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09년 미륵사탑 사리장엄구 발견!~
2009년 1월 14일.
미륵사탑 해체 조사 현장 - 전북 익산시 금마면
시간은 흐르지 않았다.
1,400년이라는 시간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막 잠에서 깨어난 백제는 흐트러짐 없이 단아했다.
"하나 말씀드릴 게 있는데 사진을 빨리빨리 찍어야 해요. 마냥 노출할 수가 없으니까"
백제인은 여기에 그들이 바칠 수 있는 최고의 정성을 담았다.
600여 개의 유물에 제각기 이야기가 있었다.
무령왕릉과 백제금동대향로에 비교되는
백제사 고고학 최고의 성과 미륵사사리장엄은
639년, 기울어져가는 백제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무왕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2009년 1월 19일 언론 공개.
사람들이 흥분해 있었다.
전국에 언론사 취재진들이 삽시간에 익산으로 모여들었다.
각개 인사들을 불러들인 것은 이 작은 구멍 하나.
취재진을 대상으로 하는 공개였지만 학계는 물론 일반 시민들까지 300여 명 모여들었다.
아무도 예상치 못했던 갑작스런 발견이었다.
미륵사 사리장엄은 이렇듯 예고없이 우리 앞에 나타났다.
한상권 아나운서.
"이곳은 금제 사리장엄이 발견된 백제 미륵사지석탑 해체 복원 현장입니다.
발견과 동시에 미륵사탑 사리장엄은 각종 매체에 헤드라인을 장식하며 뜨거운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데요,
어쩌면 역사를 다시 써야 할 결정적인 증거를 확보했기 때문입니다.
한 면이 30센치미터도 채 되지않는 이 작은 사리공으로 인해서 어떻게 역사가 뒤바뀔 수 있을까요?
무왕과 선화공주!
백제와 신라는 우리가 알던 그들이 아니었던 걸까요?
그들의 사랑이야기는 가공된 거짓이었을까요?
무왕은 선화공주를 버렸던 걸까요?
1,400년만에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백제의 비밀은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2009년 1월 14일 오후 4시 미륵사탑 해체조사 현장.
언론 공개 5일전 오후 4시,
7년간의 해체 과정 끝에 마침내 심주석 1층이 드러났다.
탑의 중심돌인 심주석 한가운데서 가로 세로 25센치미터의 숨은 공간이 나타났고,
14세기전 유물이라 하기엔 너무나 완벽한 보존 상태,
살아있는 백제가 21세기의 후손들과 대면하는 순간이었다.
"처음 봤을 때는 대단하구나, 하여튼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정도로 놀랐습니다."
- 배병선, 국립문화재연구소 건축문화재연구실장
"처음 뚜껑이 열렸을 때 사리구와 사리봉안기가 그 빛이 번쩍하는 느낌으로 다가왔습니다.
'와!~이게 무엇인가!~' 하면서 대단한 것이 소장되었구나 했습니다."
- 이귀영, 국립문화재연구소 미술문화재연구실장
"제일 놀란 것은 유물이 너무 생생해서 '이게 과연 미륵사지 건립 당시에 봉안했던 것인가?' 했습니다."
- 이규식,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존과학연구실장
1월 14일 오후 6시.
1, 2층의 심주석이 분리된 지 두 시간 뒤
유물수습전문가 30여 명이 미륵사지로 급히 모였고
그 즉시 긴급 수습에 나섰다.
3D 스캔 작업.
먼저 유물의 맨앞 순서와 특징 등을 파악하는 유물의 현장조사가 있었다.
3D 스캔으로 각 유물의 위치를 입체적으로 기록할 수 있다.
수습팀은 유물을 하나씩 꺼낼 때마다 사리공 내부를 3D 스캔하기로 했다.
1월 15일 새벽 4시.
그리고 열 시간 뒤인 새벽 4시, 유물끼리 붙어버리진 않았는지 마지막 확인을 한 뒤
금제사리구와 사리봉안기를 하나씩 조심스레 꺼내기 시작했다.
보존 상태도 훌륭했다.
그런데 꼼꼼히 도면을 작성하다가 뭔가 달라진 점을 발견했다.
"아까 상태와 달라요. 벌어져요 계속."
"아까보다 더 벌어진 거 같지 않아요?"
차고 건조한 환경에 노출된 섬유와 가죽 재질의 유물이 변성된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발굴 당시 제일 먼저 우려되는 유물이 섬유하고 목재류였습니다.
이런 유물들은 섬유질인데요, 외부환경의 습기를 호흡을 합니다.
차고 습한 환경에 노출되면서 형태가 변할 위험성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유물수습과정을 한번에 진행하면서 수습했습니다."
- 이규식
2. 미륵사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
왕후는 사택적덕의 딸!~
흔들리는 서동(무왕)과 선화공주의 사랑!~
사리공에서 유물 수습이 이루어지는 동시에,
다른 한쪽에선 사리함의 뚜껑을 열었다.
높이 13센치미터의 작은 사리병.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을까?
"단지 같은 거 하나 보여요."
"금빛나는..."
사리구의 몸체는 둘로 나눠 있다.
그런데 분리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못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 엑스레이 촬영을 했다.
그 결과 사리호 안에는 또 하나의 작은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미륵사를 세운 무왕의 조부 위덕왕이 세운 왕흥사.
이곳에서도 지난 2007년 사리함이 수습되었다.
"이것이 목탑을 올렸던 받침돌이 됩니다.
이 안에 있었습니다. 뚜껑이 있었습니다."
미륵사와 달리 왕흥사에서는 지하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청동사리함 안에는 은제사리병이,
그리고 은제사리병 안에는 다시 금제사리병이 들어있었다.
<왕흥사 사리함 - 청동사리함, 은제사리병, 금제사리병>
순도 99%, 4.6센치미터의 이 작은 황금사리병은
미륵사지 사리호와 비슷한 크기의 청동사리함 안에 모셔져 있었다.
미륵사 사리호에도 왕흥사 사리병과 비슷한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사리병을 품은 금제사리호와
사리호를 모시게 된 이유를 적은 금제사리봉안기,
그리고 은제합을 비롯한 600여 가지의 유물들이 일시에 쏟아져 나온 것이다.
"미륵사지석탑에서 사리장엄이 전체 600점이 넘는 다양한 유물들이 수습되었습니다.
우선 금속세공품의 세련되고, 우수한 가공기술은 국보급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 김봉건 소장, 국립문화재연구소
이런 국보급 유물들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한 행운이었다.
"아마 일제시대에 심주석 부근에 사리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을 하고
일본인들이 이쪽을 파내서 사리장엄을 살펴보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판석은 앞뒤가 바뀌어 있고, 이 판석은 중앙이 이렇게 잘려져 있습니다.
심초석 밑에 사리장엄이 묻혀 있을까 도굴한 흔적들이죠.
일본인들도 이 심주석의 중간에 사리장엄이 모셔져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여기에 쇠 지렛대를 넣어 개봉해서 보았겠죠."
-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
미륵사지 석탑(국보 제 11호).
미륵사지 사리장엄이 도굴되지 않은 이유는 지하가 아닌 지상에 모셔진 때문이었다.
때문에 2002년에 해체 조사를 시작하며 이렇게 빨리 사리장엄이 발견되리라고는 누구도 예측치 못했다.
미륵사 사리장엄은 1,400년의 가호로 우리 곁에 찾아올 수 있었다.
"미륵사지석탑의 사리장엄은 아마도 발견을 원치 않았던 듯 밀봉이 되어 있었습니다.
백제인들은 심주석 사방에 회를 발라놓았던 것입니다.
이 1,400년 전에 발라놓은 회를 직접 만져보니 백제인들의 피부가 직접 만져지는 느낌입니다.
이렇게 생생한 흔적은 또 있습니다.
심주석 한가운데 십자로 그어진 줄들이 보이시죠?
바로 먹줄인데, 탑의 중심을 잡기 위한 방법입니다.
그런데 귀하게 모신 유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금제사리호와 금제사리봉안기입니다.
어떻습니까? 보시는 것처럼 대단히 정교하고 우아하죠.
사리호의 경우에는 그 내부가 공개된 적이 없구요,
사리봉안기는 최근에 그 해석을 모두 마쳤습니다.
193자,
사리봉안기의 명문을 통해서
우리는 백제사를 입체적으로 들여다보는 뜻밖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먼저 사리봉안기를 좀더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수습에 들어간 지 열다섯 시간이 지난 15일 새벽녘.
사리호에 이어서 사리봉안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금판은 크기가 1센치미터도 되지않는 글자로 빼곡했다.
갓 수습된 금제사리봉안기.
먼저 보존처리과정부터 거쳐야 했다.
유물이 노출되자마자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석탑 주변에 임시보존실이 차려졌다.
가장 시급한 것은 표면에 가루가 떨어져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한 강화처리다.
일종의 아크릴계 수지를 바르니 글씨가 선명해진다.
1차 보존처리된 사리봉안기의 맨얼굴,
손바닥만한 사리봉안기 앞뒤면에 193자가 씌여져 있다.
사리봉안기를 해석한 김상현 교수(동국대 사학과)의 연구실을 찾았다.
사리봉안기의 내용은,
부처님의 덕을 칭송하며
백제 왕후가 미륵사를 짓고
백제 대왕과 왕후의 복을 기원한다는 뜻이다.
기록은 구체적이다.
왕후가 좌평 사택적덕씨의 딸이라고 밝히고 있다.
좌평은 오늘날의 총리격,
사택씨는 사비시대 백제 유력한 귀족 가문이다.
또한 사비시대 미륵사 건립 연도도 확인되었다.
'기해년 639년 백제 무왕 40년'
사리를 봉안한 날짜는 무왕 40년, 639년 1월 29일이다.
사리봉안기의 내용은 <삼국유사>의 미륵사 창건 기록과 상당 부분 일치한다.
무왕의 왕비가 부처님을 공경해 절을 세우게 되었다는 내용이 그렇다.
"무왕과 부인이 용화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이 나타나므로 경의를 표한 뒤
부인이 왕에게 절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
금당과 탑을 각각 세 곳에 세우고 미륵사라 하였다."
또한 발굴 결과 미륵사의 구조도 기록과 일치했다.
미륵사는
세 개의 탑과 세 개의 금당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보통 한 개의 탑과 한 개의 금당이 있는
'1탑 1금당' 양식이 백제의 사찰이다.
그런데 무왕의 아내를 선화공주가 아닌 사택적덕의 딸로 적고 있는 것이 문제다.
이제까지 무왕의 아내는 신라 진평왕의 딸인 선화공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이 기록만 놓고 보면 선화공주를 설명하기 대단히 어렵지요.
물론 선화공주는 무왕의 훨씬 젊은 날에 만났을 수 있고,
또 왕후가 한 명이 아닐 수도 있겠지요.
그럼에도 이 절의 창건되고,
이 사리가 모셔지는 과정에는 선화공주의 존재가 보이지 않지요."
- 김상현 교수, 동국대 사학과
세기의 사랑.
서동왕자와 선화공주의 사랑은 미륵사 사리장엄구 발견으로 위험에 처했다.
미륵사의 유물은 백제사의 열쇠인 동시에 백제사의 미궁이다.
3. 미륵사 사리호의 화려한 연화문, 당초문, 어란문!~
새로 쓰는 백제사!~
왕궁리석탑의 사리함은 통일신라 아닌 백제 제석사탑 사리공!~
"이 석탑은 미륵사지석탑을 실제 규모로 재현해놓은 모형탑입니다.
높이가 무려 20미터, 아파트 7층 높이의 규모입니다.
참 대단하지요.
그런데 백제인들은 왜 이렇게 심혈을 기울여 탑을 건립한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리 때문이었습니다.
'사리'는 산스크리트 어를 한자로 옮긴 말인데
부처님의 몸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리탑은 부처님을 모신 무덤을 상징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니까 불교국가 백제에서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탑을 건립하는데 정성을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지는 사리장엄에는
당시의 최고의 기술과 최고의 재료들이 총동원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륵사의 금제사리호도 우리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합니다."
사리장엄구의 핵심인 금제사리호.
심주석을 드러내자마자 사리호의 정교한 문양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월로 인한 손상은 약간의 푸른 녹이 전부였다.
높이 13센치미터.
어깨폭 7.7센치미터.
백제인은 이 조그만 사리호에 백제를 꼼꼼히 그려놓았다.
뚜껑에서부터 내려와 어깨를 감싸는 둥근 몸체의 화려한 문양은 전형적인 백제의 그것이다.
특히 연꽃을 본뜬 연화문은
백제 수도 부소산성 출토된 금동 광배와 거의 흡사하다.
연꽃잎과 함께 사리호를 감싸는 것은 생동감이 강한 인동당초무늬,
이집트, 로마 일대에서 실크로드를 지나고, 중국을 거쳐서 들어온 문양이다.
동굴을 형상화한 인동당초 아래로는 연꽃이 활짝 핀 모습인 '연화당초문'이 수놓아져 있다.
그리고 그 틈새를 물고기알 모양의 연주문(어란문)이 새겨져 있다.
"여백을 연주문을 빼곡히 넣어서 장식하는 방법들은
주로 통일신라시대에 유행한 방법이기에,
통일신라 이전에
백제에서 사용했다는 것을 알게 된 것 자체가
대단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무늬를 백제에서 일찍 수용해서 활용했다는 것은
당시 백제가 국제적인 예술양식을 빨리 받아들였고
나아가 그것을 확대재생산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 이귀영 미술문화재연구실장
그런데 사리호의 화려한 무늬는 왕궁리5층석탑의 미스테리를 푸는 열쇠가 된다.
통일신라시대 유물인 금동여래입상.
왕궁리5층석탑의 해체복원과정에서 사리장엄과 함께 수습되었다.
왕궁리5층석탑 해체 조사(1965년)
왕궁리5층석탑에 대한 조사는 벌써 40여 년째.
1965년 심초석에서 사리공이 발견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층 지붕돌에선 또 다른 사리장엄이 나왔는데
당연히 통일신라의 유물로 생각됐다.
은을 종이처럼 펴서 금도금을 하고 불경을 새긴 19매의 금강반야금판이 들어있었고
사리내함 안엔 녹색의 영롱한 사리병이 들어있었다.
높이 7.7센치미터의 작은 사리병.
쌀알만한 뚜껑은 정교하기가 이를 데 없다.
통일신라것으로 알려진 왕궁리5층석탑의 사리장엄.
그러나 그 선명해보였던 역사적 사실은 미륵사 사리호의 무늬로 인해 단번에 뒤집어졌다.
미륵사 금제사리호의 어깨에 새겨진 연꽃무늬는
왕궁리 유리사리내함에 새겨진 무늬와 너무도 흡사하다.
왕궁리5층석탑 사리내함에도 같은 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는 639년 당시 백제의 문양이었던 것이다.
마치 같은 사람이 새겨놓은 듯 미륵사 사리호와 왕궁리 사리함의 문양은 닮아있다.
여백을 연주문으로 빽빽히 채워놓은 양식도 마찬가지였다.
"기존의 어란문의 출현이 일부 백제에서 나타나긴 했지만
본격적으로 나타난 건 통일신라시대 이후라고 봤었거든요.
이번에 미륵사지 사리기가 출토되면서
왕궁리 사리기도 백제시대 제작한 것으로 볼 수 있다는 게 확인이 되었습니다."
- 한정호, 동국대 경주캠퍼스박물관 전임연구원
4. 미륵사와 제석사, 그리고 왕궁리5층석탑!~
그것은 무왕의 꿈, 익산으로의 수도 천도 프로젝트였다!~
그렇다면 왕궁리석탑에선 어떻게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가 혼재되어 있었을까?
왕궁리에서 1.5킬로 떨어진 궁평마을 제석사에 그 답이 있다.
제석사는 미륵사와 마찬가지로 무왕 때 창건한 절이다.
발굴 중에 발견된 목탑의 주춧돌이 눈에 띈다.
그런데 이 목탑 주춧돌의 사리공이 왕궁리 탑의 사리공과 크기가 들어맞는다.
"제석사탑 심초석의 한가운데 장방형 형태의 사리공이 확인되고 있습니다.
이 사리공 같은 경우는
사리공 내부의 깊이, 크기를 볼때,
왕궁리탑에서 확인되는 사리공 두 개가 일정하게 놓여있으면
어느정도 맞아떨어질 것 같이 확인되고 있기 때문에,
왕궁리탑의 사리장엄은
원래 제석사 탑의 심초석에 안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 전용호,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원
제석사탑의 사리공은 왕궁리탑의 사리공 두 개를 합친 것과 넓이와 깊이가 거의 비슷하다.
즉 제석사의 사리장엄이 왕궁리탑으로 옮겨졌다는 이야기다.
무슨 이유로 사리장엄이 옮겨진 것일까?
2003 제석사 폐기장 발굴.
그곳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궁평마을에 제석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것도
이곳에서 발굴된 기와로 확인할 수 있었다.
명문 기와의 양각글자에 '제석사(帝釋寺)'라고 씌여져 있었던 것이다.
유물들은 불에 타 그으른 것이 많았다.
제석사에 큰 화재가 있었던 것일까?
일본 천태종의 좌장인 청련원.
이곳 수장고에 무왕과 제석사, 그리고 왕궁리를 확실히 잇는 단서가 있다.
관세음응험기(觀世音應驗記).
7세기 중국의 불경을 기록한 문헌이다.
그런데 관세음음험기에 제석사가 등장하고 있다.
"정관 13년(무왕 40년)
기해년(639년) 겨울 동짓달
큰 벼락과 비가 내려 제석정사를 불 태웠다."
제석사는 화재로 불탔지만
주춧돌에 수정병과 금강반야경이 불타지 않고 남아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주춧돌에
부처님 사리가 든 수정병과
구리 종이로 만든 금강반야경이 불타지 않고 남아있었다."
그렇다면 제석사의 사리함은 금강경판과 더불어
왕궁리로 옮겨져 5층석탑에 다시 모셔졌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그런데 '관세음응험기'에서 눈에 익은 단어가 보인다.
'기해년(己亥年)',
제석사가 화재로 소실된 그 해 639년에
미륵사에선 탑을 세우고 사리를 봉안한 것이다.
그리고 뒤이은 놀라운 기록.
"백제 무관옹은 지모밀지로 서울을 옮기고 새로이 절집을 꾸렸다."
무왕(무광왕)이 천도를 했다는 것이다.
'지모밀지'는 바로 익산(금마)이다.
무왕 때의 수도는 분명 부여다.
그런데 미륵사와 교토에서 함께 발견된 639년,
그때 익산 왕궁리에선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한편에선 제석사가 불타고
다른 한편에선 백제 최대의 사찰 미륵사가 지어졌다.
모두가 익산땅 5킬로미터 이내 같은 지역에서 일어난 일이다.
이곳 익산지역에 집중적으로 신도시가 들어서고 있었던 것일까?
지난 2005년부터 확인되고 있는 와적기단(기와를 쌓아 만든 기단).
왕궁리에 백제 왕성이 지어지고 있었다는 뜻이다.
"와적기단은 역사적으로 또는 문화적으로 굉장히 큰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면 이 와적기단은 실제로 백제에 있어서도
한성시대에도 없었고, 웅진시대에도 없었던, 건물을 만드는 기술입니다.
이 와적기단은 백제가 사비로 천도하고 난 다음에만 나타나는 기술인데,
따라서 익산 왕궁리 유적에서 이 와적기단이 나타난다는 것은
당연히 이 왕궁리가 조성된 시기가 사비시기라는 것입니다."
- 송의정, 당시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더군다나 기와 중엔 '수부(首府)'기와가 있었다.
'수부(首府)',
수도라는 뜻이다.
2003년 왕궁리에선
왕족과 귀족들이 사용했을 장신구와 백제 공예품을 만들었을 '공방지'도 발굴되었다.
공방지에서 출토된 유리조각들은 왕궁리석탑 사리함과 성분이 같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이곳 공방에서 사리병을 직접 제작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공방지에서 나온 금조각들도 역시 왕궁리탑 금제품과 같은 방법으로 가공된 것으로 확인되었다.
왕궁리와 미륵사에 모셔진 사리장엄.
그것은 무왕의 익산 천도 프로젝트의 증거물이었다.
5. 나주, 남원 등 신라와의 접경지 백제은제관식들,
무왕은 신라와의 승부수를 놓지 않았다!~
"왕궁리에 얽힌 역사적 배경은 백제사에 미스터리로 남겨져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사리호와 사리봉안기를 통해서
사비시대에서부터 내려온 모든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리봉에는 사리호와 봉안기와 더불어 600여 점의 유물이 함께 봉안되어 있었습니다.
은제과대 은제관식, 금제소형판, 금족집게, 원형합 등 무려 683가지의 백제를 직접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제석사와 왕궁리의 역사를 들여다볼 수 있는 은제관식이 있었습니다."
사리호와 봉안기를 수습한 다음에도
사리봉에는 백제인들이 보시한 수백 점의 유물들이 남아있었다.
그 중 은제관식 두 점.
은판을 두 겹으로 접어 꽃봉우리와 잎받침을 오려냈다.
은제관식은 백제 영역 곳곳에서 발견되는 백제 고유의 유물이다.
은제관식은 6품 이상의 고위관리들이 관 앞쪽에 꽂던 관제장식품이었다.
관직이 높을수록 꽃봉우리와 잎받침이 화려하다.
전남 나주시 다시면 복암리.
복암리고분은
마한에서 백제후기까지 이르는
4백년간 계속해서 조성되었다.
이곳 유력자의 무덤을 층층히 덧대어 만들어 흔히 '아파트형 고분'으로 불린다.
각각의 고분에서는 시대별 다른 유물이 수습되었다.
백제후기에 조성된 석실고분에서는 은제관식이 출토되었다.
백제관리가 쓰던 은제관식이 출토되었다는 것은 이 지역을 백제관리가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은제관식은 백제 신분질서, 백제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포함되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은제관식을 소유했다는 것은 백제의 직접 통치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 김낙중, 부여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실장
성왕 때 옛 영토를 회복하면서 부활하는 듯 했던 백제.
그러나 신라의 배신과 성왕의 전사로 백제는 다시 한강을 잃고 위축되었다.
무왕은 신라에게 당한 굴욕을 갚아야 했다.
복수를 해야 했다.
무왕은 집요하리만큼 신라를 공격했다.
모두 열두 번이었다.
전남 남원시 운봉읍.
이곳 백두대간의 줄기는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었다.
"무왕 17년 10월 달솔 백기에 명하여
군사 8,000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모산성(운봉)을 쳤다."
신라는 백제의 기세에 대항해서 곳곳에 산성을 쌓았다.
머리띠모양의 테머리산성을 산봉우리마다 둘러쌓았다.
장교리 산성.
"이와 흡수한 성이 저기 보이는 산봉우리에 중양리산성이 있고, 그 다음에 수정산성이 있구요,
그 다음에 저 건너편에 노치산성이 있고, 이와 반대편 저쪽에는 가산리 가산산성이 있구요,
이 산성들을 경계점으로 해서 신라와 백제가 국경분쟁을 많이 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 노상준 전 남원문화원장
남원시 이백면 초촌리.
1978년 발굴, 신라와 백제 국경 바로 아랫마을에 백제의 스러진 고분이 있다.
"이 고분이 백제의 석실고분입니다.
이 부분이 연도(고분 입구)고, 이 안에 횡렬식으로 해서 석실고분이 만들어졌어요."
지금은 봉분도 다 깍여나간 고분.
역시 백제후기의 석실고분이다.
이곳에서도 토기와 함께 백제은제관식이 출토되었다.
신라를 공격하는 백제의 최전방 남원에 백제의 관리가 묻혀있는 것이다.
"백제의 지방,
나주, 남원, 논산 지역에서 백제은제관식이 나왔다는 것은
무왕 대에 좀더 지방 지배를 강화하는 정책,
그리고 신라와 전쟁을 하면서 영역을 확장하는 노력을 볼 수 있으며,
그런 정치적 상황을 설명하는 실마리가 될 수 있다고 보여집니다."
- 이한상 교수,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남원 초촌리의 은제관식은 백제의 영토확장과 무왕의 복수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6. 스러져 가는 백제!~
그러나 백제인들은 미륵사에 백제 부활의 꿈을 담았다!~
그런데 이런 은제관식이 왜 미륵사탑 사리공에 들어있었던 것일까?
미륵사은제관식의 뒷부분을 보면
부러진 부분을 못으로 이어붙인 흔적이 보인다.
무왕의 미륵사 사리봉안식에 함께 있었던 백제 관리들이
자기몸에 있었던 관식을 뽑아 시주했던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은제관식 같은 경우 끝이 부러진 것을 못으로 고정한 이런 것들이 나왔는데
또는 과대라고 해서 허리띠의 장식한 것이 나왔구요,
이런 몇몇가지 유물들은 당시에 그 자리에서 몸에서 떼어서 봉안했던 것이 아니었나 그렇게 추측합니다."
- 배병선 건축문화재연구실장
"백제 부흥이라는 절대절명의 과업 앞에 무왕은 미륵사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수십 명의 관리들도 그와 뜻을 함께 했지요.
그들은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 사리공에 보시를 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장엄하고도 복잡한 행사과정을 기다려서 그 자리에서 자신의 몸에 지녔던 일부를 떼어 보시를 했겠지요.
그들이 받친 사리공양은 그야말로 최고 중에 최고였습니다.
쓰러져가는 백제, 그 기로에선 애타는 염원이었습니다."
백제의 사찰을 짓고 보시를 한 백제인의 정성.
683개의 공양품, 그 중엔 화폐로 여겨지는 금제소형판도 있었다.
"중부에 사는 덕솔(4품 관리) 지율이 금 일만을 보시한다."
"하부에 사는 비치부는 그 부모처자가 같이 보시한다."
호박, 유리구슬이 500여 개,
은제합이 다섯 개와 동제합 한 개,
1,400년이 흐르면서 은제합과 구슬은 하나로 붙어버렸다.
금쪽집개와 각종 허리띠 장식도 나왔다.
하나같이 고급품이고, 현장에 있던 귀족들이 몸에 지닌 것들이었다.
"사리를 봉안하는 의식 자체가 불교사에서 중요한 의식이고,
그런 의식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왕족들이 많았을 것이고,
그런 국가적인 의식에 참가한 사람들은 뭔가 성의를 표시하는 모습들을 보이고 있습니다.
국가적 행사에 왕족이나 귀족들이 앞 다투어 귀중한 물건들을 부처님께 공양했다,
이렇게 보이고 있습니다."
- 이한상 교수
무왕의 백제부흥의지에 수많은 백제인들이 동참했다.
그들은 그 의지를 미륵사 사리장엄에 담았다.
639년,
백제 멸망 21년전,
백제의 꿈은 단순했다.
익산은 무왕의 마지막 승부수였고
그 정점에 미륵사가 있었다.
미륵사 사리장엄은
무왕의 이루지 못한 염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유물은 과거와의 대면이자, 역사의 미스터리를 풀어줄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당시의 이야기를 바로 여기서 직접 들여주는 것이죠.
무령왕릉 발굴과 능산리 백제금동대향로 조사 이래 백제 최고의 발굴 성과 미륵사지 사리장엄.
살아있는 역사 미륵사지 유물들은 639년 백제 무왕의 꿈을 섬세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
- 한상권의 역사추적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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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0.10.01 익산 미륵사는 일명 왕흥사이며 백제 법왕2년(A.D.600년)에 창건하여 무왕35년(A.D.634년)에 낙성되었습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화공주가 지었다고 알려져 있고, 사리봉함기에는 639년에 사리를 봉함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사리봉안기에는 좌평 사택덕적의 딸이라는 명문인데, 글쎄 알쏭달쏭하니다.
흘해이사금때 세운 김제 벽골제와 익산 미륵사의 위치가 서로 가까우니 비록 왕흥사(미륵사)를 백제가 세웠다하더라도 신라의 땅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을 듯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