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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s5x5의 штрафбат

[흠..인터레스팅]살아있음을 다시 느끼게 해주는 책 - 톨스토이 <부활>

작성자cjs5x5|작성시간23.04.08|조회수154 목록 댓글 0

요즘 이래저래 시간이 안나지만 그래도 짬을 내서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간만에 톨스토이가 말년에 쓴 소설 <부활>을 다시 꺼내보았습니다. 저에게는 각별한 추억이 있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의 박형규씨 번역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저도 어제의 저도 어지간히 이 책에 감명받았나 봅니다. 이런 생뚱맞은 글까지 시간을 내서 쓰고 있으니 말입니다.

 

본문 중에서도 나오는 표현이지만 살다보면 마음의 정화되는 느낌을 매우 가끔씩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은 귀족 네흘류도프와 창녀 카츄샤의 부활을 보여주며 독자에게 그 느낌을 몸으로 직접 느끼게 해줍니다. 이른바 체화라고 하는 순간을 말입니다.

 

과학과 이성의 시대속에서 톨스토이는 삶의 이유를 찾아다니다 결국 신과 사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찌보면 퇴보가 아닌가라는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명작은 인류의 모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다는 말이 있듯이, 톨스토이가 말하고자하는 신과 사랑도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그 사랑, 어쩌면 너무나도 흔해빠졌지만 애써 모두가 외면하고 있는 그 사랑을 의미합니다.

 

흔히 종교쪽에서는 '영성'이라는 단어를 많이 입에 올리곤 합니다. 영성이 깃드네, 영성이 충만하네 등등같은 표현으로요. 하지만 막상 '영성'이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을 구하고자하면 성경구절과 함께 불가해한 스무고개가 이어지곤 합니다. 저는 대학시절 의무로 들어야하는 채플시간에 이 질문에 부닺혔습니다. 그냥 아주 가벼운 학기말 과제로써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래저래 생각하다가 영성에 대해서 대충 이런식으로 써내려갔습니다. '영성이란 특정 존재의 성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영성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으나 발현시키지는 못하고 있는 기질이다. 성스러운 존재이기에 영성을 가지는 것이 아니다. 성스러운 행동을 하는 존재가 성스러운 존재로써 거듭나는 것이다. 신은 어디 위에 존재하는 그 누군가가 아니다. 우리가 모두가 곧 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톨스토이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거 같았습니다. <부활>의 일부분을 옮겨보자면 이렇습니다.

 

  "당신은 기도를 안하시오?" 모자를 바로 고쳐쓰면서 네흘류도프의 마차꾼이 물었다. "영세를 받지 않은 거요?"

  "누구에게 기도하란 거요?" 남루한 옷을 입은 노인은 말을 한마디 한마디 끊으며 대들듯이 분명하게 마부에게 말했다.

  "그야 물론 하느님에게지." 마부는 경멸하는 듯한 말투로 대꾸했다.

  "자넨 하느님이 어디 있는지 알겠군. 내게 보여줄 수 없나?"

  그의 말은 어딘지 진지하고 엄격했다. 때문에 마부는 잘못 걸렸다고 생각하고 당황하긴 했으나 그렇다고 귀를 기울이고 있는 주위 사람들 앞에서 아무 대답 없이 가만히 있다가는 망신을 당할까 봐서 아무렇지 않은 투로 재빠르게 대답했다.

  "그야 뻔하잖소. 하늘에 계시지 어디겠소."

  "그럼 자넨 하늘에 가봤나?"

  "가보지 않아도 하느님께 기도 드려야 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 아니오?"

  "어디서도 하느님을 본 사람은 한 사람도 없소. 아버지 품속에 계신 유일한 아들에게만 모습을 보여줬을 뿐이야." 노인은 엄격한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며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노인, 당신은 기독교도가 아닌 모양이야. 이교도겠지. 그렇다면 우상에게나 기도해요." 마부는 채찍 자루를 허리띠에 꽂고 곁말의 마치끈을 다시 고치며 말했다.

  누군가가 웃었따.

  "노인, 그렇다면 당신은 무엇을 믿소?" 나룻배 한 구석 짐마차 옆에 서있던 중년 남자가 물었다.

  "난 아무것도 믿지 않소. 단지 나만을 믿을 뿐이오." 노인은 분명한 말투로 단호하게 대답했다.

  "어떻게 자신만을 믿을 수 있지요?" 네흘류도프도 그들의 대화를 듣다가 물었다.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을 텐데 말입니다."

  "아니. 결코 안 그래요." 노인은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로 답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종교가 있을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노인의 말에 네흘류도프가 물었다.

  "여러 가지 신앙이 있는 건 자기를 믿을 줄 모르고 남을 믿으려 하기 때문이지. ... 영혼은 하나요. 종파는 무수하지만 나뿐만 아니라 당신에게도 저 사내에게도 영혼이 있소. 그러므로 자기의 영혼을 믿는다면 이 세상은 하나로 결합될 수가 있는 거요. 모두가 자기를 믿으면 일체가 될 수 있는 거요."

...

  "저런 늙은이와 얘기를 나누다니 나리도 꽤 획심이 많으시군요." 네흘류도프가 체격 좋은 사공들에게 팁을 주고 마차에 오르자 마부가 말했다. 저 노인은 쓰잘데 없는 부랑자일 뿐이에요."

...

"법률이라고?' 노인은 비웃듯 되풀이했다. "먼저 사람들 한테며 토지며 재산을 뺏고 거기에 항의하는 자들을 죽여놓고서는 살인하지 마라, 약탈하지 마라 하는 따위의 것이 법률이오. 그러기전에 법률을 만들어야 할 게 아니오."

...

"어쩃든 인간은 자기 의무만 행하면 돼. 남의 일에 간섭할 건 없어. 어디까지나 나는 나고 너는 너야. 누구를 벌주고 누구를 용서한다는 건 하느님의 일이지 우리의 일이 아니야." 노인이 말했다. "자기가 스스로의 상관이 된다면 상관 따위는 따로 필요 없지. 자, 어서 나가게. 가버리게!"

...

'너희는 지난 수세기동안 죄인이라고 판결된 사람들을 수천 수만 처벌했으나 과연 죄인이 사라졌던가? 오히려 처벌에 의해 더욱 타락한 죄인과 남을 재판하고 처벌하느 판사, 검사, 예심판사, 교도관 등과 같은 죄인들로 하여 더욱 늘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사회에 질서가 유지되는 것은 남을 쟆나하고 처벌하는 법적인 공인을 받고 있는 죄인들 때문이 아니라 이러한 타락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서로에게 연민과 사랑을 품고 있는 사람들 때문임을 네흘류도프는 알게 되었다.

-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위 아더 월드'나 '힐 더 월드'를 부르짖으며 지금 당장 경찰과 군대와 감옥을 없애버릴 수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에겐 그럴 힘도 없고 의지도 없습니다. 사회, 사회구조, 질서, 무엇으로 부르건 간에 우리 모두는 이미 구속된 존재니까요.

 

하지만 이런 생각도 듭니다. 우리는 어차피 떠밀려 살아가는 존재이다. 하지만 우리 무엇인가를 행할때는 우리 자신이 무엇을 하는지는 있는 그대로 볼 필요가 있다. 고통스럽지만 고통스러운게 당연하다라고 말입니다. 그걸 성찰이건, 자기반성이건, 무슨 어려운 말을 가져다 붙이건 말입니다.

 

  인생은 모순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기에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당연히 고통을 느끼기 마련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나 자신을 바라보면서 살아야 한다. 왜냐하면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존재는 인간으로써 살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게 모든 인류에게 씌워진 가시면류관이다.

  가시면류관은 조롱받던 예수가 아니라 모든 인류에게 이미 씌워져있던 것이다.

 

  <부활>을 보고나니 이런 글귀가 떠오르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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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톨스토이의 다른 작품들도 그러하듯이 <부활>에서도 1800년대 러시아 민중의 삶이 있는 그대로, 그것도 속마음까지 세미랗게 그려져 있습니다. 형편없고 비루한 거지와 죄수들에서 안락하고 화려하지만 허위와 공허에 가득찬 귀족들까지 말입니다. 특히 부활에서는 과거 러시아의 감옥생활과 러시아 정교의 모순들이 적나라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 당시에는 금서로 지정되기도 했고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러한 1800년대의 러시아 제정과 우리가 지금 살고있는 지금 한국의 사회가 겹쳐보이기도 했습니다. 물론 지금 한국의 사회는 자유롭습니다. 하지만 자유롭지 못하기도 합니다. 그 이유를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사해동포주의(Cosmopolitanism)를 사회주의(Socialism)와 혼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라고 말입니다.

 

특히 주류 개신교회가 그러합니다. 우리나라 주류 개신교회의 뿌리는 미 대륙 바이블 벨트의 근본주의가 6.25 전쟁을 전후로해서 우리나라에 유입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예수는 '남이 나를 떄리면 다른쪽 뺨도 대어라'며 사랑을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주류 개신교회와 교인들은 북한에 대해서 다른쪽 뺨을 대줄 생각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이 분들은 매주 일요일마다 교회에 모여 찬송을 하며 온 인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하지만 북한에게는 예외입니다.

 

저는 이 분들이 북한을 싫어하든 말든 상관안합니다. 저도 북한은 골치아픈 놈들이고 필요하다면 전쟁을 불사해야한다고 생각하니까요. 특히 저쪽에서 핵을 꺼낸 이상 우리도 더이상 전면전을 통한 북진통일을 논하지 않기엔 너무나도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게 저의 생각입니다. 북한은 그나마 그들을 생각해주는 사람들에게도 너무나도 안하무인으로 행동해왔습니다. 그러니 어쩔 수 없지요.

 

저의 관심사는 그 분들의 성향이 아니라, 그 분들이 가진 종교사상적인 긴장(사랑이냐 증오냐)를 어떻게 해소하고 있느냐에 호기심이 동할 뿐입니다. 특히 군인중에서 교인이 그렇게 많은것에 놀라고 있기도 하구요. 다만, 그 분들의 에너지는 불행하게도 사해동포주의를 사회주의로 낙인찍고 배척하는데 쓰이고 있는것으로 보입니다. 왜 실패한 과거의 실험을 지금와서 왜 다시 하려드느냐는 식으로 말입니다.

 

이 지점이 <부활>이 그린 정치범들의 모습과 지금 우리사회가 겹쳐보이는 밴 다이어그램으로 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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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저는 <부활>에 깊게 감명받았습니다. 그 감동을 이렇게 나마 배출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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