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內禮太后以祇摩帝女 久在帝位 誓于伐休帝 曰 “非吾子孫 不得立” 玉帽太后 亦以天神正統 遺命于沾解 曰 “唯內禮之孫 而爲吾統者 可以傳國宜爲眞骨正統” 沾解帝許之 時帝妃阿爾兮后 好色多私寵 而帝寵愛之 不禁其慾 末昕諫之 曰 “天后嗣子之出也 不可有私寵” 帝笑 曰 “彼爲眞骨正統 雖非吾子何害乎” 末昕乃知 沾解之無私有天下之意 乃謂述禮 曰 “吾子末仇 亦爲眞骨 可得天下 而今汝子 味鄒有聖德 仙心歸之 吾欲先立 而昌花林 可合神人之心” 述禮曰 “汝言甚合吾意 夢兆必應矣” 先是仇道世神 養疾於長萱之家 夢見金色大鳥 心奇之 時長萱妻述禮 亦夢金色大鳥 而告于長萱 曰 “必生貴子 可以相合” 長萱乃携述禮入寢 戰寒不能成房 乃大悟 曰 “吾有何功 而敢當此夢 此必仇道主公之兆也” 乃命述禮進而薦之 述禮羞慚 不肯自進 長萱乃負述禮 而强之仇道寢 仇道曰 “吾夢大吉 可借汝妻一好” 長萱曰 “天也” 乃推述禮而退 仇道乃抱述禮 向暖日臥 遂成雲雨 而娠 多異祥 自是述禮爲仇道妻 生味鄒尼今 時仇道年已七十五 人多疑 爲長萱子 及長玉貌與仇道無異 玉帽太后寵愛之 曰 “吾父多子女 而無如此兒 花林之興 專在此兒” 命孫光爲仙嗣 敎以玄妙 無不通知 年至十七八 身長而體鴻 少言語重然諾 國人器之 玉帽常置在右 起居依之 曰 “非吾弟 則不便矣” 故助賁帝命爲太后私臣 太后崩多得其珍宝 而富甲于天下 而好施于仙徒貧民 於是人心大歸 沾解阿爾兮后 皆受玉帽遺命尊之 爲師迎入宮中 設眞齋而消災 阿爾兮后深慕之 累託齋沐 而引入秘室 乞受眞身 遂相通氣搝 心約爲夫婦 乃生昭明公主 命述禮養之 而密謂述禮 曰 “此乃味鄒女也 朕欲與味鄒共治天下 母與末昕議定大事可也” 末昕大喜 乃與良夫等上言 “消災生民 莫如捧聖人爲副君” 沾解帝心知 阿后之意 在味鄒 欲許之 助賁仙帝問之 責阿后無信 阿后乃以助賁女光元妻味鄒 曰 “吾非欲爲味鄒妻也 乃配汝女 而傳國也” 助賁知仙心已歸 而竟許爲副君 招阿后於仙宮 曰 “汝乃吾妻也 當與吾居 何與光元爭副君乎” 阿后不得已入仙宮 而娠助賁女光明 曰 “已娠汝子 雖私寵何害” 乃復入天宮 視政事 沾解帝垂手皆決於副君 乃以副君胞兄爲寵相 而備受禪之策 沾解帝知之 遂入海宅 將行禪讓 疾作而崩 副君避不卽位 而阿后强立之 乃登宝祚
처음에 내례(內禮)태후가 지마(祇摩)제의 딸로 오랫동안 제위(帝位)에 있었는데, 벌휴(伐休)제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나의 자손이 아니면 왕을 세울 수 없다.”라고 하였다. 옥모(玉帽)태후 역시 천신정통(天神正統)인 까닭에 첨해(沾解)에게 유명을 남기어 말하기를 “비록 내례의 자손일지라도 나의 핏줄로 나라를 전하여야 마땅히 진골정통(眞骨正統)이라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첨해제가 허락하였다. 당시 첨해(沾解)제의 비(妃) 아이혜(阿爾兮)후가 호색(好色)하여 사적으로 총애를 함이 많음에도, 왕이 총애를 하여 그 욕정을 금하지 아니하였다. 말흔(末昕)이 간(諫)하여 말하기를 “천후(天后, 아이혜)는 사자(嗣子, 대를 잇는 아들)의 출신이니, 사적으로 총애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저 사람도 진골정통이다. 비록 나의 자식이 아니더라고 어찌 해로움이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말흔이 이에 첨해가 천하를 사사로이 계승할 뜻이 없음을 알고, 이에 술례(述禮)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자식 말구(末仇) 역시 진골이므로 가히 천하를 얻을 수 있다. 지금 너의 자식 미추(味鄒)는 성덕(聖德)이 있어 선심(仙心)이 그에게 돌아갔으니, 나는 먼저 미추를 세워 화림(花林)을 창성하게 하면 신인(神人)의 뜻과 합치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술례가 말하기를 “너의 말은 심히 나의 뜻과 부합한다. 꿈의 조짐이 응당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옛날에 구도세신(仇道世神)이 장훤(長萱)의 집에서 병을 치료하고 있었는데, 꿈속에서 금색대조(金色大鳥)를 보고, 마음속으로 기이하다고 생각하였다. 당시 장훤의 처 술례 역시 꿈속에 금색대조를 보고, 장훤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반드시 귀한 아들이 태어날 것이다. 합궁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장훤이 이에 술례를 끌어안고 잠자리에 들었으나, 추위와 싸우느라 방사가 이루어지지 않자 이에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말하기를 “내가 무슨 공적이 있어 감히 이 꿈을 감당하겠는가. 이 꿈은 응당 구도주공(主公)의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술례를 나아가게 하여 천거하였다. 술례는 크게 부끄러워하며 스스로 나아가지 않았다. 장훤이 이에 술례를 업어 구도의 침전으로 강제로 들어왔다. 구도가 말하기를 “나의 꿈이 크게 길하니, 너의 처를 빌림이 하나의 좋은 방법이다.”라고 하였다. 장훤이 말하기를 “하늘의 뜻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술례를 밀어 넣고 물러났다. 구도가 이에 술례를 안고 따뜻한 햇볕이 있는 쪽에 누워 있다가, 드디어 운우(雲雨, 남녀의 육체관계)를 이루어 임신을 하게 되었는데, 기이하고 상서로운 조짐이 많았다. 이 때부터 술례는 구도의 처가 되어 미추니금을 낳았다. 이때 구도의 나이 이미 75세였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장훤의 아들이라고 의심하였는데, 자라면서 옥모(玉貌, 왕의 얼굴)가 구도와 다름이 없었다. 옥모태후가 총애하여 말하기를 “나의 아버지에게는 자식이 많지만 이 아이와 같지 않다. 화림이 흥하는 것은 오로지 이 아이에게 있다.”라고 하였다. 손광(孫光)에게 명하여 선도의 후계자로 삼고, 현묘(玄妙, 이치나 기예의 경지가 헤아릴 수 없이 미묘함)함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십칠팔세에 이르자 알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키가 크고 체격이 컸으나, 말이 적고 말을 조심하고 그런 연후에 승낙하였다. 나라사람들이 그릇이라고 하였다. 옥모태후가 항상 곁에 두고 살면서 의지하여 말하기를 “나의 동생이 아니면 불편하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으로 조분(助賁)제가 태후사신(太后私臣)으로 명하였다. 태후가 죽자 그 진귀한 보물을 많이 얻어 천하의 갑부(富甲, 옛날에는 반대로 쓴 듯함)가 되었고, 선도(仙徒)의 빈민(貧民)에게 잘 베풀어, 당시 사람의 인심이 미추에게 크게 돌아가게 되었다. 첨해와 아이혜후 모두 옥모태후의 유명(遺命)을 존중하여, 사(師)로 삼아 궁중에 맞이하여 진재(眞齋, 齋는 불가에서 부처에게 드리는 공양)를 설치하고 재앙을 막았다. 아이혜후가 깊이 사모하여, 누차로 재목(齋沐, 재계와 목욕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부탁하여, 비실(秘室)로 이끌어 들어오게 하여, 진신(眞身, 부처의 진실한 몸)을 주기를 구걸하였다. 드디어 상통(相通)하여 기운을 들어올리고, 부부(夫婦)가 되기를 마음으로 약속하여, 이에 소명(昭明)공주를 낳았다. 술례에게 기르도록 명하고, 은밀히 술례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미추의 딸입니다. 짐은 미추와 더불어 천하를 함께 다스리기를 원하니, 어머니는 말흔과 대사(大事)를 의논하여 정함이 옳습니다.”라고 하였다. 말흔이 크게 기뻐하며 양부(良夫) 등과 상언(上言)하여 말하기를 “재앙을 막는 것은 백성을 살리는 일이며, 성인(聖人)을 받들어 부군으로 세움과 같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첨해제는 마음속으로 아후(阿后, 아이혜)의 뜻이 미추에게 있음을 알았지만 허락하고자 하였다. 조분선제(助賁仙帝)가 그 소리를 듣고 아후의 신뢰 없음을 책망하였다. 아후가 이에 조분의 딸 광원(光元)을 미추의 처로 삼으며 말하기를 “내가 미추의 처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다. 이에 너의 딸을 배우자로 삼아 나라를 전하겠다.”라고 하였다. 조분은 선심(仙心)이 이미 (미추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알았고, 결국에는 부군(副君)으로 삼기를 허락하였다. 아후를 선궁(仙宮)으로 불러 말하기를 “너는 곧 나의 처이다. 마땅히 나와 함께 살아야 한다. 어찌하여 광원과 부군을 다투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아후가 부득이 선궁으로 들어가 조분의 딸 광명(光明)을 임신하며 말하기를 “이미 너의 자식을 가졌다. 비록 사적으로 총애를 할지라도 어찌 해가 되겠느냐.”라고 하며, 이에 다시 천궁(天宮)으로 들어와 정사(政事)를 살폈다. 첨해제가 손을 드리우고, 부군에게 모두 결정하도록 하였다. 이에 부군의 같은 어머니의 형 (훤술)을 총상(寵相, 이벌찬)으로 삼고 선양을 받을 책략을 준비하도록 하였다. 첨해제가 그 뜻을 알고 해택(海宅)에 이르러, 장차 선양(禪讓)을 행하려 하였으나 갑자기 병이나 죽었다. 부군이 피하여 즉위하지 않으려 하였는데, 아후가 강제로 미추를 세워, 이에 왕위에 올랐다.
≪견해≫ 내례와 옥모의 유명(遺命)에 의한 첨해의 후사(後嗣)는 우로(于老)가 가까우나 여동생 아이혜에게 절위(竊位)당한 듯 하다.
元年 靑鳥 正月 大阿夫伊伐飡 冬皇稟主 以良夫爲大日大師 良夫者尼今之嬖臣也
원년 청조(靑鳥=乙酉) (A.D.325) 정월 대아부(大阿夫)를 이벌찬으로 동황(冬皇)을 품주로 삼았다. 양부(良夫)를 대일대사로 삼았다. 양부란 사람은 니금(尼今)의 폐신(嬖臣, 임금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받는 신하)이다.
三月 龍見東池 尼今親祓
3월 용(龍)이 동쪽 연못에서 보였다. 니금(尼今)이 친히 푸닥거리를 하였다.
命元宮主生沾解帝女白海 尼今洗之
명원(命元)궁주가 첨해(沾解)제의 딸 백해(白海)를 낳았다. 니금(尼今)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四月 伊西國太子宝相來朝 初伊西君熊相娶甘文女金宝 生宝相 美而多才 熊相乃立金宝爲后 國人多反之 曰 “正見神不許” 金宝乃勤于奉神 其祠在都外 熊相爲金宝 而移其祠于都中 國人又大騷 乃還其祠 金宝每以歲臘一七日 詣祠齋之 至是宝相年十八 金宝年三十八 幷詣于祠 金宝得疾危急 時伊西臣長眉謫在祠 傍有女甚美 宝相愛之 約爲夫婦 每夜往遊 不侍其母 從臣諫之不聽 金宝不得已召其女于側 而與宝相和之 未幾金宝病沒 熊相來救 亦見長眉女美 而愛之 遂納之 寵益高 復長眉官爲大相 以長眉妻鸚鵡爲夫人 長眉女繼金宝爲后 是爲白梗后 國人以白梗先通于宝相 而後媚于熊相 誹之 白梗乃謂太子 曰 “國君若知 吾汝事 必疑汝通我 不若朝于上國 得仙道而來 則威望 自重可以致位伊時願 與汝復爲夫婦而治國” 宝相曰 “吾年十八 汝年十六 父王四十五 次後十年吾與汝尙少 而父王老 吾以汝慰父王孝也” 遂入朝 請學仙 良夫稱其賢 賜爵級飡
4월 이서국(伊西國) 태자 보상(宝相)이 내조(來朝)하였다. 처음에 이서국의 왕 웅상(熊相)이 감문(甘文)의 여자 금보(金宝, 혹은 김보)에게 장가를 들어 보상을 낳았고, 아름답고 재주가 많아 웅상이 이에 금옥을 세워 후(后)로 삼고자 하였다. 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정견신(正見神, 가야신)이 허락하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금보가 이에 신(神, 정견신)을 섬기기를 부지런히 하였는데, 그 사당은 도읍지 밖에 있어, 웅상이 금보를 위하여 그 사당을 도읍 안으로 옮겼다. 나라사람들이 또 크게 떠들어대니 이에 그 사당을 (도읍 밖으로) 되돌렸다. 금보는 매해 섣달(臘, 12월, 설이 드는 달에서 나온 것으로 동지달인 음력11월을 첫 달로 잡은 적이 있다.) 17일 사당을 방문하여 제사를 지냈다. 이때에 보상의 나이 18세, 금보의 나이 38세였는데 함께 사당에 왔다. 금보가 병이 얻어 위급하였는데, 당시 이서국의 신하 장미(長眉)가 유배를 와서 사당 안에 있었고, 곁에 있는 딸이 심히 아름다웠다. 보상이 그 딸을 사랑하여 부부가 되기를 약속하고 그 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매일 밤 놀러갔다. 따르는 신하들이 간하였으나 듣지 아니하였다. 금보가 부득이 그 여자를 불러 옆에 두고 보상과 화해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금보가 병으로 죽자, 웅상이 구하러 와서, 또한 장미의 딸이 아름다움을 보고 사랑하여 거두어들임에 이르렀다. 총애가 점점 더하여지자 장미의 관직이 다시 대상(大相, 관호 또는 최고의 관직)이 되었고, 장미의 처 앵무(鸚鵡)가 부인(夫人)이 되었고, 장미의 딸이 금보를 이어 후(后)가 되었다. 이 분이 백경후(白梗后)가 되었다. 나라사람들이 백경이 보상과 먼저 통한 후에 웅상에게 아첨하여 후(后)가 되었음을 헐뜯었다. 백경이 이에 태자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국군(國君, 웅상)이 만약에 너와 나의 일을 안다면, 반드시 너와 태가 통한 일을 의심하게 될 것이므로 상국(上國)의 조정에 찾아감만 못하며, 선도(仙道)를 얻어오면, 즉 위망(威望, 위세와 명망)이 있을 것이니 자중(自重)하면 치위(致位, 높은 벼슬에 오름)할 것이다. 저때에 너와 내가 원하였던 것처럼 부부로 살면서 나라를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하고 하였다. 보상이 말하기를 “나의 나이는 18세, 너의 나이는 16세, 부왕의 나이는 45세, 다음 10년 뒤의 너와 나는 아직 젊고 부왕(父王)은 늙게 된다. 내가 너로 하여금 부왕을 위로하게 함이 효(孝)이다.”라고 하였다. 입조(入朝)함에 이르러 학선(學仙)이 되기를 청하였다. 양부(良夫)가 그 현명함을 칭찬하여, 급찬(級飡)의 작위를 내렸다.
≪견해≫ 정견(正見)의 사망 시기는 11월이다. 섣달 17일에 정견신에게 제사를 지냈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七月 金城西門火 延燒民戶百余 將及舟宣公宅 公奴房務 大率諸奴滅火 甚疾 末仇獎其功 請屬羽林 許之
7월 금성(金城) 서문(西門)에 불이 나서 백성의 집 100여 호가 불에 탔다. 장차 주선공(舟宣公)의 집에 이르려하자 공노(公奴) 방무(房務)가 모든 노비를 이끌고 불을 껐지만 깊이 병이 들었다. 말구(末仇)가 그 공을 권면하여 우림(羽林)군에 속하도록 청하였는데, (왕이) 허락하였다.
興潛伊伐飡 冬皇再爲稟主 時骨女有三夫之風 多者或七八夫十餘夫 以少爲無援 冬皇孫光女冬禮女也 自少爲尼今嬖妾 而好淫多夫 洋洋自得 自以爲莫我當 大阿夫興潛之從兄也 通其從兄之妻 而亦爲寵相 時俗可知也
흥잠(興潛)을 이벌찬으로, 동황(冬皇)을 다시 품주로 삼았다. 당시 골녀(骨女)는 3명의 남편을 두는 유행이 있었는데, 많은 자는 칠팔 명 혹은 십여 명의 남편을 두었다. 이 때문에 젊은 사람에게는 맡기지 않았다. 동황은 손광(孫光)의 딸인 동례(冬禮)의 딸이다. 젊었을 때부터 니금(尼今)의 총애를 받는 첩이었는데, 음란함을 좋아하고 남편이 많아서 양양(洋洋, 사람의 앞길에 발전할 가능성이 높음)하여 자득(自得, 자기가 자신이 한일에 대하여 갚음)하였다. 스스로 자신을 당해낼 자가 없다고 하였다. 대아부(大阿夫)는 흥잠의 종형(從兄)인데, (대아부는) 그 종형의 처와 통하여 역시 총상(寵相, 이벌찬)이 되었다. 이 때의 풍속을 가히 알만하다.
≪견해≫ 편찬자의 견해가 나오는 부분이 있다.
命權妻命元爲于老太子妻 時于老妻達禮 與太師良夫通 而娠故也 國俗王女無定夫 而若與太子相婚 而爲夫妻 則不得其夫之許 則不通男子義也 達禮慕良夫 而欲爲側夫 問於于老 曰 “吾已生汝子女 願得側夫 而養氣” 于老曰 “欲納何人乎” 達禮曰 “良夫尼今之寵臣也 仙門之至尊也 吾欲薦身 以得道” 于老曰 “汝父吾父皆尼今也 汝何思二骨乎” 不許之 達禮曰 “骨女皆有三夫 况王女乎” 遂潛通良夫 而與于老不親 于老怒 尼今乃以命元妻之 以慰之
권처(權妻) 명원(命元)을 우로(于老)태자의 처로 삼았다. 당시 우로의 처 달례(達禮)가 태사(太師) 양부(良夫)와 통하여 임신을 한 까닭이다. 나라의 풍속에 왕녀는 정한 남편이 없으나, 만약에 태자와 결혼하여 부부가 되면 남편의 허락 없이 남자와 통하지 않음이 법도였다. 달례가 양부(良夫)를 사모하여 측부(側夫, 샛서방)로 삼고자 하여 우로에게 물어 말하기를 “나는 이미 너의 자식을 낳았으니, 측부를 얻어 기운을 북돋고자 원한다.”라고 하였다. 우로가 “어떤 남자를 거두려 하느냐?”라고 물었다. 달례가 말하기를 “양부는 니금의 총애를 받는 신하이고, 선문(仙門)의 지존(至尊)이다. 나는 몸을 천거하여 도(道)를 얻고자 한다.”라고 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너의 아버지와 나의 아버지는 모두 니금(尼今)이다. 어찌하여 이골(二骨, 두개의 혈육, 여기서는 서로 다른 골품)을 생각하느냐?”라고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달례가 말하기를 “골녀(骨女)는 모두 3명의 남편이 있는데, 하물며 왕녀(王女)로다.”라고 하며, 양부와 잠통(潛通)하기에 이르렀다. (양부는) 우로와 친하지 않았으므로 우로가 화를 내었다. 니금(尼今, 미추)이 이에 명원을 시집보내어, 우로를 위로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원년 기사
원년 3월 대궐 동쪽 못에 용이 나타났다.
7월 금성서문에 불이 났고, 인가 삼백여 호가 연이어 불탔다.
二年 火狗 正月 良夫伊伐飡 達禮稟主兼知軍事 時于老與末昕主軍事 達禮久爲軍母 故亦以良夫分其軍權 欲樹花林之之計也 先時于老新娶命元 謁助賁仙今于海宅 仙今憙曰 “達禮命元皆吾女 沾解吾之異父弟 汝之異母兄也 以沾解之妻妻汝 甚合吾意 新今得矣” 于老曰 “達禮好淫 而命元不然 臣愛新而棄舊” 仙今笑曰 “老陽少陰 汝安得不惑乎 命元比達禮 溫柔娟艾 新今不自居而與汝 盖知吾意在汝也” 于老曰 “伐休正統 有父與我 而我國重母 外戚竊位 新今則漢之王莽也 妹后好淫 而寵愛之 臣居帝位 非祖宗法也 父今何不制妹 而正位乎” 助賁笑曰 “眞人自在 非人所爲西方 金故好殺伐 男子主政 東方木 故好生育 女子主政 女子仁而和 故好淫 而好淫者德之善也 殺伐者惡之大者也 故西土神仙已絶 惟東方有之 汝何爲殺伐聲 而害和氣乎 汝所以不得爲尼今者亦無和氣也 無和安得 育萬物乎 新今亦吾子 汝亦吾子 豈有差哉 汝宜養和氣” 因命與命元相抱 而舞 仙今自鼓 而使綃姬歌之 以解 于老之慍 綃宮人有 以其言告于阿爾兮后 故后謂尼今 曰 “吾兄有異志 不可掌兵” 尼今曰 “倉卒奪之 必生猜忌可緩” 緩圖之 至是 以達禮舊臣 皆屬良夫 于老之權大削 于老有慍意 尼今乃陽尊 于老爲元上太公 尼今五日 一問必拜 呼以叔父 奢其衣食居處
2년(A.D.326) 화구(火狗=丙戌) 정월 양부(良夫)를 이벌찬으로, 달례(達禮)를 품주 겸 지군사(知軍事)로 삼았다. 당시 우로(于老)와 말흔(末昕)이 군사의 우두머리였고, 달례가 오랫동안 군모(軍母)로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또한 양부에게 그 군권(軍權)을 나누게 하여, 화림(花林)을 세우고자 하는 만약의 계책이었다. 이전에 우로가 명원(命元)에게 새로 장가를 들어, 해택(海宅)에 있는 조분선금(助賁仙今)을 만나러갔다. 선금(仙今)이 기뻐하며 말하기를 “달례와 명원 모두 나의 딸이다. 첨해(沾解)는 나의 다른 아버지의 동생이고, 너에게는 다른 어머니의 형이다. 첨해의 처를 너에게 시집보내는 것은 나의 뜻에 심히 합치된다, 신금(新今)이 깨달은 게로구나.”라고 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달례는 음란함을 좋아하나 명원은 그러지 않습니다. 신(臣)은 새로운 여자를 사랑하여 옛 여자를 버렸습니다.”라고 하였다. 선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늙은 남자는 젊은 여자를 좋아하니, 네가 어찌 매혹되지 않았겠느냐? 명원은 달례에 비하여 온유(溫柔)하고 날씬하고 예쁜데 신금이 차지하지 않고 너에게 준 것이다. 아마도 나의 뜻이 너에게 있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벌휴(伐休)의 정통(正統)은 아버지(父, 조분)와 나에게 있는데, 우리나라는 어머니를 중요시하여 외척(外戚)이 왕위를 훔쳤습니다. 신금은 한(漢)의 왕망(王莽)과 같습니다. 여동생인 후(后, 아이혜)는 음란함을 좋아하여 (미추를) 총애하여, 신하가 제위에 있으므로 조종(祖宗)의 법(法)이 아닙니다. 부금(父今, 아바마마)은 어찌하여 누이동생을 제어하여 왕위를 바로하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조분이 웃으며 말하기를 “참된 사람은 인간되지 않은 소행에 자재(自在, 구속함과 방해함이 없음)한다. 서방(西方)은 금(金, 서방)인 까닭에 살벌(殺伐)함을 좋아하여 남자가 정치를 주관하고, 동방은 목(木)인 까닭에 생육(生育, 낳아서 기름)을 좋아하고 여자가 정치를 주관한다. 여자는 어질고 화합하나 그런 까닭으로 음란함을 좋아한다. 음란함을 좋아하는 것은 덕(德)의 최고선이다. 살벌한 것은 악의 최상이다. 그런 연유로 서토(西土)에는 신선(神仙)이 이미 끊어지고, 동방에만 남아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너는 어찌하여 살벌한 소리를 하여 화목한 기운을 깨뜨리려는 것이냐. 네가 니금이 되지 못한 까닭(所以) 역시 화목한 기운이 없기 때문이다. 화목하지 아니하면 어찌하여 만물(萬物)이 생장할 수 있겠느냐. 신금 역시 나의 아들이고 너 역시 나의 아들이다. 어찌 차별이 있겠느냐. 너는 마땅히 화목한 기운을 길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로 인하여 명원과 서로 안고 춤추도록 하고, 선금이 손수 북을 치고, 초희(綃姬)에게 노래 부르게 하여 풀도록 하였다. 우로가 성을 낸 곳에 초궁인(綃宮人)이 있어 그 말을 아이혜(阿爾兮)후에게 고(告)하였다. 그런 연유로 후(后)가 니금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나의 오빠에게 다른 뜻이 있으니 병권을 맡기는 일은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첨해가) 갑자기 죽어 왕위를 빼앗겼기 때문이다. 살아있으면 반드시 시기(猜忌)할 것이니 천천히 도모함이 옳다.”라고 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달례의 옛 신하들이 모두 양부에게 속하게 되어 우로의 권세가 크게 깎이게 되었다. 우로가 화를 내는 뜻이 있었으나, 니금이 양존(陽尊, 겉으로만 존경함)하여 우로를 원상태공(元上太公)으로 삼았다. 니금이 5일에 한번씩 안부를 묻고, 오로지 굽히며 숙부(叔父)라고 불렀다. 그 옷과 먹을 것 사는 곳을 사치스럽게 하였다.
二月 尼今與阿爾兮后親祀祖廟 大赦天下 賜百官爵一級 追封先考仇道爲葛文王 尊母述禮爲太后 述禮夫末昕爲次上太公 賜酺群臣 阿后醉抱尼今而舞 曰 “好吾夫兮壯陽仙” 于老責后 曰 “汝以仙今之妻 雖愛側夫 仙今尙存 安敢對群臣 而稱夫乎” 后曰 “人皆知之 兄何妬乎” 于老曰 “味鄒末昕之子也 猶吾子 汝以爲夫 無恥乎” 后曰 “兄以吾女妻之 憙老陽少陰 吾以兄子夫之 喜老陰少陽 人生須行樂耳 何自苦乎” 仍命命元 曳于老 入舞列
2월 니금(尼今)과 아이혜(阿爾兮)후가 조상의 사당에 친히 제사를 지내고 하늘 천하의 죄인을 사면하고 백관들에게 작위를 1급씩을 (올려)내렸다. 선고(先考, 돌아가신 아버지) 구도(仇道)를 갈문왕(葛文王)으로 추존하여 봉(封)하고, 어머니 술례(述禮)를 높이어 태후로 하였다. 술례의 남편 말흔(末昕)을 차상태공(次上太公)으로 삼았다.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어, 아후(阿后)가 취하여 니금을 안고 춤추며 말하기를 “나의 남편이 씩씩한 양선(陽仙, 남자 신선)이어 사랑스럽구나!”라고 하였다. 우로(于老)가 후(后)를 꾸짖어 말하기를 “너는 선금(仙今)의 처이고, 비록 측부(側夫)를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선금이 아직 살아계시는데 어찌 감히 군신(群臣)들을 대하며 남편이라 칭하느냐?”하고 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오빠는 어찌 시새움을 합니까?”라고 하였다. “미추(味鄒)는 말흔(末昕)의 아들이니, 나의 아들임이 마땅한데 너는 남편으로 삼았으니 부끄럽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오빠는 나의 딸을 처로 삼았는데,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에게 장가를 들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나는 오빠의 자식을 남편으로 삼아,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를 만나 기쁩니다. 인생은 모름지기 즐거움을 행할 뿐이고, 어찌 스스로 괴로워하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명원(命元)에게 명하여 우로를 끌고 춤을 추는 대열로 들어가게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2년 기사
2년 정월 이찬 양부를 서불한에 임명하고, 내외병마사를 겸하게 하였다.
2월 왕이 조묘에 직접 제사를 지냈다. 죄수들을 크게 사면하였다. 죽은 아버지 구도를 갈문왕에 봉하였다.
四月 宴花林 定樹王位次 以蘿井爲第一 壤井爲第二 花林爲第三 桃山及六部 序于其次
4월 화림(花林)에서 연회를 베풀고 수왕(樹王)의 위계와 차례를 정하였다. 나정(蘿井)은 제1, 양정(壤井)은 제2, 화림(花林)은 제3으로 하고, 도산(桃山)과 6부에 미치어 그 차례에 따라 서열을 정하였다.
七月 奈淡伊伐飡 羘尺稟主 羘尺者羘公女也 其母尺仁與尼今同年 命監事 羘尺年才十七 尼今愛其才色 而爲主 奈淡者奈音王寵孫也 爲人寬仁 無所執 而性好艾色 繼其父奈己 爲右軍頭上 惟色是務 兵官之妻 無不淫之 時于老末昕奈淡爲頭上 而分掌兵權 末昕輒 以美色送之 以懷 奈淡尼今少時爲其兵官 以兄事之 故卽位 猶用舊禮 奈淡曰 “天子臨萬民御百官 不可無外視情 雖如故禮 不可修 自盡臣道” 阿后曰 “誰謂奈淡無所執” 尼今曰 “奈兄厚於悅 已故愛臣 舊情而然也 可以此人揆百官矣” 后許之 尼今乃問於奈淡 曰 “兄爲寵相 誰可蒨乎” 奈淡笑曰 “爾可爲也” 盖尼今嘗爲其龍陽 故戱之也 尼今笑曰 “兄好艾 吾有可蒨” 遂以羘尺妻之
7월 내담(奈淡)을 이벌찬으로, 장척(羘尺)을 품주로 삼았다. 장척은 장공(羘公)의 딸이다. 그 어머니 척인(尺仁)은 니금(尼今)과 나이가 같아, 척인에게 (품주의) 일을 살펴보도록 하였다. 장척은 이제 겨우 17세로 니금이 그 재색(才色)을 사랑하여 (품)주로 삼았다. 내담은 내음(奈音)왕의 총손(寵孫)으로, 사람의 됨됨이가 너그럽고 어질며, 집정하려 하지 않았으며, 본바탕이 남색을 좋아하였다. 그의 부친 내기(奈己)를 이어 우군두상이 되었다. 생각건대 여색을 업신여겼다고 인정된다. 병관(兵官)의 처는 음란하지 않음이 없었다. 당시 우로(于老), 말흔(末昕), 내담(奈淡)이 두상(頭上)으로 있으면서, 병권(兵權)을 나누어 맡았다. 말흔이 갑자기 미색(美色, 여자)을 보내어 품도록 하였다. 내담은 니금이 젊었을 때에 니금의 병관(兵官)이었는데, (니금이) 형으로 섬겼다. 그러한 연유로 즉위하자 옛날의 관례(이벌찬과 품주는 부부로 등용함)대로 등용하였다. 내담이 말하기를 “천자(天子)가 만민(萬民, 모든 백성)을 대하고 백관(百官, 관리)을 통솔함에는 바깥의 형편을 살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이것이 옛날의 관례이나 손질함이 불가하니 몸과 마음으로 정성을 다하여 신의 도리를 지키겠습니다.”라고 하였다. 아후가 말하기를 “누가 내담이 다스리지 못한다고 말하느냐?”라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내형(奈兄, 내담)은 기쁘게 함이 두텁습니다. 이미 옛날부터 사랑했던 신하였고 옛정 때문에 그러하였습니다. 가히 이 사람이 백관을 관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후(后)가 허락하였다. 니금이 이에 내담에게 물어 말하기를 “형을 총상(寵相, 이벌찬)으로 삼으면, 누가 천(蒨, 품주)로 가당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내담이 말하기를 “너로 삼음이 가당하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니금이 일찍이 그 용양(龍陽, 중국 전국시대 위왕의 행신을 용양군이라 일컬은 고사로 남색을 뜻함)으로 삼았으니, 그런 까닭으로 희롱하였다. 니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형이 남색을 좋아하니, 내가 품주로 옳음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드디어 장척을 내담에게 시집보내기에 이르렀다.
八月 行大嘉俳
8월 대가배(大嘉俳)를 행하였다.
宝凰大母薨 春秋百十歲 以太后禮葬之 初伐休后紫凰夢見大白鳥而抱之 阿達羅帝 召而幸之 生大母 豊偉聰明好學不倦 帝命諸博士入 內訓之事多 聞一知十 猩公歎之 曰 “聖人出矣” 盤花大母盡以其學授之 故多識古事 人稱知母十八爲阿達羅帝權妻 寵傾後宮 常自退 而不與諸妃爭寵 紫凰曰 “人皆粉脂而媚 汝何素飾 而不媚乎” 大母曰 “不得已薦枕耳 豈爲媚乎” 亦不形於色 故帝不知其之 常命禱子 大母曰 “人言父女相合難子 禱之何益” 帝怒 曰 “吾死可與伐休生子” 大母乃從容言 父女不可相婚而生子 帝頗悟之 遂解當夕 月餘而帝沈悒不樂 召大母枕膝 而頗有痛吟 紫凰乃勸復受幸 帝大喜 成歡而娠 寵愛倍前 將立爲后 而大母力辭不受終 帝之世 謝絶品秩 帝臨崩 遺命于伐休 曰 “宝凰不爲吾后 汝可后之” 大母聞之 欲自潔而殉之 紫凰知之 矯帝命携至伐休寢 强婚之 遂爲伐休帝權妻 而常自咎 曰 “吾旣不能慰先今 不可媚新今” 伐休帝亦義之 不以嬪妾待之 尊之如內禮 后爲之 立西宮 內禮在東宮 多私臣 大母所居冷然 不通外色 故大母望重 帝寵漸隆 內禮后乃生妬心 逼帝廢之 出居阿達羅陵門 亦自守如一 內禮聞之 以謁盤爲衛頭 而命强通之 謁盤見大母 不覺望風 下拜不能犯之 內禮大怒 將流謁盤而罪之 謁盤乃泣 告于大母 曰 “臣雖謫死荒地而有榮 但恐惡人再來主 不能保矣” 大母曰 “吾豈自貞累人哉 汝雖不犯而遠去 必有犯人 不如與汝相合 而早絶禍根” 遂與謁盤相通於是 內禮譖於伐休 曰 “汝以爲宝凰守一夫 而與謁盤縱淫” 伐休心之其非 而不能違 內禮乃奪權妻秩 伐休崩 又使謁休妻之 而使失其志 奈解心知 大母之賢 不敢違母后之旨 及內禮崩 至謁休宅 謝之復爲一品權妻 賜田宅奴婢 而戲 曰 “朕非好色 但欲得眞氣於母耳” 大母曰 “妾年已老 又爲賤骨之妻 不敢奉枕于天子也” 固辭不應 奈解帝乃慚而退 謁休責之 曰 “臣妾有色 供之義 汝何拒之甚乎” 大母曰 “吾性不好色 自今汝亦不可犯也” 大母身長八尺 垂手下膝 有絶人之力 謁休竟不能妻之 奈解帝益慕之 累幸于宅 或至夜深而不歸 戀念殆病 大母不得已受幸 曰 “宮中多美人 何愛老醜 如是乎” 奈解曰 “叔母之美 如天宮中少艾 何能及之哉” 大母歎 曰 “天子無私女 妾安敢自守乎” 自是累被寵幸 生帝子女 而常以太后待之 大母曰 “嬪妾之禮自在 妾安敢當此” 謙恭自持終 帝之世 寵不衰焉 助賁仙今卽位 大母已七十六齡矣 尙玄髮而紅顔齒如編珠 見者莫不異之 玉帽太后之用事也 以大母爲援而當內禮諸女 故玉帽亦以大母爲仙姊 或稱母而尊之 鷄徒奉之爲神 朝廷重之 大母未嘗以私事干之 所爲之事 皆爲國護仙而已 阿達羅帝嘗以宝香賜之 他妃欲之 請以百布易之 大母許之 帝責之曰 “布易得 而香難求 何易之” 大母曰 “寒民無衣 布豈易得乎 香雖在彼 亦可以媚上 布若在我 可施寒民” 帝嘉之 加給百布 曰 “汝之媚我 以道不以香 此所謂宝香 不如人香者也” 平生所施 難訃 故士女如喪 其妣各立 其祠曰 聖天祠 奈解帝益慕之 累幸于宅 或至夜深而不歸 戀念殆病 大母不得已受幸 曰 “宮中多美人 何愛老醜 如是乎” 奈解曰 “叔母之美 如天宮中少艾 何能及之哉” 大母歎 曰 “天子無私女 妾安敢自守乎” 自是累被寵幸 生帝子女 而常以太后待之 大母曰 “嬪妾之禮自在 妾安敢當此” 謙恭自持 終帝之世 寵不衰焉 助賁仙今卽位 大母已七十六齡矣 尙玄髮而紅顔齒如編珠 見者莫不異之 玉帽太后之用事也 以大母爲援而當內禮諸女 故玉帽亦以大母爲仙姉 或稱母而尊之 鷄徒奉之爲神 朝廷重之 大母未嘗以私事干之 所爲之事 皆爲國護仙而已 阿達羅帝嘗以宝香賜之 他妃欲之 請以百布易之 大母許之 帝責之曰 “布易得 而香難求 何易之” 大母曰 “寒民無衣 布豈易得乎 香雖在彼 亦可以媚上 布若在我 可施寒民” 帝嘉之 加給百布 曰 “汝之媚我 以道不以香 此所謂宝香 不如人香者也” 平生所施難計 故士女如喪其妣 各立其祠曰 聖天祠
보황(宝凰)대모(大母)가 110세로 죽어 태후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처음에 벌휴(伐休)의 후(后) 자황(紫凰)이 꿈속에서 커다란 흰 새를 보고 안았는데, 아달라(阿達羅)제가 (자황을) 불러 행차하여 대모를 낳았다. (대모는) 풍만하고 키가 크며, 총명(聰明)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책읽기에 게으르지 않았다. (아달라)제가 여러 박사(博士)들을 부르도록 하여 내훈(內訓, 부녀자들의 교훈)에 관한 많은 일들을 가르치도록 하였는데 한 가지를 들으면 열 가지를 알았다. 성공(猩公)이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인이 나왔다.”라고 하였다. 반화(盤花)대모가 그 학문을 모두 전수한 까닭으로 많은 고사(古事)를 알았다. 사람들이 지모(知母)라고 칭송하였다. 18살에 아달라제의 권처(權妻)가 되어, 총애는 후궁으로 기울어졌으나 항상 스스로 물러나 다른 여러 비(妃)들과 총애를 다투지 아니하였다. 자황이 말하기를 “사람들이 모두 분지(粉脂)를 바르고 아첨을 하는데 너는 어찌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애교를 떨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부득이 천침(薦枕, 잠자리 시중을 듦)할 뿐이고 어찌 아첨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하였다. 또한 얼굴색을 드러내지 않은 연유로 왕이 그 뜻을 알지 못하여, 항상 자식을 임신하기를 빌도록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사람들이 부녀가 상합(相合)하면 난자(難子, 장애아)를 낳는다고 합니다. 자식을 비는 것이 어찌 유익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내가 죽으면 벌휴와 아들을 낳는 것은 가능한 일이냐?”라고 하였다. 대모가 이에 종용(從容, 조용의 옛말)히 부녀가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였다. 왕이 자못 깨달아서, 드디어 이날 저녁에 (화를) 풀었다. 한 달여를 왕이 근심에 빠져 즐거워하지 않았다. 대모를 불러 무릎을 베고, 몹시 괴로워서 끙끙 앓았다고 한다. 자황이 이에 다시 왕의 행차를 받아들이도록 권하였다. 왕이 크게 기뻐하여, 기쁨에 이르자 임신하여 총애가 전보다 배가 되었다. 장차 후(后)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대모가 있는 힘을 다하여 사양하고 끝까지 받지 아니하였다. 아달라 재위기간에는 품질(品秩, 품계)을 사절하였다. 아달라가 죽음에 임하여 벌휴에게 유명(遺命)을 남기며 말하기를 “보황을 나의 후(后)로 삼지 못하였으나, 너의 후로 삼음은 가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모가 그 말을 듣고 스스로 깨끗이 하고 따라 죽으려 하였다. 자황은 그것을 알고 왕명을 핑계되어 벌휴(伐休)의 침전에 끌고 가 강제로 혼인하게 하였다. 드디어 벌휴제의 권처가 되었는데, 항상 스스로의 허물을 말하기를 “나는 이미 선금(先今, 아달라)을 편안하게 하지 못하였는데, 신금(新今, 벌휴)에게 아첨하는 불가하다.”라고 하였다. 벌휴제 또한 의로움이 있어, 빈첩(嬪妾)으로 대우하지 않고 내례(內禮)와 같이 존중하고, 후를 위하여 서궁(西宮)을 세웠다. 내례는 동궁(東宮)에 있었는데 사신(私臣)이 많았고, 대모의 거처는 쓸쓸하고 외부의 남자와는 통하지 아니하였다. 그러한 연유로 대모는 망중(望重, 명망)이 있었으며, 왕이 총애가 점점 융성해졌다. 내례후가 이에 시새움하는 마음이 생겨 왕을 핍박하여 (서궁을) 폐하도록 하였다. 밖으로 아달라의 능문(陵門)에 나가 살면서도 또한 자수(自守, 행실이나 마음가짐을 조심함)하기가 한결같았다. 내례가 그 소문을 듣고 알반(謁盤)을 위두(衛頭)로 삼아, 강제로 정을 통하도록 명하였다. 알반이 대모를 보고 망풍(望風, 높은 명망을 듣고 우러러 사모함)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아래에 이르렀으나 욕보이지는 못하였다. 내례가 크게 화를 내며 장차 알반을 유배를 보내어 벌주려 하였다. 알반이 이에 울면서 대모에게 고(告)하여 말하기를 “신이 귀양길 거친 땅에서 비록 죽게 되더라도 영광스러우나, 다만 악인(惡人)이 다시 (문)주에게 와서 지키지 못할까 두려울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여러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정절을 지킬 수 있으며, 네가 비록 (나를) 범(犯)하지 않고 멀리 간다 하더라고 반드시 범인(犯人, 죄를 범한 자)이 있을 것이므로 너와 상합(相合)하여 일찍 화근(禍根)을 끊는 만 못하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알반과 상통(相通)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내례는 벌휴에게 헐뜯어 말하기를 “너는 보황이 일부(一夫, 一夫從事와는 차이가 있으며 결혼한 여자가 바람을 피우지 않는 것)를 지킬 것이라고 하였지만, 알반과 종음(縱淫, 방종하여 음란함)하였다.”라고 하였다. 벌휴는 마음속으로 그르다는 것을 알았지만 거스를 수 없었다. 내례가 이에 권처의 품계를 빼앗았다. 벌휴가 죽자 거듭하여 알휴(謁休)에게 시집보내어 일부(一夫)하려는 뜻을 상하게 하였다. 내해(奈解)가 마음속으로 대모가 어질다는 것을 알았지만 감히 모후(母后)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내례가 죽음(보황 47세)에 이르자 알휴댁에 이르러 사죄하고 다시 1품 권처로 삼고 전택(田宅)과 노비(奴婢)를 내렸다. 희롱하며 말하기를 “짐(朕)은 호색(好色)하지 아니하다. 다만 대모의 진기(眞氣)를 얻고자 할 뿐이다”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첩(妾)은 이미 늙었으며 또 천골(賤骨)의 처가 되었으니, 어찌 감히 천자(天子)를 잠자리에 모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며, 고사(固辭)하여 응하지 아니하였다. 내해제가 이에 부끄러워하며 물러났다. 알휴가 책망하며 말하기를 “신(臣)의 부인에게 색(色)이 있으니 받들어 모심이 의로움입니다. 당신은 어찌하여 거부함이 심한가?”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나의 타고난 성품이 호색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지금부터 너 역시 범(犯)할 수 없다.”라고 하였다. 대모의 키는 8척이고, 손이 무릎까지 늘어졌고 절인지력(絶人之力, 남보다 뛰어난 힘)이 있었다. 알휴가 결국 아내로 삼지 못했다. 내해제가 더욱 그리워하여 댁으로 누차로 행차하였고, 혹은 밤늦도록 돌아가지 않았다. 연모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으로 병이 들어 위태하였다. 대모가 부득이 거동을 받아들이며 말하기를 “궁중에는 미인(美人)이 많은데 어찌하여 노추(老醜, 나이를 먹어 추함)를 사랑함이 이와 같은가?”라고 하였다. 내해가 말하기를 “숙모(叔母)의 아름다움은 천궁(天宮)의 미녀와 같으니, 어찌 (궁중의 미인들이 숙모의 미모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대모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천자(天子)는 사녀(私女, 사사로운 계집)을 둠이 없으니, 첩이 어찌 감히 스스로 정절을 지킬 수 있으리오?”라고 하였다. 이 때부터 누차로 왕의 총애를 입어, 왕의 자녀(子女)를 낳고 항상 태후(太后)의 예로 모시도록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빈첩의 예로 대우하여도 구속됨이 없는데, 첩에게 이런 대우를 함이 가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겸공(謙恭, 남을 높이고 자신을 낮춤)하여 스스로를 끝까지 지켰다. 왕의 재위기간에는 총애가 쇠하지 않았다. 조분(助賁)선금이 즉위하자 대모의 나이 이미 76세였다. 항상 검은 머리에 붉은 색 얼굴에 치아가 구슬을 엮어 놓은 것 같았고, 본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옥모(玉帽)태후의 용사(用事, 漢詩에 쓰이는 전례의 고사나 사실의 인용)다. 대모에게 떠맡겨서 내례의 여러 딸들을 당해내었다. 그런 까닭에 옥모 역시 대모를 선자(仙姊)로 삼았고, 혹은 어머니라고 부르며 존중하였다. 계도(鷄徒)가 신(神)으로 모시고, 조정(朝廷)에서 중하게 생각하였다. 대모는 일찍이 사사로이 섬기는 일을 막지 않았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다같이 국호선(國護仙, 나라를 보호하는 신선)이 되고자 할 따름이다. 아달라제가 일찍이 보향(宝香, 향수)을 주었는데, 다른 비(妃)가 보향을 갖고 싶어 베 100포와 바꾸자고 청하였다. 대모가 허락하였다. 왕이 꾸짖어 말하기를 “베(布)는 얻기 쉽지만 향수는 구하기 어렵다. 어찌하여 바꾸었느냐?”라고 하였다. 대모가 말하기를 “한민(寒民, 가난한 백성)은 옷이 없지만 베를 얻기 어찌 쉽겠습니까? 향수가 비록 다른 비(妃)에게 있다고 하더라도 또한 왕(上)께 아첨할 것이며, 베가 만약 나에게 있다면 가난한 백성들에게 베풀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아름답게 여기어 베 100포를 더하여 주며 말하기를 “네가 나에게 아첨하는 것은 도(道)이지 향기가 아니다. 이와 같이 이른바 보향(宝香, 향수)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의 향기와 같지 않다.”라고 하였다. 평생을 베풀며 산 바가 있고 계산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런 연유로 사녀(士女)들이 죽은 어머니의 장사를 지내는 것처럼 하였다. 각자 사당을 세워 성천사(聖天祠)라 불렀다.
十月 尼今親行祖廟嘗祭及述禮宮安宅
10월 니금이 조상의 사당에 친히 행차하여 일찍 제사를 지내고, 술례(述禮)궁에 안택(安宅, 〖민속〗집안에 탈이 없도록 무당이나 소경을 불러 가신(家神)들을 위로하는 일. 주로 10월 상달에 한다)을 행하였다.
千氏生上女般氏
천씨(千氏)가 왕의 딸 반씨(般氏)를 낳았다.
三年 赤豕 正月 柒白伊伐飡 發狗稟主 發狗于老女也 年十九 時人以爲帝好艾 主者非好艾色也 不使知政 柒白所非王寵孫也 其父柒公述禮太后胞兄也 以所非之子 宜系軍統 不喜武事 常闕宿衛 或入宿衛 而暗入權井 偸淫骨女 故累貶失權 其母白介宝白太子女也 柒白亦如其父 疎放不禁 故朝廷置之度外 至是以述禮太后命入爲相 發狗之母介狗 柒白從兄介公之女也 柒白與介狗相通 又以發狗爲妻 初發狗以柒白爲舞父 伺見其母與柒白相通 而問其爲何舞 柒白笑 以爲要舞 發狗願學 遂相通 介狗妬而出之 發狗遂歸于柒白 遂奪其好 而竟作稟主 故人嘲以要舞稟主
3년(A.D.327) 적시(赤豕=丁亥) 정월 칠백(柒白)을 이벌찬으로, 발구(發狗)를 품주로 삼았다. 발구는 우로(于老)의 딸로 나이 19세였다. 당시 사람들은 왕이 아름답고 예쁜 여자를 좋아하니, (품)주는 아름답고 예쁜 여자는 아니어야 하고, 정치를 알게 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칠백은 소비왕(所非王, 이음)의 총손(寵孫)으로 그의 아버지 칠공(柒公)은 술례(述禮)태후의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소비의 아들에게는 당연히 군의 통솔권이 이어졌으나, 무사(武事)에 관한 일을 좋아하지 아니하여 항상 궐에서 숙위(宿衛, 숙직하여 지킴)하였다. 혹은 숙위하는 벼슬에 오르면 은밀히 권정(權井)으로 들어와 골녀(骨女)들을 남몰래 음란하였다. 그런 연유로 누차 권세를 깎이거나 잃었다. 그의 어머니 백개(白介)는 보백(宝白)태자의 딸이다. 칠백 역시 그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죄를 지어도 너그럽게 놓아주고 금(禁)하지 아니하였다. 그런 연유로 조정(朝廷)에서는 내버려 두고 상대하지 않았다. 이 때에 이르러 술례태후의 명으로 들어와 재상이 되었다. 발구의 어머니 개구(介狗)는, 칠백의 종형(從兄)인 개공(介公)의 딸이다. 칠백과 개구가 상통(相通)하고, 또 발구를 처로 삼았다. 처음에 발구는 칠백을 무부(舞父, 춤선생)로 삼았다. 그 어머니와 칠백이 상통(相通)하는 것을 엿보고 그것이 무슨 춤이냐고 물었다. 칠백이 웃으며 요무(要舞)라고 하였다. 발구가 배우기를 원하여 상통하게 되었다. 개구가 시새움하여 나가버렸고, 발구가 칠백에게 시집가게 되었다. 드디어 그 정분을 빼앗고, 결국엔 품주가 되었다. 그런 연유로 사람들이 조롱하여 말하기를 요무품주(要舞稟主)라 하였다.
二月 阿爾兮生尼今女 于海宅 尼今洗之 名白明 賜神衣 后謂尼今 曰 “吾夢望海神 而生此女 汝可親祀而來” 尼今東巡至望海祀 其神于古花田 宴父老仙人而歸
2월 아이혜(阿爾兮)가 니금(尼今)의 딸을 해택(海宅)에서 낳아 니금이 아기를 씻겨주었다. 백명(白明)이라 이름 짓고 신의(神衣)를 내렸다. 후(后)가 니금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내가 꿈에 망해신(望海神)을 보고 이 여자아이를 낳았으니, 네가 친히 제사를 지내고 와야 함이 옳겠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동쪽을 순행하여 망해사(望海祀)에 이르렀다. 그 신(神)은 옛 화전(花田)에 있었는데, 부로(父老)와 선인(仙人)들에게 잔치를 벌이고 돌아왔다.
三月 行黃山 問高年及貧乏子 賑恤之 與伊西君熊相 會于境上
3월 황산(黃山)으로 가서 나이가 많은 자와 가난하고 궁핍한자를 물어 그들을 구휼하고, 이서군(伊西君) 웅상(熊相)과 국경에서 만났다.
加耶女君河理智生宣威女宣失 命車理入貢 進奏行在 命賜紫衣
가야(加耶)의 여왕 하리지(河理智)가 선위(宣威)의 딸 선실(宣失)을 낳았다. 차리(車理)에게 입공(入貢)을 하여, (가야)여왕에게 나아가 안부를 묻도록 하고, 자의(紫衣)를 내리도록 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3년 기사
3년 2월 왕이 동쪽 지방을 순행하여 바다에 제사를 지냈다.
3월 왕이 황산에 행차하여 노인 및 가난하여 스스로 살 수 없는 자들을 위문하고 구제하였다.
≪견해≫ 다른 나라 왕에게 의복을 내리는 것은 품계를 하사하는 것으로 대국(大國)이 속국(屬國) 혹은 번국(藩國)에 행하는 외교행위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중원고구려비가 고구려의 국경에 세워졌다는 통설은 잘못이다.
七月 大烏夫伊伐飡 謁興稟主 謁興介狗母謁狗女也 爲發狗叔母 而媚於發狗而繼主 大烏夫大阿夫之胞弟也 爲其兄 兵官累有功 謹厚能政事 故人稱大兄弟
7월 대오부(大烏夫)를 이벌찬으로, 알흥(謁興)을 품주로 삼았다. 알흥은 개구(介狗)의 어머니, 알구(謁狗)의 딸이다. 발구(發狗)가 숙모로 삼았다. 아양부기를 좋아하여 발구를 이어 (품)주가 되었다. 대오부는 대아부(大阿夫)의 포제(胞弟)다. 그 형을 위하여 병관으로 여러 차례 공이 있었다. 근후(謹厚, 부지런하고 온후함)하여 능히 정사(政事)를 살필 수 있었다. 그런 까닭으로 사람들이 대형제(大兄弟)라 칭송하였다.
九月 行大場 述禮太后末昕太公 代尼今 當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술례(述禮)태후와 말흔(末昕)태공(太公)이 니금(尼今)을 대신하여 대장을 맡아서 행하였다.
十月 行月歌
10월 월가(月歌)를 행하였다.
爵蘿葍祠奴五漬爲舍知 五漬善沈菜 有寵於述禮太后 故封之
라복사(蘿葍祠)의 노비 오지(五漬)에게 사지(舍知)의 작위를 내렸다. 오지는 심채(沈菜, 산 속 깊은 곳의 채소나 나물)를 잘 만들어 술례(述禮)태후에게 총애를 있었으며, 그러한 연유로 봉한 것이다.
阿召禮宮主薨 年六十六 尼今哀之 葬以后禮
아소례(阿召禮) 궁주가 춘추 66세에 죽었다. 니금(尼今)이 슬퍼하며, 후(后)의 예로 장사를 지냈다.
四年 黃鼠 正月 小興伊伐飡 秀皇稟主 秀乃助賁仙今女也 小興者謁興之異母兄 而其母小潛大烏夫之叔母也 皆爲尼今之股肱者也
4년(A.D.328) 황서(黃鼠=戊子) 정월 소흥(小興)을 이벌찬으로 수황(秀皇)을 품주로 삼았다. 수(황)은 조분(助賁)선금의 딸이고, 소흥은 알흥(謁興)의 다른 어머니의 오빠이다. 그 어머니 소잠(小潛)은 대오부(大烏夫)의 숙모(叔母, 고모, 현재에 부르는 호칭과 다른 부분이 있다)다. 모두 니금(尼今)에게 괴굉(股肱, 다리와 팔, 임금이 가장 신임하는 신하)이다.
≪견해≫ 상장돈장과 신라사초에서 인물들의 가계도를 보완하고 비교하며 만들었으나 허점을 찾기 어렵다.
以權妻登世爲末仇妻 千氏爲日骨妻 以良夫妻達禮爲勸妻 以代千氏 千氏與日骨相通 以達禮娠良夫女 而入宮受幸 登世生末仇女 故也
권처(權妻) 등세(登世)를 말구(末仇)의 처로, (권처) 천씨(千氏)를 일골(日骨)의 처로 삼았다. 양부(良夫)의 처 달례(達禮)를 권처로 삼아, 천씨를 대신하게 한 것은 천씨가 일골과 상통하였기 때문이다. 달례는 양부의 딸을 임신함에 따라서 입궁하여 행차를 받았다. 등세는 말구의 딸을 낳은 까닭이다.
三月 以沾解女茜弘爲權妻 代登世 年十六 美而聰敏 寵傾後宮 擬於羘尺
3월 첨해(沾解)의 딸 천홍(茜弘)을 권처(權妻)로 삼아, 등세(登世)를 대신하게 하였다. 나이 16세로 아름답고 총민(聰敏)하여 총애가 후궁(後宮)에까지 기울어졌는데 장척(羘尺)과 비교되었다.
五月 行花林祭
5월 화림제(花林祭)를 행하였다.
七月 雄權伊伐飡 碧弘稟主 碧弘茜弘之母也 有寵有沾解帝及尼今 無異權妻
7월 웅권(雄權)을 이벌찬으로 벽홍(碧弘)을 품주로 삼았다. 벽홍은 천홍(茜弘)의 어머니이다. 첨해제(沾解帝)와 니금(尼今)에게 총애가 있어 권처(權妻)와 다름이 없었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五年 土牛 正月 羊己伊伐飡 索宝稟主 索宝信宗女也 以醫術得寵於述禮太后 能以玉石代爲齒牙 且善陰宮 羊己能知五味 久掌天廚
5년(A.D.329) 토우(土牛=己丑) 정월 양기(羊己)를 이벌찬으로, 색보(索宝)를 품주로 삼았다. 색보는 신종(信宗)의 딸이다. 의술로 술례(述禮)태후의 총애를 얻었으며, 능히 옥석(玉石)으로 치아를 대신하게 하고 또 음궁(陰宮)의 일을 잘하였다. 양기는 오미(五味)에 능하여 오랫동안 궁중의 수라간의 일을 맡았다.
二月 助賁仙今崩 仙今好神仙 不屑屑作人事 居海宅桃山二十年所 與接引者 皆羽客而已 竟得道 而羽化 海老望見 尼今與寵妃綃姬 呼雙魚 駕之而升天所 植桃杖處 花開杖頭 故居 民奉爲杖山祠 葬衣帶金冠藥物等 曰月白陵 仙徒作歌 而慕之者千數 後來帝文郞 作詩讚之 曰 “月白仙皇 何處去 雙魚不返 杖花飛”
2월 조분선금(助賁仙今)의 죽었다. 선금은 신선(神仙)을 좋아하여 인사(人事)에 관하여 마음에 두는 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해택(海宅)과 도산(桃山)에서 20년을 살았으며, 가까이서 만났던 사람들은 모두 우객(羽客, 날개가 있는 신선)이었을 뿐이다. 결국 도(道)를 얻어 우화(羽化, 날개가 생겨 하늘을 날게 됨)하였다. 해노(海老)가 멀리서 바라보고 니금(尼今)과 총비(寵妃) 초희(綃姬)를 쌍어(雙魚)라고 불렀다. 임금의 수레를 타고 승천(升天)한 곳에, 복숭아 지팡이를 심었는데 지팡이의 머리에서 꽃이 피었다. 그런 연유로 조분이 살았던 곳을 백성들이 받들어 장산사(杖山祠)로 삼았다. 의대(衣帶), 금관(金冠), 약물(藥物) 등을 껴묻고, 월백릉(月白陵)이라 불렀다. 선도(仙徒)들이 노래를 짓고, 추모하여 모인 자가 천여 명이었다. 후에 왕의 문랑(文郞, 문과출신의 낭관)이 시를 지어 찬양하여 “월백선황(月白仙皇)은 어디로 갔느냐. 쌍어(雙魚)는 돌아오지 않고 지팡이에 핀 복숭아꽃이 날리네.”라고 하였다.
七月 冬門伊伐飡 螺月稟主 冬門者冬皇之胞兄也 螺月螺黃之女也 母美而無骨品 故久不爵之 尼今幸冬皇宅 見螺月有秋水之色 命薦枕 曰 “此女淸淨如玉 可以洗朕之肥濁” 遂入宮中 寵隆
7월 동문(冬門)을 이벌찬으로, 라월(螺月)을 품주로 삼았다. 동문은 동황(冬皇)의 포형(胞兄, 여기서는 오빠)이다. 라월은 라황(螺黃)의 딸이다. 어머니는 아름다웠으나 골품(骨品)이 없으므로 오랫동안 작위를 받지 아니하였다. 니금이 동황댁에 행차하여 라월이 추수(秋水, 가을철의 맑은 물)의 색(色)이 있음을 보고 천침(薦枕, 잠자리를 수발함)하기를 명하며 말하기를 “이 여자가 옥처럼 깨끗하고 맑으니, 가히 짐의 기름진 더러움을 씻을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드디어 궁중으로 들어오게 하여 총애가 융성하게 되었다.
八月 夫余來侵 烽山城 城主直宣率壯士二百人 出擊破之 乃加直宣爵一吉飡 而賞其壯士 有差
8월 부여(夫余)가 봉산성(烽山城)을 침입하여, 성주 직선(直宣)이 장사(壯士) 200명을 거느리고 출격(出擊, 자신의 진지에서 나가서 싸움)하여 깨뜨렸다. 이에 직선의 작위를 더하여 일길찬(一吉飡)으로 삼고, 그 장사들에게 상을 내림에 차등이 있었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5년 기사
5년 8월 백제가 봉산성을 공격하였다. 성주 직선이 장사 2백 명을 거느리고 출격하였다. 적들은 패주하였다. 왕이 이 소식을 듣고 직선을 일길찬에 임명하고, 병졸들에게 후하게 상을 주었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命元生于老子訖解 賜米衣 山帽生木公子山公 千氏生日骨日千 命乳訖解
명원(命元)이 우로(老子)의 아들 흘해(訖解)를 낳아 쌀과 옷을 내렸다. 산모(山帽)가 목공(木公)의 아들 산공(山公)을 낳았고, 천씨(千氏)가 일골(日骨)의 아들 일천(日千)을 낳아, 흘해에게 젖을 먹이도록 명하였다.
≪견해≫ 千氏生日骨日千는 千氏生日骨子日千의 오기
十一月 伊西國太子宝相與乞淑妃玄雲相通 而生女玄宝 乞淑怒欲罪之 阿后笑而不許 曰 “汝在于我 彼焉得無私乎 聖人無妬 無毒腹兒” 時后已娠乞淑子 故不許乞淑作惡蘗 以禍腹子也
11월 이서(伊西)국 태자 보상(宝相)이 걸숙(乞淑)의 비(妃) 현운(玄雲)과 상통하여 딸 현보(玄宝)를 낳았다. 걸숙이 노하여 벌주려하였다. 아후(阿后)가 웃으며 허락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너는 나에게 있는데, 저 사람들에게서 사사로이 얻을게 무엇이냐. 성인(聖人)은 시새움하지 아니하며 뱃속의 아이에게 독함이 없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때 후(后)는 이미 걸숙의 아들을 임신하고 있었는데, 이러한 까닭에 걸숙이 악의 그루터기를 키우지 않도록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로써 뱃속의 아기에게 재앙이 자라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六年 白虎 正月 板太伊伐飡 元虹稟主 板太母太旺宝白太子庶女也 板太同年 故太旺乳尼今 板太自幼爲尼今之臣 元虹本尼今寵妾 而後賜板太者也 元虹之胞兄江虹 亦以尼今寵居兵官重地
6년(A.D.330) 백호(白虎=庚寅) 정월 판태(板太)를 이벌찬으로 원홍(元虹)을 품주로 삼았다. 판태의 어머니 태왕(太旺)은 보백(宝白)태자의 서녀(庶女)다. 판태는 니금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태왕이 니금(尼今)에게 젖을 먹였다. 판태는 어렸을 때부터 니금의 신하였으며, 원홍은 본디 니금의 총첩(寵妾)인데, 후에 판태에게 하사되었다. 원홍의 포형(胞兄, 오빠) 강홍(江虹) 또한 니금의 총애가 있는 병관(兵官)으로 중시되었다.
二月 行仇道王大祭 及助賁帝周祭
2월 구도(仇道)왕의 대제(大祭)를 지내고, 조분제(助賁帝)의 1주기 제사를 지냈다.
螺月生帝女螺玉
라월(螺月)이 왕의 딸 라옥(螺玉)을 낳았다.
四月 行壤井祭
4월 양정제(壤井祭)를 지냈다.
阿后生乞叔子基臨 尼今洗之 茜弘生帝子茜公
아후(阿后)가 걸숙(乞叔)의 딸 기림(基臨)을 낳아, 니금(尼今)이 아기를 씻겼다. 천홍(茜弘)이 왕의 아들 천공(茜公)을 낳았다.
七月 馬潛伊伐飡 謁興稟主 馬潛者大烏夫之從弟也 謁興通之 而再蒨
7월 마잠(馬潛)을 이벌찬으로 알흥(謁興)을 품주로 삼았다. 마잠은 대오부(大烏夫)의 종제(從弟)다. 알흥이 마잠과 통하여 다시 품주(蒨, 품주의 다른 표현)가 되었다.
江虹自北歸 奏 曰 “大趙皇帝石勒四乳而重瞳 一夕御十二姬 乙弗以其女獻之 將謨燕 燕若制之 則南下先滅夫余 且及于我云” 尼今曰 “愛民而敬神 國自安矣 乙弗自違于燕 而取敗 豈易興乎”
강홍(江虹)이 북에서 돌아와 여쭈어 말하기를 “대조(大趙, 후조)황제 석륵(石勒, 생몰 A.D.274~A.D.333, 재위 A.D.319~A.D.333)이 사유(四乳, 주나라 문왕은 태어나면서 4개의 젖을 가지고 태어났다는 일에서 유래)와 중동(重瞳, 겹으로 된 눈동자, 순(舜)임금)이며, 하룻밤에 12명의 첩을 거느립니다. 을불(乙弗)이 그의 딸을 바치고, 장차 (후조와) 연(燕)을 모의하여, 연이 만약 억제되면 곧 남하하여 부여(夫余)를 먼저 멸하고 또 우리를 멸하겠다고 한다고 합니다.”라고 하였다. 니금(尼今)이 말하기를 “백성을 사랑하고 신(神)을 존경하면 나라가 스스로 편안해질 것이오. 을불 스스로 연과 그르치므로 깨뜨림을 당할 것이다. 어찌 흥하기가 쉽겠는가?”라고 하였다.
≪견해≫ 당시 국제관계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사다. 즉, 백제 - 연(燕) - 신라가 동맹관계에 있고, 고구려 - 후조가 동맹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八月 行大嘉俳
8월 대가배(行大嘉)를 행하였다.
加耶婿君宣威殂 以其庶弟守克 請爲繼夫 許之 守克孝道子也 其母奈解帝女也
가야(加耶)왕의 남편 선위(宣威)가 죽어, 서제(庶弟) 수극(守克)을 계부(繼夫)로 삼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수극은 효도(孝道)의 아들로, 그 어머니는 내해제(奈解帝)의 딸이다.
許洗綃童女採藻兒婚嫁如常人 助賁帝遺命也 綃宮之法貞淨 故藻兒綃女多相思 而赴水氷 爲之碧綃姬請許 至是始許 碧水乃淸男女 立綃姬祠而報恩 自是綃宮之女 或人宮中 或爲公卿之妾
깨끗한 초동녀(綃童女)와 조아(藻兒)를 골라 보통사람과 같이 혼인하기를 허락하였는데, 조분제(助賁帝)의 유명(遺命)때문이다. 초궁(綃宮)의 법은 정정(貞淨, 깨끗하고 정절을 지킴)하여, 그런 연유로 조아(藻兒)와 초녀(綃女)가 상사(相思, 남녀가 서로 사모함)함이 많아, 수빙(水氷, 물이 얼어서 된 얼음)으로 나아갔다. 초녀와 염아의 위하여 벽초희(碧綃姬)가 혼인을 허락하기를 청하여, 이 때에 이르러 처음 허락한 것이다. 벽수(碧水)란 깨끗한 남녀를 말하고, 초희사(綃姬祠)를 세워 은혜에 보답하였다. 이 때부터 초궁의 여자들은 혹은 궁인이 되고, 공경(公卿)의 첩이 되었다.
七年 金兎 正月 智權伊伐飡 孫忠稟主 智權雄權之胞弟也 孫忠碩忠女也 母孫蘭孫光胞妹也 尼今以孫光之仙嗣 尊奉孫氏 呼孫蘭以叔母 其子女皆以尼今爲兄弟 干求甚多 而未嘗拒 孫忠性溫良 精於繡花 常作袞冕 有功於錦房 而不與衆兄弟 干求要進 故尼今竊愛之 曰 “蘭兄弟中 唯汝無慾” 至是最先登相
7년(A.D.331) 금토(金兎=辛卯) 정월 지권(智權)을 이벌찬으로 손충(孫忠)을 품주로 삼았다. 지권은 웅권(雄權)의 포제(胞弟)이고, 손충은 석충(碩忠)의 딸이다. 손충의 어머니 손란(孫蘭)은 손광(孫光)의 포매(胞妹)다. 니금(尼今)이 손광의 선도의 후계자였기 때문에, 손씨(孫氏)를 존중하여 받들기를 손란이라 부르고 숙모(叔母)로 삼았다. 그 자녀들은 모두 니금의 형제로 삼았다. 간구(干求, 요구, 청탁)함이 심히 많았는데, 일찍이 막지 아니하였다. 손충은 성품이 온순하고 착하며, 수화(繡花, 꽃과 같은 것을 수놓음)함에 정밀하였다. 항상 곤면(袞冕, 임금의 곤룡포와 면류관)을 지어 금방(錦房)에 공이 있었다. 무리의 형제들처럼 청탁하여 요직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 까닭으로 니금이 남몰래 사랑하여 말하기를 “손란의 형제 중에 오직 너만이 욕심이 없구나!”라고 하였다. 이 때에 이르러 가장 먼저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二月 乙弗殂 子斯由立 是爲釗也
2월 을불(乙弗, 미천왕)이 죽어, 아들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섰다. 이분이 쇠(釗)다.
四月 倭使至鶴浦 請與元上太公相見 不肯入朝 先是于老戱謂倭使 曰 “早晩虜爾王 爲爨奴婢” 盖元上拂于尼今及阿后 視王后如奴婢 而輕侮之心 偶發於倭使 倭使歸報其王 王怒命斬其使 更以他使 來求見浦 吏知有凶計 而告勿見 于老曰 “吾以一國之太公 豈畏小虜” 遂單騎往之 倭責其侮辱 于老曰 “戱言也” 倭不信之 焚之而去 命舟師追之 不得 命厚葬之 爵其幼子訖解 或曰 于老勇而善將兵 然高尤好自矜 不得衆心 故悒悒 有反志 尼今之臣與倭使相通 而密謀制之 云 恐有內訌 而外伐也 尼今親吊太公 而慰命元 曰 “太公之子 吾當子之 太公之妻 吾當妻之” 命元泣 曰 “自春不雨 中外行禱 妾與太公 將禱于山 夢見大火 而疑之 豈有如此匈事乎” 尼今曰 “皆朕不德之致也” 乃會群臣於南堂 親問政刑得失 曰 “政刑失則 禱雨無益 今太公遭變 天久不雨 寡人與爾百官 當受其罰” 尼今遂自撻 阿后聞之 親臨止之 命末仇康檍日骨乞淑連音 出五道暗察 理方得失 問民疾苦 時阿后與乞淑嬖臣好山浸淫 連音妻蘭石與后嬖裙白歡好如夫婦 良夫曰 “上好淫下 則天不雨” 尼今欲自責者 使后欲反省 而反命乞淑連音等出外 而自便縱淫 識者歎之
4월 왜의 사신이 학포(鶴浦)에 이르러 원상태공(元上太公, 우로)과 서로 만나보기를 청하며 입조(入朝)하는 것을 수긍하지 않았다. 앞전에 우로(于老)가 희롱하여, 왜의 사신에게 설명하여 말하기를 “조만(早晩, 머지않아)간 너희 왕을 사로잡아 찬노비(爨奴婢, 밥을 짓는 노비)로 삼겠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아마도 원상(元上, 우로)이 니금(尼今, 미추)과 아후(阿后, 아이혜)를 멸시한 것으로, 왕후(王后, 미추와 아이혜)를 노비와 같다고 본 것이니 경모(輕侮, 남을 하잘 것 없이 보아 모욕하거나 업신여김)하는 마음이 있었다. 뜻밖에 왜의 사신에게 전달되었고, 왜의 사신이 돌아가 그 왕에게 가서 보고하니, 왜왕이 노하여 명으로 그 사신을 베고, 다른 사신으로 바꾸어 포구에서 와서 만나기를 청한 것이다. 관리(吏)가 흉계가 있음을 알고 만나지 말기를 고하였다. 우로가 말하기를 “나는 일국의 태공(太公)이다. 어찌 작은 오랑캐 따위를 두려워하겠느냐?”라고 하였다. 결국엔 단기(單騎, 혼자)로 가서, 왜(倭)가 그 모욕(侮辱)함을 꾸짖으니, 우로가 “농담한 말이다.”라고 하였다. 왜의 사신이 믿지 아니하여 불을 지르고 가버렸다. 주사(舟師, 함장)에게 추격하도록 하였으나 도달하지 못하였다. 우로를 후하게 장례를 지내도록 명하고, 우로의 어린 아들 흘해(訖解)에게 작위를 내렸다. 혹은 우로는 용감하고 장병(將兵)을 다룸에 뛰어난 연유로 걸핏하면 자긍(自矜, 스스로를 자랑함)함을 더욱 높았다. 대중의 마음을 얻지 못한 연유로 마음이 몹시 불쾌하여 반란하려는 뜻이 있었다. 니금의 신하와 왜의 사신이 서로 통하여 은밀히 제어하려는 뜻이 있었다고 하고, 내홍(內訌, 내부에서 저희들끼리 하는 분쟁)을 염려하여 외세로 친 것이라 말한다. 니금이 태공의 상(喪)을 친히 조문하고 명원(命元)을 위로하여 말하기를 “태공의 아들은 마땅히 나의 아들이고, 태공의 처는 마땅히 나의 처이다.”라고 하였다. 명원이 울면서 말하기를 “봄부터 비가 오지 않아 나라 안팎에서 기도하고 있으니, 첩과 태공이 또한 산에서 기도를 올리고 있는데, 꿈에 큰 불이 나서 이를 의심하였습니다. 어찌 이와 같이 흉한 일이 있을 수 있습니까?”하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모두 짐의 덕이 없음으로 부른 일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신하들을 남당(南堂)에 모이게 하여 친히 정형(政刑, 정치와 형벌)의 득실(得失, 잘잘못)을 물어 말하기를 “정형(政刑)의 잘못이 있으면 비를 기도하는 것은 무익한 것이다. 지금 태공이 변란을 맞아 하늘에서 비가 오랫동안 내리지 않으니, 과인(寡人)과 너희 백관(百官)들은 마땅히 그 벌을 받아야 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니금이 드디어 스스로 매질을 하기에 이르렀다. 아후가 그 소리를 듣고, 친히 임하여 매질을 그치도록 하였다. 말구(末仇), 강억(康檍), 일골(日骨), 걸숙(乞淑), 연음(連音)에게 5도를 암찰(暗察)하게 하여, 리방(理方, 관청명)의 잘잘못과, 백성들의 질병과 고통을 살피도록 명하였다. 당시 아후와 걸숙의 폐신(嬖臣, 사랑을 받는 신하) 호산(好山)이 음란함에 빠졌고, 연음의 처 난석(蘭石)과 후(后)의 사랑을 받는 군백(裙白)이 좋아하고 사랑하여 부부처럼 지냈다. 양부(良夫)가 말하기를 “윗사람이 아랫사람과 음란하기를 좋아하면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자책(自責)하고자 한 것은 후(后)로 하여금 반성(反省)하게 하는 것이지만, 반대로 걸숙과 연음에게 밖으로 나가도록 명하여 자기 편안대로 음란함을 즐겼다. 아는 사람들은 그것을 탄식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7년 기사
7년 봄과 여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 신하들을 남당에 모아놓고 왕이 직접 정사와 형벌의 잘잘못을 물었으며, 또한 사신 다섯 명을 파견하여, 각지를 순회하면서 백성들이 무엇을 고통스러워하며 걱정하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견해≫ 왜(倭) 신공(神功)황후 섭정 초기(初期)로 생각된다.
七月 大萱伊伐飡 長禮稟主 長禮尼今之胞姊也 大萱長禮之從弟也 長禮愛之爲夫 不二夫 大萱亦勤厚不二色 時人稱之 大萱母學氏 奈解女也 大萱之家世守文章 大萱之文爲當世之魁 凡祈禱褒功吉匈之文 皆用大萱文 時有玉人蚊足者善圖書 大萱愛之 皆令蚊足彫之 故得大萱文蚊足書 則世以爲寶 其文鄕文 而孫光稱之 曰 “吾所不及 眞吾父寵孫也” 皆孫光之父眞忠善此文故也 家居萬然 無意於朝廷 而尼今迎之 曰 “非吾兄 無以淸人慾” 長禮布裙蓬首 不行蒨 禮曰 “吾弟爲尼今 吾旣榮矣 何必行蒨乎” 尼今亦知其心 而不奪其節 大萱責之 曰 “君臣之禮 雖兄弟 不可廢” 長禮乃設蒨席及其當夕以其女勝華代入之 曰 “尼今好艾 何必我乎” 尼今笑而許之
7월 대훤(大萱)을 이벌찬으로 장례(長禮)를 품주로 삼았다. 장례는 니금(尼今)의 포자(胞姊, 같은 어머니 누나)다. 대훤은 장례의 종제(從弟, 사촌 동생)이다. 장례가 대훤을 사랑하여 남편으로 삼고 다른 남편을 두지 않았다. 대훤 역시 부지런하고 온후하며 다른 여자를 두지 않으니, 당시 사람들이 칭찬하였다. 대훤의 어머니 학씨(學氏)는 내해(奈解)의 딸이다. 대훤의 집안은 세세대로 문장(文章)을 지켜왔는데, 대훤의 글은 당세의 으뜸으로 삼았다. 무릇 기도하거나 공을 기리거나 길흉(吉匈, 吉凶의 옛글자인 듯)을 점치는 문장은 모두 대훤의 글을 썼다. 당시 옥인(玉人)중에 문족(蚊足)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도서(圖書, 글과 그림과 책을 통틀어 일컫는 말)에 능하여 대훤이 그를 사랑하였다. 모두 문족으로 하여금 새기게 하였는데, 그런 연유로 대훤의 문장과 문족의 글씨를 얻으면 곧 세세대로 보물로 삼았는데 그 글은 향문(鄕文)으로 작성되었다. 손광(孫光)이 칭찬하며 말하기를 “나도 미치지 못하는 바가 있는데, 진짜 나의 아버지의 총손(寵孫)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손광의 아버지 진충(眞忠)은 이런 문장에 능통하였던 까닭이다. 가정에서는 많이 그러하지만 조정(朝廷)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니금이 그들을 맞이하며 말하기를 “나의 형이 아니면 인간의 욕심이 깨끗해짐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례가 치마를 벌리고 쑥대머리(蓬首, 머리털이 마구 흐트러져 어지럽게 된 머리)를 하며 천례(蒨禮, 품주가 되는 의식인 듯)를 행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나의 동생이 니금이고, 나는 이미 영화로운데 하필이면 품주가 되라고 하는 것이냐?”라고 하였다. 니금 또한 그 마음(一夫하려는 마음)을 알고 그 절개를 잃지 않게 하였다. 대훤이 그것을 책망하며 말하기를 “임금과 신하의 예절인데 비록 형제라고 할지라도 폐(廢)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고 하였다. 장례가 이에 품주의 자리(蒨席)에 앉고 그 날 밤의 일은 그녀의 딸 승화(勝華)에게 대신하여 들어가도록 하며 말하기를 “니금은 미녀를 좋아하는데, 하필 나인가!”라고 하였다. 니금이 웃으며 승화로 대신 하는 일을 허락하였다.
九月 命宝相 歸伊西
9월 보상(宝相)에게 이서(伊西)로 돌아가도록 명하였다.
八年 黑龍 正月 蘭忠伊伐飡 黃禮稟主 蘭忠孫忠胞兄也 黃禮儒禮之胞姊也 黃禮之父 孫億之嬖奴黃牛也 黃禮明敏善御人 得蒨主體
8년(A.D.332) 흑룡(黑龍=壬辰) 정월 난충(蘭忠)을 이벌찬으로, 황례(黃禮)를 품주로 삼았다. 난충은 손충(孫忠)의 포형(胞兄, 오빠)이다. 황례는 유례(儒禮)의 포자(胞姊)다. 황례의 아버지는 손억(孫億)의 폐노(嬖奴, 총애를 받는 노비, 혹은 섬기는 아랫사람) 황우(黃牛)다. 황례는 명민(明敏)하며 사람을 거느림에 능하여 품주를 얻는 주체(主體)가 되었다.
三月 始置五關八停 以備防密
3월 처음으로 5개의 관문과 8개의 정류장을 설치하여 은밀함에 대비하도록 하였다.
≪견해≫ 고구려와 화친이 깨어지고 이에 대비하는 기사로 생각된다.
七月 乞况伊伐飡 奈仁稟主 乞况乞淑之兄也 尼今之胞兄奈食太子之女也 自幼長於述禮太后 而太后寵 有力於中 索宝翊宗 皆其同胞也 勝華以奈仁之意爲翊宋之妻 至是有寵於尼今 出入政堂 如已居 人嘲之曰 “半蒨二主 亦一主也”
7월 걸황(乞况)을 이벌찬으로 내인(奈仁)을 품주로 삼았다. 걸황은 걸숙(乞淑)의 형이고, (내인은) 니금(尼今)의 같은 어머니의 형 내식(奈食)태자의 딸이다. 어렸을 때부터 술례(述禮)태후에게 자랐기 때문에 태후의 총애가 있었고, 그 중에서 세력이 있었다. 색보(索宝)와 익종(翊宗)은 모두 내인의 같은 어머니의 형제이다. 승화(勝華)는 내인의 뜻으로 익송(翊宋)의 처가 되었는데, 이 때에 니금의 총애가 있어 정당(政堂)에 출입하여 그곳에 사는 것 같았다. 사람들이 조롱하며 말하기를 “반쪽짜리 품주가 2사람이지만, 품주는 또한 1사람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견해≫ 尼今之胞兄奈食太子之女也은 奈仁尼今之胞兄奈食太子之女也의 오기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九年 水巳 正月 孫宗伊伐飡 冬皇稟主 孫宗者孫忠之異父胞兄也 冬皇三蒨
9년(A.D.333) 수사(水巳=癸巳) 정월 손종(孫宗)을 이벌찬으로 동황(冬皇)을 품주로 삼았다. 손종은 손충(孫忠)과 다른 아버지이고,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동황은 세 번 품주가 되었다.
阿后生好山子好臨 尼今洗之
아후(阿后)가 호산(好山)의 아들 호임(好臨)을 낳았다. 니금(尼今)이 아기를 씻겼다.
置左右辨頭於理方 五道暗察使奏 宜置辯頭 巡覈地方得失 故置之
리방(理方)에 좌우변두(左右辨頭)를 두었다. 오도암찰사(五道暗察使)가 돌아다니며 지방의 잘잘못을 밝히는 변두(辯頭)를 설치함이 마땅하다고 아뢰어, 그런 연유로 설치한 것이다.
伊西君熊相禪位于宝相 自爲仙君
이서군(伊西君) 웅상(熊相)이 보상(宝相)에게 선위(禪位)를 하고 스스로 선군(仙君)이 되었다.
二月 斯由如卒本廟 三月還 往還恤民
2월 사유(斯由, 고국원왕)를 따라서(如) 졸본묘(卒本廟)에 갔다가 3월에 돌아왔다. 갔다가 돌아오며(往還) 백성을 구휼하였다.
≪견해≫ 나의 해석이 문법에 위배되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고구려왕이 졸본에 가서 시조묘에 제사지내는 일은 늘 있는 일이고, 신라사초에서 신라와 무관한 고구려와 백제의 역사를 기록한 일은 매우 드문 일인데다, 내물이사금 16년 고구려가 신라에 부여상(夫余象)을 보내준 기록이 있다.
五月 上幸嘉凰宅 宴骨女
5월 왕이 가황(嘉凰)댁을 행차하여 골녀(骨女)들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七月 召億伊伐飡 邊康稟主 召億孫光之孫 黃禮胞兄也 邊康邊骨女也 其母康安爲末昕公所嬖 邊康亦末昕公所愛 故尼今重之
7월 소억(召億)을 이벌찬으로 변강(邊康)을 품주로 삼았다. 소억은 손광(孫光)의 손자로, 황례(黃禮)의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변강은 변골(邊骨)의 딸로 그 어머니 강안(康安)은 말흔(末昕)공의 사랑을 받은 바 있다. 변강 역시 말흔공이 사랑하는 바가 있어 니금(尼今)이 중히 여겼다.
十年 木馬 正月 乞淑伊伐飡 玄雲稟主
10년(A.D.334) 목마(木馬=甲午) 정월 걸숙(乞淑)을 이벌찬으로, 현운(玄雲)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康登卒 其妻亥骨歸其妹薛骨夫貝宣 康登弟康同爭之 奪其子女奴婢 而强囚亥骨 而荒淫之 貝宣訴于理方 發其惡 流康同于伊西
2월 강등(康登)이 죽어 그의 처 해골(亥骨)이 여동생 설골(薛骨)의 남편 패선(貝宣)에게 재가하였다. 강등의 동생 강동(康同)이 패선과 다투었다. 해골의 자녀와 노비를 빼앗고, 해골을 강제로 가두어 황음(荒淫, 음란한 짓을 몹시 함)을 하였다. 패선이 이방(理方)에 소청하여, 그 악행을 밝히어 강동을 이서(伊西)로 유배를 보냈다.
五月 行花林祭
5월 화림제(花林祭)를 행하였다.
六月 行流頭 于蚊川
6월 문천(蚊川)에서 유두(流頭)를 행하였다.
七月 乃欽伊伐飡 登陽稟主 登陽助賁女也 母冬禮也 乃欽乃白之子也
7월 내흠(乃欽)을 이벌찬으로 등양(登陽)을 품주로 삼았다. 등양은 조분(助賁)의 딸이다. 어머니는 동례(冬禮)이다. 내흠은 내백(乃白)의 아들이다.
置螺人典 阿后好珍奇 多造佣物及宝案 用螺花蝶甚多 乃設螺人典 養其才
나인전(螺人典)을 설치하였다. 아후(阿后)가 진기(珍奇, 희귀하고 기이함)한 것을 좋아하여, 용물(佣物, 품앗이하여 만든 물건)과 보안(宝案, 임금의 보물을 올려놓는 받침)을 만듦에 소라껍질로 만든 꽃과 나비문양을 사용함이 심히 많았다. 이에 라인전을 세워 그 재주를 가진 자를 길렀다.
≪견해≫ 佣은 傭의 간체자로, 중국에서 간체자가 발표된 것은 1964년이고, 남당이 사망한 것은 1962년이니 佣은 俑의 다른 자가 아닌가 생각된다. A.D.335년 2월과 7월에 관련 기사가 각각 있어 판단하기 애매하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星杞生帝子杞公
성기(星杞)가 왕의 아들 기공(杞公)을 낳았다.
句麗增築平壤城
구려(句麗)가 평양성(平壤城)을 늘려 쌓았다.
十一年 靑羊 正月 捺公伊伐飡 末禮稟主 末禮尼今之胞妹 太公末昕女也
11년(A.D.335) 청양(靑羊=乙未) 정월 날공(捺公)을 이벌찬으로 말례(末禮)를 품주로 삼았다. 말례는 니금(尼今)의 포매(胞妹)이고, 태공 말흔(末昕)의 딸이다.
句麗築國北新城
구려(句麗)가 나라의 북쪽에 신성(新城)을 쌓았다.
二月 下令曰 “農爲民本 務在其時 勿以其時役 官工藝之價太高 不肯就農 徒尙浮虛 非好兆也” 害農防桑之事 一切除之 非官典則不敢私工
2월 영(令)을 내려 말하기를 “농사는 백성의 근본으로 힘써 일하여야 할 때가 있으니, 그 시기에는 부역을 시키지 말 것이며, 관(官) 공예(工藝)의 대가가 매우 높아, 농사일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백성들이 오히려 허망함에 들떠 있으니 좋지 않는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농사를 방해하거나 양잠을 막는 일은 일절 금지하였다. 관전(官典)이 아니면 사공(私工)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七月 旼達伊伐飡 淡洪稟主 淡洪以馬淡之女 善於治腫 出入宮中 有寵於阿后 諸王女多得其效 旼達継達之子 尼今寵臣也 美而善阿諛 入孫光門 事尼今及良夫 如女事夫 好淨潔 善造像刻 尼今像如其眞 置之座上 朝夕拜之 阿后命入其像于內 而驚其才 命刻后像 殆不及 后不悅 曰 “汝何善像尼今 不善于朕乎” 旼達曰 “尼今與臣同門 熟知其像故也 若天后則龍顔至嚴 臣不敢仰視 故未詳其像故也” 阿后乃命 入居宮中 察其平生 凡三年而造尼今抱后像 妙入神手刻以玉石 后大悅 命爲相而不能於政 其妻淡洪盡決之 旼達拱手而己 其子洪達責之 曰 “使我爲相 猶勝於父” 旼達笑 曰 “父子一身 汝何不代爲之乎” 又與洪達其麀淡洪相戱 如弟兄娛 曰 “怡然” 自好 曰 “一草一木 而未嘗有根 末只是一氣相通而已 一家如一草 何通而不流乎”
7월 민달(旼達)을 이벌찬으로 담홍(淡洪)을 품주로 삼았다. 담홍은 마담(馬淡)의 딸이고 종기를 치료하는 능력이 뛰어나서 궁중에 출입하여 아후(阿后)에게 총애를 얻었다. 여러 왕녀들이 그 효험을 보았다. 민달은 계달(継達)의 아들이고 니금(尼今)의 총애를 받는 신하다. 잘생기고 아유(阿諛, 아첨)를 잘하였다. 손광(孫光)의 문하에 들어가 니금과 양부(良夫)를 섬기기를 여자가 남편으로 섬기듯 하였다. 깨끗한 것을 좋아하고 형상을 조각하기를 잘하였다. 니금의 형상은 진짜 같았다. 형상을 좌상(座上, 여러 사람이 모인 자리)에 두고 아침저녁으로 절하였다. 아후의 명으로 궁 안으로 그 형상을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고) 그 재주에 경탄하였다. 후(后)의 형상을 조각하도록 명하였는데, 거의 미치지 못하였다(닮지 않았다). 후(后)가 기뻐하지 아니하며 말하기를 “너는 어찌 니금의 형상은 뛰어나지만, 짐에게는 그렇지 못한 것이냐?”라고 물었다. 민달이 말하기를 “니금과 신(臣)은 동문(同門)이어서 그 모습을 숙지(熟知, 익숙하게 앎)한 까닭입니다. 천후(天后)의 경우에는 용안(龍顔, 임금의 얼굴)이 지엄(至嚴, 매우 엄함)하여 신이 두려워서 쳐다 볼 수 없기 때문에, 그 모습이 자세하지 않는(未詳)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아후가 이에 명으로 궁중으로 들어와 살게 하여 평소의 생활을 살피도록 하였다. 무릇 3년이 지나 니금이 후(后)를 안고 있는 상(像)을 조각하였는데, 정묘한 신수(神手)의 경지에 들어 옥석(玉石)에 새기었다. 후가 크게 기뻐하여 명으로 재상으로 삼았으나 정치에 능하지 못하였다. 그의 처 담홍이 정사를 모두 결정하고, 민달은 팔짱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아들 홍달(洪達)이 책망하여 말하기를 “나로 하여금 재상에 되게 하면 아버지 보다 오히려 낫다.”라고 하였다. 민달이 웃으며 말하기를 “부자(父子)는 한 몸인데 네가 어찌 대신하지 못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또 홍달과 그 암사슴 담홍을 서로 희롱하여 제형(弟兄, 아우와 언니)과 같이 장난치며 말하기를 “기쁘고 좋도다.”라고 하고, 스스로 곧잘 말하기를 “일초일목(一草一木, 한그루의 나무와 한포기의 풀이라는 뜻으로 하찮은 사물)이 일찍이 뿌리가 있는 것이 아니어서, 어지러운 세상에 다만 이와 같이 일기(一氣, 만물의 원기)가 상통(相通, 마음과 뜻이 통함)하였을 뿐인데, 한 가족(一家)이 한포기 풀과 같으니, 어떻게 알려야 유배를 가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北鄙霜雹害穀草 句麗亦然
북쪽의 국경에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과 풀을 해쳤다. 구려(句麗) 역시 그러하였다.
≪비교≫ 1.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11년 기사
11년 2월 농사에 해가 되는 일은 모두 없애라는 명령을 내렸다.
7월 서리와 우박이 내려 곡식에 피해를 주었다.
11월 백제가 변경을 침범하였다.
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5년 기사
5년 정월 북쪽에 신성을 쌓았다.
7월 서리가 내려 곡식을 해쳤다.
十一月 夫余入寇 敗還
11월 부여(夫余)가 들어와 노략질하고 패하여 물러났다.
十二年 火猿 正月 江虹伊伐飡 遂臣稟主 遂臣者裙白之妹也 以阿后寵入宮 爲寢婢 累加秩品 遂至蒨位 江虹者臼虹之子也 末昕之嬖臣也
12년(A.D.336) 화원(火猿=丙申) 정월 강홍(江虹)을 이벌찬으로, 수신(遂臣)을 품주로 삼았다. 수신은 군백(裙白)의 여동생으로 아후(阿后)의 총애로 궁에 들어와 침비(寢婢)가 되었고, 누차로 질품(秩品, 벼슬과 품계)을 더하더니 드디어 천위(蒨位, 품주)에 이르렀다. 강홍은 구홍(臼虹)의 아들이고, 말흔(末昕)의 폐신(嬖臣, 임금에게 아첨하여 신임을 받는 신하)이다.
三月 分署五人職 布于兵官有差 弓人石人玉人屬金人 草人屬木人 皮人廚人屬火人 染人螺人屬水人 瓦人磚人屬土人 遊花閑徒 山尺水尺海尺島尺亦皆署于兵官 序以級次 獎其工程
3월 분서(分署, 본서에 딸린 작은 관청, 여기서는 병관의 말단관청인 듯.)하여 5인의 관직을 만들고, 병관(兵官)에 뿌려놓았는데 차등이 있었다. 궁인(弓人), 석인(石人), 옥인(玉人)은 금인(金人)에 속하게 하고, 초인(草人)은 목인(木人)에 속하게 하고, 피인(皮人), 주인(廚人)은 화인(火人)에 속하게 하고, 염인(染人)과 라인(螺人)은 수인(水人)에 속하게 하고, 미인(瓦人)과 전인(磚人)은 토인(土人)에 속하게 하였다. 유화(遊花, 낭도의 짝이 되는 신분이 낮은 여자들)와 한도(閑徒)인 산척(山尺), 수척(水尺), 해척(海尺), 도척(島尺) 역시 병관의 관청에 속하게 하였다. 직급과 차례로 순서를 정하여, 공정(工程, 작업이 되어가는 정도)을 장려하였다.
≪견해≫ 벼슬의 명칭이 오행과 관련이 있다.
句麗遣其臣于莘于晉貢物 請伐燕 時有大星流其西北 故恐其侵入也
구려(句麗)가 신하 우신(于莘)을 진(晉)으로 보내어 공물을 바치고, 연(燕)을 치기를 청하였다. 당시 큰 별이 그 서북쪽으로 흘러 연의 침입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비교≫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6년 기사
六年 春三月 大星流西北 遣使如晉 貢方物.
6년(A.D.336) 봄 3월 큰 별이 서북방으로 날아갔다. 사신을 진 나라에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七月 末仇伊伐飡 卵環稟主 末仇尼今之胞弟也 卵環宝卵之女也 宝卵以宝凰大母寵孫 得仙徒供物貲貨甚饒 唯以奢侈爲事 人多誹之 而末昕公素嬖之 故恃而恣意 其女又爲末仇寵妾 以至蒨
7월 말구(末仇)를 이벌찬으로 난환(卵環)을 품주로 삼았다. 말구는 니금(尼今)의 포제(胞弟)다. 난황(卵環)은 보란(宝卵)의 딸이다. 보란은 보황(宝凰)대모의 총손(寵孫)으로 선도의 공물(供物, 신이나 부처 앞에 바치는 물건)을 얻어 재물이 심히 넉넉하였다. 비록 그러하였더라고 사치를 일삼아,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말흔(末昕)공이 본디 사랑하는 바가 있어 그런 연유로 (말흔을) 믿고 마음대로 하였다. 그의 딸 또한 말구(末仇)의 총애를 받는 첩이어서 품주의 지위에 나아갔다.
行火神祭
화신(火神=丙申)제를 행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夫余遣沙鵲 請和
10월 부여(夫余)가 사작(沙鵲)을 보내어 화친을 청하였다.
十三年 朱鳥 正月 白發伊伐飡 亥康稟主
13년(A.D.337) 주조(朱鳥=丁酉) 정월 백발(白發)을 이벌찬으로 해강(亥康)을 품주로 삼았다.
二月 遣良夫白發如夫余
양부(良夫)를 백발(白發, 근구수의 장인)과 함께 부여(夫余)로 보냈다.
四月 幸黃山
4월 황산(黃山)으로 행차하였다.
加耶守克入朝貢物
가야(加耶)의 수극(守克)이 입조하여 공물(貢物)을 바쳤다.
五月 伊西仙君熊相入朝
5월 이서(伊西)의 선군(仙君) 웅상(熊相)이 입조하였다.
七月 于色伊伐飡 淡馬稟主 于色于老子也 淡馬者奈淡之姉淡乙女也
7월 우색(于色)을 이벌찬으로 담마(淡馬)를 품주로 삼았다. 우색은 우로(于老)의 아들이다. 담마(淡馬)는 내담(奈淡)의 누나 담을(淡乙)의 딸이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鷄徒奉乳帽大母爲鷄君
계도(鷄徒)가 유모(乳帽)대모를 받들어 계군(鷄君)으로 삼았다.
九月 夫余悅福等來降 初比流母餘音爲素嬭所逐 隱于平村 與其村主私通生子優福 比流爲君 優福依餘音而位之內臣 頗多擅姿 時靑稽妻沙鷄爲比流小妻 而優福慕其色 而欲得爲妻 不得乃慓異志 且與比流諸子不和 乃據北漢山而叛 比流討之 累年相持 至時優福死 其子悅福等率其衆 而請歸于我 許之 以此復欠和
9월 부여(夫余)의 열복(悅福)등이 와서 항복하였다. 처음에 비류(比流)의 어머니 여음(餘音)이 소내(素嬭)에게 쫓겨나 평촌(平村)에 숨었다. 그곳의 촌주(村主)와 사통하여 아들 우복(優福)을 낳았다. 비류가 왕이 되자 우복이 여음에게 의지하여 지위가 내신(좌평)에 나아갔다. 자못 제멋대로 하는 바가 있었다. 이때 청계(靑稽)의 처 사계(沙鷄)가 비류의 작은 처가 되었는데, 우복이 그 색(色)을 흠모하여 처로 삼고자 하였으나, 얻지 못하자 이에 급하게 다른 뜻을 품었다. 또 비류의 여러 아들과 불화하여, 북한산(北漢山)을 근거지로 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비류가 토벌하였으나, 여러 해를 상지(相持,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고 양보하지 않음)하다가 이때에 이르러 우복이 죽자, 그의 아들 열복 등이 그 무리를 이끌고 우리에게 귀순하기를 청하였다. (왕이) 허락하였다. 이것으로 다시 화친에 흠결이 생겼다.
≪비교≫ 삼국사기 백제본기 비류왕 24년 기사
二十四年 秋七月 有雲如赤烏夾日 九月 內臣佐平優福 據北漢城叛 王發兵討之
24년(327) 가을 7월에 붉은 까마귀와 같은 구름이 해를 끼고 있었다. 9월에 내신좌평 우복이 북한성(北漢城)을 근거로 하여 반란을 일으키자 왕이 군사를 발동하여 토벌하였다.
≪견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위의 기사가 없다.
十四年 黃狗 正月 連音伊伐飡 蘭石稟主 尙檍左部執書 日骨右部執書 蘭石孫忠之姊也 連音連白之子也 精於藥石 凡知草木禽石者以萬計 自連忠連白 精於採藥論 性畵以圖形示之 人呼爲藥王 性又仁慈好施 先人後己 其妻蘭石與裙白相通而生子 知而不禁 其弟連歆怒謂音 曰 “嫂爲奴汚 兄何不言” 音徐言 “草木亦難其所好 况人乎” 灌樂圃如常
14년(A.D.338) 황구(黃狗=戊戌) 정월 연음(連音)을 이벌찬으로, 난석(蘭石)을 품주로 삼았다. 상억(尙檍)을 좌부집서로, 일골(日骨)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난석은 손충(孫忠)의 언니이다. 연음은 연백(連白)의 아들이고, 약석(藥石, 약과 침)에 정통하고, 풀․나무․짐승․돌의 대강을 아는 것을 만계(萬計, 만 가지의 계책)로 삼았다. 연충(連忠)과 연백 이래로 채약론(採藥論, 약재를 캐서 거두는 일에 관한 논문)에 정통하였고, 그리기를 좋아하는 성품이어서 도형(圖形, 그림의 형태)으로 보여주었다. 사람들이 약왕(藥王)이라 불렀다. 또 성품이 인자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다른 사람이 먼저이고 자신은 나중이었다. 그의 처 난석(蘭石)이 군백(裙白)과 통하여 자식을 낳은 것을 알았으나 위협하지 아니하였다. 그의 동생 연흠(連歆)이 화를 내며 연음에게 말하기를 “형수가 아랫사람과 더러워졌는데, 형은 어찌 말하지 않느냐?”라고 하였다. 연음이 조용히 말하기를 “초목(草木) 또한 서로 좋아함에 거리낌이 있는데, 하물며 사람이로다!”라고 하며 약포(樂圃, 약재를 키우는 밭)에 물주기가 평소와 같았다.
二月 祀祖廟
2월 조상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
三月 封十二樹王
3월 12수왕(樹王)을 봉하였다.
四月 遣連白于伊西 治宝相病
4월 연백(連白)을 이서(伊西)로 보내어 보상(宝相)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다.
七月 尙盧伊伐飡 棠氏稟主 木公左部 康權右部 尙盧江盧子也 阿盧神君寵嗣也 棠氏其伯父尙尺女也 世以歌道相傳 爲歌宗
7월 상노(尙盧)를 이벌찬, 당씨(棠氏)를 품주로 삼았다. 목공(木公)을 좌부(집서)로 강권(康權)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상노는 강노(江盧)의 아들이고, 아노신군(阿盧神君)의 총사(寵嗣, 총애를 받는 후계자)이다. 당씨는 상노의 백부(伯父) 상척(尙尺)의 딸이다. 세세대로 노래로 도(道)를 서로 전하여 가종(歌宗)이 되었다.
≪견해≫ 원문에는 상노(尙盧)의 상(尙)은 尙과 彡의 합자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述禮太后崩 春秋八十三歲 所非王利音女也 或云 奈音女 性明敏 長於承上御人 十六入奈解帝後宮 生帝子奈食太子奈述宮主 下嫁于長萱公 生萱禮萱述長述長禮 薦于軍君而生尼今 又生助賁女湯禮 末昕子末仇末禮 長萱公卒 歸末昕公爲正妻 尼今卽位封爲太后 后頗預政事 盡用所朋 以報其功 又使末仇摠執軍事 以制骨門 遂成花林之中興大業 尼今泣 曰 “非吾母 朕安得此位” 乃盡甚喪 建陵甚壯 以奈述爲祭主 分骨於五夫陵 后又多嬖臣 臨崩命皆殉之 尼今以爲非后平日之志 不許之
술례(述禮)태후가 죽었는데 춘추 83세였다. 소비(所非)왕 이음(利音)의 딸이다. 혹은 내음(奈音)의 딸이라고도 한다. 성품이 명민(明敏)하여 윗사람을 받들고 사람을 거느림에 으뜸이었다. 16살에 내해제(奈解帝)의 후궁이 되어 내해의 아들 내식(奈食)태자와 내술(奈述)궁주를 낳았다. 아랫사람 장훤공(長萱公)에게 시집가서 훤례(萱禮), 훤술(萱述), 장술(長述), 장례(長禮)를 낳았다. 군군(軍君, 구도)에게 천거되어 니금(尼今)을 낳았다. 또 조분(助賁)의 딸 탕례(湯禮)를 낳았다. 말흔(末昕)의 자식 말구(末仇)와 말례(末禮)를 낳았으며, 장훤공이 죽자 말흔공에게 시집가서 말흔공의 정처(正妻)가 되었다. 니금이 즉위하자 봉하여 태후로 삼았다. 후(后)는 자못 정사에 관여하여, 모든 등용에 벗(朋, 한패)으로 한 바가 있어 그 공적에 보답하였다. 또 말구로 하여금 군사(軍事)를 총괄하도록 하고 이로써 골문(骨門)을 제압하여 드디어 화림(花林) 중흥(中興, 쇠퇴한 것을 다시 중간에 일어나게 함) 대업(大業)을 이루었다. 니금이 울면서 말하기를 “나의 어머니가 아니면 짐이 어찌 제위에 오를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에 초상에 모든 힘을 다하여, 능(陵, 무덤)을 세움에 심히 웅장하였으며, 내술을 제주(祭主)로 하였다. 다섯 남편(내해, 장훤, 구도, 조분, 말흔)의 무덤에 분골(分骨)하였다. 후는 또 폐신(嬖臣, 귀여움을 받는 신하)이 많았는데, 죽음에 임하며 모두 따라죽도록 명하였다. 니금이 평소의 후의 뜻이 아니라 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견해≫ 당시 말흔은 죽지 않았는데 말흔의 무덤에 분골(分骨)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또 분골(分骨)은 화장(火葬)하여 뼈를 나눈다는 뜻으로 판단되는데 시신도 없는 무덤을 만든다는 뜻일까?
十一月 尼今入海宅 擇新上綃姬 行月池祭 因阿后不豫 未行而還
11월 니금이 해택(海宅)으로 들어와 새로이 상초희(上綃姬, 궁녀로 추측)를 뽑아 월지제(月池祭)를 행하려 하였다. 아후(阿后)가 편안하지 못하여, 행하지 않고 돌아왔다.
十五年 土豕 正月 康檍伊伐飡 宣帽稟主 乳帽女也 其父孫光子宣德也 康檍者連檍子也
15년(A.D.339) 토시(土豕=己亥) 정월 강억(康檍)을 이벌찬으로 선모(宣帽)를 품주로 삼았다. (선모는) 유모(乳帽)의 딸이고, 그의 아버지는 손광(孫光)의 아들 선덕(宣德)이다. 강억은 연억(連檍)의 아들이다.
二月 會群臣于南堂 議政事得失 宅師頭上千夫等奏 曰 “今南堂旣新 而皇居未遑 請以農暇改作宮室” 尼今曰 “朕以不德忝位 災蘗未息 何可勞民而自營居宅乎 神舍廟院 公舍頹落 者者爲先治之” 時物力漸富 工手且豐 故下民之居 亦多以瓦葺粉壁 而帝儉如此
2월 군신(群臣)들이 남당(南堂)에 모여 정사(政事)의 잘잘못을 의논하였다. 택사두상(宅師頭上) 천부(千夫) 등이 여쭈어 말하기를 “지금 남당은 개선됨이 없으니, 황거(皇居, 임금의 거처)가 한가할 날이 없으니, 농사가 한가로운 때에 궁실을 고쳐짓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니금이 말하기를 “짐이 부덕하여 이 자리가 황송할 따름이고, 재앙의 그루터기가 아직 쉼 쉬고 있으니, 어찌 백성을 수고스럽게 하여 스스로 살집을 짓는 것이 옳은 일이겠느냐? 신사(神舍, 신령을 모시는 사당)와 묘원(廟院, 종묘와 서원)을 고치고 공사(公舍, 관공서)의 무너져 떨어진 곳들을 고쳐라. 이것들이 먼저 수리하여야 할 곳이다.” 라고 하였다. 당시 물력(物力, 물자와 노력, 집짓는 데 쓰는 돌, 기와, 흙 따위를 일컬음)이 점점 부유하게 되고 장인의 재주 또한 풍성하여 하민(下民, 일반 백성)의 거처 또한 기와로 지붕을 잇고 분으로 벽을 칠하였다. 왕의 검소함이 이와 같았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15년 기사
15년 2월, 신하들이 궁궐을 다시 짓기를 청하였으나 왕은 백성들에게 노동을 시키는 것은 중대사라고 여겨 이에 따르지 않았다.
七月 馬狗兩徒相鬪于北川 發兵禁之 馬徒玉帽太后徒 而狗徒仇道世神徒 故狗以馬爲女而戱之 馬以爲玉帽后也 仇道臣也 不敢辱之 况今阿后爲馬 而末昕爲狗 是大不敬也 狗徒信 狗治天下之說 而不屈 裙白以阿后命 欲諭馬徒狗徒 狗徒以裙白爲淫馬 以泥水射之 馬徒怒 遂相石戰 多傷害
7월 마도(馬徒)와 구도(狗徒)가 북천(北川)에서 서로 싸워, 병사를 일으켜 억제하였다. 마도는 옥모(玉帽)태후의 무리이고, 구도(狗徒)는 구도세신(仇道世神)의 무리다. 그런 연유로 구도(狗徒)는 마도(馬徒)를 딸이라며 희롱하였다. 마도(馬徒)는 옥모태후는 후(后)이고, 구도(狗徒)는 신하라고 감히 모욕하지 않았다. 하물며 지금의 아후(阿后)는 마도(馬徒)이고, 말흔(末昕)은 구도(狗徒)인데 이것이 대불경(大不敬, 존경하는 마음이 없는 무례함)하였다. 구도(狗徒)의 무리는 구도(狗徒)가 천하를 다스리게 된다는 설을 믿었기에 굴하지 않았다. 군백(裙白)은 아후(阿后)의 명령으로 마도(馬徒)와 구도(狗徒)를 타이르고자 하였다. 구도(狗徒)가 군백(裙白)을 음마(淫馬)라고 하여 진흙탕 물을 쏘았는데, 마도(馬徒)가 화를 내어 드디어 서로 돌을 던지며 싸우게 이르러 많은 사람들이 다치게 이르렀다.
≪견해≫ 말흔(末昕)은 미추의 계부(繼父)이고, 아후(阿后)는 미추의 처이니, 시아버지와 며느리관계라고 놀린 것으로 생각된다.
尙檍伊伐飡 德帽稟主 德帽宣德胞妹 尙檍棠氏胞兄也 尙檍之母康檍之父連檍之妹也 故爲康檍從弟
상억(尙檍)을 이벌찬으로 덕모(德帽)를 품주로 삼았다. 덕모는 선덕(宣德)의 포매(胞妹)다. 상억은 당씨(棠氏)의 포형(胞兄,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상억의 어머니(檍氏)는 강억(康檍)의 아버지 연억(連檍)의 여동생이다. 그런 까닭에 상억은 강억(康檍)의 종제(從弟)다.
≪견해≫ 연억과 억씨는 오누이고, 상억은 억씨의 아들이고 강억은 연억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상억과 강억이 사촌간이 된다는 뜻이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九月 燕皝伐麗新城 克之 斯由乞盟 乃還
9월 연(燕)의 모용황이 고구려의 신성(新城)을 쳐서 이겼다. 사유(斯由, 고국원왕)가 동맹을 구걸하고 곧 돌아왔다.
≪비교≫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9년 기사
9년(A.D.339) 연왕(燕王) 모용황이 침입하여 군사가 신성에 이르렀다. 왕이 동맹을 구걸하고 곧 돌아갔다.
幸命元宅 賜衣馬及奴婢 尼今傷于老之非命 厚遺其妻子 而恤之
명원(命元)댁에 행차하여 옷과 말과 노비를 내렸다. 니금(尼今)은 우로(于老)의 비명(非命, 제명대로 살지 못함)을 아파하며, 그 남겨진 처자식을 후대하고 동정한 것이다.
十月 良夫率諸仙徒 行經祭于四街 先是孫光集經 而良夫傳其經 至是畢成故也
10월 양부(良夫)가 모든 선도(仙徒)를 거느리고 네거리에서 경제(經祭, 경전을 완성한 것에 대한 제사)를 행하였다. 앞서 손광(孫光)이 경전을 모았고, 양부가 그 경전을 전수받아, 이때에 이르러 마침내 완성한 까닭이다.
十六年 白鼠 正月 日骨伊伐飡 千氏稟主 貝宣左部 碧環右部 日骨日白子也 千氏助賁女也
16년(A.D.340) 백서(白鼠=庚子) 정월 일골(日骨)을 이벌찬으로 천씨(千氏)를 품주로 삼았다. 패선(貝宣)을 좌부(집서)로, 벽환(碧環)을 우부(집서)로 삼았다. 일골은 일백(日白)의 아들이고, 천씨는 조분(助賁)의 딸이다.
命骨女力蠶絲 勿荒奢
골녀(骨女)에게 잠사(蠶絲)에 힘쓰도록 명하고, 허황되게 사치하는 것을 금하였다.
三月 碧芝生儒禮子芝公
3월 벽지(碧芝)가 유례(儒禮)의 아들 지공(芝公)을 낳았다.
斯由以其弟玟朝于燕皝
사유(斯由)가 그의 동생 민(玟)을 연나라 모용황의 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비교≫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0년 기사
10년(A.D.340) 왕이 세자를 보내어 연 나라 임금 모용황의 조회에 참석하게 하였다.
七月 木公伊伐飡 山帽稟主 木公助賁子也 山帽宣帽胞妹也 木公好鶴 家有十二鶴舍 人以爲鶴太子 性廉雅 不喜世事 山帽與其嬖專政
7월 목공(木公)을 이벌찬으로 산모(山帽)를 품주로 삼았다. 목공은 조분(助賁)의 아들이고, 산모는 선모(宣帽)의 포매(胞妹)다. 목공은 학을 좋아하여 집에 12개의 학의 둥우리가 있었다. 사람들이 이 때문에 학태자(鶴太子)라 하였다. 성품이 청렴하고 우아하여 세상일을 좋아하지 않았다. 산모와 (산모의) 총애를 받는 자들이 정치를 오로지 하였다.
八月 行嘉俳
8월 가배(嘉俳)를 행하였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二月 入海宅 行沾解祭
12월 해택(海宅)으로 들어와 첨해(沾解)의 제사를 지냈다.
十七年 白牛 正月 康權伊伐飡 山帽再主 康權康檍之異父弟也
17년(A.D.341) 백우(白牛=辛丑) 강권(康權)을 이벌찬으로 산모(山帽)를 다시 품주로 삼았다. 강권은 강억(康檍)의 다른 아버지의 동생이다.
四月 暴風拔木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七月 貝宣伊伐飡 薛骨稟主 貝宣宣帽之異母弟也 薛骨薛忠女也 與日骨同母而異父
7월 패선(貝宣)을 이벌찬으로 설골(薛骨)을 품주로 삼았다. 패선은 선모(宣帽)의 다른 어머니의 동생이다. 설골은 설충(薛忠)의 딸인데, 일골(日骨)과는 어머니가 같고 아버지가 다르다.
燕以慕容恪鎭平郭
연(燕)이 모용각(慕容恪)으로 하여금 평곽(平郭)에 진(鎭)을 치게 하였다.
十月 夫余來圍槐谷城 命海飡正源領兵 拒之 賊聞之佯退 以誘之 正源不追
10월 부여(夫余)의 군사가 와서 괴곡성(槐谷城)을 포위하였다. 해찬(海飡) 정원(正源)으로 하여금 병사를 통솔하도록 하여 막도록 하였다. 적들이 그 소식을 듣고 물러나는 체하며 우리 병사들을 유혹하였다. 정원이 추격하지 않았다.
加耶女君河理智殂 女宣失継立 仍以守克爲夫
가야(加耶)의 여자 임금 하리지(河理智)가 죽었다, 딸 선실(宣失)이 계승하여 왕이 되었다. 거듭 수극(守克)을 남편으로 삼았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17년 기사
17년 4월 폭풍이 불어 나무가 뽑혔다.
10월 백제 군사가 와서 괴곡성을 포위하였다. 파진찬 정원으로 하여금 군사를 이끌고 가서 방어하게 하였다.
十八年 水虎 正月 淡老伊伐飡 軟凰稟主 淡老遤老子也 與于色妻淡馬爲胞兄弟 軟凰沾解女也
18년(A.D.342) 수호(水虎=壬寅) 정월 담노(淡老)를 이벌찬으로 연황(軟凰)을 품주로 삼았다. 담노는 휭노의 아들로, 우색(于色)의 처 담마(淡馬)와 같은 어머니의 오누이다. 연황은 첨해(沾解)의 딸이다.
二月 命儒禮太子 巡視州郡
2월 유례(儒禮)태자에게 명하여 주군(州郡)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도록 하였다.
句麗修葺丸都城 又築國內城
구려가 환도성의 지붕을 수리하고, 동시에 국내성을 쌓았다.
≪비교≫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년 2월 기사
12년(A.D.342) 2월 환도성의 지붕을 수리하고, 동시에 국내성을 쌓았다.
七月 公宣伊伐飡 安宣稟主 安宣安骨女也 年二十 以帝寵爲主 與發狗羘尺等 呼作艾林 公宣公羊子也 奈解帝孫也 爲人淸雅有仙風
7월 공선(公宣)을 이벌찬으로 안선(安宣)을 품주로 삼았다. 안선은 안골(安骨)의 딸인데, 나이 20세로 왕의 총애로 품주가 되었다. 발구(發狗), 장척(羘尺)등과 더불어 미녀 집단(林, 무리)이라고 부른다. 공선은 공양(公羊)의 아들이며, 내해(奈解)제의 손자다. 사람의 됨됨이가 청아(淸雅)하며 선인과 같은 풍채가 있었다.
九月 行大場
9월 대장(大場)을 행하였다.
十月 燕大破斯由 執其母妻去
10월 연(燕, 전연)이 사유(斯由, 고구려 고국원왕)를 크게 깨뜨리고, 사유의 어머니와 처를 붙잡아 데리고 갔다.
十九年 黑兎 正月 千夫伊伐飡 虎舟稟主 千夫夫良子也 虎舟舟宣女也
19년(A.D.343) 흑토(黑兎=癸卯) 정월 천부(千夫)를 이벌찬으로 호주(虎舟)를 품주로 삼았다. 천부는 부량(夫良)의 아들이고 호주는 주선(舟宣)의 딸이다.
四月 旱 錄囚
4월 가물었다. 죄수들을 (억울함이 있는지) 조사하였다.
七月 碧環伊伐飡 狒氏稟主 碧環碧隆之子 與末仇妾卵環同母 爲末昕公寵臣 狒氏亦無品女 而得末昕公寵 尼今重之 竟入蒨
7월 벽환(碧環)을 이벌찬으로 비씨(狒氏)를 품주로 삼았다. 벽환은 벽융(碧隆)의 아들이다. 말구(末仇)의 첩 난환(卵環)과 동모(同母)이고, 말흔(末昕)공의 총애를 받는 신하였다. 비씨(狒氏, 吳에서 건너온 사람) 역시 골품이 없는 여자였는데, 말흔의 공의 총애를 얻어 니금(尼今)이 중히 여겨, 결국 드디어 품주의 반열에 올랐다.
十一月 設眞齋 于海宅
11월 해택(海宅)에 진재(眞齋)를 설치하였다.
≪비교≫ 진재(眞齋)는 불교식 용어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아도본비(我道本碑)의 기록에는 불교가 미추왕 때에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二十年 靑龍 正月 謁秀伊伐飡 淡山稟主 弘權兵官伊飡 良質一吉飡 光謙沙飡 光謙年少 而詳文故擢 爲執事郞 謁秀謁白之子 淡山淡馬胞妹也
20년(A.D.344) 청룡(靑龍=甲辰) 정월 알수(謁秀)를 이벌찬으로 담산(淡山)을 품주로 삼았다. 홍권(弘權)을 병관이찬, 양질(良質)을 일길찬, 광겸(光謙)을 사찬으로 삼았다. 광겸은 나이가 어리나, 상문(詳文, 관청명, 長은 미암)이 발탁한 연유로 집사랑(執事郞)으로 삼았다. 알수는 알백(謁白)의 아들이고, 담산은 담마(淡馬)의 포매(胞妹)다.
二月 謁祖廟
2월 조상의 사당을 알현하였다.
三月 行靑龍祭
3월 청룡제(靑龍祭)를 행하였다.
七月 虎宣伊伐飡 白欽稟主 虎宣虎舟胞兄 白欽乃欽胞妹也
7월 호선(虎宣)을 이벌찬으로 백흠(白欽)을 품주로 삼았다. 호선은 호주(虎舟)의 포형(胞兄, 같은 어머니의 오빠)이다. 백흠은 내흠(乃欽)의 포매(胞妹)다.
九月 大閱楊山西
9월 양산(楊山)의 서쪽에서 크게 사열하였다.
≪비교≫ 신라본기 미추이사금 20년 기사
20년 정월 홍권을 이찬, 양질을 일길찬, 광겸을 사찬으로 임명하였다.
2월 시조묘에 참배하였다.
9월 양산 서쪽에서 크게 군사를 사열하였다.
夫余比流殂 汾西子契立
부여(夫余)의 비류(比流)가 죽어 분서(汾西)의 아들 계(契)가 섰다.
≪비교≫ 백제본기 비류왕 41년 기사
41년(A.D.344) 10월 왕이 죽었다.
十月 角干眞斗卒 年七十三 眞斗與其妻雲氏修仙史五十編 骨史三十編 吏史二十編 性重厚篤學 久掌版籍
10월 각간 진두(眞斗)가 죽었는데 춘추 73세였다. 진두(眞斗)와 그의 처 운씨(雲氏)는 선사(仙史) 50편, 골사(骨史) 30편, 리사(吏史) 20편을 고쳐 지었다. 성품이 중후(重厚)하고 학문에 충실하였는데, 오랫동안 판적(版籍, 호구에 관한 책, 서책)을 담당하였다.
≪견해≫ 신라왕실과 귀족의 가계도가 자세한 연유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