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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북분에서 출토된 금관. 국보 191호. |
‘아시아판 투탕카멘’ 신라고분 황남대총이 서울로 옮겨 왔다. 국립중앙박물관(관장 최광식)은 용산 이전 개관(2005년 10월 28일) 5주년을 기념하여 ‘황금의 나라, 신라의 왕릉 황남대총’ 특별전을 열고 있다. 신라 왕릉 하나만을 주제로 한 대규모 전시는 이번이 처음이다. 1973년 발굴됐을 당시 학계를 흥분시킨 황남대총(皇南大塚)은 경주에 있는 신라 고분군(群)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서기 4~5세기경 신라 왕을 부르는 마립간(麻立干) 시기의 왕릉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 주인공은 아직도 미스터리다. 봉분이 두 개인 쌍릉으로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1976년 문화재위원회는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큰 무덤’이라는 의미로 황남대총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은 과연 누구일까?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전시회
지난 9월 8일 상설전시관 1층 특별전시실엔 관람객들이 그리 많지 않았다. 평일이기도 하고 개학한 지 얼마 안돼서인 듯했다. 더러는 외국인도 보였다. 각각 자기 나라를 표시한 ID카드를 목에 건 단체 외국인 관람객 수십 명이 눈에 띄었고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왔다는 역사학 교수도 유물들을 유심히 살펴보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황남대총 쌍둥이 무덤 중 남분(南墳)에서 발견된 나무 기둥 등을 토대로 복원한 목조 구조물(실물의 95% 크기)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목조구조물 중심부에 무덤 주인공이 안치된 목곽(木槨)과 목관이 배치돼 있었다. 목조구조물 끝에는 토기를 비롯한 각종 부장품을 묻은 공간인 부곽(副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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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 전시실을 찾은 관람객들. |
황남대총에서는 무려 5만8441점의 유물이 출토됐다. 이번 전시회에는 그중에서 금관을 비롯해 각종 황금 장신구와 귀금속 그릇들, 서역에서 온 유리그릇 등 신라 황금 문화의 진수를 보여줄 1268점을 엄선하여 전시했다.
내물·눌지 재위기간 40년 넘어
황남대총에 묻힌 마립간은 발굴 당시 금동관 끝에서 대형 허리띠드리개 끝까지의 길이가 181㎝였다. 머리에서 금동관 끝까지 비어있는 부분과 허리띠드리개 바깥 발부분을 가감하더라도 묻힌 사람의 신장은 180㎝가 넘는다. 뼈는 사라지고 두개골 일부만 남았는데 치아의 마모 상태 등을 조사한 결과 60세 이상으로 추정됐다.
출토된 유물을 근거로 판단해볼 때 황남대총의 주인공은 3명의 마립간으로 압축된다. 서기 4~5세기 중엽까지 마립간을 지낸 왕으로는 내물(재위 356~402년), 실성(재위 402∼417년), 눌지(재위 417~458년) 마립간이 있다. 모든 마립간은 알지(閼智)를 시조로 모시는 김(金)씨에서 나왔고 내물왕 때부터 마립간이라는 이름이 사용되기 시작했다. 마립은 꼭대기, 우두머리, 으뜸, 첫째 등을 뜻하는 마리(頭), 마루(宗)라는 신라의 말을 한자로 옮겨 적은 것으로 해석된다. 칸(khan)은 동북아시아 지역에서 지배자 또는 족장을 부르는 일반 칭호다. 따라서 마립간은 여러 족장 가운데 으뜸, 즉 왕을 지칭한다.
신라 제17대 왕인 내물 마립간은 고대국가 체제를 정비하고 김씨 왕위 세습의 기반을 다졌다. 당시 신라는 한반도 3국 중 국력이 가장 약해 국내외 정세가 불안했다. 백제는 영산강 유역까지 지배력을 확대했고, 가야와 왜를 앞세워 신라를 위협했다. 말갈의 침입도 받았다. 따라서 신라는 가장 힘이 센 고구려의 힘을 빌려야 했다. 내물 마립간은 390년에 자신과 가까운 왕족 실성을 고구려에 볼모로 보내기도 했다. 이듬해 광개토대왕이 고구려 왕에 올랐다. 광개토대왕은 399년 백제를 주축으로 한 왜와의 연합군을 격파했고 400년에는 5만의 군사를 낙동강 하구로 보내 가야와 왜를 물리쳤다. 내물 마립간은 377년과 382년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중국 전진으로 사신을 보냈다. 이때쯤 중국과 고구려의 황금 문화가 고구려를 통해 들어오기 시작했다. 내물 마립간은 재위기간이 46년이라 60세 이후에 죽은 것으로 보인다. 현재 경주 첨성대 서남쪽 인근에 내물왕릉이 있다. 그러나 학자들은 이 왕릉을 내물왕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조선시대인 1700년대 말 박·석·김씨의 신라 왕 후손들을 중심으로 왕릉을 재지정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삼국유사 왕력에 나와 있는 내물왕의 무덤에 대한 기록을 근거로 첨성대 서남쪽의 능을 내물왕릉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상당수 학자들은 이 능을 통일신라시대의 능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전(傳)내물왕릉이라고도 부른다. 내물왕 무덤으로 전해진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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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제 신발 |
내물 마립간에 이은 신라 18대 왕은 실성 마립간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내물 마립간이 죽을 때 태자(눌지)의 나이가 어려 실성을 왕으로 옹립했다고 하는데 삼국유사에는 내물 마립간이 세상을 떠났을 당시 눌지 태자가 20세가 넘는 성년이었다고 돼 있다. 아마도 이것이 사실이라면 실성은 볼모로 가 있었던 ‘강대국’ 고구려의 입김으로 왕이 됐다는 관측이 가능하다.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고구려의 성장을 직접 현지에서 목격한 실성은 당시 대외 정세를 파악하는 데 훨씬 수월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실성은 왕이 된 후 친고구려 정책을 펴나갔다. 실성은 즉위 해인 402년 왜와 우호를 맺었으나 405년과 407년에 왜가 신라를 침공하기도 했다.
실성 마립간은 쿠데타에 의해 정권과 목숨을 잃었다. 실성 마립간은 옛날 자신을 고구려 볼모로 보냈던 내물 마립간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 군사를 시켜 내물의 장남 눌지를 죽이려 했으나 오히려 눌지가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역습을 펼쳤고 실성 마립간은 결국 살해당했다. 실성왕의 무덤은 기록에 없어 왕릉이 전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를 죽인 신라 19대 왕 눌지 마립간은 실성 마립간의 사위이기도 해 최소한 왕의 예를 다해 무덤을 지어줬을 것으로 보인다.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실성 마립간의 체구가 무척 컸다는 기록이다. 실성의 키는 7척5촌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국 남조(南朝) 척도로 환산하면 183.8㎝이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실성 마립간은 내물 마립간과 그다지 나이 차가 안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눌지 마립간은 아들(장자)에게 왕위가 이어지도록 제도를 다져 놓았다. 또 때때로 내정을 간섭하고 위협하던 고구려로부터 벗어나고자 433년에 백제와 동맹을 맺었다. 재위기간이 41년이나 돼 60이 넘어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
황남대총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는 ‘결정적 증거’가 없어 학계에서도 의견이 엇갈리고 있다. 중국과 일본의 학자들도 자기들의 과거사에 유리하게 맞추려고 가장 후대의 눌지가 황남대총의 주인공일 것이라는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탄소연대측정을 통해 유물의 연대를 측정해봤지만 오차 범위가 60~70년에 걸쳐 있어 누구의 것이라 단정할 수 없는 형편이다.
이희준 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교수는 내물 마립간에, 김용성 중원문화재연구원장은 눌지 마립간에 무게를 두고 있다. 함순섭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관은 “학문적으로 볼 때 황남대총의 주인공은 내물 아니면 눌지로 귀결돼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또 하나의 가능성’으로 주인공 후보에서 항상 제외된 실성 마립간도 당시 정황을 살펴보면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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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 있는 황남대총 전경. |
황남대총을 둘러싼 미스터리는 더 있다. 신라는 황금의 나라로 알려져 있다. 8세기에 간행된 ‘일본서기’에는 신라를 “눈부신 금은채색의 나라” “금은의 나라”라고 했다. 굳이 세분하자면 마립간 시대가 황금의 시대였다.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신라 황금제품의 대부분은 4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까지 약 150년 동안에 만든 것들이다. 황남대총 이전과 이후의 신라 무덤에서는 황금 유물을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중국 서진(西晋)의 진수가 편찬한 삼국지위지동이전에 따르면 3세기경 삼한지역 사람들은 금·은·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고 한다. 오직 구슬만 귀하게 여겨 이때의 고분에서는 다량의 구슬이 출토됐다. ‘황남대총 특별전’ 실무책임을 맡고 있는 함순섭 학예연구관은 “내물 마립간 때 고구려 사신의 안내를 받아 중국 전진으로 간 신라 사신이 돌아오면서 중국과 고구려에서 활발했던 금 장신구의 필요성을 마립간에게 인식시키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여자는 순금관, 남자는 도금한 금동관
내물 마립간은 황금을 통해 나라의 위계를 새로 만들어갔다. 마립간을 비롯해 마립간과 가까운 왕족은 황금제 장신구로 꾸민 복식을 착용했고 방계 왕족과 지방의 전통 족장세력은 금동 혹은 은으로 꾸민 복식을 사용했다. 당시 신라 세공기술은 굉장히 높은 수준이었다. 함순섭 학예연구관은 “중국에서 건너온 금장신구도 있었겠지만 신라인들의 기술 습득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며 “특히 깨알보다 작은 금방울을 일일이 붙인 누금 세공 기술은 신라 세공기술의 극치”라고 말했다.
법흥왕 때인 527년 불교가 공인되고 나서 신라는 황금을 왕실과 불교 사원을 화려하게 치장하는 데 집중 투입한 것으로 보인다. 경주 안압지에서는 건물을 꾸미는 데 쓴 금동장식이 많이 발굴됐다.
황남대총 남분의 마립간은 순금관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금동관을 쓴 채로 묻혔다는 점도 특이하다. 반면 마립간의 부인이 묻혔을 것으로 추정되는 북분에선 화려한 금관이 출토됐다. 북분 금관은 국보 191호, 금제허리띠는 국보 192호로 지정됐지만 거의 부식이 돼 복원을 한 금동관은 문화재 지정이 안됐다. 남분에서 나온 금제허리띠는 보물 629호로 지정됐다.
대신 남자의 무덤에서는 새날개 모양의 관꾸미기 등 남자의 지위를 나타내는 다수의 순금 장신구가 나왔다. 이를 보면 금관이 반드시 신분의 차이를 나타낸 것은 아닌 듯하다. 남분 금동관의 디자인은 전형적인 신라 나뭇가지 모양의 금관이 완성되기 직전의 모습이다. 반면 북분은 나뭇가지 모양이 표준 형식으로 완성된 첫 금관으로 평가받는다. 두 금관 사이에는 아마 20여년의 시차가 있는 듯하다.
무덤은 죽은 자의 집이다. 뒤집어보면 산 자들의 권세가 지어낸 것이다. 마립간 시대의 신라 사람들은 이승과 저승이 이어져 있다는 계세사상(繼世思想)을 믿었다. 살아있는 왕이 죽은 왕을 기리며 모든 능력을 바쳐 한바탕 ‘제사 의식’을 펼친다. 조상의 권위는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래서 무덤에는 생전에 지녔던 권위를 상징하는 물건과 음식을 가득 바쳤다. 계승자는 물려받은 권위를 주위에 각인시키며 지도력을 과시했다. 죽은 마립간의 지위는 수많은 황금장신구로 표현됐다. 귀금속으로 꾸민 큰칼, 금동제 장식을 단 여러 벌의 말갖춤, 금으로 만든 각종 그릇, 여러 자루의 큰 칼과 유난히 크고 긴 창, 수많은 화살들이 들어있었다. 농사와 대장간에서 쓰는 연모도 넣었다. 황남대총에는 커다란 항아리 4개가 묻혀 있었는데 소·말·바다사자·닭·꿩·오리뼈가 다량 나왔다. 특히 닭뼈가 가장 많이 출토됐다. 참돔·졸복·다랑어·농어·상어·조기 등 다양한 물고기 뼈도 나왔다. 전복·오분자기·홍합·재첩 심지어 거북의 조각난 뼈도 발견됐다. 요즈음 현대인의 먹거리와 별반 차이가 없음을 보여주는데 주로 염장을 한 것이 많아 조리법은 지금과는 상당히 다르다.
1600년 전 신라의 신비를 보여주는 ‘황남대총전’은 10월 31일(일)까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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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문학신문 - 시야 시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