宣婦人傳
인종(仁宗)에게 아들 넷이 있었는데 이중 장남 태(兌)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일찍 죽었다. 이로인해 차남 열(悅)과 삼남 공(共)의 주변에 차기를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처음 공의 주변에 사람들이 몰리자 열의 측근 황진하(黃進夏),복진풍(復晉豊)등이 소(疏)를 올려 역모의 위험이 있다 고했다. 이에 삼남 공의 측근 고귀현(高歸賢),임종수(任宗秀)등이 억울하다며 탄원하였다. 이후 열이 측근들과 사냥을 떠났는데 공의 측근 배수현(裵壽賢),원영권(元營勸)등이 군사를 몰아 공의 측근들을 치려 하였다. 양군(兩軍)이 미아리 인근에서 맞붙으니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다.
인종이 놀라 진상을 조사하려 들었으나 이미 병들어 있는데다가 난(亂)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많은 정신적 충격을 받아 몸져누워 결국 머지않아 세상을 떠났다. 이에 열의 측근들이 이를 왕위에 올리니 그가 17대 수종(受宗)이다. 열이 왕위에 오르니 공의 측근들이 승복하지 않아 거듭 상소를 올리고 군사를 일으키려 하였다. 왕이 명을 내려 장군 보상호(普想浩)에게 진압하게 하니 다시 수십여인이 붙잡히고 처벌받았다.
이때 함길도(咸吉道)에는 진권수(陳權洙)라는 이가 절제사(節制使)로 가 있었는데, 본래 공의 측근 고귀현과 친분이 있는자였다. 여진과의 변란에서 여러차례 승리를 이끌어 공을 세운자로 따르는이가 많고 여진인조차 신망할 정도였다. 공의 세력이 모두 처단당하고 열을 왕위에 올리니 이를 역모라며 인정할수 없다며 군사를 일으켜 도성으로 진군하려 하였다. 왕이 다시 장수 정수(鄭收)와 남동일(南東壹)에게 명하여 진압하게 하였다.
도산군(都山君) 원(員)은 본래 선대(先代) 의종(毅宗)의 사촌 현도군(縣導君) 계(係)의 아들이다. 인종의 사남 복(復)과는 친분이 두터웠다. 이때 비슷한 연배의 친우들과 자주 시회(詩會)를 열고 술을 즐겼는데 종종 이와같이 말했다. 금선(金鮮)이 세워지고 어느덧 300년이 흘렀는데 지금껏 17대에 이르기까지 절반 이상이 적장손(嫡長孫)이 아니었다. 나라에 왕을 세우는데 적장승계를 원칙으로 세움은 다른 왕자들로 인한 변란이나 야심을 진작에 예방하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라가 적장이 아닌이들이 즉위하는 사태가 지속되고 있으니 어찌 이를 제대로 된 나라꼴이라 하겠는가.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하였다. 이에 시회의 참석한이중 열(悅)과 본래 교통(交通)하는 이가 있어 이를 고하니 역시 역모의 혐의로 잡혀가고 군호(君號)가 삭제되었다.
열이 즉위하여 17대 수종이 되니 왕이 되는 과정에서 생긴 몇몇 불미스러운 일과 변란을 진압한 공으로 공신(功臣)을 하사하였다. 이름을 ’명정공신(明政功臣)‘이라 하였는데 1등에 17명, 2등은 37명, 3등은 75명 4등에 154인이 봉해졌다. 이의를 제기하는이는 없었다.
이때에 참의(參議) 벼슬하는 선동욱(宣童旭)과 정국진(鄭局振)이라는 이가 있었는데 수종의 측근 황진하와 복진풍을 보좌해온 공으로 ’명정 이등공신‘에 봉해졌다. 두 사람은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는데 함께 공신반열에 오르고 벼슬에 오르자 둘이 ’우리가 예전부터 쌓아온 친분으로 함게 나라에 공을 세우고 금상(今上)의 총신(寵臣)들을 잘 보좌한 공으로 예까지 왔으니 앞으로 우리의 출세길은 활짝 열릴것일세. 이제 우리 고대의 도원결의처럼 살아도 같이살고 죽어도 같이 죽기로 하고, 또한 우리 둘이 이 다음에 아들과 딸을 낳으면 혼약을 시켜 사돈을 맺는게 어떻겠는가 ?‘ 하여 두 사람이 서로 동의하여 ’좋은 교류가 될것일세‘ 말했다.
먼저 정국진이 혼사를 치른뒤 아들 하나를 낳았다. 이름을 태진(泰珍)이라 지었다. 안타깝게도 선동욱은 혼사를 좀 늦게 치루었는데 태진이 태어난지 육년이나 지나 딸을 하나 낳았다. 헌데 불행히도 어린시절 큰 열병을 앓아 이후 말을 할수 없게 되었다. 뒤늦게 정국진이 이를 알고 탄식하여 ’우리가 이전에 함께 생사를 하기로 맹서하고 나중에 혼사를 치르면 자손들끼리도 혼약을 맺어 사돈간이 되었으면 했는데 일이 이와같이 되어 유감스러울 따름일세. 설사 우리의 우의는 이후에도 변치 않는다 하더라도 애초에 했던 혼인의 서약은 없었던 것으로 해야할 것 같네‘ 하였다. 이에 동욱도 탄식하며 ’이미 저리 성치못한 아이를 어찌 공신가에 시집을 보내 그 소임을 다 하게 할수 있겠는가. 딸아이의 문제는 내가 알아서 할터이니 너무 서운치 마시게‘ 하며 거듭 비록 사돈의 약조는 파기하더라도 두 사람 우의는 변치 않기로 거듭 맹서하였다.
태진이 어느덧 자라 나이 열다섯이 되었는데 뒤늦게 곡절을 알고 부친을 찾아가 이와같이 말했다. ’아버님께서 이미 오래전에 혼사를 약조한 혼처가 있다고 들었는데, 어찌 신의를 저버리길 이와같이 하습니까. 지금이라도 애초에 선낭자와의 약조를 되돌리지 않으신다면 저는 평생을 가더라도 혼약을 치르지 않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국진이 오히려 노하여 꾸짖으며 말하기를 ’네가 그 아이를 이미 본적이 있는 것으로 아나 이미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해 혼사는커녕 제 한몸 건사하며 이 세상을 살아갈수나 있을지 걱정되는 아이다. 이미 모든일은 선공(宣公)과 함께 순리대로 파기의 절차를 밟았으니 너는 이 일을 더 이상 논하니 말라 하였다.
이때 선동욱의 딸은 이름을 정진(貞晉)이라 지었는데 태진과는 여섯 살 차이라 이때 나이 아홉 살이었다. 태진이 먼저 지극한 편지를 보내니 그 내용이 이와 같았다. ‘이미 오래전에 두 가문 사이에 약조한바가 있다고 들었으나 이제와 뒤늦게 신의를 저버리고 약조를 파기한다고 하니 뭐라 드릴 말씀이 없소이다. 부친의 뜻이 어떻든 낭자에 대한 저의 마음은 변치 않을테니 낭자께선 그저 몸단장을 단정히 하시고 때를 기다려주시오.’ 하였다. 이때 아직 정진의 나이 어렸으나 오히려 서찰을 받고 당치 않다는 듯 두려워 떨며 ‘도령께서 이미 지체높은 공신가의 자손으로 충분히 좋은 혼처를 만날 수 있을터인데 어찌 다만 이전에 선대의 약조에만 얽메여 일을 그르치려 하시나이까. 저는 내심 만약 이런몸으로 더 이상 거두어줄곳없는 처지가 되면 차라리 머리를 깍고 출가(出家)하여 일생을 불심으로 살까 생각중에 있으니 지체높은 도령께서 공연히 천한몸의 일을 신경쓰지 말아주소서.’ 하였다. 이에 다시 태진이 간곡한 편지를 보내니 ‘이미 말씀드린바와 같이 한번 맺은 약조를 파기할 생각이 없고 신의를 저버릴 생각이 없는데 어찌 스스로를 학대하며 천한길을 택하려 하시나이까. 낭자에 대한 나의 마음이 오직 한길이니 부디 다른뜻을 품지 말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태진이 거듭 정진과의 혼인할 뜻을 밝히며 마침내 밥을 굶으며 고집을 피우기에 이르렀다. 이때 태진의 생모(生母)인 본부인(本婦人) 송씨(宋氏)는 수년전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이후 후실을 들였는데 금씨(琴氏)라 하고 태진의 계모(繼母)가 되었다. 태진이 거듭 밥을 먹지않고 버티니 오히려 근심이 되어 국진에게 말하기를 ‘이 집에 원래 손이 귀한 집안이라 저 또한 그 소임을 다하지 못할까 염려되어 근심중에 있사온데, 태진이 비록 제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나 행여 행실이 비뚫어질까 날로 근심하고 있었는데, 이제 저와같이 버티다 몸이 상할까 두렵사옵니다. 차라리 이쯤에서 대감께서 태진의 뜻을 받아주소서.’ 하였다. 이에 거듭 국진이 뜻을 밝히기를 ‘이 집이 손귀한 집안이오 태진이 삼대독자임을 부인도 모르지 않을터인데 어찌 그와같은 망령된 말씀을 하시오. 마땅히 자부(子婦)가 들어오면 그 아이 또한 이 가문을 번창케할 막중한 소임이 있을터인데 어찌 제 한몸 건사하지 못한 여인을 들인단 말이오. 이는 더 논할뜻이 없으니 더 거론치 마시호.’ 하였다. 국진의 뜻이 단호하기만 해싿.
태진이 거듭 부친을 설득하며 말하기를 ‘아버님께서 일찍이 선대인(宣大人)과의 혼약을 파기하신데 혹 다른 큰뜻은 있지 않을까 의심하였는데, 이제와 고민하심이 겨우 그것이라니 오히려 실망스럽습니다. 선낭자가 비록 말은 하지 못하나 편지로 충분히 자기뜻을 전할만큼 총명하고 또한 다른 몸들은 성한 처자와 별반 다를것이 없는데 어찌 그런 문제를 근심하신단 말입니까. 이 문제만큼은 제가 뜻을 거둘생각이 없으니 외람되오나 아버님께서 따라주소서.’ 하였다.
마침내 태진과 선씨(宣氏)의 혼사가 이루어졌다. 혼인식을 치른뒤 대감이 은밀히 선씨를 따로 불러 말하기를 ‘본래 너희 아버지와 내가 앞서 나중에 자손을 보거든 둘을 결혼시켜 사돈을 맺기로 하자’고 하였으니 이는 너희 집안과 우리의 결속을 그렇게 굳게 다지기 위함이었다. 헌데 이후 부득이한 사정이 있어 혼약의 맹서를 파기하려 하였는데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너 아니면 장가들지 않겠다 거듭 고집을 피워 결국 이 혼사를 허락하였다. 허나 너도 모르는바는 아니겠지만 선씨(宣氏)는 지금 자손이 번창하지만 우리집은 태진이가 삼대독자인 손귀한 집안이다. 본래 내가 너와 태진이의 혼사를 망설인데는 실로 이와 무관치 않은 문제가 있어서이니 이제와 숨길 이유가 없으니 모든 것을 말하겠다. 네 비록 말은 하지 못한다고 하나 육신은 대체로 멀쩡한 편이니 너는 손귀한 가문에 시집온 그 소임을 다해야할 것이다. 만약 그 소임이 제대로 이루지 못한다면 가문을 위해 결국 다른 대안을 찾을 수밖에 없으니 이를 명심해여 할 것이다‘ 하였다. 선씨는 말을 할줄 몰랐으므로 다만 정중히 절하여 수긍의 뜻을 밝힌뒤 물러났다.
태진과 선씨는 초야(初夜)를 치루었다. 허나 집안의 하인과 하녀들은 이 문제를 한층 더 기이하고 신기하게 여겼다. 종종 자기네들끼리 숙덕거리기를 ’우리 도련님께서 새 마님을 들이셨으니 마땅히 부부의 정을 다해야 할 것이다. 허나 다들 알다시피 말을 못하는 성치못한 마님이라 큰대감께서도 오래전부터 이 문제를 근심해 오신것이고 대체 어찌 초야를 치른것인지 심히 의심되고 걱정되도다.‘ 하였다. 하인들이 자기들끼리 킥킥거리는 가운데 또다른 나이어린 하녀가 나서며 말하기를 ’이전에 내가 살던 동네에 말도 못하고 귀도 듣지 못하는 어린 계집이 살았는데 뭇사내들한테 몹쓸 봉변을 당한뒤 목숨을 끊는 불행한일이 있었다. 중요한건 몸이 비록 성치 않아도 그 문제에는 큰 지장이 없다는 것이다.‘ 하였다. 또 다른 젊은 하인이 말하기를 ’내가 이전에 일하던 집에도 역시 정신 온전치 못한 낭자가 있었는데, 다행히 천운(天運)이 있었는지 혼사를 치르고 자손을 낳았다고 한다 그러니 몸에 비록 사소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그 문제엔 별 지장이 없는 듯 하더라‘ 하였다.
부인이 하인들이 이와같이 수군거림을 알고는 있었으나 크게 꾸짖지 않았다. 다만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는듯해 하루는 대표적인 하인과 하녀 몇몇을 불러 매우 곤장을 쳤다, 다만 부인이 말을 할줄 모르니 대신 글로써 써서 보여주기를 ’너희가 망령되이 내가 단지 말을 할줄 모른다는 이유로 무시하며 망령된 말을 함부로 입에 담음을 다 알고 있었으나 문제삼지 않았다. 허나 천지음양의 법도와 이치가 어찌 그리 단순할수 있겠느냐 ? 내 그토록 너희가 그 문제를 의심하면 머지않아 스스로 증명해 보일테니 쓸데없는 공론을 삼가도록 하라. 내 이후에 다시 쓸데없고 망령된 소리를 지껄이는 자가 있을시엔 사내고 계집이고 가리지않고 엄히 꾸짖을터이니 그리 알도록 하라.‘ 하였다. 부인은 말을 할줄 모르고 하인들은 글을 몰랐으니 집사를 대신 불러 자신이 쓴 글을 읽어주게 하여 노하게 꾸짖는 뜻을 보여주었다.
이때 태진은 생모 송씨가 오래전에 죽고 나중에 대감이 들인 계모 금씨가 집안의 대소사를 돌아보는 중이었다. 금씨가 태진은 지극히 아꼈지만 며느리가 말을 할줄 모르는 것을 근심하고 마땅치 않게 여김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루는 은밀히 선씨를 불러 묻기를 ’네가 이 집에 며느리로 들어와 3대독자 집안의 대를 이어야할 팔자뿐만 아니라 우리 또한 결코 무시할수 없는 공신가요 명문가인데 네가 과연 이런 집의 자부(子婦)로서 소임과 도리를 다할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심되도다. 네가 말을 할지 몰라 어차피 소통도 쉽지 않으니 다만 내 뜻을 제대로 알아들을수 있을지 의심되도다. 앞으로 이 일을 어찌하곘느냐. 하였다. 선씨가 우선 정중히 절한뒤 직접 글을 써서 보여주기를 ‘어머님께서 심려하심을 제가 모르지 않으나 가르쳐주시면 부족한대로 배우고 익혀 소임을 다하도록 하겠나이다. 어머니께선 부디 지나친 근심은 하지 말아주소서.’ 하였다. 금씨가 글을 알아서 부인이 써준 내용을 모르지는 않았으나 근심의 빛은 여전히 떠나지 않았다.
부인(婦人)이 본래 말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항시 글로써 소통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이에 주위 사람들이 늘 답답하였는데 특히 태진의 계모(繼母) 금씨(琴氏)의 답답함은 한층 더할 수밖에 없었다. 막상 선씨를 며느리로 들인뒤 늘 탄식하며 말하기를 ‘저 아이와 말로는 소통할 수가 없으니 좀 답답하지 않을수가 없으며, 어차피 집안살림의 모든 것을 저 아이에게 가르쳐야할 판인데 이 소임을 제대로 감당할지나 모르겠다’ 하며 탄식하였다.
부인이 금씨의 이란 속내를 알고 있었는데 한번은 손수 털실옷을 짜서 금씨 방에 갖다 놓은뒤 작은 쪽지를 남겼는데 그 내용이 이와같다. ‘곧 날이 추워질텐데 어머님께 조금이나마 도움되실게 없을까 근심하다 손수 털실옷을 하나 짜보았나이다. 비록 부족한 솜씨이지만 겨울에 챙겨 입으소서’ 하였다. 또 한번은 시장에 가서 두꺼운 가죽신을 사서 부인께 드렸는데 금씨가 의아해하자 역시 쪽지를 써서 보여주기를 ‘어머님이 본래 발이 차서 밤에도 버선을 벗지 않고 주무시는걸로 알고 있습니다. 역시 날이 추워지면 어디에 거동하실 때 불편해하지 않을까 걱정되어 특별히 발이 차지 않도록 두꺼운 가죽신을 사왔습니다. 겨울에 잊지않고 챙겨 신으소서.’ 하였다. 뒤늦게 금씨가 며느리의 뜻을 깨닫고 손을 잡고 눈물흘리며 말했다. ‘이 아이가 비록 말을 할줄은 모르나 내 깊은 비밀까지 심히 꿰뚫어보고 있구나. 보통 영특한 아이가 아니로다.’ 하며 이때부터 며느리를 이뻐하였다.
한번은 집안에 작은 분란이 있었는데 나이많은 하인 하나가 어린 여종을 범하려 하였다. 이에 부인이 직접 당사자들을 불러 추궁하니 나이많은 하인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소인이 원래 신분이 천한몸으로 이 집에 노비로 팔려와 어느덧 이십년을 살았는데 지금껏 장가들지 못하고 홀몸으로 지냈습니다. 나이많고 장가들지 못한 것이 어찌 죄가 될수 있습니까. 다만 지금이라도 정상적으로 각시를 얻어 장가들고 자손을 보기 원할따름입니다.’ 하였다. 이에 부인이 어린 여종에게 그 뜻을 물었다. 역시 말을 하지 못하니 글로 소통하는 수밖에 없는데 부인이 쓴 글은 글을아는 집사가 대신 읽어주어 하인들이 알게하였다. 여종은 또한 억울하고 항변하여 말하기를 ‘소녀가 아직 나이 어리고 일찍이 한번도 저 하인을 눈길준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천하고 어린 여인이라도 자신의 생각에 따라 능히 짝을 정하고 또 혼처를 가질 생각이 없다면 혼자 사는길도 있사온데 어찌 단지 나이많은 하인이라고 해서 강제로 저를 범하려 한답니까. 있을수 없는 일이니 마님께선 헤아려 주시오소서.’ 하였다. 이에 부인이 판결을 내리기를 ‘나이많은 하인의 심정도 이해 안가는바는 아니나 원하지도 않는데 어린 여인을 뜻을 물어보지도 않고 강제로 취하려 함은 실로 있을수 없는 일이다. 다만 그 처지를 불쌍히여겨 죄주지는 않겠으나 두 사람이 한 집에서 서로 얼굴을 보고 살기는 쉽지 않을터이니 나이많은 하인이 떠나도록 하라.’ 하고 약간의 노자를 준뒤 집안의 노적(奴籍)에서 삭제하였다.
이때 태진은 부친 정국진과 함께 공신 반열에 오른 기세봉(奇勢奉),엄주환(嚴株煥),국응배(菊應培)의 자녀들과 교류하며 자주 기방을 출입하였다. 이에 부인이 말하기를 ‘지금 나으리께서 어울리는이들이 모두 부친과 함께 공을세운 공신가문의 자녀들로 알고 있습니다. 공신가의 자녀들이 자손 대대로 교류하는 것은 예부터 지금까지 흔하게 볼수 있는 일이나 자주 기방에 출입하는 것이 행여 훗날 누가 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예부터 좋은벗과 그른벗을 가리는 것은 그 사람의 판단에 달린것이니 나으리께선 부디 좋은벗과 그른벗을 가리는 혜안을 키우소서.’ 하였다. 이에 되려 태진이 역정을 내며 말하기를 ‘부인께서 나에데해 심려하는 것이 그른벗과 어울리는 문제 때문인지 아니면 기방 출입을 투기하는것인지 뜻을 모르겠소이다. 나에게도 좋은벗과 좋지못한 무리를 가리는 판단력이 없는 것이 아니니 부인은 공연한데까지 간섭하지 마시오’ 하였다.
본래 태진이 처음 집안에서 혼사를 파기하려는 것을 스스로 고집을 부려 부인이 어려서부터 말을 못하는 장애가 있음에도 스스로 선택한것인데 이제 어느덧 나이들고 혼사를 치른뒤도 시간이 지나 옛 정이 많이 떨어진 것이 아닌가 우려되었다. 태진이 기방출입을 자주하자 한번운 부인이 진심으로 화가나 방문을 걸어잠그고 태진을 들어오지 않게 하였다. 이에 태진이 화가나서 뜻을 물으니 부인이 글로 써서 보여주기를 ‘나으리께서 이제 기방출입만 즐기시고 저를 더 이상 찾지 않으시니 이는 필시 옛정이 많이 사라진 뜻 같습니다. 이런식으로라면 차라리 더 어린첩을 두시어 스스로 즐기시 바라고 저를 찾지 마소서. 정이 딸어진 낭군곁에 공연히 미련을 두고 남아있을 생각이 없나이다.’ 하였다. 태진이 이에 뉘우치고 진심으로 부인에게 사죄한뒤 한동안 기방출입을 자제하였다.
부인은 태진과의 사이에 아들 둘을 낳았는데 이름을 각기 세현(世賢)과 세호(世浩)라 지었다. 부인이 말을 할줄 몰라 아이들을 훈육할때도 글로 소통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다행히 세현과 세호 모두 어미를 천하다 여기지 않고 잘 따랐다. 하루는 계모 금씨가 부인을 불러 차를 마시며 말하기를 ‘이 집안이 손귀한 삼대독자 집안이라 너나 나나 그 막중한 소임은 모르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나는 태진에게 계모라 행여 내가 자손을 낳았을시 후일에 어떤 분란이 있지 않을까 근심하였다. 대감께선 개의치 않으시고 자손을 더 보기 원하셨으나 보다시피 이와같이 되었다. 너는 말못하는 여인으로 처음 시집올때도 여러 가지 말들이 많았으나 이제 네가 먼저 아들 둘을 낳았으니 오히려 내가 더 할말이 없도다. 대감께서 만약 세상을 떠나시면 나는 뒷방 늙은이로 늙어갈 수밖에 없을터인데 모쪼록 훗날의 일을 잘 부탁한다.’ 하였다. 이에 부인이 화답하기를 ‘어머니께서 어찌 벌써부터 안 해도 될 근심을 다 하십니까. 죽을때까지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다할것이오 서방님께서도 절대 키워주신 은의를 저버릴분이 아니시니 근심마소서.’ 하였다. 금씨가 그런 부인의 청초한 모습을 보며 더욱 탄식하며 ‘과연 영특하고 총명하기로 세상에 짝을 이룰만한이가 없을것같은 인품이로다.’ 하였다.
하루는 태진과 부인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때 태진이나 부인이나 그 부친이 수종의 일을 도운 황진하,복진풍등의 측근으로 일해온이들이라 그 자손 역시 계속해서 황진하등의 무리를 따랐다. 다른 교류하는 공신가문의 자손들도 처지가 거의 비슷하였는데 부인이 하루는 근심되는 듯 이와같이 육필로서 하고픈말을 대신하였다. ‘서방님께서 공신가문의 자손들과 교류하시며 금상의 실세들 밑에 줄을 서심을 나무랄것이 없으나 어느덧 금상께서 즉위하신지 이십년이 넘었고 처음 즉위하실 때 여러 가지로 복잡한 나변이 있었던 것으로 압니다. 따라서 이후의 일이 또 어찌될지 모르는것이니 부디 후대의 평가를 의식하시며 근신하소서.’ 청하였다. 이에 태진이 오히려 이해할수 없다는 듯 말하기를 ‘장부로 태어나 입신양면하여 크게는 나라를 번창하게 하고 안으로는 가문을 빛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이거늘 부인께선 내게 뭐 그리 크게 잘못된 것이 있다고 이렇게 나오시오. 이해할수 없는 일이오이다.’ 하였다. 이에 부인이 응수하며 말하기를 ‘소첩이 아는 것은 별로 없사오나 무릇 정치를 할 때 근본은 크게는 널리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고 평온하게 하는것이요, 작게는 사직이 위태롭지 않도록 안정적으로 지탱해 나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도리를 아는이는 훗날 충신이나 명신으로 평가를 받을것이나 도리에 어긋난일을 하는자는 당대에는 부귀를 누릴지라도 후대에는 평가가 그릇될수 있으니 다만 그것을 유념하시길 바랄따름입니다.’ 하였다. 이에 오히려 태진이 이해할수 없다는 듯 ‘부인은 마치 금상의 치세가 잘못되었거나 내가 모시고 따르는 어른들이 크게 도리에 어긋나는 일이라도 하고있는양 말씀하시는구려. 더더욱 이해할수 없는말이오이다.’ 하였다. 부인이 다시금 답답함을 참지 못하여 대꾸하기를 ‘저는 다만 정치를 함에 있어 올바른 도리를 원론적으로 일러드렸을 따름입니다.’ 하였다. 태진에게 불쾌한 빛이 쉬이 지워지지 않았다.
하루는 부인이 기이한 꿈을 꾸었는데 그 내용이 이와 같았다. 부인이 태진과 함께 어떤 이상한 집안에 있었는데 가구며 침구,집기 따위가 모두 이 세상의 것 같지않은 듯 예사롭지가 않았고 옷차림새 또한 기이하였다. 놀라 주변을 살펴보니 다른이들의 옷차림새나 모양새도 모두 마찬가지였는데 부인이 무슨 영문인지 몰라 두려워 떠는 가운데 태진이 갑자기 부인의 뺨을 때렸고 부인은 울면서 뛰쳐나갔다가 그만 놀라 깨어보니 꿈이었다. 본래 생시에도 태진이 부인에게 손찌검을 하는일이 없었는데 꿈에서 이런일이 벌어지니 더욱 놀랍고 기이하기만 하였다. 다만 꿈속에서 싸운 곡절이나 대화내용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아 그저 혼란스럽기만 했다. 부인이 본래 점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나 하도 기이하고 이채로운 꿈이라 도저히 참을수 없어 물어물어 아는 복자(卜者)를 찾아가 꿈 해몽을 부탁했는데 복자가 답하기를 ‘장차 집안이나 남편과 사이에 큰 분란이 있을 것 같은 조짐입니다. 부인께선 바라건데 한동안 몸가짐을 조심하소서.’ 하였다. 부인이 불안해하는가운데 한동안 근심과 수심이 쉬이 떠나지를 않았다.
수종이 즉위한지 23년만에 세상을 떠났는데 나이 55세였다. 장남 원성군(原盛君)이 뒤를이어 즉위하였는데 병약하여 3년만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아들 종(宗)은 이때 나이 겨우 네 살이라 대를이어 왕위에 오르기 적절치 못하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어떤이들은 수종의 다른 아들인 차남 원진군(原辰君)이나 삼남 원동군(原同君)을 왕위에 올리자는 이야기 이미 죽고없는 인종의 삼남 공(共)의 아들인 기전군(起展君)과 기승군(起承君) 심지어 선대 의종의 장손인 혜선군(慧線君)을 왕위에 올리자는 의견까지 나오는등 조정이 사분오열되었다.
이때 태진의 나이 어느덧 40에 이르고 있었는데 조정의 의견이 분분해지자 별도로 어떤 소신을 펴지는 못한채 그저 눈치만 보고 있었다. 나이어린 첩실을 들었는데 이름은 세진(世眞)으로 나이 십칠세였다. 태진이 차마 조정에 출사할 생각은 하지 못한채 세진의 거처에만 들러 술을 드니 세진이 근심되고 의아한 듯 말했다. ‘대감깨선 근래에 조정엔 나가시지도 않고 다만 향리의 일만 보시고 술만 드시고 계시니 이 어찌된 일입니까 ?’ 하였다. 이에 태진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선왕께서 승하하시고 그 아들이 즉위하였는데 보위에 오른지 삼년만에 세상을 떠나 그 아들은 너무 어려 왕위에 오를수 없다하여 조정이 의견이 분분하다. 어찌보면 선대왕 인종께서 세상을 떠나신뒤 그 차남과 삼남이 후계를 다툴때와도 비슷한 사정이라 할수 있겠는데, 그때 내 아버님께선 다행히 줄을 잘서 차남쪽의 측근에 기대어 일을 도와 승승장구할수 있었다. 허나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다급하고 위태로와 만약 여기서 줄을 잘서면 계속 승승장구 할수 있겠으나 만약 줄을 잘못서면 멸문지화가 코앞에 있으니 이를 어쩌면 좋겠는가. 너처럼 나이어린 계집이 이런 조정의 사정을 어찌 헤아릴수 있곘냐만 나로선 걱정근심이 떠나지를 않는구나‘ 하였다. 이때 세진이 나름 지혜를 발휘한답시고 이와같이 말했다. ’대감같이 현명한분이 어찌 이런일로 깊은 근심을 하십니까. 제가 아직 나이어리고 미천한 계집이나 세상에는 적장손 계승 원칙이란게 있어 자칫 왕의 사후에 일이 질못되는 일을 대바히가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 선왕의 아들이 나이 어리다하여 조정의 일부 신하들이 반대 공론을 꾸미고 있는듯한데 이 자체가 역모요 선왕의 정통성을 거스리는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가. 나으리는 부다 적장손 계승의 원칙을 따르소서.‘ 하였다. 헌데 이때 조정의 대세는 선왕 수종의 차남 원진군이나 삼남 원동군을 가능성을 보는이가 많았고 네 살짜리를 왕위에 올리자고 주장하는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태진이 여전히 선택을 하지 못한채 조정일을 내던지고 술만 계속 들고 있었다.
이때 선씨(宣氏)가 남편의 근심함을 보다못해 결국 서한을 보냈다. ’세상에 적장자 계승 원칙이 있다하나 이는 다만 후계구도가 분명치 않아 왕실의 법도가 무너지는 것을 막기 위함이나, 장손이 바르지 못해 다른 대안을 찾는경우가 이전에도 많았습니다. 제가 볼 때 이런때 나으리께선 고집스럽게 적장손 계승 원칙을 따지는이들을 따르기보단 누가 보다 조정을 안정케하고 백성의 삶을 평온케 할 왕재인지를 먼저 살피소서‘ 하였다. 이로인해 다시 태진이 탄식하며 ’이제 본처와 첩실사이에조차도 후계에 대한 의견이 다르니 내가 몸을 반으로 나눌수도 없는것이니 어찌할 방도를 모르겠도다.‘ 다만 술마시며 탄식하는날만 늘어갈 뿐이었다.
이때 다시 세진이 술에 취한 태진을 자신의 침소로 들게하여 동침하였다. 그리고 거듭 고운 말과 글로 적장손 계승파를 따를 것을 간하니 태진이 세진을 품에 안고 말하기를 ’아무리 그래도 말못하는 부인보단 말이 통하는 첩실과 대화하는게 나을 것 같도다‘ 하고 그녀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왕위는 결국 수종의 차남 원진군이 물려받게 되었다. 이로인해 3년만에 세상을 떠난 장남 원성군의 네 살난 아들을 보위에 올리려던이들은 모두 파직되거나 한직으로 밀려날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본래 태진이 교류하던 이들이 모두 수종때 공을 세운 공신가의 자손들이고 모두 원진군을 밀어 신왕치세에서도 계속 승승장구할수 있게 되었다. 태진 혼자만 처지가 딱하게 되니 이에 옛 벗들이 찾아와 이와같이 위로하였다. ’너무 근심치 말고 우리와 계속 교류하며 지내세. 금상과 높으신 대감들게 잘 말씀드리면 그리 어렵지 않은 벼슬 하나정도는 유지할수 있을것일세.‘ 하였다.
이때 이원모(李員謨),한창섭(韓倉涉),봉원식(奉元式),송태권(宋兌權)등이 찾아와 이렇게 말하였다. 나라에 적장손 계승 원칙은 금선이 생겨진 태조때부터 세우려한 법도요 앞서 화려(華麗) 시절부터도 그와같은 법도가 있었네. ’장자가 어질지 못하거나 문제가 있을시 다른 대안을 찾으라‘는 단서가 있긴 했으나 적장손 계승이 원칙인 것은 달라진 것이 없네. 태조 이래로 적장자 계승 원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안타까운일이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바른 법도를 세워야하지 않겠는가 ?’ 하며 함께 손잡을 것을 권하였다. 이들은 모두 앞서 원성군의 네 살난 아들을 밀다가 파직된 이들이었다.
이에 태진이 근심하기를 ‘이들을 따르다 자칫 일이 잘못되면 역모가 되어 멸문지화를 맞을것이나 지금 섣불리 금상의 뒤를 따르기도 쉽지 않도다. 이미 실세에서 밀려나 더 이상 출사하기도 쉽지 않은데, 지금와서 대체 어쩌자는 말인가. 한쪽을 택하자니 역모가 될것이 두렵고 다른 한쪽을 택하더라도 앞으로의 일이 순탄치 않을것임은 달라지는 것이 없도다’ 하며 쉬이 결심을 하지못하고 근심하고 있었다. 이에 어린 첩실 세진을 불러 술을 마시며 다시금 근심을 논하니 세진이 말하기를 ‘대감께선 어찌 이리도 대의(大義)를 쉽게 저버리려 하시나이까. 지금 적장손 계승 원칙을 파기한이가 옛적 벗들이니 지금 저들을 버리고 충의의 길을 택하면 만세에 그 이름이 남을것인데 무엇을 근심하십니까. 마땅히 대감께선 대의를 따르소서.’ 하였다. 태진이 여전히 어찌해야할지를 몰라 술로 날밤을 지새면서 고민만 하였다. 이때 뒤늦게 부인(婦人)이 이 일을 듣고는 놀라 급히 서한을 보내 이와같이 썼다. ‘대감께서 어찌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치세에 평지풍파를 다시 일으키려 하시나이까. 또한 대감께선 이미 손귀한 집안에서 가문을 번창케 해야할 책무가 있거늘 이제와 섣불리 역모의 길에 들어섰다가 일이 그르치게 되면 그 뒷감당을 어찌하려 하시오이까. 지금이라도 공연한 일에 끼어들어 파란을 일으키지 마시고 온전히 한 몸을 보전할 길을 찾으소서’ 하였다. 자칫하면 두 집안이 모두 멸문의 화를 입을수도 있을 것 같기에 거듭 간곡히 권하였다.
태진이 여전히 어느 한쪽을 택하지 모사고 술만 마시며 세월을 보내고 있었는데 어느덧 이원모등의 일이 발각되어 모두 체포되고 주살되었다. 다행히 태진은 제안만 받았을뿐 아직 동참의 뜻을 밝힌바가 없어 연좌(連坐)를 면할 수가 있었다. 이때 태진의 일을 걱정한 옛 벗들이 다시 찾아와 말하기를 ‘지방의 작은 현감자리라도 받을수 있도록 힘을 써볼터이니 당분간은 공연한 일에 끼어들지말고 자중하시게. 우리가 알아서 자네의 일을 신경써주도록 하겠네’ 말하였다. 태진은 더욱 근심의 골이 깊어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세진이 본래 부귀공명의 길을 바라고 어린 나이에 첩실이 된것인데 태진의 앞날이 가망없어 보이자 결국 떠나고 말았다. 이때 세진은 태진과의 사이에 딸도 하나 낳았는데 그 아이마저 버리고 떠나고야 말았다. 계모 금씨마저도 ‘내 아들이 비록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아니나 그렇게까지 어리석은 아이는 아닌줄 알았는데 이 지경까지 이를줄은 몰랐구나. 늦은 나이에 들인 어린 첩실마저도 제 새끼를 버리고 달아나버렸으니 이제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말인가’ 탄식하였다. 이에 아무도 태진의 일을 돌아보지 않는 처지가 되었을 때 다만 선부인만이 뒤늦게 다시 찾아와 그를 위로하였다. 이에 태진이 뒤늦게 눈물을 흘리며 ‘옛부터 조강지처를 외면하고 나이어린 첩실에 빠졌다가 패가망신한 이가 많다고 들었는데 나 또한 그 이치를 따르는 것 같이 심히 면목이 없소이다. 진심으로 부인을 뵐 면목이 없소.’ 눈물을 흘리며 거듭 사죄하였다.
부인이 어릴때부터 말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이로인해 항상 글로서 소통할 수밖에 없음을 안타까와 하였다. 이에 문득 생각하니 또 한편으론 ‘나는 그나마 글을 알아 이와같이 소통하지만 양반이 아닌 천한 집안 여인이 말을 할줄 모르면 그땐 소통할 방도도 없는 것 아닌가.’ 하였다. 이로서 스스로 손짓이나 발짓 혹은 그림등으로 농아가 소통할수 있는 방식을 연구해보고자 하였으나 아쉽게도 그 내용은 전해지지 않는다. 또 한번은 부인이 스스로 자신처럼 말을 할줄 모르는 천한 집안의 나이어린 여인들을 모두 불러 크게 잔치를 열기를 청했으나 이때는 이미 집안의 가세가 기울어져 있을때라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부인이 나이 40대 중반을 넘었을 때 병을 얻어 거동조차 쉽지 않은 상태가 되었다. 태진의 나이 이때 50을 넘었는데 부친은 이미 오래전 세상을 떠나고 계모 금씨는 아직 살아 있어 나이 60대 중반이었다. 이에 부인이 근심하고 죄송스러워 태진에게 뜻을 전하기를 ‘제가 본래 말을 할줄 모르는 병을 얻어 지금까지 낭군을 제대로 보좌하지 못한 죄가 있는데 이제 다시 병을 얻어 더 이상의 일을 장담할수 없게되니 한스럽기 그지없나이다. 지금이라도 차라리 나이어린 첩실을 두시어 더 많은 자손을 보아 가문을 번성케하시고 계모님께도 못다한 효를 다 하다록 하십시오. 저는 원망치 않고 여기서 만족하여 편히 눈을 감겠나이다.’ 하였다. 이에 오히려 공(公))이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내가 오히려 지금가지 그대에게 지은죄가 많은데 이제와 그와같은 말을 하는 까닭이 무엇인가. 죽는날가지 그대 곁을 떠나지 않고 배신하지 않겠노라.’ 하였다. 이에 오히려 다시 부인이 짧은 서한을 주어 보여주기를 ‘이미 지난날 제가 말못하는 병으로 집안에서 내쳐질뻔하였는데 공께서 끝내 저를 내치지 않으시고 신의를 지켜 부인을 맞아주셨으니 그 은혜만도 큰데 죄라하니 당치 않으십니다. 가문의 번창함은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마땅한 자손의 도리일터 이제 더 이상 제게 부담갖지 마시고 공의 뜻대로 하십시오.’ 하였다. 공이 거듭 당치 않음을 말했으나 부인이 오히려 고집을 부려 결국 나이 오십에 더 나이어린 첩실을 들여 아들은 보지 못하고 딸만 둘을 더 두게 되었다.
공에게 부인이 첩실을 포함하여 셋이었는데 첫부인인 선부인에게서 두 아들을 보았고, 그 다음 둔 첩실로부터는 딸 하나를 낳은채 배신을 당했다. 그 다음 첩실이 딸 둘을 더 낳아 슬하이 2남3녀를 두게되었다. 공은 나이 칠십에 이를 때 세상을 떠났는데 부인은 그보다 6년 앞서 세상을 떠났다. 부인이 공보다 여섯 살 연하였으니 60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셈이다. 공이 세상을 떠날 때 자손 다섯을 모두 불러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품행이 성실하고 온천지를 못하여 나라에도 큰 공을 세우지 못하고 집안에도 오히려 누만 끼쳤다. 이로써 선대를 볼 면목이 없고 말못하는 너희 어미에게도 못할짓을 많이 했으니 실로 몸둘바를 모르겠구나. 그저 너희 다섯이 먼저 돌아가신 너희 어머니를 진심으로 존중해주면 내가 다른 여한이 없겠도다.’ 하고 눈물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선부인의 일은 아쉽게도 ‘여중군자록(女中君子錄)’에 실리지는 못하였으나 서북파(西北派)의 기세봉이란 이가 남긴 잡저(雜著)에 이와같은 곡절이 실려있기에 특별히 남겨두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