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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물/사상/종교

문사철과 이 시대의 보석 송복 교수

작성자동웅|작성시간10.09.05|조회수215 목록 댓글 6

저가 있는 다른 글방(입 출회가 닫혀진)에 계재된 글이지만,

그리고 저의 친구의 얘기라 그런 것이 아니고 우리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는 좋은 글이라 옮겨 왔읍니다.

 

이 시대의 보석... 송복(宋復)!

김승웅

 

 

이, 하영석,

자네가 앞서 언급한 글 "왜 인문학(人文學)인가"... 열독(熱讀)했네.

그 글의 주인공되시는 송복 선배님,

이 시대가 두고두고 모셔야 될, 정말 대단하신 분이시네.

 

빼어난 붓글씨 솜씨에, 풍류까지 갖춰... 외우는 시만 수 백편 되고, 

두주불사(斗酒不辭)의 전형적인 호걸이시네.

또 출신이 자네와 같은 기자라서, 댓쪽 같이 곧으시고...

1년 전 송 선배 모시고 남해 욕지도에 다녀오면서

많을 걸 생각케 하신 분일세.

 

지난 해까지도 이 글방의 고정 식구셨는데,

요즘은 내가 글을 보내드리는 걸 자제하고 있네.

아래 소개하는 책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을 출간하신데 이어

지금 <우암 송시열>을 집필 중이시라

그 분의 금쪽같은 시간을 빼앗지 않기 위한 나의 작은 배려일세.

 

자네 글 읽고 글방 저장함에 들어가

송 선배의 위 명저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을 읽고

내가 2년 전 이 글방에 남긴 독후감을 찾아냈기에 여기 재록하네.

저장일자가 2008년 6월 15일로 되어 있는 걸 보니

자네가 글방 식구 되기 전이구먼.

 

쉬엄쉬엄 읽어보시게나.

추석 쇠고, 전주 촌놈들 모아 한 잔 기울이세.

승웅이가  

   ...............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을 읽고

 

 

자 송복(宋復)교수(연세대 명예교수)의 역저(力著)

<서애 류성룡 위대한 만남>을 닷새 전 다 읽었습니다.

미미한 접근이 되겠습니다만,

독후감을 씁니다. 

                                                                                          

                                                                         송복 교수

 

아, 세상을 이렇게 보는 학자가 계셨구나...하고

그 분과 제가 이 시대를 함께 살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결론부터 미리 말하고 들어가는 저의 이런 못된 습속, 

같은 언론인 출신이신 송복 선배께서도

익히 공감하실 습속이라 여깁니다만.... 

 

 

늦깎이 말단 무장 이순신을 만나자 대번에 7단계 승진이라는 파격 조치를 취해

전라좌수 라는 요직에 앉힌 인물이 다른 사람 아닌,

당시 영의정을 맡고 있던 서애 류성룡입니다. 

 

 

더구나 수군(水軍)과는 전혀 무관한 육군(陸軍)의 이순신을

행주대첩의 권율과 마찬가지로 발탁한 분도 바로 류성룡이었다는 점,

그리고 저자가 책 속에서 자주 거론하고 있는 “만약에...?”(What if...?)라는 논리에

비춰 그 이순신을 만약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발탁했던 들

조선이라는 나라가 지금 과연 존재하고 있을까,

심지어 제가 이렇게 4백여 년 지난 시점에서 당시의 임진왜란이 어쩌고저쩌고 를

감힌 따질 수나 있었을까 하는 역사의 우연성과 필연성을

저울질 하게 되네요. 

 

 

이순신을 하루아침에 수군 최고자리인 전라좌수사 자리에 앉혔던 걸로 미뤄

당시의 시대와 세상, 그리고 사람을 보는 류성룡의 안목과 기개는

한마디로 촉나라 제갈공명 이상 가는 신산(神算)의 경지가 아니었나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하는 대목은

이순신이 선상에서 왜군의 총에 맞아 숨을 거두던 바로 그날이

이조 5백년에 걸쳐 최장수 영의정 자리에 있던 류성룡이 관직에서 물러나던 날과

일치한다는 점입니다.                     

 

저자 송복이 책 제목으로 뽑은 “위대한 만남...”이라는 표현은 분명

그런 이순신-류성룡의 만남에 착안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만,

아무튼 당시 두 인물의 만남....한마디로 오싹할 정도입니다. 

 

 

이 대목을 기술하며 저는 대학시절 읽었던, 함석헌이 쓴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는 책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순신에 관한 평전(評傳) 대목에서 함석헌은 그 이순신을

하나님이 조선을 살리기 위해 내려 보내신 메시아 예수로 보고 있습니다. 

 

 

그 이순신 아니었던들 지금의 한국은 존재할 수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많은 선교사와 순교자를 통해 이웃 일본에까지 오셨던 바로 그 예수의,

이웃 조선 사람과 조선 땅을 구해내는 “구원의 역사(役事)”가 바로

임진왜란이었던 것으로 함석헌은 본 듯싶습니다.

 

저자 송복 식(式)의 표현과 접근을 빌려 제 나름으로 말씀드리자면

임진왜란은 다른 게 아니라 예수와 조선 사이에 이뤄진 <위대한 만남...>

그 자체가 되겠습니다.

 

따라서 류성룡과 이순신 사이의 <위대한 만남>도 따지고 보면

바로 예수와 조선간의 만남이라는 그 틀에서 배태됐고 아니, 그 보다 훨씬

현란하고 상위(上位)의 만남이 바로 이 예수와 조선의 <위대한 만남>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저자 송복의 책 가운데 또 하나 눈을 찌르는 대목은

우리가 지금도 역사교과서에 곧잘 인용하는, 소위 ‘대첩(大捷)’이라는 단어가 지닌

허구성에 관한 진단입니다. 한마디로 대첩은 이순신이 일본을 상대로 치른

연전연승의 수전을 빼면 무슨 얼어 죽을 대첩이었느냐는 반문입니다.

 

교과서마다 ‘행주 대첩’이다 ‘진주성 대첩’이다 하고 자못 기를 살려주려는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만, 송복의 눈에 비친 위 두 차례의 육전(陸戰)은 엄밀히 말해

왜군의 공격을 깨부순 것이 아니라 왜군의 진공을 잠시 저지했거나

더 정확히는 속도를 늦추는 역할에 그쳤을 뿐이지, 말 그대로 “크게 이겼다”는 의미의

 대첩(大捷)이 결코 아니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입니다. 

 

 

우리가 맞았던 임란시절의 왜군은 저자의 표현을 빌면,

당시 유럽 어느 나라의 군대와도 비교할 수 없는 세계 최강의 군대였습니다.

임란 당시 조선 땅에 발을 들인 최정예 왜군의 수효는 15만.

그리고 당시 왜라는 나라의 총 인구수는 3천2백만이었다고

저자는 기술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당시 조선의 인구는?

 

미치고 환장할 일은 당시의 조선왕조가 그 통계마저 갖고 있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페어뱅크나 라이샤워 같은 미국 학자들에 의해 그 당시 조선인구가

약 5백만 정도는 되지 않았겠느냐 하는 분석이 나온 것도

임진왜란이 있고나서 근 4백년 지나서의 일이고,

뒤 늦게 (창피를 느낀 듯) 우리 사학자들이 서둘러 치른 조사에는

당시 조선 인구가 2백 30만 명 수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임란 발생 10년 전 이율곡이 제안한 걸로 우리가 흔히 잘못 알고 있는

소위 ‘10만 양병설’의 허구가 여실히 드러나게 됩니다.

당시 조선 인구 2백 30만 가운데 반은 여자일 테니 남자인구는 1백 15만이 되고,

이 가운데 징집 가능한 16~60세 남자를 추려 40~50만이 된다 칠 경우,

10만 양병이라면 국민 4~5사람당 한 사람을 군인으로 뽑아야 한다는

얘기가 되는데... 이런 나라가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습니까?

 

가족을 4~5명으로 칠 경우(그것도 온 가족이 남자만으로 이뤄졌다

가상해서입니다) 온 집안 식구 모두가 군인이 돼야 10만 양병이 가능하게 됩니다.

따라서 이율곡의 10만 양병은 어느 문헌에도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

후세 이율곡의 제자의 제자가 조부격 스승 이율곡을 기리기 위해 남긴

요상스런 문헌에 그 10만 양병설 이야기가 나와 있던 것이

과대 포장된 것이었다고 송복의 책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 10만 양병설의 허구를 들추는 더 기막힌 사실은

당시 조선군대한테는 다른 나라 군대와 다른 점이 두 가지 있었다는 점입니다.

 

첫째 장군이고 쫄병이고 월급이 없었다는 점입니다. 

쫄병은 군역(軍役)을 몸으로 때우러 온 농부들이었고

장군 역시 월급이 없어 밑의 쫄병이 챙겨 주거나 군복무 면탈희망자들이 바치는

베로 충당됐다는 점입니다.

 

다른 또 한 가지는 조선 군사한테 지급된 무기가 거의 없었고

있어봤댔자 낫이나 곡괭이, 쇠 시랑... 그것도 잘 갈지 않아 아무짝에도 쓸 데 없는

병장기였다는 점, 따라서 조선병사의 주 무기라고는 활 하나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병사 한 사람에 활 하나씩은 어림없었고,

막말로 1개 분대에 활 하나씩의 지급 정도에 그쳤다는 점입니다.

 

이런 판국에 10만 양병이라고요? 

이 대목과 관련, 제가 이 글의 서두에 저자 송복을 독종(!)학자로 표기한 데 대해

설명이 좀 필요할 듯싶습니다. 저자한테는 한마디로 그런 독종 기질이

알게 모르게 그의 DNA속에 들어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어 그런 표현을

쓴 것입니다만... 이 책의 앞부분에 등장하는 다음 대목을 읽어보시지요. 

 

 

저자 송욱이 문리대 정치학과 3학년이던 1958년

이병도 교수의 국사 강의에 이어 사회학과 이해영 교수의 인구학을 수강하며

다음과 같은 질문을 교수에게 던집니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 인구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10만 양병이라면

엄청난 대군을 기르는 것인데... 

“세종 때 호구조사가 있었지만 임진왜란 때 얼마가 되는 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럼 당시 일본 인구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1차 침입에 수군까지 합쳐

15만 명이상의 군대를 끌고 올 수 있었다면

우리 인구와의 차이가 상당히 크지 않았겠습니까? 

"그것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렇다면)그 당시 우리나라 세수(稅收)는 얼마나 되었습니까? 

10만 명, 그것도 정규군 10만 명을 양성하려면 엄청난 양의 군량미가

요구될 텐데요. 

“그것도 알 수 없다”

 

-율곡이 이조판서도 하고 병조판서도 했으니

최소한 그 계산은 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일 선생님 말씀대로

율곡이 위대한 천재라면... 

"..... "

 

 

저자 송복은 이 대목과 관련해서

책 속에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었다.

당시 역사 강의는, 특히 국사 강의는 정치사만 있고

사회경제사가 없었다. 있어도 없는 것이나 다름없이 아주 미미했다.

역사는 으레 정치사라고만 했다...(중략)...이유는 간단했다.

사회경제사의 부재 때문이었다.

 

사회경제사가 없는 나라는 없다. 가장 핵심적이며 가장 기본적인 것임에도

그것을 연구하지 않으니 역사에서 사회경제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것이 1960년대 이전, 내가 대학 다닐 때의 역사연구였고,

그런 역사연구에서 율곡의 ‘10만 양병론’이란 허구가 만들어지고 믿어진 것이다” 

 

 

이야기가 류성룡에서 조금 곁가지로 나갑니다만 임진왜란과

이순신을 거론함에 있어 제가 늘 관심을 갖는 인물이 두 사람 있습니다.

 

저에게는 4백 년 전의 임진왜란을 가장 잘 상징하고 여실하게 재연한 인물로

여겨지는데, 이 글방에서 얼마 전 임철순 주필이 잠깐 언급한

그의 한국일보 입사동기로, 지금은 기자를 버리고 작가로 변신해 있는 김훈이

바로 그 첫 번째 인물입니다. 

 

 

이순신의 충렬은 김훈에게 동인(東仁)문학상을 안겨준 `칼의 노래`로 불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상/하 두 권으로 된 이 책을 통해 (여기에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이 책을 읽고 남긴 독후감과 또 이를 `불멸의 이 순신`으로 영상화한

한 방송사의 노력에 힘입어)

지난 몇 년 동안 서울 시민들 거개가 이순신으로 바뀌게 됩니다. 

 

 

저 역시 한국일보 옛 친구 김훈의 책에 흠뻑 빠졌습니다. 

이순신의 영혼 속에 뛰어들어 장군의 핏방울을 잉크 삼아 

한자 두자 쥐어 짜낸 김훈의 글은 이 시대 어느 문객도 엄두 못 낼 

쾌거였음이 분명했습니다.

 

두 번째 인물은 임진왜란의 사실상 주인공임에도 

(우리나라의 경우 으레) 이순신한테 가려 라이트가 비쳐지지 않는 

도요도미 히데요시입니다. 

 

 

“적은 혼노지(本能寺)에 있다” 일본의 속담입니다. 

일본 전국시대를 주름잡던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강적 모리(毛利)를

토벌하기 위해 교토의 절 혼노지에 숙박했다가

자신이 아끼던 부장 아케치 미츠히데(明知光秀)에게 피살된 사건으로,

진짜 적은 엉뚱한 데 있음을 뜻하는 일본의 속담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동양사학자 민두기 교수가 쓴 “일본의 연구”에 소개된 대목인데,

불의의 타격을 입었을 때 일본인들이 지금도 자주 쓰는 말입니다. 

 

 

이 혼노지의 변(變)이 바로 임진왜란의 단초가 된 것입니다. 

이 사건으로 노부나가가 죽지 않았던들(다시 한 번 What if...? 얘기가 되겠습니다만)

임진왜란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으로 저는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이렇게 믿는 데는 나름의 근거가 있습니다.

 

혼노지의 변이 터질 당시

노부나가의 또 다른 부하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 역시 모리와 대치 중이었습니다.

하시바 히데요시는 주군 노부나가가 살해됐다는 소식을 듣자

적장 모리와 전격 화의를 맺고 회군해 버립니다.

이어 노부나가의 빈자리를 차지하고 후사 결정에서부터 장례식까지를

자신의 주도하에 치르게 되는데 이 하시바가 바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입니다.

도요토미라는 성은 그가 전국시대를 수습하고 나서

그가 천황에게 하사 받은 후 붙인 성입니다. 

 

 

도요토미는 그러나 영주격인 다이묘(大名)출신이 아닌 자수성가의 인물로,

강력하고도 믿을 만한 직할군이 없었기에 조선침략을 자신의 직할군 편성의

기회로 여기게 됩니다.

이 모든 과정 절차가 알고 보면 모두 '혼노지의 변' 초래한 업입니다. 

 

 

여기서 제가 새삼 강조하고 싶은 것은 도요토미가 당시 바깥세상을 내다보던

안목의 수준입니다. 그중에도 그 안목이 지니고 있던 국제성입니다.

그는 뛰어난 국제정치 전략가였다는 말씀입니다.

조선침공 한해 전 그는 포르투갈 영토인 인도 고어 총독에게 조공을 바칠 것을

요구했고 임란이 한창 진행 중인 1593년에도 필리핀의 루손 도(島)와

타이완에 같은 조공을 요구,

불응할 경우 군사적으로 정복하겠다고 협박할 정도로 탁월했습니다. 

 

 

또 한 가지, 도요도미를 거론함에 있어 우리가 빠트려서는 안될 항목이

모든 왜군에게 기본화기로 지급된 조총의 위력입니다.

이 위력이 사실보다 늘 과소 평가돼 저는 불만입니다.

 

임란이 발생하기 50년 전 포르투갈로부터 왜에 전해진 이 조총은

그 후 개발에 개발을 거듭돼 오다 일본의 전국시대를 마감시키는

결정적 무기가 됩니다. 

 

 

특히 나가시노 싸움(1575년)과 세키하라(關原) 싸움(1600)은

조총을 가진 보병부대가 활과 칼, 창 등을 지닌 기존의 사무라이 기병대를 깨부순

역사적인 전쟁으로, 임진·정유 양란은 그런 의미에서 왜 측에게도

그 조총의 위력을 재확인시켜 준 전쟁이었습니다.

 

그리고 앞서 송복 교수의 책 소개를 통해 잠깐 언급 했습니다만

당시 진주성이나 행주대첩 등 지엽적인 승리만을 들어 임란 중간 중간에

우리에게 유리했던 전황이 있었던 것으로 호도함은 올바른 역사교육이 못됩니다. 

 

 

진 싸움은 진 것으로, 그 대신 싸움에 진 이유를 정확히 알려줌이 옳습니다.

이순신의 활약 또한 바로 이 대목에서부터 재조명 받아야 정석이다. 

그의 등장으로 왜군의 해상활동이 완전 봉쇄됐고

도요토미가 직접 조선에 발을 들여놓으려 했던 계획도 취소됐습니다.

왜군들은 또 전라도 땅에 한 발도 들여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순신의 전과를 지금처럼 해상에서 거둔 몇 차례의 대첩으로 국한하는 것도

옳은 평가가 아닙니다. 당시의 국제상황을 내다보고 운신한 도요토미를

고대 바빌론 제국의 절대 왕 느븟가넷살에 비유한다면

조선이라는 작은 나라의 이순신은 하늘이 조선을 구하기 위해 내려 보낸

성령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그의 죽음에서 그런 성령을 거듭 느낍니다.

그가 만약 왜놈의 유탄에 희생되지 않고 살아남았던들

당시 당파 싸움만 존재하던 이씨조선이라는 나라의 추세나 속성에 비추어

이순신은 십중팔구 유배되거나 사약을 마시고 생을 마감했을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인물을 내고 거둬드리는 것 모두가 하늘의 뜻이기 때문이지요.

 

송복 교수님의 지혜와 담력에 거듭 경의를 표하며

길고 지루한 글 여기서 마칩니다.

감사합니다.             -2008년 6월 15일자 글방에서 전재/방장

  <김승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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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총장 | 작성시간 10.09.05 구구절절이 곧고 바른 글입니다. 조선 선비의 맑고 타협치않는 기개가 넘치는 글. 청량한 가을 아침에 감사히 읽었습니다
  • 작성자스테파노 | 작성시간 10.09.05 좋은 글을 잘 읽었습니다
  • 작성자끼호테 | 작성시간 10.09.05 동웅선배님은 나랑은 뭔가 달라 ! 이렇게 멋진 친구도 있고...아이리얼리엔비유!
  • 답댓글 작성자동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9.06 감사합니다. 저도 끼호테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지요. 문제점을 가지고 진지하게 사물에 접근하는 태도 하나로도 우리는 가능성을 가졌다고 하겠지요. 다만, 별다른 기회가 닥아와 성질(properties)이 다르게 훈련되어질 수도 있지요. 저도 54년 고 1 때는 영화광?이 었지요. ㅎㅎㅎ 무려 일 년에 54개의 외화를 그것도 학교 알게 몰르게 보았으니...ㅎㅎㅎ
  • 답댓글 작성자동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0.09.06 제일 무서운 훈육주임 서생님의 교외 사찰에 걸려 거수까지 부치고 왔지만 저를 믿어주던 선생님의 못본 것으로 해 주셨던지 ㅎㅎ 무사히 넘기기도. 토성동 명성극장의 "안나 카레니나"였읍니다. 그 땐 기억도 좋아 스토리며, 스탶, 캐스트도 잘 기억했고...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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