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대학생들의 마당

나의 괴팅겐대학 학창시절 (1) 이희우

작성자世岩 최삼송|작성시간02.02.11|조회수277 목록 댓글 0


나의 괴팅겐대학 학창시절(1)
- "프리쵸프-난센-하우스"-기숙사에서 살 때 -

extra Gottingam non est vita, si est vita, non est ita.
(Out of Goettingen there is no life. If there's a life, that is not the same one)
옛 괴팅겐대학 학생들이 맥주를 마시며 즐겨 외치던 名句의 하나다.

괴팅겐대학교는 25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독일의 오래된 대학중의 하나다. 영국의 國王을 겸하고있던 하노바(Hannover)의 왕 Georg 2세가 이 대학을 세웠다. 이와 해를 비슷하게 괴팅겐에는 대학도서관이 건립되었는데 이 도서관은 처음부터 하나의 학문적(Academic Library)인 도서관으로 도안되어 18세기 유-럽에서는 선구적인 역할을 한 혁신적인 도서관이었다.

괴팅겐은 대학도시다. 총인구의 1/4이 대학생들이다. 그래서 학기방학이 되면 시내가 빈다. 그러니 대학과 대학생들은 괴팅겐의 경제를 좌우할말 큼 이 도시는 학생수의 증감에 예민하게 반응한다. 괴팅겐 시 자체는 볼 것이 별로 없다. 시의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지르는 베엔데슈트라쎄(Weende Strasse)를 빼어 놓고는 모든 거리가 다 뒷골목이다.
시중심지에서 한 1km 만 나가더라도 농촌과 깊은 숲이 나온다. 이 대학에서 공부했던 독일의 저명한 유태계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Heinrich Heine)의 하르츠여행기(Harzreise)에 하이네가 자기가 공부했던 Alma Ata 괴팅겐을 비꼬아서 "괴팅겐은 등을 지고 바라보면 더 아름답다" 라고 한 말이 있다.

독일 "민화의 길"(Maerchenstrasse)이 괴팅겐을 지나서 간다. 그래서 여름에는 일본사람들이 괴팅겐을 많이 찾는다. 독일의 민화(Maerchen)를 처음으로 총 수집하고 독일어문법에까지 큰 공헌을 한 그림(Grimm) 형제가 이곳 대학에서 교수 겸 도서관원으로 일했다. 몇십년을 계획하고 출발한 그림의 "독일어사전"은 그 편집부가 이 괴팅겐대학에 있다. 2차 세계대전 전까지 만 해도 44명의 노벨상 수상자가 이 대학을 거쳐 갔다. 그만큼 이 대학의 자연과학과는 세계적으로 이름났던 대학이었다.

"鐵과血"(Eisen und Blut)의 수상으로 유명했던 독일의 Bismarck도 이 대학에서 공부했다. 옛괴팅겐을 둘러싸고 있는 土城위에는 비스마르크가 학생시절에 살았다는 조그만 집이 있는데 이는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집이기도 하다.
城에 붙어는 있지만 성 밖에 집문을 지어 놓은 이 "비스마르크집"에는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다. 비스마르크가 학생으로 공부하던 그 시절에는 "멘주어" (칼로 결투하는 것)가 이미 금지되어 있었는데 비스마르크가 이것을 지키지 않아 罰로 괴팅겐시에서 추방을 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집을 괴팅겐의 성에 붙여서 지었지만 집문은 성밖이라 괴팅겐의 밖에서 살았다는 일담이다. . .

괴팅겐 대학에서 오늘날 공부하는 대학생들 가운데 프리쵸프-난센-하우스
(Fridtjof-Nansen-Haus)라는 옛 寄宿舍를 아는 학생이 얼마나 될지 모르겠다. 비록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이 프리쵸프-난센-하우스는 이미 과거의 일로 다만 괴팅겐대학사의 한 페이지를 채우고 있을 뿐이다. 특히 지나간 40년의 괴팅겐 대학교 학생 생활사를 들추어볼 때 이 프리쵸프-난센-하우스를 빼어 놓고는 얘기 할 수가 없다. 속담에 "호랑이가 죽으면 가죽을 남겨놓고 사람이 죽으면 이름을 남겨놓는다"고 하는 말이 있다. 이 옛 기숙사의 정문에 "Fridtjof Nansen Haus" 라는 이름만이 현재까지 남아 있을 뿐이지 이 집을 아는 사람들을 빼어 놓고는 전일의 유명했던 이 학생기숙사가 괴팅겐의 학생들에게는 완전히 잊어 버려진 집이 되어 버렸다.

이 난센-하우스는 여러모로 보아서 특이했다. 그래서 이와 유사한 기숙사를 독일에서 다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내가 독일에서 보낸 나의 학창생활을 회고해 볼 때에 독일에 와서 처음 프랑크프르트에서나 다음 괴팅겐에서 그래도 여러 기숙사에서 살아 본 경험이 있지만 이 난센-하우스에서 살며 받은 경험은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것들이 많았다고 하겠다. 이 난센-하우스라고 불렸던 기숙사는 개인기숙사였다. 그래서 더 재미가 있었든 집이었는지도 모른다. 다른 기숙사들과 비교해 본다면 이 기숙사의 특이한 점으로는 舍監 "父母"를 가진 異色 多人種의 커다란 家庭이었다는 것과 또 成人들을 모아다 놓은 커다란 幼稚園이었었다는 데에도 있겠다.

내 개인적으로만 보더라도 이 난센-하우스와 나와는 또한 특별한 관계가 있었다. 내가 이 난센-하우스로부터 받은 많은 혜택이라던가 또는 이 집에서 살던 학생들과의 개인적 교유관계는 그 후에 오는 나의 독일생활에 절대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겠다. 내가 독일에서 영주하게 된 동기도 이 기숙사에서 살 때부터 싹터 나왔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아직도 틈틈이 옛날을 회고할 때마다 또 이 기숙사가 있던 곳을 지나 갈 때마다 나는 이 난센-하우스에서 살던 때를 즐거이 되돌아보고 또 가끔 쎈티멘탈 할 정도로 옛 追憶에 빠져보곤 한다. 이것은 결코 "...아, 어느새 40년이란 시간이 벌써 지나갔구나!.."하는 애석한 마음에서만 오는 것이 아니다. 그때 내가 겪었던 체험을 즐겁게 다시 음미해 보며 그 당시의 일들이 좋았었던 나빴었던 간에 모든 것을 하나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겨보려고 노력하는 것에도 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나에게 있는 친한 독일친구들이라던가 또 두 셋의 외국친구들은 내가 이 기숙사에서 사귀었던 옛친구들이다. 마치 한국에서 초등학교나 중학교에서 같이 자라던 "반말"쓰는 학교 동창생과 같은 친구들이다.
이 옛 벗들 중에는 대학교수도 있고, 고등학교 선생도 있고, 정치가도 있고, 또 방송국 기자도 있으며 심지어는 괴팅겐 어느 식당에서 "뽀이"로 일하고 있는 놈도 있다. 지금도 기회만 나면 서로 찾아가고 찾아오고 하여서 만나기만 하면 반듯이 옛날 "난센-하우스" 얘기를 하기 마련이다. 이만큼 그때의 난센하우스는 우리에게 아직도 영향을 주고 있다고 하겠다.
난센-하우스는 이제 학생기숙사로 존재하지 않지만 이 기숙사에서 살던 "알트난세아트"(옛 난센하우스 학생들)들은 이 기숙사가 지니고있던 "난센"정신을 아직도 계속 이어가고 있다고 하겠다.

난센-하우스는 기숙사 건물 자체가 또한 다른 기숙사 건물들과는 달랐다.
塔이 있는 기숙사 本舍가 바로 이 집을 세운 옛 괴팅겐의 부유했던 면포공장 주인의 본채였고 본채 앞 길 건너편에 있는 조그마한 집은 주인집의 馬夫가 살던 집이었고 본채옆 왼쪽 숲 속에 자리잡고 있는 조그마한 집은 주인집의 하우스마이스터 (Housemaster)가 살던 집이었다. 모두 다 19세기말의 건축식으로 지은 아름다운 집들이다.

1950年대에 들어와 이 기숙사가 창립될 때에는 이 세 채의 집들은 이미 소유자가 바뀌어진 뒤였고 이 집들 중에 다만 본채만이 기숙사로 이용하게 되었다. 학생수가 증가함에 따라 집이 좁아지자 4층의 신축건물을 본채 오른쪽 편을 이어 (현재 정문이 있는 곳) 집 뒤 정원 쪽으로 세웠는데 이 신축건물에는 지하층과 아래층에는 남학생들이 살았고 2층, 3층, 4층에는 여학생들이 살았다. 이 아래층의 끝 모퉁이에 舍監家族들이 살았다. 塔이 있는 본채에는 남학생들만 살았고 탑 속에는 조용한 학생들만 살게 했다.
거의 100년이 되어 가는 이러한 건축식의 집들이 괴팅겐에서 아직도 이곳 저곳 눈에 뜨이지만 학생기숙사로서 사용된 이 집이야말로 여러나라 학생들이 모여서 마치 한 가족같이 살기에는 安城맞춤의 집이었기도 하였다.

난센-하우스가 위치한 자연적인 주위 분위기를 말해 본다면 이것 역시 괴팅겐 市內에 있어서도 또한 특별한 곳이다. 괴팅겐의 東山 하인베르크(Hainberg)에서 산책하다가 메르켈-슈타인(Merkel-Stone)이 있는 곳으로 내려오면 눈앞에 실러비이제(Schillerwiese)-공원이 퍼져 나온다. 이 메르켈(Merkel)이란 사람은 100여년전 괴팅겐 市長으로 한때 이 하인베르크에 적극적인 식목을 하여 현재에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울창한 숲을 만든 것이다.
이 공원을 둘러싼 주위의 지역이 서울로 말한다면 "압구정동", 괴팅겐의 부유지대 東區지역이다.

기숙사 앞에 놓여 있는 공원 실러비이제를 빼어놓고는 또다시 난센-하우스 얘기를 할 수가 없다. 그렇게끔 이 실러비이제는 난센-하우스와 특히 난센-하우스에서 살던 스칸디나비아에서 온 학생들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고 있다. 난센-하우스 학생들 중에 술꾼들로 유명하던 학생들이 바로 노르웨이에서 온 의학학도들 이었다. 이 학생들은 여름이 오면 거의 매일저녁을 이 실러비이제에서 술을 마시며 밤새움했다. 술주정을 하면서 밤늦게 기숙사에 돌아와 집 앞에서 소란을 치고 나면 다음날 점심식사 시간에 사감으로부터 야단의 말이 나오기 마련이었다. 그러면 아직도 술이 깨이지 않아 풀죽은 고양이 얼굴들을 하고 있던 이 학생들이 저녁이 오면 다시 자기네들의 밤 세계인 실러비이제로 몰려 나가곤 했다.

하인베르크 와 실러비이제는 괴팅겐에 있는 산책길로도 유명하다. 하인베르크山에서 내려와 실러비이제를 걸어서 서쪽으로 향해 아래로 내려가면 메르켈슈트라쎄(Merkelstrasse)가 나오는데 바로 이 길에 서 있는 높은 塔집이 옛날의 난센-하우스였다. 이 집은 현재 괴-테학원으로 쓰이고 있다.
40년 전에는 이 메르켈슈트라쎄가 매우 조용한 길이었다. 저녁이 되면 자동차 왕래가 거의 없었다. 1960년도 말에 괴팅겐 대학의 신축공사 지대가 북부 괴팅겐에 개척되고 의과대학 대학병원 신축건물이 생긴 후로부터는 이 도로가 괴팅겐의 남북을 잇는 직통 교통도로로 사용되어서 지금은 시끄러운 길이 되었지만 1960년도에는 정말 아주 조용한 길이었다.

...첫 가을날, 높고 푸르러진 하늘을 虛無해지는 가슴에 안고
앞날의 추운 겨울을 재촉하듯 싸늘하게 불어오는 가을바람을
귀 끝으로 맛보며 虛空에서 날려오는 이름 없는 落葉들을
가벼이 밟으면서 침묵히 이 공원을 한번 산책해 보라!
이때 자신의 詩想이 머리에 떠오르지 않는다면
릴케의 가을詩를 암송해도 좋을 것이고 아니면 李孝石의 "落葉을
태우면서"를 回想해도 좋으리라.
이 순간이야말로 누구나 다 한번은 생활철학가가 되리려니...

저녁이나 밤에는 기숙사의 주위가 너무 깜깜하고 한적해서 겁이 날 정도였다. 기숙사 옆 숲 속에서는 냇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오고 마치 시골에 온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던 낭만적인 곳이었다. 한밤중에라도 무서움 없이 혼자 돌아다닐 수 있었던 평화스러웠던 곳, 이 옛 괴팅겐이 아니었던가...

하루의 공부를 끝내고 저녁에 냇물이 졸졸 흐르는 기숙사 옆의 깜깜한 숲길을 정말 손발 더듬어 가다싶이 해서 내려가면 하인홀츠베-크(Hainholzweg)라는 길이 나오는데, 거기에 "탄테-토니"(Aunt Toni)라고 난센-하우스 학생들이 부르던 단골 맥주집이 있었다. 이 맥주집 여주인은 키가 조그마한 검은머리의 중년 여자로 "토니"라고 불리었는데 이 맥주집은 난센-하우스의 여러 학생들에게는 또다시 잊힐 수 없는 "막걸리술집" 이기도 했다. 몇몇 기숙사 학생들은 매일저녁 탄테-토니를 찾는 것을 너무 의무적으로 생각하여서 그 결과로 대학공부까지 포기하게 된 불행한 자들도 있었다.

이 기숙사를 운영하던 사감 O.B. 라던가, 사감의 부인 E.B., 그리고 이들의 유일하던 그래서 행실이 좀 나쁘던 외동딸 C.B. (사감과 사감부인은 학생들이 정식으로 O.B., E.B.라고 이름을 약자로 불렀다), 사감가족의 털보 개 "베뽀"(Beppo)라던가 그리고 사무실에서 일하던 뿔덕 같은 인상을 주던 몸집이 큰 H.라는 노르웨이 독신여자, 이와는 반대로 몸이 쪽 마른 독일여자 타이피스트와 하우스마이스터 F.의 가족들, 부엌에서 일하던 식사를 나누어 주면서 자주 투덜거리든 요리인 Mrs. Z., 몸집이 뚱뚱하고 마음이 선하든 Mrs. K. ...이 모든 기숙사 "운영진"이 또한 다 특이한 사람들이었다. 요리인 Mrs.Z.는 몸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 침대에서 쿵쿵하고 발을 굴르며 일어난다고 해서 옆방에서 살던 여학생들이 아침단잠에서 깨어 불평이 많았다. 이 운영진의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났다. 사감가족 모두들, 노르웨이 독신여자 H., 이중에도 하우스마이스터 부부는 모두 다 암으로 별세했다. 하우스마이스터 F.는 목을 메 자살하고...

더 말할 것도 없이 이 기숙사에서 살던 학생들 역시 모두가 다 특이했다. 대부분의 학생들을 말하자면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부모의 슬하를 처음으로 떠나 다른 도시에 "유학" 온, 아직도 어머니의 젖내가 나는 애들이 많았으니까 이 기숙사의 매일 생활면을 쉽게 짐작하리라 믿는다. 성인이면서도 어린애들이었던 이 학생들이 자기네들 학창생활의 "Sturm und Drang"-(핏발이 오르는 청년시절) 시절을 직접 체험하던 곳이 또한 바로 이 난센-하우스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 기숙사에는 공부하는 학생들이 없었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은 독방을 얻어 조용히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塔속에 있는 독방들은 보통 학생들에게는 거의 얻기 힘든 귀한 방들이었다.

한 집에서 매일 같이 서로 만나고 서로 어울려 생활할 수 있던 관계로 서로 눈이 맞아 사랑하게 되고 사랑이 짙어져 결혼으로... 그래서 내가 살던 네학기 동안만에도 일곱 쌍이 결혼한 예가 있었다. 나의 경우를 들어 본다면 내가 8년 후에 결혼한 내 마누라를 처음 만난 곳도 바로 이 기숙사였다. 그러나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로 이 난센-하우스의 기숙사 규칙은 매우 엄했다. 집 분위기는 "스칸디나비아"식으로 매우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기숙사 규칙이 엄해서 저녁 10時가 넘어 남학생이 여학생층 방에 머물러 있던 것이 발각되면 다음날 무조건 기숙사에서 추방되었다. "꾸짖는 시어머니 보다 눈흘기는 시누이가 더 밉다"고 하듯이 이 학생들 중에도 사감에게 고자질을 해서 자기의 편리를 노리는 놈들도 더러 있었다. 예를 들어 독방을 얻고 싶은 의도에서라든지, 그렇지 않으면 어느 학생의 코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라든지... 여하튼 이 애들은 일종의 난센하우스 정보원들이었다.

한 집에서 젊은 학생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에는 의례 많은 사건들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난센-하우스에는 어린애들이 누구를 애 먹이려고 행사하는 어린애들의 "장난" (Streiche)이 유독하게 많았다. 그래서 지금 까지도 이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웃음이 저절로 나올 때가 많다. 기숙사 옛 친구들이 모이기만 하면 의례 즐겨 말하는 얘기들이 바로 이러한 "장난꾸리"의 옛 얘기들이다.

이 기숙사가 Fridtjof-Nansen-Haus 라는 이름을 갖게 된 이유가 우연한 것은 아니었다. 주지하다 싶이 Fridtjof Nansen은 노르웨이의 유명한 北極 探險家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 유엔의 국제란민고등임명위원(UNHCR)으로 피란민들을 돕고 또 세계 제국가 상호간의 평화를 위해 큰 공헌을 한 사람이었다.

(Walter Bauer: Die langen Reisen. Eine Nansen-Biographie. (긴 여행. 난센 자서전) Munchen
: Kindler 1963. 특히 여행과 모험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한번 꼭 권하고 싶은 책이다).

이 난센-하우스를 창설한 분이 또한 노르웨이 출신 목사 올라프 브렌호브드(O.B.)로 이 기숙사의 첫 사감이자 마지막 사감이었다. 정말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그 당시 학생들간에 떠도는 말에 의하면 O.B.가 제2차대전후 독일에 체류하면서 독일여자와 결혼하여 살았기 때문에 목사로 노르웨이에 다시 돌아가지 못한다는 말이 있었다. 여기 마지막 사감이 되었다는 것에는 좀 설명이 필요하다. 이 "오.베."라는 사감이 학생들에게는 너무 "아우토리테어"(엄격한 어른노릇)해서 학생들로부터 어느 정도 존경은 받았지만 큰 호감을 받은 사람은 아니었다. 이 기숙사가 오로지 이 "오.베."의 힘과 돈 모으는 수단에 의하여 운영되어 왔기 때문에 매학기마다 사감측과 학생들간에는 기숙의 계약을 맺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누가 이 기숙사에서 살 수 있느냐하는 마지막 결정은 이 사감에 의해서 결정되었다.
1968년의 소위 독일학생 반체제운동시기에 (이때의 반체제운동하던 학생들을 독일에서는 지금도 "68er"= "68년 족"이라고 부른다) 학생들이 사감이 요구하는 기숙조건을 모두 다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자 결국 사감측이 계약을 거부하여 실제 모두 다 쫓겨 나오게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서 기숙사는 학생 부족으로 문이 닫히게 되고 O.B.는 마지막 사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난센-하우스는 O.B.가 만들었고 또 O.B. 자신이 거두어 드린 기부금과 학생들의 기숙비로 운영해 나갔기 때문에 O.B.를 마지막으로 기숙사의 운명을 그친 것이다.

사감 O.B.는 자신이 제2차대전때 KZ (Konzentrationslager "나치들의 강제수용소")에서 고생한 사람이다. 이 기숙사를 통하여 전후의 독일 젊은세대와 세계 각국에서 온 젊은 세대를 한 지붕 아래 같이 모여 살게 하여서 서로 이해하며 서로 사귀어 벗이 되고 이렇게 함으로서 세계 여러나라의 친선우호를 도모해 보겠다고 하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 "난센-하우스의 정신" 이였다. 이 중에서도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1961년에 베를린에 장벽이 생기고 西.東獨의 국경이 세워지던 동서냉전이 첨예하던 때에 O.B.는자기 개인의 외교수단으로 東유-럽의 학생과 학자들을 이 난센-하우스에 초대하여 이곳에서 체류할 수 있도록 만든 것이다. 이러한 예는 그 당시 독일에서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개인적인 노력은 東유-럽 공산 제 국가와의 친선도모에 기여하여 후에 프라하대학의 명예박사까지 받게되었다. 1962년의 한국으로 말한다면 제3공화국의 절대적인 반공시절이 아니었나. 나는 이 난센-하우스를 통해서 처음으로 체코슬로바키아나 폴란드, 쏘련에서 온 학생들과도 만나서 자유로이 얘기할 기회가 있었다.

다음 난센-하우스의 내부생리를 말한다면 약 120명의 학생이 이 기숙사에 살았는데 이 중에 여학생이 약 50명이었다. 이 120명의 학생 중 독일학생들이 거의 70명이었고, 나머지가 약 20여국에서 온 50여명의 외국학생들이었다. 한방에 두명씩 독일학생과 외국학생을 섞어서 살게 했고, 하루 세끼가 이 기숙사 식당에서 나왔다. 그래서 이 기숙사는 120명의 학생공동생활처였다.
한 마디로 말해서 머리 큰애들이 사는 "幼稚園"이기도 했다. 첫 학기의 외국학생들은 의무적으로 독일학생과 한 방에서 같이 살도록 되어 있었다. 사감이 노르웨이 출신이라고 해서 외국학생들 중에는 노르웨이 학생들이 수적으로 많았다.

기숙사에서 사는 동안 학생들이 꼭 지켜야 했던 의무중의 하나가 매일 낮 한시 정각에 점심식사에 참가하는 것이었다. 달마다 내는 기숙사비에 이미 식사비가 포함되어 있어서 밖에서 식사한다는 것은 그 당시 학생들에게는 경제적으로 이중의 부담이었다. 그리고 또 그 당시에는 대학멘자(대학학생식당)라고는 다만 지금 시내 대학강당 앞에 있는 알테멘자(옛 대학학생식당)밖에 없었다. 이 점심식사 참가는 그래서 모든 기숙사 학생들에게는 거의 의무적이었고 또 하루에 한번씩 기숙사학생 모두가 사감네들과 모일 수 있던 유일한 시간이기도 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에 사감은 매번 짧게 "Guten Appetit!"라고 한 뒤 이어 사감이 매일 즐겨 들려주던 농담이 아니면 엄숙한 얼굴로 입에서 내어 뱉다싶이 하던 야단치는 말이었다. 하기야 120의 큰머리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 이것저것 야단칠 일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이 점심시간이 하필이면 학생들에게는 하루에 한번씩 야단맞는 곳이기도 했다. 특히 일요일의 점심시간은 점심시간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식사하는 곳은 120여명이 앉을 수 있는 지하층에 있는 식사실이었다. 식사실은 매우 큰방이었고, 부엌에서 나오는 방문 앞에 놓인 긴 식탁 머리 쪽에 사감이 자리를 차지하고 사감의 왼쪽에 사감의 부인이, 오른쪽에 딸이 자리 잡아 앉았었다. 이들과 자리를 같이하던 학생들은 하우스-아우스슈스 (기숙사학생위원)에 속하는 학생들이던가 그렇지 않으면 소위 "고자질"하는 아첨꾼 애들이었다. 이 아첨꾼 애들의 하던 일 중의 하나가 털보개 "베뽀"를 매일 실러비이제로 끌고 나가는 일이었다. 이러한 정식으로 정해진 자리를 빼어 놓고는 모든 자리가 다 자유선택의 자리였다.

내가 즐겨 앉던 단골자리는 사감이 자리잡던 식탁의 끝 쪽 맞은 편이었다.
한집에서 마치 가족과 같이 살아서 날이 가면 어느 때인가 서로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그룹을 지어서 같이 앉게된다. 그래서 무슨 약속이 없어도 아침, 점심, 저녁식사 때에는 하루에 한번씩은 이 그룹이 같은 자리에 앉게되었다.

기숙생들이 지켜야 했던 의무중에 또 하나가 부엌근무였다. 5-6명으로 구성 된 이 당번들은 식탁준비에서부터 식기, 식사 나르기, 식사후 그릇 씻기와 그릇챙기기였다. 힘든 일은 아니었지만, 저녁 부엌근무와 일요일 점심때 근무들은 다들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프랑크푸르트(Frankfurt)대학에서 괴팅겐대학으로 옮겨온 것이 그러니까 1962년 겨울학기였고 난세하우스에 들어 온 날은 10월31일이었다.

1960년대 독일대학 학기제도가 지금과는 좀 달라서 겨울학기는 11월1일에 시작해서 2월15일에 끝나고 여름학기는 5월1일에 시작해서 7월15일에 끝났다. 그래도 교수가 정식으로 강의를 시작하기까지는 2주일을 더 지내야 했다.
독일대학의 강의는 정각 "s.t."(sine tempore) 과 "c.t." 15분 후(cum tempore)로 시작한다. 유명한 교수일수록 강의가 보통 "c.t." 로 시작하는데 교수가 약 5-10분 늦게 들어오기가 일수라서 진짜 강의는 그러니까 반시간밖에 걸리지 않는다. 이 "c.t." 는 "akademisches Viertel" (학문적인 15분)라고 해서 특히 외국학생들은 처음부터 이러한 독일의 대학전통을 알아야 한다.
놀 수 있는 방학이 반년이고 공부하는 학기가 반년이어서 공부하는 학생에게나 노는 학생에게나 그 주어진 기회는 다 반반이었다. 그 당시 이 세상에서 공부를 안하고 제일 놀기 좋던 대학제도가 그러니까 독일대학이 아니었겠나. 거기에다 특히 문학부의 학생들에게는 고등학교교사로 국가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 외에는 박사시험이 최종의 학부시험이었다. 지금과는 크게 달라서 마이스터(Master)같은 제도가 없어서 20-30학기씩 공부하는 학생들이 적은 수가 아니었다. 박사과정을 끝내지 못한 학생들은 소위 "Bummelstudent"(느리광이 학생)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10-15년 공부를 했더라도 박사과정시험을 끝내지 못한 학생들은 일단 직업생활에 들어갈 때에는 고등학교 졸업생 자격으로만 취급되어서 월급과 대우에도 막대한 차이가 있었다. 이것이 독일의 전통적인 옛 티가 나는 학생위주의 대학제도였다. 독일에는 대학이 모두 다 국립대학이지만 1960년대에 공부하던 학생들은 학기마다 학비를 240마르크씩을 내었다. 환산해서 당시 1딸라가 4마르크50이었고 난센하우스 기숙사비가 한 달에 120마르크였다. 1970년도 초에 들어와서 사회민주당이 정권을 잡게 되면서부터 노동자들의 아이들에게도 널리 대학에 가서 공부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기 위한다는 표어아래 학비제도를 폐지한 것이 오늘까지 계속되고 있다.

내가 난센-하우스에 입사한데는 대학의 외국학생처장으로 있던 Mrs. K.의 추천과 난센-하우스의 사감 브렌호브드의 호의가 컸었다. 1962년 여름에 하숙방을 찾느라고 괴팅겐에 잠깐 들렸을 때 길에서 우연히 Mrs. K.를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서 이 기숙사를 찾게 되었던 것이다. 낯선 도시에서 복덕방도 없이 방을 구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 강당앞 길을 걷는데 어느 중년의 독일여자가 말을 걸었다. 내가 여기에 처음이냐고. 그래서 내가 하숙방을 구하러 프랑크푸르트에서 일부러 왔는데 낯설다고 했더니 "난센하우스"에서 사감이 외국학생을 찾는다고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사감을 찾아 기숙사에 들어오게 된 것이다.

나의 기억에 단편적이나마 그래도 아직까지 인상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 이 10월 31일은 싸늘한 바람이 부는 맑고 푸른 하늘의 가을날이었다. 늦은 오후 난센-하우스 건너편 실러비이제는 단풍든 나무들로 마치 가을에 한국에 온 것과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했다. 다만 잎사귀 없는 감나무에 붉은 紅枾들이 달려있는 한국의 가을 경치가 아니었다 뿐이지 캐나다 사람들이 부르는 "Indian Summer" 의 날씨였다. 붉고 노란 낙엽들이 공중으로 휘날리고 수북하게 땅에 쌓인 낙엽들을 밟아가며 실러비이제를 걸어보았다. 낯선 새로운 곳이라 마음구석 어느 한 모퉁이가 외로워서 그러했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나에게는 매우 인상 깊은 산보였다.

내가 독일에 첫 발을 디딘 곳은 서독의 중부에 있는 독일의 재정도시 프랑크푸르트(Frankfurt)였다. 프랑크푸르트는 내가 2년 넘어 정들어서 살던 곳이었고 그래서 나에게는 두번째의 고향이 되는 곳이었다. 그동안 사귀었던 적지 않은 친구들과도 이별하고 이곳 괴팅겐으로 떠나 왔다는 것이 나로서는 그렇게 마음 쉬운 것이 아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