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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안쓰럽다 [홍세화 칼럼]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0.11.05|조회수42 목록 댓글 0

우리는 곧잘 우리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 교육이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니 얻는 게 없”는 것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인데, 민도가 높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들이 안쓰럽다

홍세화

장발장은행장, ‘소박한 자유인’ 대표

 

“한국의 교육자여 단결하라! 우리가 얻을 것은 참교육과 참학문이고, 우리가 잃을 것은 거대한 무력감과 패배주의뿐이다.”

지난 12월10일치 한겨레 <세상읽기> 난에 실린 김누리 교수의 ‘한국의 교육자여 단결하라!’ 칼럼의 결론 부분이다. 그는 “더 이상 무책임한 국가, 비열한 사회에 대학정책, 교육정책을 내맡길 수 없”으며, “한국의 교육/대학 문제를 풀 유일한 방법은 교육자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라며 “교육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해서는 교육과 연구에 종사하는 모든 사람들, 초·중등 학교, 대학교의 교사, 교수, 강사와 연구소의 연구원이 하나의 조직으로 뭉쳐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면서 ‘아래로부터의 교육혁명’을 이끌 ‘한국교육연구노조’ 건설을 모든 교육자, 연구자에게 제안했다.

 

나는 앞으로 조직되기를 바라는 ‘한국교육연구노조’의 노조원 자격 여부를 떠나 김 교수의 제안에 적극적으로 응답하고자 이 글을 쓴다. 기성세대의 한 사람으로서 우리 아이들을 무한경쟁의 도가니 속에 몰아넣고 있는 반인권, 반시민, 반노동의 교육 현실에 절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프랑스의 68세대는 “우리 후손들에게 정의롭지 않은 사회를 물려줄 수 없다!”며 70대 나이에 ‘노란 조끼’를 입고 거리에 나섰는데, 감히 말하건대 그들보다 더 절박한 심정이다. 노무현 정권 때에는 그래도 ‘국공립대 통합네트워크화’ 등 대학서열을 완화, 철폐하기 위한 모색과 토론, 실천운동이 펼쳐졌다. 오늘 교육개혁의 가능성은 문재인 대통령의 교육공약이 실종되면서 멀어졌다. 촛불정권에 걸었던 기대가 가뭇없이 사라지면서 교육운동계는 과거에 비해 더 무력감과 패배주의에 시달리고 있는 듯하다. 이는 김 교수의 제안에 별 반향이 없는 것에서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그가 호소하듯, 교육자들이 교육개혁의 주체가 될 수밖에 없고 되어야 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교육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먼저 아이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삼천지교’의 ‘맹자 어머니’ 같은 학부모는 이미 오래전에 사라지고 없다. 자식이 학교에 다니면서 인간성을 확장하고 인간의 염치를 알며 올바른 인격, 더불어 사는 연대의식을 형성하는지에 관심을 갖는 학부모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자식이 학교에서 무엇을 배우는지에 관해서는 별 관심 없고 등급과 석차로 표시되는 성적에만 관심이 있다. 자식세대가 장래를 설계하기가 더 어려운 헬조선의 ‘엔(N)포세대’가 된다는 불안의식이 부모세대를 압도하는 탓이 크다 할지라도, 민주공화국의 공교육 이념이 우리 사회에 정립되지 못했다는 점을 드러낸다. 참된 교육자라면 자유, 평등, 평화, 연대, 공공성 등 민주시민이 가져야 할 가치 형성을 기대할 수 없고 다만 석차와 등급을 매기기 위한 학교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보다 지지율에만 관심을 갖는 대중추수 정치인들한테서 교육개혁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점은 분명하다. 시민적 자유와 행복추구권 신장을 위한 차별금지법 입법 요구에 반응을 보이지 않는 집권세력은 시민사회의 거듭된 전교조 법외노조화 직권취소 요구도 계속 외면하고 있다. 어려운 학교현장에서 참교육을 고민하고 실천해온 교사들마저 부정한다면 누구와 함께 참교육 실현을 도모하겠다는 것인가.

 

아이들이 안쓰럽다. 특히 석차와 등급 경쟁에서 앞자리를 차지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무척 안쓰러운 것은 학습에 지친 그들에게서 불법파견된 비정규직 노동자의 모습이 어른거리기 때문이기도 하다. 최근 <한겨레21>은 자해 행위로 ‘살아 있음’을 느끼는 초중등 학생이 적지 않다는 충격적인 사실을 보도했다. 수월성 경쟁이 지배하는 학교에서 대다수 학생은 자긍심, 자존감을 갖기 어렵고, 잉여적 존재로 취급받기 쉽다. 학교생활이 행복할 리 없다. 1등급은 2등급 이하를 차별하고 2등급은 그 이하 등급을 깔보고 9등급 남학생은 여학생을 혐오한다. 이런 사회에서 성소수자와 난민이 차별과 혐오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인데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은 왜일까? 공자님의 말씀을 기록한 논어에 “학이불사즉망, 사이불학즉태”(學而不思則罔, 思而不學則殆)라는 구절이 있다. 중국의 각급 학교 곳곳에 붙어 있다는 글귀로,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고, 생각하기만 하고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는 뜻이다.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게 없다! 바로 우리 모습 아닌가! ‘배움’과 ‘생각하기’는 어우러져야 한다. ‘배움’이 모든 학생이 같은 내용(이론, 용어, 연대, 인명 등 객관적 사실)을 숙지하는 것이라면, ‘생각하기’는 배움의 토대 위에서 각자 ‘나’가 사유하는 것이다. 공자님의 가르침은 “배움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는” 우리 교육이 ‘나’ 없는 전체주의 교육임을 일깨워준다. ‘조반’(창조적 반란)이나 상상력을 기대할 수 없다. 이처럼 우리 교육에 배움만 있고 생각하기가 없는 것은 서열화된 대학에 조응하려고 학문을 왜곡한 데서 비롯되었다. 학생들을 줄 세워야 하는데 ‘생각하기’로는 줄 세울 수 없어서 ‘배움’으로 마감한 것이다. ‘배움’으로 마감하니 ‘나’가 없다. ‘나’가 없으니 자긍심, 자존감을 가질 수 없고, 나의 자리에서 생각하지 않으니 남의 자리에서 생각하는 역지사지는 그야말로 연목구어다. 또 ‘나’가 없으니 비판의식이나 계급의식 형성도 애당초 불가능하다.

 

우리는 곧잘 우리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진실은 우리 교육이 학생들에게 자기 생각을 갖도록 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사유는 곧 언어이고 언어는 곧 사유다. ‘생각하기’는 언어로, 즉 글쓰기와 말하기(토론)로 표현되어야 하는데, 우리 학교와 교실에서 학생들의 글쓰기와 말하기는 거의 없다. 곧 ‘생각하기’가 거의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배우기만 하고 생각하지 않으니 얻는 게 없”는 것이다. 공부 시간은 세계 최장, 대학진학률은 세계 최고인데, 민도가 높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철학 공부를 한다는 점은 프랑스인들에게 은근한 자긍심의 원천이다. 매년 6월 중순에 치르는 대학입학자격시험(바칼로레아) 중에 철학 시험문제는 많은 언론매체가 소개한다. 수험생들은 계열별로 주어지는 3개의 논제 중 하나를 선택하여 4시간 동안 논술하게 되어 있다. 필수과목인데다 가중치도 높아 인문계의 경우 프랑스어가 5학점인데 철학은 7학점이다. 최근에 출제된 논제들을 보면 “모든 진리는 확정적인가?” “예술에 무감각할 수 있나?” “욕망은 우리가 불완전하다는 징표인가?” “부당한 일을 겪어야만 무엇이 정당한지 알 수 있나?” “알기 위해서는 관찰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예술 작품은 꼭 아름다워야 하나?” 등이 있다. 잠시나마 이 논제들 중 하나를 선택해 4시간 동안 뭐라고 쓸 것인지 짚어보면 좋겠다. <르몽드> 인터뷰에 응했던 한 학생은 7장을 썼다고 말했다. 한국의 대학생들에게 이 논제들을 던져본 적이 있는데, 가장 많이 들은 답변은 “아닌 것 같은데요”, 한마디였다.

 

그렇다면 우리 학생들에게 지우는 학습노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앞에 공자님 말씀을 들어 “얻는 게 없다”고 했는데, 지배세력에겐 이로운 부수적 효과가 적어도 두가지 있다. 세계 최장의 학습시간으로 세계 최장의 노동시간에 익숙하게 하는 것이 그 하나이고, 비판의식과 계급의식은 형성하지 않은 채 등급과 석차로 서열을 규정함에 따라 머리 좋거나 경제력 있는 부모를 둔 학벌 엘리트집단에 복종하도록 하는 것이 그 둘이다. 총총한 눈빛의 아이들 앞에서, 참된 교육자라면 이와 같은 교육 현실을 단호히 거부해야 할 것이다. 김누리 교수의 제안에 호응 있기 바란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875242.html#csidxd6e7fd26b76fe138c6a6e42cc08fd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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