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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그나라의 기억법: 카포레토

작성자bamdori|작성시간22.11.24|조회수341 목록 댓글 4

I. 킹탈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킹탈리아군”. 역덕과 밀덕들 사이에선 오합지졸의 대명사로 통용됩니다. 근데 ㄹㅇ이었구염. 아무튼 2머전은커녕 1머전 이전, 심지어 리소르지멘토 시기에도 이탈리아는 물론 유럽 전역에서 ‘이탈리아군’은 안 좋은 쪽으로 꽤 이름 높았습니다. 이탈리아 통일의 영웅 주세페 마치니가 ‘쓰읍. 우리 이탈리아인들은 마음이 너무 여리고 부드러워서 탈이야.‘라며 고민을 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여튼 1차대전 이전 이탈리아는 1866년 쿠스토차와 리사, 1887년 도갈리에의 패배에 이어, 1896년 아도와에서 개작살나는 참사를 마주하며 군사적 자신감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이는 1915년 이탈리아가 1머전에 참전하네 마네를 두고 사회 각계서 갑론을박하던 시기 더욱더 불거졌죠.

 

1915년, 이탈리아 사회와 문화는 전쟁과 ’패배‘에 대한 공포가 짙게 드리운 상태였습니다. 그런만큼 참전을 주장하는 개입주의자들의 목표 중 하나는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이탈리아를 짓누르던 패배의 공포와 군사적 열등감을 말소하는 것에 있었습니다. 하여튼 이탈리아는 1915년 4월 26일 런던 비밀조약에서 프랑스 공화국과 영국에게 이탈리아가 탐내던 “이탈리아권” 영토 병합을 보장받고, 5월 3일 게르만 족속들과 연을 끊었으며, 5월 23일 자정을 기해 오헝제국에 선전포고를 날림으로써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화덕속에 아직 반죽이 덜 된 피자를 밀어 넣었습니다. 그리고 2년 후 기어코 일이 터졌죠.

 

 

 

II. 카포레토

1티어 열강 프랑스, 영국, 독일이 프랑스 영내에서 지옥의 참호전을 치르는 동안, 우리의 2티어 열강 이탈리아 왕국과 오헝제국도 트렌티노부터 프리울리까지 알프스를 따라 형성된 이탈리아 전선에서, 모두가 등산왕이 되어 치열한 팬티레슬링을 치루었습니다. 최대의 격전지 중 하나는 지금의 슬로베니아-이탈리아 접경지인 ’이손초 강‘ 유역이었습니다. 2년간 무려 11회나 공방전이 벌어졌었죠. 그 누구도 확실하게 승기를 잡지는 못했습니다. 1917년 10월 24일 이른 새벽은 조금 달랐습니다. 톨로미노와 콘카 디 플레초의 이탈리아군 전선으로 포격과 독가스 안개가 들이닥쳤습니다. 이윽고 오헝군이나 파스타군과는 질적으로 다른, 실전으로 단련된 독일군 예거들과 돌격대대가 혼란스러운 이탈리아군 참호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일부 이탈리아군 부대는 최후의 순간까지 죽어라 버텼으나, 상당수는 초스피드로 참호를 벗어나 남쪽을 향해 내달렸습니다. 연이은 전투와 조악한 보급상태로 인해 파스타들은 싸울 의지조차 없었습니다. 전선은 삽시간에 붕괴되었고 전선의 이탈리아군은 군 규모로 모랄빵이 난 초유의 사태를 맞이했습니다. 그곳은, 카포레토였습니다.

 

본 글은 카포레토 전투의 배경과 전개 설명이 아닌,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적 아젠다로서 카포레토를 설명코자 하는 글이기에, 전투의 세부내용은 생략하도록 하겠습니다.

 

단 한번의 공세로 루이지 카펠로의 이탈리아 제2군이 완전히 무너졌습니다. 며칠 뒤에는 옆동네 제3군도 전면 후퇴를 시작했습니다. 10월 27일, 우디네에 자리한 이탈리아 육군 최고사령부도 남쪽으로 철수했습니다. 30일에는 이탈리아군 사령부는 전선의 군에게 탈리아멘토 강 너머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후퇴하던 이탈리아군은 독일-오헝군의 추격을 막기 위해 탈리아멘토 강을 건너자마자 다리를 폭파했습니다. 문제는 수만명의 시민들이 군을 따라 남쪽과 서쪽으로 피난을 가고 있던데다, 전선 동부의 이탈리아군 수 개 군단 역시 탈리아멘토 강 너머로 철수하기 위해 접근중이었다는 겁니다. 더욱더 비참한 것은 이탈리아군은 탈리아멘토 강을 따라 방어선을 구축하는데도 실패했습니다. 동맹군은 피자 반죽을 두들겨 패 여러 도하지점을 확보했고, 곧 도강에 성공하였습니다. 11월 4일 전선의 모든 부대에게 더 아래인 피아베 강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이 하달됐습니다.

 

11월 말이 돼서야 ’이탈리아 전선‘이 지도에 다시 그려졌죠. 한 달 남짓한 시간 동안 이탈리아군은 150km를 후퇴했으며, 2만 평방킬로미터의 땅을 상실했고, 제2군이 전면붕괴해 67만 병력을 상실했습니다. 28만은 포로로 붙잡혔고, 35만여 실종 및 행방불명(..), 사상자는 4만에 달했습니다. 아울러 프리울리와 베네토 지방에서 40만여명의 피난민이 발생하였죠. 장비의 손실 역시 막대했습니다. 각종 구경의 화포 3천여문 상실, 약 3천여정의 기관총 상실, 그 외에 잃은 탄약, 식량, 군복, 각종 군수품 및 의약품, 그리고 소화기의 수는 집계조차 불가능했습니다.

카포레토 전투는 이탈리아 왕국에 있어 대참사였습니다. 그러나 또한 중요한 전환점이기도 했습니다. 우선 사령관이 씹꼰대 루이지 카도르나에서 유능한 아르만도 디아츠 장군으로 교체되었습니다. 디아츠는 카도르나 시절과는 비교도 안되는 효율적인 행정, 인적관리, 훈련, 전술 체계를 도입했고, 이탈리아군의 전투능률을 향상해 피아베 강에 성공적으로 방어선을 구축해 냈습니다. 사회 각지선 애국 프로파간다가 활성화돼 이탈리아 군민의 사기를 진작시켰죠.

 

새로운 이탈리아는 1918년 6월 15일 오스트리아군이 58개 사단 90만여 병력을 동원, 피아베 강으로 대공세를 벌이며 시험에 들었습니다. 8일간의 혈전, 새로운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군을 성공적으로 막아내었습니다. 이어 10월 24일에는 반격에 나서서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라는 카운터를 날려 오헝제국의 숨통을 끊어버렸습니다. 강화협상 무렵에는 이탈리아군이 다시 탈리아멘토 강을 건너 북부로 진격하던 중이었습니다. 1915년 이탈리아를 뒤덮은 패전의 공포와는 달리, 1918년 말 이탈리아는 전쟁에서 승리했습니다. 그러나 카포레토의 상처는 피아베 강-비토리오 베네토-승전이라는 대승으로도 치유될 수 없을 만큼 이탈리아 국가 전체에 깊이 패여버렸습니다. 카포레토 전투는 “킹탈은 싸웠다 하면 진다”라는 공식에 방점을 찍은 것이나 마찬가지였거든요.

 

전후, 아니 카포레토 이후 피자집에서 제일 뜨신 화덕은 카포레토 전투 그 자체였습니다. 정계, 사회, 군부, 모든 곳에서 카포레토의 해석을 두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팽팽하게 충돌하며 상호 간 긴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우파는 카포레토를 “졸리티 정부의 중립충질의 말로“이며 민주주의 체제가 야기한 참사라 주장했습니다. 좌파는 대체적으로 참전에 반대했던 만큼, 카포레토를 어떠한 하나의 ”정치적 행동“이라 해석하였습니다. 가령 온건좌파는 이탈리아군 병사들의 집단탈영과 투항을 권력과 폭력에 반하는 ’군사 파업‘이라 칭했고, 극좌는 ’집단행동‘이라 일컬으며 체제 저항을 꿈꾸었으나 좌절된 ”실패한 혁명“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논쟁들이 있었고, 1919년 이탈리아가 마주한 국제정세와 융합되어 당대의 시대정신으로 발전했습니다.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에서 시작된, ”Vittoria Mutiliata“, 즉 ”불구의 승리“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III. 배반당한 천하

베르사유 조약은 다 된 파스타에 재를 뿌렸습니다. 이탈리아는 참전의 대가로 요구한 영토 가운데 일부만 보상받았으며, 충분한 경제적 배상도 받아내지 못했습니다. 연합국 모두 다수의 전사자를 비롯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는 보불전의 복수와 알자스-로렌을 탈환했고, 영국은 자국을 쫓아오던 독일 수상함대를 지워버리고 독일 식민지를 장악했습니다. 미국은 국제정치의 주요국으로 급부상했죠. 그러나 56만에 달하는 전사자와 100만여에 달하는 부상자, 막대한 전비지출에도 불구, 이탈리아가 받아낸 땅은 인구도, 경제적 가치도 적은 트렌티노와 프리울리의 산동네에 불과했습니다.

 

전선에서 돌아온 베테랑들은 이 광경에 분노하고 절망했습니다. 옛 친구 서방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이 이탈리아를 휩쓸었습니다. 전쟁은 이탈리아에게 영광따위 없이 상처만 남긴 것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영광의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여겨졌기에, 피아베 강과 비토리오 베네토보다 카포레토에 더욱더 정치적 무게가 얹어졌습니다. 이 시기 이탈리아에선 정치적 아젠다로서 카포레토가 ”행동“과 ”망각“ 두 갈래로 나뉘어 동시에 논해졌습니다.

 

 

”행동“이란 우리 굥통이 늘 하듯, 희생양을 찾아 비난하는 것이었습니다. 첫 움직임은 놀랍게도 대참사의 장본인인 루이지 카도르나 장군의 아가리 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카도르나는 독일군에게 한타 쳐맞고 모랄빵나 붕괴된 제2군을 가리키며 ”의지와 노오력이 부족한 겁쟁이 쉐키들“이라며 맹비난을 가했습니다. 카도르나의 이 말은 공식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다만, 군 참모부를 시작으로 순식간에 퍼져 군 내 디스전을 열어버렸습니다. 장성들은 병사들을 비난하고, 초급장교들은 장성들이 쌉꼰대라 이 난리가 났다며 상호 비방이 1922년까지 난무했습니다. 심지어는 ”니들이 프랑스인과 독일인들보다 애국심이 부족해서 그런 것이여!“라며 ”이탈리아 국민“들을 디스하는 발언도 나왔습니다. 다만 이 상호 디스전은 1922년 파시즘 정권 수립 이후 순식간에 잦아들었습니다. 무솔리니와 파시즘에게는 군부 고위층의 지지와 베테랑들의 지지 모두 필요 요소였기에 이 논의를 잠재웠습니다.

 

”망각“은 가장 쉬웠던 방법이기에, 그렇기에 정치권에서 손을 댔던 길이었습니다. 1919년 8월 보고된 ’왕립조사위원회‘의 보고서에, 당시 이탈리아 왕국 총리 프란체스코 니티는 ”비토리오 베네토가 모두 해결했다.“라 의견을 썼으며, ”승리가 모든 것을 치유했다.“라 발표하였습니다. 트라우마로 가득찼던 이탈리아에서 이 방식은 효과를 보았고, 1920년에는 카포레토의 잘잘못을 따지는 정치논의는 점차 주류 자리에서 밀려났고, 이탈리아 사회당 역시 정부를 카포레토로 비난하는 것을 그만두었습니다. 이는 베니토 무솔리니 역시 비슷했습니다. 그는 카포레토를 무슨 따로 기록되어야 할 중요한 순간이 아닌, 그저 각주 하나 달아넘기면 되는 수준인냥 말하며 그 중요성을 희석했습니다.

 

하지만 민족적 차원에서, 그리고 범국가적 차원에서 카포레토 및 전흔의 망각은 정치인들의 합의처럼 쉽사리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가령 로마 진군 전에 있던 가브리엘레 단눈치오의 피우메(리예카) 점령은 ’불구의 승리‘가 불러온 불만족을, 치유되지 못한 상처를, 조국이 응당 받았어야 할 대가를 쟁취해내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카포레토는 다시 한 번, 이러한 사상과 역사의 흐름, 정치적 필요와 맞물려 그 성격이 바뀌게 됩니다.

 

IV. 이탈리아의 골고다

오리지날 파시즘인 이탈리아 파시즘은, 정치운동으로 시작하여 1922년 무솔리니의 총리 등극 이후 이탈리아 국가의 지배적 이데올로기가 되어, 하나의 새로운 체제로서 이탈리아 사회에 스며들어갔고, 이탈리아 사회와 융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기독교죠. 파시즘은 두터운 기독교 문화 위에 구축된 이탈리아 사회에 녹아들기 위해 기독교의 여러 이미지와 사상들을 빌려왔습니다. 그리고 이는 카포레토에도 적용되었습니다.

 

기독교에 따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올라, 그곳에서 세상 만민의 대속자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사흘 뒤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갔습니다. 이탈리아는, 카포레토의 산악에서 끔찍한 고통을 겪은 후 부활하여 궁극적으로는 민족의 원쑤를 탈곡을 넘어 국가 해체를 시켜버렸습니다. 파시즘과 기독교의 메차쿠차 속에서 카포레토 전투는 빤쓰런의 치욕에서 성스러운 홀리 파스타로 이루어진 이탈리아의 골고다로 그 의미가 전환되었습니다.

 

이탈리아 역사가들은 카포레토는 단순 참패가 아니라, 이탈리아 국가의 부활 및 영생(최종 승리)로 이어지는 골고다라 주장하였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더 짧아진 전선과 훨 능률적인 지휘관으로의 교체를 통해 군사적 재정비에 성공해 피아베 강에서 카포레토의 상흔을 치유했다 했고, 정치적으로는 좌에서 우까지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 정치판을 ’조국의 승리‘라는 일념 하에 연합하도록 만들었다 했으며, 사회적으로는 수세기의 지배와 지난 세기의 군사적 패배가 남긴 오스트리아에 대한 공포감을 마침내 말소했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리고 국가파시스트당은 이탈리아 국가가 골고다를 오르던 그 순간이 바로 파시스트들이 태어난 순간이라며 신성화 했습니다.

 

파시즘 아래서 카포레토는 혁명이 되었습니다. 카포레토를 통해 이탈리아 국가는 ’약점‘들을 모조리 도려내는데 성공했고, 국민들은 비로소 애국파스타로 거듭났으며, 통일 이탈리아 역사상 최초로 국익을 위해 초당적 협력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 혁명은 1922년 10월 31일 ’로마 진군‘과 함께 완성되었습니다.

오늘날 순례자들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예수님의 골고다 언덕을 오르듯, 파시즘 시기의 이탈리아인들도 이탈리아 국가의 골고다를 올랐습니다. 1920년대 이탈리아에서 가장 활발한 산업 가운데 하나는 1머전 전적지 답사 및 순례였습니다. 전선에서 복무했던 참전용사들의 전장 순례에서 시작된 이 관광은 파시즘 정권의 전폭적인 후원을 통해 급성장을 이루었습니다. 일례로 당대 가장 인기있던 전적지인 레디풀리아 같은 경우 1920년대 중반 연간 10만여명의 방문객이 다녀갈 정도였죠. 앞서 말했듯 1머전 전적지 관광은 로마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후원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당시 파시즘 정권은 이탈리아 인구의 일부만 누릴 수 있던 문화 및 여가생활을 전국적 단위로 확대하여 여가의 파시즘화를 이룩하고자 했습니다. 이를 위해 국영 휴가제도인 ’도포라보로‘ 제도를 실시하여 급식이들, 학식이들, 파시스트 노조원들 등등 사회 각계각층의 구성원들이 영화건, 사교클럽이건, 스포츠건 문화와 여가를 ’파쇼적으로‘ 즐길 수 있게 국비를 지원했지요. 즉 전적지 관광 역시 많은 경우 이 도포라보로 제도의 지원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중앙정부와 지방정부는 특히 자라나는 파쇼새싹인 급식이들이나 학식이들을 모아 기차와 버스에 태워 선조들이 쓰러진 곳으로 견학을 보냈습니다.

 

*여가의 파쇼화는 이탈리아 파시즘의 덜떨어진 세뇌능력으로 인해 개꿀휴가의 결말을 맞이했습니다. 

카포레토가 이탈리아 국가의 골고다가 되었으니, 그에 걸맞을 물리적 상징물 역시 필요했습니다. 1938년 이탈리아 정부는 카포레토, 지금의 슬로베니아 코바리드에 이데올로기 강화 차원에서 거대한 기념물을 세웠습니다. 이는 전투에서 쓰러진 이탈리아 군인 7천명의 합장묘임과 동시에 고난과 극복의 상징물이기도 했습니다. 카포레토 기념물은 파시즘과 기독교의 메차쿠차 융합 그 자체였습니다. 곳곳에 기독교를 상징하는 십자가와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별이 함께하는 기념비가 늘어섰고, 기념물의 구조는 마치 성지의 언덕을 오르는 듯 하며 자연스레 엄숙함을 선사해주도록 건축학적으로 의도되었습니다. 파시즘 정권에 따르면 이는 ’기독교와 군사적 애국주의‘의 융합, 즉 파시스트 이탈리아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 가보고 싶은데.. 워낙 산동네 시골인데다 국경을 넘어야 해서 차 없이는 힘들겠더라고요.. 

 

 

* 첫 줄 참고: 이것은 우리 스포츠계의 카포레토다. 많은 이들이 존재하는지조차 모르는 나라인 북마케도니아에게 개박살났다.

 

시간이 흘렀습니다. 파시즘은 무너졌고, 1917년 늦가을에 벌어진 이 사건은 이탈리아인들에게 군사적 패배감을 느끼게 해주기엔 너무 오래전 일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그 누구도 카포레토의 정치적 책임을 두고 디스배틀을 벌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카포레토는 하나의 표현으로서 여전히 이탈리아서 살아 숨쉬고 있습니다. 물론 그 무게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주로 아무리 일어나도 이탈리아 국가의 존망에는 그 어떠한 영향도 끼치지 않는 스포츠 경기에서 쓰이지요. 하지만 의미는 ’충격적인 참패‘로, 원래의 그 카포레토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어떻게 보자면 이탈리아가 영원히 안고 가야만 하는 역사일지도요.

 

 

근래 카포레토에 관한 재밌는 자료들을 봤는데, 토탈앙에 소개해드리고파 한번 간략하게 정리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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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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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노스아스터 | 작성시간 22.11.24 벨기에:이탈리아처럼 '위대한 잊기'를 해야지!
  • 작성자O . K | 작성시간 22.11.24 킹탈은 왜 못싸울까?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2.11.24 카포레토는 이탈리아의 골고다로 그 의미가 전환되었군요
  • 작성자나아가는자 | 작성시간 22.11.24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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