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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사회/이슈

히틀러의 러시아 정복 후 통치계획

작성자미르팡|작성시간24.06.18|조회수222 목록 댓글 0

히틀러가 지배와 착취의 전범으로 삼은 나라는 대영제국이었다. 독일인도 영국이 인도를 다스린 방식에서 배워야 한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영국처럼 작은 나라가 세계를 무대로 거대한 제국을 세워서 꾸려나가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라고 히틀러는 관료와 장군들에게 여러 번 말했다.

 

영국이 인도를 다스리는 것처럼 독일도 러시아를 다스려야 한다고 히틀러는 믿었다. 25만 명 정도만 있으면 동방 영토를 다스릴 수 있다는 것이 히틀러의 판단이었다. 영국은 그 정도 인원으로 4억의 인도인을 다스렸다. 러시아는 독일인을 상전으로 모셔야 한다. 러시아 민중은 도로 표지판을 읽을 정도로만 가르치면 된다.

 

또 웬만큼 먹고 살게 해주는 쪽이 독일을 위해서도 좋다. 우크라이나 남쪽 특히 크림 반도 지역에는 독일 농민병을 정착시킨다. 기존의 주민을 다른 데로 몰아내느라고 골머리를 썩일 필요는 없다. 정착지는 봉건제 비슷하게 끌고 간다. 150만에서 200만의 상비군을 두고 12년의 복무를 끝내면 3만에서 4만 마르크의 연금을 준다. 시골 출신이면 농사 지을 땅도 준다.

 

12년 동안 군 복무를 한 대가로 나라에서 농기계까지 다 갖춰서 농장을 제공한다. 무기도 제공한다. 딱 하나 조건이 붙는데, 그것은 도시 여자가 아니라 시골 여자한테 장가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독일 농부들은 가까운 도시로 가는 도로가 잘 닦인 아름다운 전원에서 산다. 거기만 벗어나면 "다른 세계"가 펼쳐지고 그곳에서는 러시아인이 독일인을 섬기며 산다. 혁명이라도 일어나면 "도시에다 폭탄 몇 방만 터뜨리면 경제는 끝장난다."

 

10년 뒤에는 믿을 만한 독일 엘리트가 나타나서 새로운 과업을 떠맡을 것으로 히틀러는 내다보았다. "서구에서는 써먹을 수가 없겠지만 정말로 지배자 노릇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유형의 인간이 등장할 것이다. 바로 총독(viceroy)이다." 독일 관리는 호화 저택에서 살고 총독은 '궁전'에서 산다.


히틀러는 8월 8일부터 11일까지 꼬박 사흘 밤낮을 러시아를 어떻게 하면 인도처럼 다스릴 수 있을까 하는 청사진을 그리는 데 골몰했다. 인도는 영국에게 자부심을 안겨주었다. 땅덩어리가 워낙 크다 보니 소수의 인원으로 수백만을 다스려야 했다. "영국에게 인도가 있었다면 우리에겐 동방 영토가 있다"고 히틀러는 단언했다.

영국에게 단순히 패권만이 아니라 번영까지 안겨준 제국의 심장부에 인도가 있다고 히틀러는 생각했다. 히틀러가 동방에 세우려고 꿈꾸던 독일 제국의 핵심은 바로 무자비한 경제수탈이었다. 이제 바야흐로 꿈이 이루어질 찰나였다. "우크라이나 평야와 볼가 강 유역은 언젠가 유럽의 곡창이 될 것"이라고 히틀러는 점쳤다.

 

"우리는 유럽에 철도 제공할 것이다. 조만간 스웨덴에서 철을 공급 안 해도 괜찮다. 동방에서 가져오면 된다. 벨기에 공장에서 찍어내는 저렴한 소비재와 동방에서 나는 곡물을 맞바꾸면 된다. 튀링겐과 하르츠 산맥에서 가난한 노동자 계급을 데려와서 땅을 덥석덥석 안겨주어도 좋다." "우리는 곡물을 원하는 모든 유럽인에게 곡물을 수출할 것"이라고 히틀러는 한 달 뒤에 말했다.

크림 반도에서는 감귤과 고무나무(4만 헥타르면 자급이 가능), 목화를 기를 것이다. 프리페트 습지에서는 갈대를 얻는다. 우크라이나인한테는 머릿수건도 좋고 유리 목걸이도 좋고 식민지 백성들이 좋아하는 것을 던져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 독일인이 요새처럼 폐쇄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다는 점이다. 미천한 마구간지기라도 어떤 원주민보다 앞서야 한다.

히틀러 생각으로 안보의 바탕은 자립 경제였다. 독일의 안보를 위해서라도 동방을 정복해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가 1920년대부터 부르짖은 논리였다. "유럽에서 세계 패권 투쟁은 러시아 공간의 점령이 결정할 것"이라고 히틀러는 9월 중순 주변 사람들에게 말했다. "러시아만 차지하면 유럽은 경제 봉쇄에도 끄떡없이 버티는 이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지역이 된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단골 주제로 돌아갔다. "전쟁에는 원료 조달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점을 깨닫고 나는 바로 독자적인 원료 조달 경로를 확보하는 데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다. 철, 석탄, 원유, 곡물, 가축, 목재가 우리 손에 있어야 한다. 이제 나는 말할 수 있다. 아시아를 끌어들여 우리한테 싸움을 거는 데 유럽 문명을 써먹는 공룡 국가만 막아낼 수 있다면 유럽은 자립할 수 있다고."

 

히틀러는 자립 경제의 장점을 국제 시장 경제와 비교하여 오래전부터 강조했는데 특히 영국과 미국처럼 수출과 외국 시장에 기대다 보면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하고 관세와 생산 원가도 덩달아 올라가서 실업률이 높아진다고 폐단을 지적했다. 영국이 인도를 공업화하는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영국 실업률이 높아지고 노동자 형편이 어려워졌다고 히틀러는 지적했다. 독일은 수출에 목을 매지 않으니까, 실업을 걱정하지 않는 유일한 나라다.


지금 우리가 열고 들어가는 나라는 우리에게는 원료 공급 기지이자 판매지역이지 공업 생간 기지가 아니다. 이제부터는 극동에서 활기찬 시장을 찾지 않아도 된다. 여기가 우리 시장이다. 여기만 확보하면 된다. 면제품도 좋고 요리 냄비도 좋고 생활에 꼭 필요한 기본 품목을 남김없이 공급하면 된다.

 

여기서처럼 많이 팔리는 것을 만들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여기서 강대국을, 진정한 세계 패권국을 세울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본다. 앞으로 몇백 년 동안 우리는 아무도 넘보지 못할 활동 공간을 가질 것이다.


(중략)



히틀러는 10월 4일 육군 초 육군 총사령부로 브라우히치의 회갑을 축하하러 갔다가 막 돌아와서 저녁을 먹는 자리에서도 평소보다 기분이 좋아 보였다. 새삼스럽지는 않았지만 '동방 독일'의 미래를 펼쳐 보았다. 앞으로 반 세기 안에 무력으로 대륙을 장악한 군인들이 주축을 이루어 500만 호의 농가가 그곳에 자리를 잡는다.

 

히틀러는 식민지에는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서 그 점에서는 영국하고 부딪칠 일이 별로 없다고 말했다. 독일은 그저 커피와 차를 기를 식민지 땅만 조금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유럽 대륙에서 몽땅 생산할 수 있다. 카메룬과 프랑스령 적도 아프리카의 일부 아니면 벨기에령 콩고 정도만 있으면 독일은 충분하다. "우리의 미시시피 강은 니제르 강이 아니라 볼가 강이라야 한다"고 히틀러는 결론지었다.

다음날 저녁 힘러가 식탁에서 키예프 인상을 소개하면서 헐벗은 키예프 주민의 80~90%를 '처분'할 수 있다는 말로 좌중을 즐겁게 하자 히틀러는 독일어 방언을 화제로 삼았다. 처음에는 작센 사투리가 모조리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사투리 때문에 외국인이 독일어를 배우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이제 유럽에서는 독일어가 공용어로 자리 잡아야 한다는 것이 히틀러의 생각이었다.

10월 13일 발터 풍크 경제장관을 만났을 때도 히틀러는 여전히 들떠 있었다. 동방 영토만 손에 넣으면 유럽에서 실업을 없앨 수 있다고 히틀러는 주장했다. 돈 강과 드네프르 강, 흑해와 도나우 강을 물길로 이어서 원유와 곡물을 독일로 실어 온다는 구상도 밝혔다. "무한한 가능성의 땅은 이제 미국이 아니라 유럽이 된다."

나흘 뒤 프리츠 토트가 있는 자리에서 정복한 영토를 새로 낸 도로로 거미줄처럼 잇는 더 원대한 구상을 밝혔다. 크림 반도까지만 고속도로를 내는 것이 아니라 카프카스는 물론이고 그 너머까지도 고속도로를 뚫겠다는 것이었다. 강과 강이 만나는 곳에는 독일 도시를 지어서 행정 중심지로 삼는다. 전쟁 포로 300만 명이 있으니까 한 20년은 부려먹을 수가 있다.

 

도로를 따라 독일인 농장이 들어선다. "단조롭기만 한 아시아의 초원이 곧 몰라보게 달라질 것이다." 히틀러는 이제 1천만 독일인만이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네덜란드, 플랑드르, 심지어는 미국에서도 이주민이 와서 정착할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 주민은 "큰길에서 뚝 떨어져서 자기들끼리 지저분하게 살아야 한다." 교육은 도로 표지판을 읽을 정도로만 시키면 된다.

 

지금 독일 방을 먹는 사람들은 12세기에 독일의 신성로마제국 황제가 무력으로 엘베 강 동쪽의 곡창을 되찾았을 때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고 히틀러는 말했다. "아메리카를 점령할 당시처럼 이곳 동방에서도 비슷한 과정이 다시 벌어질 것이다." 그러면서 앞으로 벌어질 일을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십 년에서 십오 년만 젊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내용 출처 : 히틀러 II, 이언 커쇼 저, 495~498, 534~5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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