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꽃들의 축제 /이해인
누워서도 하늘과 숲을 바라볼 수 있는
나의 작은 수방修房을 사랑한다
새들의 노랫소리와 나무들의 기침소리가
거침 없이 들어와 나를 흔들어 깨우는 새벽
나의 가슴엔 풀물이 든다
송진 내음 가득한 솔숲으로
뻗어가는 나의 일상 너무 고요하고 평화스러워
늘상 송구한 마음으로 시작되는 나의 첫 기도
사방엔 온통 봄꽃들의 축제인데
내 마음엔 왜 이리 봄이 더딘가
마음의 메마름은 슬픔이다.
작은 일에 기뻐하고 감동할 수 없는
무딤과 무관심은 수도생활에도 지장을 준다
비온 뒤의 정원은 더욱 아름답다
수선화, 모란, 자목련, 은방울 꽃 조팝나무꽃
영산홍, 산딸나무꽃, 사과꽃들이
향기를 토해 내는 안 정원에
오랜만에 가보았다
단조로운 일상에서 다양한 모습의 꽃들을
볼 수 있음은 얼마나 큰 즐거움인가
한바탕 꽃을 피우고 나서
조용히 떠나가는 그 모습 또한
얼마나 의연한가
'수녀원에 생각보다 꽃이 많네요!'
하도 반가워서 가슴이 뛰었다
오늘 아침 성당에서 만난
부활초 옆의 패랭이꽃이
하도 반가워서 가슴이 뛰었다.
내가 열다섯 살의 생일을 맞던 6월에
나의 우상이었던 여고생 세레나 언니가
가파른 언덕길 위의
우리집까지 찾아와
한다발 안겨 주던 추억의 패랭이 꽃
이제는 패랭이꽃처럼 어여쁜
그 언니의 막내딸 아린이가
먼 나라에서 내게 편지를 보내 오고 있으니
나도 그애에게 톱니 모양의 앙증스런
꽃잎을 닮은 고운 추억을 심어 주어야겠다.
바깥에 머물던 세월보다 수도원 안에 머문
세월이 더 많아서일까 잠시 수도원을 떠나 있어도
내 귀엔 문득 귀에 익은 종소리가 들리고
수녀들이 함께 외우는기도소리가 들리고
풀 밭에서 함께 웃는 웃음소리가 들린다
어디엘 가나 계속되는이 환청幻聽을
나는 아름다운 것으로 받아들인다
서원반지를 20년이나 끼고 있던
손가락이 어느 날부터 조금씩 부풀더니
매우 아프기 시작했다
반지를 빼고 나서도
오래 아프고 말을 안듣는다.
늘 끼고 있으면서도 잊고 살았던
내 동그란 반지처럼 너무 가깝기에
잊고 산듯한 나의 하느님
약속의 하느님을 오늘은
죄송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그리워했다
나는 그분 앞에 늘 염치없는 사람이다
섣부른 충고, 경솔한 판단,
자기 사랑 가벼운 지껄임
하루의 모든 말들이 내가 주워 온
침묵의 돌들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며칠 전 안동에 갔다가 700년 되었다는 용계
은행나무 아래서 기념으로 몇 개 주워 온 침묵의 돌들이
밤마다 깊고 고요한 눈길로 나를 길들인다
침묵으로 노래하라 침묵으로 기도하라
침묵으로 사랑하라고
단순히 재미로 숨은 그림을 찾는 데도
노력이 필요하듯 삶에 숨겨진 의미를 찾는데는
더욱 꾸준한 인내와 노력이 필요하다.
겨울에 숨어 있는 봄 여름에 숨어 있는 가을
슬픔 속에 숨어 있는 기쁨 농담 속에 숨어 있는 진담.
그리고 또.........숨은 것을 볼 줄 알면
삶이 지루하지 않다 사랑하는 이가 내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서운하게 할 때는
말을 접어 두고 하늘의 별을 보라 별들도
가끔은 서로 어긋나겠지 서운하다고 즉시
화를 내는 것은 어리석은 일임을 별들도 안다.
배추잎 속에 숨은 배추벌레처럼
우린 저마다 보호색을 만들기에 능한지도 몰라
이웃을 위해 만들어 가는 사랑의 보호색은
아름답고 따뜻해 보이지만 자신의 유익만을 위한
이기적인 보호색은 차디차고 섬칫하다.
가끔 그럴듯한 모습으로
교묘하게 보호색을 만들어가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나는 내가 보기 싫고
흉해서 얼굴을 돌린다
이른 아침에 몹시 힘이 들고 몸이
무거울 때마다 창밖에서 나를 깨우는
새들의 가벼움이 부럽다
우리가 다른 이의 무게를 덜어주기엔
서로 너무 바쁘고 피곤해서 힘이 없는 것 같다
우선은 자기가 밝고 건강해야
남에게도 기쁨과 위로를
줄 수 있는게 아닐까?
<이 해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