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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하늘 좋은 시

Re:[나희덕] 벽오동의 상부

작성자ojinny|작성시간02.04.29|조회수871 목록 댓글 0




벽오동의 상부





나는 어제의 풍경을 꺼내 다시 씹기 시작한다

6층에서 바라보는 풍경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앞비탈에 자라는 벽오동을 잘 볼 수 있다

며칠 전만 해도 오동꽃 사이로 벌들이 들락거리더니

벽오동의 풍경은 이미 단물이 많이 빠졌다

꽃이 나무를 버린 것인지 나무가

꽃을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래도 꽃을 잃고 난 직후의 벽오동의 표정을

이렇게 지켜보는 것도 또 다른 발견이다

꽃이 마악 떨어져 나간 자리에는

일곱 살 계집애의 젖멍울 같은 열매가 맺히기 시작했는데

나는 그 풍경을 매일 꼭꼭 씹어서 키우고 있다


누구도 꽃을 잃고 완고해지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6층에 와서 벽오동의 상부(上部)를 보며 배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거칠고 딱딱한 열매도

저토록 환하고 부드러운 금빛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이미 씨방이 닫혀버린 벽오동 열매 사이로

말벌 몇 마리가 찾아들곤 하는 것도

그 금빛에 이끌려서일 것이다

그러나 저 눈 어두운 말벌들은 모르리라

캄캄한 씨방 속에 갇힌 꿈들이 어떻게 단단해지는가를

내 어금니에 물린 검은 씨가 어떻게 완고해지는가를







- 詩 : 나희덕 2001 미당문학상 수상작품집 中에서




(...) 속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을 발견해내는 시인들...




엿보기의 즐거움은 시 읽는 또 다른 재미인지도 모릅니다





ojinny 드림





--------------------- [원본 메세지] ---------------------

재로 지어진 옷




흰나비가 소매도 걷지 않고

봄비를 건너간다

비를 맞으며 맞지 않으며




그 고요한 날갯짓 속에는

보이지 않는 격렬함이 깃들어 있어

날개를 둘러싼 고운 가루가

천 배나 무거운 빗방울을 튕겨내고 있는 것이다

모든 날개는 몸을 태우고 남은 재이니




제 마음 몇 배의 돌덩이를 굴려 올리면서도

걸음이 가볍고 가벼운 저 사람

슬픔을 물리치는 힘 고요해

봄비 건너는 나비처럼 고요해




비를 건너가면서 마른 발자국을 남기는

그는 남몰래 가졌을까

옷 한 벌,흰 재로 지어진




詩.나희덕


시집<여우구슬을 물고 도망치는 아이들>.작가.2002




*"보이지 않는 격렬함"을 가진
날개 하나 달고 싶은 ....
빗방울들 길 위에 내려앉는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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