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르다
김신용
마당가에 호박꽃이 피었다
먼지 낀 시렁에서 씨앗 얻어 담장 아래 묻어두었던 것
초여름이 되자 햇살을 제 한 몸에 다 받으려는 듯
넝쿨들은 넓은 잎들을 펴고 돌담 위에까지 기어오른다
그러나 호박꽃 초롱에는 불이 켜지지 않는다
빈혈이듯, 넝쿨들은 힘없이 꽃들을 떨구어버리고는
열매 하나 없이, 제 할 일 다했다는 듯이
축 늘어져 있다 그것을 보며 혀 끌끌 차던 섬의 아낙은
저 호박꽃을 확, 불질러주어야 한당께! 하며
한낮의 호박꽃처럼 몸을 움츠리며 웃는다
그때서야 나는 저 호박꽃도 암꽃과 수꽃이 있다는 것을 안다
노란 꽃잎 속에 네 겹의 작은 꽃술을 오므리고 있는, 암술
受精의 노란 꽃가루를 잔뜩 매달고, 남자의 性
오똑 서 있는 외줄기 수술, 그 앙증맞은 발기를
네 겹의 작은 암술을 열어 부벼주며, 아니 <불질러주며>
벌과 나비처럼, 사람도 자연의 훌륭한 매개체임을 깨닫는 그 순간,
禁治産의 내 몸도 확 불타오르는 것 같다
못생긴 호박의 생이라도 열매 맺을 수 있는 것처럼
빈집에 대하여
섬은/허공의 대머리에 씌어진 모자//내 두개골 속의 의식은 가발 같다//이미 폐허가 된 몸,/나는 내가 가공된 자연임을 안다//내 몸속의 공장 또한 가동을 멈춘 지 이미 오래//노동은, 두족류처럼 흐느적거리는 육신을/세계 속에 조립시켜주는 유일한 길이었다//이제 미지도, 신비도 없는 이 섬에서/나는 또 어떤 종의 변신을 기다리고 있는 것일까?//해골에 낀 의치 같은 나를, 저 바다에 인공수정시켜줄/<머리에 떨어진 벽돌> 같은, 새로운 생의 돌발성에 몸을 기대고/그것이 사체기생식물의 또 다른 삶의 방법이라고 해도
이 시는 앞에 소개한 시와 마찬가지로 시집 『몽유속을 걷다』에 실려있는 「섬. 斷想」이라는 시이다. 이 시에는 섬에 살면서도 섬(자연)과 동화하지 못한 존재의 이질감이 들어있다. 그러니까 자연 속에 있으면서도 마치 이물질처럼 떠도는 감정의 소화불량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다.
그랬다. 한때 나에겐 자연이란 가난과 배고픔을 상징했었다. 도시에서 도시로만 떠돌던 나에겐 농촌(자연)이란, 그 가난과 배고픔의 대명사였다.
그런 나에게 섬은, 마치 길을 걷다가 머리에 떨어진 벽돌처럼 다가왔었다.
그러니까 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선택된, 그만큼 갑작스런 것이었다. 내가 섬의 빈집에 이삿짐을 풀었을 때, ‘내 두개골 속의 의식은 마치 가발’ 같았었다. 그만큼 낯설었고 어리둥절하기까지 했었다.
하여튼 그래도 나는 그 섬에서 2년여 동안을 살았었다. 앞에 소개한 시의 한 구절처럼 ‘머리에 떨어진 벽돌 같은 새로운 생의 돌발성에 몸을 기대고’ 나는 섬에서 생활을 시작했었다.
그런 어느 한날, 나에게 자연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게해주는 하나의 사건(?)을 만났었다.
그래, 그것은 하나의 사건이라면 사건이었고, 하나의 계기라면 계기였다.
그때, 내가 세를 얻어들었던 빈집 마당가에는 나즈막한 돌담이 있었는데, 섬에서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막돌들을 주워 쌓아올린 볼품없는 돌담이었지만, 시멘트블록이나 콘크리트 담벽만 보아온 나에겐 무척 새롭고 정겨워보였었다.
그 돌담 앞에는 조그만 채마밭이 있었고, 돌담에 잇대인 대문가에는 키 큰 접시꽃이 누구를 마중이라도 하는 몸짓으로 서 있었다. 나는 섬의 빈집 마루에 앉아 한낮의 고요를 가져다주는 돌담을 바라보는 것을 좋아했고, 그 돌담 너머로 지나가는 마을 사람들과 인사하는 것도 반가웠었다.
그 돌담 아래 호박을 심었었다.
빈집의 먼지 낀 시렁을 뒤적이다 우연히 발견한 호박씨였다. 그 호박씨를 심고 난 후 얼마쯤 지났을까? 씨를 심은 흙 속에서 넝쿨들이 자라오르기 시작했고, 또 얼마 지나지 않아 넝쿨들은 무슨 경쟁이라도 하듯 돌담을 타고 올라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넓은 잎들 사이사이에 노란 호박꽃을 피워놓기 시작했다.
그런 어느 날 마루에 앉아 무심코 돌담을 쳐다보았을 때, 노란 호박꽃들이 열매를 맺지도 못하고 힘없이 시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어떤 것은 그냥 통째로 꽃을 툭툭 떨구고 있었다. 대체 저것이 왜 저러나? 싶어 재래식 화장실에서 똥물을 퍼다가 뿌려주기도 했으나, 그야말로 백약이 무효인 듯 아무런 효과가 없어, 그래 이것도 자연의 한 현상이려니 싶어 그냥 그대로 두었었다. 그런데 돌담의 골목길을 지나가던 이웃집 과수댁이 나에게 말은 건넸다.
“호박꽃을 저대로 두면 안되야─ 호박꽃을 확, 불질러줘야 한당께─” 하고 말하며 한낮의 호박꽃처럼 부끄럽게 웃었다. 그리고는 마치 남성의 성(性)처럼 오똑 서 노란 꽃가루를 잔뜩 머금고 있는 수술의 호박꽃을 따 암술의 호박꽃에 부벼주거나 암술의 꽃술 사이에 꽂아주며 재차 강조하듯 말했다. “이렇게 호박꽃을 확 불질러주지 않으면 열매가 맺지 않아야─! 일일이 하나씩 이렇게 확 불질러주어야된당께─” 하고 말하며 자신은 더 부끄러운 듯 입술을 오므리며 웃었다.
그 말을 들은 나는 그때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호박꽃도 암꽃과 수꽃이 있다는 것을─ 수정의 노란 꽃가루를 잔뜩 매달고 남자의 성처럼 오똑 서 있는 외줄기 수술─.
노란 꽃잎 속에 네 겹의 작은 꽃술을 오므리고 있는 암술─. 벌과 나비 같은 자연의 수정의 매개체가 귀한 바닷가 마을에서 이렇게 사람이 수정의 매개체가 되어주어야 호박꽃이 결실을 맺는다는 것을─ 나는 그때 비로소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도 그런 자연의 훌륭한 매개체라는 것을─ 살아있는 자연의 한 개체라는 것을─.
그리고 나는 다시 깨달았다. 아스팔트에서 아스팔트로 떠돌며 살아온 내가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내가 세를 얻은 섬의 빈집만이 빈집이 아니라, 내가 그 빈집 속의 빈집이었음을─.
그날 이후 지금도 호박을 심어놓은 텃밭에 서면 마치 남성의 성처럼 오똑하게 서 있는 호박꽃을 따 암꽃의 꽃술 속에 부벼주곤 한다. 그러면 그 자리, 동그랗게 부풀어오르는 호박의 결실을 보며, 인간도 훌륭한 자연의 매개체임을 다시 한번 깨닫곤 하는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섬의 빈집에서 만난 이 경이로움이, 훗날 내게 ‘도장골 시편’을 쓰게 한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내 눈에 낯설게만 비쳐지던 자연의 생명현상을 경이로운 눈빛으로 지켜보게 한 그런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문학 무크 『시에티카』 2013년 · 상반기 제8호
김신용
부산 출생. 1988년 『현대시사상』으로 등단. 시집 『버려진 사람들』, 『개 같은 날들의 기록』, 『몽유 속을 걷다』, 『환상통』, 『도장골 시편』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