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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설명

[스크랩] 엘리자베스. Elizabeth. 1998

작성자팔방미인|작성시간12.09.01|조회수81 목록 댓글 0

1999.03.20 개봉 / 18세 이상 / 121분 / 드라마 / 영국

감독 : 셰카르 카푸르 Shekhar Kapur

출연 : 케이트 블란쳇 (엘리자베스 1세 역), 제프리 러시 (프란시스 월싱엄 경 역), 크리스토퍼 에클리스턴 (노포크 공작 역), 조셉 파인즈 (로버트 더들리 역), 리처드 아텐버로우 (윌리엄 세실 경 역), 로드 컬버트슨 (리들리)

1554년 영국, 질투심 많은 카톨릭 신봉자인 메리 1세의 치정 하에 있는 영국은 재정적으로나 종교적으로나 어려운 처지에 몰려있다. 죽음을 눈앞에 둔 구교도 메리 여왕(Queen Mary Tudor: 캐시 버크 분)은 신교도 박해에 더욱 박차를 가한다. 역시 신교도인 메리의 배다른 여동생 엘리자베스 공주(Elizabeth I: 케이트 블랑쉬 분)도 모함에 빠져 사형될 위기에 처한다. 다행히 그녀는 살아나고 메리는 임종을 맞는다.

여왕의 자리에 오른 엘리자베스는 공주 시절 사랑하던 로버트 더들리(Robert Dudley: 조셉 피네스 분)와 헤어질 것을 강요당하고, 윌리엄 세실 경(Sir William Cecil: 리차드 아텐보로 분)에 의해 정략결혼을 해야할 처지에 놓인다. 영국은 당시 재정적으로는 적자를 면치 못한 채 군대도 없어 외세의 침략 위협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노포크 공(Duke of Norfolk: 크리스토퍼 에클레스톤 분)이 왕정의 반대세력으로 떠오르게 된다. 국가를 위해서 엘리자베스는 죽은 언니의 남편이었던 스페인의 필립 왕이나 프랑스 여왕의 조카 앙주 공(Duc d'Anjou: 빈센트 카셀 분) 중 한 사람을 선택해 결혼해야만 하는 운명에 놓인다. 이때 프랑스의 여왕 메리 드 기스(Mary of Guise: 패니 아던트 분)가 스코틀랜드에 병력을 집결시키고, 이 전투에서 엘리자베스는 치욕스러운 패배를 당한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권위를 더욱 드높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녀는 세실 경의 압력에도 불구, 청혼을 모두 거부하고, 이로 인해 암살의 위협에 시달린다. 더들리에게서 위안을 찾으려던 그녀는 그가 이미 유부남이었다는 사실을 전해 듣는다. 모두에게 배신감을 느끼게 된 엘리자베스는 이전보다 더욱 월싱엄 경(Sir Francis Walsingham: 제프리 러쉬)에게 의지하게 된다. 조카의 청혼을 거절한데 대해 앙심을 품은 메리 여왕이 독 묻은 드레스를 보내 암살을 기도했음이 드러나자 엘리자베스는 월싱엄 경을 스코틀랜드로 보내 메리 여왕을 암살하도록 한다. 뿐만 아니라 노포크 공을 중심으로 반역을 꾀하던 궁중 내 무리들을 숙청함으로써 그녀는 마침내 왕좌를 안전하게 지켜낸다. 음모와 배반의 소용돌이를 지나온 그녀는 자신이 영국과 혼약을 맺은 ‘버진 퀸’임을 선포한다.

16세기 영국 절대왕정의 전성기를 이룬 여왕 ‘엘리자베스 1세’의 전기 영화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공주에서 여왕으로 등극한 그녀의 일대기를 다룬 시대극이자 스릴러물. 음모와 암투가 난무하던 시절, 왕위에 올라 독립된 한 개체로서의 여성의 면모를 보여주었던 엘리자베스 튜더의 파란만장한 삶과, 개인적 열정, 우정을 비롯해 국가를 통합해가는 과정이 감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94년작 <밴디트 퀸>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은 인도 감독 셰카르 카푸르가 첫 영어권 영화로서 연출한 작품이다. 아카데미 7개 부문 후보에 올랐으나 분장상 단 한 부문만 수상했다.

엘리자베스 여왕에 관한 참고 자료.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는 헨리 8세와 앤 볼린의 딸로 1553년 9월 7일 그리니치 로열 팰리스에서 출생했다. 엘리자베스의 아버지 헨리 8세는 폭군임과 동시에 카리스마적인 인물이었다. 스페인의 공주였던 첫번째 부인 ‘아라곤의 캐더린’은 ‘메리’라는 딸 하나밖에 낳지 못했기 때문에 헨리로부터 버림을 받았고, 아들을 바랐던 헨리 8세는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그녀와 이혼했다. 교황이 이혼을 반대하자 천년 이상 이어온 구교(로마 카톨릭)와 바로 인연을 끊고 영국을 신교국가로 만든다. 당시만 해도 가장 막강한 권력을 지닌 것으로 간주되던 로마 교황청과 정면 대립하게 되자 전 유럽이 긴장했다. 대를 이을 아들의 탄생이 안정의 권력의 상징과도 같았던 때에 두번째 부인 앤 볼린이 또다시 딸인 엘리자베스를 낳자 크게 실망한 헨리 8세는 앤 볼린을 간통과 반역죄를 뒤집어씌워 참수형에 처하고, 그녀와의 결혼이 무효이며 엘리자베스는 사생아라고 발표한다. 엘리자베스는 런던에서 햇필드 하우스로 추방당해 외롭게 자란다. 역사에 의하면 엘리자베스는 어린 나이에도 어른처럼 의젓했다고 전한다. 헨리 8세는 세번째 왕비 제인 세이모어를 맞아들인다. 그녀는 그에게 그토록 고대하던 아들을 낳음에 따라 엘리자베스의 존재는 더욱 약해진다. 비록 그녀가 사생아라고는 해도 왕위 계승 서열 3위였고, 따라서 귀족의 아들들만이 받을 수 있었던 교육을 받았다. 헨리 8세와 앤의 이야기는 그 유명한 69년작 <천 일의 앤>에 잘 나타나있다. 엘리자베스는 음악, 시, 고전과 역사는 물론 이태리어, 불어, 그리스어, 라틴어까지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이런 외국어 능력은 훗날 그녀의 뛰어난 외교 활동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영리하고 진지했던 엘리자베스는 이때 신학에도 관심을 가져 태동기에 접어든 실용적인 성공회의 교리를 받아들이게 된다.

마침내 헨리 8세의 여섯 번째이자 마지막 왕비인 캐더린의 도움으로 엘리자베스는 다시 런던에 입성할 수 있게 된다. 1547년 헨리 8세가 죽자 10세의 에드워드가 뒤를 잇게 된다. 그러나 에드워드는 몸이 허약하여 오래 살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으며, 수 많은 음모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의 후견인이었던 캐더린 파는 토머스 세이모어 경과 재혼했고, 세이모어 경과 엘리자베스의 관계를 놓고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캐더린 파가 죽은 뒤 세이모어 경은 엘리자베스와 결혼해 왕위를 노리려 했다는 죄목으로 체포되어 엘리자베스 역시 심문을 당했다. 결국 1553년 에드워드 왕이 죽자 카톨릭을 맹신하는 맏딸 메리가 왕위에 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어머니를 폐위하고 사형에 처하게 한 구실이었던 영국 국교회를 탄압하고, 스페인의 필립 왕과 결혼하고 영국을 카톨릭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잔인한 학살도 마다하지 않자, ‘블러디 메리’(피의 메리)라고 불릴 정도로 국민들의 마음은 점점 더 신교로 돌아섰고, 국민들은 엘리자베스를 향하게 되었다. 1554년 토머스 와이어트의 반란이 일어나자 엘리자베스 역시 반역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런던탑에 끌려갔으나, 반역 가담에 대한 증거가 나오지 않아 결국 풀려나게 된다. 엘리자베스는 메리의 통치 기간 동안 여왕에 대한 깊은 충성심의 카톨릭 신자처럼 거짓으로 살아야 했는데 가장 가까운 친구들조차 그것이 연극인지 아닌지 모를 정도였다고 한다. 메리 여왕은 아이가 없었고 결국엔 남편에게도 마저 버림받은 처지였다. 암으로 투병하던 그녀는 카톨릭을 수호하기 위해 다음 후계자인 엘리자베스를 제거해야 한다는 신하들의 말에 계속 망설이다 결국 1558년 11월 17일 서거하였다.

1559년 1월, 마침내 25세의 나이로 엘리자베스가 여왕이 된다. 웨스트민스터에서 대관식을 가진 그녀의 앞길에는 이제까지 겪어온 위험보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녀의 첫 번째 임무는 영국에 신교를 회복시키고, 메리 시절의 유혈 정치를 끝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으로써 가장 막강한 두 국가, 프랑스와 스페인을 영국의 적으로 만드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또 하나의 문제는 그녀가 여성이라는 점이었다. 16세기에는 여성은 연약하고 열등한 존재라는 인식이 깊이 뿌리 박혀 있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그녀가 혼자 통치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안정과 행복을 얻기 위해서 그녀가 조속히 결혼해 아들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찰스 공, 훗날 프랑스의 왕이 되는 앙주 공, 스웨덴의 에릭 14세, 러시아의 이반 대제 등이 물망에 올랐다. 엘리자베스는 수년 동안 이들을 저울질해 보았고, 그녀가 영영 결혼하지 않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 의회의 두통거리가 되었다. 그녀가 후계자를 남기지 않고 죽으면, 헨리 8세의 여동생의 손녀인 스코틀랜드의 메리 여왕이 뒤를 잇게 되며, 그녀가 구교도라는 것이 문제점이었다. 영국의 미래는 불투명해 보였다. 결국 엘리자베스의 마음을 사로잡은 남자는 그 누구도 아닌 어린 시절부터의 애인 로버트 더들리 백작임이 드러나고, 여왕이 임신했다는 소문까지 궁중에 나돈다. 그러나 그녀가 워낙 조심스럽고 신중해 오늘날까지도 그 로맨스가 진실이었는지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1570년 교황은 엘리자베스를 파문시키고 그녀의 신하들이 어떤 충성의 서약의 제약도 받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 후대의 교황은 한술 더 떠 이 ‘미천한 이단아’를 왕좌에서 밀어내는 것이 결코 죄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이를 신호탄으로 영국 구교 귀족층의 지원을 받은 프랑스와 스페인이 엘리자베스 축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그러나 영국이 군사적으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나 엘리자베스의 고문들은 프랜시스 월싱엄 경 덕분에 방대한 양의 정보를 보유하고 있었다. 독실한 신교도인 월싱엄은 문제의 근원이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5세와 메리 드 기스의 딸 메리에게 있다고 보고 1568년 그녀를 영국에 가택 연금시켰다. 엘리자베스는 그 이상의 행동은 허락하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1569년 월싱엄은 당시 가장 막강한 재력과 권력을 자랑하던 노포크 공이 스코틀랜드의 메리와 결혼해 왕좌를 차지하려 한다는 것을 알고, 이듬해 노포크가 메리를 탈출시키려는 음모를 실행하려는 때(훗날 리돌피 플롯이라 불리운다) 이를 밝혀내어 그를 단두대로 보낸다. 이 음모에는 더들리 백작도 연루되어 있었다. 남편 없이 또 한 번 역경을 이겨낸 엘리자베스는 선대에 없었던 막강한 여왕의 모델을 세우려 하고 있었다. 전쟁 대신 사랑의 언어로 나라를 다스리고, 사람들이 더 이상 성모 마리아에게서 위안을 찾을 수 없을 때 자신이 그 위안을 줄 수 있는 ‘버진 퀸’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시대는 황금기로 불리며, 그녀는 ‘글로리아 나라(요정의 나라)’로 불린다. 이러한 황금기와 신격화된 왕의 이미지가 이만큼 굳건히 세워진 것은 이 시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그녀의 이미지 역시 정치적으로 철저히 계산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와 스펜서는 시로써 그녀를 찬양했고, 화가인 힐리어드는 이 ‘태양 여왕’의 초상화를 그려냈다. 탤리스와 버드는 그녀의 통치를 찬양하는 노래를 작곡했다. 엘리자베스가 의회에서 ‘황금 연설(Golden Speech)’을 했던 1601년은 통치 40년이 넘은 해였다. 이제는 늙고 노쇠했으며 옛날과 같은 영광은 사라졌으나 여전히 그녀는 ‘버진 퀸’ ‘글로리아나’였다.

참고사항. 엘리자베스가 공주 시절 살던 햇필드 하우스 장면은 더비셔의 해든 홀에서 촬영하였다. 앨른윅 캐슬은 순교자들의 화형 장면, 엘리자베스가 프랑스 대사를 맞는 장면, 공주 시절 체포되는 장면 등에 이용되었다. 뱀버러 캐슬은 색슨 시대부터 매우 중요한 거점으로 꼽혀왔던 곳이다. 11세기 후반 윌리엄 2세가 점령했던 곳이기도 하다. 엘리자베스와 더들리가 밀애를 나누는 헌팅 로지 장면, 그리고 메리 드 기스가 최후를 맞는 장면은 칠링엄 캐슬에서 촬영되었다.

엘리자베스 여왕 시대를 다룬 영화가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이 이 영화의 의상 디자이너 알렉산드라 바이른의 흥미꺼리였다. 그 시대 의상에 관한 아무런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정확히 고증 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디자이너의 창의력이 많이 발휘되었다. 블랜쳇의 의상은 영화 초반에는 목이 깊이 파여 있다가 후반으로 갈수록 점차 목둘레가 좁아져가고, 마지막 아이콘 신에서는 완전히 목을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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