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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loyd] 발트십자군사

[중세 유럽]Teutonic Knights - 역사 (1)

작성자Floyd|작성시간07.12.29|조회수3,392 목록 댓글 1

 

 Ordo domus Sanctæ Mariæ Theutonicorum Ierosolimitanorum

 

 

                                                              이미지를 클릭하면 원본을 보실 수 있습니다.

 

 

[원래 이 게시물은 전에 올린 '중세 리투아니아 전사' 글과 비슷한 포맷으로 올리려 했지만 어쩌다보니(-_-)

내용이 갑자기 늘어나 버렸습니다. 일단 두 편은 튜턴 기사단의 역사를 간략하게 요약해서 소개하는 것으로 하고,

보다 세부적인 사항들 - 기사단의 조직, 생활, 이념, 무장, 기타 등등은 차후 두편 정도로 요약하려고 합니다.

 

이 글에 나오는 내용의 세부사항 및 평가에 있어서는 추후에 보충 및 수정이 필요할 수 있으며,

오류가 있을 시 과감히 지적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림 첨부는 시간관계상 생략하겠습니다.]

 

 

[1] 튜턴 기사단의 역사

 

 

1-1. 기사단의 기원

 

1189년, 붉은 수염 프리드리히 (Friedrich Barbarossa) 황제의 지휘 하에 소아시아를 횡단 중인 신성로마제국의 군대는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눈 앞에 두고 있었습니다. 앞을 가로막는 모든 적들은 여지없이 패배하거나 달아났고, 어느 누구도

 그토록 강력한 제국 군대에 감히 맞설 수 없을 것만 같았습니다.

 

독일인들의 이 장대한 원정은 황제의 신상에 벌어진 어떤 사건으로 황당한 결말을 맞이하고 말았습니다. 프리드리히 황제는

어이없게도 소아시아의 작은 강변에서 익사하였고, 그의 권위에 의해 간신히 지탱되고 있던 십자군의 단결력은 산산이

흩어졌습니다.

 

많은 제국 귀족들이 나름대로의 이유를 가지고 - 차기 황제의 선출을 위하여, 앞으로 벌어질지도 모를 내전에 참여하기

위하여, 본국에 남겨둔 재산과 영토를 수호하기 위하여 - 황급히 독일로 돌아갔습니다. 오로지 가장 독실한 신앙인임을 자처하는

소수의 귀족들만이 황제의 셋째 아들과 함께 성지로의 여정을 끝까지 수행하고자 했으며, 그리하여 험난한 여정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마침내 공성 중이었던 팔레스타인의 항구도시, 아크레(Acre)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그 독일인들의 신앙심은 결코 적절한 보답을 받지 못했습니다. 북유럽과는 전혀 다른 현지의 열기로 인하여

많은 이들이 온갖 열병과 질병들에 시달리며 죽어갔습니다. 더군다나 아크레에서 공성을 주도하고 있던 잉글랜드의 사자왕

리처드 1세는 대부분이 호엔슈타우펜 가문의 충성파였던 그 독일인들을 탐탁치 않게 여겼으므로, 기회만 있으면 그들을

모욕할 준비가 되어있었습니다. 아크레의 함락 후에는 프랑스 왕과 오스트리아 공작이 리처드 1세에게 넌덜머리를 내며

돌아갔고, 리처드 1세 자신도 더 이상의 큰 성과는 거두지 못한 채 잉글랜드로의 귀로에 올라버렸습니다.

 

이 것이 위대한 3차 십자군의 결말이었습니다. 지금까지 무수한 난관들을 견뎌내며 성전에 몰두했던 독일인들의 실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며, 그들의 독실한 신앙심은 세속군주들의 편협함에 배신을 당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실망스러운 상황 속에서 그들은 한 가지 작은 성취를 이룰 수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튜턴 기사단의 토대를 세운 것이었습니다.

 

 

1-2. 창단

 

아크레 공성전은 농성자들뿐만 아니라 공성자들에게도 많은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것은 단지 중동의 뜨거운 열기와 부적절한

음식과 식수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전투 중에 죽거나 질병으로 사망한 많은 십자군들의 주검들이 아크레 성의 해자에

던져졌고, 여기서 발생한 악취와 파리 때는 십자군의 진영을 덮쳐 온갖 질병을 유발했던 것입니다.

 

이 경우 적절한 의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할 의무는 구호 기사단(=성 요한 기사단)에게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능력으로는

공성 과정에서 발생하는 무수한 사상자들 모두를 수용할 수 없었고 그나마 제공되는 서비스도 프랑스나 잉글랜드 인들에게

우선적으로 베풀어졌습니다. 독일인들은 천덕꾸러기처럼 한 켠으로 치워졌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은 그들이 3차 십자군 과정에서 겪었던 정신적인 소외감과 함께 작용하여 독일인들만의 종교 결사가

만들어질 여건을 조성하였습니다. 1190년, 브레멘과 뤼베크에서 온 몇몇 시민계급 출신의 십자군들이 주축이 되어 독일인들을

위한 작은 야전 병원이 설립되었는데, 십자군 함선들의 돛과 목재로 급조된 이 초라한 병원용 천막들이야말로 미래의 튜턴

기사단으로 발전하게 될 것이었습니다.

 

1190년 11월, 이 야전병원은 십자군의 제국 귀족 중 가장 지체가 높았던 바르바로싸 황제의 셋째 아들, 슈바벤 공작

프리드리히 6세의 후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프리드리히 공작은 자신의 형제인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와 예루살렘의

대주교, 구호 기사단, 그리고 성전 기사단에 편지를 보내어 그 작은 병원 조직을 소개하였고, 마침내 1192년, 아크레의 독일

야전병원은 교황으로부터 종교 교단으로서의 정식 인가를 받게 되었습니다.

 

 

1-3. 발전

 

이렇게 초창기의 튜턴 기사단은 기사단이라기 보다는 구호조직의 성격이 강했으며 조직의 구성과 운영은 구호 기사단의

규정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아크레의 함락 후 이 신생 교단은 아크레 시 내부에 자리를 잡을 수 있었으며, 그들에게 주어지는

각종 기부를 활용하여 점차 교단의 시설과 서비스를 확충하였습니다.

 

1197년에 중동지역에 새로 도착한 일련의 독일 십자군들은 그들의 선배들에 비하여 보다 편안한 여건에서 성전을 수행할 수

있었습니다. 성지에는 그들을 위한 병원 조직이 설립되어 있었고, 그들은 의료 서비스뿐만이 아니라 숙식 제공을 포함해

빈털터리가 된 십자군에게는 돈까지 제공하는 등의 여러 가지 편의를 돌보아 주었습니다.

 

흥미롭게도 독일 교단에 봉직하고 있는 많은 이들은 기사 출신이었습니다. 일종의 경찰 역할을 수행하거나 성지에서의

종교적인 삶에 헌신하는 교단의 기사들은 새로 온 독일 십자군의 관심을 끌게 되었으며, 이 발견은 곧 구호기사단의 선례를

따라 독일 교단에도 군사적 성격을 부여하려는 움직임으로 나타났습니다. 중동의 성지에는 항상 군사 인력이 부족했으므로 이

아이디어는 환영을 받았습니다.

 

1198년, 교황 셀레스틴 3세는 이 독일 교단의 군사 기사단 화를 인가하였습니다. 군사교단으로서의 규정은 성전 기사단의

것을 차용하였으므로, 튜턴 기사단은 구호기사단과 성전기사단의 규정(Rule, 종규 宗規)을 함께 적용 받는 셈이 되었습니다.

 

신생 튜턴 기사단은 아직 그 힘이 미약하였습니다. 기사단의 정식 기사의 수는 1210년까지 30명을 넘지 않았으며, 위계상으로

구호 기사단의 아래에 놓여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신성로마제국의 위태로운 정치 상황은 그들이 본국으로부터 적절한 지원을

받는 것을 방해하고 있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이 성전기사단이나 구호기사단에 합병되는 것은 시간문제처럼 보였습니다.

 

 

1-4. 도약

 

그러나 1209년, 튜턴 기사단은 새로운 기사단장을 맞이함으로써 비약적인 발전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 4대 기사단장인 헤르만

폰 잘차(Hermann von Salza)는 원래 하급귀족(ministerialis 농지 및 재산, 회계 관리를 맡은 평민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봉신의 자격을 취득한 것) 출신에 불과했지만 뛰어난 언변과 친화력, 그리고 활동력을 과시하며 교황과 황제를 상대로

적극적인 정치 활동을 벌였습니다. 그의 활약으로 인하여 기사단은 실질적인(de facto) 독립 교단으로서의 지위를 인정

받았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재산을 기부 받아 그 덩치가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났습니다.

 

그는 기사단을 위하여 여러 가지 공헌을 이루었지만, 무엇보다도 리미니의 칙령으로 대표되는 황제와 교황의 공식 인가를

통해 새로운 기사단 국가를 세우기 위한 발판을 발트 지역에 마련했습니다. 이 것은 앞으로 튜턴 기사단의 운명과 동유럽의

역사 전개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1-5. 이교도에 대한 성전

 

폴란드 마소비아(=마조프세)의 콘라드 공작으로부터 초청을 받아 발트 지역에 들어온 튜턴 기사단은 비스툴라 강 유역을 제압

하는 것부터 시작하여 발트 십자군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세습 군주들의 선천적인 권위를 가지지 못했던 그들은, 용의주도하게도 새로운 정복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항상 황제와 교황의

칙령을 얻어내어 자신들의 군사행동에 대한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노력하였습니다. 그들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독일인이

유입되어 새로운 성채와 도시가 건설되었고 정복된 원주민들은 점차 그들에게 흡수되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기사단의 주요 적수는 다신교를 믿고 있던 발트 지역의 프루스 인, 수도비아 인, 리투아니아 인들이었습니다.

처음에 발트지역의 이교도들은 중동의 더 중요한 성전을 위한 일종의 연습상대로 간주되었고, 실제로도 기사단은 그들을

상대로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울창한 숲과 질척거리는 늪지대, 그리고 혹독한 기후를 방패로 삼은 발트의 이교도들은

완전히 정복되기에는 무척이나 힘든 상대라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쌍방 간에는 무수히 많은 반란과 반격, 약탈, 방화,

대량학살의 야만적인 행태가 꼬리를 물고 벌어졌고, 이런 식의 전쟁이 반세기나 지속된 뒤에야 프러시아와 수도비아의 정복은

달성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쪽의 리투아니아는 여전히 건재했습니다.

 

 

1-6. 성지의 상실

 

본래 튜턴 기사단의 주요 관심사는 중동 지역의 성지에 있었으며 기사단 조직의 본부 또한 그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이 지역에서 기사단의 힘은 구호 기사단과 성전 기사단의 그것에 미치진 못했지만 험준한 몽포르 성(=슈타르켄베르크)을 거점

삼아 단단히 수비태세를 굳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슬람 아이유브 왕조의 뒤를 이어받은 마물루크 왕조의 바이바르스의 등장은 튜턴 기사단뿐만이 아니라 서유럽

기독교 세력의 중동지방 축출이라는 결과를 낳게 되었습니다.

 

1266년, 슈타르켄베르크 성에 대한 바이바르스의 첫 공격은 실패로 끝났지만 5년 후 그는 다시 돌아왔습니다. 이슬람 군대의

공병대가 남쪽 외벽으로 침투하여 무너뜨린 후 그 곳을 기반으로 삼아 본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기사단은 무사 귀환을

대가로 바이바르스에게 항복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이바르스는 약속을 지켰으므로 기사들은 무사히 아크레로 돌아갈 수

있었지만, 1291년 아크레마저도 이슬람 군대에 함락되자 기사단은 본부를 베네치아로 옮겼습니다.

 

그 곳에서 기사단은 이탈리아 기사들을 고용하기도 하면서 한동안 성지탈환 계획에 매달렸습니다. 그러나 성지탈환의

가능성이 희박해지면서 마침내 기사단 본부는 1309년에 프러시아의 마리엔부르크(Marienburg) 성으로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들과 프러시아에서 이교도들과 혈전을 벌이고 있던 기존의 형제 기사들 사이에는 곧 심각한 알력이 벌어졌지만, 결과적으로

기사단은 프러시아에 완전히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평온해 보이는 마리엔부르크의 적색 성벽 뒤에서는 항상 분쟁과 음모가 소용돌이 치고 있었습니다. 정치적인

갈등으로 인하여 몇몇 기사단장은 도중에 자리에서 쫓겨났고, 또 어떤 이는 암살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1-7. 카톨릭 세력과의 분쟁

 

튜턴 기사단의 힘이 커지면서 주변의 폴란드 공후들과 분쟁이 발생하였습니다. 이미 기사단은 13세기 중반에는 포메렐리아의

시비엥토페우크 공작과 전쟁을 벌였으며, 14세기가 되면서 폴란드의 왕들과 싸우기 시작했습니다.

 

14세기의 폴란드는 오랜 분열에서 벗어나 피아스트 왕조의 통치하에 통일을 이루고 있었지만 자신들의 힘 만으로는 튜턴

기사단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기사단은 무력을 동원하여 주요 무역항인 그다인스크와 포메렐리아(=폼메라니아) 일대를

정복했고 마조프세 일부를 차지했으며 대 폴란드 지역까지 진출하여 약탈했습니다. 폴란드는 불리한 조건으로 튜턴 기사단과

강화조약을 맺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 기사단은 교회세력과도 갈등을 일으켜 기사단 역사상 최악의 스캔들을 일으켰습니다. 리보니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해

리가 대주교와 벌인 분쟁은 기사단의 평판을 땅바닥으로 추락시켰을 뿐만 아니라 교황으로부터 파문까지 당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멸망한 성전 기사단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하여, 기사단은 프러시아의 정복 이후 거의 30년 만에 북쪽의 이교도들을

상대로 다시 발트 십자군을 일으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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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yskwww 작성시간 07.12.29 역시.. 월드오브평작크래프트는 그당시에도 통용되는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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