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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어위키 : 일제시기의 대만에서 일어난 우서사건

작성자FireEmblem12|작성시간23.08.30|조회수165 목록 댓글 0

霧社事件 - Wikipedia

 

 

우서 사건

 

 

 

 

사건의 참상 

 

 

 

우서 사건 이란, 1930년(쇼와 5년) 10월 27일에 일본 통치 시대의 타이완 타이중 노우코우군 우서(현재의 난터우 현 런아이향)의 세딕 족이 일으 켰던 항일 반란 사건 이다. 타이완 총독부에 의해 진정 되었지만, 다음 해 4월에 다른 부족이 반란에 가담 했던 부락을 습격 하여 (제2 우서 사건), 살아 남은 세딕 족은 강제 이주 되었다.  

 

사건의 원인과 배경

 

당시의 우서 

 

타이완의 일본 통치 초기에 있어선 청조 통치 시대의 아이유 제도가 답습 되어, 원주민의 격리와 억제가 계획 되었지만, 1906년에

 

사쿠마 사바타가 타이완 총독으로 취임 하자, 산림 자원 등을 요구 하여 이번 사업이 본격적으로 개시 되었다. 타이완 총독부는 

 

장기에 걸친 무력 제압 끝에 1915년 에는 전역의 원주민을 지배 하기에 이른다. 원주민에 대해서는 대량의 경관을 통한 고압적인

 

통치를 하는 한 편, 교육에 의한 동화가 진행 되어, 전통적인 문화, 관습은 금지 되었다.  

 

원주민 봉기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 것은, 우서 세디크 족 촌락의 하나 마헤보사의 리더 였던 모나 루다오의 장남, 타다오 모나가

 

1930년(쇼와 5년) 10월 7일에 일으킨 일본인 순사 구타 사건 이다. 그 날, 순사가 동료를 이 끌고 마을에서 치러 진 결혼식의 잔치

 

장을 지나 갈 무렵, 잔치에 초대 할려고 했던 타다오가 순사의 손을 끌어 당겼다. 하지만, 그의 손은 잔치를 위해 해체한 돼지의 피

 

로 더렵혀 있었기 때문에, 그 불결함에 혐오를 느껴 무심코 타다오의 손을 경봉으로 때렸다.  원주민 으로썬 술을 권하는 것은, 상

 

대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의미 였고, 그 거절은 최고의 모욕 이라고 느낀 타다오는, 이 순사를 구타 했다. 원주민 측은 이 순사 구

 

타 사건의 보복을 두려워 했는 데, 특히 타다오의 아버지 모나 루다오가 경찰의 처벌에 의해 지위를 잃을 것을 두려워 해서, 사건

 

을 획책 했다고 알려져 있다.   

 

원주민이 사건을 일으 키기 까지의 배경으로써, 대낯 부터의 차별 대우와 강제적인 노동 공출의 강요(출역), 산지 통치를 하는 경

 

찰에 대한 반감, 그리고 1900년대의 저항 하는 민족에 대해 갔던 타이완 총독부에 의한 탄압의 기억 등이 열거 되고 있다.   

 

 

경위

 

사건의 무대가 된 우서 공학교 

 

토벌 부대

 

참호로 부터 곡사 보병포로 공격을 하는 병사 

 

토벌에 참가 하는 아군 번 

 

 유골이 발굴 된 런아이 향 공소

 

1930년 (쇼와 5년) 10월 27일, 우서 세딕크 족 마헤보 사의 두목 모나 루다오를 중심으로 한 6 마을의 장정 300명 정도가, 먼저 우

 

서 각지의 재주소를 습격한 후에 우서 공학교의 운동회를 습격 했다. 당시의 공학교는 일반 시민의 일본인과 중국인(대륙으로 부

 

터의 이주자)의 가족 형제가 모였고, 부족민은 일본 옷의 일본인을 목적으로 해서 습격, 결과 일본인 132명과 일본 옷을 입은 타

 

이완인 2명 넘게 참살 되었다. 희생자는 무참히 목을 잘려 있었던 모양 이었다. 

 

더 나아가, 현지의 경찰에는 하나오카 이치로 (세디크어 다키스 노민 1908년 ~1930년)과 하나오카 지로(세디크어 다키스 나위, ?

 

년 ~1930년) 이라고 하는, 우서 세디크 족의 경찰관도 2명 있었지만, 그들은 사건 발생 후에 일본으로의 체면을 지키기 위한 아래

 

의 유서를 남기고 각각 자결 했다. 이 유서는 위조 되었다고 하는 견해와, 실은 그들이 폭동을 주모, 선동 또는 이끌었다고 하는견

 

해도 있지만, 양명이 봉기를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또 그것에 관여 한 것인지는 지금에 이르기 까지 불명 이다.. 또 하나오카 이치

 

로와 하나오카 지로 이 둘은 혈연 관계가 아니다.    

 

봉기의 연락을 받은 주류 일본군과 경찰은 무력에 의한 진압을 개시 했다. 일본측은 2일 후의 10월 29일 에는 빠르게도 우서를 탈

 

환 했다. 우서 세딕크 족 측은 산에 숨어 들어서, 우서 습격 때의 경찰 들로 부터 뺏은 무기 탄약을 사용 해서 저항 했다. 11월1일

 

의 전투에는 봉기 군 측은 일본 측에 저항 했지만, 지휘를 맡았던 모나의 차남 밧사오가 사망. 11월 초에는 모나 루다오가 실종, 일

 

본 측은 친일파 세디크족과 주변의 제번 부족(아군 번 이라고 불렸다.)을 동원 하여, 11월4일 까지의 봉기 측 부족의 부락을 제압

 

했다. 모나의 실종 후는 장남 타다오 모나가 봉기 세력을 전투를 지휘 했지만, 12월 8일에 타다오는 자살 했다. 12월 중의 진압군

 

은 현재의 치안을 완전히 회복 하여, 전투는 종결 했다. 일본측은 대포와 기관총, 항공기 등의 병기를 투입 하여, 드디어 봉기군을

 

진압 했다. 독가스 탄이 사용 되었다고 하는 문헌이 있지만, 제설이 많지 않다. (후술)

 

아군 번의 전투원 들에 대해서는 봉기군의 수급과 바꾸어서 일본 측으로 부터 포상금이 지금 되었다. 이 조치는 일본 통치 하에서

 

금지 되어 있던 수급 사냥 (출차)를 허가 할 정도 였으며, 포상금의 대상은 적번의 장정 뿐만 아니라, 일반 시민 까지 포함 되었다. 

 

이 조치는 원주민 부족간 뿐만 아니라 동족 세디크 사이에의 처참한 내분도 조장 하여, 후술의 제2 우서 사건의 발단으로 되었다

 

고 한다. 

 

전투 중에, 700명 정도의 봉기군이 사망 한 것과 자살, 500명 정도가 투항 했다. 특히 모나의 마헤보사 에서는 장정의 아내가 전투

 

중에 전원 자살 하는 사태가 되었다. 한 편, 진압 측의 전사자는 일본군 22명, 경찰관 6명, 아군 번 21명 이었다.  

 

소탕전 에서 전사 한 일본군인 아군 번 병사는 야스쿠니 신사에 모셔져 있다.

 

다음 1931년(쇼와 6년) 1월, 타이완 총독 이시즈카 에이조, 총무장관 히토미 지로, 경무국장 이시이 타모츠, 타이중 주지사 미즈

 

코시 코우이치의 책임을 물어 사임 했다. 

 

독 가스 사용의 유무

 

나카가와(1980) 에서는, 비란성 독가스 병기(루이 사이트)를 투입 했다고 한다. 또 타이완 교과서 에서는, 진압을 할 때에 치사성

 

의 화학 병기도 준비 했다고 쓰여 있다. 그 근거 로는, 1930년 11월 3일에 타이완 군 사령관이 육군 대신 앞으로 "병기 송부에 관

 

한 건" 으로써 " 반도의 대피 구역은 단애를 잇는 삼림 지역이 되므로, 비란성 투하탄 또는 산 포탄을 사용 해야 하는 급한 상황 이

 

니 교부를 희망 한다" 라고 타전한 기록에 의한 것이다. 

 

한 편, 하루야마 메이데츠(2002) 에서는, 11월 3일의 타전에 대해서, 11월 5일의 육군성은 대외적으로 그 외의 다른 관계상 전의

 

할 수 없다고 하는 답변이 있고, 타이완 군은 특수탄(시안화 가스와 최루성 가스를 발생 시킨 갑삼탄)의 시작 3발을 11월 8일에,

 

산포용 최루탄(미도리, 갑일탄)수백발을 11월 18일에 사용 했다고 기록 하고 있다. "일본 통치하에 의한 타이완 민족 운동사" 에

 

서는 일본군은 최루 가스는 사용 했지만, 독가스는 일본군 에게도 피해가 갈 우려가 있으므로 사용 하지 않았다. 라고 한다. "도설

 

타이완의 역사" 118항 에서는, 독가스 사용의 유무에 대해서는 지금에 이르기 까지 제대로 된 게 없다고 한다.  

 

 

 

제2 우서 사건과 카와나카지마 전이

 

 

수급을 사냥 당한 세디크 족 보호번과, 수급을 사냥한 타우츠아사. 경찰관의 모습도 보인다. 

 

1931년 (쇼와 6년) 4월 25일, 봉기에 참여한 후에 투항한 우서 세디크족 생존자(보호번으로 불렸다)를 타우츠아사(타우츠아사는

 

세디크족과 대립 하였고, 아군 번 으로써 일본에 협력 했다)가 습격 하여, 216명이 살해 되어, 생존자는 298명이 되었다. 습격 측

 

인 타우츠아 사의 사자는 1명 이었다. 이것을 제2 우서 사건 이라고 한다. 

 

우서 사건의 뒷처리로 경찰이 아군 번으로 부터 총기를 회수 하기 직전의 일이었지만, 당시의 경찰관 들로 부터, 경찰이 타우츠아

 

사에 습격을 사주 했다고 하는 증언이 있었다. 타우츠아 사 에게 처벌은 없어서, 반대로 봉기 부족의 토지를 부여 하는 것이 되었

 

다. 

 

1931년 (쇼와 6년) 5월 6일, 최종 적으로 생존 한 세디크 족 보호번 282명은 북항 타니나카 유역의 카와나카 시마(현재의 칭리우

 

부락) 으로 불렸던 지역에 강제 이주 되었다. 여기에서 생존자들 가족은 경찰로 부터 지도 아래에 생활 했다. 강제 이주 후도 봉기

 

참가자 에게 경찰의 조사와 투옥 등 책임 추궁은 이어 졌다. 10월에는 귀순식과 이름을 붙여서 주민을 모아서, 사건 관계자 라고

 

인정 한 23명을 체포. 반란에 참여 하지 않은 우서 세대크 족 각 사에 대해서도 "반란 협력자" 라고 하여 투옥 된 예도 있다. 

 

이렇게 최종적으로 봉기 유책자 로써 38명이 체포 투옥 되었다. 당초 경찰은 이것들을 독살에 의한 처형을 할려고 한 것이 담당

 

의사로 부터 독약 주사를 거부 되었다. 38명은 유치 처분이 되었지만, 도망을 계획 하고 살해 된 1명 외에 전원이 1932년(쇼와 7

 

년) 3월 까지 유치 중에 옥사 했다. 

 

카와나카 시마로 이주자 에게는 당국으로 부터 원조가 있었던 것으로, 노동력 부족과 말라리아로 고통 받아서, 이주 한 후 1년이

 

되자 주민은 210명 까지 줄어서, 2년 후 에는 인구가 3분의 2 까지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후는 다시 회복 되었다. 

 

영향

 

사건 전 부터 우서는 이번 정책의 선진 지역 이었다. 한 때 수급 사냥을 두려워 한 세디크 족으로 부터 습격 사건(번해 라고 불렸

 

다.)은 1929년(쇼와 4년) 에는 연간 사상자가 5명 까지 줄어서, 아직 교육도 보급이 진행 되었다. 하지만, 사건은 통치 정책의 성공

 

을 믿고 있었던 타이완 총독부를 진감 시키기엔 충분한 것이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대해 저항을 하고 있던 타이완 민중당은 사건을 계기로, 이번 정책의 개선과 경찰 정치의 개혁을 외쳤

 

다. 좌파 운동을 전개 하고 있던 타이완 공산당도 당국을 비판 했지만, 당시의 타이완 한족 주민측은 우서 사건 그 자체에는 관여

 

하지 않았다고 알려져 있다. 전국 대중당의 중의원 의원 이었던 카와카미 죠타로와 코노 미츠는 방대 하여 사건을 조사 하여,

 

1931년(쇼와 6년) 6월에 전국 대중당은 제국 의회 에서 당국의 대응을 비판 했다. 쇼와 천황 까지도 "사건의 근본 에는 원주민에

 

대한 모욕이 있다" 라고 얘기 했다. 

 

타이완 총독은 사건 후, 원주민에 대한 정책의 방침을 수정 해 나갔다. 원주민에 대한 동화 교육과 동시에, 적농 지구의 정주화와

 

쌀 생산의 보급이 시험 되어, 성과를 냈다. 우서 사건의 생존자가 이주 한 카와나카 시마와, 우서 에서 댐 건설을 위해 쫓겨난 사람

 

들이 이주 한 나카하라(카와나가 시마의 인접)은, 벼농사 적지 였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농업 생산성이 향상 되어, 주민들의 생활

 

을 이전 보다 풍족 해 졌다. 

 

또, 천황과 제국에 대한 충성을 나타낸 사람은 일본인과 같이 현장을 받아서, 태평양 전쟁(대동아 전쟁) 때 타카사고 의용대 에는

 

스스로가 지원 해서 전지로 간 원주민이 많이 생존 했다. 일설에 의하면 우서 사건 에서 산악전 에서 세디크 족이 엄청나게 강했

 

기 때문에 군부가 타카사고 의용대의 창설을 착상 했다고 일컬어 진다. 이러한 사례에는 영화 사욘의 종 에도 묘사 되어 황민화

 

교육의 성과 로써 불려 졌다. 

 

평가

 

당시의 일본 사회에 있어서는 타이완 원주민의 존재 자체가 숙지 되지 않았고, 잡지 등에 흥미 위주로 그 풍습 등이 그려질 정도

 

였다. 우서 사건은 타이완 총독부에 대해서는 강한 충격을 줘서, 원주민 통치의 발본적인 개혁을 앞 당기게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후, 일본과 바 꿔서 중국 국민당이 타이완을 통치 하게 되자 항일 교육이 행해 지게 되었다. 그 때문에, 타이완 에

 

서는 우서 사건은 일본의 압정에 대한 영웅적인 저항 운동 으로써 높은 평가 되게 되어, 봉기의 지도자 들은 "항일 영웅"으로 칭해

 

지게 되었다. 우서에 있던 일본인의 순난 기념비는 파괴 되어, 봉기의 참가자 들을 기리는 비석이 세워 졌다. 

 

우서 에서는 매년, 우서 사건의 유족들이 참가 하여, 봉기 측 부족의 희생자를 추모 하는 "추사제전"이 개최 되고 있다.

 

1990년대 이후, 민주화의 과정 중에서 타이완 사에서 재인식이 붐이 되어 원주민 문화의 재평가가 이뤄 지게 되니, 이번 에는 우

 

서 사건은 "원주민족의 정체성을 건 싸움" 이라고 하는 위치가 붙게 되었다. 

 

위령 및 현장

 

무명 영웅의 묘(앞)과 모나 루다오 열사의 묘(안쪽)

 

우서 사건 원주민 항일 군상

 

1932년에 일본인 희생자 추모비 "우서 사건 순난 순직자의 묘"가 설치 되었지만, 일본 과의 국교 단절에 격해진 외성인에 의해

 

1972년에 파괴 되었다. 

 

일본 통치 종료 후인 1953년, 방공호 건설이 이 루어 졌을 때 구 주재소 우서 분실의 철거 부지로 부터 30체의 백골 사체가 발견

 

되었다. 우서 사건 당시의 당사자 회상록 에는, 이 시체는 일본 측이 불러서 응하여 투옥 된 봉기 부족이 처형 되었다고 해서, 국민

 

정부는 "무명 영웅의 묘"에 유골을 합장 했다. 이것이 계기 중 하나가 되어, "우서 산포 항일 기의의 기념비"가 설립 되었다. 

 

1973년에 모나 루다오의 유골이 타이완 대학의 표본실로 부터 돌아 와서, 국민 정부는 "무명 영웅의 묘"에 이은 "모나 루다오 열

 

사의 묘"라고 만들어져, 그곳에 유골을 묻었다. 

 

1997년 에는 통일 기업이 500만 대만 달러를 투자 하여 모나 루다오 상을 봉기에 앞장 선 사람들의 군상을 기증 하여, 현재 에는

 

사진 촬영 스팟으로 되었다. 

 

관련 작품

 

1941년 소설 나카무라 지헤이 우의 번사 (타이완 소설집)

 

1989年10月 소설 니시무라 보우 이제 날이 저물었다. 1990年

 

만화 1990년 치우 루오 롱 우서 사건 

 

 2011년 타이완 영화 세디크 바레(레인보우 워리어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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