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nhk.or.jp/gendai/comment/0029/topic083.html
여군을 모집 하게 되었습니다
전 여자 통신대원 스가와라 시게코 씨
전 여자 통신대원 중 한 명이, 지금도 센다이시 에서 살고 있습니다
스가와라 시게코 씨, 99세. 이제 까지의 얘기 하지 않았던 여자 통신대의 일과에 대해서, 처음으로 취재에 응해 줬다.
센다이 시내의 양품점의 딸 이었던 스가와라 씨는 여학교를 졸업 후, 가업을 돕고 있었다. 전쟁이 시작 되자 미혼의 여성 에게도 노동 봉사가 요구 되게 되어서, 스가와라 씨는 가끔 여군의 수험을 권유 받았다고 술회 한다.
스가와라 시게코 씨
그 때 집은 양품점을 하고 있어서, 거기에서 점원을 하고 있었 습니다. 그러자 전쟁이 시작 되어서 게으름 피우는 것은 안 된다
라고. 남성 모두 군대로 갔으니까, 여자가 집에 있는 건 안 된다고. 그래서, 혼자서 직업 안정소에 가서 뭐가 좋은 일이 없는 지
생각 해서 물었죠. 그러자 때 마침 잘 왔군요 라고..
"지금, 여군을 모집 하게 되어서, 입대 해 보지 않겠습니까? 라고 들어서, 엥!? 이라고 반응 했죠.."
당시, 스가와라 씨 주변에는 동년대의 미혼 여성은 군수 공장 에서 탄피 만들기 등의 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 한 일과 비
교 해서, 군대 안에 들어 가는 일을 하는 여군은 매력 적으로 비쳤다고 한다.
스가와라 씨는 1943년(쇼와 18년)1월, 19세의 나이로 여자 통신대의 시험을 수험. 면접 시험 에서 "나라를 위해서 일 하고 싶
다"라고 제대로 말 한것을 지금도 기억 하고 있다.
스가와라 씨
"오라버니가 출정 했을 때 "몸, 조심해" 라고 말하자 "그런 건 말할 것도 없이, 남자는 모두 나라를 위해 죽게 되어 있다" 라고
말했었죠. 모든 남자들은 군대에 가서 전사 한다고 들었으니, 여자 통신대 라고 하는 곳에 들어 가면 "여군" 이니까 나라를 위
해 뭐라도 해야 한다고(저 자신) 생각을 했었죠"
육군 여자 통신대의 제복을 입고 있는 스가하라 씨
사전에 시험은 고배율 이었다고 들었던 스가하라 씨는 합격. 그 해 2월에 상경 해서, 도쿄의 동부군에 만들어 진 여자 통신대의
일원이 되었다.
항공 부대의 부족을 채우기 위해 여성을 활용
동부군 관계자의 수기 등에 의하면, 여자 통신부대가 창설 된 것은 개전으로 부터 1년이 지날 무렵이었던 1942년(쇼와 17년)12
월 1일
이번 해의 4월 18일, 진주만 공격의 4개월 후, 일본 본토는 처음으로 미군에 의한 공습을 받았다. 도쿄, 나고야, 고베 등이 폭격
되어 수백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하는 툴리틀 공습. 일본 에게 있어서 큰 충격 이었다.
그 이후, 본토의 방공 태세의 정비가 급무가 되어서, 항공을 담당 하는 부대의 증원이 필요 하게 되었다. 개전에 의해 급격 하게
남성의 동원이 되었던 시기 이기도 해서, 그 부족을 채 우기 위해 여성을 활용 하기에 이르렀다고 보고 있다.
육군 여자 통신대의 모집 광고(도쿄 일일 신문/ 1942년(쇼와 17년)10월 27일)
당시, 신문에 게재 된 모집 광고에 의하면, 대상은 17세 부터 25세 까지의 독신 여성. (실제로는 17세를 채 우지 않고 입대한 사
람이 있었다는 것이 그 후의 조사 에서 알게 된다) 급여는 월 57엔 이상. 당시의 육군 하사의 약 두배 액수로 후대 했다.
제복과 제모, 구두도 지급 되었다. 스가하라 씨에 의하면 양식의 제복 모습은 젊은 여성들의 동경 이었다고 한다.
여자 통신대는 도쿄, 오사카, 나고야, 후쿠오카 삿포로, 히로시마, 센다이, 일본의 통치 하에 있던 서울 에서 조직 되어, 뤼순에
있었던 것도 알고 있다. 각 사령부를 포함 하니, 대체로 3000명 정도의 여성이 일했다고 하는 추계도 있지만, 그 전모는 아직도
밝혀져 있지 않다.
남성과 대등 하게 일 하고 싶다.
여자 통신대원 중에는, 남성과 대등 하게 일 하고 싶어서 입대를 희망한 여성도 있다.
도쿄 도에 살고 있는 모리타 마사코 씨, 95세. 당시의 일을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 이라고 말 하면서도, 실태를 알았으면 해서 취재에 응해 줬다
남성과 대등 하게 일하는 것을 희망 했던 모리타 마사코 씨
모리타 씨는 어렸을 때는 남자와 칼싸움 놀이를 해서 놀았을 정도로, 활발한 성격 이었다고 한다. 의사와 약제사가 되고 싶었다
는 꿈을 안으면서 여자 학교에 다녔던 14세 때 전쟁이 일어나, 4년생(16세)가 되자, 군수 공장 에서 비행기의 나사를 옮기는 일
과, 모포를 만드는 일등이 부여 되었다.
공부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나날 중, 아버지로 부터 여군에 대한 얘기를 듣고, 곧 바로 응모를 희망 했다고 한다.
모리타 마사코 씨
"(아버지가) 여군이 있다고 한 것을 식사 때 들었죠. 그런 분들이 있어서, 제 차례라 생각 해서 반드시 하고 싶다고.. 간접적인
일을 하는 것 보다도, 직접 도움이 되고 싶다고. 그 때는, 모두 군국 소녀로 교육 되어 있어서, 보다 철저 하게 애국심을 키웠습
니다. 그래서 자연히 그러한 분위기가 되었지요
전쟁과 군대가 어떤 것 인지 전혀 미지의 세계 였던 터라, 이제 부터 천천히 어떤 생활이 될 거 라는 것도 깊게 생각 하지 않았
습니다"
모리타 씨는 16세에 응모 해서 시험에 합격. 4년생의 도중에 입대 했다. 남성과 대등 하게 일 하고 싶다고 하는 생각도 있었다
고 되 돌아 봤다.
여자 통신대의 제복을 입은 모리타 씨
후지타 마사코 씨
"뭔가에 덧 붙일때 여자 주제에 라는 말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여자 주제에 오빠 에게 대드는 거 아니야" 라고 들었으니까요. 여자 답게 있을 수 없었죠. 반감을 가지게 됩니다.
제가 여자로 태어난 게 아니라고 어머니 에게 반발을 했습니다. (학교 에서도)여자는 가정에 들어 가서, 아이를 키 우는 거라고, 그런 교육 이었습니다만, 그것에 대해서 반발 하는 성격 이었죠"
여성들이 담당 하는 적기의 정보 처리
통신 업무를 하는 여자 통신대( 사진 제공 : 옛 대원의 유족 야마구치 마사카즈 씨)
여자 통신대는 도쿄 에서는, 시험에 합격 한 여성들의 훈련 기간을 거쳐서, 1943년 4월 부터 본격 적으로 시동 했다.
그들 에게 내려진 임무는 각지로 부터 사령부에 모이는 적기의 정보를 신속 하고 정확 하게 처리 하는 것 이었다. 그 정보는 장교들이 작전을 판단 할 때 근거라 되는 것으로, 지극히 중요한 임무 였다.
센다이 에서 상경한 여자 통신대에 입대한 스가와라 씨는 당시, 황거 근처인 타케바시에 있던 동부 사령부에 세워 진 정보실에서 근무. 거기에는 50개 정도의 정보대가 늘어 서 있었고, 각 감시대로 부터 적기의 정보가 전화로 전해 졌다고 한다.
여자 통신 대원들은 연락이 들어 오면 빨리 정보대에 입력. 정보대는 참모들이 있는 지하의 작전실에 있는 정보반에 연결 되어, 거기 에서 정보가 표시 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안에는 전파 경계 기밀 정보로 불리는 감시 레이더가 잡은 항공기의 정보를 처리 하는 대원도 있었다.
스가와라 씨는 치바의 타테야마에 있는 감시대로 부터 받은 적기의 정보를 필사적으로 받아서, 정보대에 입력 했다.
스가와라 씨
"감시대로 부터 전화가 들어 옵니다. 그것을 지금의 컴퓨터 같은 기계에, 남쪽 방향에서 라고 하는 남을 누르고, 다음은 적기가 몇 대 정도 라는 걸 누르는 거죠. 그 외의 것은 아무것도 생각 하지 않죠. 전화로 들어 온 정보를 어떻게 해서든 입력할 뿐. 그것이 작전실로 들어 가서, 일본의 군대를 움직이는 것이니까요. 정말 힘들었죠. 어쨌든 시간 관념이 가장 엄격 했으니까요, (정보가)들어오면 바로 들은 부분을 타다닥 누르지 않으면 안 되는 거였죠"
"남성과 대등 하게 일 하고 싶다"도 입대 한 모리타 씨는 그 작전실 에서 근무 했다. 모르스 부호로 보내 온 정보를 본문에 정리해서, 참모들 에게 건네는 일 이었다.
모리타 마사코 씨
"어디서 부터인지 통신이 지지직, 쿵쿵. 5명 정도가 옆 방에서 그것을 듣습니다. 어느 방면에서 몇 기의 비행기가 들어 오는 지의 정보가 여러 대의 전신 에서 들어 오는 것이죠. 암호 정도 이잖아요, 공습 경보 라면 쿠하 라던다(약호로)전부 두 글자로 들어 갑니다. 그것을 본문에 고쳐서, 짚 종이에 잡서 정도지만, 큰 글자로 쓴 것을 던지듯이 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 한 정보를 바탕으로 참모들은 고사포 부대에 사격 준비를 지령을 하고, 방공 전투기의 발진과 공중 대기 위치를 지령 하고, 경계 정보나 공습 정보를 발령을 판단 해 오기도 했다.
사령부는 여자 통신대가 없었다면, 방공 작전이 세 울수 없는 것이 실정 이었다.
가혹한 근무, 신체 검사.. 여성들의 힘든 군대 생활
여자 통신대의 임무는 24시간 체재. 하루를 여섯 시간 정도인 4교대로 돌렸다. 야근 등 불규칙한 근무로 몸을 혹하 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근무중의 긴장감으로 신경을 상했다고 하는 스가와라 씨는 증언 한다.
스가와라 씨
"(여자 통신대원이 일을 한다)뒤에 전부 높은 장교들이 서 있으니까요. 틀린다면, 벌, 벌, 벌을 서게 되니까요. 화장실 청소 라던 가, 10분간 일어서지 못 하게 하던가 말이죠. 정말로 저는 신경을 썼거든요. 몸이 나 빠져서 그만두는 사람도 나 왔을 정도 였으니까요. 마음이 아프다, 라고 하는 말을 하면서 말이죠
가혹한 근무를 견뎌내는 강한 병사를 원했던 실태도 보이기 시작 했다.
남성 병사 끼리의 건강 관리가 실시 되었다. 매월, 신체 검사가 실시 되어, 몸 상태를 자세 하게 진찰 하러 온 것을 스가와라 씨는 특히 선명 하게 기억 하고 있었다. 식사를 남긴 대원은 그 양 까지 조사 해서, 군의 에게 불려 져 가는 경우도 있었다.
스가와라 씨
"눈, 귀, 이, 전부 했죠. 몸이 있으니(나쁘 게 되면)일을 계속 할 수 없으니까요. 그러니까 신체 검사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되었죠. 몇월 몇일은 어느 검사의 날 이라고 하면, 거기에 가 도록 해서 했었으니까요. 전 심하다고 생각 하지 못 한채, 그것이 당연 하다고 생각 했었죠. 역시 나라를 위해 왔기 때문 이었으니까요. 몸이 약하게 되어서 점점 나빠 진다고 하면, 넌 그만 둬 라고 들으니까...."
취재중, 여자 통신대 에서 배웠던 경례 자세를 보여 주는 스가와라 씨
근무 시간 외에도 엄격한 규율을 원했다. 영외 에서 장교와 만날 때는 반드시 경례를 했어야 했다. 기밀 정보를 다 뤘기에, 군에서 업무의 내용은 가족 에게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다. 또 여자 통신대와 남성 군인과의 연애는 엄격히 금지 되었다.
스가와라 시게코 씨
"여자 통신대 중에서는, 장교와 사 귀어서, 그것이 발각 되어서 그만 두는 사람이 있었어요. 전쟁 중 이니까, 남성 쪽은 멀리 보내어 져서, 여성은 그만 두게 되었지요. 엄격 했었거든요, 정말로.
일로 통신을 했을 때 뒤에서 장교가 서 있었어요. 그렇게 하니, 역시, 여성도 좋은 사람 이구나 라고 생각 하게 되네요. 그렇게 하자 상대는 말이죠,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죠. 그런 걸 누가 보게 되면, 알려지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만 두게 했죠"
"여자는 가정" 사회의 가치관 사이에서 남성 병사와 똑 같은 힘든 근무를 해 왔던 여자 통신대 였지만, 그 정식적인 신분은 군인이 아니었다. 군 에게 고용 된 민간인, 군속 이라고 하는 입장 이었다.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 하는 여자 통신대(사진 제공 : 옛 대원 유족 야마구치 마사카즈)
여성을 군인 으로써 동원 하는 것에 대해서 논의는 있었지만, 국회 에서는 반대 의견이 나타 낸 것으로 밝혀 졌다.
여자 통신대가 발족 한 지 10개월 정도 지난 1943년 10월, 중의원 예산 위원회 에서는 여자의 동원을 더 강화 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 왔지만, 내각 총리 대신 겸 육군 대신 도죠 히데키는 답변으로 그것을 부정 했다.
장래는 어찌 되었든, 지금은 여자를 징용 하는 의견은 없습니다(중략)
여자의 징용 이라고 하는 것은 중대한 것이 된다고 생각 하게 됩니다.
꼭 유럽의 지금 얘기 처럼, 영국이 이렇게 하면, 미국이 이렇게 하면, 이런 것에 편승 한다면 즉 일본의 가족 제도의 파괴로 됩니다..
(1943년 10월 27일 제 83회 제국 의회 중의원 예산 위원 회의록 으로 부터)
전후 정리한 자료*에도, 전쟁 말기에 인적 자원 핍박의 타개책 으로써, 여자를 채용 해야 한다는 논의가 일어 났지만, 여성을 둘러 싼 국민 습관 등의 문제로 부터 맹렬한 반대가 일어 나서, 결정에 이르지 못 했다, 라고 했다고 기록 되어 있다.(참고 :쇼와 12~20 지나 사변 대동아 전쟁간 동원 개사)
여성이 군인 으로써 동원 되지 않았던 배경에, "여성은 가정" 이라고 하는 사회의 근간 이었던 가족관에 있다고 파악 되어 진다.
하지만, 현장 에서는 여군이 없으면 일이 안 되는 상황이 이어 졌다. 현실과 사회의 가치관에 큰 괴리가 생긴 채로, 군은 여성의 군인 으로써 동원 하는 것에 부정적인 입장을 이어 가는 한편, 동부군 여자 통신대의 모집은 3년 사이에 15차 까지 다뤘다.
여자 통신대는 군속 으로써 계속 일 했다.
이런 와 중에, 실제로는 가혹한 근무로 몸을 망치거나, 결혼이 정해지거나 해서, 부대를 떠 나는 여성도 많았을 것이다.
스가와라 씨도 2년간 근무 한 중에, 센다이로 돌아 가기로 했다.
스가와라 시게코 씨
"2년이 지나서 2월에 아버지가 마중 나왔습니다. 오빠가 23세에 북 지나(중국 북부)에서 전사 해서, 이번엔, 딸 까지 그렇게 되면 안 되었지요. 2년 만에 관 두게 해서, 센다이로 돌아 갔습니다. 그 해 4월에 결혼 했습니다. 어쨌든 부모 끼리가 정해 버렸죠"
격해 지는 공습 여자 통신 대원은 전황이 힘 들어 지는 본토의 공습이 격해지자, 여자 통신대가 근무 하는 현장은 일변 해 버렸다.
스가와라 씨 처럼 부모가 걱정 해서 고향으로 돌아 오는 대원도 있었지만, 모리타 씨는 긴장감이 높아 지는 중에 임무에 계속 임했다.
모리타 마사코 씨
"어쨌든 전쟁, 공습이 시작 되니 정말, 큰 일 이었거든요. 그 전에는 태평 하게, 남녀의 혼기에 누가 멋지 다던가, 그러한 얘기를 하는 여유는 있었지만, 공습이 시작 되고 나서는 전혀. 경보는 저희들이 내지 않으면, 우리들이 한다고 하는 것으로 자부심으로 생각 했습니다. 제대로 해야지 라고 말이죠. 그 때는 매일 밤 처럼 경보가 있었거든요. 빨리 (적기를)발견 해서, 빨리 여러 분도 안전 하게 방공호 안에 들어 가는 것, 그러 한 것을 생각 했습니다"
3월 10일의 도쿄 대공습 에서는, 새벅 근무로 현장 에서 쪽잠을 잤던 모리타 씨는 작전실이 소연 하게 되었다는 걸 기억 하고 있다. 아침을 맞아, 도쿄의 인접한 치바 현 이치카와 시의 친가로 길 따라 걸어서 돌아가는 중, 굉장한 피해를 눈 앞에 마주 하고 만 것이다
모리타 마사코 씨
"돌아가신 분과, 앉아서 숨이 헐떡 이는 분과, 거기를 지나 가는 게 괴로웠죠. 죄송 합니다, 미안한 기분으로 가지면서, 괜찮습니까? 라고 말 하면서 말이죠. 제방 쪽에는 모두 얽혀서 돌아 가셨거든요. 심한 공습의 화재로, 굉장히 강풍 이었습니다. 인간의 탄 냄새와 화재의 냄새 였죠.... 이제 도쿄는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아닌, 이제 전부 타서 들판 이잖아요. 거기는 정말로 지옥 이었습니다. 살아 있는 저희들은 기적일 정도로. 이제 전쟁은, 졌다고 직감 했습니다"
8월 15일, 예감 한 대로의 패전. 전쟁이 끝났을 때 안고 있던 기분을, 모리타 씨는 이렇게 술회 한다.
모리타 마사코 씨
"그 날은 사령부 에서 친가로 돌아 온 것이죠. 그 때에 찻물 간판을 세우면서, 건물의 전기가 켜지는 것을 보고, 아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 했죠. 건물의 빛이 말이죠, 굉장히 뭔가 분한 듯한 기분과 홀가분한 기분과 동시에. 이제 부터라도 더 이상 공습도 없어 질 거라고. 처음으로 그 때, 기뻤습니다"
모리타 씨가 소속 했던 동부군의 여자 통신대는 다시 모일 일 없이, 해산 했다고 한다.
"총력전"의 실태를 알아 가는 것에는 여성들의 증언이 불가결
지금, 역사에 묻힌 여자 통신대원에 빛을 비 추도록 할려고 천천히 조사를 이어 가고 있는 사람이 있다. 여성사를 연구 하는 니시다 히데코 씨(71세)
여자 통신대의 조사를 이어 가고 있는 니시다 히데코 씨
옛 여자 통신대원 들에게 듣고, 주고 받은 편지, 앙케이트 조사 등을 통해서, 그 실태를 쫓아 갈려고 하고 있다. 이제 까지 70명에 가까운 여성이 조사에 협력을 해 줬다.
군 안에서 여성이 담당 했던 역할을 분명 하게 하는 것이, 전쟁의 실상을 보다 이해를 깊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이어진다고 생각 하고 있다.
니시다 히데코 씨
"(시민을 말려 들게 해서)"총력전" 이라고 하는 것이 제2차 세계 대선의 큰 특징 이지만, 일본의 총력전 중에서 여성이 어떤 역할을 담당 한다고 하는 것은, 아직 분명하지 않은 부분이 있는 것이죠. 정규군에 배속 되어, "여성 병사" 라고 하는 임무를 한 여성이 있다는 것, 그 여성 자신이 어떤 마음으로 임무를 했는 지, 자세하세 기록 하고 들어서 남기지 않으면 전쟁의 전체상, 전생의 진짜 모습, 진상에 육박 하는 것이랄까? 추구 해 나가는 것은 할 수 없는 게 아닌 가 라고 생각 합니다."
무력을 행사 하는 군 안에서 군속 이라고 하여"군대" 로써 일 한 것은, 적의 목숨을 빼 앗는 것으로도 이어진다. 하지만 니시다 씨의 조사 에서 옛 대원 대 부분이 그러한 측면에 대해서 말 한적은 없었다고 한다.
많은 여성들은 스스로가 나아가서 군에 들어가고, 군 안에서 일한 것, 자신들의 임무가 시민을 지킨다는 것에 이어 진다 라고 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꼈다.
니시다 씨는 그 배경 으로써, 여성들이 놓여 있던 사회 상황에 대해서 이해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 한다.
니시다 씨의 자료 : 옛 여자 통신대 들에게 앙케이트와 옛 대원으로 부터의 편지 등
니시다 히데코 씨
"군대에 들어 가서 도움이 되서, 작전에 한 걸음도 가까워 질 수 있도록 임무를 하고 싶다고 하는 솔직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1938년에 국가 총동원법이 생겨서, 나라는 전쟁 속행을 위해 차례대로 법률을 만들고, 전쟁을 위해, 전쟁을 위한다고 모두를 동원 한 것 입니다. 젊은 여성은 직장을 찾아서 반드시 근로 봉사 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국가 에게 도움이 되는 일]로 취업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라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여자 통신대가 된 여성들은) 그 안에서 푹 스며 들었습니다. 일견, 지원 한 것 같지만, 객관적으로 사회 정세 안에서 보더라도 "강제 된 자발성" 입니다.. 자유롭게 어디든 갈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도 했구요. 정해진 선택지 중에서 보다 좋은 것을 선택 한 결과 였던 것이라고 말 할수 있다고 생각 합니다
지금 얼마 안 남은 건재한 분들의 최후의 한방울 같은 증언을 꼭 들어서, 사실은 이러 했다 라는 것을(기록 으로써)남기고 싶습니다. 이후 보다 제대로 평화적인 사회를 만드는 것에는, 과거의 일을 교훈 삼아서 제대로 마주 해야 한다고 생각 하는 것이 필요 하다고 생각 합니다"
취재를 통해서
취재로 만나 봤던 옛 여자 통신대원의 분들은, 당시의 청춘을 한 페이지 로써 밝게 술회 하는 한 편, 그 같은 시대를 반복 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젊은 사람 들에게는 경험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강력 하게 말해 줬습니다.
"여성 이니까" 선택지가 한정 되었던 시대.
여성의 의사를 묻지 않고 "가족 제도"를 중시 하면서도, 여성의 근로 하지 않으면 살아 남을 수 없었던 시대.
그러한 속에서 성별 역할 분업의 의식을 일으 켰을 때도 일한 여성들이 있던 사실
패전으로 부터 77년. 여자 통신대원 들이 놓였던 상황은, 지금 어느 정도 변했을 까요?
현대 사회도 구도가 바 뀌지 않은 부분이 있지 않나 생각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리고, 젠더 바이아스(사회와 문화가 만 들어낸 성차에 의한 고정 관념)이 과거에 일어난 사실을 말 하는 것을 어렵게 하는 일면도 있는 듯하게 느껴 집니다
"여성이 군에서 일했다고 얘기 하는 것은, 남성 병사와는 다른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닌 가.."
어떤 옛 여자 통신대원을 어머니로 둔 따님은, 어머니가 통신대에 대해서 말 하지 않은 이유로 그렇게 설명 해 줬습니다.
우리들이 여러 사회의 과제에 대해서 젠더를 넘어서 생각 하게 된 것으로, 새 로운 전쟁의 측면이 보이게 되는 것이 아닌 가. 거기에서 부터 다시 전쟁을 반복 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생각 해야 하는 것이 필요 한 게 아닌 가 느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