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보기도를 위한
기초 정보
School of Practical Warfare
제주도 편
헤롤드 리스트
작성자 제 3 조
김옥진 김석봉
김영구 전재형
석미정
가. 자료 수집과
자료 분석
역사적인 조사
(Historical Research)
1.도시의 역사
A. 도시의 건설
1.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에 대한 紀元설
1. 삼성혈 기원설
제주 원주민에 의해 건립 씨족사회에서 3성인을 계기로 고대 부족국가가 형성되었다는 설
2. 자연 관계를 통해 설명하는 설
1C.경에 있었던 화산 폭발 후 생존자들이 농경생활을 이루며 집단을 형성한 것이 제주지역의 역사적 기원이라는 설
제주의 역사
476년(백제 문주왕 2)에는 백제와 통교하여 탐라국 사자가 토산물을 바치나 왕이 사자에게 은솔(恩率) 벼슬을 주었고, 498년(동성왕 20)에는 탐라가 조공을 하지 아니하므로, 왕이 친히 정벌하기 위해 무진주(武珍州;光州)에까지 이르자 탐라왕이 듣고 사신을 보내어 사죄하므로 그만두었다. 백제가 망하자 662년(신라 문무왕 2)에는 탐라왕 도동음률(徒冬音律)이 신라에 항복하여 신라 말까지 그 속국이 되는데, 이 무렵에는 중국의 당나라와 일본과도 통교하여 사신의 왕래가 빈번해지다.
938년(고려 태조 21)에는 탐라국 태자 말로(末老)가 조공하므로 신라의 예에 따라 성주.왕자의 작위를 주었고, 1105년(숙종 10)에는 탐라군(耽羅郡)으로 편제되어 고려의 일개 지방 군·현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의종 때에는 현(縣)으로 강등되었으며, 1270년 (원종 11)에는 김통정(金通精)이 삼별초를 거느리고 입도(入島)하여 그들의 최후의 아성으로 삼았으나, 1273년(원종 14) 김방경(金方慶)을 보내어 원나라 군사와 함께 이를 쳐서 평정하였는데, 이 때부터 약 20여년 간 원나라의 직할지가 된다. 탐라총관부(耽羅摠管府)는 원이 탐라에 설치했던 대표적인 관부였으며, 그 장관으로는 다루가치가 파견되었다. 제주에 목마장을 서리하여 말, 소, 약대, 나귀 등을 방목한 것도 이 무렵부터의 일이었다.
그 후 1294년(충렬왕 20) 원은 탐라를 고려에 돌려주었는데, 그 이듬해에 고려에서는 다시 제주로 고치고 목사를 파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300년(충렬왕 26)에는 탐라현(당시 제주도)을 동·서도(東西道)로 나누고 귀일(歸日).고내(高內).애월(涯月).곽지(郭支).귀덕(歸德).명월(明月).신촌(新村).(咸德).김녕(金寧).호촌(弧村).홍로(洪爐).토산(兎山).예래(猊來).산방(山房).차귀(遮歸) 등 15개 현촌(縣村)과 참라현의 치소(治所)인 지금의 제주시에는 대촌현(大村縣)을 두었다.그 후 원나라에서 파견한 목호(牧胡; 말먹이꾼)들의 세력이 강하여 자주 조정에서 보낸 관리를 죽이고 반란을 일으키자 1374년(공민왕 23) 최영(崔營)을 보내어 평정하고 만호 겸 목사(萬戶兼牧使)를 파견하여 다스리기 시작한다. 종전의 행적적 측면에서 군사적인 측면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1397년(조선 태조6년)에는 만호를 혁파하고 목사 겸 점철제사를 두었는데, 1401년(태종 1)에 다시 안무사 겸 목사(安撫兼牧使)로 바꾸는 등 조선조 말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쳐 제주목사의 칭호가 바뀌었다. 그런데 1402년에는 성주 고봉례(高鳳禮)와 왕자 문충세(文忠世)가 성주. 왕자의 칭호가 참람하다 하여 바꾸어 주기를 요청하자 성주를 좌도지관(左都知管), 왕자를 우도지관(右都知管)으로 고쳤으며, 1416년(태종 16)에는 오식(吳湜) 안무사의 건의에 따라 한라사을 경계로 산부을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를 두고, 산남은 양분하여 동쪽에는 정의현, 서쪽에는 대정현을 설치하고 현감을 두어 통치 하였다.
1864년(고종 1)에는 대정.정의 양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 관찰사의 관할하에 두었다가 1880(고종17) 다시 형으로 환원시켰고, 1895년(고종 32)에는 지방 관제의 개혁(乙未改革)에 따라 전국 23부(府)의 하나로 제주부(濟州府)를 두어 관찰사가 제주.대정.정의 3군을 관할하다가 그 이듬해의 행정구억 개편(13道)에 의하여 제주군이 되어 전라남도에 편입 되었는데, 이 때 제주에는 목을 설치하여 전국 유일의 목(牧)이 되었다. 섬의 특수성을 감안한 것이었다. 그리고 1897년(광무 1)에는 제주목이 목사부(牧使府)로 승격되었다가 1906년(광무 10)에 폐지되어 군이 되었으며, 1914년에는 정의.대정 2군을 혁파하여 제주군에 통합하였다. 이 때 추자면도 제주군에 통합되어 13면이 되었는데, 이를 열거하면, 제주,구좌(舊左),신좌(新左),구우(舊右),신우(新右),정의(旌義), 동중(東中),서중(西中),우면(右),대정(大靜),중면(中),좌면(左), 추자(楸子) 등이다.
그리고 1915년에는 도사체(島司制)로 개편되었고, 1931년에는 제주면이 읍으로 승격되었는가 하면(1읍 12면),1935년 4월 1일에는 행정구역 명칭 변경에 의해 정의를 성산(城山), 동중을 표선(表善), 서중을 남원(南元), 우면을 서귀(西歸)로, 중면을 안덕(安德), 좌면을 중문(中文)으로 고쳤으며, 신좌를 조천(朝天), 신우를 애월(涯月), 구우를 한림(翰林)으로 각각 고쳤다. 해방 후인 1946년 8월 1일에는 제주도(濟州道)로 승격하는 동시에 북제주와 남제주 2군을 새로 설치하였으며, 1955년 9월 1일에는 제주 읍을 시로 승격하여 1시 2군 12면이 되고, 1956년 7월8일 서귀.대정.한림 3면을 새로 설치하였다. 그리고 1980년 10월 21일에는 남제주군의 남원면과 성산면, 북제주군의 구좌면과 애월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여 1시 2군 7읍 6면이 되었고, 1981년 7월1일 서귀읍과 중문면을 합하여 서귀포시로 승격됨으로써 2시 2군 6읍 5면이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제주도 도시형성의 배경
1. 촌락의 역사
제주도의 물은 크게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와 빗물을 고이게하여 사용하는 봉천수로 구분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최대 강우량을 보이면서 생활용수로 사용할 물은 귀하다. 그것은 고려시대까지 화산활동이 이뤄진 때문이다. 지표 바로 밑에는 현무암이고 트고 작은 굴이 형성되어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작은 굴들을 '숨골'이라고 한다. 비가 오면 물은 땅밑 숨골을 통하여 흐르다 바닷가에 이르러서야 솟아난다. 때문에 산간이나 중산간 마을들은 드물게 솟아나는 용천수나 봉천수에 의존했다. 반면에 해안부락에서는 바닷가에 질 좋은 용천수를 찾아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양촌 : 근세 조선 초기에는 제주, 대정, 정의를 연결하는 관도를 중심으로 중산간의 유림 부농들이 동족부락을 형성하며 경제 생활의 중심지대를 형성했다.
어촌과 화전촌 : 양반에 눌린 서민들은 해안지대에 이주하여 어촌을 형성하거나, 또는 산촌에 반농반목의 화전촌을 형성하였다.
해안촌과 일주도로 : 해안촌은 일주도로 연변부에 발달한 해안취락형태. 1917년 해안을 연결하는 일주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지방행정과 경제생활의 중심지가 해안촌락으로 옮겨졌다.
중산간 부락의 수난과 개발 : 중산간 부락은 100-200m의 고지 사이의 구릉 평야에 발달한 농촌형태이다. 해상 문명이 봉쇄되었던 조선 중엽까지는 경제 농목(農牧)이 여기서 발생하였다. 縣村의 치소(治所)가 서고, 유림들의 대다수가 여기에서 배출되었다. 1948년 4.3 사건이후 화전촌과 중산간 부락을 해안으로 강제 소개하여 이주시켰다. 큰 수난 후 5.16 이후에서야 중산간 지대에 개발 노력이 시작되었다.
산간부락 : 300m 이상의 반농반목의 산촌형 원시형 해안 수렵생활에서 정착 경제의 농목생활을 피하여 우마군을 따라 올라온 것임. 방목, 화전 하면서 야수 때문에 집단 생활을 하였다.
2. 도시의 형성
탐라라는 부족국가는 고려 숙종 10년까지 이어져 내려왔으나, 웅대한 왕국이나 고도의 문화국가를 이루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백제가 강해지면 백제에 조공을 바치고, 신라가 통일된 후에 신라를 섬겼고, 고려가 건국되니 속국이 되면서 국가적 명맥을 이어왔다.
숙종 10년에 비로소 고려의 중앙집권제 밑에 들어가 탐라군이 되었지만 원종 때에 삼별초군이 입도 하여 항파두리를 쌓아 항거하자 몽고군의 지원으로 이를 토벌함으로 약 1세기간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향촌마을은 임진. 병자란 이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아마도 많은 주민들이 이주를 하고 마을이 재편되었다.
대체로 마을이 선 곳은 400년 전으로 보지만 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제주는 임란. 병자의 병란을 겪지 않는다. 대신 조선 초기까지 왜구에 의한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해안마을에는 자경단까지 있을 정도였고, 군 현을 해안에 근접해 있다는 이유로 물 사정이 나쁜 중산간으로 옮겼다. 왜구의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던 지를 반증해 준다.
조선조 태종. 세종 연간에 조선으로 완전 통합된 이후 군 현에 해당하는 도시만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다가 조선 반도가 전란에 휩쓸린 다음 많은 사람이 제주로 이주하면서 도시의 틀이 짜여졌다. 17세기말쯤 서귀포시의 보목리가 형성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제주에는 육지의 발달된 농법이 들어왔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마을은 골짜기에서 나와서 바다를 보고 자리잡게 되었다. 제주는 집성촌을 찾아보기 힘든데, 그 이유는 마을 입지의 주요 요소인 생수가 한정되어 있었고, 전통적인 상속제도가 남녀가 동등했으므로 장자 중심의 종가가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철학과 신조는 무엇인가?
제주의 도시들은 원주민의 생존을 위한 여러 조건을 갖춘 지역이다. 이 지역에 주민이 거주한 것은 선사시대 유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a. 그들이 현재의 제주시 인근지역에어 생활을 시작한 가장 큰 이유로 추정되는 이유는
1. 해안은 중심으로 한 어로작업의 유익
2. 유일한 식수원인 해안 저지대를 중심으로한 지하수의 용출
3. 해상 교역을 통한 정보와 문화적 이점등 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b. 그들의 주요 철학과 신조의 기반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현재까지 강하게 전통 문화 속에 남아 있는 삼성혈 신화에 대한 신봉, 뱀신숭배, 용왕숭배, 각 마을마다 최소 2개 이상 존재하고 있는 신당의 존재 등을 고려한다면 이 지역의 조상들이 강하게 믿었던 신념은 정령 숭배적 세계관의 전형적인 현상인 범신론적 신념이 가장 강한 사고쳬계엿다고 할 수 있다.
2. 역사 속에 나타난 제주지역의 외교관계를 고찰해 보면 생존을 위한 사대(師大)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예로는 고. 양. 부의 15대 손이 신라에 가서 벼슬을 받아 온 사건, 백제의 흥황기에는 백제의 편에 신라의 흥황기에는 신라의 편에 서서 조공을 바치고 고려 시대에 와서는 스스로 고려의 속국이 된다. 열악한 주거환경-특히 농경이 어려운 토양과 풍토-에서 외부의 원조가 없이는 생존이 어려웠음이 그 원인으로 생각된다. 그 예는 다음과 같다. 1. 고. 양. 부 3성인이 출현 후 벽랑국의 공주와 결혼하면서 농경이 시작되었다는 전설 2. 조선시대 제주의 기근을 위해 육지에서 싵고오던 살 운송선의 침몰을 막은 뱀을 신으로 모신 유래 등에서 보는 것처럼 빈약한 농경지와 태풍 등에 따른 식량 부족과 어로의 장애를 들 수 있다.
이 도시의 장래의 비전은 무엇인가?
공식화된 비젼이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제주의 비젼을 위한 중요한 사상적 흐름을 적는다.
현제 제주에는 제주를 '평화의 섬'으로 선포하려는 움직임이 태동하고 있다.
'평화의 섬'이란 제주를 비무장 비군사화하여 남북한 갈등의 해소 및 동북아/북태평양의 긴장완화와 평화공존체제 형성에 일익을 담당한다는 생각이다. 나아가서 제주를 동북아 평화거점의 핵심거점우로 부각시키려는 능동적,진취적입장을 수용한다는 것이다. 이익과 이념의 갈등 구조를 초월한 진취적인 '해양권적 사고의 기반이 필수적 MIND로 필요해진 것이다. 마치 홍익인간의 이념과 같다 하겠다.
3. 이 도시의 원래의 이름과 의미는 무엇인가? 이름이 바뀌었나?
연혁 (이름 변천사)
상고시대-삼국시대 : 탐라(탁라)국
938년(고려 태조21년) :탐라국 태자 고말 고려입조
1105년(고려 숙종10년) 탐라국호 패지, 탐라국 설치
고려 고종 년대(1192-1259)탐라군을 제주로 개칭
1275년(충렬왕 원년)탐라국으로 회복, 총관부 설치
1294년(충렬왕20년)고려로 환속, 제주로 복호
조선조 초기(태조 년대) 제주목에 도안무사 겸 목사를 둠
1416년(태종16년) 제주목 외에 정의 대정현 설치
1895(고종32년) 제주목을 부로 개편, 관찰사를 둠
1906년(광무 10년) 목사를 폐지, 군수를 둠
1910년(융희 4년) 정의, 대정군을 제주군에 합군
1915년5월(일제시대) 군제 폐지 도제로 개편
1946년8월1일 :도제실시(2군 1읍 12면)
1955년9월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1981년7월1일 서귀읍과 중문면을 통합, 서귀포 시로 승격
1995년 현재:2시 2군 7읍 5면 31개동
4. 이 도시에 대한 다른 이름이나 토속적인 호칭이 있는가? 그 이름에는 어떤 의미가 있는가?
탁라:
- 탁은 풀잎'책'자라는 뜻이다. 라(羅)'벌릴라'자인데 여기서는 나라의 뜻으로 통한다. 중국사기 하본기에 풀 옷을 입은 섬 오랑캐라는 뜻으로 도이훼복이라는 말이 있는데, 탁라는 풀로 짠 옷을 입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라는 뜻으로 본다.
탐라:
- 탐(眈)자는 즐길 탐 또는 깊고 멀 탐자인데 탐라라는 뜻은 깊고 먼바다에 있는 나라
제주(濟州)의 뜻은 제자가 건널 제의 뜻이니, 바다를 건너가는 고을이라는 뜻이다.
영주:
- 중국의 신선설에서 나온 이름. 세상에 신선들이 사는 곳은 봉래산, 방장산, 영주산이다. 이를 삼신산이라 하는데 영주산이 한라산이다. 이것에서 영주가 유래됨
본 도에 대한 이름은 본도 사람 스스로가 붙인 것이 아니라고 본다. 제주와 외교 관계가 있던 나라들에서 편의상 나름대로 불렀기 때문에 일정한 나라 이름이 없이 여러 종류가 전해지는 것임
예)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마한 서쪽 바다에 주호가
후한서-마한의 서쪽 섬을 주호국이라고 불렀다.
탁라, 탐라, 제주가 가장 많이 사용된다 .그 외에 섭라 ,탐부라, 탁모라, 석모라, 석라, 담라, 둔라, 모라, 영주(중국에서 불려 지는 이름-한라산을 영주산-瀛洲山이라고 한데서 유래)
고려사 지리지 에는 숙종 10년 (1105년)에 탁라를 고쳐 탐라군(眈羅郡) 으로 하였다.
이어서 충렬왕 21년(1295년)에 탐라를 제주(濟州)로 고쳤다.
그것이 어떤 종교와 연관되어 있는가?
아니다.
혹 마귀 적이거나 주술적인 이름은 아닌가?
아니다.
이름이 축복인가? 아니면 저주를 의미하는가?
아니다.
B.도시의 역사
B-1 이 도시는 나라 전체의 생활 그리고 특성과 관련하여 어떠한 역할을 해 왔는가?
역사적으로는 본 도의 속국, 조공, 부용의 역할을 함.
환태평양 문화권에 놓았을 때 그 문화권을 연결하는 공간으로 중요성을 지닌다.
제주의 고후삼형제가 신라에 입조 함으로 백제보다 신라에 실질적인 속국관계 유지
나당연합으로 인한 영향력으로 당과의 무역교류도 한발.
참고-하멜 1668년 하멜 표류기 출판 서구에 우리 나라를 널리 소개
지리적으로는 만주와 한반도 제주도를 연결하는 한민족의 역사적 존재
B-2 이 도시에서 특출한 지도자가 나왔을 때 이 도시에 대한 그들의 비전은?
고대사회 형성時 삼성인의 권력형성은 전쟁을 하거나 피흘림 없이 형성이 되었다. 고려에 예속되면서 중앙관리의 지배적인 구조로 인해 제주 원주민의 정치적, 사회적 참여의 기회가 어려웠다. 조선 후기 제주民 중 재망있는 자를 향직에 임명(자리가 너무 한정적이다. 따라서 자신이 속해 있는 지방에 대한 관심을 전환시킴)
1946년 제주도 승격이전까지 제주민의 항쟁과 쿠데타 외에는 제주민의 정치지도자를 배출되는 것은 불가능함
B-3 이 도시의 정부나 정치적 지도층에 어떤 급격한 변화가 일어난 적이 있었는가?
고대사에는 자립자체 구조 , 삼국시대 이후에는 예속 종속적 구조
고려말에서 지금까지 중앙체제 집권화
삼국시대 - 신라와 백제의 권력다툼
6C후반 신라 삼국통일 탐라는 신라에 속하게 되었다.
고려시대 - 1005년 탐라국에서 고려행정명인 탐라군으로 개명(중앙에서 관리파견)
1273년 삼별초 항몽 이후 탐라 총관부를 설치. 원에 일본정보를 위한 병참기지화
조선시대 - 1394년 태조 제주본토화 정책
1445년 태종 제주귀족 모두 평민화(신라시대 이후 세습되던 성주, 왕자직을 패함으로 제주 자치제가 아니라 조선의 속국으로 되어 버렸다.)
1416년 행정재개편 - 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설치
근 대 - 1946년 8월1일 :도제실시(2군 1읍 12면)
1955년 9월1일 제주읍이 제주시로 승격
B-4 이 도시의 경제 생활에서 의미심장하거나 갑작스런 변화들이 있었는가? 기근이 있었는가? 경제공황이 있었는가 기술혁신이 있었는가 천연자원이 개발 된 적이 있었는가?
급격한 변화와 자원개발
1. 원래 이 도시는 목축업이었는데 몽고의 식민지로 목장이 개발시켰다. 원의 탐라총곤부 이후 목축지 조성
2. 1960년 이후 감귤 농장 시작으로 많은 소득을 올림
3. 전략적 관광산업 육성지역으로 선정 - '제주도 종합 개발 계획'이 1982년 중앙정부에 의해 세워졌다. 1982년-2001년까지 20년을 계획으로 1. 지역개발개획 2. 관광계발계획 3.국제자유지역조성계획등 3개 부분으로 짜여져있다.
그러나, 국제자유지역 조성 계획은 예산 문제등 중앙부처의 이견에 의해 축소, 연기되었다.
기근과 경제 공황
1. 제주를 옛말로 三災의 환경-수재, 한내, 풍재 거듭되는 흉년이었다.
2. 크고 작은 제해가 매해마다 있었다. 지리적 위치상 태풍진로선상에 있었고 집중호우의 특성이 있다. 잦은 흉년 와 자연재해가 있었다.(해를 거르지 않을 정도)
예) 제주도 역사이래 대 흉년 1794년 영조 18년-대부분의 가옥이 훼파 될 정도 태풍과 해일이 겹 침- 굉장한 기아가 있었다.
근대에 와서는 1945년경 일본 패잔병 본국 귀한 시 큰 흉년이 있었다.
3. '제주도 종합 개발 계획'의 부작용으로 인해 토지의 상당부분이 외지인의 소유로 넘어가고 수익의 주요부분이 외지로 빠져나가는 자금유출현상 발생
B-5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이주민들이 있었는가 도시전체에 새로운 언어나 문화가 유입됐나?
주요 민족대이동
1. 고려후기 - 몽고에 제주도 예속. 목장 설치, 당시 제주인구1만명
원나라 관리병정 3000명 파견
2. 조선 왕조초기에서 부터 300년전 쯤 임진왜란, 병자호란이 일어난 당시에 마을이 형성되었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많은 육지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3. 대동아 전쟁말기 일본군 20만 병력 배치 제주인구 15만
4. 광복전후 2년 패망친일 타지인 영입
5. 6.25시기 15만 육지 피난민과 중공군 포로수용소 건립
제주의 마을 공동체에 대한 기초이해
제주문화의 형성배경에 대한 세 견해 (제주문화의 위상과 관련)
1.환경적응론- 완결된 생활공동체적인 독자적인 문화권형성
2.주변부문화이론 - 한반도문화의 하위문화권으로 해석
3.외래문화유입설- 동아시아 문화권의 한 부분으로 조망
이 시각에 따라 제주문화는 근본적으로 남방문화인가 북방문화인가, 탐라의 원주민은 어디서부터 유래된 것인가, 삼성신화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등등 제주문화의 원류를 찾으려는 시도들에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 관점이 서로 틀리기 때문에 직접 찾아 연구하시면...)
4-5C 고대국가발전 단계에서 볼 때 탐라시대는 평등사회 단계였던 군집사회와 부족사회를 거치고 고인돌과 철제무기를 사용하던 족장사회로 이어졌으며 (기원 후 0년에서4,500년까지) 독자적인 대외관계를 주력함으로 국가단계를 형성했다. 7C경 백제신라와 무역-8,9C경 백제 계의 유물대량유입. 이후 백제와 신라와의 전쟁이후 신라가 승리를 함으로 신라에 예속. 신라문화 대량 유입
B-6 이주자들은 소수민족들을 어떻게 대우했는가? 민족이나 종족 집단들은 서로 어떤 연관을 가지고 살아왔나? 인종차별을 합리화시키는 법률이 있었는가?
민족이나 종족집단들의 연관성
1. 삼국과 고려시대는 본도와 탐라간의 속국관게 고려 태조 탐라의 자치권 인정-성주와 왕자라는 칭호 사용)
2. 1105년 고려-국호폐지, 중앙관리 파견 지리적 위치상 관리감독 소홀-큰 민폐와 파견된 관리들의 부정부폐가 심하였다. -이와 관련된 백성들의 크고 작은 난들이 일어난다.
예)1168년 양수의 난, 1202년 번석, 번수의 난 등
3. 공동생활권의 영역을 가지고 있다.
- 거래권,통혼권,사회조직활동권,신앙권,교육건,
4. 유배지로써의 제주- 원나라의 유배지로서는 원나라의 도둑들이 거의 죄인,- 목장횡포,
조선시대 유배인 들은 정치적으로 밀려난 명신들 이었다.
5. 1629년 출육제지법 제정으로 제주도민의 출육을 금지했다. 재난과, 세금탈취, 관리횡포로 말미암아 도민들이 육지로 탈출하는 것에 대해 막았던 법. 200년후 1833년에 해제
B-7 이 도시의 지도자들이 약속을 어긴 것이 있는가?
예를 들자면 고려 충선왕이 제주백성들 보호를 명했으나 이후로 실제적인 탐욕관리들의 통제 는 거의 불가능했음
근대: 해방이후-제주도 제해 복구 위원회(1949년12월)
1960년대 다채로운 개발사업등이 실천진행중
B-8 이 도시에 전쟁의 직접적인 영향이 있었나? 전투가 실제로 있었나? 피흘림은 있었는가?
1. 1862년(철종13년)-조세와 착취중지 요구가 목적, 공권력의 탄압에 대항한 농민봉기, 농민 항젱 - 5명의 농민 압제자 처형, 약 20일 후 자진 해산
2. 1891년 2월 - 조세와 착취중지 요구가 목적, 공권력의 탄압에 대항한 농민봉기 - 지도자 1명 처형됨 관련자 8명 유배됨
3. 1898년 농민항쟁(방성칠난)- 주도세력은 전라도에서 유입된 남학당이라는 종교 세력- 조세감면과 조세의 형평성 요구- 지주세력과 관의 연합군을 진압함- 사상자 통계 없음- 정부군에 의해 다시 진압됨
4. 1901년 농민 항쟁-(이재수난 또는 성교난)- 천주교도와 제주도민과의 충돌- 천주교인 500-700 여명 처형됨- 정부군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진압됨
5. 삼별초의 난
6. 왜란 - 고려이후 이웃 일본의 해적 등에 의한 침략이 자주 있어서 마을마다 자경단을 구성할 정도였음
7. 1948년 4/3사건 - 당시 인구 17만 명중 사망 약 5만 여명. 이제민 약 10만명. 전체 마을중 약 70% 완파
B-9. 가난한자와 억눌린 자들이 이 도시에서 어떠한 대우를 받았는가? 지도자들은 탐욕스러운가? 정치, 경제 또는 종교지도자나 기관 중에서 부정이 자행되고 있는가?
1. 1305년 행정적, 정치적 고려예속으로 인해 고려관리 직접 정치행정담당. 권력형 횡포, 공공연한 수탈이 제주민의 생활고를 더 어렵게 했음
2. 1404년 세습되던 성주, 왕자제도 폐지 제주귀족 모두 평민화를 통해 실질적인 조선 예속화 후 중앙관리 파견, 탐욕관리와 민폐,세금포탈,횡포로 인한 지역감정의 원인이 됨
B-10. 이 도시에 영향을 미친 자연재해는?
제주에 영향을 주는 자연 재해는 주로 매년마다 계속되는 태풍과 가뭄이다.
B-11. 이 도시에는 표어나 모토가 있는가? 그 의미는?
자료 없음
제주도 당국은 제주도가 21세기 동북아의 핵심도시로 도약할 것에 대한 목표를 세우고 도정을 진행하고있으나 이에 대한 도민의 참여와 반응에 대하여는 자료가 없다.
B-12. 사람들은 어떤 종류의 음악을 즐겨 듣는가? 그 의미는?
자료없음
B-13. 오늘날 이 도시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들의 긍정적인 특징들을 설명하기 의해서 사용하는 말은 무엇인가? 이 도시의 부정적인 특징들을 설명하기 의해서 사용하는 말은 무엇인가?
삼다 삼무(三多 三無)
2. 도시의 종교역사
A. 비 기독교적인 종교의 역사
1.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에 이 지역에 살고 있던 사람들의 종교적인 관습과 견해들은 어떤 것이었나?
현재와 현대 이전 제주도민의 신앙은 원시 샤머니즘과 유교, 불교를 절대적으로 신봉하고 있었다.
2. 이 도시의 건설에 있어서 종교적 사항을 중요하게 고려했는가?
제주도는 전통적으로 어업경제권을 형성하고 있었고 대부분의 주요 인구밀집지역이 해안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어업문화권 중심의 자연 발생적 도시인 제주와 서귀포 등의 인구밀집지역은 해양 중심의 샤머니즘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 현상은 비의도적이다. 그러나 제주도민의 중심문화는 정령숭배와 자연 숭배적 신관, 자연관위에 세워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비 계획된 도시 발발의 중심에는 자연과 정령숭배를 중심으로한 문화가 자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3. 비 기독교인들이 대단위로 이 도시에 이주한 적이 있는가?
1960년 이후 제주의 인구 유동에 가장 큰 부류는 세력은 관광객들이다.
4. 프리매이슨과 같은 비밀사교집단이 이 도시에 있는가?
자료 없음
5. 이 도시에서 무당들, 사단주의자 집단 또는 그런 유의 다른 이단들이 활동한 적이 있는가?
많은 수의 무당들이 역사 이전부터 제주에서 활동해 오고 있고 약 18.000개의 신을 무당, 개인 마을 공동체, 지방정부차원에서 섬기고 있다.
B. 기독교의 역사
1. 기독교가 언제 이 도시로 들어오게 되었는가?
선조15년(1582)서양선의 난파로 섬에 표류하였으니 이것이 기록상 나타난 것으로는 서양인이 제주에 왔던 시초였다고 보고 있으며 인조6년(1628)9월에는 네덜란드인 박연이 상선으로 일본으로 가는 도중 풍파로 인해 제주도 연안에 포착했다가 제주로 옮겨가 귀화하고 박씨로 . 총포 기술자로 후대를 받았다.
그후 효종 4년(1653)역시 네덜란드인 夏梅兒(Handric Hamel)이 대만을 거쳐 일본으로 행하던 중 폭풍을 만나 난파되어 일행 30여명이 제주도 화순 앞바다에서 표류됨 이때 그들이 제주 사람들을 식인종으로 오해하여 두려워했고 서울로 압송되어 14년 동안 억류생활.1666년 조서 땅을 탈출성공 일본으로 건너갔고 1668년 본국으로 돌아감
효종실록에 보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됨,-기독교인으로서 제주도를 거쳐 지나간 첫 번째 사람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2. 어떤 상황에서 들어오게 되었는가?
1800년대 말 한반도 전역과 제주도는 외세의 거센 힘에 극한 혼란기를 거치고 있었고, 제주도내는 계속적인 민란의 와중에 민심의 수습이 어려운 대 혼란기였다.
1. 카톨릭 선교의 배경과 역사
1899년대 말 중앙정부의 전폭적인 후원과 프랑스 제국의 후원을 받은 프랑스의 선교사들이 제주에 들어오면서 교회가 제주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구한말 폭정과 각종 항쟁 등으로 중앙정부와의 관계가 좋지 않던 시기에 들어온 천주교회는 초기에 약 500명 이상의 신자를 만들게 되었다.
그들은 수감된 카톨릭 신자를 구하기 출옥시키기 위해 감옥 문을 부수는 등 그 전도의 배경에 프랑스와 조선 중앙정부를 배경으로 초법적인 권력을 통해 전도하고 있었다.
이에 반감을 가진 제주도민에 의해 1901년 성교의 난이 일어낫다는 사관이 있다.
2. 개신교 선교의 배경과 역사
1990년에 이르기까지 본토에서는 선교사업이 활발하게 급진전되어 가고 교회가 성장되고 부흥해 가고 있었으나 제주도는 그때까지 복음의 빛을 받지 못했다.
소문난 불량배 출신 '이기풍'-마포삼열(S. A . MOFFET)선교사가 평양 서문로 길을 가고 있을때 돌로 때려 거꾸러 뜨렸던 불량배였으나 나중에 회개하고 전도사가 되었다. 1903년에 평양신학교에 입학. 제1회 졸업.
1907년 9월17일 드디어 합동공의회 시대의 종막이 내리고 한국인 목사 7인이 장립을 받음 ''어둠과 죽음의 그늘에 앉은 자에게 비취는 큰 빛"이 비취기 시작한 해요 한국 장로교회의 신기원을 이룩한 날이라 할 것이다. 1907년 9월17일 평양 중앙교회에서 조서예수교장로회 독로회가 조직-7인의 목사중 이기풍 목사를 제주에 파송-이기풍 목사를 제주도 선교사로 파송한 큰 의의는 한국 교회가 처음으로 장립한 목사 중 1인을 특별히 하나님께 바침으로써 받은 바 은혜에 보답하자는 뜻이었더라고 되어 있다. (조선 예수교 사기 하권 PP318-319)-1908년 이른 봄 제주에 상륙(성안교회연혁참조)
그때 제주도의 배경은 1899년에 있었던 갑오 聖敎亂으로 거칠어진 인심은 서양교에 대한 적개심이 팽배했다. 관가에 고발하였으나 이미 기독교 선교가 허락된 정부였다. 핍박을 겪으면서 10여년을 사역함
2. 과거에 기독교 지도자들이 프리메이슨에 있었던 적이 있는가?
자료 없음
3. 기독교 공동체가 이 도시에서 어떤 역할을 해 왔는가? 또 이것으로 변화는 있었는가?
1917년 전남노회가 전라노회에서 분립되며 전남노회가 주역을 맡아 제주선교 전력. 개화에 의한 간접적 효과외에 사회 전반에 걸친 직접적 영향력을 나타내었다는 보고는 접하기 어렵다. 교회가 제주에 미친 영향력들은 대부분 비계획된 피동적 활동의 부산물이라고 정의 할 수있겠다.
3.1 운동에서 교회 지도자들의 주도적 역할 담당에 대한 평가등은 제주의 역사에서 깊이 조명되고 있는 부분이다.
현제 제주교회의 주구성원은 생계 등의 이유로 제주로 이주한 사람들이다. 이것이 제주 선교의 한계성을 보여주는 주요 요인이라 생각된다. 디아스포라 선교의 수동적 선교 성향이 제주에서 교회의 영향력의 극대화를 낳지 못한 요인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
4. 이 도시에 있는 기독교는 발전하고 있는가? 정체상태인가? 감소상태인가?
현재 기독교 성장은 거의 정체상태인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제주도내 교회의 주 구성원은 제주 토착민이 아닌 6.25전쟁과 감귤., 관광 붐으로 제주에 온 외지인인 것으로 조사됨
C. 관계들에 대한 역사
1. 이 도시에서 종교들간의 알력이 있었던 경우가 있었는가?
초기 카톨릭 선교의 급진적 개혁운동(당나무 벌목)에 의한 지역 무속인과 천주교인간의 난투극을 비롯하여 '성교의 난'까지 제주지역에서 기독교와 지역민들과의 갈등관계는 지금 까지 지속되고 있다.
2. 기독교인들간에 알력이 있었던 경우가 있는가?
자료 없음
3. 이 도시에서 교회가 분열된 적이 있는가?
개신교 선교 초기에 세워진 교회가 분열된 경험이 있음
자연적인 조사
(Physical Research)
1. 이 도시에 대한 여러 가지 지도를 찾도록 하라. 특히 오래된 지도를 찾도록 하라. 이 도시의 외형적인 특징들과 관련하여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가?
근세 조선초기 제주, 대정, 정의를 연결하는 관도(官道)를 중심으로 중산간의 유림 부농들이 마을을 형성하며 경제생활의 중심지대를 이루었다. 반면 서민들은 해안에서 어로에 종사하거나 산촌에 화전촌을 형성하였다.
1917년 해안을 연결하는 일주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지방 행정과 경제생활의 중심지가 해안촌락으로 옮겨졌다. 중산간 마을은 해발 100-200사이에 조성되었다.
1948년 4.3 사건이후 화전촌과 중산간 부락을 소개하고 주민을 해안으로 강제이주시켰다.
1961년 5.16 이후에 중산간 지대가 다시 개발되었다.
2. 이 도시를 설계한 사람은 누구였는가? 그들 중에 프리메이슨이 있었는가?
프리메이슨 관련에 대한 자료는 없다.
조선 조 태종 집권기에 조선으로 완전 흡수 통합된 제주는 임진왜란 등의 이유로 많은 난민이 제주로 이주하였다.
17세기말쯤 서귀포시의 보목리가 형성
18세기 들어서 제주에 들어온 육지의 앞선 영농기법이 농업생산력을 비약적으로 향상 , 촌락들이 골짜기에서 나와서 바다를 보고 자리잡게 되었다.
3. 이 도시에 대한 원래의 설계도나 배치도에 어떤 의미 있는 구조물이나 상징물이 첨가되어 있는가?
제주도 도시형성의 배경
1.부락의 형성
제주도의 물은 크게 땅속에서 솟아나는 용천수와 빗물을 고이게하여 사용하는 봉천수로 구분된다. 제주도는 우리나라의 최대 강우량을 보이면서 생활용수로 사용할 물은 귀하다. 그것은 고려시대까지 화산활동이 이뤄진 때문이다. 지표 바로 밑에는 현무암이고 트고 작은 굴이 형성되어 있다. 제주도 사람들은 이 작은 굴들을 '숨골'이라고 한다. 비가 오면 물은 땅밑 숨골을 통하여 흐르다 바닷가에 이르러서야 솟아난다. 때문에 산간이나 중산간 마을들은 드물게 솟아나는 용천수나 봉천수에 의존했다. 반면에 해안부락에서는 바닷가에 질 좋은 용천수를 찾아서 마을이 형성되었다.
양촌 : 근세 조선 초기에는 제주, 대정, 정의를 연결하는 관도를 중심으로 중산간의 유림 부농들이 동족부락을 형성하며 경제 생활의 중심지대를 이루었다.
어촌과 화전촌 : 양반에 눌린 서민들은 해안지대에 이주하여 어촌을 형성하거나, 또는 산촌에 반농반목의 화전촌을 형성하였다.
해안촌과 일주도로 : 해안촌은 일주도로 연변부에 발달한 해안취락형태. 1917년 해안을 연결하는 일주도로가 개통됨에 따라 지방행정과 경제생활의 중심지가 해안촌락으로 옮겨졌다.
중산간 부락의 수난과 개발 : 중산간 부락은 100-200m의 고지 사이의 구릉 평야에 발달한 농촌형태이다. 해상 문명이 봉쇄되었던 조선 중엽까지는 경제 농목(農牧)이 여기서 발생하였다. 縣村의 치소(治所)가 서고, 유림들의 대다수가 여기에서 배출되었다. 1948년 4.3 사건이후 화전촌과 중산간 부락을 해안으로 강제 소개하여 이주시켰다. 큰 수난 후 5.16 이후에서야 중산간 지대에 개발 노력이 시작되었다.
산간부락 : 300m 이상의 반농반목의 산촌형 원시형 해안 수렵생활에서 정착 경제의 농목생활을 피하여 우마군을 따라 올라온 것임. 방목, 화전 하면서 야수 때문에 집단 생활을 하였다.
2. 도시의 형성
탐라라는 부족국가는 고려 숙종 10년까지 이어져 내려왔으나, 웅대한 왕국이나 고도의 문화국가를 이루지는 못했던 것 같다. 백제가 강해지면 백제에 조공을 바치고, 신라가 통일된 후에 신라를 섬겼고, 고려가 건국되니 속국이 되면서 국가적 명맥을 이어왔다.
숙종 10년에 비로소 고려의 중앙집권제 밑에 들어가 탐라군이 되었지만 원종 때에 삼별초군이 입도 하여 항파두리를 쌓아 항거하자 몽고군의 지원으로 이를 토벌함으로 약 1세기간 몽고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일반적으로 우리 나라의 향촌마을은 임진. 병자란 이후에 커다란 변화를 겪는다. 아마도 많은 주민들이 이주를 하고 마을이 재편되었다.
대체로 마을이 선 곳은 400년 전으로 보지만 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말에서 18세기에 들어서면서 부터이다. 제주는 임란. 병자의 병란을 겪지 않는다. 대신 조선 초기까지 왜구에 의한 피해가 끊이지 않았다. 해안마을에는 자경단까지 있을 정도였고, 군 현을 해안에 근접해 있다는 이유로 물 사정이 나쁜 중산간으로 옮겼다. 왜구의 피해가 얼마나 극심했던 지를 반증해 준다.
조선조 태종.세종 연간에 조선으로 완전 통합된 이후 군 현에 해당하는 도시만 계획적으로 만들어지다가 조선 반도가 전란에 휩쓸린 다음 많은 사람이 제주로 이주하면서 도시의 틀이 짜여졌다. 17세기말쯤 서귀포시의 보목리가 형성되었다. 18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 제주에는 육지의 발달된 농법이 들어왔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으로 발전하고, 마을은 골짜기에서 나와서 바다를 보고 자리잡게 되었다. 제주는 집성촌을 찾아보기 힘든데, 그 이유는 마을 입지의 주요 요소인 생수가 한정되어 있었고, 전통적인 상속제도가 남녀가 동등했으므로 장자 중심의 종가가 별반 중요하지 않았다.
4. 중요한 건축물의 건축양식이나 장소나 위치적인 관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 특히 이 국가의 정치, 경재, 교육, 종교적인 세력들을 나타내 주는 건축물들이 있는가?
아래의 주요 건축물과 공원들은 주로 조선시대 이후에 세워진 것들로써 국가에 대한 충성과 제주의 어려움을 경제적 어려움을 도왔던 사람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1. 조천 만세동산
조천읍 조천리 일주도로변을 가다 보면 동북쪽의 동산에 '3·1운동기념비(三一獨立運動記念碑)'라고 쓰여진 기념탑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의 조각상이 보인다. 이 미밋동산은 3·1운동 당시 제주도에서 맨 처음으로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온 고승로 만세동산이라 부르고 있다. 서울 휘문고등학교 재학중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약하다가 뜻을 품고 고향인 조천리로 내려온 김장환이 김시범 등 14명과 더불어 동지를 포섭하고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1일 오후 3시 미밋동산에서 조천, 신촌, 함덕리 주민 500∼600명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구호를 외쳐 도내 곳곳에 펴졌던 것이다. 지금의 기념탑은 1991년 조천 만세동산 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새롭게 들어선 것이다.
2. 사라봉. 모충사
제주시 동쪽 건입동에 위치한 봉우리로서 1.062.600㎡(321.756평) 규모의 사라봉 공원은 깎아 놓은 듯한 절벽 밑으로 세차게 부스러지는 파도의 모습이 일품이다.
사라봉 공원 남쪽기슭에 있는 모충사는 제주지역 주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사당이다. 모충사에는 의병항쟁 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김막덕 할머니 묘탑이 20m 높이로 삼각형을 이루며 우뚝 솟아 있다.
'의녀 김만덕 할머니 묘탑'은 정조 때(1794) 제주에 큰 흉년이 들자 장사해 모은 돈을 내놓아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백성들을 구해 낸 의녀 김만덕 할머니의 숭고한 이웃사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매년 한라문화제 때에는 모충사에서 의녀 김만덕 할머니를 기리는 제가 봉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만덕제'이다. 이때 제주도 일원에서 사회봉사에 공헌한 여성을 선정해 만덕봉사상을 수여하고 있다.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은 한일합방 이후 제주도내에서 독립군 자금 1만원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가 탄로 나자 혼자 책임을 떠 안고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한 지사 조봉호를 기리기 위한 탑이다.
'의병항쟁 기념탑'은 고사훈, 김석윤, 노상옥, 김만석 등의 의병들이 1909년 제주시 광양에 대장간을 마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의병을 규합하던 중 왜경에 의해 총살돼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4. 오현단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오현단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665년(헌종 6) 최진남 판관이 세운 귤림 서원이 철폐된 후, 1892년(고종 29) 김의정 등 제주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단의 유래를 살펴보면 1578년(선조 11) 조인후 판관이 1521년(중종 16) 10월에 제주에 유배되어 사약으로 죽은 충암 김정(金 )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충암묘(沖庵廟)를 짓고 제사지내게 한데서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오현단 자리인 귤림서원에 모셔졌던 오현은 충암 김정 이외에 안무사 청음 김상헌(金尙憲), 동계 정온(鄭蘊), 제주목사 규암 송인수(宋麟壽), 우암 송시열(宋時烈)등으로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부임했던 이들은 지방문화 발전에 적지 않게 공헌하였다.
오현단 내에는 이들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의 조두석(俎豆石)과 함께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 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의 마애명과 적려유허비가 남아 있다.
제주시 중앙로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5. 제주읍성
지방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그 연대는 기록상으로 확실하지 않다. 1411년(태종 11) 제주읍성을 보수했을 때 성의 둘레가 4,700척, 높이 11척이었으나 1512년(중종 7) 증축으로 둘레 5,489척 높이 11척이 되었다. 이후엔 성안에 물이 없고, 가락천과 산저천(산짓물)의 범람으로 인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루어졌다.
1565년(명종 20년) 곽흘목사가 식수난과 변란 때의 물난리를 대비하여 동쪽성을 산지내 밖으로 물려 쌓고 동· 서에 각 1문, 남쪽에는 2문을 내었다. 또한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가 성굽을 5자 더 늘려 쌓고 남문을 없애는 동시에 문마다 초루를 만들고 납북의 두 수구(水口)에는 무지개 모양으로 남수각과 북수삭을 설치하였다. 이후 1780년(정조 4)에는 김영수 목사가 산저천의 범람으로 인가가 잠겨 부서지자 옛 성터를 따라 길이 551보(步) 높이 9척의 간성(間城)을 쌍아 그 피해를 막았다. 현재는 오현단 납쪽에 성지 일부가 복원돼 있을 뿐이다.
6.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시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사적지로서, 앞에는 동그란 원을 그리며 물을 뿜어내는 시원한 분수대가 있다.,
이 정은 조선시대 건물로서 세종 30년 안무사(按撫使) 신숙청이 병사의 훈련과 무예 수련장으로 사용키 위하여 창건하였다. 창건한 후에 이 곳의 용도를 보면 연무를 지휘하고 사열하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 쓰였다.
관덕이라는 이름은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 라 하여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텀라지>에 의하면 세종 30년인 1448년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건과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그 수법으로 보아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덕정 건물이 앉아 있는 방향은 동쪽이며, 구조는 이중기단위에 전면 5칸, 측면4칸으로 단층 8작 겹처마집이다. 또한 이익공(二翼工) 집으로서 처마가 길었던 것이 특징이며 사방은 창호없이 개방한 정자양식이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 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李瑢)의 글씨이다. 그래서 사적 가치가 더 높은 곳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내 천장의 '탐라형상'과 호남 제일정'은 방어사 김승록, 박선양의 편액이다. 그리고 관덕정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7폭의 벽화가 대량밑의 장설(長舌) 양면과 그 아래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림의 내용은 두보의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십장생도(十長生圖), 상산사호(商山四浩),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진중서성탄금도 (陳(진)中(중)西(서)城(성) (탄)琴(금)圖(도)), 홍문연(鴻門宴) 등이다.
보물 제32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7. 화북비석거리
옛날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고 제주도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었던 화북포구 일대는 유적지가 많다. 별도봉에서 화북포구로 걸러 내려오거나 일주도로 변으로 나와서 화북마을에 들어서면 비석거리가 나온다. 제주에는 역사가 오랜 마을마다
높은 관리나 마을과 연관된 선비들의 치적을 기리는 비(碑)가 한곳에 많이 세워져 있는데 이러한 거리가 바로 비석거리다.
화북포구는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제주목사나 판관, 조방장 등의 지방관리들이 부임하거나 떠나며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고자 많은 비를 세웠는데, 현재는 13개의 비석이 이곳 비석거리에 남아 있다.
비석거리 앞 해안 가에는 고려 원종 11년 삼별초의 입도를 막기 위해 해안선 3백여리에 걸쳐 쌓은 환해장성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와 더불어 화북포구에는 지방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해신사(海神祠)'가 자리잡고 있다. 이 해신사는 조선 순조 20년(1829) 한상묵 목사에 의해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할 목적으로 처음 지어졌는데, 1841년(현종 7) 이원조 방어사에 의해 증수되고, 1849년에는 장인식 방어사에 의해 '해신지위(海神之位)'나는 신위를 돌에 새겨 안치시켰다.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하기 전에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내 해상안전을 기원했다. 1975년 노후된 사당을 헐고 지금의 자리로 여겨지었는데, 건물규모는 전면 1칸 5량집 8작지붕이다.
옛 관리들이 많이 드나든 영향인지 심도 깊은 유배객의 내왕이 잦은 탓인지 화북일대에는 옛날 서당교육에서부터 출발한 화북국민학교, 제주동중, 제주오현중/고등학교, 제주교육대학교, 우당도서관 등이 있어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다.
8. 삼무공원(三無公園)
신 제주 중심부 북쪽에 자리잡은 삼무공원은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가까이 찾는 이들에게 상쾌함과 휴식의 여유를 선사해 주는 곳이다. 공원이름은 제주섬을 상징하는 '삼다(三多)삼무(三無)'에서 따 온 것인데
예로부터 돌많고·바람많고·여자많고·거지없고·도둑없고·대문없는 이곳 제주사람들의 강인함과 정직함을 기리기 위함이다. 원래 조상으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제주도의 삼무는 걸무(乞無)·도무(盜無)·맹무(猛無)라하여 거지없고·도둑없고·사나움없음이었으나 해방 이후에 사나움 없음이 대문 없음으로 바뀌어 고유한 미풍양속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제주도에는 유일하게 없는 것이 기차인데 체육시설 지구 안에 한량 짜리 견본 기차가 전시돼 있어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의 견학이나 소풍장소로 자주 이용되기도 한다. 공원 맨 위에는 '삼무정(三無亭)'이란 이층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이른 새벽에는 이곳을 산책하는 주민들이 많다.
총 22,800㎡ 면적에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삼무공원은 신 제주 중심가 어디서나 5∼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다.
9. 조설대
신제주 중앙중학교 동쪽에 위치한 오라2동의 염미마을회관 서남쪽 농로로 300m 약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큰 솔밭이 나타난다. 이 솔밭 가운데 누워 있는 왕바위머리에 '조설대(朝雪臺)'라고 음각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흔적만 남은 이 조설대는 지난날의 풍파와 역사를 가늠케 하는데, 원래 이 바위산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모여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 하던 유서 깊은 망곡터였다.
구한말 도내 각 지역 유림대표 12명이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체를 조직하는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바위산에 모여 '조선의 치욕을 설원(雪怨)한다'는 뜻에서 바위에 '조설대'라고 새기고 된 것이다. 이때부터 망곡터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구국의 맹약을 한 조설대가 된다.
이응호, 김자겸, 김병구, 서병수, 고석구, 강철호, 임성숙, 김기수등 12인의 집의계 인사들은 한일합방이된 경술국치일에 조설대에 다시 모여 '왜적에 항거하기를 천지와 더불어 하고 종묘사직에 맹세하여 의병으로 투쟁하자' 고 거듭 다짐하였다 한다.
지금은 소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과 정적만이 조설대를 감싼 채 지난날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오늘날의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마모된 마애명 옆에는 조설대비가 새로 세워져 있다. 또한 조설대 옆에는 1977년 신제주 건설 당시 지금의 북제주군청 자리에 모셔졌던 '문연사(文淵社)'가 옮겨져 있다. 이 제단은 '집의계' 유림들을 길러 낸 귤암 이기온 선생과 그의 스승 면암 최익현 참판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워 향사하던 것으로, 아직도 음력 정월 중정에 제를 지내고 있다.
10. 열녀비
제주에는 약 9개의 열녀비가 있다.
1. 박씨열녀비 - 제주시 모등동 1201 (수절)
2. 광산 김씨 열녀비 - 아라동 2025-2 (순절)
3. 제주양씨 " - 아라1동 650 "
4. 열녀김씨 " - 남제주군 남원읍 위미리(순절)
5. 여산송씨 " -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1024 (수절)
6. 진주강씨 " - 애월읍 금성리 하동 남쪽 (순절)
7. 좌씨효열녀 " - 상동
8. 양씨효부비 " - 상동
9. 장씨효부비 " - 상동
5. 이러한 건축물들이 하나 또는 그 이상의 지역, 도시에서도 역사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가? 처음에는 누가 그 구조물을 소유했었는가?
제주에 세워진 중요 기념건축들에서 육지와의 공유되는 상징적 의미를 지닌 것은 거의 찾기 어렵다.
관계 있는 건축물들은 조설대와 조천 만세동산들로써 일제강점기의 국권회복운동과 연관된 것들과 열녀문 등 유교적 전통관과 깊이 연관된 것이다..
6. 이 도시의 공원과 광장이 축조된 배경에는 무엇이 있는가? 누가 그것들을 조성하였으며 누가 그 자금을 대었는가? 그 이름의 의미는 무엇인가?
1. 조천 만세동산
조천읍 조천리 일주도로변을 가다 보면 동북쪽의 미밋동산에 '3·1운동기념비(三一獨立運動記念碑)'라고 쓰여진 기념탑과 만세를 부르는 모습의 조각상이 보인다. 이 미밋동산은 3·1운동 당시 제주도에서 맨 처음으로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나온 고승로 만세동산이라 부르고 있다. 서울 휘문고등학교 재학중 3·1만세운동에 참여하여 활약하다가 뜻을 품고 고향인 조천리로 내려온 김장환이 김시범 등 14명과 더불어 동지를 포섭하고 이곳에서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1일 오후 3시 미밋동산에서 조천, 신촌, 함덕리 주민 500∼600명이 모여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만세구호를 외쳐 도내 곳곳에 펴졌던 것이다. 지금의 기념탑은 1991년 조천 만세동산 성역화사업이 추진되면서 새롭게 들어선 것이다.
2. 사라봉. 모충사
제주시 동쪽 건입동에 위치한 봉우리로서 1.062.600㎡(321.756평) 규모의 사라봉 공원은 깎아 놓은 듯한 절벽 밑으로 세차게 부서지는 파도의 모습이 일품이다.
사라봉 공원 남쪽기슭에 있는 모충사는 제주지역 주민의 성금으로 세워진 사당이다. 모충사에는 의병항쟁 기념탑,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 김막덕 할머니 묘탑이 20m 높이로 삼각형을 이루며 우뚝 솟아 있다.
'의녀 김만덕 할머니 묘탑'은 정조 때(1794) 제주에 큰 흉년이 들자 장사해 모은 돈을 내놓아 육지에서 쌀을 사들여 백성들을 구해낸 의녀 김만덕 할머니의 숭고한 이웃사랑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매년 한라문화제 때에는 모충사에서 의녀 김만덕 할머니를 기리는 제가 봉행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만덕제'이다. 이때 제주도 일원에서 사회봉사에 공헌한 여성을 선정해 만덕봉사상을 수여하고 있다.
'순국지사 조봉호 기념탑'은 한일합방 이후 제주도내에서 독립군 자금 1만원을 모금해 상해 임시정부에 송금하였다가 탄로 나자 혼자 책임을 떠 안고 대구형무소에서 옥사한 지사 조봉호를 기리기 위한 탑이다.
'의병항쟁 기념탑'은 고사훈, 김석윤, 노상옥, 김만석 등의 의병들이 1909년 제주시 광양에 대장간을 마련하여 무기를 만들고 의병을 규합하던 중 왜경에 의해 총살돼 순국한 것을 기리기 위한 탑이다.
3. 삼성혈
신화의 섬인 제주도에는 개국 신화인 삼성신화(三姓神話)가 전해 내려온다. 이 신화는 제주시 중심에 위치한 삼성혈에서 고·양·부 삼신인의 탄생과 함께 시작된다.
국가 지정 사적 제134호로 지정된 삼성혈은 7,097평의 울창한 숲 속에 혈단(穴壇)을 중심으로 탐라 시조 삼을라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三姓殿)과 분향소, 제향(祭享)을 받드는 전사청(典祀廳), 서원이었던 숭보당(崇報堂)이 들어서 있다.
<영주지><고려사 지리지> 등의 옛 문헌에 의하면 삼성혈에서 용출한 삼신인은 수렵 생활로 피의육식(皮衣肉食)하다가 오곡의 종자와 송아지, 망아지 등 육축(六畜)을 가지고 온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삼공주를 배필로 맞이하며 땅을 정한 후 농경 생활과 함께 생활 터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지상에 파인 세 개의 구멍(穴)은 품(品)자 모양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는 6자이고 깊이는 바다까지 통한다고 한다. 나머지 둘은 둘레가 각각 3자이나 오랜 세월로 말미암아 지금은 흔적만 남아 있다.
이곳이 성역화 되기 시작한 것은 1526년(중종21)에 이수동 목사가 삼성혈 주위에 석단을 쌓고 혈(穴) 북쪽에 홍문(紅門)과 혈비를 세워 삼성의 후예들에게 춘추제를 지내게 하고 매년 11월 상정일(上丁日)에 도민들이 혈제(穴祭)를 봉행하게 한데서부터 비롯되었다. 이후 유한명 절제사(1698), 이형상 절제사(1702), 양세현방어사(1772), 이행교 방어사(1827), 이행교 방어사(1827), 장인식 방어사(1849)가 삼을나묘(삼성전), 전사청, 숭보당 등을 건립하거나 혈주위에 축성. 식묵함으로써 오늘날의 규모가 갖추어졌다.
현재 매년 4월 10일과 10월 10일에 춘추대제(春秋大祭)를 후손들이 봉향하고,12월 10일에는 건시대제(乾始大祭)가 혈단에서 행해지고 있다. 조선시대까지 국제(國際)였다가 지금은 제주도제(道祭)로 봉향되고 있는 건시대제의 초헌관은 제주도지사, 아헌관과 종헌관은 지역 유지중에서 추천된 인사가 맡고 있다.
삼성신화와 관련된 곳으로는 삼성혈 이외에도 삼사석(三射石), 쌀쏜장오리(射矢岳), 혼인지, 혼인포(황루알)등이 있다.
4. 오현단
지방기념물 제1호로 지정된 오현단은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1665년(헌종 6) 최진남 판관이 세운 귤림 서원이 철폐된 후, 1892년(고종 29) 김의정 등 제주유림들의 건의에 의해 귤림서원에 배향되었던 오현(五賢)을 기리기 위해 마련한 제단이다.
오현단의 유래를 살펴보면 1578년(선조 11) 조인 후 판관이 1521년(중종 16) 10월에 제주에 유배되어 사약으로 죽은 충암 김정(金 )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충암묘(沖庵廟)를 짓고 제사지내게 한데서 시초를 찾아볼 수 있다.
지금의 오현단 자리인 귤림서원에 모셔졌던 오현은 충암 김정 이외에 안무사 청음 김상헌(金尙憲), 동계 정온(鄭蘊), 제주목사 규암 송인수(宋麟壽), 우암 송시열(宋時烈)등으로 제주에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부임했던 이들은 지방문화 발전에 적지 않게 공헌하였다.
오현단 내에는 이들 오현의 위패를 상징하는 높이 43-45cm, 너비 21-23cm, 두께 14-16cm의 조두석(俎豆石)과 함께 '증주벽립(曾朱壁立 :증자와 주자가 벽에 서있는 듯이 존경하고 따르라)'의 마애명과 적려유허비가 남아 있다.
제주시 중앙로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다.
5. 제주읍성
지방기념물 제3호로 지정된 제주읍성은 탐라국 때부터 축성된 것으로 추측되나 그 연대는 기록상으로 확실하지 않다. 1411년(태종 11) 제주읍성을 보수했을 때 성의 둘레가 4,700척, 높이 11척이었으나 1512년(중종 7) 증축으로 둘레 5,489척 높이 11척이 되었다. 이후엔 성안에 물이 없고, 가락천과 산저천(산짓물)의 범람으로 인해 여러차례에 걸쳐 개축이 이루어졌다.
1565년(명종 20년) 곽흘목사가 식수난과 변란 때의 물난리를 대비하여 동쪽성을 산지내 밖으로 물려쌓고 동· 서에 각 1문, 남쪽에는 2문을 내었다. 또한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가 성굽을 5자 더 늘려 쌓고 남문을 없애는 동시에 문마다 초루를 만들고 납북의 두 수구(水口)에는 무지개 모양으로 남수각과 북수삭을 설치하였다. 이후 1780년(정조 4)에는 김영수 목사가 산저천의 범람으로 인가가 잠겨 부서지자 옛성터를 따라 길이 551보(步) 높이 9척의 간성(間城)을 쌍아 그 피해를 막았다. 현재는 오현단 납쪽에 성지 일부가 복원돼 있을 뿐이다.
6. 관덕정
관덕정은 제주시내 한가운데 자리하고 있는 사적지로서, 앞에는 동그란 원을 그리며 물을 뿜어내는 시원한 분수대가 있다.,
이 정은 조선시대 건물로서 세종 30년 안무사(按撫使) 신숙청이 병사의 훈련과 무예 수련장으로 사용키 위하여 창건하였다. 창건한 후에 이 곳의 용도를 보면 연무를 지휘하고 사열하는 곳이었을 뿐만 아니라 관민이 함께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이기도 했다. 때로는 죄인을 다스리는 형장으로 쓰였다.
관덕이라는 이름은 '사자소이 관성덕야(射者所以 觀盛德也)' 라 하여 '평소에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뜻이며 문무의 올바른 정신을 본받기 위함이었다고 한다.
<텀라지>에 의하면 세종 30년인 1448년에 병사들의 훈련장으로 사용하기 위해 창건되었으며 이후 여러 차례 개건과 중수를 거쳤다. 현재의 건물은 그 수법으로 보아 17세기 전후의 것으로 추정된다.
관덕정 건물이 앉아 있는 방향은 동쪽이며, 구조는 이중기단 위에 전면 5칸, 측면4칸으로 단층 8작 겹처마침이다. 또한 이익공(二翼工) 집으로서 처마가 길었던 것이 특징이며 사방은 창호없이 개방한 정자양식이다.
관덕정의 편액은 세종 대왕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李瑢)의 글씨이다. 그래서 사적 가치가 더 높은 곳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정내 천정의 '탐라형상'과 호남 제일정'은 방어사 김승록, 박선양의 편액이다. 그리고 관덕정의 진수라고 할 수 있는 7폭의 벽화가 대량밑의 장설(長舌) 양면과 그 아래에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그림의 내용은 두보의 취과양주귤만헌(醉過楊州橘滿軒), 십장생도(十長生圖), 상산사호(商山四浩), 적벽대첩도(赤壁大捷圖), 대수렵도(大狩獵圖), 진중서성탄금도 (陳(진)中(중)西(서)城(성) (탄)琴(금)圖(도)), 홍문연(鴻門宴) 등이다.
보물 제32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7. 화북비석거리
옛날부터 제주와 육지를 잇고 제주도로 들어오는 첫 관문이었던 화북포구 일대는 유적지가 많다. 별도봉에서 화북포구로 걸러 내려오거나 일주도로 변으로 나와서 화북마을에 들어서면 비석거리가 나온다. 제주에는 역사가 오랜 마을마다
높은 관리나 마을과 연관된 선비들의 치적을 기리는 비(碑)가 한곳에 많이 세워져 있는데 이러한 거리가 바로 비석거리다.
화북포구는 제주성과 가장 가까운 곳으로 제주목사나 판관, 조방장 등의 지방관리들이 부임하거나 떠나며 자신의 공적을 기념하고자 많은 비를 세웠는데, 현재는 13개의 비석이 이곳 비석거리에 남아 있다.
비석거리 앞 해안가에는 고려 원종 11년 삼별초의 입도를 막기 위해 해안선 3백여 리에 걸쳐 쌓은 환해장성이 길게 늘어서 있다.
이와 더불어 화북포구에는 지방기념물 제22호로 지정된 '해신사(海神祠)'가 자리잡고 있다. 이 해신사는 조선 순조 20년(1829) 한상묵 목사에 의해 해상활동의 안전을 기원할 목적으로 처음 지어졌는데, 1841년(현종 7) 이원조 방어사에 의해 증수되고, 1849년에는 장인식 방어사에 의해 '해신지위(海神之位)'나는 신위를 돌에 새겨 안치시켰다. 매년 정월 보름과 선박이 출항하기 전에 이곳에서 해신제를 지내 해상안전을 기원했다. 1975년 노후된 사당을 헐고 지금의 자리로 여겨지었는데, 건물규모는 전면 1칸 5량집 8작지붕이다.
옛 관리들이 많이 드나든 영향인지 심도 깊은 유배객의 내왕이 잦은 탓인지 화북일대에는 옛날 서당교육에서부터 출발한 화북국민학교, 제주동중, 제주오현중/고등학교, 제주교육대학교, 우당도서관 등이 있어 교육의 요람이기도 하다.
8. 삼사석
지방문화재 기념물 제4호인 삼사석(三射石)은 탐라 시조 삼신인(三神人)이 벽랑국 삼공주를 맞아 배필로 정한 후, 생활 터전을 마련하기 위해 한라산 북쪽기슭 쌀손장오리(射矢)에서 활을 쏠 때 화살이 박혔던 돌 과녁이다. 그래서 이 지역을 '쌀쏜디왓'이라 부른다.
석실에 안치된 삼사석은 직경 55cm내외의 현무암 2개인데, 바로 옆에는 1735년(영조 11) 제주목사 김정이 세운 삼사석비가 있다. 석실(石室)은 1735년 제주사람 양종창이 처음 만들었으나 허물어졌고 지금 것은 1870년(고종 7)에 중건되었다.
9. 삼무공원(三無公園)
신제주 중심부 북쪽에 자리잡은 삼무공원은 번화한 도심 한가운데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여 가까이 찾는 이들에게 상쾌함과 휴식의 여유를 선사해 주는 곳이다. 공원이름은 제주섬을 상징하는 '삼다(三多)삼무(三無)'에서 따 온 것인데
예로부터 돌많고·바람많고·여자많고·거지없고·도둑없고·대문없는 이곳 제주사람들의 강인함과 정직함을 기리기 위함이다. 원래 조상으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제주도의 삼무는 걸무(乞無)·도무(盜無)·맹무(猛無)라하여 거지없고·도둑없고·사나움없음이었으나 해방 이후에 사나움없음이 대문없음으로 바뀌어 고유한 미풍양속중의 하나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특히 제주도에는 유일하게 없는 것이 기차인데 체육시설 지구안에 한량짜리 견본 기차가 전시돼 있어 호기심 많은 어린이들의 견학이나 소풍장소로 자주 이용되기도 한다. 공원 맨 위에는 '삼무정(三無亭)'이란 이층 팔각정이 세워져 있고 이른 새벽에는 이곳을 산책하는 주민들이 많다.
총 22,800㎡ 면적에 1988년부터 본격적으로 조성되기 시작한 삼무공원은 신제주 중심가 어디서나 5∼10분이면 걸어갈 수 있다.
10. 조설대
신제주 중앙중학교 동쪽에 위치한 오라2동의 염미마을회관 서남쪽 농로로 300m 약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오른쪽에 큰 솔밭이 나타난다. 이 솔밭 가운데 누워 있는 왕바위머리에 '조설대(朝雪臺)'라고 음각 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오랜 풍화작용으로 흔적만 남은 이 조설대는 지난날의 풍파와 역사를 가늠케 하는데, 원래 이 바위산은 국상을 당했을 때 선비들이 모여 향을 피우고 북향사배 하던 유서 깊은 망곡터였다.
구한말 도내 각 지역 유림대표 12명이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로잡기 위해 집의계(集義契)라는 비밀결사체를 조직하는데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이 바위산에 모여 '조선의 치욕을 설원(雪怨)한다'는 뜻에서 바위에 '조설대'라고 새기고 된 것이다. 이때부터 망곡터는 빼앗긴 주권을 되찾기 위해 구국의 맹약을 한 조설대가 된다.
이응호, 김자겸, 김병구, 서병수, 고석구, 강철호, 임성숙, 김기수등 12인의 집의계 인사들은 한일합방이된 경술국치일에 조설대에 다시 모여 '왜적에 항거하기를 천지와 더불어 하고 종묘사직에 맹세하여 의병으로 투쟁하자' 고 거듭 다짐하였다 한다.
지금은 소나무 사이로 불어노는 바람과 정적만이 조설대를 감싼채 지난날의 역사를 되새기면서 오늘날의 우리를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마모된 마애명 옆에는 조설대비가 새로 세워져 있다. 또한 조설대 옆에는 1977년 신제주건설 당시 지금의 북제주군청 자리에 모셔졌던 '문연사(文淵社)'가 옮겨져 있다. 이 제단은 '집의계' 유림들을 길러 낸 귤암 이기온 선생과 그의 스승 면암 최익현 참판을 기리기 위해 1931년에 세워 향사하던 것으로, 아직도 음력 정월 중정에 제를 지내고 있다.
11. 중문관광단지. 표선 민속단지. 무수천 유원지. 표선면 성읍 민속촌
이들 관광지역은 제 3공화국시절 국토개발 5개년개획 실행의 자금확보와 국가이미지 향상을 목적으로 한 제주도종합개발계획의 실행을 위해 조성되었다.
조성 자금의 대부분은 국내 대기업등의 거대 민간 자본과 정부예산을 이용하였다.
7. 이 도시의 중요 조각상과 기념탐의 배경과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들 중에는 마귀 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거나 조물주보다 피조물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있는가?
1. 원당사지 5층석탑
해발 170.4m 원당봉 기슭에 위치한 지금의 불탑사는 원래 원당사지(元堂寺址)로서 오층석탑이 전해 내려온다. 제주도산 다공질 현무암으로 제작된 이 원당사지 오층석탑은 높이 385cm 측면너비 84cm 정면넓이 89cm인데, 1층 기단과 5층 옥신(屋身)이 심하게 좁아지는 것이 특징을 띠고 있다.
유물편(片)이나 상층기단의 중석(中石) 세면에 안상(眼象)무늬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고려시대 불탑으로 추정되며, 원나라 때 기황후(寄皇后)가 왕자를 얻기 위해 이곳에 절을 세웠다는 전설도 전해진다. 세 번의 화재로 원당사가 완전히 소실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오층석탑은 원래의 위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원당사지 가람배치는 물론 제주도의 불탑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삼양이나 조천행 시내버스를 타고 삼양파출소에서 내려 바닷가 쪽으로 20분 정도 걸어가면 된다. 승용차로는 절터입구까지 들어갈 수 있다.
2. 산천단
제주시에서 5.16도로를 따라 약 20분 남짓 오르면 오른쪽으로 산천단이 위치해 있다. 이곳은 산천단은 한라산신제를 올리는 곳이다. 예전에는 한라산 정상에서 제사를 지냈는데, 그때마다 제물을 지고 올라가는 사람들이 얼어죽거나 날씨가 사나와서 올라갈 수 없는 날이 많았으므로 1470년(성종1) 이약동 목사가 지금의 아라동으로 옮겨 제단을 설치하고 산신제를 지내게 하였다. 이약동 목사가 건립한 '한라산신고선비(漢拏山神古禪碑)'는 1977년에 홍정표씨가 발굴하여 단내에 세워진 것이다. 현재 이약동 목사의 사적비가 새로이 세워져 있다.
8. 이 도시의 특징을 이루는 다른 예술품이 있는가? 특히 공공건물의 안팎이나 박물관 또는 극장 안에 그런 것이 있는가?
돌하루방-도시의 권세를 보호하기 위해 세운 신상
이 석상들은 18세기 중엽에 제주목(濟州牧), 대정현(大靜縣), 정의현(旌義縣) 등, 각 성문밖에 세워졌다.
오늘날까지 보존되고 있는 석상은 총 47기이다.
본래 돌하루방은 마을 입구에 세워져 위엄 있는 자태로 마을의 수호신적 기능을 했을 뿐 아니라 다복을 가져다주고 액을 몰아내는 주술적 기능까지 하였다. 돌하루방의 신장은 136.2 - 234cm로 여러 크기며, 그 형태도 조금씩 다르다.
이것들은 제주의 관광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해 주요 장소에 세워지고 있다.
9. 이 도시에는 고고학적으로 유수한 지역들이 있는가?
있다면 그것들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1. 선사시대 유적 발굴지
구석기. 신석기 시대의 것으로 추정하는 유물이 제주에서 출토되고 있다, 이것은 제주지역사를 진화론적 역사관으로 해석하는 기반이 되고 있다.
2. 제주목관아지(濟州牧官衙址)
제주목관아지는 탐라순력도나 홍화각기 등 많은 문헌 기록을 통해서 제주의 정치, 행정, 문화의 중심지 였음을 알 수 있으며, 발굴조사결과 탐라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이르는 여러 문화층과 함께 제주 목관아의 주요시설이었던 동헌내아건물지 등의 위치와 규모를 확인함으로써, 이곳이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제주도 중심지 역할을 한 중요한 유적지 였음이 밝혀졌다.
차후 이곳을 역사교육장 및 문화휴식공간이 될 수 있도록 정비 복원할 예정임.
3. 제주향교(濟州鄕校)
조선 태조 원년(1392) 제주성내 교동에 창건된 이후 여러 차례 옮겨 세워졌다가 순조 27년(1827) 현 위치로 옮겨졌으며, 향교 내에는 명륜당, 대성전, 계성사 등의 건물이 남아 있다. 그중 명륜당은 최근에 콘크리이트로 다시 지은 것으로 원래는 막돌기단에 전돌을 이용하여 뇌문을 넣을 정도로 아름다운 건물이었다 한다.
대성전에는 공자를 위주로 공문10철, 송조6현, 조선 18현을 모시고 있으며, 매년 춘추 2회에 걸쳐 석전제를 봉행한다.
4. 제주성지(濟州城址)
제주성을 언제 처음 쌓았는지 분명하지 않으나, 이 지방에 많은 화산암을 이용하여, 고려 숙종 때 둘레 4,700척, 높이 11척으로 확장 축조하여 면모를 새롭게 하였다.
조선 중종 7년(1512) 삼포왜란 뒷 수습책의 일환으로 목사 김석철이 둘레 5,486척으로 확장하고 방어시설을 갖추었다. 이때 성안에는 샘이 없어 별도로 중성을 쌓아 급수토록 하였다. 명종 10년(1555) 을묘왜변 때에 왜선이 침범하여 성을 포위하고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는데 성공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에 목사 성윤문이 성벽 높이를 5척 더 높이 쌓고, 포루 등의 방어시설을 더 갖추었고, 정조 4년(1780)년 목사 김영수가 산저천변과 별도천변에 익성과 보를 쌓았고 이후 계속 수축을 하였다. 탐라국 시대부터의 유서 깊은 유적지이다.
5. 향사당(鄕社堂)
향사당은 고을의 한량들이 봄, 가을 2회의 모임을 가지고 활쏘기와 잔치를 베풀며, 당면과제나 민심의 동향에 대해 논하던 곳이다.
향사당은 애초 가락천 서쪽에 지었던 것을 조선 숙종 17년(1691) 절제사 이우항과 당시 판관 김동이 지금의 자리로 옮겨 짓고 향사당이라 이름하였다.
이 건물은 1981년 다시 지었는데 이때 길가에 붙어 있어 동남향이던 집방향을 동북향으로 바꾸었다.
6. 복신미륵(福神彌勒)
이상의 제작연대는 고려시대로 추정되며, 자복(資福), 자복신, 자복미륵, 서미륵(西彌勒), 큰 어른으로 불려지고 있다. 달걀형의 온화한 얼굴에 벙거지형 모자를 썼고, 코를 크게 새긴점이 특이하며, 두손을 가슴부분에 가볍게 얹었다.
이 미륵은 민간에서 명복신으로 숭배되어 왔으며, 용왕신앙과 결합되어 해상어업의 안정과 풍어, 출타가족의 행운을 지켜 준다고 믿고 있음.
7. 용두암(龍頭岩)
용두암은 제주시 서부해안에 위치해 있다.
전설에 의하며, 한 마리 용이 한라산 신령의 옥구슬을 훔쳐 달아나다가, 화가 치민 하나산 신령이 활을 쏘아 용두암 해면에 떨어뜨려 몸전체는 바닷물에 잠기게 하고 머리부분은 하늘로 향하게 하여 굳어 내리게 했다.
용두암은 화산 폭발에 의한 용암이 굳어진 화산암의 하나이다.
8. 용연(龍淵)
용두암 동쪽 200m지점에 있는 이곳은 7-8m의 기암괴석이 병풍처럼 둘렸으며, 바위에는 상록수림이 우거지고, 물은 매우맑고 차다. 예로부터 용연야범이라하며, 시흥(詩興)이 넘치는 곳이다.
9. 삼성혈(三姓穴)
삼성혈은 제주도 원주민의 발상지로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 세명의 시조가 용출하여 수렵생활을 하다가 오곡육축을 가지고 온 벽랑국의 세 공주를 신부로 맞이하여 이 땅에 농겨문화가 시작되었다는 신화를 지닌 곳이다.
지혈은 품자형으로 나열(상혈은 고씨, 좌혈은 양씨, 우혈은 부씨)
삼성혈의 조성은 중종 21년(1526) 이수동 목사가 삼성혈 주위에 280여척의 제단을 쌓고 혈의 북쪽에 홍문과 혈비를 세워 삼성의 후손들로 하여금 춘추제(4월 10일, 10월 10일)를 봉행함과 아울러 매년 12월 10에 도민으로 하여금 혈제(穴祭)를 모시게 하였다.
10. 모충사(慕忠祠)
제주시 사라봉 기슭에 있는 모충사의 경내에는 세 개의 높은 탑이 있는데, 두 개의 탑은 한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시기(1910-1945)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일본에 항거, 투쟁하다가 옥사한 조봉호 등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며, 또다른 한 개는 제주 태생 의녀 김만덕 여인을 추모하기 위한 탑이다.(1792-1795년 심한 흉년으로 아사상태에 있던 제주도민에게 양곡을 나누어 줌)
1976년 도민의 성금으로 건립.
11. 삼사석(三射石)
고.량.부 세 시조들이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를 배필로 맞이하면서 각자가 화살을 쏘아 닿는 곳까지를 각자의 생활영역으로 정했는데, 화살이 꽂혔던 돌멩이를 "삼사석"이라 부른다.
이 삼사석들은 제주 시가지에서 동쪽 3km지점에 위치한 화북동에 보관(1735년 제주인 양종창이 석간(石間)을 건립했고, 제주목사 김정이 석비를 세움)
12. 산천단(山泉檀)
제주에서 서귀포로 가는 제 1횡단 도로를 따라 8km 지점에 거대한 노소을이 우뚝우뚝 서 있는 곳이 산천당이다.
옛날부터 제주에 부임한 목사는 백록담에 올라가 천제를 드렸는데, 산길이 험하고 날씨가 궂을 때에는 이곳에 제단을 만들어 천제를 올렸다는 신성한 곳이다.
13. 항몽유적지(抗蒙遺跡地)
고려 원종 14년 흉포한 몽고의 침입에 맞서 40여년간 끈질기게 항쟁했던 삼별초군이 장렬한 최후를 맞은 곳. 우리 민족의 호국 투쟁사에 길이 남을 삼별초군을 기리기 위하여 1977-1978년까지 9,000여평의 대지에 항몽순의비를 세우고 6km의 토성중 922m를 복원.
14. 조천 연북정
제주에 사는 백성들이 북쭉의 한양을 바라보며 임금님을 사모하는 정을 기리 는 정자라는 뜻의 연북정은 건물 사방이 창호없이 트인 정자양식으로 전면 3칸, 측면 2칸의 7량집팔작지붕이다. '연북정(戀北亭)'이란 이름은 1599년(선조 32) 성윤문 목사가 건물을 중수하면서 붙인 것으로 이전에는 1590년(선조 23) 이옥(李沃)목사가 '쌍벽정'으로 편액 하였는데 원래는 조천성 밖에 있었던 객사로서 성을 동북쪽으로 물려 쌓은 뒤 그 위로 이건했던 것이다.
조선 중엽 제주도에 유배되어 온 선비들이 연북정에 올라 임금을 연모하며 살았다고 해서 유서가 깊고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3호로 지정되어 있다. 연북정 부근 마을 안길에는 마을의 공적을 남긴 사람과 덕망 있는 사람들의 뜻을 기리는 비석거리가 있다. 조천 포구에 위치해 있다.
10. 낙태시술의원, 음란물서점이나, 극장, 매춘지역, 도박장, 술집, 동성연애 등과 같은 매우 가시적인 죄의 거점은 어디인가?
신제주지역은 제주관광을 위해 조성된 도시로써 호텔과 유흥업 등이 밀집되어 있다.
술집 - 신제주의 광양로, 중앙로, 탑동,
매춘지역 - 삼지
도박장 - 제주시 연동, 서귀포시 색당동
극장- 일도1동
제주도 전체가 관광지인 관계로 각종 유흥업 종사자에 대한 전염병, 성병검사와 예방에 주력하고 있다.
서귀포시의 경우 96년 한해에 약 130.000명에 대하여 임질, 매독검사를 실시하였다.
11. 탐욕, 착취, 가난, 인종차별, 폭력, 질병이나 잦은 사고가 발생하는 곳은 어디인가?
자료 없음
12. 과거나 현재에 있어 학살이나 전투, 살인을 통하여 피를 흘린 장소는 어디인가?
전투 - 삼별초의 난 당시 함덕포구에서 여·몽 연합군과의 전투
학살 - 이재수의 난 당시 제주지역에서 천주교인 약 500여명 학살됨
4.3사건당시 조천, 고산, 삼양, 외도, 안덕, 북촌 지서 앞에서 학살. 제주전역에서 살인과 폭력 발생
13. 나무, 언덕, 돌 또는 강의 위치가 외관상 의미 있는 모양을 갖추고 있는가?
1. 천지연폭포
그 이름만큼이나 빼어난 서귀포 천지연(天池淵)폭포는 조면질 안산암의 기암절 벽이 하늘높이 치솟아 마치 선계(仙界)로 들어온 것 같은 황홀경을 느끼게 한다. 천지연계곡에는 천연기념물 제163호로 지정된 담팔수 자생지 이외에도 가시딸기, 송엽란 등의 회귀식물과 함께 계곡 양쪽에 구실잣밤나무, 산유자나무, 동백나무 등의 난대성 식물들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어 천연기념물 제182-8호로 별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특히 담팔수나무는 담팔수과의 상록교목으로 우리 나라에서는 섭섬, 문섬 등이 그 북한지(北限址)이다.
이 천지연 난대림지대를 따라 나있는 산책로를 1Km쯤 걸어 들어가면 웅장한 소리를 내며 떨어지는 폭포에 다다르게 된다. 서귀포항 어귀에서 길게 뻗은 오솔길에는 꽃치자, 왕벚나무, 철죽 등이 아름다운 꽃나무와 더불어 정취어린 돌징검다리, 숲사이 군데군데 마련된 쉼터가 최상의 데이트코스를 연출해 주므로 신혼부부나 연인들 사이에 무척 인기가 높다.
또한 폭12m 높이22m에서 세차게 떨어져 수심 20m의 호(湖)를 이루는 천지연의 맑고 깊은 물은 천연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된 무태장어의 서식지로서도 유명하다. 일반 뱀장어와는 무늬색깔과 척추 골수가 다른 무태장어는 길이 2m무게 20km이 넘는 것도 있는데, 이곳이 무태장어의 북한지로 알려지고 있다.
2. 정방폭포
천지연, 천재연과 더불어 제주도내 3대 폭포중의 하나인 정방폭포는 서귀포시 중심가에서 약1.5Km 동남쪽에 위치해 있다. 우리 나라에 유일하게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정방폭포는 높이23m에 두죽기의 폭포로 까만 절벽에서 쏴 하는 폭포음과 함께 비산하는 물줄기에 햇빛이 반사되면 은하수 빛깔로 변하여 시원한 경치가 짙푸른 바다의 정취를 함께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급경사 계단을 조심스레 내려가면 높이 치솟은 절벽에는 노송이 바다로 가지를 드리워 넘어질 듯 서 있고 안개같이 비산하는 포말이 잠시 지나는 나그네를 반긴다.
특히 여름답다고 표현하기엔 너무나 큰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래서 예로부터 이를 '정방하폭(正房夏瀑)'이라 하여 영주10경의 하나로 삼았다.
정방폭포 절벽에는 서귀포 지명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해 내려온다. 옛날 중국 진시항제의 명으로 불로초를 구하러 ㅎ던 서불(徐 )이라는 사람이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되돌아가다가 정방폭포의 아름다움에 흠뻑 취해 절벽에 '서불과차(徐 過此)' 하는 글자를 새겼는데 그가 서쪽으로 돌아갔다 하여 '서귀(西歸)' 하 이름 붙였다고 한다.
3. 외돌개
남주의 해금강 서귀포 칠십리 해안가를 둘러선 절벽기암중 가장눈에 띄는 것이 20m높이의 기둥바위 외돌개이다. 서귀포 시내에서 약2Km쯤 서쪽에 삼매봉이 있고 그 산자락의 수려한 해안가에 우뚝 서 있는 외돌개는 약150만년 전화산이 폭발하여 용암이 섬의 모습을 박꿔놓을 대 생성되었다 . 꼭대기에는 몇 그루 작은 소나무들이 자생하고 있다. 뭍과 떨어져 바다 가운데 외롭게 서 있다 하여 외돌개라 이름하여졌는데 여기에는 한가지 역사와 관련된 설화가 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고려말 최영 장군이 제주도를 강점했던 목호(牧胡)의 난을 토벌할 때 외돌개 뒤에 있는 범섬이 최후의 격전장이었는데 전술상이 외돌개를 장대한 장수로 치장시켜 놓았다.
그러자 목호들이 이를 보고 대장군이 진을 친 것으로 오인하여 모두 자결하고 말았다 한다. 그래서 이 외돌개는 '장군석' 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려진다.
또한 바위가 된 할머니와 고기잡이 할아버지 사이의 애절한 전설이 깃들여 있어 '할망바위'하고도 하는데 ,서귀포체류시 아침이나 저녁이 산책코스로 삼매봉의 시가전경과 함께 권할만한 곳이다. 외돌개로 가는 왼쪽 길목에는 소머리바위라는 해안기암이 있다. 그 모양이 삼매봉에서 바다를 향해 치닫는 소의 머리와 같다고 하여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4. 천제연폭포
천제연폭포는 옥황상제를 모시는 7선녀가 별빛 속삭이는 한밤중이면 영롱한 자주빛 구름다리를 타고 옥피리 불며 내려와 맑은 물에 미역감고 노닐다 올라간다고 하여 천제연(天帝淵) 곧 하느님의 못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지명유래가 있다.
천연기념물 제182-7호로 지정된 울창한 천제연 난대림지대 사이로 웅장한 3단 폭포가 떨어지는 모습은 실로 장관인데 제1폭포는 22m절벽에서 떨어져 수심 21m의 못을 이루고. 이 물은 다시 제2폭포, 제3폭포를 거쳐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특히 제1폭포가 떨어지는 절벽 동쪽의 암석동굴 천정에서는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물이 쏟아져 내리는데 예로부터 백중, 처서에 이 물을 맞으면 모든 병이 사라진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았으나 지금은 수영이 금지돼 있다.
천제연계곡에는 아름다운 일곱 선녀상을 조각한 '선임교'와 '천제루'라고 불리우는 누각이 세워져 있어 주변경관을 한층 더 돋보이게 한다.
5. 용두암
제주시 한천 하류의 용연에서 서쪽 200미터쯤의 바닷가에 있다. 용궁에 살던 용이 하늘로 오르려다가 굳어졌는데 그 굳어진 모양이 용의 머리와 닮아서 용두암이라 이름 붙여졌다.
그 모양이나 크기로 보아 매우 드문 형상기암이다. 높이는 10여미터나 되고 바닷 속으로 잠긴 몸의 길이가 30미터쯤이 되어 석양 속에서 가만히 이 괴암을 응시하노라면 정말로 상상 속의 용이 살아 꿈틀거리는 것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이 용두암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서쪽으로 100여미터 떨어진 곳이 적당하며, 바닷가 잔잔한 날보다는 파도가 심하게 몰아치는 날이 적격이다. 마치 천지개벽이 이루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신의 노여움 속에 용이 으르릉 울부짖으며 바닷속에서 솟구쳐 오르는 듯하기도 하다.
용두암에 얽힌 전설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용왕의 사자가 한라산에 불로장생의 약초를 캐러 왔다가 산신이 쏜 화살에 맞아서 죽었는데 그 시체가 물에 잠기다가 머리만 물위에 떠 있다고도 한다. 또 용이 승천할 때 한라산 산신령의 옥구슬을 입에 물고 달아나려 하자 산신령이 분노하여 쏜 화살에 맞아 바다로 떨어졌는데 몸체만 바닷속에 잠기고 머리는 울부짖는 모습으로 남아 있다고도 한다.
이 용두암은 지질학적으로 보면 용암이 분출하다가 굳어진 것이며, 제주특산식물인 섬갯분취와 희귀식물인 낚시돌풀 등이 자생하고 있어 식물학을 전공하는 이들에겐 소중한 지역이기도 한다.
6. 산굼부리
천연기념물 제263호로 지정된 화산의 화구(火口)인 산굼부리는 제주의 360여개 기생화산이 용암과 화산화가 쌓여서 만들어진 것임에 반해 폭발로 암석이 날려 평평한 지면에 움푹 꺼져 들어간 '구멍화산'이다. 이를 폭렬공 기생화산(밑에서 폭발하여 폭발물이 쌓이지 않고 다 분출되어 뻥 뚫린 분화구)이라 하며 봉우리가 거의 발달되어 있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내부면적이 30만평방미터에 내부 밑둘레 7백56미터, 외부둘레 2천70미터, 거의 수직을 이룬 높이가 1백30며미터로 한라산의 분화구인 백롬담보다 조금 더 크고 깊다.
백록담·일출봉·송악산과 함께 제주도의 대표적인 분화구의 하나인 산굼부리 분화구는 아무리 비가 와도 물을 빨아들여 버린다. 그래서 이 화구 안에는 물이 고이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해발438m의 분화구는 뿔이 잘라 나간 원추를 거꾸로 한 모양을 하고 있다. 산굼부리 안에는 '식물의 보고'라 부를 만큼 420여종의 희귀한 식물들이 서식하고 있으며 노루·오소리등 수많은 포유류 및 조류, 파충류 등의 동물이 살고 있다. 우리 나라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상록활엽수림과 낙엽활엽수림이 공존하고 있으며 봄철이면 분화구가에 보라색 수국이 활짝 피어 방문객을 반긴다.
7. 비자림
구좌읍 평대리에서 서남방으로 6㎞되는 지점에 비자나무가 약 45ha의 광대한 면적에 집단적으로 자생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182-2호, 제374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는 비자림은 300∼800년생 비자나무 2,570그루가 밀집하여 군락을 이룬다. 나무의 높이는 7∼14m, 직경은 50∼110㎝, 수관폭(樹冠幅)은 10∼15m에 이르고 있어 단순림으로는 세계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예로부터 섬의 진상품으로 바쳤던 비자나무의 열매인 비자는 구충제로 많이 쓰였고 음식이나 제사상에 오르기도 하였다. 지방분이 있어 비자유를 짜기도 하는데 기관지 천식이나 장기능에 효염을 나타내는 것으로 알려졌다. 나무는 재질이 좋아 고급가구나 바둑판을 만드는데 사용되어왔다.
주목과에 속하는 비자나무는 암수 딴 그루로 일년에 겨우 1.5㎝가량 자라나는데 나이테가 없어 정확한 수령을 알기는 어렵다. 15∼20년이 되어야 열매를 맺는데 지난해에 맺힌 열매가 가을까지 달리고 올 봄에 다시 피어난 꽃이 열매로 달려 내년 가을에 수확한다. 한해에 지난해와 올해의 열매가 동시에 맺혀 사시사철 열매를 볼 수 있다.
숲속 중앙에는 제주에서 최고령목이라는 8백년 이상된 비자나무가 있다. 키 25m, 둘레 6m로 비자나무의 조상목이라고도 하는 이 나무는 어른 서넛은 두 팔을 벌려야 안을 수 있다.
8. 만장굴
세계 최대의 용안동굴인 만장굴은 제주시에서 동쪽으로 30㎞지점인 북제주군 구좌읍 동김녕리 산 7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천연기념물 제 98호로 지정되어 보호되고 있는 이 동굴은 길이가 13,422m(과람길이는 왕복 2㎞)로서 용암(溶暗)동굴 시스템으로는 세계최장으로 공인되고 있다. 이는 만장굴 8,928m와 김녕사굴 70.5m, 그리고 이웃한 밭굴, 개우샛굴 등 3,789m를 같은 시스템으로 포함한 것이다. 만장굴은 높이 3∼20m(보통 6m), 넓이 3∼23m(보통 4∼5m)이며 굴 안의 온도는 15∼18℃, 습도는 87∼100%를 유지하여 항상 쾌적하다. 용암굴이란 화산이 분출할 때 땅속 깊이 잠겨 있던 암장이 화구로부터 솟아나 지표면으로 흘러내리면서 생긴 굴이다.
만장굴은 70㎝나 되는 용암석순을 비롯하여 용안튜브터널등 대표적인 용암굴로서의 다양한 형태 뿐만 아니라 경관 면에서도 세계에서 자랑할 만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서 관광객들이 반드시 찾는 곳이다.
먼저 굴 입구에 들어서면 마치 어느 신전의 복도를 걷는 듯한 장엄하고 환상적인 느낌을 자아내며 굴 안으로 600m 지점에는 용암이 얽혀 이루어진 거북바위가 나타난다. 이 거북바위는 길이 3m, 넓이 2m, 높이 0.7m의 규모로 천년묵은 거북이 그대로 굳어 버린 듯한 신비한 모습을 하고 있다.
9. 문주란 자생지
섬이 온통 파란 잎으로 덮여 있고 그 위로 백설 같은 꽃이 향수를 불러일으킨다. 이 섬은 하도리 굴동포구에서 50미터쯤 떨어진 곳에 표류하는 듯 떠 있는 작은 섬으로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문주란을 볼 수 있는 '토끼섬'이다. 문주란은 수선화과에 속하는 상록 다년생 초로서 해안에 자라는데 하얀 꽃은 은은하면서도 짙은 향기를 뿜어 관상용으로 높이 평가된다. 줄기는 위경(僞莖)으로 끝은 둥근 기둥 형태이며 높이는 50Cm, 지름 10Cm 정도이다. 위경 밑에는 짧은 근경(根莖)이 있어서 뿌리가 빽빽이 나 있다. 잎은 폭이 넓고 끝으로 갈수록 좁아지며 여름철에 잎사이에서 높이 70Cm가량의 화경이 나와서 맨 끝에 몇 송이의 꽃들이 우산 모양으로 피는데 은은한 향기가 해안까지 풍겨 온다. 열매는 가을에 익는데 밤톨 크기이며 메마른데 서도 잘 견디어 모래밭에서 3∼4년이 지난 것이라도 모래가 조금만 덮이면 그대로 싹이 튼다.
문주란은 원래 아프리카 내륙에 자라는 것으로 종자가 해류에 의하여 인도양을 거쳐 북미 및 남미 해안에서 해류를 따라 흘러 들어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문주란의 북한대(北韓帶)로 학술상 가치가 높아서 1962년 12월 3일 천연기념물 제 19호로 지정되었고 1966년 10월 12일 천연기념물 제 182호, 한라산 천연 보호구역 제 3 호 지구로 섬일대를 포괄하여 지정 보호되고 있다.
토끼섬에 자라는 식물은 모두 41종류이고 이중에서 목본은 개머루, 까마귀쪽나무, 돌가시나무, 사철나무, 댕댕이 덩굴 등 5종류뿐이고 나머지는 초본식물이다. 대표적인 초본식물로는 갯금불초, 갯까치수영, 갯미나리, 갯상활, 갯방풍, 갯괴불주머니, 갯메꽃 등 해안성의 식물들이다.
난도를 토끼섬으로 부르게 된 것은 7∼8월에 문주란 꽃이 피어 온 섬을 하얗게 덮은 모습이 마치 하얀 토끼를 닮았기 때문이라는데 일설에는 하도리 사람이 이 섬에 토끼를 길러 많이 번식하였으므로 이같은 이름이 불었다고 한다.
14. 이 도시에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지계표가 있는가?
자료 없음
15. 이 도시에서 가장 높은 지리적 지점은 어디인가? 거기에는 무엇이 있는가? 또는 무엇이 축조되어 있는가? (권위자들의 진술을 들으라)
한라산 - 영실기암= 제주의 모든 신들의 집합지로 알려진 곳
16. 이 도시의 어떤 지역이 자기들만의 특징을 가지고 있는 듯이 보이는가? 이 도시에서 특유의 영적 환경을 가진 것처럼 보이는 지역을 구분해 보아라.
제주 전역은 한국의 관광지역으로 개발되고 있는 지역이다. 특히 신제주지역은 관광의 효과성을 위해 건설된 도시이다.
영적인 조사
(Spiritual Research)
A. 비기독교 적인 조사
A-1 이 도시의 과거나 현재와 관련된 주요 신들이나 지역 귀신들의 이름은 무엇인가?
이 제주도 땅 가운데 있는 신령은 다음과 같다. 일반신과 당신, 그리고 조상신에 대해서 알아본다.
일반신
1. 옥황상제 - 하늘을 차지한 신
2. 지 보 사천대왕 - 땅을 차지한 신.
3. 산신대왕, 산신백관 - 산을 차지한 신.
4. 바 다 - 데서용궁 또는 요왕황제국.
5. 절(寺) - 서산대사, 육관대사
6. 인 간 - 삼승할망
7. 수복의신 - 칠원성군, ‘북두칠성의 신’
8. 얼굴을 차지한 신. - 홍진국대별상 서신국마누라
9. 일월을 차지한 신 - 날궁전, 달궁전
10. 무 조 신 - 초공 삼형제( 본멩두, 신멩두, 살아살축삼멩두)
11. 서천꽃밭(화를 가구는 밭)을 차지한 신-이공(꽃감관)
12. 전생을 차지한신 - 삼공
13.저승과 인간 생명을 차지한 신. - 시왕(十王)과 차사.
14. 목 숨 - 멩감
15. 농신, 목축의 신 - 세경과 테우리
16. 가옥의신 - 성주
17. 문 신 - 문전
18. 부의 신 - 안칠성, 밧칠성
19. 부 엌 - 조왕
20. 오방토신 - 울타리 안을 지키는 신.
21. 집안 출입로의 신- 주목(정주목)지신,정살(정낭)지신
22. 울타리 신 - 울담지신,내담지신
23. 낟가리의 신(노적신) - 눌굽지신
24. 아이를 저승으로 데려가는 신- 구삼싱할망 또는 구불법할망
25. 변소를 차지한 신 - 칙도부인 또는 칙시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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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마을 전체의 수호신을 말한다. 마을에는 신을 모시는 성소로서 신당이 있는데, 이곳에서 상주하면서 마을 주민들의 생활을 지켜준다.
역할에 따토지관, 본향당신,질병수호신, 씨족 수호신, 생업 수호신등리 있다. 한 마을안에는 여러개의 당을 모시고 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역할 분류
⑴ 마을 전체의 수호신
토지관, 본향이라고 한다. - 생산, 물고, 호적, 장적등 일반적인 제반사항을 차지한 신. 이 당을 모신 당을 본향당이라 한다. 이것은 자연 부락마다 하나씩 있다.
⑵ 육아와 안질,피부병,복질 등의 치료신
이 신을 모신 당을 ‘일뤠당’이라 하고,신은 ‘일뤠도’,’일뤠할망’이라 한다.
⑶ 사신
이 신은 표선면 토산리의 여드렛당에서 발원하여, 전도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다. 이 신을 모신 당을 ‘여드렛당’이라 하고, 신은 ‘여드렛도’또는’토산서편한집’이라 한다.
⑷ 어업수호신
섬 주의 해안 마을에 모셔지고 있다. 이 신의 당을 ‘해신당’ ‘개당’ ‘돈짓당’이라 하고, 이 신의 이름은 ‘해신’ ‘개하르바님,개할마님’ ‘돈지 하르바님,돈지할머님’이라 한다.
⑸ 수렵수호신
산간마을에 주로 분포되어 있다.
당명은 ‘산신당’이라 하고, 신명은‘산신대왕,산신백관,하로산또’라 한다.
⑹ 기타
농신, 목축신, 두신, 산신 등 일반신을 당신으로 모시는 마을과 처녀의 원령,도깨비가 당신으로 모셔지고 있는 곳이 있다.
마을제 (당굿)의 의미와 종류
1) 포제 - 마을 수호신을 위한 의례.
2) 별제 - 포제와 별도로 지내는 역병이나 재난을 방지하는 의례.
3) 기우제 - 가뭄의 해갈을 비는 의례.
4) 해신제 - 어업 특히 어망업 관장신을 위한 의례.
5) 제석제 - 농신 (제석신) 을 위한 의례.
6) 기타 - 무속의 본향당제.
당굿의 종류
1) 신과세제
마을의 신년제를 말한다. 신구관이 갈리는 것을 말한다.
겨울을 보내고, 새해르 맞이하여 농사의 풍등을 기원하는 계절제의이며, 마을 수호신인 당신에게 신녀하례를 드리는 당굿이다. 제일은 음력 정월이다.
2) 영등굿
음력 2월 초하루에 들어와서 2월15일에 나가는 내방신이다.
영등신은 ‘바람의 신’으로 저 멀리 강남천자국으로부터 북서계절풍을 몰고 오는 신이다.
3) 마불림제와 백중제
마불림제는 ‘당신의 옷’을 보존하고 있는 신당의 궷문을 열어 장마가 갠 후에 그 옷을 내놓아 말려 곰팡이를 풀어내는 제. 즉, 신의 청소 굿을 말한다.
4) 시만국대제
10월의 만국대제라고도 한다.
이것은 추곡의 수확 후에 새 곡식을 마련하여 올리고 기원하는 추수감사제. 음력 9~10월 중 택일하여 행한다.
본향당신에게 바치는 제미공양의 추수감사의례라 할 수 있다.
※ 굿은 행하는 기회, 규모, 성격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일반굿(가제)
문 전 제 - 일년의 행운을 비는 신년제.
철 갈 이 - 정월 또는 초가을에 행하는 계절제.
맹감코스 - 생업의 풍요를 비는 신년제.
요 왕 제 - 해신인 용왕에게 비는 신년제.
불도맞이 - 생남을 위한 기자의례.
아기비념 - 소아의 무병 성장을 비는 소규모의 의례.
넋 들 임 - 넋이 육체에서 이탈함으로써 일어난 병을 치료하는 의례.
마누라배송 - 홍역 또는 천연두의 신을 치송하는 의례.
푸 다 시 - 잡귀가 붙어 일어난 병을 치료하는 의례.
구삼승냉 - 아이를 저승으로 잡아가는 구삼승(저승할망)을 쫓는 의례.
두 린 굿 - 정신병을 치료하는 무의(추는굿)
영감놀이 - 도깨비의 범접으로 일어난 병을 치료하는 무의.
칠 성 제 - 수복신인 북두칠성군을 청하여 기원하는 의례.
성주풀이 - 가옥을 신축했을때 행하는 건축의례.
연산맞이 - 어선을 신축했을 경우와 원양출어를 할 경우에 배 아니에서 행하는 의례.(뱃고사)
불 찍 굿 - 화재가 났을 경우 화마를 퇴산시키는 의례.
조상신
조상신은 ‘조상’ ‘일월조상’ ‘군웅일월’등이라 부른다. 어떤 씨족이나 그 씨족의 일부인 한 집안을 수호해 주는 신.
A-2 주술, 마술, 예언, 사단주의 프리메이슨, 몰몬주의 ,동방종교, 여호와의 증인과 같은 것과 관련 있는 사당, 제단, 신당, 기념물 또는 건물은 어디있는가?
☞ 사당
제주향교 제주시 용담동 239번지 1392년 조선 태조 원년에 세워짐.
순조 27년에 현위치로 옮겨짐.
대정향교 서귀포시 대정읍 인성리 1416년 태종 16년에 세워졌다.
정의향교 남제주군 표선면 성읍리 1416년 태종 16년에 세워졌다.
( 성읍 민속마을) 헌종 15년(1849년) 장인식 목사(목민관)에 의해
현위치로 옮김.
향사당 제주시 삼도 1동 1691년 조선 숙종 17년에 세워짐.
고을의 한량들이 봄, 가을 모여 활쏘기와 잔치를 가지며, 민 심의 동향과 당면과제를 논하던 곳.
오현단 제주시 이도 1동 조선시대 제주에 유배 또는 방어사로 부임하여 지방 발전에 공헌한 다섯 명을 배향했던 옛 터.
☞ 제단
산신제 제주시 남동쪽 산천단. 음력 1월.5일 처음은 한라산에서 지냈다. 지금은 이약동 목사에 의해서 1470년에 옮겨짐
만설제 양력 1월 하순 산악인들이 한라산신에게 지냄
포제 별첨참조 입춘 2월4일 민안 태평을 기원하는 마을 단위의 제사
대상신(동사지신위)에게 마을의 평안을 빈다.
포제단 조천읍 북촌리 포제를 지내기 전에 본향제를 먼저하고, 상단제와 하단제 를 지낸 다음, 거리굿이 유교화된 도청제를 차 례로 드린다.
포제단 성산읍 온평리 온평리는 유교식 포제와 무속 당굿인 포젯굿을 동시에 거행 한다.
포제단 성산읍 고성리 ‘국신’은 마을 수호신을, ‘사명대신’은 원래 별제에서 모시던 신으로 ‘목숨 차지한 신’마을에 전염병을 막아주 는 신이라 한다.
포제단 서귀포시 호근동 호근리는 마을 포제를 한 해도 거르지 않고 행해해 온 마을 로, 100년 전에 만든 포제의 제관의복과 축문 등이 원본으 로 전해 내려온다.
포제단 제주시 해안(이승이) 축산 단지 북족 ‘주르레’라는 곳에서 설촌하여 해 안동남 쪽‘이스이'에 새가름이 형성되었고지금은 동동,중동,서동 으로 이루어졌다.
정월에 당제를 축문으로 서서 유교식으로 치르고, 음력 7월 에 초정일, 또는 혹정 혹해일 길일을 택하여후일제로 마을 포제를 드린다.
☞ 신당
문수물당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1리 당명 - 문수물당. 신위 - 1위. 성별 - 할망.
수운교 사당 서쪽100m 신명 - 문수물 큰당한집. 제물 - 돼지고기.
지점 바닷가. 祭日은 매월 3,7,13,17,23,27일에 다니며, 생산, 물고호적, 장적을 차지한 토지관이다.
바닷가 간단한 돌담만 두른 당이다.
상 ; 하모리인이 다닌다.
섯다니물당 남제주군 대정읍 하모3리 당명 - 문섯사니물당, 개당, 돈짓당. 신위 - 1위
성별 - 할망. 신명 - 고망돌 일뤠중저.祭物-돼지고기
제일은 매월 3,7일이며, 지금은 거의 폐당. 어부 해녀를 차지한 토주관이 다. 상 ; 하모리인이 다닌다.
장수원일뤠당 남제주군 대정읍 일과1리 장수원 당명 - 날뤠 일뤠당. 신명 - 일뤠할망. 신위 - 3위.
제일은 매월 1월 7일,17일, 성별 - 男女神
제물- 메 3기(밥세그릇), 물색,지전. 동일리,일과1,2리
주민. 모슬포 무슬물로 가지 갈라온 당.해녀,아이 피부병을 차지한 토주 관이다.
동문밧산짓당 남제주군 대정읍 안성리 당명 - 동문밧 산짓당. 신명 - 산짓당 일뤠중저
물탱크에서 100m 지점 제일은 2월,매 7일에 올린다. 성별 - 여신
생산,물고,호적,장적을 차지한 토주관이다.
제물 - 돼지고기X 메 3기. 안성. 인성리 주민.가는 현감, 오는 현감을 맞 이 하는 신당.
신평본향일뤠당 남제주군 대정읍 신평리 당명-신평본향당,일뤠당. 신명-산짓당 일뤠중저.
한길 북쪽 물탱크 아래쪽 제일은 정월 7일.(단제일). 신위-1위.성별-여신.
숲속. 생산,물고,호적,장적을 차지한 토주관이다.
이재수난 때 출정 전에 당제를 지냈다 함.
저지허릿당의 큰 딸. 현씨 상단골
지방틀할망당 남제주군 대정읍 구억리 당명 - 지방틀 할망당. 신위 - 1위. 성별 - 여신.
신명 - 일뤠할망, 저지허리궁전.
제일은 매달 7,17,27일. 제물 - 메3기, 과일, 생선
물고,호적,장적,생산을 차지한 토주관이다.
저지 당물 허리궁전에서 가지 갈라온 당.
서코지할망당 남제주군 대정읍 구억리 당명 - 서코지 할망당. 신명 - 일뤠할망. 신위 - 1위.
상동 서코지 제일은 매달 7,17,27일. 제물 - 메3기. 성별 - 여신.
생산,물고,호적,장적을 차지한 토주관이다.
대정 할망이 시집오면서 산지당에서 가지 갈라온 당.구억 상; 하동 주님 일부.
뒷성 서낭당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 당명 - 황개당. 신명 - 돈지 하르방.할망. 신위 - 2위.
하동 포구 바위 제일은 정월, 6월, 8월. 택일. 성별 - 남녀신.
제물-메 3기(조상 1), 돼지, 명실.
상동 매부리당에서 가지 갈라다 모신당.
하도 어부 해녀가 단골인 토지관이다.
상동 매부리당 남제주군 대정읍 가파리 당명 - 매부리당. 신명 - 돈지할망. 하르방.
상동 포구 신위 - 2위. 성별 - 남녀신. 어부와 해녀의 토주관
제물 - 메 3기, 돼지고기, 실, 동전.
하도 어부 해녀가 단골이다.
모슬포 하모리에서 가지 갈라다 모신 당.
제일은 정월, 6월, 8월에서 택일 한다.
아기업개당 남제주군 대정읍 마라리 당명 - 아기업개당, 처녀당. 신명 - 허씨 애기.
포구 높은 동산 신위 - 1위. 제물 - 메 1기. 매년에 1번. 성별 - 여신.
아기업개의 원령을 모신 당. 마라도 주민이 단골.
육아를 차지한 토주관이다.
하동 일뤠당 남제주군 대정읍 영락리 당명 - 일뤠당. 신명 - 일뤠할망. 제물 - 메 2기.
하동 정거장에서 바다쪽 제일은 일뤠날, 생기에 맞는 날을 택일하여 한다.
300m 왼쪽 밭 하나 건너.
☞ 이단들
제7안식교. 예수재림교회
#제주시
제주시교회 제주시 이도1동1549-8 김원삼목사 22-8054
#서귀포시
서귀포교회 서귀포시 천지동 320-14 신장호목사 62-6008
#북제주군
한림소장 북군 한림읍 옹포리 김우전소장 72-6331
어음가정반 애월읍 어음2리 양부필선생 99-1957
애월가정반 애월리 이장화선생
곽지가정반 곽지리 황순심선생
선인동에배소 초천읍 선흘2리선인동정명환소장 83-9008
함덕에배소 함덕리 노진구소장
통일교
제주통일교회 정종률 제주시 이도1동 1139-9 22-4245
신제주통일교회 진장진 연동 272-15 27-2994
서귀포통일교회 허경한 서귀포시 서귀동324-6 62-4713
한림통일교회 이승림 북군 한림읍 한림리 1183-5 72-5708
함덕통일교회 박광주 북군 조천2485 83-7765
대정통일됴회 박성인 대정읍 하모리944-1 72-9766
남원통일교회 김진철 남원리105-6 32-4673
성산통일교회 윤어학 성산읍 고성리1180-14 82-4885
윌취타워 성서책자 제주회
남원왕국회관 박우혁 남원읍 태흥1리 1337 32-4578
(여호와증인)
" 서광철 성산읍 고성리 1434 82-4624
서병휴 제주시연동280-29 23-0059
남원왕국회관 문재학 제주시삼도동 571-1 22-4851
(동부회중) 박화춘
(서부회증) 김부남 천지동 62-2265
문명윤 한림
A-3 과거에 이 도시가 건설되기 전부터 우상숭배가 자행되던 지역은 어디인가?
1)애월읍 곽지리 :제사에 쓰이는 토기 발견
2)애월읍 고내리 :탐라시대 유물발견
3)남 제주군 안덕개곡:고인돌 발견(당대의 묘제임)
*고인돌:(초기 권력자의 존재 영역 입증)제주시 한천 주변,외도동,애월읍 광령리를 거처 신예리 까지 제주도 서부 지역에 집중
4)남 제주군 남원읍 신예리 :고인돌 발견
5)제주시 한천주변:토기,그릇등다수의 유물발견
6)제주군 대정읍 상모리:유적발견
A-4 우상숭배와 연관된 기예품이나 유물이 있는 문화센타들은 어디에 있나?
A-5 이도시의 지도자가 의식적으로 자신을 이방 신이나 정사에게 바친 적이 있는가?
1) 건시제:삼을라의 탐라개벽을 기례 매년12원 10일에 봉제하고 있다. 옛날에는 국제로 받들다가 제주도 제로 모시는 제사로서 초헌관은 도백. 아종헌관은 기관장또는 유지가 맡는다. 건시대제는 삼성혈단에서 지냄으로 혈제라고도 한다.
2) 숙종왕이 3재로(수제,풍제,한제) 인해 제사를 허락함
A-6 이 도시에 처음 거주하던 사람들이나 이 도시를 건설한 사람들이 이 도시를 저주한 적이 있는가?
고종달 전설-진시왕이 인재가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물혈을 끊어 버려서 저주함.지명 이름을 종달이라하여 물이 나지 못하도록 저주함. 출중한 인물들이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 가지 저주들을 한 설화가 있음
B. 기독교적인 조사
B-1 이 도시는 하나님의 사자들을 어떻게 대접하여 왔는가?
1 헨드릭 하멜 - 네덜란드인으로서 64명과 일본, 나가사끼로 향하던 중에 폭풍을 만나 제주 부근 해협에서 파선되어 사십명의 생존자가 제주에 표류해서 1654년 5월에 서울로 압송 되었다. 이들은 1년6개월 동안 제주도안에서 그리스도 선교회 흔적을 남겼다.
2 1901년 신축교란(천주교 박해)이 있었다.
3 이기풍목사 -1908년에 제주도에 도착한 목사님은 강력한 반대로 인해 심한 박해를
받았고 200명이상 되는 사람이 그를 죽이기로 서약했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하나님의 은혜 로 송문옥을 통해 구해졌는데 그 다음날 어느 마을에서 복음을 전했는데 밤이 되자 아 무도 자기 집에 자는 것을 허락치 않아서 밖에서 자야만 했었다.
참고자료 ;한말서구의 제주관련 내 친구 이기풍목사를 만나다에 발췌
영적전쟁; 이기풍 목사님이 처음 제주도에 도착한 곳은 산지포다. 지금 현재 산지리는 제주도에서 가장 큰 윤락가가 되었다.
B-2 복음전파가 쉬웠는가? 어려웠는가?
1.역사적
1989년에 천주교가 처음 들어오고 1907년 개신교가 제주에 들어오게 되었다. 권력을 등에업고 제주의 문화와 권위체계를 무시하던 천주교 선교의 실패에 의해 많은 피흘림이 있었고, 이기풍 목사의 교회개척 사역 또한 토착화에 실패했다. 6.25와 60년대 이후 유입된 외지인에 의해 대부분의 교회가 성장했다. 디아스포라 선교적 한계성이 강하게 나타난 6.25 이후의 제주선교 또한 토착화에 실패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2. 현재
1) 아직도 곳곳에 미신 (신구간등) 믿는 것 때문
2) 기독교에 대해 폐쇄적이고 편견을 가지고 있다.
* 메스컴에 나타난 이단 종파에 악 영향(영생교 구원파...)
3) 우상숭배는 없지만 부모로 부터 내려오는 영향력이 크다.(청소년 시각)
4) 뿌리깊은 미신적인 신앙으로 인해 주님을 영접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B-3 교회들은 어디에 위치해 있는가? 올바른 교회라고 느끼지는 가?
서귀포와 제주시등 인구 밀집지역에 대다수의 교회가 밀집해 있고 토착종교의 강한 영향력 아래 있는 소규모 마을과 중산간 마을에는 교회가 거의 개척되지 않았다. 이런 통계를 참고하면 제주 교회는 외지인의 교회로 남아 있다. 현지인의 삶에 영향력을 주지 못하고 있다.
1988년 통계
제주 선교 활동은 시대 상황별로 조금씩 차이는 나지만 대체로 활발한 것으로 볼수 있다 그러나, 선교 활동의 초/중기에는 전 道내에 분산되게 교회가 설립되었으나 1970년 이후의 교회는 주로 제주 시권 내에 세워져 상당한 지역 편중 현상을 보이고 있다.
1970년 까지는 도내 전체 교회의 82%가 농촌지역교회 였는 데 비헤 현제는 제주시에 32%, 서귀포시에 19%로 읍/면지역내의 교회가 49%에 불과하다.
제주도의 자연 부락 215개 가운데 개신교회가 없는 곳이 103개 마을이며 그 중에는 주민 1.000명 이상 되는 마을이 30여개나 있다.
문론 인구 편차로 볼 때 교회의 도시 집중이 자연적 현상이라 할수 있으나 제주전역 복음화의 필요 라는 관점에서 볼때는 세로운 목표설정과 더불어 이를 성취하기 위한 효과적인 전략과 적용이 요구되고 있다.
B-4 이 도시의 교회들의 건강상태는 어떠한가?(설문조사 토대)
* 역사적 성향
: 1908년 이기풍 목사 제주 개척 이후 10년간 제주성내외 11개지역에 교회 설립
1920년 일정치하 이후 25년간 12개 교회 설립
민족해방기 ~ 현재까지 45-50년 8개 교회 설립
51년 한해 19개교회 건설
52-60년 극히 부진한 선교활동 (6.25 경향)
72-80년 활발한 활동으로 46개 교회 설립
81-88년 무려 51개 교회 설립 이후 새로운 전환기를 맞음
* 현 교회 실정 1) 전체교회중 80%가 주민의 호흥 얻지 못하는 미자립 영세교회
2) 전체중 59% 자립할수 없는 열악한 환경
3) 농촌 교회 보조와 개척의 필요성-현재 미자립 교회가 대부분임
4) 유아교육 참여교회가 20여군데
* 해결책 : 1) 미자립 교회 지원 2) 새 교회 개척 3) 교회 시설 확충
4) 장학제도 및 청소년 지도 이웃봉사등의 주민 호응도 높은 사회봉사활동 필요
B-5 “이 도시의 장로”로 인정받는 기독교 지도자는 누구인가?
1) 정 영택 목사 - 성안 교회 . 지역내 인정받는 교계 지도자
2) 신 구범 집사 - 영락 교회. 제주 도지사.
3) 오 성찬 집사 - 영락 교회. 소설가. 신세계미술관관장
4) 김 종식 장로 - 영락 교회. 신협등 많은 사업체 운영. 선교기관 후원내입 주로 부담.
5) 이 경수 장로 - 영락 교회. 前 오현고등학교 교장역임.
6) 허 철수 장로 - 제주대 교수.
7) 강 우탁 장로 - 영락 교회. 사회사업.
8) 홍 성범 목사 - 동부 교회. 30여 년 간 제주 목회. 제주교회 연합운동의 주역.
9) 故 현 영립 장로 - 성안 교회. 제주 교회사등 많은 저서/논문 저술.
제주 선교에 대해 많은 영향력 끼침.
10) 표 순호 목사 - 제주 순복음 교회. 기독교 협의회 회장.
11) 부재호 집사 - 토요 거리찬양 지도자
B-6 이 도시 전역에서 기도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1) 역사적 흐름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 반감을 가진 사람이 많다.(천주교의 난 등)
2) 기독교 행사 형식의 노방전도 기도모임에[ 대한 적극적 회방은 보고되지 않고 있다.
B-7 교파간에 기독교 지도자의 단합정도는 어떠한가?
1) 아세아 방송 (애월읍 소재) 통한 정기적인 목회자 연합 세미나 있음
2) 교회 연합 활동의 긍정적인 이유 - 목회자들간의 교파에 대한 비판적 인식이 없음
상호 개방/ 인정 노력
3)기독교 교회 협의회 주체 연합사역을 주도하고 있음
B-8 기독교 도덕에 대한 이 도시 지도자들의 견해는 어떠한가?
1) 천주교난의 영향과 두터운 민속신앙 영향으로 기독교적 세계관 폐쇄적 경향 짙음
2)초기선교의 학교나 병원 개척등 지역사회를 위한 노력 부족으로 인해 도민 공감대 형성부족
3)교회내 선교원 활발한 활동으로 주민의 좋은 반응 일으킴
4)여전히 부족한 지역사회 활동
C. 계시적인 조사
1. 이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메시지를 들을 줄 아는 성숙한 중보자로 인정받고 있는 이들은 누구인가?
거리 찬양의 지도자 그룹
그외 자료 없음
2. 이 도시 전체 또는 이 도시의 삶이나 지역의 어떤 분야들을 지배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주요 정사들의 정체는 과연 무엇인가?
1. 탐욕과 무자비한 정사를 조정한 맘몬의 영
2. 토속신앙 속의 미혹의 영 - 미혹의 영
3. 사고 속의 견고한 진들
1. 두려움 -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중요 무기
2. 거절감 - 무자비, 정욕적인 권위의 영향을 이용
4. 관광지 특유의 음란의 영- 서귀포시의 경우 96년 한해동안 1000여명 이상에게 임질과 매독 검사를 실시했다.
나. 정보의 정리와 활용
1. 영적인 지도(Spiritual Mapping)를 그리라
수집된 정보에 의해서 영적인 지도를 그리라. 4절지-전지크기
2. 중보기도의
전략을 세우라
1. 이 도시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 VISION은 무엇인가?
1-1. 국제 교류와 무역의 중심지로 풍요와 부의 통로가 되는 것
A. 계시적 근거들
1. 이사야 60 : 1 - 9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8) 저 구름 같이,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 날아 오는 자들이 누구뇨
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2. 이사야 61 : 4 - 6
4) 그들은 오래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며 예로부터 무너진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며 황폐한 성읍 곧 대대로 무너져 있던 것들을 중수할 것이며
5) 외인은 서서 너희 양떼를 칠 것이요 이방 사람은 너희 농부와 포도원지기가 될 것이나
6) 오직 너희는 여호와의 제사장이라 일컬음을 얻을 것이라 사람들이 너희를 우리 하나님의 봉사자라 할 것이며
B. 사실적 근거들
제주는 역사적으로 동북아와 환태평양을 연결하는 국제적 해양도시로써의 지정학적 위치를 가진 중요한 땅이다.
수출과 동아시권의 관광거점으로써의 재정적 가능성과 살기좋은 자연환경등 제주가 가진 자연자원은 실로 무궁한 부요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역사 이레 제주는 여러 중앙 정부의 폭정에 의해 부당한 조치를 당해온 것이 사실이지만 제주가 가진 본래의 자원과 가능성을 소멸시키지는 못했다.
제주도 당국의 목표는 인구 20억의 동북아권 중심 도시로 제주를 성장시키는 것이고 제주를 정치와 이념을 초월하는 국제평화도시로 발전시키려는 움직임 또한 중요한 움직임으로 대두되고 있다.
지난 예이지만 고르바쵸프와 노태우 대통령의 기습 정상회담의 성공은 제주가 아닌 다른 땅이었다면 불가능했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만큼 제주는 한국에 속한 땅 이지만 한국이 가진 사회,문화,정치,이념적 한계성을 뛰어 넘을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를 이미 확보하고 있어서 제주의 국제 교류의 중심화와 세계의 평화에 기여하는 섬이되는 비젼의 가능성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1-2. 세계선교의 전초기지
A. 계시적 근거들
이사야 61 : 5-9
너희가 열방의 재물을 먹으며 그들의 영광을 얻어 자랑할 것이며
7) 너희가 수치 대신에 배나 얻으며 능욕 대신에 분깃을 인하여 즐거워할 것이라 그리하여 고토에서 배나 얻고 영영한 기쁨이 있으리라
8) 대저 나 여호와는 공의를 사랑하며 불의의 강탈을 미워하여 성실히 그들에게 갚아 주고 그들과 영영한 언약을 세울 것이라
9) 그 자손을 열방 중에,그 후손을 만민 중에 알리리니 무릇 이를 보는 자가 그들은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 인정하리라
이사야 60 : 1 - 9
1)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 이는 네 빛이 이르렀고 여호와의 영광이 네 위에 임하였음이니라 2) 보라 어두움이 땅을 덮을 것이며 캄캄함이 만민을 가리우려니와 오직 여호와께서 네 위에 임하실 것이며 그 영광이 네 위에 나타나리니 3) 열방은 네 빛으로,열왕은 비취는 네 광명으로 나아오리라 4) 네 눈을 들어 사면을 보라 무리가 다 모여 네게로 오느니라 네 아들들은 원방에서 오겠고 네 딸들은 안기워 올 것이라 5) 그 때에 네가 보고 희색을 발하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풍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열방의 재물이 옴이라 6) 허다한 약대,미디안과 에바의 젊은 약대가 네 가운데 편만할 것이며 스바의 사람들은 다 금과 유향을 가지고 와서 여호와의 찬송을 전파할 것이며 7) 게달의 양 무리는 다 네게로 모여지고 느바욧의 수양은 네게 공급되고 내 단에 올라 기꺼이 받음이 되리니 내가 내 영광의 집을 영화롭게 하리라 8) 저 구름 같이,비둘기가 그 보금자리로 날아 오는 것 같이 날아 오는 자들이 누구뇨 9) 곧 섬들이 나를 앙망하고 다시스의 배들이 먼저 이르되 원방에서 네 자손과 그 은금을 아울러 싣고 와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에 드리려 하며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에게 드리려 하는 자들이라 이는 내가 너를 영화롭게 하였음이니라
신명기 28 : 12 -14
12) 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13) 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14)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그 말씀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아니하고 다른 신을 따라 섬기지 아니하면 이와 같으리라
이사야 62 : 8
8) 여호와께서 그 오른손,그 능력의 팔로 맹세하시되 내가 다시는 네 곡식을 네 원수들에게 식물로 주지 아니하겠고 너의 수고하여 얻은 포도주를 이방인으로 마시지 않게 할 것인즉
B. 사실적 근거들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와 민족을 세계를 섬기는 봉사의 나라로 부르셨다고 믿고 있다. 그 역사적 근거는 弘益人間이라는 우리 민족의 건국 설화에서부터 우리 민족 내면에 흐르는 精 문화와 그것을 원칙으로하는 관계중심적인 가치관 등을 들수있겠다.
한국은 다음 세기를 준비하는 선교 파송국으로써 국제적 요청과 그 전략적 필요성이 날로 높아지고 있다.
이런 성경적 시대적 요청에 부흥하기 위해 한국의 교회는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데 그것중의 하나는 한국특유의 내향적 문화 극복과 효과적 선교훈련을 위한 훈련 센터의 부족 등이라 할수 있다.
또 유교적 가족 정통의 굴레로 인해 많은 헌신자가 부르심을 포기하는 등의 문화적 갈등 극복 훈련을 위해서도 같은 나라안에 속해있지만 육지와 멀리 떨어진 제주에서 부르심을 준비하는것도 헌신자들에게는 좋은 기회라 아니할수 없다.
더구나 제주는 국제 관광도시로 비자 규제의 완화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외국의 뛰어난 강사들의 단기 사역이 용이하다는 장점등 제주도가 지닌 선교 기지로써의 가능성과 유용성은 이루 말로할수 없을 만큼 많다고 할수있다.
아울러 하나님께서는 제주가 가진 해양도시로써의 이점을 이용하여 조선시대부터 기독교인을 이곳에 보네셨고 디아스포라 선교를 통해 이 땅에 교회적 기반을 구축해 놓으셨다.
이 기반은 제주의 세계선교적 기여를 위한 것일 뿐만 아니라 역사이래 어둠의 영들에의해 결박 당해온 제주민의 해방과 이 땅의 영적 부흥을 위한 하나님의 자원이기도 한 것이다.
2.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것들이 무엇인가?
2-1. 제주를 지배하는 주요 정사와 권세
1. 탐욕과 무자비한 정사를 통해 일하는 맘몬의 영
2. 토속신앙 속의 미혹의 영
3. 사고 속의 견고한 진들
1. 두려움 - 자연에 대한 두려움이 중요 무기
2. 거절감 - 무자비, 정욕적인 권위의 영향을 이용
2-2. 역사시대와 함께 시작된 불의(不義)한 권위를 이용 한 방해
1. 탐욕과 무자비한 정사를 통해 이 땅을 역사적으로 가장 가난하고 억압된 땅으로 만들었다. 고려이후로 제주의 산물은 이 땅의 사람을 위해 사용되지 못하고 제주의 가장 중요한 탤런트인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한 무역을 막았고 제주사람이 육지로 나가는 것조차 막음으로써 이 땅이 가진 지리, 외교적 은사를 결박했다.
2. 경제적 수탈과 권력을 이용한 무자비한 학살 등을 통해 외부인에 대한 적대감을 강화시키고 독립적이 되려는 정서를 심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적대감으로 나타나서 이 땅의 회복을 본질적으로 방해했다.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거절한 것이다.
2-3. 역사시대 전부터 뿌리내린 거짓 진리를 통한 원수의 방 해
1 . 악한 영들과 어둠의 세상주관자들이 삶을 지배함
제주의 지리적 위치 때문에 자연 극복에 대한 노력이 많이 필요했다. 이것을 이용하여 원수는 하나님이 받을 창조의 영광을 이 땅에서 도둑질하고 각종 종교행위를 통해 이 땅을 귀신들의 땅으로 만들었다. 이 땅의 사람들은 어둠의 권세에 제주를 넘겨준 것이다.54
도표 1) 거짖 종교와 비 진리의 진 - 제주의 불교
도표 2) 기타 종교와 샤머니즘
2. 원수들의 속임에 의해 복음을 거절하게 됨
각종 초자연적 능력을 행함, 이 땅 사람의 생각 속에 두려움과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심음. 비 진리적 전통과 문화의 결박을 통해 적극적으로 복음을 거역함
3. 어떻게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할수 있는가?
3-1. 계시적 근거
사 62장 1-5 제주에 대한 비젼을 홍보함
이사야 61장 1- 11 7 MM전반에 선한 지도력을 발휘함
신명기 28장 12-14 제주민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김 - 영적 각성
이사야 41장 8-16 약속의 선포와 영적 전쟁
이사야 42장 10-13 찬양과 경배
시 2편 8 열방을 위한 기도 운동
출애굽기 15장 1-7 영적 전쟁
역대하 7장 13-14 영적 각성과 중보기도
시편 149편 예배와 영적 전쟁
3-2. 전략적 근거
1. 국제 해양도시로써의 은사 회복을 위한 사역
국제 해양도시로써의 제주의 은사를 회복하기 위하여는 정치적 제한 완화와 제주인의 중안정부에 대한 부정적 감정 해소 그리고, 국제 해양도시에 걸맡는 비젼을 가진 지도자들의 정치 경제 문화등 다방면에 걸친 활동이 道民 전체의 축복속에서 추진되 나가도록 해야 하겠다.
이사야 61장 1 - 11 7 MM전반에 선한 지도력을 발휘함
이사야 62장 1 - 5 제주에 대한 비젼을 홍보함
그러므로,
1. 제주와 본토간의 화해운동,
2. 제주 개발의 기본 정신을 국제화해를 위한 봉사정신 위에 세우는 개몽운동,
3. 제주도 출신의 지역 인사와 교회 지도자들의 자발적 봉사를 유도하여 제주도내에서의 지 도력이 회복 되도록 해야하 겠다.
4. 하나님의 계획이 제주에 이루어질 때 까지 지속적인 중보기도망을 가동해야 한다.
중보기도 헌신자는 교회 뿐만 아니라. 제주와 한국 내의 헌신되고 분별력있는 7MM 관련 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기도네트웤을 구축하도록 해야 하겠다.
2. 영적 부흥을 통한 축복과 도 전체의 미래를 위한 영적 환경 조성을 위한 사역
영적 부흥을 통해 이 땅의 빈곤의 원인인 어둠의 세력의 진을 파하고 이 땅의 사람들이 성경적 가치관 안에서 제주를 변화시키고 이땅을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이 이룰수 있도록 영적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그러므로
1. 지난 역사에서의 교회와 제주와의 관계를 정밀 연구하여 현제까지 양자간에 존재하는 갈등 요인을 규명 해야 한다.
2. 재주 복음화와 영적 부흥을 위한 연구 개발 사역을 통해 정확한 지역 정보를 기반한 효 과적인 상황화 전략이 수립 되어야 한다.
3. 제주내에 있는 영적 세력을 분별하여 효과적으로 결박하기 위한 지속적인 중보기도 사역 이 필요하다.
4. 제주도내 교회와 타 지방교회가 제주의 영적 부흥에 효과적이고 장기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하기위한 네트웤과 동원사역이 필요하다.
5. 제주도민의 실제적인 회심과 복음화를 위해 지속적,효과적인 전도사역이 수행되어야 한 다.
신명기 28장 12-14 제주민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김 - 회개와 영적 각성
이사야 41장 8-16 약속의 선포와 영적 전쟁
이사야 42장 10-13 찬양과 경배
시 2편 8 열방을 위한 기도 운동
출애굽기 15장 1-7 영적 전쟁
역대하 7장 13-14 영적 각성과 중보기도
시편 149편 예배와 영적 전쟁
3. 영적전쟁을 하라
중보기도를 하라
경배와 찬양을 하라
영적행진을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