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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수상 창고

Re:Re:글쓰기회보의글3) 회보를 읽고

작성자교육자치|작성시간06.11.18|조회수26 목록 댓글 0
살아 있는 기쁨도 맛보고 내 고백도 하고 싶어서
최창의
고양글쓰기회

나는 글쓰기 회보를 받는 날이면 차례를 살펴 어떤 글들이 실려 있는지 대충 훑는다. 그러다 먼저 읽는 것들이 대개 살아가는 이야기나 어찌 지내는지 궁금했던 사람이 쓴 글들이다. 그 다음 맨 뒷면의 알림글도 읽고 누가 회비를 보내고 누가 새로 들어왔는지도 본다. 앞서 몇 가지를 골라 읽고 난 뒤에는 한 쪽에 던져 둔다. 읽은 글들이 배불러 소화하느라 쉬면서 한참 목메기도 하고 내 사는 모습을 돌아보며 한숨을 퍽퍽 쉬기도 한다.
이번 회보에서는 머리글인 황시백 선생님의 <고욤 잔치>와 윤종진 선생님의 <내 부끄러운 고백>이 몇 날을 두고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사무실에서 잠시 멍하니 넋을 놓고 있거나 길을 걷다가 읽은 글들을 되씹으면서 사람을 떠올리고 사는 모습을 짐작해 보곤 했다. 그렇게 사나흘이 지난 뒤에 읽지 못한 연재물과 글쓰기 지도에 관한 글들을 마저 읽었다.
황시백 선생님은 늘 물 흐르듯 글을 쓴다. 그래서 곁에서 이야기를 듣는 듯 편안하고 글이 걸어다니는 것처럼 눈앞에 살아난다. 그리고 술 먹을 때 빼놓곤 말없이 구부정히 다니는 황 선생님의 가슴에서 어찌 이런 글들이 피어나는지 부럽기도 하다.
<고욤 잔치>도 참 편안하게 읽었다. 그러면서 쌀바가지를 들고 고욤을 하나 둘 주워 담는 황 선생님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나뭇가지에 걸린 비닐자락을 걷어 내려다 떨어질 뻔했다는 마음 씀씀이도 진하게 다가왔다. 고욤나무도 사람들 사이에서 살다 보면 이러저런 사나운 꼴도 보고 살아야 할진대 그냥 두지. 그래 목숨 걸고 못 오르는 나무까지 올라 탔나 싶은 맘도 들었다.
고욤을 씹어 보다가 ‘살아 있는 기쁨’의 맛을 느꼈다는데 그 맛이 무엇일꼬? 그 맛을 혼자 못 삭여 이 사람 저 사람을 불러 대는 그 인정도 부럽구나. 그러다 ‘미안하구나 새들아’ 하는 데 이르러서는 황 선생님이 반쯤 도인이 된 건 아닌가 엉뚱한 생각도 들었다. 그저 그 자리에 씨 뿌려진 대로 뿌리내리고 자라 우뚝 서 있을지도 모를 고욤나무에게 ‘그래, 이 찬 겨울 새들을 위해 열매를 달고 있구나.’ 하고 의미를 붙여 준 황 선생님이 고욤나무보다 더 커 보인다. <고욤 잔치>를 읽고, 나는 며칠 간 줄곧 우리 동네 일산의 아파트 숲과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면서 어디서 황 선생님이 맛본 ‘살아 있는 기쁨’을 찾아볼까 머리를 굴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이 이렇다. 머리로 찾으려고 해서 오는 게 아닌데 그저 그 맛이 가슴으로 스르르 느껴져야 하는 건데. 너무 머리 쓰지 말고 살아야겠다.
황 선생님 글을 읽으면서 뱀다리 같지만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생각도 좀 있다. 고욤을 따 놓고 왜 멀리 떨어진 우리 회원들을 그리도 애틋하게 그리워할까? 내일이면 만날 학급 아이들이나 한두 집이라도 이웃 사람과 함께 나누고 맛뵈일 생각은 안 했을까? 그러다 보니 황 선생님 글에서는 줄곧 시골 둘레의 나무와 풀, 꽃, 곡식 이야기가 많지 않았나 싶다. 황 선생님이 하루의 반을 같이 지내는 학교 아이들이나 선생님들, 함께 사는 동네나 이웃 사람들 이야기는 없었던 것 같다. 혹시 황 선생님이 그 동안 해 왔던 조직 활동이나 기계처럼 했던 교직 생활에서 멀찍이 비켜나가 서 있는 건 아닌가. 글만 읽고서 짐작하는 헛된 걱정이겠지.
윤종진 선생님의 <내 부끄러운 고백>은 남 이야기가 아니게 읽혔다. 상황과 처지가 다를 뿐 내 이야기이고 내가 아는 또 다른 복직 교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윤 선생님의 글을 읽으면서 자꾸 내 넋두리를 해 보고 싶었다. 그래서 내친 김에 하련다. 나도 전교조 운동을 할 때는 누구보다 좋은 교사가 되고 싶었고 교육을 바로 세워 보겠다고 힘에 부치게 뛰어다닌 기억이 있다. 해직 5년여 동안에도 오직 참교육의 그 날, 전교조 합법화의 길이라면 내 한 몸 아끼지 않고 이를 악물고 살았다. 그러다 해직 막바지에 탈퇴각서 이야기가 나오고 무기력감에 빠져 들면서 돌파구랍시고 찾은 것이 글쓰기 학원(처음에는 학원이라는 말이 싫어 ‘교실’이니 ‘문화원’이니 했지만 다 부질없는 말장난이다 싶다)이란 걸 시작하게 되고 그 길로 직업이 돼 버리고 복직도 안 했다. 복직을 할까 생각도 했지만 숨막힐 것 같은 학교 현장에 들어가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것도 겁나고, 제대로 되지도 않는 교육 운동을 한다고 교육 관료들과 마주치기도 끔찍했다. 차라리 학교 바깥에서라도 내가 할일이 있겠다 싶었고 교육과 사회를 바꿀 수 있는 운동을 다른 자리에서 하겠노라 마음을 다졌다.
그러나 어쩌랴. 내가 교육 운동을 하면서 교육 문제로 들추어 대던 사교육으로 돈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계속 괴롭히고 낯뜨겁게 하였다. 더구나 삶을 가꾸는 글쓰기 교육을 학원에서 가르치는 일이 혼란스러워 글쓰기 연수회에 갈 때마다 전과 달리 쭈뼛쭈뼛거려지고 글쓰기 회보를 받는 날이면 밤새 잠을 뒤척이곤 했다. 그러면서 이런 부끄러움을 이겨 보겠다고 시민 운동이다 참교육학부모회다 하는 지역 운동에 힘을 쏟아 보았지만 그 또한 만족스럽지 못하고 겉도는 느낌이었다. 오랜 고민 끝에 결국 학원을 그만두는 날까지는 내 지금의 현실을 인정하고 만나는 아이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참된 글쓰기로 아이들의 마음을 풀어 내려 애쓰기로 마음을 고쳐 먹었다. 그런 다음 지역에서는 참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을 만나고 모으려고 몸부림을 친다.
전교조 복직 동지들이 예전보다 더욱 답답해진 교육 현장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 치는 모습을 가끔 보았지만 윤종진 선생님은 자기 속에서 갇혀 많이도 괴로워 했구나 싶다. 결국 그런 괴로움이 자기를 자꾸 갉아 먹게 되고 남까지 힘 빠지게 했을 터인데……. 이번 겨울 연수에서 복직 이후에 처음 만난 윤 선생님과 같은 방에 있었고 복도에서 몇 번 마주 보며 담배도 피웠는데 이런 아픔들을 나누었더라면 혹 서로에게 힘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다행히 윤종진 선생님이 글쓰기 연수에서 그랬는지 맺힌 마음을 글로 풀어 내어 그랬는지는 몰라도 다시 힘을 얻고 아이들한테 다가갈 용기를 얻었다니 힘껏 응원을 하고 싶다. 이래서 글쓰기회가 사람 살리는 교육을 하고 있구나 해서 든든하지만 왜 좀더 일찍 윤 선생님들 같은 분들에게 가까이 갈 수는 없었는가 생각하며 또 다른 윤종진 선생님은 없는가 함께 찾아야 할 듯 싶다. 절망이여 저리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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