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해서 잊어버린 노래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시와에세이, 2010)
김윤환
사람이 말을 한다는 것은 축복이다. 말은 관계 속에서 빛을 발한다.
내가 생각하는 시는 누군가를 만나기 위한 즐거운 고독이다. 외롭지 않기 위해 뻔한 것들에 대한 경멸을 내 시는 그대로 수용한다.
나는 시인이 되는 과정도 그리 화려하지 않았다. 시보다 사람을 좋아했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더 유심히 보았다. 수려한 시어보다는 그들의 눈길, 말, 웃음, 울음을 그대로 담는 것이 좋았다.
마흔을 넘기면서 첫 시집을 냈다. 『그릇에 대한 기억』 역시 관념과 자가당착의 유혹을 떨치지 않는 노래였고, 그로부터 여섯 해를 지내면서 나는 놓쳐 버린 익숙한 것들을 더욱 노골적으로 찾기 시작했다. 아직도 오늘인 과거를 버리지 않기로 했다.
나는 이야기가 시를 말하도록 나의 기교(技巧)를 포기했다. 그저 풍경이 시를 반사(反射)해 주길 바랬다.
시가 예술이라는 것이 참 고맙지만 내겐 시적 표현이라는 말은 왠지 가식스럽다. 시가 마치 지고(至高)한 진리와 만나야하는 무거운 짐도 버리고자 했다. 사람이 피할 수 없는 것이 시간이고, 생명이며, 그리고 고통과 외로움이다. 피할 수 없는 숙명이 있기 때문에 투쟁과 화해를 반복하며 노래하는 것이 시가 지닌 역사적 소명이다.
시를 통해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 때문에 시가 되는 것처럼 정의를 부르짖으려면 사랑이 있어야 한다. 아무리 메마른 구호도 사랑이 있으면 시가 된다.
내가 만난 예수는 역사적 예수다! 그러나 그는 내 안에 들어와 버린 현현한 신령(神靈)이다. 오래된 경전과 교리에 갇힌 성자가 아니라, 그는 지금 내 심장에 열정을 쏟아 부어주는 내 시의 힘이 되었다. 그렇다고 이 시집을 종교적 관념으로만 재단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의 사는 이야기와 우리가 마주한 역사적 현장과 우리가 부르는 사랑노래가 궁극적으로 시와 분리하여 생각할 수 없다면, 우리의 「발자국」이나, 각자의 머리에 씌여진 「모자」나, 지친 일상의 「신도림역」이 차창에 비친 풍경처럼 빤할 지라도 그것은 결코 비켜서서 말하거나 돌려 말할 만큼 추하거나 비밀스러운 것은 아니다.
아직도 경제가 지상 최고의 덕목이 된 세상에 「신바벨탑」은 세워지고 있고, 임진강 옆 「자유로 유령」이 우화가 아니라 실제상황이 되고 있다는 것이 내 시집에 머물러 있는 떠나지 않은 과거다.
인간의 삶의 지표는 예술과 별개일 수 있을까? 예술이라는 문명은 때로 언어를 복잡하게 했고 복잡한 언어는 결국 무너진 바벨탑처럼 소통을 막아 버렸다.
나는 시가 시원한 냉수이길 바란다. 누구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갈증마저 잊어버린 이의 목을 씻어줄 맹물이었으면 한다. 비록 걸쭉한 건더기는 없어도 아무에게나 들이켜지는 한 잔의 물이고 싶은 것이다. 콸콸 쏟아지는 시의 범람 속에 각자의 부유물을 둥둥 띄우고 있을 때 냉수 한 잔으로 만족하고 싶다.
나는 촌놈이다. 태생도 그렇고 사는 것도 그렇다. 시인이 지식인이고, 시대의 어둠을 다 껴안고 있다 할지라도, 나는 촌놈인 채로 누구나 아는 말, 그러나 다시 하기는 쑥스러운 방언들, ‘깨달음’이란 것이 그리 유별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시를 쓰고 싶었다.
시단(詩壇)의 저열(低劣)한 이단이 될 지라도 내 앞에 펼쳐진 생명들의 풍경, 그 익숙한 것들을 놓치지 않기 위해 촌스러움을 감추지 않고자 한다. 그래서 이 시집은 김윤환 시의 촌스러움을 그대로 옮겨놓은 실로 반예술적 시편들일지도 모른다. 고백하거니와 나는 온전한 시인이 아니다. 이제 내 시를 읽어 주는 이가 나를 명명(命名)해 주길 바랄 뿐이다.
김윤환
경북 안동 출생.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그릇에 대한 기억』, 『까띠뿌난에서 만난 예수』 등.
―『시에』(2010, 여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