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튜턴기사단의 역사
2-1. 리투아니아 십자군
14세기 초에 벌어진 주변의 카톨릭 세력 및 교회 세력과의 갈등은 기사단을 궁지에 몰고 갔습니다. 비록 기사단 국가 자체는
막강한 국력을 과시하고 있었지만 주변에 너무도 많은 적들을 만들어 버렸고, 그 중에는 교황청까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새로운 성전을 위한 여건을 만들었습니다. 성전을 위한 기사단의 정체성을 부각시켜 파문을 운운하는 교황청의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권세 높은 세속 군주들을 십자군에 끌어들여 그들과의 친목을 돈독히 함으로써 기사단의 유력한 동맹
세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필요성은 북쪽의 리투아니아에 남아있던 이교도들을 상대로 새로운 성전을 개시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 지역은 리투아니아 인들 뿐만이 아니라 튜턴 기사단의 공격으로부터 탈출한 프루스 인, 수도비아 인,
세미갈 인과 같은 난민들이 몰려와 유럽 이교도들의 총 본산지가 되어있었습니다. 기사단은 그들 스스로의 대외적인 이미지를
‘그러한 야만적인 이교도의 침략으로 위험에 처한 나약하고 고립된 절망적인 수도사들’로 포장, 선전하여 유럽의
십자군을 성공적으로 유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이 그들 스스로와 이웃들과의 분쟁에 정신이 팔려있는 사이, 리투아니아는 과거의 ‘야만적’인 수준에서
벗어나 거대한 크기의 군주제 국가로 성장해있었습니다. 이교도들의 마지막 보루인 리투아니아 대공국(Grand Duchy of
Lithuania)은 기사단이 지금까지 상대해왔던 프루스 인이나 수도비아 인, 그리고 13세기의 옛 리투아니아 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상대였습니다.
그 결과는 100년 가까이 벌어진 기독교 세력과 이교도 국가 간의 대대적인 혈전이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이나 리투아니아 양 쪽
모두 자신의 군사적, 정치적,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면으로 충돌했던 것입니다.
기사단이 서유럽에서 십자군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면 리투아니아는 서부 러시아에서 자원을 끌어내어 이에 맞섰고,
기사단이 다른 세력과 동맹을 맺어 압력을 가하면 리투아니아는 기사단 영토의 내부 반란을 부추겼습니다. 기사단이 성채를
쌓으면 리투아니아는 강 건너편에 또 다른 성채를 건설했고, 기사단이 전쟁터에 대포를 도입하면 리투아니아 역시 대포를
동원하여 기사단의 성채를 포격하였습니다. 기사단은 저항을 시도하는 리투아니아의 이교도 주민들을 몰살시키거나 포로로
잡아가고 있었지만, 기사단보다는 종교에 관용적이었던 리투아니아 역시 필요할 경우 자국의 카톨릭 신자들을 색출해서
처치해버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전반적인 전황은 튜턴 기사단이 약간 우세했지만 결정적이지는 못했고, 그나마도 리투아니아의 반격에 의하여 그간의 성과가
무위로 돌아가버리는 일이 자주 벌어졌습니다. 결과적으로 양 측의 국경선 사이에는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무인지대가 생겨났고, 폐허가 된 촌락들 위로 무수한 군사 거점들이 빼곡하게 들어섰습니다. 14세기 중반까지 그 누구도
승패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의 혼전이 거듭되었으며, 유능했던 튜턴 기사단의 20대 기사단장조차도 전쟁의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정신병이 걸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혈전은 14세기 중엽 흑사병이 도래하면서 잠시 수그러들었고, 곧 기사단은 빈리히 폰 크니프로데
(Winrich von Kniprode)를 기사단장으로 맞이하면서 전성기에 다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군사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뛰어난 외교적인 술수와 책략으로 기사단의 적들을 분열시켰고 서유럽의 공후들과 돈독한
관계를 쌓아 올렸습니다. 동시에 유능한 리더십으로 기사단 국가에 소속한 주교들과 영주(융커 Junker)들,
시민(부르거Burgher)들을 검은 십자가의 깃발 아래 단단히 결속시켰습니다. 이제 튜턴 기사단의 위력은 극에 달했고 기사단의
적들을 상대로 승리에 승리를 거듭했습니다. 더군다나 그들은 리투아니아 내부의 권력분쟁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어부지리까지 취했습니다.
1382년 크니프로데의 사망 당시, 기사단은 사모기티아(Samogitia)를 정복하여 기사단령 프러시아와 리보니아의 육로 연결을
달성했을 뿐만 아니라 리투아니아의 중심부인 빌니우스(Vilinus) 지역까지 진출하여 교두보를 마련했습니다. 이제 최후의
승리가 목전에 있는 듯 보였습니다.
2-2. 쇠퇴의 시작
14세기 후반 리투아니아는 골육상잔의 권력다툼으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 분쟁은 게디미나스 왕조의 요가일라
(Jogaila)와 그의 삼촌인 케스티투트(Kestitut) 및 그의 아들 비타우타스(Vytautas) 간에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은
처음에는 요가일라와, 그리고 나중에는 비타우타스와 손을 잡고 리투아니아의 내부 정세에 개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니프로데의 사후 상황은 급변했습니다. 요가일라가 기독교 세례를 받고 폴란드의 젊은 여왕 야드비가와 결혼하면서
야기에오 브와디스와프 2세(Wladyslaw II Jagiello)라는 이름으로 폴란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와 비타우타스 사이의 내전은
한동안 계속되었으나, 곧 폴란드 왕이 비타우타스를 리투아니아 대공으로 인정하는 조건으로 극적인 화해를 이끌어 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리투아니아의 내분은 끝이 났으며 동유럽의 두 나라는 서로 손을 잡았습니다.
이 것은 파워 밸런스를 한번에 역전시킬만한 사건이었습니다. 두 나라가 힘을 합치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
(Polish-Lithuanian Commonwealth)이라는 동유럽의 최강국이 만들어졌던 것입니다.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과 튜턴 기사단과의 전쟁은 이미 예정된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이든 연합이든 그 미래를 보장 받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쓰러뜨려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연합왕국의 두 구성원들은 튜턴 기사단의 발흥으로 인하여 오랜 세월
동안 고통을 받아왔습니다. 최후의 일격을 위하여 양 세력은 자신들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기 시작했습니다.
1410년, 마침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연합군이 기사단의 거점인 프러시아를 향해 진격하기 시작했고, 제 26대 기사단장인
울리히 폰 융잉엔(Ulrich von Jungingen) 역시 튜턴 기사단과 서유럽에서 참전한 십자군들을 거느리고 출진하였습니다.
7월 15일, 양 군대는 탄넨베르크 마을의 부근에서 격돌하였는데, 그것은 훗날 중세유럽 최대의 전투 중 하나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연합군의 수적 우위에도 불구하고 맹공에 나선 튜턴 기사단은 리투아니아 군대를 쫓아내고 폴란드 왕의 깃발을 탈취하는 등
막강한 위력을 여지없이 과시하면서 승리를 거머쥐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후퇴했던 리투아니아 군대가 전장으로 다시
돌아왔고 숲 속에 숨어있던 보병대가 합세하자, 결국 최후의 승리는 연합왕국의 것이 되었습니다. 기사단장과 주요 간부들을
포함하여 약 250~400여명의 튜턴 기사들이 8000여명의 기사단령 병사들과 함께 이 전투에서 전멸하였습니다.
그러나 연합왕국은 궁극적인 승리를 얻지 못했습니다. 튜턴 기사단의 생존자들은 마리엔부르크의 강력한 성벽을 의지 삼아
연합군의 공격을 막아낼 수 있었고 일련의 군사행동이 이어진 후 1411년의 토룬 조약으로 일시적이나마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사모기티아와 도브진 지역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기사단령은 그대로 보유할 수 있었습니다. 대신 그들은
대량의 무기를 연합 측에 넘겨주어야 했고, 전투에서 잡힌 포로들의 몸값 명목으로 20톤의 은을 4년에 걸쳐 배상해야
했습니다. 이 배상금은 영국 왕의 1년 총수입의 10배에 달했습니다.
궤멸적인 패배에도 불구하고 튜턴 기사단의 힘은 아직 무시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들은 1414년 브와디슬라프 2세가 감행한
대규모의 공세를 막아낼 수 있었고, 독일의 공후들로부터 다시금 십자군 지원병들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시대는
변해있었습니다.
기사단은 아직도 기독교 공후들 중에 많은 친구들을 가지고 있었지만 교권의 일각에서는 기사단의 패배가 그들의 타락으로
인해 벌어진 필연적인 결과라는 견해가 머리를 들고 있었습니다. 독일을 제외한 영국과 프랑스의 관심이 시들해졌고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기사단의 국고가 바닥났으며, 기사단령의 신민들은 동요하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튜턴 기사단은 아직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2-3. 부활의 시도
시오노 나나미가 어느 교황에게 내린 비유를 여기에도 그대로 적용한다면, 한 손에 든 날카로운 검이 부러져버린 지금, 이제
기사단은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십자가에 의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무력에 호소할 수 없게 되자 그들은 양 손으로 십자가를
움켜 잡고 그것을 높이 쳐들었습니다.
거대한 연합왕국에 대한 군사적 승리의 가망성이 없어져 버린 시점에서 기사단은 외교적인 수단에 매달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연합, 특히 폴란드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는 프러시아에 대한 자신들의 권리를 다시 찾고자 했으며, 또한 유럽에서
발트 십자군을 다시 일으킴으로써 이 난관을 극복하고자 했습니다. 곧 기사단과 연합왕국의 신학자들이 분주하게 교황청을
드나들기 시작했고, 또 다른 전쟁 – 십자군에 대한 신학적 설전이 시작되었습니다.
기사단 측에서는 전통적인 십자군의 관념에 근거하여 서유럽에서 새로운 성전의 열의를 불러일으키고자 시도하였습니다.
연합 측에서는 보다 근원적으로 무력에 의한 발트 십자군의 합법성에 의문을 던졌습니다. 양 측의 신학자와 법학자들은
반대 논리를 만들어내기 위하여 머리를 쥐어짜냈고, 몇 년간의 신랄한 논전 끝에 교황청의 호의는 기사단 쪽으로 기울었습니다.
기사단으로선 치열한 설전에서 승리를 거둔 셈이었지만 반 쪽짜리 승리였습니다. 기사단에 대한 호의에도 불구하고 교황청은
성전을 위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없는 한, 카톨릭 세계로 편입된 연합국에 대한 새로운 십자군의
출진은 불가능했습니다.
그 이후에도 기사단은 필사적인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성과는 별로 없었습니다. 부분적으로는 외부적인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는 그들 자신에게도 문제가 있었습니다. 연합왕국의 일시적인 분열로 인한 유리한
대외 상황을 이용하지도 못했고, 지나치게 거만하고 독단적인 태도로 인하여 신민들(주교, 융커, 부르거)의 충성심을 상실
했습니다. 리보니아 지역의 기사단 지부가 점차 기사단 본부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내부적인 정치 파벌들의 대립으로
몇몇 개혁 안이 좌절되었습니다. 점차 충원되는 기사들의 자질이 떨어졌고 부족한 재정상황 속에서 용병대에 대한 의존도가
늘어갔습니다.
2-4. 기사단 국가의 종말과 그 이후
그룬발트 전투부터 약 40년 동안 프러시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폴란드 측과 다시 과거의 영광을 되찾고자 하는 튜턴 기사단
사이에는 일련의 논쟁과 소송과 중재와 전투가 끊임없이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조된 긴장관계는 마침내 1454년,
새로운 대전쟁의 발발로 폭발했습니다. 연합과 협상, 중재, 습격, 전투로 점철된 이 전쟁에서 튜턴 기사단은 13년 동안이나
항전하였지만, 궁극적인 승리는 동유럽의 슈퍼파워가 되어버린 폴란드의 것이었습니다. 1466년, 기사단은 토룬 협정에서
부유한 서부 프러시아를 폴란드로 넘겨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제 기사단의 운명은 완전히 봉인되었고 살아남은 파편들은 제각기 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사단의 핵심이었던
프러시아 지부는 13년 전쟁 이후에도 동 프러시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러시아 지부는 전통적인 적수였던
폴란드뿐만 아니라 더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기사단 국가는 루터파 교리의 확산으로 인하여 내부 분열이 시작된 상태였고, 이러한 상황은 특히 카톨릭 종교 교단이었던
튜턴 기사단에게는 치명적으로 작용할 수 있었습니다.
대 폴란드 전쟁에 대한 지원을 얻기 위하여 신성로마제국을 돌아다니고 있던 호엔촐레른(Hohenzollern) 가문출신의
37대 기사단장 알브레흐트 폰 브란덴부르크-안스바흐(Albrecht von Brandenburg-Ansbach)는 비텐베르크에 체류하던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를 직접 방문하였습니다. 그는 튜턴 기사단의 운명에 대한 자문을 구했고, 루터는 기사단장에게
서원(誓願)을 포기하고 기사단을 세속화시켜 하나의 공국(Duchy)으로 새로 출발할 것을 권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525년, 알브레흐트는 결심을 굳히고 스스로 프러시아의 공작위에 올랐으며 폴란드 왕의 봉신으로서 충성을
맹세하였습니다. 그의 결정을 승인하기 위하여 쾨니히스베르크로 소환된 불운한 튜턴 기사들은 루터파 군중들로부터 위협을
받고 투척된 계란을 얻어맞았습니다. 린치의 공포로 인하여 대부분의 기사들이 세속화에 동의하였고, 그리하여 한때
장대했었던 프러시아의 튜턴 기사단은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한편 북쪽에 떨어져 있던 튜턴기사단 리보니아 지부는 나름대로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까지는 기사단의
중심인 프러시아 지부가 수행하던 발트 십자군 성전과 그룬발트 전투, 그리고 13년 전쟁 등에서 아낌없는 지원을 제공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그들은 독자적인 활로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의 입장에서 프러시아 지부는 부담스러운
짐 덩어리에 불과했습니다.
그룬발트의 재난과 프러시아의 분열 상에도 불구하고 리보니아 지역의 정치체제는 15세기에도 그럭저럭 원활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발트해 교역으로 인해 여전히 이곳의 기사단은 부유했고, 심지어는 아직도 유럽의 십자군 ‘고객’들이 찾아오기도
했습니다. 기사단은 성벽 뒤에 병력과 대포를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가며 막강한 군사력을 유지하고 있었고,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와 같은 정교 세력에 대해 공세를 벌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리보니아 지역도 점차 시대의 흐름에 휘말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성장으로 기독교권의 관심은
이 지역에서 멀어졌고, 동방의 강력한 모스크바 공국의 진출은 프러시아의 기사단이 연합왕국에 대적했던 것과 같은 상황을
다시금 연출하였습니다. 발트 십자군을 다시 발진시키기 위한 최후의 노력이 1503년에 실패로 돌아간 뒤, 리보니아 기사단은
거대한 공룡 모스크바가 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를 집어삼키고 바로 옆에까지 다가오는 것을 힘없이 바라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1557년, 드디어 리보니아 기사단에 대한 마지막 일격이 시작되었습니다. 공포황제 이반 4세의 모스크바 군대가 리보니아를
휩쓸었고, 곧 주요 열강들이 리보니아에 개입하였습니다. 1562년, 리보니아 지부장인 고트하르트 케틀러(Gotthard Kettler)는
프러시아 지부의 선례에 따라 기사단을 세속화 하였고 그리하여 쿠를란트와 세미갈리아의 공작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리보니아 지부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프러시아의 세속화 이후, 남아있던 형제기사들은 독일 지부장이었던 발터 폰 크론베르크(Walter von Cronberg)라는 인물을
대기사단장으로 선출하였습니다. 기사단장 자리를 노리고 있던 리보니아의 지부장이 여기에 이의를 제기했지만, 중재를 맡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카를 5세는 크론베르크의 손을 들어주었습니다.
기사단은 본부를 독일 남부의 메르겐트하임(Mergentheim)으로 옮겼고, 그곳에서 다시 출발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도
별로 순탄치는 않아서 독일 농민전쟁으로 무수한 기사단의 재산이 소실되었고, 또한 많은 기사들이 개신교의 영향을 받아
기사단에서 이탈했습니다. 그러나 연이은 재난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튜턴 기사단은 끝까지 살아남았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독일과 오스트리아, 보헤미아 지역에 재산을 보유하면서 오스만 투르크에 대항하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용병대
지휘관으로 봉직하였습니다. 기사단의 이러한 군사적인 기능은 1809년이 되어서야 종말을 맞이하였습니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기사단의 해산을 명령했고, 그 재산은 나폴레옹의 신하와 동맹자들에게 분배했던 것입니다.
이후 튜턴 기사단은 카톨릭의 종교 교단으로서 기능했습니다. 나치 독일의 오스트리아 점령 후 – 나치가 그 이미지를 선전에
활용했음에도 불구하고 – 튜턴 기사단은 폐지되었지만, 기사단은 이탈리아에서 그 조직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1945년, 나치의 패망 후 튜턴 기사단은 다시 돌아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조직을 복구하였습니다.
오늘날 튜턴 기사단은 자선과 구호단체로서 말타 기사단과 같은 길을 걷고 있습니다. 과거 발트 지역에서 피비린내 나는
혈전을 벌이며 동유럽의 역사 흐름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독일 교단(Deutscher Orden)은, 오랜 고난의 세월을 거쳐
이제 소박했던 원점으로 되돌아와 그리스도의 자선을 행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