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rdo domus Sanctæ Mariæ Theutonicorum Ierosolimitanorum
[3] 튜턴기사단의 조직과 이념
1192년에 창단된 튜턴 기사단은 80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기사단의 사상과 기능과 구성은 시대에 따라 변화해왔으므로
간단하게 다룰 수 있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주로 본문에서 다루고자 하는 내용은 13~14세기에 해당되는 것입니다.
또한 본문에서는 필요에 따라서 기사단과 교단이라는 용어를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는데, 동일한 무장 수도조직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이고 있다는 점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군사 교단(Military Order)의 시초는 1차 십자군 성전 후 순례자 및 성지 보호를 위해 예루살렘에서 결성된 일단의 기사들의
결사인 성당 기사단(Order of the Temple)이었습니다. 이러한 종교 기사단의 원리는 군사와 종교적인 삶을 결합시킨
것이었습니다. 종교 기사단은 신을 위한 성전을 수행하는 군사조직이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카톨릭 수도회로서 청빈과
순결과 복종의 종교적인 삶을 동시에 추구했습니다.
성당 기사단과 뒤를 이어 창설된 구호 기사단, 튜턴 기사단과 같은 군사 교단들은 교회에 의해 이론적인 뒷받침을 받고
있었습니다. 기사계급의 형성은 기독교 교회가 기사들에 대해 신학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그들에게 걸 맞는 기독교적인
행동규범을 마련하려는 움직임으로 이어졌고, 그리하여 기독교 성전과 기독교 전사(Miles Christiana)라는 사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론은 시토 수도회의 창시자이기도 한 클레르보의 성 베르나르(St. Bernard)와 같은 이들의 설교에 의해 크게 힘을
얻었습니다.
위하여 바쳐져야 했습니다. 시토 수도사들이 노동을 통해 신의 길을 걷고 있듯이 기사들 역시 자신의 전투 능력을 신을 위해
사용해야 했습니다. 신성한 목적을 위하여 비기독교적인 살상 행위는 정당화 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성지를 호시탐탐
노리는 악마의 대리인 이슬람 군대와 싸우는 것은 신에게 바쳐진 성전이었고, 이 성전에서 전사한 이들은 순교자의 반열에
오를 만한 자격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군사 교단에 속한 기사들의 성전은 일종의 고행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세속적인 즐거움을 버리고, 불확실하고
위험한 세상의 저편으로 떠나 종교적인 검소한 삶의 길을 따르는 한편 검으로써 자신의 가치를 신에게 증명해 보여야 했습니다.
3-2. 정당성
기독교의 성지가 모여있는 팔레스타인은 ‘원래부터 기독교인들이 정당한 소유권을 가지고 있는’ 지역이었으므로 당시의
유럽인들은 이슬람 교도들과의 전쟁에 대하여 그 정당성에 별로 의문을 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튜턴 기사단이 진출한
발트지역에서는 중동지역의 성전에서는 없었던 여러가지 의문점들이 발생하였습니다.
발트 지역의 이교도들 전체가 무력 정복의 대상인가? 아니면 침략해오는 이교도들만이 무력사용의 대상인가? 그 이교도들과
동맹을 맺거나 협상을 벌일 수 있는가? 이교도들의 조건부 항복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그들과 평화 협정을 맺을 수 있는가?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 개종 권한은 교단의 기사와 교회의 성직자 중 누가 가지고 있는가?
이러한 부분들에 대한 기사단의 행동은 언제나 논란의 여지가 있었습니다. 특히 개종한 이교도들에 대한 적절한 처우의
문제는 거듭해서 제기되고 있었고, 교권의 일부 성직자들은 아예 무력을 통한 프루스 인들의 개종 사업 자체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기사단은 리미니의 칙령으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부터 정복사업에 대한 일종의 ‘면허’를 받아놓은 상태였고
발트 십자군 운동은 교황으로부터 권위를 직접 부여 받은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의 입장에서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궁극적인 목적을 효율적으로 달성해야 했습니다. 더군다나 기사단은 발트지역 카톨릭 세력의 보호자였고 이교도들과의
전쟁에서 수많은 목숨과 자금을 뿌리는 것도 바로 그들이었습니다.
(*리미니 칙령의 내용은 이미 소개한 적이 있으므로 생략합니다.)
그룬발트 전투(=탄넨베르크 전투) 이후에는 크라쿠프 대학의 법학자인 파울루스 블라디미리(Paulus Vladimiri)로부터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투 후 기사단 측에서 기사단장의 대리인을 파견하여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에 대한 십자군을
다시 일으키려고 시도했는데, 여기에 대하여 폴란드 측에서는 블라디미리를 내세워 법학적, 신학적인 측면에서 튜턴 기사단의
십자군에 대한 정당성을 비판했던 것입니다.
블라디미리는 튜턴 기사단의 성전을 인가한 교황과 황제의 칙서에 대한 법적인 허구성을 따지고 들었습니다. 과연 황제의
칙서가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밖에서도 법적인 효력을 가지고 있는가? 교황의 칙령이 교황의 권한을 넘어서는 부분까지
기사단에 부여할 만한 정당성을 가지고 있는가?
더 나아가 그는 이교도에 대한 전쟁의 정당성 자체에 대해 근본적인 의문을 던졌습니다. 공격적인 이교도들과 이슬람 교도를
제외한다면 평화롭게 사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킨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벌인다는 것이 과연 기독교 교리에 합당한 것인가?
이교도라 할지라도 하나의 세속국가를 이루고 있는 세력에 대해 교황의 명령으로 전쟁을 벌이는 것이 합법적인가?
무력을 통하여 이교도들을 진정으로 개종시킬 수 있는가? 교황이라 할지라도 기독교 인이건 이교도이건 그들에 대한
자연법(Natural Law)의 침해를 용인할 수 있는 것인가?
그러나 이 때는 보헤미아의 후스를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하던 시대였습니다. 비록 블라디미리가 이슬람 교도에 대한 무력
성전의 정당성은 인정하는 타협을 하긴 했지만 그는 곧 반격을 받게 되었고 일시적으로 이단혐의까지 받았습니다. 기사단의
이론적인 토대는 그 때까지도 견고했습니다. 튜턴 기사단이 몰락한 것은 오로지 더 강력한 적들에 의하여 무력으로 패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3-3. 모집
튜턴 기사단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독일인 중에서 모집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규정이 엄격하게 지켜진 것은 아니므로
프랑스 인, 폴란드 인, 스칸디나비아 인, 이탈리아 인과 같은 외국인 출신의 튜턴 기사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다만
기사단 내부에서 사용되는 언어는 독일어로 통일되어 있었습니다.
14세기 이후 기사단은 크게 세 지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신성로마제국에 위치한 독일 지부는 기사단 인력의 보충기지 역할을
수행했고, 나머지 두 지부인 프러시아 지부와 리보니아 지부는 이단 및 이교에 대한 성전을 주로 수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두 지부의 형제 기사들의 구성 성분에는 차이가 있었습니다.
프러시아 지부의 형제들은 거의 바이에른이나 프랑켄, 슈바벤, 헤쎈 출신의 고지(高地) 독일인들이었습니다. 리보니아 지부의
형제들은 거의 라인란트나 베스트팔렌 등지에서 온 저지(低地) 독일인이었습니다. 이러한 차이는 본래 저지 독일인으로
구성되어 리보니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던 검의 형제단(Sword Brethren)의 기사들이 튜턴 기사단 리보니아 지부로 흡수
되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습니다.
기사단의 형제들은 결혼을 하지 않았으므로 사망자가 발생할 경우 독일 지부로부터 충원이 되어야 했습니다. 각 지부에 대한
기사들의 충원은 지부 구성원들의 지역성을 고려하여 이루어졌습니다. 이러한 배려는 실용적이기도 했는데, 두 독일 지역에서
사용되는 언어의 차이가 상당해서 서로 간에 제대로 된 의사소통이 힘들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교단에 입교하고자 하는 신청자는 먼저 그 사람의 지원 동기가 순수한 것인지, 범죄를 저지른 적이 있는지 등의 여부에 대해
면밀한 사전 조사를 받았습니다. 이후 그는 지역 수도회로 소환되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았습니다.
다른 교단에 서임을 한 적이 있는가? 약혼한 여성이 있는가? 신청자가 다른 사람의 농노인가?
교단에 영향을 끼칠 정도의 빚을 다른 사람에게 지고 있는가? 건강상태가 나쁜가?
만일 이 중에서 하나라도 해당되는 사항이 있다면 신청자는 입교가 거부되었으며, 만일 거짓으로 답변했다면 나중에라도
추방당할 수 있었습니다.
만일 신청자의 자격이 적합하다는 판정을 받게 되면 다음과 같이 서약했습니다.
저는 교단의 규정과 관습에 따라 육신의 순결과 청빈을 지키고 죽을 때까지 신과 성모마리아와 기사단장과 그의
후계자들에 대해 복종할 것을 서약하겠나이다.
3-4. 교단 기사들의 삶
일반적으로 튜턴 기사단의 구성원들의 성분은 다양했습니다. 튜턴 기사단은 크게 군사조직과 구호조직으로 구분되어 있었고,
그 구성원들은 각각 기사, 서전트, 성직자, 간호사 (여성 포함), 기타 고용인들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다루는 것은
대부분 군무(軍務)에 종사하는 튜턴 기사단의 기사 형제들 (리터브뤼더Ritterbrueder)과 서전트 형제들 (디넨데브뤼더
Dienendebrueder)에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교단의 형제들은 군사적, 종교적인 삶을 동시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수도승들이었으므로 일상적인 생활은
수도사들의 그것과 별반 차이가 없었습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군무를 행하는 그들의 특수성으로 인해 발생하는 것이었습니다.
입단이 허용된 교단의 형제들은 독일에 남거나, 아니면 팔레스타인이나 아르메니아, 프러시아, 리보니아로 보내졌습니다.
그들은 대체로 각 지부에 흩어져있는 콤투라이(Komturei)로 보내졌는데, 콤투라이는 독자적인 장원을 소유하고 있는 하나의
단위 수도원으로서, 많은 경우 성채화 되어 있었으며 교단 형제들의 종교 생활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만일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이러한 단위 수도원들은 하나의 전투 단위로 기능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이 입고 있는 의복은 극히 소박하고 검소했으며 디자인을 동일하게 통일하는 것이 원칙이었습니다. 교단의 거의 모든
물품들과 심지어는 무기와 갑옷, 군마조차도 공동 소유였습니다. 수도원의 형제에게 지급되는 물품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셔츠 두 장, 바지 두 벌, 장화 두 켤레, 서코트(Surcoat) 한 벌, 침낭 한 개, 담요 한 장, 성무(聖務) 일과표 한 장, 나이프 한 자루
교단의 형제들은 가죽 코트를 걸치기도 했는데, 이러한 코트는 고급스러운 모피가 아닌 값이 싼 염소 가죽이나 양 가죽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들은 항시 옷과 장화를 착용하고 잠자리에 들어야 했고 개인 사물함은 열쇠로 잠글 수 없었으며 식사 중이거나
숙소에서는 침묵을 지켜야 했습니다.
개인 무기 및 갑주도 공동소유가 원칙이었으며 가문의 문장을 부착하는 등의 행위는 당연히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은 순결의 서약과 함께 지켜지기가 상당히 힘든 것이었는데, 왜냐하면 전투에서 무기와 갑주는 생명과 직결되는 것이니 만큼
공동 소유의 원칙을 지키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기사단장이 직접 몇 차례에 걸쳐 금지령을 내린 것에서 알 수
있듯이, 각자의 병기를 규정에 어긋나게 치장하는 행위도 종종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마상 창 시합(져스트 Joust)과 음악과 음주 행위와 같은 세속적인 오락거리는 당연히 금지되었습니다. 사냥 역시 금지가
원칙이었지만 이 경우에는 약간의 예외가 있어서 곰 사냥과 늑대 사냥은 허용되었습니다. (다만 마상 창 시합이나 사냥의
경우에는 군사 훈련을 위해 유용한 것이었으므로 예외가 허용되었을 가능성도 고려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든 공식적으로
허용된 유일한 오락거리는 나이프로 나무 토막을 깎는 것뿐이었습니다.
종교적인 고행은 식단에 있어서도 그대로 반영되었습니다. 사순절과 11월, 12월은 금식의 기간이었고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토요일에는 어떤 종류의 육식도 금지되었으며 그 외에도 20일 정도의 금식 일이 있었습니다. 기사단의 주요 식단은 계란,
우유, 죽과 물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식단의 영향과 종교적인 계율로 인하여 튜턴 기사단의 많은 형제들의 인상은 덩치 좋은
일반적인 기사 이미지보다는, 지방질이 거의 없는 메마른 이단 심판관과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교단의 형제들은 육체적인 순결 서약을 하고 있었으므로 결혼을 할 수 없었고 평생 독신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여성과는 직접
대화를 할 수 없었고, 비록 교단의 구호소에는 여성 단원들이 있었으나 언제나 교단의 남자 형제들과 격리되었습니다. 다만
순결 문제는 보다 각별한 노력을 필요로 했는데, 바로 거의 매년마다 벌어지는 전쟁 통에 발생하는 여자 포로들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순결의 준수는 기사단 차원에서 각별히 강조하고 단속하고 있었으며 사방의 유혹들로부터 완전히 해탈할 수 없을 만큼
정신력이 강하지 못한 형제들은 종종 극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갬비슨을 입지 않고 맨 살 위에 거친 사슬 갑옷을
직접 걸쳐 고통의 힘으로 성욕을 정화하는 것이었습니다.
교단의 규정에 대한 위반행위는 끝없이 단속되었으며 강력한 형벌로써 단죄되었습니다. 형벌의 종류는 위반행위의 정도에
따라 다양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기사가 죄를 저지른 경우, 그는 1년 동안 서전트(디넨데브루더)의 숙소로 내려가 숙식해야
했고 다른 기사 형제(리터브루더)들과의 의사소통이 전면 금지되었으며, 1주일 중 3일 동안은 오로지 빵과 물만을 먹어야
했습니다. 보다 무거운 범죄를 저지른 경우 범법자는 지하 감옥에 감금되었습니다. 대부분의 형벌은 채찍질이나 음식을 박탈
하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죄의 대가를 치르고 나면 다시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수 있었지만, 절대로 용서 받을 수 없는
범죄 행위가 있었습니다.
전투 중 적의 면전에서 비겁한 모습을 보였을 때, 이교도들에게 투항했을 때, 남색을 저질렀을 때
앞의 두 경우는 교단에서 추방되는 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동성애를 저지를 경우, 그 대가는 종신 투옥이나 사형이었습니다.
엄격한 규율 속에서 교단의 형제들의 하루 일곱 차례 기도를 올렸고 나머지 시간에는 수도원에 부과된 군사적, 종교적, 행정적
임무를 수행하거나 전투 훈련에 열을 올렸습니다. 만일 전쟁이 일어나고 지휘관(마샬 Marschall)이 소집명령을 내릴 경우,
그들은 수도사에서 전사로 변신하여 기사단과 소속 수도원의 깃발 아래 전장으로 출정했습니다.
교단의 형제들은 군사 원정에 나선다 할지라도 종교적인 의식 수행을 결코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기도 시간이 되면 지휘관
(마샬 Marschall)의 천막은 야전 교회로 변신했고 야전용으로 만들어진 제단이 앞에 놓여졌습니다. 경계 임무를 수행 중인
형제들을 제외한 나머지 인원들은 그 곳에서 다 함께 모여 신을 향해 기도를 올렸습니다.
다른 많은 규정과 마찬가지로 기도 규정도 성단 기사단과 동일했지만 발트 지역의 경우에는 예외가 있었습니다. 이 곳에서는
교황의 허락을 받아 새벽 녘에 첫 종교 집회를 가졌는데, 왜냐하면 북방에서는 해가 늦게 뜨기 때문에 계획된 행군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서는 새벽부터 진지를 거두고 출발 준비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전쟁을 위한 군사동원, 사열, 행군, 진지건설, 초병임무, 기타 행위들은 모두 교단 규정에 의하여 적절하게 표준화가 되어 있었고,
그 모든 것들은 전투의 효율성을 위하여 조직된 것이었습니다.
전쟁터에서 교단의 형제들은 압도적인 열세에 처하거나 상급자의 명령이 없는 한 후퇴란 결코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가호를 받는 전사들이었고, 전투에서 죽는 것은 영광스러운 순교를 뜻했습니다. 상급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과 침묵 속의
신속한 명령 수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광신성은 같은 시대의 세속 기사들에게는 좀처럼 보기 힘든 군사 교단으로서의
강점이었습니다.
교단의 형제들은 수도사와 군인일 뿐만이 아니라 동시에 숙련된 행정관리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수적으로 우세한 원주민들과
이민자로 구성된 이질적인 신민들을 다스려야 했으며 기사단의 부를 늘리기 위하여 교역에 종사하는 것이 허용되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행하는 모든 통치 행위는 매년 더 큰 행정 단위로 보고가 되었으며 성과에 따라서는 승진의 기회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엄격한 규율 속에서 단련된 교단의 형제들의 헌신으로 인하여 튜턴 기사단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외부의 여러
나라들과 내부의 신민들 위에 군림하며 번창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은 언제나 고단했고, 죽음은 늘 그들의 곁에서
어슬렁 거리고 있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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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Floyd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1.05 동유럽사에서의 비중과 후대의 영향을 놓고 본다면 그리 마이너는 아니었지만, 사실 동유럽사 자체가 마이너이긴 하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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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카르도 작성시간 08.01.03 계율을 문자 그대로 지킨다면 대단한 성직자군요...살인과 엄격한 청빈을 동시에 행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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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Floyd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1.04 이교도에 대한 살인행위 자체는 금욕적인 삶과 크게 배치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말 그대로, 군사 교단이니까요. 다만 그 이외에 교단의 이념과는 배치되는 타락의 사례들은 확실히 있었습니다. 튜턴 기사단이 가지고 있었던 권력의 크기를 생각해보면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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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목표를향하여 작성시간 08.01.04 이봐 서 슈미트 거기 비누를 줍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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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Floyd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08.01.05 슈미트 : 비누는 주워드리는데 이상한 짓 하시면 교수형이지 말입니다. 이상한 생각나면 형제님 등짝에 채찍질이라도 해드리지 말입니다. 아파서 싫으시면 맨살위에 사슬갑옷이라도 한장 걸치고 다니시지 말입니다. 따가워서 싫으시면 그냥 어디가서 이교도나 하나 때려 잡으시지 말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