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재봉틀과 박쥐우산이 해부대 위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듯_최 욱의 스튜디오 스몰
내가 오래 전부터 살고 싶어서 문턱이 닳도록 찾아 다닌 동네는 경복궁을 사이에 두고 빙 돌면서 있는 옛날 이름을 가진 동네들이었다. 그 동네들은 통의동, 효자동, 창성, 사간동, 화동 등등 길 하나 건널 때마다 동네이름이 변하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가고 싶었던 동네가 경복궁의 서쪽 궁정동과 경복궁의 동쪽 팔판동이었다.
궁정동은 집이라곤 열 댓 가구밖에 없어 아주 작은 동네이면서 백악산과 인왕산을 동시에 바라볼 수 있고, 사진작가 임응식 선생의 사진으로만 볼 수 있었던 그러나 청와대의 옆구리에 있어서 들어갈 수 없던 '신비의 성' 칠궁과 그 앞에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사이의 묘한 기운을 모두 가질 수 있는 이점이 있었고, 여덟 명의 판서가 나와서 그런 이름이 붙었고 옛날엔 고래등 같은 기와집만 즐비한 동네였다는 팔판동은 동네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은데 작은 집들이 복작복작 모여있고 실핏줄 같은 골목길들이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고 있으며 특히 그곳에 있는 몇몇 집이 아주 맘에 들어서 몇 번이고 거래를 시도했었다.
그러나 결혼하는 것과 집 사는 것은 양상이 똑같다는 경복부동산 아주머니의 말씀대로 너무 저자세로 무릎 꿇고 들어가니 상대편에서 매력을 못 느꼈었는지 번번이 퇴짜를 놓아서 결국 '닭 대신 꿩'으로 그 아래 동네 통의동으로 들어가 한 동안 살았다.
그러나 미련을 못 버리고 통의동에 사는 동안도 언제나 경복궁을 빙 돌면서 그 동네들을 기웃거리곤 했는데 기회가 닿지 않았다. 예전부터 점 찍어둔 집 하나는 경복궁 담과 마주보고 길에 바짝 붙어 있는 삼층 집인데 눈길 준 지만 칠팔 년이라 낡았던 집이 수리가 되고 다시 낡아가는 과정을 보는 사이 몇 번인가 주인이 바뀌었음을 짐작할 따름이다.
광화문 교보문고 앞에서 지하철을 내려 삼청동으로 가는 마을 버스를 타고 총리공관 앞에서 내렸다. 새삼 감회에 젖어 골목으로 들어서는데 그 동안 팔판동도 많이 변했다. 삼청동, 사간동, 가회동 큰 길 주변에서부터 생기기 시작하는 '먹자 집'들이 골목으로 파고들고.... 그렇게 시작되는 동네의 변화가 이곳까지 번지고 있었다.
아무 때건 동네 아주머니 할머니 다리 펴고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 나누는 그 길가에 프랑스 음식을 파는 한옥 레스토랑은 마치 '박쥐우산과 재봉틀이 해부침대에서 만나'는 것 같은 충격적인 영상이었다. 그 사이에는 묘한 단절이 있었으며 어찌 보면 현대성에 가장 깊숙이 다가가 있는 것 같았다.
스튜디오 스몰. 17평짜리 땅에 꽂아놓은 집. 집을 저렇게 꽂아놓는 수도 있구나. 가지런히 눕혀놓은 집들 사이에 불쑥 꽂혀 있는 집. 그 집이 ‘장영혜중공업’의 사장 장영혜 씨의 집이었다.
상식이 일천하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둔해서 나는 장영혜 씨가 어떤 사람인지 전혀 몰랐다. 사진을 찍는 김재경 선생은 이 집이 장영혜 씨의 집인가요? 하며 흠칫 놀라 했다. 물론 집으로 들어가기 전에 문 앞에서 나눈 이야기였다.
“인터넷에서... 아주 쎄게.... 작업을 하시는데......?”
아무튼... 먼저 들어가 있기로 한 최 욱 소장에게 전화를 했고 장영혜 씨로 추정되는 사람이 문을 열어주었다. 집도 작았지만 대문도 작았다. 여느 집의 샛문 분위기의, 그 정도 크기의 문이 열리고 안으로 안내되었다.
들어서자 마자 보이는 계단 아래에 최 욱 소장 소장이 꽃처럼 웃고 있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가 없이 만난 장영혜 씨의 첫인상은 나중에 확인한 작품의 스타일과는 달리 매우 부드러웠다. 작품으로만 세상과 만나려 해서인지 집 구경에 수반된 촬영 과정에서 가급적 사진 프레임에 들어오지 않으려고 했다. 장영혜 씨와 마크 보주(Mark Voge)는 넷아트(Net Art)의 선구자로 불리며 2000년 에르메스상 수상, 2001년 웨비어워드 예술상 수상, 2003년 베니스 비엔날레 참가 등 화려한 경력을 가진 작가들이다. 현대중공업, 삼성중공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장영혜중공업’의 본사는 온라인(www.yhchang.com)에 있다.
쌍방교류(Interactive)의 상징공간인 온라인에서 이들의 작업은 유별나다. 이들의 홈페이지에는 게시판도, 방명록도 없으며(물론 그것들이 쓰레기장으로 변한 지 오래이긴 하다) 오로지 한국어, 영어, 불어 등 각 나라말로 제공되는 그들의 ‘작품’만이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리고 거기엔 무엇보다 ‘이미지’가 없다.
이제와 인터넷에서 이미지를 제외시킨다는 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다. 쉽게 기사를 쓰려는 기자들이 자주 뒤지고 다니는 ‘디씨인싸이드’에서는 이미지를 ‘짤방’(짤림방지)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게시 글에 이미지를 첨부하지 않으면 아예 글이 삭제되기 때문이다. 게다가 텍스트에 대한 대접은 어떤가. 뉴스조차도 한 페이지를 넘어가는 글은 웬만해도‘분량의 압박’으로 인해 외면당하기 십상이다.
그 텍스트가 ‘장영혜중공업’의 공장에서는 곧장 이미지이자 메시지로 가공된다. 빠른 비트의 배경음, 10,9,8, 카운트다운과 함께 시작하는 단지 원색이나 흑백 등으로 치장된 직설적 언어들의 폭발. 단지 몇 줄의 텍스트를 연속시키는 플래시 작업일 뿐인 과정의 단순함에 비해 작품이 던져주는 충격은 놀랍고도 흥미롭다. <DAK0TA>, < SAMSUNG>(실은 삼성으로 대표되는 물질문명을 비판한) 등의 작업이 인상적인데, 유명세를 타자 삼성 미술관에서 전시 의뢰가 들어오는 역설적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장영혜 씨는 프랑스에서 살다가 귀국해서 처음에는 팔판동 대로변에 있는 적산가옥에서 4년간 살았다. 집주인은 근처 기와집에 살고 있었는데, 처음엔 전세금으로 1천만 원을 부르더니, 마크가 외국인(중국계 미국인)이라는 걸 알고서 그 자리에서 3백만 원을 올렸다고 한다. 동네 가게도 마크가 가면 가격을 올려 받기 일쑤라 매사에 바가지 쓰는 게 일상화되다시피 했다. 동네가 유명해지면서 갑자기 그 집에 월세 90만원이라도 들어온다는 사람이 생기길래 얼른 나왔단다.
장영혜 씨는 아예 집을 짓겠다고 마음먹고 땅을 샀다. 집을 지으려 산 땅의 면적은 56 평방미터. 우리나라 건축법상으로 50 평방미터 이하의 땅은 아예 건축을 할 수 없는 땅으로 규정되어 있다. 커트라인을 아슬아슬하게 넘은 이 땅을 보고 집을 짓기엔 너무 좁다고 말리는 사람이 많았다. 종로구청에서도 죽은 땅이라고, 죽은 땅의 의미가 뭐냐고 물으니 몰라서 묻느냐는 식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건축가를 알아보러 다니다가 장영혜 씨는 마음에 드는 건물을 발견하고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서 최 욱 소장을 찾아온다. 최욱이 유명한 건축가인 것을 알고 예산이 별로 없는데 설계비가 많이 들 것 같아서 살짝 쫄기도 했었다. 하지만 다른 건축가는 너무 좁아서 건축이 안 된다고 했던 땅인데, 최 욱 소장은 땅을 보고 매우 흥미로워하며 한번 해보고 싶다고 의욕을 보여서 반가왔다. 게다가 사무실에서 현장까지 걸어서 2분, 이만하면 이른바 “동네건축가”인 최 욱 소장으로서는 최고의 조건인 셈이다.
원래는 바로 옆집(도 역시 한옥)과 지붕이 붙어 있던 기와집이 있었다. 그걸 지붕 일부만 잘라내 허물고 3층집(다락방이 있는)으로 지은 것이다. 8m 고도 제한이 있어서 사실은 2층 건물이고, 3층은 난방이 없는 다락 개념의 방이다. 1층에 들어가면 바로 2층으로 오르는 계단이 현관 앞에 있고 안쪽으로 식당 겸 거실, 그 너머에 침실과 욕실이 있다.
최 욱 소장은 별 말 없이 그저 웃으며 대화에 가끔씩 끼어들 뿐이어서, 이야기는 주로 장영혜 씨와 나누었다. 장영혜 씨는 질문에 대답하랴 마크에게 통역해주랴 매우 바빴지만 하나도 귀찮은 기색이 없었다. 실은 마크의 아버지가 미시간 대학교 건축과 교수이고 형제들도 모두 건축가라서(그들이 땅에도 직업 와 봤고 계획안도 보고 모두 좋아했다.) 마크와 장영혜 씨는 건축 설계가 잘 되었을 때 얻을 수 있는 이점에 대해 처음부터 기대가 컸던 것 같다.
규모는 작지만 공간의 쓰임새를 섬세하게 배분해서인지 집은 실제보다 크게 느껴진다. 침대를 사용하지 않기에 침실이 좁아도 전혀 불편하지 않고, 욕실에도 타일로 마감한 욕조가 있어서 한창 유행하는 반신욕을 즐길 수 있다. 외부용 고무 바닥재로 바닥 마감을 한 것도 아주 신선하다. 외장재는 공사할 때는 별로 안 비쌌는데 그 이후 값이 올라서 흐뭇했다고.
작업공간인 2층에는 길다란 작업대에 네 대의 노트북 컴퓨터가 나란히 놓여 있는데 이것만 가지고이들의 직업을 짐작하기란 불가능할 것 같다. 소위 “예술하는” 사람의 집이라고 섣불리 단정할 만한 별스러움은 하나도 없는 것이 더 특이하다 해야 할까. 3층은 손님 접대용 공간인데, 2층과 3층 사이에도 절묘하게 화장실을 끼워넣은 건축가의 솜씨도 예사롭지 않다.
공사 과정은 순조롭긴 했지만 시간이 5개월 걸렸다. 대지가 너무 좁아서 비계를 못 매고 작업해야 했는데, 기초를 이렇게 튼튼히 하는 건 처음 본다고 동네사람들이 놀랄 정도로 시공팀이 굉장히 꼼꼼했다. 약간 삐딱한 대지 조건에 맞춰서 싱크대도 약간 삐딱해졌고, 2층 작업실의 가구 등도 모두 custom-made, 즉 현장에 맞춰서 제작했다. 작은 집이지만 수납이 아주 많이 들어가 있어 사용하기에 매우 만족스럽다. 예산이 한정되어 있어서 공사비는 9천만 원 들었다.
집 짓는 내내 설계 사무소의 담당자가 하루에도 몇 번씩 들를 정도로 열심히 감리를 했다. 하지만 실제 이 집의 감리자는 스무 명이 넘는다. 맞은편 한옥 앞에서 이 동네 할머니들이 모여 매일매일 함께 집 짓는 과정을 지켜보았고 공사가 끝나자 그 할머니들이 떡은 안 하냐고 해서 급하게 떡을 하고, 공사 반장이 막걸리까지 돌려서 거하게 동네 잔치를 벌였다.
이 집과 두 사람에 대한 동네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다. 한번은 외국에 나갈 일이 있어 집을 오래 비워두면 도둑이 들까봐 불을 하나 켜놓고 갔다. 다녀오니 동네 사람들(바로 그 할머니들)이 왜 불을 켜놓고 갔느냐고, 이 동네는 도둑이 없으니 전기 아깝게 불 켜놓고 다니지 말라고 점잖게 충고를 했다. 심지어 옆집 할머니는 장독대에 올라가 이 집 부엌을 들여다보곤 한다. 처음엔 매우 이들을 못마땅해 하던 할머니다. 예술가, 건축가 나부랭이라는 식으로. 원래 붙어있던 두 집이라 팔 때도 같이 팔기로 했는데 이 땅 주인 할아버지가 배신(?)을 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그런 식의 지나친 관심이 부담스럽거나 불편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장영혜 씨는 마크와 웃음을 주고 받으며 부정한다. 그들이 밖에서 다 들여다보는 것 같지만, 실은 잘 안 보인다. 자신들의 작업에 대해 잘 모르니까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고, 집에서 잠만 자는 줄 안다. 워낙 오래된 동네이다 보니 엉뚱한 사람이 들어와 어지럽히는 것을 싫어하는 할머니들의 마음을 이들은 이해한다. 사실 자신들도 그런 존재였는데, 집이 특별하긴 하지만 작으니까 용서가 되고, 차 없이 걸어 다니는 모습도 할머니들의 마음을 풀어준 것 같다고 생각한다.
집은 생활을 대변하는 것이기 때문에, 유럽이나 미국 사람들은 삶과 집이 일치하는 것을 이해하고 매우 부러워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장영혜 씨는 한국사람들이 가회동 한옥을 포기하고 바로 아파트로 가서 생활이 편하고 쉽다고 행복해하는 것이 이해가 안 간다. 단적으로 아파트는 화장실에 창문이 없어서 싫은데, 한번은 여의도의 주상복합 아파트에 갔더니 생각보다 소음이 심해서 놀랐다. 이 집엔 화장실에 창이 있어서 좋고, 작지만 이렇게 트여있어서 좋다.
아직도 주변 사람들은 이 집에 대해 ‘뜬금없어’ 한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2년 후 이 집을 팔아 아파트를 사야 한다고 충고한다. 하지만 한 일본작가가 이 집에 와 보고 이들더러 부자라고 불렀는데, 도쿄 시내에 이 정도 집에 살면 사실 그렇다. 외국의 예술가, 큐레이터 같은 사람들은 아트 선재라든가 현대 갤러리 등이 위치한 이 동네에 사는 걸 부러워한다.
이 집을 얼핏 미술관인 줄 아는 사람도 많다. 잡지에서 취재 의뢰가 오기도 하고 학생들도 찾아온다. 피할 수 없으니 즐길 만한 일이지만, 집 앞 프랑스 식당에 친구들이 거기 밥 먹으러 왔다가 “너 지금 보인다”며 전화를 하는 건 부담스럽다. 장영혜 씨의 집은, 그리고 그의 삶은, 그렇게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은 확실하게 보여주고, 그렇지 않은 부분은 철저히 감춘 채로, 묵은 된장처럼 오래된 동네에 어느 날 날아와 박힌 모노리스처럼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서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