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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위에서/엄상익변호사

작성자grace|작성시간26.06.10|조회수22 목록 댓글 0

바닥 위에서

오랫동안 변호사를 하던 친구가 말했다.

“집에서 법에 관한 책들을 모두 없애 버렸어.”

그는 변호사 사무실 문을 닫았다.

“머릿속에 있는 법률 지식도 모두 삭제했어.”

그 말을 들으면서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가 판사를 할 때였다. 그가 수술을 한다고 해서 병문안을 갔다. 그는 피 묻은 솜뭉치를 코에 꽂고 입원실 침대 위에서 판례를 공부하고 있었다.

 

대학 이학년 때였다. 안암동에 있는 고대 도서관에서 그와 함께 공부하고 있었다. 그는 앉아서 괴로워하고 있었다.

열이 나고 진땀을 흘렸다. 감기 몸살이었다. 그가 일어나 나가더니 몇 시간 후에 돌아왔다.

“어디 갔었어?”

의아했다. 그는 책상에 붙박이 같이 붙어 있곤 했다. 독한 공부 벌레였다.

“용인 아버지 의원에 가서 링겔 맞고 왔어.”

깜짝 놀랐다. 고속버스를 타고 고향까지 갔다 온 것이다.

“그냥 쉬고 오지 그랬어?”

“아니야”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다시 법서를 들추고 도서관의 파란 형광등 불 아래서 밤늦도록 공부했다. 그는 사법고시에 일찍 붙었다.

합격한 지 얼마 후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합격자 발표장에 내 이름이 붙어 있는 걸 보고 길거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한참을 울었어.”

목숨을 걸고 얻은 변호사 자격증이었다. 그는 판사가 됐다. 변호사를 했다. 이제 그가 쓰고 있던 면류관을 모두 벗어버렸다.

 

그는 십 년 동안 오카리나와 영국 휘슬을 연습했다. 그의 강박적인 근성을 음악에 쏟아 부었다. 프로 수준에 올랐다.

그는 버스킹에 나섰다. 탑골공원 뒤쪽에 모여있는 노인들 앞에서 오카리나를 불어 주었다.

내가 동해의 실버타운에 있을 때도 와서 노인들 앞에서 연주했다.

 

나는 오년 전 동해 바닷가로 내려왔다. 변호사자격증을 장롱 속에 넣었다. 자격증은 밥을 얻기 위해서였다.

사실은 문학을 하고 싶었다. 본격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매일 원고지 열 장은 채운다는 목표를 세웠다.

지난 오 년 동안 꾸준히 실천했다. 점점 욕심이 생겼다. 요즈음은 글을 쓰고 나서 인공 지능에게 객관적이고

날카로운 비평을 부탁한다. 지적받은 부분을 고친다. 만족할 때까지 글을 끝내지 않는다. 글을 못쓰는 날은 내가 없는 날이다.

나는 평생 무언가를 해야만 살아있다고 생각했다.

 

삼십대 중반이었다. 매일 수영을 하겠다고 계획했다. 시간이 없었다. 새벽 네 시에 수영장을 갔다. 찬 물 앞에 수영복을 입고

다이빙 대 위에 나 혼자 서 있었다. 왜 그랬을까. 생활 계획표에 엑스표를 하나 치기 위해서. 매일 아침 일어나 생활영어

프로그램을 틀어놓고 따라 했다. 하루의 밀도를 높이기 위해. 그게 아이들의 원망이 됐다. 지금은 중년이 된 딸과 아들이 놀린다.

“아빠 그 때 민병철 생활영어 하지 말고 우리하고 놀아주지 그랬어.”

유학을 한 아이들은 영어에 능통하다. 아버지의 영어 실력을 보고 피식 웃는다. 아이들에게 정말 미안하다.

지금도 가슴에 걸려있다. 뭔가 해야 한다는 나의 강박증 때문이었다.

 

변호사를 그만 두겠다고 결심했다. 그런데 필요할 때 다시 써먹으려고 자격증을 보관하고 있다. 던진 척하면서 손에 쥐고 있다.

글도 그렇다. 세상의 시선이나 인정에 상관없이 내 길을 가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마음이 가짜다. 고치고 또 고치고 완벽을 추구한다.

그 글의 조회수가 신통치 않은 게 목에 가시같이 걸린다. 삼십 년 전 막 쓴 폭로성 글은 백팔십만명이 들어와 봤다.

공들인 걸 봐주지 않는다. 불만이다. 나는 아직도 세상의 시선에 잡혀있다.

 

늙은 내 앞에 흘러간 시절 저쪽의 한 소년이 보인다. 양손에 무거운 바윗돌을 들고 끙끙거리고 있다.

이마에 땀이 번질거린다. 노인이 된 내가 그 소년에게 말한다.

“내려놔. 그래도 돼.”

“안 돼, 이게 나의 정체성이야.”

“괜찮아 그냥 바닥에 놓으면 편해져.”

 

늙은 소년은 허리를 굽혀 바닥 근처까지 바위를 내렸다. 바닥 바로 위에서 바위가 떨고 있다.

 

[출처] 바닥 위에서|작성자 소소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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