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의 주유천하(14)桃花殺(도화살)에 대하여
세월이 왜 이리 빠르게 흘러간단 말인가! 흐르는 강물처럼 지나가는가, 아니면 KTX 고속철처럼 가는가, 그것도 아니면 화살처럼 가버리는가. 시간을 늦추는 방법을 알면 성공한 인생이다.
인생 템포를 늦추는 방법 가운데 하나가 꽃을 보는 일이라는 것을 근래에 깨달았다. 꽃은 계절에 맞춰 핀다. 각기 피는 타이밍이 다르다. 이 꽃을 보고 계절이 변하는 것을 알아차리는 인생은 시간이 천천히 가는 인생이다. 필자의 글방인 전남 장성 축령산 휴휴산방(休休山房) 뜰 앞에는 백도화(白桃花)가 있다. 부산의 화승원(和承園)에서 만발한 백도화를 처음 보고 매료됐다. 주인이 선물로 묘목 두 가지를 보내준 것이 벌써 7~8년이 돼가니 꽃이 갈수록 풍성해진다.
대개의 도화가 짙은 분홍색인데 비해 백도화의 꽃잎은 하얀색이다. 그래서 귀하다. 휴휴산방은 해발 300m에 있으므로 꽃 피는 시기가 평지에 비해 일주일 정도 늦다. 이 백도화는 초봄이 지나고 중봄이 되는 무렵인 4월 하순에 만발한다. 백도화가 피면 봄의 가운데로 들어가고 있음을 알아차려야 한다. 지난해에도 뭐가 그리 바빴는지 백도화 피는 것도 모르고 지나쳐버렸다. 올해는 만사 제쳐놓고 이때를 기다렸다.
다른 꽃은 ‘예쁘다’ ‘좋다’는 느낌이 들지만 하얀색의 백도화를 보면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는다. ‘뇌쇄적(惱殺的)’이라는 단어의 참 뜻을 백도화를 보고 알았다. 왜 이 꽃이 중년 남자를 홀딱 빠지게 만드는지 생각해보니 그 순진무구함이다. 하얀색은 순진·순수·결백·무저항을 상징한다. 그런데 하얀색도 약간씩 차이가 있다. 그림물감의 하얀색이 있고, 옷감의 흰색도 있고, 자동차의 흰색도 있다. 백도화의 하얀색은 이러한 흰색들을 초월하는 그 어떤 신성함이 있다. 굳이 문자로 표현하자면 ‘고귀한 하얀색’이다. 물감이나 옷감에서 느끼는 흰색과는 다르다는 말이다.
인생을 살면서 때가 묻고 분별이 덕지덕지 쌓인 중년 남자의 악어가죽을 벗겨버리는 힘을 가진 색감이라고나 할까. 백도화의 하얀색을 보면 무장이 해제된다. 그 어떤 공격의지도 퇴화된다. 고귀한 하얀색이 주는 마력이다. 고귀한 하얀색 앞에서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저항할 수 없다. 이기심이 작동할 수 없다. 가진 거 다 내놓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 고귀함은 절대의 순진무구(純眞無垢)이기 때문이다.
백도화의 꽃잎은 홑겹이 아니다. 여러겹이 겹쳐 있다. 홑겹에 비해서 여러겹의 꽃잎은 포근한 느낌을 준다. 속이 더 깊은 것 같다. 그리고 꽃잎이 바람에 팔랑거린다. 뻣뻣하면 덜 그럴 텐데, 꽃잎을 손에 쥐면 바스러질 것 같은 부드러움이 더 사람을 끌어당긴다. 인간의 보호본능을 촉발시킨다. 순진무구한 백도화의 꽃잎은 세상에 오염되기 이전의 인간 본성, 본래 고향을 상기시켜주는 작용을 한다. 인간 세상에 살면서 시루떡처럼 쌓인 분노·상처·회한을 씻어내주는 꽃이 백도화라고 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뜰 앞에 핀 백도화에 빠져 있다가 머릿속에 다가온 단어가 있다. 도화살(桃花殺)이다. 도화는 이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안에 살기(殺氣)를 머금고 있다는 뜻이다. 사주팔자에 도화살이 있으면 이성이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는다고 해서 예로부터 도화살 낀 여자나 남자는 이성 때문에 시달린다고 봤다. ‘물 묻은 바가지에 깨 달라붙듯이 달라붙는다’는 옛말이 그것이다. 잡아당기고 끌어당기고 매료시킨다. 이 매료시키는 힘이 오히려 자기를 망가뜨리는 힘으로 작용한다.
사주명리학에서는 자(子)·오(午)·묘(卯)·유(酉)를 도화로 본다. 십이지에 이게 들어 있으면 도화살이 있는 것이고, 이성을 잡아끄는 매력이 내장돼 있다고 본다. 기차나 버스를 타고 가다가 옆에 앉은 사람과 결혼한 사람들은 대개 도화살이 있는 경우가 많다. 장희빈이 숙종에게 캐스팅된 것도 도화살의 힘이라고 해석한다. 장희빈은 도화살이 서너개쯤 됐던 것 같다.
옛날에는 도화살을 부정적으로 봤지만 지금은 아니다. 연예인이 되려면 도화살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인기가 있다.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도화살이 있는 정치인은 이성들의 표가 몰표로 쏟아진다. 받은 것도 없이 왠지 끌리는 것이다. 산방 뜰에는 백도화 옆에 분홍색 꽃잎의 보통 도화가 있다. 백도화의 색깔이 종교적 살기라면 분홍색 도화는 도화살로 분류하고 싶다. 종교적 살기는 때를 벗기는 작용을 하고, 분홍색 도화는 인간을 잡아끄는 성적인 매력을 풍긴다. 백도화가 성기(聖氣)라면 분홍색 도화는 성기(性氣)인 셈이다.
분홍색 도화의 성기(性氣)를 인수분해하면 나체(體)도화, 월장(越牆)도화, 곤랑(滾浪)도화 등이 있다. 나체도화가 있으면 속옷 입기를 싫어하고 아무 데서나 옷을 훌러덩 벗기를 좋아한다. 월장도화가 있는 여자는 남자들이 담장을 넘어서라도 그 여인에게 다가가게 할 정도로 흡인력이 강력하다. 곤랑도화는 색을 밝히다가 성병에 잘 걸리는 팔자다.
인터넷이 발달한 현대는 화면발(畵面發)의 시대다. 화면발의 시대에 가장 맞는 팔자가 도화살 팔자다. 단, 지성을 겸비해야 돈이 된다. 지성이 결여된 도화살은 색난(色難)이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