基臨帝四年 赤兎 正月 光明神后以帝爲伊伐飡 命執內外政事 以妃蝶皇爲稟主 先是 良質密勸于基臨帝 曰 “神后好色 而多寵 不若早定大策 天下者乃阿后之天下也” 基臨曰 “朕非貪夫 汝何以鄙言間吾夫妻乎” 良質妻螺玉 恐得罪於神后 遂告于神后 后怒流良質於捺己 以帝摠政 螺玉味鄒女也 美而善歌 而性奸詐好淫 以光謙蘭大良質爲三夫 三爲稟主 又得基臨及帝寵 追勢媚之 光謙子玉謙疾 良質專 其母密聞良質謀 而脅之 螺玉乃懼 先告之 欲以其功繼爲帝之稟主 神后許之 帝曰 “螺玉奸詐 陷其所夫 非人情也” 后曰 “雖曰奸人 爲汝我而告之 不可不報其忠也” 帝曰 “玉謙密聞於床下 而脅之 故懼而告之 豈眞忠乎” 后曰 “朕已許之 汝勿多言” 乃强命吉之 螺玉大喜 盛飾而迎夜 帝於枕席 無喜色 螺玉曰 “郞君前日窃我於公私之間 不勝喜色 今夜始得爲妻 而不喜何也” 帝曰 “恐汝好陷所夫故耳” 螺玉愀然 良久 曰 “吾所慕者 惟郞君故耳 今郎君不信 吾豈貪稟主者乎” 帝笑 曰 “汝旣三稟主 吾妻蝶皇 未嘗一稟主 誰其貪乎” 螺玉乃謝而退 遂以蝶皇代之 二月 帝母命元宮主 行赤兎祭三日 儒禮帝崩 三月四月 繼以旱災 螺玉密諷以帝咎 帝乃自責請免 后不許之 索流言者罪之 小息 未幾基臨胞弟好臨公薨 又有亂言 及八月地震 而泉湧 九月又大震 壞屋傷人甚多 亂言復大興 帝力辭之 神后曰 “朕欲以汝爲夫 豈爲亂言者 所擾乎” 乃推帝 爲副君 以蝶皇兄夫急利 代帝爲伊伐飡 素皇爲稟主 而行政事 自是大權歸於帝 人不敢亂言 帝以康世女千康 妻夫余太子吉湏 急利女水皇 妻倭太子 以柔遠懷近 命世己爲大日大師 以統仙衆 世己母宣秋爲稟主 山公爲伊伐飡 山公以帝同年 爲丑徒故也 宣秋者味鄒帝女也 以儒禮帝正妃 多私寵 山公少一丑 情愛敦密 至是迎爲妻 初山公年十六 密通宣秋 生女山己 時帝通山公母山帽生子帽公 故帝以山公爲子 儒禮卽祚 宣秋又生 山公子中己 儒禮素含之因事 流于推火 時山公新娶茜因宮主 交情甚密 不能相別 終夜對泣 山公曰 “色事非人力 故吾有此過 若吾之出 無以自慰 則當迎訖解 無與他人好” 茜因曰 “諾” 山公乃迎帝 而托之 帝大喜 曰 “吾得汝妻而樂 汝無妻而在外可乎 吾有美婢 可以與汝幷給庄奴婢” 時娠帝女 不肯之 帝諭之 曰 “山與我同體 非汝則 誰能爲我溫之乎” 婢乃從之 山公在謫 凡十五年 而儒禮退位時 帝亦有寵於神后 力薦山公入 爲大倉師 盖治推火庄 而能於稼穡故也 婢所生帝女 是時己長 亦爲山公妻 帝乃還茜因 爲山公妻 賞婢之功 爲品母 是爲白婢 終身不嫁他人 而唯事帝及山公而已 儒禮帝崩 宣秋願爲山公妻 神后許之 茜因復爲帝副妻 至是宣秋欲以稟主 讓于茜因 帝以茜少 命讓之 宣秋外辭而內喜 遂入政堂 其子世己諫 曰 “母以吾父之妻 好淫 山公使之得罪 居外 今又奪其妻職 恐有外論” 宣秋泣 曰 “吾爲山公妻 則死無願矣 汝其恕我” 世己不敢復言 世己以仙望見重 亦以母力致位 故雖以其母之好淫縱慾 自悶于心 亦不能力止之 常以不能匡 母爲己過 帝賢之 任以仙政 與山公茜公等 互相表裡 以彰帝德 翌年 茜公伊伐飡 冬月稟主 冬月者螺玉之異父妹也 美如螺玉 而性甚聰敏 帝甚愛之 與茜因常奉左右枕 命冬月主錦房 茜因主玉房 執衣食之政 至是茜因不得爲稟主 而冬月得之 茜因之臣慨然 曰 “吾君重錦 而輕玉 臣等恥爲廚” 茜因笑 曰 “汝等重稟主 而吾重副妻而已 爲君盡旨樂莫大焉 何言恥乎” 衆皆歎服 帝聞之 益愛茜因 乃告于神后 曰 “臣位在副君 而政不由臣 反不如稟主 願以臣妻 授以宣主之職 使掌處決之 權置于稟主之上 則臣之位 名實庶可合” 神后笑 曰 “冬月亦汝妾 汝何欲立新法乎” 帝乃奏 “茜因有愛臣之言 臣不復不報” 后乃笑 而許之 宣主之官 自此始焉 冬月免 基臨帝寵姬登末 代冬月妹門月 又其次亦帝寵也 時人憤之 曰 “神國之政 豈可獨出 於螺月之門乎” 反側者欲 以是危帝 帝不悅請退 神后乃讓基臨帝 基臨怒處禮生宮 不與后 見者數月 適値白馬祭 太史奏 “星變 當改新元” 乃迎帝 爲繼夫 卽祚於明宮 國人虛不悅 慕頌歌連天 后與帝 夜登神樓 賞獻歌老人十二人 皆賜母牛 騎而歸 命神牛省 飾王牛雌牡 色黃卞角者 送桃山 受民新禮
기림제(基臨帝) 4년(A.D.367) 적토(赤兎=丁卯) 정월 광명신후(光明神后)가 왕을 이벌찬으로 삼아 내외(內外, 나라 안과 밖)의 정사(政事)를 처리하도록 하고, 왕의 비(妃) 접황(蝶皇)을 품주로 삼았다. 이전에 양질(良質)이 기림제에게 은밀히 권하여 말하기를 “신후는 호색(好色)하여 총애하는 자가 많으니, 만일 일찍이 큰 계책을 정(定, 준비하다)하지 아니하면 천하는 이에 아후(阿后)의 세상(아이혜가 왕위 승계서열 및 조정의 의견을 무시하고 자신이 총애하는 자를 왕으로 세우던 일)이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기림이 말하기를 “짐은 탐부(貪夫, 탐욕스런 사내, 욕심이 많은 俗人)가 아니니, 너는 어찌하여 더러운 말로 우리 부부사이를 이간질 하느냐!”하고 하였다. 양질의 처 라옥(螺玉)이 신후에게 죄를 짓는 것이 두려워 드디어 신후에게 알리기에 이르렀다. 후가 노하여 양질을 날기(捺己)에 유배 보내고, 왕에게 정사를 총괄하도록 하였다. 라옥은 미추(味鄒)의 딸로 아름답고 노래를 잘하며 성품이 간사하고 음탕함을 좋아하여, 광겸(光謙), 난대(蘭大), 양질 셋을 남편으로 삼아 3번 품주가 되었다. 또 기림과 왕의 총애를 얻으며 권세를 쫓아 아첨하였다. 광겸의 아들 옥겸(玉謙)이 병이 들자 양질이 전담하였다. 그의 어머니(라옥)가 양질의 모의함을 은밀히 들었다고 하자 라옥을 위협하였다. 라옥이 이에 두려워하며 먼저 알리고, 그 공으로 계승하여 왕의 품주자리가 되고자 하니 신후가 허락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라옥은 간사하게 남편을 함정에 빠뜨렸으니 인정이 없는 여자입니다.”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비록 간사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라도 너와 나를 위해 고한 것이니 그 충심을 보답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옥겸의 병상 아래에서 은밀히 들은 것으로 위협을 받자, 두려운 까닭에 고한 것이니 어찌 참된 충성이라 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후가 말하기를 “짐이 이미 허락한 바이니, 너는 많은 말을 하지마라.”라고 하였다. 이에 강경하게 결혼을 하도록 명하였다. 라옥이 크게 기뻐하며 성대히 치장하고 밤을 맞아들였다. 왕이 침석에서 기뻐하는 기색이 없으니, 라옥이 말하기를 “낭군은 예전 공사지간(公私之間)에 나를 훔치고 기쁜 얼굴을 이기지 못하더니, 오늘 밤 바야흐로 처로 얻게 되었음에도, 어찌 기쁜 얼굴이 아닙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말하기를 “네가 남편을 함정에 빠뜨림을 좋아하여 두려워할 까닭일 뿐이다.”라고 하였다. 라옥이 근심한 연후 한참이 지나 말하기를 “내가 그리워했던 사람은 오로지 낭군이었던 까닭이고, 지금 낭군이 믿지 아니하니 내가 어찌 품주의 자리를 희망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왕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는 이미 세 번 품주를 지냈고, 나의 처 접황(蝶皇)은 일찍이 한번도 품주를 지내지 않았으니 누가 품주의 자리를 희망하겠느냐?”라고 하였다. 라옥이 이에 사양하며 물러나니, 드디어 접황으로 대신하게 되었다. 2월 왕의 어머니 명원(命元)궁주가 적토제(赤兎祭)를 3일 동안 행하였는데 유례(儒禮)제가 죽었다. 3월과 4월에 계속하여 가뭄으로 인한 재앙이 들었다. 라옥이 왕의 허물을 은밀히 풍자하였다. 왕이 이에 자책하여 면직하기를 청하였다. 후가 허락하지 아니며 유언비어를 날포 하는 자를 색출하여 벌을 주었다. 간신히 숨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기림제의 포제(胞弟, 어머니가 같은 동생) 호임(好臨)공이 죽었다. 또 난언(亂言, 막되고 잡된 말)이 나돌았다. 8월 지진에 이르러는 샘이 솟구쳐 오르고, 9월에 또 대지진이 있어 집이 무너지고 다친 사람이 매우 많았다. 난언(亂言)이 다시 크게 일어나자 왕이 사직하고자 애썼다. 신후가 말하기를 “짐이 너를 남편으로 삼고자 하는데, 어찌 난언(亂言)에 (마음을) 움직이느냐?”라고 하였다. 이에 왕을 천거하여 부군으로 삼았다. 접황의 형부 급리(急利)를 왕을 대신하여 이벌찬으로 삼고, 소황(素皇)을 품주로 삼아 정사를 행하였다. 이때부터 대권(大權, 국가를 통치하는 권한)이 왕에게 돌아왔다. 사람들은 감히 난언(亂言)을 하지 않았다. 왕이 강세(康世)의 딸 천강(千康)을 부여(夫余)태자 길회(吉湏)에게 시집보내고, 급리(急利)의 딸 수황(水皇)을 왜(倭)태자에게 시집보냈다. 먼 나라는 유화하고 가까운 나라는 달래기 위해서다.(아마도 신라가 백제와 왜와 맺은 혼사는 백제와 왜가 원했던 혼사이나, 신라로서는 내키지 않았던 혼사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백제와 왜로 시집갔던 신라녀는 왕녀 출신이 아닌 채녀(采女)일 뿐인데 신라가 내키지 않았던 연유는 무엇일까? 당시 백제와 왜의 혼인 당사자는 모두 왕위 계승자의 신분인 태자(太子)인데, 신라에서는 신분이 미미한 여자를 간택한 연유는 무엇일까? 앞에서 밝혔던 것처럼 강세의 가계는 박혁거세왕의 남계(男系) 직계후손이나 진골에서 뒤쳐져 있으며, 왜로 시집보낸 급리의 가계는 신라가 기휘(忌諱)한 연유로 밝힐 수 없음이 안타깝다. 당시에 신라의 채녀에게 장가간 백제와 왜의 태자는 침류와 응신으로 생각된다. 이 역시도 당대에 소극적으로 기재하여 살피기 어렵다. 당시에 신라가 백제와 왜와 맺은 혼사는 왕실간의 혼인으로 신라에서도 왕녀를 시집보냄이 그 격식에 맞는 것이다. 오히려 반대로 백제, 왜와의 혼사에 신라 석(昔)씨 왕녀가 배제된 것은 아닐까?) 명으로 세기(世己)를 대일대사(大日大師)로 삼고 선도의 무리를 통합하게 하였다. 세기의 어머니 선추(宣秋)를 품주로 삼고 산공(山公)을 이벌찬으로 삼았다. 산공은 왕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축도(丑徒, 牛徒)로 삼은 까닭이다. 선추(宣秋)는 미추제의 딸이고 유례제의 정비(正妃)인데, 사적으로 총애하는 자가 많았다. 산공은 어린 축도로 정애(情愛, 따뜻한 사랑)가 돈독하고 가까웠는데, 이때에 이르러 처로 맞이하였다. 처음 산공이 16살 때 선추와 은밀히 통하여 딸 산기(山己)를 낳았고, 당시 왕은 산공의 어머니 산모(山帽)와 통하여 모공(帽公)을 낳았다. 그런 연유로 왕은 산공을 아들로 삼았다. 유례가 즉위하고 선추가 또 산공의 아들 중기(中己)를 낳았다. 유례는 본래는 참아내나 겹치어 일어난 일로 추화(推火)로 유배를 보냈다. 당시 산공은 천인(茜因)궁주에게 새로 장가들어 교정(交情, 사귀는 정분)이 심밀(甚密, 아주 가까움)하여 서로 이별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날 밤에 마주하여 울었다. 산공이 말하기를 “남녀간의 잠자리는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나에게 이와 같은 잘못이 있는 연유로 만약 내가 밖으로 내보내지면 자위(自慰, 스스로 괴로운 마음을 안심시킴, 手淫)할 수 없으니, 곧 흘해(訖解)를 맞이함이 마땅하며 다른 사람과 좋아하는 것과 같지 않다.(흘해에게는 맡기고 떠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천인이 응낙하였다. 산공이 이에 왕을 맞이하여 천인을 맡겼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말하기를 “나는 너의 처를 얻어 즐거우나, 너는 처도 없이 밖에 나가서 살게 되니 온당한가? 나에게는 아름다운 여종이 있으니, 장원과 노비와 함께 내려줌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당시에 여종은 왕의 딸을 임신하여 수긍하지 않았다. 왕이 유혹하여 말하기를 “산공과 나는 같은 몸이니, 네가 아니면 누가 있어 나의 몸을 따뜻하게 해 주겠느냐!”라고 하였다. 여종이 이에 산공을 따르니, 산공이 유배지에서 무릇 15년을 지냈다. 유례의 퇴위(退位, 임금의 자리에서 물러남)시에 왕 또한 신후에게 총애가 있어 힘써 천거하여 산공을 (궁으로) 들어오게 하여 대창사(大倉師)로 삼았다. 모두 추화(推火)의 장원을 관리하여 가색(稼穡, 곡식 농사)에 능통한 연유다. 비(婢, 白婢, 여종)가 낳은 왕의 딸이, 당시 이미 장성하여 또한 산공의 처로 삼았다. 왕이 이에 천인을 돌려보내어 산공의 처로 삼았다. 여종의 공(功)을 상을 주어 품모(品母)로 삼았는데, 이 분이 곧 백비(白婢)다. 죽을 때까지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보내지 않고 오로지 왕과 산공을 섬겼을 뿐이다. 유례제가 죽자 선추가 산공의 처가 되기를 원하였는데, 신후가 허락하여 천인이 다시 왕의 부처(副妻)가 되었다. 이 때에 이르러 선추가 품주가 되기를 원하여 천인에게 양보하라고 하였다. 왕이 천(인)이 젊으니 명으로 양보하게 하였다. 선추는 밖으로 사양하면서도 속으로는 좋아하였다. 드디어 정당(政堂)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의 아들 세기(世己)가 간하여 말하기를 “어머니는 나의 아버지(유례)의 처이다. 음란함을 좋아하여 산공으로 하여금 죄를 짓게 하여 밖에 살게 하더니 지금 또 산공의 처의 자리를 빼앗으니 외론(外論, 외부사람의 논평)에 두려워함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선추가 울며 말하기를 “내가 산공의 처가 된다면 죽어도 원이 없겠으니, 너는 그런 나를 용서하라.”라고 하였다. 세기가 다시는 감히 말하지 않았다. 세기는 선도의 희망이 견중(見重, 남에게 소중히 여김을 받음)하고, 또한 어머니의 힘으로 치위(致位, 높은 벼슬에 오름)한 것이다. 그런 연유로 그의 어머니가 음란함을 즐기며 멋대로 욕심 부리더라도, 스스로 마음속으로 번민하였지만 또한 힘써 막지 못하였다. 항상 바로 잡지 못하고 어머니를 자신의 잘못으로 삼았다. 왕이 현명하다 하여 선정(仙政)을 맡겼다. 산공, 천공(茜公)등과 함께 서로 표리(表裡, 겉과 속)로 왕의 덕을 드러나게 하였다. 익년(翌年, A.D.368) 천공(茜公)을 이벌찬, 동월(冬月)을 품주로 삼았다. 동월은 라옥의 아버지가 다른 여동생이다. 아름답기가 라옥과 같고, 성품이 심히 총민(聰敏, 총명하고 민첩함)하여 몹시 심히 사랑하였는데, 천인과 함께 항상 좌우에서 잠자리를 받들었다. 명으로 동월을 금방(錦房)의 주(主)로, 천인은 옥방(玉房)의 주(主)로 하여, 옷과 음식에 관한 정사를 집행하게 하였는데, 이 때에 이르러 천인이 품주가 되지 못하고, 동월이 품주의 자리를 얻었다. 천인의 아랫사람들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우리의 군(君, 흘해)은 금(錦)을 중요시하고, 옥(玉)을 가벼이 여기니 신(臣) 등은 부끄럽게도 부엌때기가 되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천인이 웃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품주의 직을 중요시 하지만 나는 부처(副妻)의 자리를 중히 여길 뿐이니, 군(君)을 위하여 맛있는 음식(旨)을 만드는 것은 즐거움이 막대(莫大, 몹시 크거나 많음)하니, 어찌 수치스럽다 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였다. 무리들이 모두 탄복(歎服, 감탄하여 마음으로 따름)하였다. 왕이 그 소리를 듣고 더욱 천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에 신후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신의 지위는 부군(副君)이나, 정사(政)는 신으로 말미암지 아니하니, 반대로 품주와 같지 않습니다(품주보다 못하다). 원컨대 신의 처(妻, 여기서는 천인)에게 선주(宣主)의 직을 내려, 정사를 처결(處決, 결정하여 조처함)하는 심부름하는 일을 맡기고, 권한(權, 권세)을 품주의 위에 두었으면 합니다. 곧 신(臣, 흘해)의 위치에 명실(名實, 겉에 드러난 이름과 속에 있는 실상)이 거의 합당합니다.”라고 하였다. 신후가 웃으며 말하기를 “동월 역시 너의 첩이다. 너는 어찌하여 새로운 법을 세우려 하느냐?”라고 하였다. 왕이 이에 여쭈어 말하기를 “천인이 신(臣)을 사랑한다는 말이 있으니, 신(臣)이 보답하여 갚지 않음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후가 이에 웃으며 허락하였다. 선주의 관직은 이때부터가 시작이다. 동월이 면직되자 기림제의 총희(寵姬 총애를 받는 아름다운 여자) 등말(登末)이 품주가 되었고, 동월을 대신하여 (동월의) 여동생 문월(門月)이 품주가 되었다. 또 그 차례에 역시 왕의 총애가 있었다. 당시 사람들이 분개하여(부군이 왕을 배려하지 않고 정사를 처결함) 말하기를 “신국(神國)의 정사가 어찌하여 한 곳 라월(螺月)의 집안(라옥, 동월은 라월의 딸이고 문월 역시 라월의 딸인 듯)에서만 나오는가!”라고 하였다. 반측자(反側者, 두 가지 마음을 품어 일정하지 않은 사람)는 이로 인해 왕이 위태롭기를 바랐다. 왕이 기뻐하지 아니하며 물러나기를 청하였다. 신후가 이에 기림제에게 양위하도록 하였는데, 기림이 노하여 예생궁(禮生宮)에 머무르면서 후와 함께 하지 않았다. 서로 본지가 수개월이 지났는데 백마제(白馬祭)를 즈음하여 만나게 되었다. 태사(太史)가 여쭈어 말하기를 “별이 변하고 있다. 마땅히 새로운 왕으로 고쳐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왕을 맞이하여 계부(繼夫)로 삼고, 명궁(明宮)에서 즉위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기뻐하지 않음이 줄어들게 되었다. 모송가(慕頌歌, 흠모하여 칭송하는 노래)가 하늘에 이어지고, 후(后, 광명)와 왕이 밤에 신루(神樓)에 올라 노래를 바친 노인 12명에게 상을 내렸다. 모두 모우(母牛, 어미 소)를 하사 받고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명으로 신우(神牛)를 살펴, 왕우(王牛) 자모(雌牡, 암컷과 수컷)를 누렇게 칠하여 장식하고, 고깔모양의 뿔을 가진 왕우는 도산(桃山)으로 보내게 하였다. 신례(新禮, 새해의 예절, 새로운 예절)로 백성들에게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