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근 시인
1973년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중앙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98년 문학동네신인상에 「이월」 외 네 편의 시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가 있다.
------------------------------------------게시 목록----------------------------------------
종점 근처 / 김근
어제 / 김근
담벼락 사내 / 김근
복도들 1 / 김근
뱀소년*의 외출 / 김근
공중전화부스 살인사건 / 김근
종점 근처 / 김근
지하도 주둥이를 빠져나오자
얇은 여자 하나 나를 가로막았다
여자의 텅빈 눈은
아무것도 비추지 않았고,
저랑 얘기 좀 하실래요?
아뇨 그럴 생각 없어요
그저 잠시만 함께 있으면?
같이 자는 건 어때요?
외눈박이 가로등이 몇 번인가
노란 눈을 검벅거렸다
자세히 보니 여자는
그림자를 달고 있지 않았다
왜 하필 저죠?
이곳엔 당신 말곤 아무도 없으니까요
비좁은 계단으로 여자는
나를 데려갔다 내가 어두워지자
모서리가 너덜너덜해진 손으로
여자가 내 팔목을 잡았다
저...... 도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요?
잽싸게 나는 여자를 구겨
후미진 골목에 버렸다
적어도 나는 그 얇은 여자를
찢어버리진 않을 것이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중에서
어제 / 김근
항아리 같은 뚜껑을 열고 사내는 깨어났다 낡고 낡은 저 바깥엔 삼백예순 날 종일 비 내리고 빗방울 하나마다 부릅뜬 눈알들 추녀 끝 마당엔 여자가 온몸으로 눈알을 맞고 있었다 여자는 희게 젖고, 엄마 나는 저 눈깔들이 무서워요 무서워 할 것 없단다 얘야 지느러미나 혓바닥이 내릴 날 있을 거다 저것들은 엄마가 죽인 아기들의 눈깔인가요? 얘야 저것들은 무수한 날에 바꿔 달 눈알들이란다 또로록 또로록 굴러다니며 검은자위들이 본 저 징글징글한 것들을 내가 다 다시 봐야 한다고요?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 너 같은 건 다 거짓말이란다
눈알 비 맞고 새들이 떨어져 죽었다 희게 젖은 여자가 죽은 새들을 들췄다 새들의 찬 부리 위에는 눈 없이 텅 빈 구멍만 뚫려 있었다 사내애는 제 눈알을 뽑아 여자에게 버렸다 희게 젖은 여자의 옷에 붉은 피 번졌다 여자는 이제 영영 붉은 여자가 되었다 잎사귀마다 데롱데롱 눈알들을 달고 나무들이 사내애를 쏘아보았다 대지는 터진 눈알들로 질퍽거렸다 없는 눈으로 사내에는 보이지 않는 길을 더듬거렸다 아무것도 아니란다 네가 살아 있다는 것도 지느러미도 없이 시들한 혓바닥도 없이 멀리서 항아리 깨지는소리가 들려왔다
[시 관련 기사 / 한겨레 신문, 2005.10.21]
태어남의 고통을 노래함
젊은 시인 김근(32)씨가 등단 7년 만에 첫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을 묶어 냈다.
“항아리 같은 잠의 뚜껑을 열고 사내애는 깨어났다 낡고 낡은 잠 바깥엔 삼백예순 날 종일 비 내리고 빗방울 하나마다 부릅뜬 눈알들 추녀 끝 마당엔 여자가 온몸으로 눈알을 맞고 서 있었다 여자는 희게 젖고, 엄마 나는 저 눈깔들이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단다 얘야 지느러미나 혓바닥이 내릴 날 있을 거다 저것들은 엄마가 죽인 아기들의 눈깔인가요? 얘야 저것들은 네가 무수한 날에 바꿔달 눈알들이란다 또로록 또로록 굴러다니며 검은자위들이 본 저 징글징글한 것들을 내가 다 봐야 한다고요? 보이는 건 아무것도 아니란다 얘야 너 같은 건 다 거짓말이란다”(<어제>)
시 <어제>의 앞부분은 이 개성 넘치는 시집의 매혹과 당혹을 압축해서 보여준다. 한 아이의 또는 한 시인의 환상적 탄생담에 해당하는 이 시에서는 빗방울들이 눈알이 되어 내리고, 항아리 같은 잠에서 깨어난 사내애는 그 눈알들을 무서워하지만, 그가 엄마라고 부르는, 아기들을 죽인 여자는 눈알 비말고도 무서워할 일은 얼마든지 많다는 말로 그의 불안을 덧칠한다. 압권은 인용부의 마지막 구절, “너 같은 건 다 거짓말이란다”에 있다. 보르헤스의 소설을 연상시키는 이 세계에서 태어남은 거짓-태어남이고 적대적인 경험과의 마주침에 해당한다. <헤헤 헤헤헤헤,>라는 제목의 시에서도 뒤란의 시커멓게 빛나는 항아리들을 열어 본 늙은 어미는 “아기들의 몸 없는 머리를(…) 하나씩 뽑아들”고는 말한다: “언제 다 죽을래?”
이런 시적 정황을 가령 적대적인 모자관계 또는 불행한 가족사의 표현이라 이해하는 것은 순진하고도 곤란한 독법일 것이다. 시인이 포착하는 것이 불행과 적대감이라면 그것은 부모-자식 관계나 가족사를 뛰어넘는 훨씬 근본적인 차원을 겨냥한다. 탄생과 죽임, 교접과 부화, 뒤틀린 성장과 탈피, 사지절단과 식인(食人) 등이 난무하는 김근씨의 시들이 끔찍하거나 음울하기는커녕 자못 발랄하고 유쾌하게까지 다가오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오래된 자궁>이라는 시의 화자 ‘나’는 자궁에 도착한 정충으로 보인다. 그는 “내가 태어날 바다를 찾아서 왔는데” “정충의 부패한 찌꺼기들로 가득한 바다의 침침한 심연”에서 그는 “내가 왜 태어나려는 것인지” 알 수 없어한다. 이 시에서 탄생의 과정은 팔과 다리와 머리와 몸이 차례로 떨어져나가는 반(反)-탄생으로 묘사되고, 시의 마지막에서 화자는 “흐흐 지겹게 나는, 또, 태어나는, 것이더란, 말이지”(박상륭 투로) 체념하고 만다. <삼국유사> 중 사복(蛇福)을 주인공 삼은 표제작은 시인이 그리는 탄생담이 불교적 윤회전생의 설화임을 알게 해 준다.
“어미이기도 하고 어미가 아니기도 한/아들이기도 하고 아들이 아니기도 한/암소이기도 하고 수소가 아니기도 한/이 질긴 슬픔의 끄나풀을 누가 끊을 것인가”(<뱀소년의 외출>)
독창적이면서도 강렬한 이미지들이 가히 감각의 축제를 벌이다시피 하는 김근씨의 시를, 시집 해설을 쓴 평론가 황현산씨는 ‘고독한 판타지’라 규정한다. 김근씨의 고독한 판타지들은 얼핏 괴기스럽고 충격적인 외피를 둘러쓰지만, 몽정을 노래한 <강, 꿈>과 같은 아름다운 시를 보면 그가 언어와 이미지의 조작에 능한 시인임을 알게 된다.
“산과 들과 세상이 밝음과 어둠의 바깥에, 흐르지 않고/강인데, 누이야, 허옇게 물안개만 피어올라 몽글몽글,/자울거리는 시간하고 노닥노닥, 안개에 싸여 오두마니, 나,/어디 기척이나, 배곯는 밤부엉이 소리나 어디,/그저 한참을 앉아만, 나, 내가 참말 나인지도 모르게 앉아만,”(<강, 꿈>)
최재봉 기자 bong@hani.co.kr">bong@hani.co.kr,
[조선데스크] “이것도 시라고 해주세요” / 박해현 문화부 차장 hhpark@chosun.com">hhpark@chosun.com
‘이봐 이쯔이, 거울 밖의 네 얼굴은 꼭 내 얼굴 같구나/ 우리 서로 첫눈에 반해버렸지만/ 단 한 번의 키스도 나눌 수 없어/ 이제부터 나는 기다란 수염을 달고/ 아무런 화면도 보여주지 않을 거야…’
2000년대 젊은 시인들의 새로운 시경향을 대표하는 황병승 시인의 시 ‘버찌의 계절’ 일부다. 거울의 안과 밖이 대화를 나누는 듯한 초현실주의적 환상이 펼쳐지면서 동성애를 암시하는 듯한 요설이 전개된다. 과연 이것도 시라고 해야 하나?
또 다른 젊은 시인 김근의 시 ‘어제’는 이렇다. ‘엄마 나는 저 눈깔들이 무서워요 무서워할 것 없단다 얘야 지느러미나 혓바닥이 내릴 날 있을 거다 저것들은 엄마가 죽인 아기들의 눈깔인가요? (중략) 얘야 너 같은 건 다 거짓말이란다’.
난해할 뿐만 아니라 구역질날 정도로 엽기적이다. 여기에다가 90년대 후반 이후 젊은 여성 시인들은 입에 담기 민망한 단어들을 거침없이 시에 쓰는 것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환상, 요설, 외설, 엽기로 무장한 이 괴상한 젊은 시인들이 일으킨 돌풍의 핵은 양대 시동인(詩同人)이다. 1999년 결성된 ‘천몽’ 동인과 2002년 등장한 ‘불편’ 동인이다. 특히 ‘천몽’ 동인을 이끄는 시인·평론가 권혁웅이 동세대 시인들을 ‘미래파’라고 명명한 뒤 시단에서 ‘미래파’ 찬반 논쟁이 끊이지 않는다. ‘낯선 피의 침입’이라든가 ‘바퀴벌레 시인들’이란 표현도 사용된다. 그런데 ‘천몽’과 ‘불편’은 동인을 표방하면서도 지금껏 동인지 한 권 내지 않았다. 과연 동인이 맞는가 라고 물으면 “당연하지~”라고 답한다. ‘미래파’ 시인들은 “80년대 선배 시인들은 특정 이념을 중심으로 모였지만, 우리는 각자 개성을 인정하면서 동시대 젊은 시의 다양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의미에서 동인을 만들었다”고 동인의 성격보다 각자의 개인성을 강조했다. 동인지를 내지 않은 까닭에 대해서는 “출판사들이 잘 팔리지 않는 동인지를 선뜻 내주지 않는 현실”이라며 코를 찡긋거리지만 “우리는 주요 계간지가 폐간돼 발표 지면이 없었던 80년대 시인들처럼 발표 매체를 확보하기 위해 동인지를 애써 내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그러고 보니 신문사 문학담당 기자의 책상에 쌓인 문학계간지 봄호만 해도 15종이 넘는다.
기세를 올리는 ‘미래파’ 시인들이지만 기성 시단으로부터 쏟아지는 집중 포화를 피할 수 없다. ‘소통 불가능하고 유희적이고 자폐적인 언어를 쓰는 철없는 시인들, 장광설과 환상과 엽기로 특징짓는 진지하지 않은 일군의 시인들’이란 욕을 먹고 있다.
게다가 ‘미래파’ 시인들은 시의 시대로 불렸던 80년대 선배 시인들과는 달리 시 독자가 상당수 줄어든 시적 공황기를 맞고 있다. 시집 초판 2000부 이상 소화하는 시인이 다섯 손가락을 꼽기 힘들 정도다. 가뜩이나 줄어든 대형 서점의 시집 코너에 가면 유명 중진 시인들이 다른 시인들의 시를 골라서 엮은 시선집들이 독자를 다 앗아가고 있는 판이다. 오죽했으면 시인들이 현실과 문학 제도에 모두 불편하다는 이중적 의미를 담아 ‘불편’이란 동인을 결성했겠는가.
그래도 상당수 ‘미래파’ 시인들은 “우리 시에도 서정이 있고, 운율이 있다”고 우긴다. “원래 시는 독자가 많지 않았다. 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과거와는 다른 독법으로 새로운 시를 읽으려고 노력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감히 훈시한다. 앞 세대가 가지 않은 길을 가려는 ‘미래파’의 미래가 궁금하다.
담벼락 사내 / 김근
오래된 담벼락을 지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사내는 얼핏 찌든 세월의 오줌자국이나 부식된 시간이 만들어놓은 얼룩처럼도 보이지만 항상 그의 눈이 담벼락에 박혀 우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혹시 쫓기던 사람이 담벼락 근처 그늘 속으로 휙 사라져버렸다면 일단 사내를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언젠가 취객 하나가 고궁의 어둠 속을 지나다 그의 그림자가 담벼락에 드리워지는 순간 사내에게 덜미를 잡힌 적이 있다 때마침 불어닥친 비바람에 취객은 고장난 우산처럼 담벼락을 따라 굴러다녔다 사람들은 그것이 날개가 꺾인 커다란 박쥐인 줄 알았다 고 증언했다 몸만 빠져나가 사라진 옷을 발견한 건 다음 날이었다 옷은 아직 온전히 몸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사람들은 모두 입을 다물었다 담벼락 사내가 담벼락 속으로 취객을 끌고 들어갔다는 사실을 아무도 입 밖에 내지 않았지만 사람들은 며칠 동안 몸서리치며 담벼락 근처엔 얼씬도 하지 않았다 어느 밤 으슥한 담벼락에 기대 키스를 하다 문득 사라진 젊은 사내의 행방은 아직도 묘연하다 밀가루 반죽처럼 물렁물렁해진 미처 사라지지 않은 애인의 손 하나를 부여안고 남은 여인은 담벼락 앞에서 오래 울었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는 오래된 담벼락을 지날 때는 조심해야 한다 자신의 그림자가 구겨지지 않도록 아무도 실제로 본 사람은 없지만 오늘도 담벼락엔 껌딱지처럼 달라붙어 사내 하나가 그의 주민을 물색중이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중에서
복도들 1 / 김근
저 사나운 아가리에서부터 신성한 똥구녕으로 이어지고 마는 배아지 속으로, 멀쩡히 그가 나를 끌고 들어온다 이 길고 둥근 통로에는 거칠고 반짝이는 비늘은 없으나 보드라운 살이랑 물컹하게 출렁이는 바닥과 벽, 에 달린 어둡고 축축한 문들 미끌미끌한 손잡이가 몇 개씩 달린 그 많은 문들의 주소 알 수 없고 그 문들 열리기가 안으론지 바깥으론지 또한 가늠할 길 없는데 해설라무네 여기는 그의 배아지 속일거나 내 배아지 속일거나 내 먹이일거나 그가 그의 먹이일거나 내가 아니면 그와 나는 또 누구의 여태도 소화되지 못하고 썩은 내 풀풀 풍기는 살점이나마 듬성듬성만 붙어 있는 뼈다귀일러나, 오뉴월 개 혀바닥만큼이나 축축 늘어지는 말, 이 흘리는 침 한 사발 꿀떡꿀떡 받아 마시기나 하는 그와 내 시간의 바깥 쪽 저 사나운 아가리에서부터, 오긴 했으나 들지도 나지도 못하고 그저 있기만 하는 여기를, 신성한 똥구녕 밖까지 쉭쉭거리며 바람 한 줄기 지나, 간다 그가 나를 끌고 더 깊은 배아지 속으로 들어, 간다 바람에서 무슨 평생 수절한 홀애비 냄새라도 번져 나나 내 얇은 손 꺾어 잡고 그가 미끄덩거리는 문의 손잡일 돌리자 홱, 그의 얼굴이 바뀐다 온전히 그도 아니고 그 아닌 것도 아닌 그의 얼굴 다시 희미해지고 오살헐 문들 문들의 손잡이들 너무 많다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없었던 것인지 모른다, 아예는, 온전히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닌 채 쉼 없이 꿈틀거리만 하는 여기 이 혼곤한 배아지 속, 행방마저 그만 묘연해져버린 나는,
계간 『문학동네』2006년 봄호 발표
뱀소년*의 외출 / 김근
1
누가 어미의 장사를 지내줄 것인가 누가
어미의 육체를 장엄하게 썩게 할 것인가
내 갈라진 혀는 여태도 길고 사나우니
내 날카로운 독니로 찢고 발긴
어미의 살점은 또 어느 허공에 뿌려질 것인가
어머이기도 하고 어미가 아니기도 한
아들이기도 하고 아들이 아니기도 한
암소이기도 하고 수소가 아니기도 한
이 질긴 슬픔의 끄나풀을 누가 끊을 것인가
2
무릎이 까진 채 버려진 나무 아래
오누이가 울고 있다 울면 안 돼
울면서 오라비는 우는 누이의 뺨을 때린다
돌아오지 않아 아무도 영원히
오누이의 눈물방울들이 무거운 공기 안에 멈춘다
쉭쉭거리며 나는 혓바닥을 내밀어 눈물을 맛본다
암염처럼 딱딱한 눈물방울들
사라지는 것은 하나도 아프지 않은 거란다
내 몸의 모든 비늘이 가늘게 떨린다
비늘이 고요해지자 나는 오누이를 긴 몸통으로 휘감는다
몸통 안에서 오누이가 으스러진다 으스러져 한데 엉긴다
사라지는 것은 그저 비늘처럼 적막해지는 일일 뿐
무릎이 까진 채 버려진 나무처럼
나는 우는 법을 모른다
긴 몸을 풀었으나 오누이가 보이지 않는다
3
태를 묻지 못했으니 고향도 없다
몇 차례 허물을 벗었는지는 잊었다
허물을 벗어도 허물 안의 기억은
허물 바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것이 허물 안의 기억인지
어느 것이 허물 바깥의 기억인지
알 수 없다 나는 안인가 바깥인가
몇 차례 허물을 태우면서
한때 번들거렸으나 이제 푸석해진
한 生이 지글지글 타는 냄새를 맡으면서
나는 삶인가 죽음인가
이승인가 저승인가
돌 하나 붙박인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거기가 돌의 고향인지는 묻지 않았다
4
주름 자글자글한 소녀를 만난 적 있지
어제가 오늘과 살짝 옷을 바꿔입는 구멍 앞에서
그 늙은 소녀가 자꾸 풀을 꺾는 것을 지켜보았어
나는 풀들의 꺾인 뼈를 맞추며
늙은 소녀와 내가 아기를 낳으면
뱀이기도 하고 소년이기도 한
할미이기도 하고 소녀이기도 한
아기가 태어날지 궁금했다구
저녁이 한번 부르르 진저리를 쳐
긴 몸통에서 새빨간 성기를 꺼내 나는 오줌을 갈기지
길이 풀어지고 풀어진 길을 거슬러 늙은 소녀가
훠이훠이 구부러진 허리로 걸어와
이 길은 주름이 너무 많아 네 성기처럼
나 늙은 소녀의 늘어진 살가죽을 벗겨내
벗겨도 벗겨도 늙은 소녀는 늙은 소녀야
5
몸을 벗고 말을 벗고 어미가 누워 있네
나는 어미를 모르네
모든 사라지는 것들은 다 어미네
뻣시디뻣신 띠풀을 뽑아내
어미를 지고 나는 거기로 미끄러져들어가네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네 몇천 년 미끄러지네
누군가 구멍으로 거기를 들여다보네
말이 아니라 비로소 그가
내 몸에 새겨진 무늬를 읽어나가네
뱀소년*: 「사복불신」(「삼국유사」의해편 사복(蛇福)은 사복(蛇伏), 사파(蛇巴) 혹은 사동(蛇童)으로 불리나 모두 '뱀아이'다. 그가 뱀의 형상을 하고 있었는지는 「삼국유사」에서 전해지지 않는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문학동네, 2005) 중에서
공중전화부스 살인사건 / 김근
때마침 공중전화부스가 뚜벅뚜벅 걸어왔다 후두둑 지상의 중력과 내통한 첫 빗방울들이 두꺼운 구름장에서 손쉽게 끌어내려진다 사내는 중력에 지친 발을 잠시 쉰다 너무 멀리까지 사내는 흘러왔다 첫 침투에 성공한 빗방울들은 재빨리 거리에 스며든다 물보라 일으키며 보도블록에 새겨진 사람들의 발소리가 순식간에 녹슨다 눅눅한 예감으로 부스 안은 흐려지고 유리문 바깥으로 흐물흐물해지는 상점 간판들 무거운 짐처럼 가까스로 수화기가 사내의 귀에 매달린다 너를 죽이러 왔다 의뢰인을 밝히진 않겠다 그건 그의 프라이버시니까 너는 가장 사소하게 죽을 수고 있다 갑각류처럼 껍질이 손상되지도 않은 채 여기에서 저기로 건너가는 것이다 가볍게
비는 거리를 점령한다 후둑후둑 비의 침공은 점점 격렬해지고 보이지 않는다 저마다 커다란 우산을 펴들고 나무들처럼 빽빽하게 거리를 메우던 사람들 빗방울의 필사적인 저항을 받으며 자동차는 도로를 질주한다 자동차의 속도는 그러나 비의 흡착력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비에게 엔진을 매수당한 채 자동차는 결국 멈춰서고 말 것이다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거리에서 죽을 수 있는 행운은 아무나 차지하는 게 아니지 네 운명 따윈 이야기하지 마라 네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이곳을 가득 채운 곰팡이 같은 예감일 뿐 그건 이미 네 몫이
아니다 너무 멀리까지 사내는 흘러왔다 부스가 집의 습격을 견뎌낼지 사내는 의심스럽다 비의 침투경로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가늠할 수 없는 바깥 비가 유리벽을 뚫고 들어오리란 것은 상상하지 못한 일이다 몸서리치며 사내는 외투에 달라붙는 빗방울들을 털어낸다 털어내도 거머리처럼 또다시 흡반을 들이대는 빗방울 사내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신다 뻣뻣해진 손이 그만 수화기를 놓치자 사내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린다 사내의 무릎 근처에서 대롱대롱 중력에 지친 수화기가 흔들린다 조준되지 않는 사내의 손은 미친 듯이 비치용 전화번호부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나는 너를 죽이러 왔다 의뢰인을 밝히진 않겠다 그, 건 그의 프, 라이버시다……
시집 <뱀소년의 외출>2005년 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