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화(源花)의 전래
고구려 태조왕 21년 기사(고구려사초)
二十一年 壬申 正月 芦花太后崩 春秋八十四 身長八尺 重百三十斤 有脅力善槍釼 慕本初 隨夫皇再思大王 平扶余內乱有功 仙帝時 國之大事皆決於后 上之卽位初 亦居太輔之位 有英斷能決難事 知大體務精要 臨崩勤 與遂成相傳 篤友愛 又言天花 “國之源花 可與遂成共之” 以是乱倫 而失政
尙后生子春固
遂成太輔 羽弈左輔 禾直右輔
21년 임신(A.D.132) 정월 호화(芦花)태후가 춘추 84세로 죽었다. 신장은 8척에 체중도 130근이었고, 상대를 겁주는 힘도 있었고 창과 칼도 잘 썼다. 모본(慕本) 초에 부황(夫皇) 재사(再思)대왕을 따라가 부여(扶余)내란을 평정한 공이 있었다. 선제(仙帝)시절엔 나라의 큰일들이 (태)후에게서 결정되었다. 왕의 즉위 초엔 또한 태보의 자리에 있었는데, 용기 있는 결단으로 어려운 일을 능숙하게 처결하였다. (정사의) 큰 틀을 알고 일에 요점을 꿰었다. 죽음에 임하여 근심(勤)하며, 수성(遂成)과 서로 전하게 하여 우애를 도탑게 하라하였다. 또 천화(天花)에게 말하기를 “나라의 원화(源花, 신라의 원화와 한자가 같다. 신라의 원화는 召門國에서 유래되었다.)는 수성과 공유함이 옳도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인륜이 무너지고, 정치가 잘못되게 되었다.
상후(尙后)가 아들 춘고(春固)를 낳았다.
수성(遂成)이 태보, 우혁(羽弈)이 좌보, 화직(禾直)이 우보가 되었다.
지증왕 3년 기사(신라사초)
三年 玄駒 四月 仙徒奉 碧花爲源花 以召文爲花之源也 或曰太子爲花主 故妃爲花之源也
3년(A.D. 502) 현구(玄駒=壬午) 4월 선도가 벽화(碧花)를 봉하여 원화(源花)로 삼았다. 소문(召文)사람들은 화지원(花之源, 꽃의 기원, 발생)이라 하였다. 혹은 태자(太子, 법흥왕)를 화주(花主, 꽃의 주인)라 하고 그런 연유로 비(妃)를 화지원(花之源)이라 한 것이다.
화랑세기 서문(序文)
花郞者 仙徒也 我國奉神宮 行大祭于天 如燕之桐山 魯之泰山也 昔燕夫人好仙徒 多畜美人 名曰國花 其風東漸 我國以女子爲源花 只召太后廢之 置花郞 使國人奉之 先是法興大王愛魏花郞 名曰花郞 之名始此 古者仙徒只以奉神爲主 國公例行之後 仙徒以道義相勉 於是賢佐忠臣 從此而秀 良將勇卒 由是而生 花郞之史不可不知也
화랑(花郞)은 선도(仙徒)다. 우리나라에서 신궁(神宮)을 받들고 하늘에 대제를 행하는 것은 마치 연의 동산(桐山), 노의 태산(泰山)과 같다. 옛날 연부인(燕夫人)이 선도를 좋아하여 많은 미인을 길렀는데 이름하기를 국화(國花)라 했다. 그 풍속이 동쪽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에서는 여자로서 원화(源花)를 삼게 되었다. 지소(只召, 법흥왕의 딸, 진흥왕의 어머니)태후가 이것을 폐지하고 화랑을 설치하여 국인들로 하여금 그들을 받들게 했다. 이에 앞서 법흥대왕이 위화랑(魏花郞)을 사랑했는데, 화랑이라 불렀다. 화랑이라는 이름은 여기에서 비롯했다. 옛날에 선도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을 위주로 했는데, 국공(國公)들이 무리에 들어간 후에 선도는 도의(道義)를 서로 힘썼다. 이에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빼어났고 훌륭한 장군과 용감한 병졸들이 이로부터 나왔다. 화랑의 역사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해석 : 이종욱 서강대총장)
서문은 화랑세기 발췌본에서 따온 것이라고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