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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머전과 킹탈리아 이야기 몇가지

작성자bamdori|작성시간23.05.14|조회수200 목록 댓글 4

최근 이것저것 공부할 것들이 있는데다 학식이 생활을 끝내기 위해 졸업논문을 끄적여야 하는 관계로 꽤나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아무래도 킹탈빠인지라 졸논 주제는 당연히 2머전 속 킹탈로 잡고 이것저것 참고자료를 뒤져본 결과, 이놈의 나라는 알던 것보다 더 꿀잼 트롤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1. 그리스 침공 이야기

 

 워낙 유명하기에 설명도 필요 없지만.. 그리스를 침공한 이탈리아군은 국경 넘자마자 뒤지게 쳐맞고 알바니아로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유일한 예외가 있었으니, 바로 우리의 킹갓 산악사단 "줄리아"였죠. 줄리아 사단은 험준한 산악지형을 혈혈단신으로 돌파, 핀두스 산의 주요 거점을 장악하는 기염을 토했습니다. 이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양측에 상당한 인상을 주었죠. 그리스군의 반응은 "아니 미친 저 지형을 돌파한다고?" 였고 이탈리아는 "오 미친 우리가 전쟁 이길 듯" 이었습니다. 하지만 잘 풀리면 파스타가 아니죠. 

 

줄리아 사단은 산악 기동전을 위해 "기책"을 내놓았는데.. 이것은 무려 '수나라 별동대' 전술이었습니다. 네, 보급대를 뒤에 떼어놓고 싸울 만큼만 짊어지고 전선을 돌파하는 거였죠. 그 결과 혼자 뚫고 나가다 포위되어 다굴빵을 쳐맞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알피니 사단은 탈파스타인 만큼 포위망을 뚫고 전선으로 되돌아가는데 성공하긴 한다만.. 

 

2. 러시아 전선 이야기 

 

 무솔리니는 낙지들과 "전우"로써 나란히 싸우고 싶다는 열망 하나만으로 3개 기동사단을 바르바로사 작전에 파병했습니다. 이 세 개 사단은 지휘관이 탈파스타인 조반니 메세 장군인 관계로 출중한 전투력을 보여주어 두체쿤이 흡족하게 만들어 주었죠. 근데 이놈의 머머리가 너무 흡족해버린 나머지, 추가로 20개 사단을 보내고자 했습니다. 이 소식에 밥먹다 체한 군부가 바짓가랑이 붙들고 설득해 7개 사단 23만으로 규모가 조정되었죠. 참고로 스탈린그라드 공방전에서 이들 중 최소 3할이 냉동파스타가 되는 대참사가 발생했습니다. 

 

3. 독고다이

 

당시 이탈리아는 군종별 협력이 일본군과 맞먹을 지경이었습니다. ㅈ본군에 대본영이 있듯 이탈리아군에도 코만도 수프레모란 총사령부가 있었으나, 협력은 개뿔 다들 따로따로 놀았죠. 심지어 킹탈의 최고지도자 머머리는 윗동네 짝부랄 상병과 달리 군내 갈등을 정치적 권위를 이용하여 조정하려는 시도도 별로 안 했습니다. 

 

당시 이탈리아군의 군종 협력이 얼마나 개판이었는지는 대공방어에 여실히 드러납니다. 육군 방공부대가 영국군 폭격기에 개같이 쳐맞는 동안 이탈리아 공군 요격기는 날아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4. 폭격 이야기

 

폭탄에 찜질당한 낙지 독일과 일본에 비해 심각하게 무시되곤 하는데, 이탈리아도 2머전 기간동안 전략폭격에 무지하게 두들겨 맞았습니다. 그리고 킹탈 아니랄까봐 여기도 이야기가 산더미였죠. 

 

i. 당시 이탈리아 도시들은 야간에 등화관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물론 등화관제의 개념을 모르던 건 아니었습니다. 킹치만 국민들은 등화관제에 협조함으로써 자신들이 전쟁상태라는 걸 구태여 체감하고 싶지 않아했으며(..) 당국의 경우 등화관제를 강제할 시 생길 공공질서 하락을 염려하여 어떠한 강압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습니다(..) 그런고로, 이탈리아 기차들은 밤에도 불 환하게 켜도 칙칙폭폭 돌아다녔으며, 알프스 넘어온 RAF 폭격기들은 폭격 대상인 토리노, 제노바, 밀라노를 힘들게 찾을 필요도 없었습니다. 

 

ii. 당시 이탈리아의 대공방어 능력은 시궁창이었습니다. 전략폭격의 시조새급인 줄리오 두에의 이론에 관심을 갖고 스페인 내전에서 전략폭격이론을 실전에서 검증해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요. 전쟁 전 이탈리아 전역에 설치된 900여 개소의 대공포대 중 약 200여개소만 멀쩡히 작동했으며, 있는 대공포도 윗동네의 8.8같은 명품은 커녕, 1차대전때 쓰던 70mm 포나 굴리던 게 이탈리아 방공군의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걸로 저 위에서 날아다니는 웰링턴 같은 뚱땡이를 맞춰 떨굴 수는 없었죠. 

 

iii. 1942년 10월 이후 연합군(특히 RAF)는 전략폭격을 도입해 이탈리아 도시들을 때려부수기 시작했습니다. 타격은 토리노에서만도 1943년이 오기도 전에 수천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전전 인구의 절반에 가까운 30만이 도시를 떠날 정도로 심각했죠. 근데 심심하면 쳐맞던 토리노, 밀라노, 제노바와 달리 로마는 단 한 번도 폭격을 당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7월 19일에 쳐맞았죠. 마침내 로마에도 폭탄이 떨어지자 토리노 시민들은 "어휴 로마놈들 꿀빨더니 꼴 좋다ㅋㅋㅋ"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iv. 이탈리아군의 방공능력이 이리도 한심한 이유로, 낙지가 북아프리카 개입을 시작하자 남이탈리아에 무려 한 개 방공군단을 전개해 방공을 전담했습니다. 

 

*참고로 로마 폭격에 미군 폭격기 500대 이상이 동원되었는데, 이탈리아 방공군의 격추 전과는 2대...

 

5. 민심 이야기

 

i. 1940년 6월 10일 이탈리아가 전쟁에 뛰어들었을 때 여론은 찬반 양쪽 다 있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생각은 '어차피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이다'와 '어쨌든 무솔리니가 승리의 길로 이끌겠지!' 였습니다. 당시 두체는 킹왕짱임페라토르파쇼였거든요.

 

ii. 사실 "전쟁" 자체에 반대하는 여론보다는 "독일과 함께하는 전쟁"에 반대하는 여론이 폭넓게 관찰되었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이탈리아의 독일에 대한 반감 때문인데, 같은 게르만 족속인 오스트리아의 오랜 지배를 받은 베네토 지방과 프리울리 지방에서 반독 정서가 크게 나타났습니다. 

 

iii. 이탈리아인들은 프랑스 덕후였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자 피에몬테와 롬바르디아에서 "아니 미친, 프랑스, 영국 민주국가를 도와 낙지랑 싸워야지!"하는 여론이 일었으며, 이후 반영 기조가 심화되자 "저 개같은 영국놈들이 프랑스를 전쟁으로 끌어들여 독일군에 짖밟히도록 만들었어!" 식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엘랑(!) 이후 메르 엘 케비르에서 로열 네이비가 프랑스 해군을 때려부수자 이탈리아내 여론은 "씨발라마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를 외쳤습니다. 

 

 

 

뭐 더 쓸 내용이 있는 듯 한데 기억이 안 나네요. 기억나면 또 쓰도록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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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노스아스터 | 작성시간 23.05.14 무솔리니:하지만 나는 프랑스랑 영국의 땅이 탐난다고!
  • 답댓글 작성자뒷산너귤 | 작성시간 23.05.14 https://www.youtube.com/watch?v=IylgC3-vQUc

    그리고 무솔리니의 공격은-
    첨부된 유튜브 동영상 동영상
  • 작성자푸른잎새 | 작성시간 23.05.14 이탈리아인 좋은 특성 추가 '탈 파스다'ㅋ
    그리고 피골이 상접해도 타지역까는 건 멈추지 않는 킹탈리아인들ㅋㅋ항상 킬포임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23.05.14 산악사단 줄리아가 산악기동전을 위해 수나라 별동대 전술을 썼군요 그나마 포위망을 뚫고 전선으로 되돌아가는데는 성공했군요
    등화관제를 안하면 그야말로 야간에 타깃이 되는데...
    또 대공방어가 안되면 독일한테 88mm 대공포를 빌려서 쓰면 안될까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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