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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신라)

Re:소문국(召文國) 관련 기사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09.11.21|조회수158 목록 댓글 0


소문국(召文國) 관련 기사


① 후한서 예(濊)의 기사 발췌


其後四十餘世 至朝鮮侯準 自稱王 漢初大亂 燕齊趙人往避地者數萬口 而燕人衛滿擊破準 而自王朝鮮 傳國至孫右渠 元朔元年 武帝年也 濊君南閭等 畔右渠 率二十八萬口 詣遼東 內屬 武帝以其地爲蒼海郡 數年乃罷

그 후 40여세(世)가 흘러, 조선후(朝鮮侯) 준(準)에 이르자 왕이라 자칭(自稱)하였다. 한초(漢初, 秦나라의 말년으로 삼국지 위서동이전의 秦韓과 같은 시기)에 큰 난이 있어 연(燕)․제(齊)․조(趙)나라 사람들이 난을 피하여 그 땅으로 간 자가 수만 명이었다. 연나라 사람 위만(衛滿)이 준(準)을 격파하고 스스로 조선(朝鮮)왕이 되었다. 나라를 전하여 손자 우거(右渠)에 이르렀다. 원삭(元朔) 원년(B.C.128), 한(漢) 무제(武帝)때 예군(濊君) 남려(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여,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러 내속(內屬, 한나라가 다른 나라의 속국으로 복종함)하였다. 한 무제가 그 땅을 창해군(蒼海郡)이라 하였다. 수년 후 그만 두었다.


≪견해≫ 후한서의 예(濊)의 기사를 소문국 예왕(穢王)과 비교해보면, 예왕(穢王)이 예군 남려로 추정된다. 한 무제 원삭(元朔) 원년(B.C.128)에 예군(濊君) 남려(南閭)등이 우거를 배반하고, 28만 명을 거느리고 요동에 이르러 내속(內屬)하고자 하였을 때는 마땅히 안전과 생계를 책임지겠다는 약속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 무제는 자신의 영토를 나누어 그들을 편안히 살게 할 방법을 마련해 준 것이 아니라 남려가 있었던 지역을 창해군(蒼海郡)으로 삼아 자신의 영토로 개척하고자 하였다.


한 무제의 입장에서는 예군 남려 등은 자신들을 배반하고 도망간 백성들의 무리이므로 죄를 묻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며 논공행상과 사면령이 미루어지자, 망명인들은 한(漢)나라를 의심하게 되었으며 위만 조선의 설득이 이어지자 위만조선으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이들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② 한서(漢書) 조선전(朝鮮傳) 발췌


傳子至孫右渠 〈師古曰 滿死傳子 子死傳孫 右渠者 其孫名也〉 所誘漢亡人滋〈師古曰 滋 益也〉多 又未嘗入見〈師古曰 不朝見天子也〉 眞番辰國欲上書見天子 又雍閼弗通〈師古曰 辰謂辰韓之國也 雍讀曰壅〉 元封二年 漢使涉何 譙諭右渠 終不肯奉詔〈師古曰 譙 責讓也 音才笑反〉 何去至界 臨浿水 使馭刺殺送何 者朝鮮裨王長 〈師古曰 長者 裨王名也 送何至浿水 何因刺殺之〉 卽渡水 馳入塞 遂歸報天子 曰 “殺朝鮮將” 上爲其名美 弗詰 拜何爲遼東東部都尉 朝鮮怨何 發兵攻襲 殺何

아들에게 전하여 다시 손자 우거(右渠)〈사고(師古)는 ‘위만이 죽어 아들에게 전하고, 다시 아들이 죽어 손자에 전하였다. 우거는 위만의 손자 이름이다.’라고 하였다〉에게 이르렀다. 한나라에서 도망 온 자를 꾀여냄이 점점 더하여 많아졌다. 〈사고는 ‘滋(더하다, 보태다)는 益(더하다)의 뜻이다’라고 하였다.〉 또 일찍이 입견(入見, 입조하여 찾아뵙다)하지 않았다.〈사고는 ‘천자의 조회에 찾아와 뵙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진번(眞番)과 진국(辰國)이 글을 올려 천자(天子)를 뵙고자 하였으나, 또 가로막아 통하지 못하였다.〈사고는 ‘辰은 辰韓의 나라이다. 옹(雍)은 옹(壅)으로 읽는다.’라고 하였다.〉 원봉 2년(B.C. 109년)에 한(漢)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우거를 꾸짖고 깨닫게 하려고 했으나, 끝내 조서를 듣지 않았다.〈사고는 ‘초(譙)는 꾸짖다, 사양하다는 뜻이다. 才笑를 거꾸로 발음한다.’라고 하였다.〉 (섭)하는 돌아가 국경에 이르러 패수(浿水)에 다다랐다. 마부에게 시키어 (섭)하를 배웅 나온 자를 찌르도록 하였는데, 그는 조선(朝鮮)의 비왕(裨王) 장(長)이라는 자였다. 〈사고는 ‘장(長)은 비왕의 이름이다. (섭)하를 보내려고 패수에 이르렀는데, (섭)하는 그런 이유로 장(長)을 찔러 죽였다.’라고 하였다.〉 곧 강을 건너 말을 타고 요새로 들어왔다. 돌아와 천자에게 보고하여 말하기를 “조선 장수를 죽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은 그의 공적을 아름답다 하여, 꾸짖지 않고 (섭)하에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 벼슬을 내렸다. 조선은 (섭)하를 원망하여 군사를 일으켜 습격하여 (섭)하를 죽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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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삼국지 위서동이전 진한(辰韓) 기사 발췌


辰韓在馬韓之東 其耆老傳世 自言古之亡人避秦役 〈范書作 自言秦之亡人避苦役〉 來適韓國 馬韓割其東界地與之 有城柵 其言語不與馬韓同 名國爲邦 弓爲弧 賊爲寇 行酒爲行觴 相呼皆爲徒 有似秦人 非但燕齊之名物也 名樂浪人爲阿殘 東方人名我爲阿 〈錢大昭曰 後人名我爲俺 俺卽阿也 聲之轉耳〉 謂樂浪人本其殘餘人 今有名之 秦韓者 局本 無爲字 誤〉 始有六國 稍分爲十二國 范書 辰韓在東 十有二國 其北與濊狛接〉

진한(辰韓)은 마한(馬韓)의 동쪽에 있다. 그곳의 늙은 노인들이 세세도록 전하는 말로 스스로 말하기를 옛날 망한 나라의 사람이 진(秦)의 싸움을 피하여 〈범서(范書, 후한서)는 스스로 말하기를 진나라의 망명인들이 고역(苦役)을 피하여 왔다고 한다.〉 한국(韓國)으로 즐겁게 왔는데, 마한이 그 동쪽 땅을 나누어 함께 살게 해 주었다고 하였다. 성책이 있고, 언어는 마한과 같지 않았다. 국(國, 나라)을 방(邦, 나라)이라 하고 궁(弓, )을 호(弧, )라 하고, 적(賊, 도둑)을 구(寇, 도둑)라 하고, 행주(行酒, 술을 마시다)를 행상(行觴, 술을 마시다)이라 부른다. 서로 함께 부르기를(相呼皆) 무리(徒)라 한다. 진(秦)나라 사람의 말과 같음이 있으니, 단지 연(燕)과 제(齊)의 사물의 명칭뿐이 아니다. 낙랑(樂浪)사람을 아잔(阿殘)이라 하고, 동쪽 사람은 아(我)를 아(阿, 또는 옥)라 부른다. 〈전대소(錢大昭)는 훗날 사람들이 아(我, 우리)는 엄(俺, 우리)이라 하였다. 엄(俺)이 곧 아(阿)다. 소리가 바뀌었을 뿐이다.〉낙랑(樂浪)사람을 설명하기를 본래의 땅에 남겨진 사람이라고 하였다. 지금도 낙랑(樂浪)이라고 부른다. 〈국(局) 본(本, 판본)에는 위(爲) 자(字)가 없으나 잘못이다〉 진한(秦韓)은 처음에 6나라가 있었는데, 점점 나누어져 12나라가 되었다. 〈범서(范書, 후한서)에는 진한(辰韓)은 동쪽에 있으며 12국이 있는데, 그 북쪽은 예맥(濊狛)과 접(接)하여 있다고 한다.〉


④ 삼국지 위서동이전 예(濊) 기사 발췌


正始六年 樂浪太守劉茂 帶方太守弓遵 以領東濊屬句麗 興師伐之 不耐侯等 擧邑降 其八年 詣闕朝貢 詔更拜不耐濊王 居處雜在民間 四時詣郡朝謁 二郡有軍征賦調供給役使 遇之如民

정시 6년(A.D.245) 낙랑(樂浪)태수 유무(劉茂), 대방(帶方)태수 궁준(弓遵)이 동예(東濊)가 구려(句麗)에 속하여 다스려지자, 병사(師, 군대)를 일으켜 고구려를 쳤다. (領을 岺의 뜻으로 보아 領東濊를 지명으로 볼 수 있다. 領東濊는 낙랑군 동부도위를 말하는 것으로 신라북쪽의 동예와는 별개의 지역으로 보임) 불내후(不耐侯)등이 읍(邑)을 바치고 항복하였다. 정시 8년(A.D.247) 대궐에 이르러 조공을 바치니, 조서를 내려 다시 불내예왕(不耐濊王) 벼슬을 내렸다. (예왕은) 민간인들과 섞여 살면서 사시(四時, 계절마다)로 군(郡)에 이르러 조알(朝謁, 임금을 찾아 뵘)했다. 두 군은 군사의 일(征, 온갖 세금)이나, 세금을 거두는 일, 사역(使役, 남을 부려 일을 시킴)을 공급(供給)함에 일반 백성과 똑같이 대우(예우)했다.


≪견해≫ 1.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정시 6년(A.D.245)의 기사를 정시 7년(A.D.246)의 기사로 본다.


         2. 신라의 북부의 동예(東濊)는 소문국으로 불내예(不耐濊)와 동족(同族)이나 지리적인 차이가 있는 듯 하다.


⑤ 삼국지 위서동이전 마한(馬韓) 기사


景初中 明帝密遣 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 越海定二郡 諸韓國臣智 加賜邑君印綬 其次與邑長 其俗好衣幘 下戶詣郡朝謁 皆假衣幘 自服印綬衣幘千有餘人 部從事吳林 以樂浪本統韓國 分割辰韓八國 以與樂浪 吏譯轉有異同 臣智激韓〈宋本에는 臣幘沾韓으로, 三國志 韓傳에는 臣濆沽國으로 되어 있으니 幘과 濆 중 어느 하나가 誤記인 듯 하다.〉忿 攻帶方郡崎離營 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 興兵伐之 遵戰死 二郡遂滅韓

경초(景初) 중(A.D.237~239)에 위 명제(明帝, 조예)가 몰래 대방(帶方)태수 유흔(劉昕)과 낙랑(樂浪)태수 선우사(鮮于嗣)를 은밀히 보내어, 바다를 건너 (대방과 낙랑의) 두 군(郡)의 경계를 정(定)하도록 하여,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에게는 읍군(邑君)의 인수(印綬)를 더해 주고, 그 다음 사람에게는 읍장(邑長)의 벼슬을 주었다. 그들의 풍속은 의책(衣幘, 옷과 머리싸개)을 입기를 좋아하여, 하호(下戶)들도 (낙랑이나 대방)군에 가서 조알(朝謁)하며 모두 거짓으로 의책(衣幘)을 입었다. 스스로 인수(印綬)를 차고 의책(衣幘)을 착용하는 사람이 천여 명이나 되었다.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은 낙랑은 본래 한국(韓國)을 거느렸으므로, 진한8국(辰韓八國)을 분할하여 낙랑에게 주었다. 그 때 통역하는 관리가 말을 옮기면서 같거나 틀림이 있어, 신지(臣智)가 한인(韓人)들을 격분시켜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국사편찬위원회 : 宋本에는 신책첨한(臣幘沾韓)으로, 三國志 韓傳에는 신분고국(臣濆沽國)으로 되어 있으니 幘과 濆 중 어느 하나가 誤記인 듯 하다.〉 이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군사를 일으켜 이들을 정벌하였는데, 궁준은 전사하였으나 2군(二郡)은 마침내 한(韓, 신분고국을 뜻하는 듯)을 멸(滅)하였다.


≪견해≫ 1. 경초(景初) 중(A.D.237~239)에 위 명제(明帝, 조예)가 대방(帶方)태수 유흔(劉昕)과 낙랑(樂浪)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마한에 몰래 보낸 것은 공손(公孫)씨의 연(燕)나라 멸망(A.D.238) 직전의 상황으로, 당시 연(燕)나라에 내부해 있던 마한(馬韓)을 이간질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마한(馬韓)을 실질적으로 통치하고 있던 백제(百濟)는 연(燕)과 위(魏)의 눈치를 살피며, 가짜를 보내서 위(魏)와 화통한 척하고, 또 연(燕)에게는 내부하지 않았다고 발뺌하려 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공손(公孫)씨의 연(燕)은 망했으나, 백제는 망하지 않은 것이다.


         2. 대방태수 궁준(弓遵, 백제본기 삭방태수 왕준)이 전사한 것은 A.D.246년의 사실이다. 위(魏)나라 유주(幽州)자사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 동천왕을 공격하였을 때 대방태수 궁준(弓遵)과 낙랑태수 유무(劉茂)가 불내예(不耐濊)를 공격하였는데 이 틈을 백제왕이 노린 것이다.


보급로가 끊길 것을 두려워한 관구검(毌丘儉)은 고구려의 도읍인 환도를 함락하였음에도 본진을 회군하였고, 동천왕을 추격하던 왕기(王頎)가 무너졌을 때는 이미 물러나 있던 상태였던 것이다.


⑥ 삼국사기 백제본기 고이왕 13년 8월 기사


十三年 秋 八月 魏幽州刺史毌丘儉 與樂浪太守劉茂 朔方太守王遵 伐高句麗 王乘虛 遣左將眞忠 襲取樂浪邊民 茂聞之怒 王恐見侵討 還其民口

13년(A.D.246) 가을 8월 위(魏)나라 유주(幽州)자사 관구검(毌丘儉)이 낙랑(樂浪)태수 유무(劉茂), 삭방(朔方)태수 왕준(王遵)과 함께 고구려를 공격하자, 왕은 그 틈을 이용하여 좌장 진충(眞忠)으로 하여금 낙랑을 습격하여 변두리 주민들을 잡아왔다. 유무가 이 말을 듣고 분개하였다. 왕이 침공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잡아온 사람들을 돌려보냈다.


≪견해≫ 백제가 위(魏)나라 대방군(帶方郡)을 삭방(朔方)이라 하는 것은 백제가 대방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위(魏)나라는 영토를 실제로는 차지하고 있지 않으면서, 가칭하고 있는 것이다. 삼국지 위서동이전에는 대방군(帶方郡)의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하였다고 하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낙랑이라고 나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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