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략 폭격의 역사 (39) 독수리 날개를 펴다 -1942년 유럽 전황-

작성자Venice의 선원|작성시간11.12.06|조회수611 목록 댓글 7

그럼 이번에는 쉬어가는 의미에서 잠시 1941년 말기부터 1942년 말까지의 근황을 살펴보도록하겠습니다. 글 제목에 적혀 있듯이

 

이 연재글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전략 폭격에 맞춰져 있습니다. 제가 가진 정보에서는 전략폭격에 걸맞는 폭격이 실시되는 시기가

 

바로 1943년부터였기때문에 1942년은 제 연재에서는 버려야하는 부분입니다. 하지만 1942년이란 해는 개인적으로 의미를 부여

 

하자면 바로 추축국의 몰락이 시작되는 해이기에 굵직 굵직한 사건부터 집고 넘어려고 합니다. 먼저 유럽 서부전선입니다.

 

1942년 1월 10일 독일은 마지막 공습을 영국 리버풀에 퍼붓습니다. -ㅅ- 리버풀에는 당시 리버풀 출생에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

 

-히틀러의 조카입니다-가 살고 있었는데 원래는 독일서 삼촌과 잘 살다가 뭔가 일이 틀어졌는지 이 사람은 영국으로 돌아갔고,

 

히틀러는 빡쳐서 어떻게든 이 조카를 죽이려고 했답니다. 그래서 이렇게 대규모 폭격도 했지만, 이 사람은 살아남아서 무려

 

1987년까지 살았고, 이 폭격 이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미 해군에서 근무 했다고 합니다.

 

 

-히틀러의 이복 동생의 아들 윌리엄 패트릭 히틀러, 나중에 히틀러라는 성은 개명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1942년 8월에는 영국군과 미국의 디에프 상륙이 실시 됩니다. 하지만 당시 독일군은 아직 건재 했기때문에 이 소규모

 

상륙은 말그대로 대 실패 했고, 아직 독일의 대서양 방벽이 튼튼하다는 것만 확인한채 막을 내립니다.

 

 

-처참한 실패 디에프 상륙작전, 이 작전 실패로 1944년을 기약하게됩니다.-

 

대서양 쪽에서는 여전히 카를 되니츠의 유보트가 어마어마한 전과를 달성하며 대서양에서의 격침수를 늘려갑니다. 이는 미국

 

해군이 독일에 선전포고 해서 영국해군과 같이 호송을 다녀도 계속되는 유보트의 공격을 막을 수 없을 수준에 이릅니다.

 

 

-대서양 수송선단의 고생은 1944년까지 이어집니다 ㅠ-

 

아 그리고 여기서 잠시 사족을 달면 당시 대서양 함대의 수송선단 호송을 담당하고 있던 해군담당자 어니스트 킹제독은 현대

 

해전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해서 유보트가 대서양에서 활개를 칠때 적절한 대처법을 숙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합니다. 먼저

 

대서양에서 항해를 할때 유보트에 발각되지 않도록 영국해군과 영국 상선 및 영국 해군이 호송하는 함대는 모든 불 빛을 끄고

 

항해했는데-마치 등화관제처럼-미 해군과 미 해군이 호송하는 함대는 마치 여기 있다는 듯 불이란 불은 다 키고 다녔다 합니다.

 

게다가 이 킹제독은 영국을 싫어해서 영국 해군 방식 안따른다며 고집을 피웠고, 일본과의 전쟁이 발발하자 당장 급한 태평양

 

전선으로 구축함들을 보내는 바람에 대서양 구축함 전력이 줄어들었으며, 거기다 얼마 없는 그 구축함들을 상선 호송이 아니라

 

병력 수송선 호송에 올인해서 병력 수송선은 한척도 격침되지 않았지만, 영국으로 가는 물자 수송선단의 피해는 엄청나게 늘어

 

났다고 합니다. 하여간 1941년에서 1944년까지 대서양에서의 항해는 위험천만했고, 이 시기에 절정에 달합니다. 다음에 살펴볼

 

전선은 이제 북아프리카 전선입니다. 북아프리카에는 그동안 이탈리아군이 삽질하고 있었지만 1941년 2월에 파견된 롬멜 장군에

 

의해 1942년 말까지 북아프리카에서는 추축군의 우세가 이어집니다. 비록 1942년 11월에 엘 알라메인에서 탈탈 털리고 영국군과

 

미군이 북아프리카에 상륙하는 토치 작전 전까지는 롬멜에 의해 북아프리카는 독일군의 땅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좀 쩔어줬던 롬멜 원수-

 

이번엔 동부 전선입니다. 1941년 6월 바르바로사 작전이 실시 된이후 1941년 12월엔 모스크바 근방까지 갔던 독일군 이었지만

 

겨울 & 히틀러의 삽질로 모스크바 점령은 실패하고 전열을 가다듬으며 동부전선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1942년 5월 2차 하라코프

 

공방전등 소련의 역습이 있었지만 여전히 전세는 독일이 잡고 있었습니다. 이 2차 하라코프 공세는 실패했고, 전열을 가다듬은

 

독일군이 다시 공세에 들어가면서 소련군이 주춤합니다. 1942년 6월 이번에는 러시아 남부의 대표적 항구도시 세바스토폴이

 

만슈타이에 의해점령됩니다. 그리고 승승장구하던 여세를 몰아 1942년 8월 독일군은 스탈린그라드를 정복합니다.

-스탈린 그라드를 지키려는 소련군 vs 압도적인 전력으로 밀어붙이려던 독일군-

 

스탈린 그라드 싸움이후로 독일군이 조금씩 밀린다고하는데 이때까지만해도 여전히 독일군은 상승세였습니다. 과연 연합국은

 

이 독일을 어떻게 무너뜨렸을까요?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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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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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11.12.07 리버풀은 제가 알기로는 당시 수송선단이 기항하는 정박지이자 영국의 대표적인 산업항구입니다.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폭격했다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 답댓글 작성자Venice의 선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2.07 물론 농담입니다 ㅋ 리버풀이 워낙 우명한 도시라 드립 한번 ㅋㅋ
  • 작성자Che_GueVaRa | 작성시간 11.12.08 1942년 전사 요약집이네요. 후후후.

    첨언.
    1. 2차하리코프 전투 이후 스탈린그라드 전투까지. --> 이 때의 소련군은 작년보다는 기민하게 후퇴해서 사상자 숫자가 작년만큼 크지는 않았습니다. 땅뎅이는 많이 내줬지만요. 뭐, 그 정도 내주는 거야 러시아 전쟁개념상 늘 있는 거죠.
    "중요한 건 싸울 병력임."

    2. 스탈린그라드 전투 --> '스탈린그라드'는 무지무지 중요한 장소죠. 볼가강이 있던 곳이죠.
    페르시아(이란) 통해 들어오는 연합국의 물자와 '아스트라한'등에서 나오는 러시아 석유가 지나가는 요충지.

    3.디에프상륙 --> 제 기억으로는 캐나다 애들이 대부분이었는데...... 미군 애들이 참여했나요? 저도 기억이??
  • 작성자신격카이사르 | 작성시간 11.12.08 DF상륙작전은 처음 듣는...-; 자세한 설명 글이 있으면 조을듯하군요
  • 답댓글 작성자Venice의 선원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1.12.08 프랑스 북부 디에프라는 도시?에 영국군 코만도스가 주력이 되어 상륙을 시도 했습니다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함께 게릴라 전을 수행하려 했다가 독일군에게 제대로 걸려서 대실패로 끝났습니다 미군은 여기서 공중지원을 담당했다고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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