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등산화 역사는 어떻게 쓰여질까?
국민학교 내내 고무신만 신었다.
중학교에 가 처음 신은 운동화는 잘 닳아졌다.
교대에 입학했다고 장흥 외삼촌이 제화점에서 처음 구두를 사 주셨다.
1984년인가 85년인가 섬에서 근무할 때 처음 친구들과 함께 가야산에 갈 때도 아마 운동화였을 것이다.
1996년엔가 대서초로 등산화를 팔러 다니는 장사가 큰 가방에 등산화를 짊어지고 교무실에 와 늘어놓았다.
단단한 가죽에 바닥과 등을 실로 꿰맨 자국이 선명한 그 등산화를 3만원에 샀던가, 5만원에 샀던가?
그 이후로 싸구려 등산화를 많이도 신었다.
그러다가 2008년 무렵 장성교육청에 근무할 때 광주의 산악회를 몇개 따라다녔다.
신발 자랑 옷자랑이 많았다.
5만원 내외의 저가 등산화만 신다가 10만원이 넘은 등산화를 샀다.
트렉스타였던 것 같다. 그러다가 산악회 회원이 우리나라 산엔 캠프라인이 좋다고 해 20만원 가까이 들여
그걸 샀다. 과연 좋았다. 밑창이 닳아지면 4만원을 주고 보내면 새 신발처럼 깔개까지 하나 더 들어있는 신발이 돌아왔다.
오토바이 스턴트를 하는 송병철이 회사에서 나온 신발을 선물해 지금도 가끔 신고 있다.
고흥지원청 학교생활지원센터장을 하던 박수영이 순천 교장으로 가면서 블랙야크에 가서 등산화 하나 사라고 연락이 왔는데,
염치가 없어 가지 않았더니 사장이 어느 날 포두 교장실로 가져와 또 그걸 잘 신었다.
지금도 신발장과 창고엔 맑고 실이 터지고 밑창이 등산화가 많다.
어느 날 구례의 철수 형님이 전화해 등산화 사이즈를 물었다.
6월 둘째주에 지리산에 다녀오면서 형님네에 들러볼까 생각하다가
등산화 가지러 가는 사람처럼 될까봐 그냥 왔는데 바로 다음날 형님이 고흥으로 오셨다.
차에서 내린 신발은 검은 비로드 옷감 가방에 쌓인 잠발란이었다.
난 잠발란이 어떤 신발인지 모른다. 이탈리아 삼색국기가 조그맣게 말목에 새겨져 있었다.
바닥과 옆을 잇는 부분에 바느질한 자국이 또렷하다.
짙은 갈색에 발목까지 감싸는 등산화를 받고 난 어떻게 사례해야 할지 난감하다.
벌교에 나가 점심을 하자하니 고흥읍에 가 생선구이 백반을 먹자 하신다.
술을 안 마신다기에 난 한잔 하려니 운전을 부탁하고 고흥읍으로 간다.
시장에 들어가니 생선구이 가게만 보이고 식당은 안 보인다. 식당을 가려는 차에
회를 먹자고 자연식당에 가니 열려 있는데 장사를 안 한단다.
생선구이는 잊고 도라지식당에 전화하니 문을 열었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