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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신라)

신라의 불교전래(삼국유사)

작성자정성일|작성시간10.04.16|조회수124 목록 댓글 0


신라의 불교전래(삼국유사)


阿道基羅〈一作我道 又阿頭〉

아도(阿道)가 신라에 불교의 기초를 세우다.〈어떤 사서에는 我道(아도), 또는 阿頭(아두)라고 한다.〉


① 新羅本記第四云 第十九訥祗王時 沙門墨胡子 自高麗至一善郡 郡人毛禮〈或作毛祿〉 於家中作堀室安置

② 時梁遺使賜衣著香物〈高得相詠史詩云 梁遺使僧曰元表 宣送溟檀及經像〉 君臣不知其香名與其所用 遣人齎香遍問國中 墨胡子見之 曰 “此之謂香也 焚之則香氣芬馥 所以達誠於神聖 神聖未有過於三寶 若燒此發願 則必靈應” 〈訥祗在晉宋之世 而云梁遣使 恐誤〉 時王女病革 使召墨胡子焚香表誓 王女之病尋愈 王喜 厚加賚貺 俄而不知所歸

③ 又至二十一毗處王時 有我道和尙 與侍者三人 亦來毛禮家 儀表似墨胡子 住數年 無疾而終 其侍者三人留住 講讀經律 往往有信奉者 〈有注云與本碑及諸傳記殊異 又高僧傳云西竺人 或云從吳來〉


① 신라본기(新羅本紀) 제4권에는 제19대 눌지왕(訥祗王, 재위A.D.417 ~ A.D.458)때 사문(沙門, 출가한 중을 달리 이르는 말) 묵호자(墨胡子)가 고(구)려에서 일선군(一善郡)에 이르자 (일선)군 사람 모례(毛禮)〈어떤 사서에는 毛祿(모록)이라고 하였다.〉가 집 안에 굴을 파서 방을 만들어 편안히 있게 하였다고 한다.


② 당시 양(梁)나라에서 사신을 보내 의복과 향(香)을 보냈다.〈고득상(高得相)의 영사시(詠史詩)에는 양(梁)나라에 보낸 사승(使僧)을 원표(元表)라고 하는데 명단(溟檀)과 불상(佛像)을 보내 왔다고 한다.〉 군신(君臣)들은 그 향의 이름과 쓰는 방법을 몰라서 이에 사람을 시켜 향을 가져가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묻게 하였다. 묵호자(墨胡子)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이것은 향(香)이라고 하는 것으로, 태우면 향기가 매우 강하여 정성이 이르면 신성(神聖)에 이르는 까닭에, 신성(神聖)은 삼보(三寶, 불교의 佛, 法, 僧)보다 낫지 아니하나(아래이나), 만일 이것을 태우고 발원(發願, 소망하는 것을 생각함)하면 반드시 신령이 응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눌지왕은 진(晉, 동진)․송(宋)대에 재위 하였으니, 양(梁)나라가 사신을 보냈다고 한 것은 아마도 잘못일 것이다.〉 당시 왕녀(王女)의 병이 위독하여 묵호자를 불러 향을 태우고 (소망을) 고하여 아뢰니 왕녀의 병이 이윽고 나았다. 왕이 기뻐하여 하사품을 후히 주었는데 갑자기 그가 간 곳을 알 수가 없었다.


≪견해≫ 신라가 중국과 사신을 교환한 일은 법흥왕(재위A.D.514 ~ A.D.540) 재위기간중이며 양(梁)나라와 통한 것이므로 묵호(墨胡)가 나타난 눌지왕의 재위기에 양(梁)나라에서 향(香)이 전래되었다는 것은 잘못이다.


③ 또 21대 비처왕(毗處王, 소지마립간, A.D.479 ~ A.D.500) 때에 이르러 아도화상(我道和尙)이 시자(侍者, 설법자를 모시는 사람) 세 사람을 데리고 또한 모례(毛禮)의 집에 왔는데 의표(儀表, 거동과 용모)가 묵호자와 비슷하였다. 수년을 살다가 아무 병도 없이 죽었는데, 그 시자 세 사람은 머물러 살면서 경(經, 불경)과 율(律, 계율)을 강독(講讀, 글을 강의, 토론하여 읽음. 책을 읽고 뜻을 밝힘)하니 왕왕(往往, 이따금) 신봉(信奉)하는 사람이 생겼다.〈注(주)가 있는데 본비(本碑, 아도본비)와 모든 전기(傳記, 사람을 일대를 기록한 것)와는 전혀 다르다고 하였다. 또 고승전(高僧傳)에는 (아도는) 서천축(西天竺)사람이고, 혹은 오(吳)나라사람을 따라 왔다고 한다.


≪견해≫ 소지마립간 재위기에 온 사람은 묵호(墨胡)가 아니라 묵호를 닮은 사람일 뿐이며, 이분의 이름도 아도(阿道)인지는 알 수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아도(阿道)가 고구려에 온 것이 소수림왕 즉위 4년 갑술(甲戌, A.D.374)의 일이므로 기년에 모순이 생긴다.


남당유고 신라사초에는 묵호가 모례(毛禮)와의 사이에 아들이 있었다고 하였고, 소지마립간 재위기에 모례가 중(僧)을 모아 불법을 설파하였다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모두 묵호를 닮았다고 하였으므로 묵호의 아들이 나타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 소수림왕 4년(A.D.374) 동진(東晋, A.D.317~A.D.420)으로부터 온 아도(阿道)는 누구인가?

고승전(高僧傳)에는 아도(阿道)가 서천축(西天竺)사람으로, 오(吳, A.D.229~A.D.280)나라사람을 따라 왔다고 하였으므로 오나라의 멸망시기와 차이가 있다. 남당유고에는 오(吳)나라가 멸망했음에도 그 지방 사람들을 계속 오인(吳人, 오나라 사람)으로 지칭하고 있으므로 신라에 온 아도(阿道)는 동진(東晋)의 오(吳)를 통하여 입국한 것으로 생각된다.


(중략)


④ 未幾未雛王卽世 國人將害之 師還毛祿家 自作塚 閉戶自絶 遂不復現 因此大敎亦廢 至二十三法興大王 以蕭梁天監十三年甲午登位 乃興釋氏 距未雛王癸未之歲二百五十二年 道寧所言三千餘月驗矣

얼마 안 되어 미추왕(未雛王, 미추이사금)이 즉세(卽世, 사람이 죽어 세상을 떠남)하자 나라 사람들이 그를 해치려 하므로, 스님은 모록(毛祿)의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무덤을 만들어 문을 닫고 자절(自絶, 자살 혹은 세상과의 인연을 끊다.)하여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대교(大敎, 화엄경을 일컫는 말, 불교)도 또한 쇠퇴하게 되었다. 23대 법흥대왕(法興大王)이 소량(蕭梁) 천감(天監) 13년 갑오(甲午, A.D.514)에 즉위하여 석씨(釋氏, 석가, 불교)를 일으키니 미추왕 계미(癸未, A.D.263)에서 거리가 252년이 된다. (고)도녕(道寧)이 예언한 3,000여 달이 맞았다 할 것이다.


≪견해≫ 남당유고를 살펴보면 신라사초 미추이사금기에만 불교용어가 등장하여, 초벌 해석 시 난감했던 부분을 삼국유사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신라사초를 살펴보면 미추(味鄒)의 스승인 손광(孫光)은 오(吳)나라에서 수학한 일이 있었고, 미암(米諳)을 따라 오(吳)나라 사람들이 신라로 건너온 기록이 있으므로, 오(吳)나라 사람을 따라 아도(阿道)가 들어왔을 가능성이 있으며,


또한 신라사초에 의하면 미추가 죽은 것이 362년의 일이고, 죽엽(竹葉)을 귀에 꽂은 병사들이 나타난 것이 363년의 일인데, 미추가 사사로이 기르던 무리들이 나라에 공을 세우고자 한 것은 아닐까? 아도(阿道)가 고구려로 간 소수림왕 4년(A.D.374)과 시기가 어울린다.


이에 대하여 미추왕릉 발굴 고고학자들에게 숙제를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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