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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남분발굴조사보고서(1995,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작성자정성일| 작성시간11.02.11| 조회수198| 댓글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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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1 http://www.gcp.go.kr/index.jsp
    복사하기 해서 붙여넣기도 안되고, 파일을 올렸으나 읽혀지지 않습니다.
    아래의 주소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홈피이고 원문정보쪽에서 검색하여 찾으시면 될 것입니다.
  •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황남대총남분 발굴조사보고서의 내용이 상당히 많은데, 제가 이전에 인터넷에서 찾았던 자료와 큰 차이가 없더군요.
    (연령부분 발췌-부록부분 참조) 頭蓋扁骨片 5개는 그 두께가 대부분 成人男性 것에 가깝고 또 冠狀縫合의 일부가 外面에는 屈曲線으로 남아 있으나 內面에서는 완전히 融合되어 구분할 수 없는 것으로 보아 後述하는 齒牙所見과 더불어 60歲 前後의 男性의 것에 속하는 것으로 推定된다.
    (張信堯,金逵澤)
  •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방사선탄소연대측정 발췌-부록부분 참조)
    放射性 炭素年代 測定結果는 9項에 記述되어 있으나 天馬塚의 境遇 試料가 木槨材와 木棺材의 一部인 關係로 樹齡에 依한 年代差가 있었음인지 A.D.320年 및 A.D.170年으로 測定되고 있다. 한편 遺物의 考証으로 본 考古學的인 年代는 6世紀初로 發表되어서 그간에 많은 年代差가 있는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放射性炭素 年代測定에서는 樹齡, 計測誤差 等으로 士70년의 誤差가 있을 수 있으나 新羅上代古墳의 編年이 確寶하지 못한 現時點에서는 그 上限線을 推算하는 데 重要한參考資料가 될 수 있다고 確信하고 있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皇南大塚 南墳에서는 天馬塚의 境遇와는 달리 多量의 숯 및 炭化된 木材痕이 出土되었다. 따라서 樹齡이 確實치 못한 木材試料보다 誤差限界가 적은 試料가 入手될 수 있어 그 年代測定値에 期待되는 바 있었다. 年代側定結果를 要約하면 表 2와 같다.
    이 表에 의한다면 樹齡에 의한 誤差가 적은 炭化木痕試料에서는 북 410~375年, 南 405年의 年代을 보여주고 있고 其他에서는 100~150年의 差異을 보여 주고 있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중략)
    原來 新羅上代古墳에서는 紀銘文이 出土되지 않아서 積石木槨墳 全體의 編年이 確實하지 못하다.
    따라서 上記한 諸般比較考察事項에 비록 自信이 있다 하더라도 比較에 標準이 되는 年代가 未知이므로 正確한 年代를 推定할 수는 없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그러나 現 時點까지의 科學的 方向에서의 調査結果 및 放射性炭素年代 測定結果를 土臺로 한다면 皇南大塚 南墳은 17代 奈勿王(A.D.35l~402), 18代 實聖王(A.D.402~417), 19代 訥祗王(A.D4l7~458), 20代 慈悲王(A.D.458~479) 중의 1名, 北墳을 同 王妃, 天馬塚은 21代 炤知王(478~500), 또는 22代 智證王(510~514)의 陵인 것으로 提案하고 싶다. 年代의 上限을 17代 奈勿王으로 함은 이 時代로부터 新羅王室構成이 金氏系가 되어 있고 皇南大塚, 天馬塚이 相互隣接된 地域에 位置하고 있기 때문이다.
    (金 裕 善 外 全員)
  •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유물 참고자료 - 6.고고학적 종합고찰)
    이 古墳의 被葬者는 金冠이 아니라 金銅冠을 착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고분의 被葬者는 金製銙帶와 腰佩를 착용하고 있었고, 副葬品 가운데에는 金製鳥翼形冠飾이 포함되어 있었다. 지금까지 조사된 新羅古墳에서 金冠과 金製銙帶 및 腰佩는 반드시 세트로 착장되었고, 金製冠飾도 金冠이 출토된 고분에서만 출토되었다. 이 점에서 金製銙帶와 腰佩를 착용하고 있었고 金製冠飾을 부장품으로 가지고 있었던 이 고분의 被葬者가 金冠이 아니라 金銅冠을 착용하고 있었던 것은 분명히 예외적인 사실이고, 이 古墳 被葬者의 婦人이었음이 분명한 北墳의 被葬者가 金冠을 착용하고 있었던 점과도 대비된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그래서 學界 일부에서는 이 고분의 被葬者가 金冠을 착용하고 있지 않은 사실을 들어 이 古墳 被葬者의 社會的 地位를 金冠이 출토된 다른 고분들의 피장자보다 한 단계 낮추어 보려는 경향도 있다.
    그러나 古墳의 規模와 細部構造도 그렇지만 이 고분에서 출토된 副葬品의 量과 種類, 質을 포함한 水準은 지금까지 金冠이 출토된 다른 어떤 古墳보다도 뒤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월등하다.
  •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피장자의 신장과 관련된 부분 - 4.유물의 출토상태)
    內棺 안에서는 被葬者의 遺骨로 頭蓋骨片과 下顎骨이 출토되었지만 頭蓋骨片도 흩어져 있었고 被葬者의 下體部 遺骨은 발견되지 않아 被葬者의 體格을 알 수는 없었다. 被葬者가 착장하고 있던 裝身具들도 크게 보아서는 대부분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세부적으로는 약간씩 움직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이들의 위치로서도 被葬者의 體格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 답댓글 작성자 정성일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11.02.12 다만 金銅冠의 頂部가 위치하였던 곳에서 大形 腰佩 끝까지의 거리가 181cm, 鐶頭大刀의 끝까지가 177.5cm로,北墳의 金冠 頂部로부터 大形 腰佩 끝까지의 거리 143cm보다는 모두 30cm 이상이나 길었다. 北墳의 경우 大形 腰佩의 上端이 銙帶와 근접하여 있었던 반면,南墳의 경우 大形 腰佩의 上端이 銙帶와는 약 25cm나 떨어져 있었던 차이점이 있지만. 大刀의 끝을 기준으로 하여도 北墳의 被莽者보다는 큰 키였다고 판단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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