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야기사랑방

공부 잘 해서 남 주는 사람을 [최창의 / 고양신문]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20.09.22|조회수23 목록 댓글 0

공부 잘 해서 남 주는 사람을


                                                                                     최창의 (행복한미래교육포럼 대표)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며 의사와 전공의들이 진료거부에 들어간 걸 두고 비난이 거세다. 환자들 생명은 아랑곳없이 자기들 욕심만 앞세운다고 나무란다. 더구나 많이 배우고 공부를 잘해 의사가 된 사람들이 사회적 책임이나 공공의식이 없다고 탄식한다. 그런데 보도 기사를 보다가 눈에 들어온 공부 잘 한 의대생들이라는 표현이 가시처럼 걸렸다. 학교 다닐 때 귀에 못 박히도록 자주 들었던 '공부' 이야기가 왜 나온 걸까?

 

어른들은 우리가 자랄 때 쉴 새 없이 공부하기를 요구했다. 아마 부모나 교사들이 애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도 공부해라일 것이다. 하라는 공부 안 하고 놀거나 돌아다니면 공부해서 남 주냐고 윽박질렀다. 가끔씩 배워서 남 주냐는 훈계 비슷한 핀잔도 들었다. 자주 반복해서 말하고 듣다보니 가훈인 듯 그렇게 믿고 따랐다. 열심히 공부하면 남 좋은 일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잘 먹고 잘 사는 거라고 아로새겼다. 그래서 교과서와 참고서 달달 외우느라 밤을 패고 코피를 쏟았다. 남보다 공부 잘 하고 앞지르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다. 친구들을 밟고 위만 보고 올라갔다.

 

학교 다니다 잘못을 저질러 붙들려 가면 험한 말도 예사로 들었다. “공부도 못하는 놈이 그런 말썽까지 피워.” 이런 고약한 꾸지람에 얹혀 출석부로 뒤통수를 후려맞거나 막대기로 뱃살을 찔리기도 했다. 공부를 잘 하면 곱게 봐 주거나 눈감아 줄 수도 있다는 속뜻을 뼈저리게 곱씹어야 했다. 그만큼 우리 학교사회에서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엄청난 우대권이고 기득권이었다. 공부를 잘 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특별한 대우를 받으며 학교생활을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이 누린 특권적 지위와 우대는 흘러간 옛노래가 아니다. 지금 시대에 와서 오히려 심화되고 굳건하게 제도화되기에 이르렀다. 예전의 공부 서열은 우열반을 가르거나 일류대학에 입학하는 지위를 누리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부모 재력에 따른 사교육으로 불평등 격차를 더욱 벌리고 아예 일부 귀족학교를 담을 쳐 갈라놓기도 한다. 이른바 공부 잘 한 아이들만 입학한다는 특목고와 자사고는 일반공립고 35배의 학비를 받아 최고의 환경과 교육여건을 만들어 운영한다. 이런 특별한 학교 아이들은 학급당 학생수 20명 남짓한 학습 여건에 기숙사까지 갖춰 먹고 자며 공부만 하고 있다.

 

학생을 마치 공부 기계처럼 여기고 편을 가르는 수단이 되어버린 공부는 본디 어때야 하는가. 사전에서는 공부를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힘'으로 풀이해 놓았다. 영국의 저명한 철학자 허버트스펜서는 일찍이 교육의 목적은 인격의 형성이다고 말했다. 진정한 공부라면 사람으로서 가진 사람다운 심성과 인품을 닦아야 함을 이르는 명언이다. 더 나아가 공부는 삶을 가꾸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어야 한다. 공부를 통해 자신과 세계를 이해하고 삶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신영복 선생이 담론에서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며, ‘가슴에서 끝나는 여행이 아니라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라고 그 본질을 환히 밝혀 놓지 않았던가.

 

그러나 참으로 안타깝게도 아이들을 죽자사자 내몰아 강요하는 오늘날 공부는 진정한 의미의 공부와 거리가 멀다. 그저 시험문제 잘 풀어서 이름난 대학에 진학하는 목표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지식을 활용하여 삶의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과 창의적인 생각을 키우는 건 뒷전이다. 오로지 교과서와 참고서 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반복해 외우거나 짜맞춰 시험지를 잘 푸는 게 지상과제가 되었다. 따라서 가슴의 감성은 바짝 마르고 손발은 제대로 놀리지 않더라도 오직 머리만 잘 쓰게 하면 된다. 머리 굴리는 잔재주만 발달된 기형적인 가분수 인간을 기르고 있는 것이 부정할 수 없는 슬픈 교육현실이다.

 

이번 공공의료 정책 추진 과정에서 정부 당국의 미숙함도 없지는 않다. 하지만 의사들의 집단적인 진료 거부에는 시험 공부가 키운 우매한 우월의식과 이기심이 독소처럼 작용했다는 걸 알아야 한다. 공부를 많이 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무엇일까? 바로 공부 잘 해서 어떤 점수를 얻었는가 보다 어떤 사람이 되었는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배우고 공부해서 자기의 뱃속을 채우는 게 아니라 남 주기를 잘 하는 사람을 키우면 좋겠다. 지금 우리를 가두고 있는 공부에 대한 그릇된 인식 틀부터 망치로 깨뜨리는 데서 다시 시작해 보자.

 

출처 : 고양신문(http://www.mygoyang.com)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