나서게됩니다.

 

 

-노구교사건을 일으켜 중일전쟁을 일으킨 장본인이자, 임팔작전으로 일본군을 말아먹은 독립유공자 무다구치 렌야-

 

그리고 4년이 흐른 뒤 경제대공황에서 어느정도 수습한 미국은 일본을 더욱더 압박하기로 결정하고, 고철 수출금지, 석유 수출

 

금지령을 내립니다. 대부분의 석유를 미국과 영국에게 의존하던 일본은 이 조치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일본은 동남아의

 

석유자원을 뺏기위하여 영국과 미국을 공격하겠다는 대담한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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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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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비두우카★ | 작성시간 11.11.12 독립유공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작성자VOCALOID 時代 | 작성시간 11.11.12 근데 저 군축조약에서 항공모함도 주 전력(전함)은 아니긴 하지만, 전함과 비슷하게 건조-보유에 제한이 있지 않던가요?
  • 답댓글 작성자Venice의 선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1.12 그건 런던 조약때 다시 제약을 가하기 시작했지만 제일 처음 맺었을때 논외여서 후에 다시맺었을때 그닥 실효가 없었던걸로 압니다
  • 작성자기러기 | 작성시간 11.11.13 으엌!!..무다구치 렌야!!..ㅋㅋㅋㅋㅋㅋㅋㅋ
  • 작성자흑풍 | 작성시간 11.11.15 대한 독립의 장매물이 치워지고, 그 자리를 독립유공자가 차지하는 과정이군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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