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하 시인
1963년 전북 고창군 상하면 하나대 마을에서 출생하여 세종대 영문과와 동국대 대학원 영화과를 졸업했다. 1988년 『문예중앙』신인문학상 공모에 당선하면서 시단에 데뷔하였으며, 1989년 첫 시집 『무림일기』출간, 1990년 「시인 구보씨의 하루」를 비롯한 16㎜ 단편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1991년 영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의 시나리오를 쓰고 직접 감독, 1993년 세번째 시집 『세상의 모든 저녁』출간, 1994년 대학원 졸업. 논문은 할리우드 SF영화를 분석한「포스트모더니즘 영화 연구」였다. 1995년 네번째 시집 『세운상가 키드의 사랑』과 산문집 『이소룡 세대에 바친다』출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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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여치의 불편한 관계 / 유하
참빗 하나의 시 / 유하
거미, 혹은 언어의 감옥 / 유 하
겨우 존재하는 것들 / 유하
흐르는 강물처럼 / 유하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같이 / 유하
나와 여치의 불편한 관계 / 유하
비척비척 술기운의 발걸음을 멈춘
주택가 공터, 임시로
한 살림 차린 호박덩굴 속에서
쯧쯧쯧쯧
침 튀기듯 달빛 튀기며
쯧쯧쯧쯧
여치란 놈이 열심히
혀를 차고 있다
나의 오줌 줄기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뭐가 그리 개탄스럽다고
쯧쯧쯧쯧
혀를 차는 여치
한 도시 가운데서, 진저리치며
난 여치와
농경문화적으로 만났다
잠깐!
이곳에 방뇨하는 자는
그것을 잘라버리겠다 주인백
쯧쯧쯧쯧
참빗 하나의 시 / 유하
지금 식으로 따진다면
자신이 내놓은 물건 값보다
더 신세를 지고 가던 사람이 있었다
검정 고무신 찰박찰박 장마 끝물로 와서
거시기 모다 있어라우, 찰 옥수수 같은 잇속 드러내며 웃던
담바우 방물장사 아짐
대나무 참빗 하나 달랑 풀어 놓고는
골방 아랫목 드르렁 고랑내 냄새 풀어놓으며
새비젓 무시너물 쩍국에 척척 식은 밥 한 술 말아먹고
보리쌀 반 되 챙겨서 싸묵싸묵 새벽길 떠나가던
염치도 바우 같은 담바우 방물장사 아짐
그것만이면 진짜 양반이게
담바우 아짐 자고간 날 이후론 온 식구 머릿속엔
영락없이 이가 바글바글 들끓었다
그 예펜네 욕 직싸하니 퍼대다가
그 빗살 촘촘한 참빗으로 득득 빗어내리면 와따
후두둑 후두둑 민경 위로 새까맣게
떨어져 내리던 가랑이 서카래떼
장마 걷힌 하늘처럼 맑아오던 머릿속
그날은 온 식구 한데 모여 그놈의 서카래 손톱으로 똑똑
장단 맞춰 터뜨려가며 곤시랑댔다
허허참, 그래도 담바우 아짐 참빗이
참말로 짱짱한 참빗이랑게
거미, 혹은 언어의 감옥 / 유 하
난 외로움의 힘으로 집을 짓는다 몸의 내부 깊은 곳
음습한 욕망을 나는 은빛 유혹으로 바꿀 줄 안다
꽁무니에서 나오는 가녀린 실의 끈적거림
나는 그만큼 삶에 집착한다 그러니까
내 집은 내 욕망의 무늬이자 미로인 셈이다
내가 풀어 놓은 무늬에 때론 내가 헤매기도 하기에,
오늘은 하루종일 하루종일 하루살이를 기다렸다 세상의 온갖 방황도
내 집에 갇힌 이상, 내 좋은 대리 경험의 양분일 뿐이다
먹이는 고스란히 내 집의 실기둥으로 뽑혀져 나온다
먹이들의 살과 뼈를 원료로 이루어진 집,
나는 안다 자기 몸이 결국 자기 덫이었음을
적어도 나는 그 죽음의 덫을 내 식으로 육화시킬 줄 아는
교활함을 지녔다..... 저주받았으므로, 난 즐겁다
자, 내 분신 같은 새끼들아, 날 남김없이 먹어 해치워 다오
난 내 욕망의 무늬를 끝없이 확대 재생산하고 싶다
그리하여 모든 너 안에 내가 살고 싶다
겨우 존재하는 것들 / 유하
여기 겨우 존재하는 것들이 있다 쑥국 먹고 체해 죽은 귀신 울음의 쑥국새, 농약을 이기며 물 위를 걸어가는 소금쟁이, 주인을 들에 방목하고 저 홀로 늙어나는 흑염소, 사향 냄새로 들풀을 물들이며 날아오는 사향제비나비, 빈 돼지우리 옆에 피어난 달개비꽃, 삶의 얇은 물결 위에 아슬아슬 떠 있는 것들, 그들이 그렇게 겨우 존재할 때까지, 난 뭘 했을까 바람이 멎을 때 감기는 눈과 비 맞은 사철나무의 중얼거림, 수염 난 옥수수의 너털웃음을 그들은 만졌을지 모른다 겨우 존재하기 위한 안간힘으로, 달개비꽃 진저리치며 달빛을 털 때 열리는 티끌 우주의 문, 그 입구는 너무도 투명하여 난 겨우 바라만 볼 뿐이다 아, 겨우 존재하는 슬픔, 보이지 않는 그 목숨들의 건반을 딩동딩동 두드릴 수만 있다면! 난 그들을 경배한다
흐르는 강물처럼 / 유하
그대와 나 오랫동안 늦은 밤의 목소리로
혼자 있음에 대해 이야기해왔네
홀로 걸어가는 길의 쓸쓸한 행복과
충분히 깊어지는 나무 그늘의 향기,
그대가 바라보던 저녁 강물처럼
추억과 사색이 한몸을 이루며 흘러가는 풍경들을
서로에게 들려주곤 했었네
그러나 이제 그만 그 이야기들은 기억 저편으로
떠나보내야 할 시간이 온 것 같네
어느날인가 그대가 한 사람과의 만남을
비로소 둘이 걷는 길의 잔잔한 떨림을
그 처음을 내게 말해주었을 때 나는 다른 기쁨을 가졌지
혼자서 흐르던 그대 마음의 강물이
또 다른 한줄기의 강물을 만나
더욱 깊은 심연을 이루리라 생각했기에,
지금 그대 곁에 선 한 사람이 봄날처럼 아름다운 건
그대가 혼자 서 있는 나무의 깊이를 알기 때문이라네
그래, 나무는 나무를 바라보는 힘만으로
생명의 산소를 만들고 서로의 잎새를 키운다네
친구여, 그대가 혼자 걸었던 날의 흐르는 강물을
부디 잊지 말길 바라네
서로를 주장하지도 다투지도 않으면서, 마침내
수많은 낯선 만남들이 한몸으로 녹아드는 강물처럼
그대도 그대와 그대가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
하나로 스며드는 곳에서 삶의 심연을 얻을 거라 믿고 있네
그렇게 한 인생의 바다에 당도하리라
나는 믿고 있네
끝없이 부서지는 파도같이 / 유하
수천의 파도가
몰려와 부서집니다
수만의 파도가 한꺼번에
산산이부서집니다
부서진 파도들 비로소
편안한 어깨로 되돌아갑니다
그러나 어이할 수 없어라
그렇듯 뒷모습으로 돌아간 파도를
또다시 부서지려 몰려 옵니다
한번 부서져본 사랑
대단한 권세인 줄 알았습니다
그대여
내 사랑 더도말고
저 파도 같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