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묵한 책방
-정서영
재개발 현수막 아래 버려진 화분
봉숭아꽃 피었다 지고, 헌책방이 피었어요
아무도 드나들지 않아 푸석해진 문
헌책 주렁주렁 진열해놓고
주인은 어디로 갔나요
오래 펼쳐보지 않아 떡잎이 된 표지
날 좀 건드려 주세요 톡톡
노크 소리에 화들짝 열리는 문
와르르 쏟아지는 말, 말의 씨앗들
자음과 모음 참았던 수다가 두서없이 굴러 나와요
세상이 바뀌어도 묵묵히 버티는 기둥
할 말은 많지만 누군가 읽어주지 않으면
꽃과 씨방이 무슨 소용 있겠어요
이미 시의 방은 벽 쪽으로 밀려난 지 오래
남의 울타리 밑에서도 당신 손톱 밑에서도
내 색깔을 지켜왔어요
가까스로 보듬어 온 구전과 고서들
어린 왕자가 시들지 않도록
백과사전이 폐지가 되지 않도록
날 수시로 건드려 주세요
두드릴수록 범종이 되어가는 말씀
나는 한 점 씨앗도 흘리지 않으려고
쉼표 없이 문장을 이어받아 적었어요
톡톡톡 과묵을 터트렸어요
시집 『바닥에 바닥이 되어』 2026. 글로우문 시선
정서영 시인
충남 금산에서 태어나 시인 정지용의 고향, 옥천에서 살고 있다. 2015년 「시에티카」 신인상으로 등단했다. 시에
문학회, 문정문학회, 한빛문학회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시집 『바닥에 바닥이 되어』 2026. 글로우문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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