歷史 Essay 1125 ☞ 신촌의 봉원사(奉元寺)
갑오개혁(甲午改革) 후 대원군(大院君)의 문인들은
친일 개화내각(開化內閣)을 타도할 음모를 꾸몄는데
궁중을 습격해 왕과 왕비를 살해하고 손자 이준용(李埈鎔)을 임금으로 세우는 각본을 세운다.
민비파(閔妃派)에서 미리 탐지하여 이준용은 의금부(義禁府)에 갖혔다가
강화 교동도(喬桐島)로 종신유배형을 받았다.
이에 낙심한 대원군은 별장인 아소정(我笑亭)에 칩거해 무언의 항의를 한다.
1895년 민비 살해의 앞잡이로 이용하기 위해 들이닥친 일본 낭인들에 의해
대원군은 경복궁으로 납치된다.
그 후 대원군이 죽고 지금 동도중학교(東都中學校) 교정에 있던 아소정은 자취도 없어졌지만
그 건물 본채는 다행히도 고스란히 옮겨져 신촌 봉원사(奉元寺)의 큰방으로 지어졌다.
서대문) 봉원사
봉원사(奉元寺)는 한국불교태고종의 총본산 사찰이다. 서울 서대문구 봉원동 산1번지의 안산 자락에 있다.
사찰 역사
신라 말기 진성여왕 3년인 889년에 도선이 처음 지은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의 이름은 반야사(般若寺)였다. 이후 고려 공민왕 때 보우(普愚)가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가 불교에 심취했을 때 삼존불을 조성해 봉원사에 봉안하였고, 사후에는 태조의 초상이 봉안되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다시 짓는 등 조선 영조 때까지 지금의 연세대학교 자리인 연희궁 터에 있었다. 영조 24년인 1748년에 지금의 터로 이전하였고, 영조는 친필로 봉원사라는 글씨를 쓴 현판을 내렸다. 영조의 친필 현판은 한국 전쟁 때 소실되었다. 이때부터 새로 지은 절이라 하여 신도들 사이에서는 '새절'이라 불렀다. 정조 때 전국 승려의 풍기를 바로잡기 위한 8도승풍규정소(八道僧風糾正所)가 세워질 정도로 사세가 컸다.
조선 말기에는 승려 이동인이 머물러 갑신정변의 요람이 되었다. 이동인은 이 곳에서 박영효, 김옥균, 서광범 등 개화파 청년들과 교류하였고, 일본을 내왕하면서 이들에게 개화 문물을 전해주었다.
1954년부터 시작된 오랜 불교계 분규 과정에서 사찰 운영은 태고종이, 토지 소유권은 대한불교조계종이 갖게 되어 순천 선암사와 함께 대표적인 분규 사찰로 꼽힌다.
<위키백과>
봉원사는 신라 말~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봉원사는 독립문 근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절집탐방·10) 봉원사
봉원사는 신라 말~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봉원사는 독립문 근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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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신촌 봉원사
봉원사는 신라 말~고려 초에 창건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존 봉원사는 독립문 근처에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때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현대에 조계종 사찰로 정비됐고, 전통 불교 의례 중심 도량으로 자리잡았다.
봉원사는 한국 불교 의례 중 가장 중요한 의식인 영산재(靈山齋)의 중심 도량이다. 영산재는 부처님의 설법 장면을 재현한 의식으로 음악, 춤, 의식이 결합된 종합 예술이다.
영산재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됐다.
국가안녕의 염원이 담긴 왕실 발원 불사 봉원사 산신도(山神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