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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방사선탄소연대측정 발췌-부록부분 참조)
放射性 炭素年代 測定結果는 9項에 記述되어 있으나 天馬塚의 境遇 試料가 木槨材와 木棺材의 一部인 關係로 樹齡에 依한 年代差가 있었음인지 A.D.320年 및 A.D.170年으로 測定되고 있다. 한편 遺物의 考証으로 본 考古學的인 年代는 6世紀初로 發表되어서 그간에 많은 年代差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放射性炭素 年代測定에서는 樹齡, 計測誤差 等으로 士70년의 誤差가 있을 수 있으나 新羅上代古墳의 編年이 確寶하지 못한 現時點에서는 그 上限線을 推算하는 데 重要한參考資料가 될 수 있다고 確信하고 있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그러나 現 時點까지의 科學的 方向에서의 調査結果 및 放射性炭素年代 測定結果를 土臺로 한다면 皇南大塚 南墳은 17代 奈勿王(A.D.35l~402), 18代 實聖王(A.D.402~417), 19代 訥祗王(A.D4l7~458), 20代 慈悲王(A.D.458~479) 중의 1名, 北墳을 同 王妃, 天馬塚은 21代 炤知王(478~500), 또는 22代 智證王(510~514)의 陵인 것으로 提案하고 싶다. 年代의 上限을 17代 奈勿王으로 함은 이 時代로부터 新羅王室構成이 金氏系가 되어 있고 皇南大塚, 天馬塚이 相互隣接된 地域에 位置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 裕 善 外 全員) -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유물 참고자료 - 6.고고학적 종합고찰)
이 古墳의 被葬者는 金冠이 아니라 金銅冠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분의 被葬者는 金製銙帶와 腰佩를 착용하고 있었고, 副葬品 가운데에는 金製鳥翼形冠飾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新羅古墳에서 金冠과 金製銙帶 및 腰佩는 반드시 세트로 착장되었고, 金製冠飾도 金冠이 출토된 고분에서만 출토되었다. 이 점에서 金製銙帶와 腰佩를 착용하고 있었고 金製冠飾을 부장품으로 가지고 있었던 이 고분의 被葬者가 金冠이 아니라 金銅冠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예외적인 사실이고, 이 古墳 被葬者의 婦人이었음이 분명한 北墳의 被葬者가 金冠을 착용하고 있었던 점과도 대비된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다만 金銅冠의 頂部가 위치하였던 곳에서 大形 腰佩 끝까지의 거리가 181cm, 鐶頭大刀의 끝까지가 177.5cm로,北墳의 金冠 頂部로부터 大形 腰佩 끝까지의 거리 143cm보다는 모두 30cm 이상이나 길었다. 北墳의 경우 大形 腰佩의 上端이 銙帶와 근접하여 있었던 반면,南墳의 경우 大形 腰佩의 上端이 銙帶와는 약 25cm나 떨어져 있었던 차이점이 있지만. 大刀의 끝을 기준으로 하여도 北墳의 被莽者보다는 큰 키였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