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글은 길희성 원장이 지난 9월 28일에 개최된 '서울인문포럼'에서 강연한 내용을 올린 것입니다. 심도학사 카페 회원들 가운데 관심을 가진 분들이 계실 걸 같아서 지나치게 전문적인 부분만 빼고 올립니다.
인문학과 가치중립성의 문제
1. 인문학의 위기?
소설가 박완서는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서 어떻게 그가 작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마음껏 공부해서 교수가 되고 싶었던 꿈을 6·25전쟁으로 접고 소설가가 되었지만, ‘못 가본 길’이기에 더 아름답게 여겨지는 상아탑에 대해 아직 약간의 미련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가 가지 못했던 길이 상아탑 속 인문학의 길이었다면, 내가 경험한 것은 상아탑 속 인문학 중의 인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서양철학에 대해 느꼈던 좌절감이었다. 이 좌절감은 내가 1961년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하면서부터 곧 시작되었다. 당시 내가 철학과의 문을 두드리게 된 것은 누구나 젊은 시절에 한 번쯤 심각하게 경험하게 되는 실존적 문제 때문이었다. ‘나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할까?’ ‘무엇에다 나의 삶을 바치고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이 될까?’ 하는 식의 문제였다. 그래도 박완서는 6·25전쟁이라는 처절한 삶의 경험을 통해 소설가가 되었고, 그 자신의 표현대로 “소설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성공했다. 그분은 가톨릭 신자로 알려져 있지만, 소설을 통해 받았다는 ‘구원’은 물론 좁은 의미의 종교적 구원이기보다는 의미 있는 삶, 보람 있는 삶 정도를 뜻하는 말일 것이다. 나는 당시 내가 찾던 ‘구원’에 대한 갈망이 서울대학교 철학과에서 만난 철학으로는 충족될 수 없다고 느꼈을 뿐만 아니라 배신당했다고 느낄 정도로 크게 실망했다. 지금까지도 서양철학에 대한 이러한 부정적 생각에는 큰 변화가 없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부정적 판단은 현대 인문학 일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대학에서 접한 철학이나 인문학은 구원의 문제와 별 관계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철학공부는 내가 학자로서 개념적 사고를 하고 내 생각을 다지며 글을 쓰는 일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 사실 서양철학에 대해서 이 정도의 기대는 누구나 가져도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원의 열망에 관한 한, 예나 지금이나 서양철학이나 현대 인문학만으로는 충족시키지 못한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사람은 당장 다음과 같이 반문할지도 모른다. 문학이라면 몰라도 철학에서 ‘구원’ 같은 것을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더군다나 인문학에서 무슨 ‘구원’ 같은 것을 기대하느냐고 고개를 설레설레 절지도 모르겠다. 그야말로 번지수를 잘못 찾아간 것이 아니냐고 말이다. 애당초 구원을 기대했다면 종교로 갔어야 한다고 한 마디 덧붙일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언급할 필요가 있다. 서양철학이 처음부터 구원의 문제와 무관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철학은 문자 그대로 지혜를 사랑하는 데서 출발했고, 이때 지혜란 당연히 인생의 참된 길을 아는 지혜를 포함한다. 잘 알려진 대로, 서양 근대철학은 칸트 이후로 세계에 대한 궁극적 인식을 추구하던 형이상학(metaphysics)이나 존재론을 포기하는 ‘인식론적 전회’(epistemological turn)를 겪는다. 세계와 인간에 대한 독자적 인식·지식을 포기하다시피 하고 ‘인식에 대한 인식’을 논하는 인식론에 주력하는 철학으로 변신한 것이다. 나는 오늘날 서양철학이 인간이 찾고 있는 구원의 문제와 유리되고 무력하게 된 근본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도 내가 오늘 인문학과 서양철학에 대해 이처럼 글을 쓰게 된 것이 아이러니라면 아이러니다. 나이 70이 넘도록 주로 서구에서 형성된 인문학, 종교학, 철학, 신학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해서 관심을 품고 그 주위를 맴돌고 있는 사람으로서, 현대 인문학과 철학에 대한 평소 생각을 좀 정리해서 몇 마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글 제목이 암시하고 있듯이, 결론부터 말하면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는 19세기 이후의 근대 인문학과 현재 우리나라 인문학계, 특히 젊은 세대에서 인문학의 이론적 담론을 주도하고 있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문학은 인간의 ‘구원’은커녕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만한 도덕적 힘조차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구철학과 인문학 그리고 우리나라 인문학이 ‘위기’를 극복하고 사회가 기대하는 대로 인간을 변화시킬 힘을 되찾으려면 지금까지와는 다른 길로 나아가야 한다.
나는 학창시절 화두처럼 꽂힌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을 지금까지 사상 여정의 중심적 관심사로 삼게 되었다. 이 말은 신을 믿지 않으면 우리가 선악시비를 가릴 줄 모르게 된다거나 아무렇게나 부도덕하게 살게 된다는 뜻이 아니라,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도덕이라는 것이 세계 자체에 기반을 둔 ‘객관적’ 질서가 아니라 순전히 인간의 자의적 선택의 대상이 되어버린다는 뜻이다. 정말 이렇게 된다면 인생의 근본적 문제, 즉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왜 도덕적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답하기 어려울 것이다.
내가 아는 한, 철학을 지망하는 학생 대다수는 이런저런 인생의 고민을 안고 철학과의 문을 두드린다. 그들은 대학에서 배우는 전문적인 강단철학이 무엇인지, 철학이 실제로 어떤 문제를 논하고 따지는 학문인지 알지도 못한 채 철학과에 입학한다. 하지만 철학뿐만 아니라 인문학까지도 실질적인 인생 문제에는 별 관심이 없고 고도로 이론화되고 전문화된 문제들만 놓고 따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면서 실망하고 말았다. 내가 서울대학교 철학과에 입학했을 당시에는 분석철학(analytic philosophy) 그리고 이와 밀접히 연관된 논리실증주의(logical positivism)라는 것이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유행하기 시작했다. 논리실증주의에 따르면, 형이상학의 언어는 우리의 경험에 잡히지 않는 주제들을 다루기 때문에 진위를 검증(verify)하기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그런 언어는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선악시비를 가리는 도덕적 언어도 어떤 객관적 근거를 가진 것이 아니라 순전히 개인들의 느낌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추구하며 살아야 의미 있는 삶이 될지를 다루는 학문은 서양철학보다는 동양철학이다. 서양철학의 전통에서 찾자면 고대와 중세의 형이상학 정도다. 전통적으로 ‘제일철학’이라 불리는 형이상학은 세계와 인생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는 철학이다. 하지만 그런 학문은 제대로 접해보지도 못하고 혼자서 헤매다가 대학을 졸업하게 되었으니 철학에서 ‘구원’ 같은 것을 경험하지 못한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우리나라 철학 또는 철학교육이 지닌 심각한 문제점 가운데 하나는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나 아우구스티누스-아퀴나스의 사상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니체-하이데거나 분석철학-논리실증주의 같은 것을 먼저 접하면서 서양철학사 전반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부터 배운다는 것이다. 서구의 철학 전통을 제대로 배우기도 전에 비판부터 배우니 공부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서양철학 전체를 통틀어 문제 삼는 서구철학자들의 비판이 우리나라 지식인들에게 어필하는 데는 다분히 심리적 만족감이 작용하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의 이른바 ‘후진국’ 지성인들은 대체로 서구문화와 철학에 대한 선망과 동경을 가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서구사상가들 자신이 서구문명에 가하는 비판에서 일종의 카타르시스나 대리만족 같은 것을 느낀다. 서구에 대한 열등감을 극복하는 손쉬운 길처럼 느껴지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 근대화를 제대로 달성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서구지성인들이 서구식 합리주의와 개인주의가 낳은 온갖 문제점에 가하는 비판을 듣는 것은 우리나라 지식인들을 포함한 비서구 세계의 지성인들에게 심리적 만족감을 준다. 손쉬운 서구문명 비판에 매력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나라 지식인들이 아직도 이러한 멘탈리티를 벗어났다고 할 수 없으며, 솔직히 말해서 나 자신도 이 점에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다. 돌이켜보면 내가 서양철학 전공을 포기하고 동양철학으로 눈을 돌린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인문학은 과연 대학의 꽃인가? 오늘날 우리 사회는 인문학을 둘러싸고 두 가지 상반된 현상을 노출하고 있다. 대학 안에서는 인문학의 위축된 위상을 지적하면서 인문학의 위기 또는 고사를 말하지만, 이와 대조적으로 대학 밖에서는 인문학이 전성시대를 맞았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각종 인문학 프로그램이 대중적 관심과 인기를 끌고 있다. 인문학이라는 단어가 도대체 무엇을 가리키는 말인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어떤 주제든 ‘인문학’이라는 말을 갖다 붙인다. 무슨 복잡하고 전문적인 학술이론을 좀 쉽고 피부에 와 닿게 설명하거나 재미있게 강의하면 다 ‘인문학’ 강좌로 통하는 것 같다. 백화점 인문학, 텔레비전 인문학, 교양 인문학, 수필 인문학, 저명인사의 인생론 인문학, 기업체 초청 인문학이 유행하고 있으며 심지어 요점정리식 학원 인문학도 있다고 한다. 가히 인문학 열풍이라 해도 될 정도다.
이런 현상을 부정적으로만 볼 필요는 없다. 오히려 장려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제 우리나라도 절대가난에서 벗어나서 먹고 살 만해졌다. 그러면서도 경제는 고도성장을 멈추고 세계는 너무나 급속히 변하며 경쟁은 더 치열해져 모두가 불안해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앞만 보고 달려왔던 삶을 되돌아보면서 삶의 의미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려는 마음을 품고, 당장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인간다운 삶을 찾아보고자 인문학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닌지 긍정적으로 생각해본다.
하지만 내가 이 글에서 논하고자 하는 것은 ‘위기’에 처해 있는 대학 인문학, 강단 인문학 또는 대학 안과 밖에서 다양한 형태로 연구되고 있는 전문화된 이론적 인문학이다. 이른바 ‘문사철’이라고 불리는 학과들에서 교수와 대학원 학생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는’(research) 인문학 말이다. 문학(국문, 불문, 독문, 중문 등)은 단순히 작품을 읽고 감상하고 토론하는 정도가 아니라 각종 문학이론을 동원해서 작품을 분석하는 학문이며, 철학은 상당한 교육을 받은 사람조차 이해하기 어려운 전문화된 주제를 다루는 난해한 학문이다. 역사를 연구하는 역사학, 종교를 대상으로 삼는 종교학, 예술을 논하는 미학도 전문화된 연구 중심의 학문이기는 매한가지다. 인문학의 위기는 바로 이처럼 일반 대중과 점점 더 유리되어가는 이론화된 인문학에서 비롯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문학, 역사, 철학, 종교, 예술 등은 인간이면 누구나 관심을 둘 만한 주제를 다루는 학문이다. 하지만 마치 골치 아픈 수학문제나 과학이론처럼 소수의 전문가 집단만 이해할 수 있는─아니 때로는 그들 자신도 정말 이해하고 있는지 의심이 들 정도로─난해한 언어로 연구되는 학문이 됨에 따라 인문학과 일반 대중과의 거리가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다. 나는 이런 현대 인문학의 변화를 인문학의 ‘자기소외’라고 부르고 싶다. 대학 인문학의 위기는 일차적으로 이런 전문화되어 가는 인문학, 난해한 이론적 담론이 마구 유행하고 있는 우리나라 인문학계의 특이한 현실에서 비롯된다고 나는 본다.
나는 현대 인문학이 자초한 소외를 주로 두 가지 측면에서 고찰해보고자 한다. 하나는 연구자와 연구대상 사이의 역사적·시대적 거리를 확실하게 의식하고 그것을 전제로 삼는 ‘거리두기 식 인문학’을 둘러싼 문제다. 이는 연구의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면서 주제에 대한 객관적 지식을 추구하는 현대 인문학 일반이 지닌 문제점이다. 다른 하나는 마땅한 이름이 없어 일단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문학’이라고 부르지만, 인문학을 주로 담론분석, 즉 담론들에 대한 담론으로 변질시키고 있는 ‘담론 인문학’이다. 이는 다른 한편으로는 진리 상대주의, 도덕 상대주의 그리고 권력과 성 등 인간의 동물적 욕망을 부추기는 ‘욕망의 인문학’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주체의 실종’ ‘인간의 죽음’을 선언하는 ‘반 휴머니즘적 인문학’ 등도 그런 포스트모더니즘적인 인문학에 포함된다. 그리고 이와 무관하지 않게, 우리 인문학계의 또 하나의 두드러진 현상이 있는데, 내용에 상관없이 마구 글을 써대는 대중적 ‘글쓰기 인문학’의 유행이다. 물론 이런 현상에는 오늘날 인터넷 글쓰기 문화의 영향도 클 것이다.
여하튼 위에 언급한 두 가지 현대 인문학의 성격을 본격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생각해볼 것이 있다. 내가 ‘자연스러운 인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으로서, 인간의 문제를 다루기에 누구에게나 친숙할 수밖에 없는 인문학, 따라서 굳이 ‘인문학’이라고 이름조차 붙일 필요가 없을지도 모를 상식적인 인문학이다. 먼저 이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인문학을 먼저 논한 다음, 이러한 인문학이 어떻게 고도로 추상적이고 전문화된 인문학으로 변질되어서 인문학의 자기소외가 일어나게 되었는지를 고찰해보고자 한다.
2. 텍스트를 다루는 학문
인문학은 예나 지금이나 ‘텍스트’(text)를 다루는 학문이다. 주로 글로 된 책이나 문서, 문헌이나 작품, 경전과 고전 그리고 인류 문화에 대한 역사적 연구자료인 사서나 금석문 등을 다룬다. 좀더 넓게는 건축, 조각, 음악, 미술, 연극, 영화 등 예술적 창작물에 대한 평론이나 이론 그리고 역사적 연구도 인문학이 다루는 텍스트 개념에 포함된다. 아무튼 인문학은 일차적으로 언어로 된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하는 작업이다. 문제는 우리가 주어진 텍스트를 어떻게 읽고 이해할 것인지, 무슨 목적으로 그리고 어떤 방법으로 연구할 것인지다. 이에 따라 인문학의 성격이 크게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먼저 사람들이 소설 같은 문학작품을 읽을 때 어떤 자세로 임하는지 생각해보자. 사람들은 우선 상식적인 텍스트 이해를 바탕으로 작품을 대한다. ‘상식적’이라 함은 일반적인 언어 이해에 기초해 텍스트를 읽는다는 말이다. 사람들은 텍스트가 아무리 낯선 말로 씌어 있다 해도, 언어의 기능은 일차적으로 소통에 있다고 생각하며, 소통은 언어가 대상(object)세계를 지시하기(refer)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언어의 의미는 지시하는 대상에 있다는 것이 상식적인 언어 이해다.
이때 대상은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텍스트의 저자나 등장인물들 외부에 존재하는 사물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이들의 내면세계, 즉 의식이나 심정 같은 것이다. 언어가 가리키는 대상은 이 두 범주를 벗어나지 않는다. 소설의 경우, 전자는 소설가가 직접 묘사하고 있는 외부세계 또는 등장인물이 주고받는 대화 속에 등장하는 외부세계이고, 후자는 소설가가 묘사하고 있는 주인공이나 여타 등장인물의 내면세계다. 작가에게는 두말할 필요 없이 우선 이 두 세계를 탁월하게 묘사하는 언어구사 능력이 있어야 하지만, 더욱 중요한 점은 이러한 능력이 이 두 세계를 민감하게 관찰하고 의식하며 경험하는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온다는 사실이다. 외부세계든 인간 내면의 세계든 결국은 모든 것이 작가 자신의 경험에서 온다. 이 경험은 작가 자신의 것일 수도 있고 타인의 글을 통해 얻은 간접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작가의 풍부한 상상력이 만들어낸 것일 수도 있다.
물론 작가의 언어구사 능력과 경험세계는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사실 이것은 작가의 경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도 해당된다. 그만큼 인간의 경험과 언어는 떼려야 뗄 수 없을 정도로 밀접한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여하튼 소설의 언어는 결국 작가 자신이 경험한(experience) 것, 적어도 그의 의식을 통과한 것을 훌륭하게 언어로 표현한(express) 것이라고 보는 것이 문학작품을 대하는 일반인의 상식이다. 물론 한 작가의 능력은 그의 글이 얼마나 독자들의 심금을 울리고 공감을 자아내는지에 달려 있다. 이 공감을 ‘추체험’(Nacherlebnis)이라고도 부르는데, 독자들이 글을 읽으면서 작가가 경험한 것을 따라 경험한다는 뜻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는 자연스럽게 소설의 주인공이나 등장인물 가운데 한 사람과 자신을 동일시하기 마련이다. 등장인물의 이야기가 지닌 그럴듯한, 즉 있을 법한 개연성(plausibility)은 독자들이 공감할 만한 설득력을 지닌다. 독자들이 처한 삶의 환경과 사회문화적 배경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고 삶의 경험이나 태도도 천차만별이지만, 그럼에도 독자들은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이야기에 공감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그 소설을 읽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이야기가 지닌 힘이다. 이야기는 성격상 어느 특정 인물들─실존했던 사람이든 소설가가 지어낸 가공의 인물이든─에 관한 것이지만 동시에 보편성을 지닌다. 이러한 ‘특수보편성’이야말로 이야기의 매력이며, 소설이 보편적 진리, 개념적 진리를 추구하는 철학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 가운데 하나다.
독자들은 문학작품뿐만 아니라 오래된 종교 경전이나 철학 고전을 대할 때도 거기에 나오는 말을 자기 자신을 향한 말로 받아들이면서 읽는다. 물론 이때는 통상적으로 텍스트의 권위가 전제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을 돌아보기도 한다. 이런 통상적이고 자연스러운 텍스트 읽기를 나는 ‘자연스러운 인문학’이라 부른다. ‘인문학’ 아닌 인문학이며 그냥 ‘인문적’이라 해도 좋다. 불행하게도 오늘날의 이론 중심적 인문학은 바로 이러한 자연스러운 인문학이 지닌 힘을 점차 약화시키는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으며, 그 결과 인문학의 자기소외가 일어나고 있다.
소설이나 고전의 힘은 바로 독자들의 공감을 자아내는 능력에 있는데, 이 공감은 독자들이 텍스트를 둘러싼 역사적 배경─저자나 시대적 배경 등─에 대해 별다른 사전지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무슨 특별한 전문지식이나 복잡한 문학이론 같은 것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전문가나 문학평론가들의 해설 같은 것도 필요 없을 지 모른다. 그냥 읽어도 재미있고 진한 감동과 오랜 여운을 느낄 수 있다. 때로는 책 한 권이 독자의 자기이해와 삶을 완전히 바꾸는 엄청난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읽기를 통해서 독자들은 자신의 삶과 가치관을 돌아보게 되고,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 그리고 “우리가 사는 사회는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으며 어떻게 변해야만 할까?” 등의 진지한 물음도 제기하게 된다. 이런 ‘자연스러운 인문학’은 글을 읽고 이해할 만한 능력, 즉 나이에 알맞은 인생경험과 공감능력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모두 중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성장하지 않았는가? 요즘 학생들은 불행하게도 입시경쟁에 치어 이렇게 책을 읽을 만한 여유가 없다고 한다.
나는 인문학의 힘은 근본적으로 텍스트에 대한 이러한 자연적 읽기에서 온다고 생각한다. 이런 자연적 읽기의 힘을 키우기 위해서는 독후감 같은 것을 쓰는 것이 큰 도움이 될 것이며, 학생들끼리 자유롭게 토론하도록 내버려 두는 것도 좋을 것이다. 인문학은 전문화된 이론적 학문이기에 앞서 우선 좋은 책 읽기다. 좋은 책과의 만남을 통해 독자와 텍스트의 대화가 이루어지면 독자들의 의식과 삶은 자연스럽게 변한다. 유감스럽게도 현대 아카데믹 인문학은 이론의 과잉, 때로는 상식을 외면한 이론의 범람 때문에 자연스러운 읽기의 힘을 점점 더 상실해가고 있다. 인문학은 이론화되면 될수록 자연스러운 읽기에서 오는 힘이 약화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다면 이제 대학 인문학이 어떻게 해서 그렇게 되었는지, 이론적 인문학이 지닌 근본성격과 문제점이 무엇인지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볼 차례다.
3. 거리두기의 인문학과 가치중립성의 인문학
먼저 현대의 학문적 인문학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에 존재하는 시대적·역사적 거리를 전제하고 확실히 의식하는 ‘거리두기의 인문학’이다.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는 독자가 처한 특수한 환경─사회, 문화, 언어, 사고방식 등─과 상황에서 올 수 있는 가치판단이나 ‘편견’을 가능한 한 배제하고 텍스트 자체가 가지고 있다고 상정되는 ‘객관적 의미’를 인식하려고 노력한다. 아카데미 인문학에서는 텍스트에 대한 역사적 접근이 우선이다. 어떤 텍스트이든 특정한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라는 가정 아래 그것이 만들어진 시대와 사회상을 알아보려고 한다. 텍스트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언어는 물론이고 그것이 만들어진 특정한 시대의 역사적 상황과 사회문화 그리고 저자가 어떤 삶을 살았는지에 대한 지식과 이해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역사적 거리두기의 인문학은 출발점에서부터 이미 텍스트가 독자의 삶에 미칠 수 있는 힘을 차단해버린다. 텍스트를 ‘과거’ 어느 특정 시대의 산물로 치부해버림으로써 현재를 사는 나의 삶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인식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텍스트의 보편성보다는 역사적 특수성을 강조함으로써 다른 시대, 다른 사회 속에 살고 있는 내 삶에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을 처음부터 차단하거나 약화시키는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다. 연구자는 텍스트를 이해하려고 자기의 모든 개인적 가치관이나 자기가 처한 삶의 환경에서 올지도 모를 편견을 배제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텍스트 이해의 객관성이 보장되고 학계에서 학문성을 인정받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치중립성에 기반을 둔 현대학문 일반의 성격을 가장 잘 대변하고 옹호한 대표적 학자가 독일의 유명한 사회학자 베버(Max Weber)다. 그는 이미 고전이 되다시피 한 『직업으로서의 학문』이라는 글에서 자연과학은 물론이고 사회과학이나 인문학 분야까지도 학문연구와 교육에 종사하는 사람은 모두 자신의 개인적 가치관을 철저히 배제하고 엄정한 중립적 자세로 객관적인 인식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강의나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들은 객관적 사실의 진리를 추구할 뿐, 연구 활동이나 결과에 자신의 가치판단을 개입시켜서는 안 된다. 학자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객관적 진리 탐구에 있지, 자신의 종교적 신념이나 정치적 이념 또는 개인적 가치관이나 인생관을 전파하는 설교가나 이데올로그가 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사회변혁을 외치는 예언가나 혁명가 행세를 해서도 안 된다. 학자는 문자 그대로 상아탑에서 지식을 산출하는 철저한 ‘직업인’이어야 한다. 가치의 문제는 대학 강단에서 다룰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이 처한 삶의 현장에서 각자의 신념과 가치관에 따라 다뤄야 하며, 이 점에서는 학생들도 마찬가지다. 교수가 강의실에서 학생들에게 일방적으로 자신의 가치관을 전파하는 것은 절대 금물이라는 것이 베버의 견해다.
그렇다고 베버가 말하는 ‘직업’으로서의 학문을 단순히 돈벌이 수단으로서의 직업 정도로 비하하거나 오해해서는 안 된다. 베버가 말하는 직업(Beruf, vocation) 개념은 그야말로 소명(召命) 또는 천직(天職)으로서의 직업이며, 거기에는 중세적 장인 정신, 한눈 팔지 않고 오로지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하는 ‘금욕적’ 자세, 철저한 프로의식 같은 것이 담겨 있다. 사실 한눈 팔기 잘하는 학자를 쉽게 용납하고 그들이 곧잘 유명세를 타는 우리나라 학계의 풍토를 감안할 때, 이는 실로 ‘무서운’ 직업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하튼 위에서 논한 거리두기와 가치중립성의 인문학은 오늘날 누구도 외면할 수 없는 현대학문의 대세고 주류다. 그러나 자연과학이라면 몰라도, 인간 문제를 다루는 인문학의 경우 이러한 거리두기와 가치중립성은 사실 지극히 부자연스럽고 인위적인 태도임이 틀림없다. 거리두기의 인문학은 근본적으로 연구자와 연구대상 그리고 교수와 학생 사이의 거리를 전제로 하는 ‘소외의 인문학’이다. 물론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는 인문학이 가치의 문제를 소홀히 여긴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역설적이게도 강의와 연구 활동에서 철저한 가치중립성을 주장한 베버 자신은 사회학에서 가치의 중요성, 특히 사회변화에서 종교적 신념과 가치관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한 학자로 이름을 날리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인생이 다양한 가치가 충돌하는 장이라는 것, 그 자신의 표현대로 “신들이 서로 끊임없이 투쟁하는” 곳임을 강하게 의식했던 학자다. 따라서 그가 개인적으로 유난히 가치문제에 관심이 없거나 그것을 소홀히 여기기 때문에 학문의 가치중립성을 주창한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가치가 다원화된 현대사회, 지배적 종교가 사라짐에 따라 세속화되고(secularized) ‘탈주술화된’(disenchanted) 시대의 학문에서는 가치중립성이 피할 수 없는 운명과 같다고 생각했다. 베버는 대학에서는 예언가가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망각하고 지성을 왜곡하는 것보다는 지적 성실성이 더 귀한 덕목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베버가 아무런 전제 없이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순수한 학문이 가능하다고 주장한 것도 아니다. 그에 따르면, 소명으로서의 학문 자체도 학자가 선택한 하나의 ‘가치’이며, 이 가치도 다른 모든 가치와 마찬가지로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같은 논리로, 우리는 가치중립성이라는 것 자체가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또 하나의 가치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베버는 경제사가로서 학자로서의 커리어를 쌓기 시작했다. 그의 유명한 저서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은 자본주의 발생 과정에서 개신교 윤리의 역할이 결정적이었음을 실증적으로 밝히는 책으로서, 그를 세계적 사회학자로 만들었다. 그 후로도 그는 세계 종교들의 가르침, 특히 종교 간의 상이한 경제윤리가 신자들의 삶과 행위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유형별로 폭넓게 고찰함으로써 종교사회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대가가 되었다. 그의 책은 자본주의 자체에 대한 개인적인 가치판단을 삼가고 엄정하게 가치중립성을 지킨 연구서다.
학술활동에서 가치판단을 엄격히 배제해야 한다는 베버의 신념은 근대사회의 성격이나 정신적 상황과 궤를 같이한다. 서구의 근대과학이 초래한 세속화된 이성은 중세를 지배했던 목적론적(teleological) 세계관, 즉 세계가 신의 뜻에 따라 어떤 궁극적 가치를 지향하고 있다는 세계관을 붕괴시켰다. 학문의 가치중립성은 과학기술적 이성이 지배하는 탈주술화되고 탈가치화된 근대문명 자체의 성격을 반영한다. 과학적 세계관이 지배하는 현대 세계에서 ‘가치’란 더 이상 세계 자체의 근본 성격이나 자연의 질서 또는 신의 뜻을 반영한 것이 아니며, 그렇다고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것도 아니다. 현대 세계에서 가치란 단지 개인의 주관적 선택의 대상이자 실존적 결단의 문제가 되어버렸다. 이렇게 가치가 개인화되고 다원화됨에 따라 가치의 문제는 이제 개인의 선택이나 특정 집단의 사회적·문화적 관습 또는 전통으로 치부될 뿐, 더 이상 옳고 그름을 논할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가치(value)와 사실(fact)이 분리되고 가치판단과 사실판단이 엄격히 구별되면서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이 이제 사실적 진리의 인식에만 치중하게 되었고 더 이상 가치나 의미의 문제에 개입하지 않고 개입할 수도 없게 된 것이다. 가치는 객관적 사실이나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치중립성은 현대 민주사회에서 당연시되는 성숙한 윤리적 자세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가치이며 덕목이다. 역설적이게도 가치중립성은 가치가 다원화되기 시작한 근대사회에서 하나의 신성한 가치가 된 것이다.
현대 인문학도 이러한 대세를 비껴가지 못하게 되었다. 현대 인문학, 특히 연구중심의 대학 인문학이나 이론 중심의 학문적 인문학은 근본성격상 가치교육이나 인성교육과 무관하게 되었다. 그런 것을 지향하지도 않고 지향한다 해도 할 수 없게 되었으며 해서도 안 된다는 것이 가치중립성을 표방하는 현대적 학문의 대세다. 오늘날 인문학자는 모두 이러한 학문의 대원칙에 동의할 수밖에 없고, 이를 무시하고 자신의 개인적 신념이나 가치를 의도적으로 개입시킨 연구를 수행한다면 학계에서 학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해 퇴출당할 수밖에 없다. 또 대학 강단에서 자신의 인생관이나 가치관, 특히 종교적 신념 같은 것을 외치면 퇴출되어야만 한다. 우리는 조선조 유교 사회나 중세 서구의 그리스도교 사회에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종교와 가치가 다원화되어 개인의 자유로운 선택대상이 된 세속화된 사회에 살고 있다. 누구도 나에게 특정 종교나 가치관을 강요할 수 없다. 심지어 부모도 할 수 없게 되었는데, 하물며 대학교수가 이미 성인이 된 학생들에게 도덕교사 역할을 할 수 있겠는가? 교수는 강단에서 어디까지나 지식을 논하고 전수해야지 설교를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다는 것이 오늘날 대학사회의 상식이자 불문율이다.
하물며 군사부일체 같은 것을 들먹이면서 전문분야에서 갓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교수가 된 젊은 교수에게 인생의 교사나 참다운 ‘스승’이 되기를 기대하거나 인성교육이나 가치교육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초등학교나 중고등학교 교사라면 몰라도,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이다. 대다수 교수는 이 같은 사실을 의식하고 있지만, 학생들이나 학부모들은 여전히 교수들에게 전통적인 스승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 우리나라의 현실이다. 교수들을 무척 곤혹스럽게 하는 이러한 상황은 자연히 위선과 허위의식을 낳지만, 그렇다고 사회분위기상 누구 하나 그런 역할을 명시적으로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여하튼 현대의 대학 인문학이 우리 사회가 기대하는 인성교육, 가치교육, 인격함양 등의 역할에 부응하기가 어렵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더 이상 그런 것을 사회가 기대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는 것 또한 엄연한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당면한 도덕의 위기나 인성교육의 문제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해야지, 거리두기와 가치중립성을 기반으로 한 연구중심의 대학 인문학과 교수들에게는 그 해결을 기대하기 어렵게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사회는 정확하게 인식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인문학을 포함해 현대학문 일반이 지닌 가치중립성에 대해 좀더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생각할수록 더 깊은 차원의 문제가 많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첫째, 연구중심의 대학 인문학에서 실제로 가치중립성이라는 것이 지켜지고 있는지 또 지킬 수 있는지의 문제이고, 둘째, 가치중립성이라는 것 자체가 고도의 성숙한 도덕적 자세를 필요로 하는 근대사회의 가치라는 점이고, 셋째, 대학은 연구기관일 뿐 아니라 교육기관이라는 문제다. 이 세 가지 문제를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가치중립성이 현대학문의 본질적 성격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 해도, 대학이나 연구기관에 속한 학자들이 실제로 엄정한 가치중립성을 지키며 연구하고 있는지는 보장할 수 없다. 우선, 연구 자체는 중립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치더라도, 연구용역을 주고 연구비를 지원하는 단체는 어떤 특정한 목적과 가치를 위해서 설립되었기 때문에 중립성을 기대하기 어렵다. 이런 점을 감안할 때, 일체의 가치를 배제한 순수 중립적인 연구, 그야말로 오직 진리 자체만을 위해 진리를 탐구하는 연구란 현실적으로 존재하기 어렵다. 대학 운영이나 연구 활동도 현실적으로 자본의 논리를 초월하기가 지극히 어려운 것이 오늘의 현실이며, 인문학 서적도 시장의 논리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실제로 우리는 연구보고서가 종종 특정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되거나 결과를 과장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또 인문학자들도 인기를 위해서 때로는 마음에 없는 발언을 하거나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쓰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다음으로 학자들에게 요구되는 엄정한 가치중립성 자체가 고도의 도덕성을 요구한다는 역설 또한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동일한 주제를 학자 몇 명이 각각 연구한다고 하자. 학자들이 제아무리 중립성을 표방해도─학자치고 그러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실제 결과는 학자마다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학자도 기계가 아니라 인간이기 때문이며, 자기가 처한 역사적 상황이나 개인적 삶의 경험과 가치관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들은 엄정한 가치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자신을 둘러싼 환경적 요인에서 올 수 있는 오해나 편견의 가능성을 가능한 한 차단하려고 노력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상당한 정도의 자기절제와 성찰이 필요하다. 자신의 사적 욕망이나 가치 지향성을 제어할 수 있을 만한 도덕적 능력과 금욕적 자세가 요구되는 것이다. 마치 판사가 일체의 개인적 편견을 배제하고 순전히 법적 논리에 따라 공정한 판결을 내리기 위해서는 상당한 수준의 도덕적·인격적 자질이 필요한 것과 마찬가지다. 가치중립성의 이상을 지킨다는 것 자체가 상당한 도덕성을 필요로 하는 일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양심에 따라 진실을 있는 그대로 말해야 하는 것 또한 말처럼 쉽지 않을 때가 있다. 때로는 상당한 도덕적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미 지적한 바 있지만, 가치중립성 자체가 가치가 다원화된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새로운 도덕적 가치라는 역설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학문의 가치중립성에는 이보다도 더 근본적인 문제가 또 하나 있다. 도대체 왜 하고많은 연구주제 가운데서 그 주제를 선택했는지 하는 문제다. 비록 학자들이 연구 활동의 가치중립성을 지킨다 해도, 그 연구의 가치와 목적은 연구 활동 자체로 결정되지 않고 연구자 개인 또는 연구를 지원하는 단체의 가치관에 따라 결정된다는 사실이다. 연구 자체가 아무리 가치관을 배제한다 해도, 도대체 그 연구가 왜 필요한지 판단하고 선택하는 데는 특정한 가치관과 도덕성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대학도 교육기관인 이상 도덕성을 외면할 수 없기 때문에 대학의 학술활동과 가치관을 분리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다. 우선 대학들은 모두 설립목표나 철학 같은 것이 있다. 대학들이 표방하고 있는 특정한 가치는 논외로 하더라도, 교육이라는 활동 자체가 도덕적 가치의 문제에서 중립성을 지킬 수 있을지, 또 그래야만 하는지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도덕성과 교육은 떼려야 뗄 수 없다. 도덕성과 가치 지향성을 뺀 교육은 기술교육이나 지식을 사고 파는 행위는 될지언정 인간다운 인간을 기르는 교육은 될 수 없다. 대학은 연구기관이기 이전에 교육공동체다. 따라서 구성원들 사이의 인격적 신뢰와 존중, 정직과 배려 같은 인간적 자질과 덕목을 구성원 모두에게 요구한다. 무엇보다도 교수들은 성별이나 사회적 신분, 혈연이나 지연 등을 떠나 모든 학생의 인격을 존중하고 평등하며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 이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교수들에게 성숙한 인격과 도덕성을 요구하는 일이다.
자연과학이든 인문학이든 연구에 종사하는 학자들에게 요구되는 가치 중립적 자세는 근대 서구에서 출현한 특정한 인간관을 전제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유의할 필요가 있다. 어떤 일에서 엄정한 ‘중립성’을 지키는 태도는 결코 인간의 ‘자연적’ 태도가 아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특정한 사회적·역사적·언어적 환경 속에서 성장한다. 인간을 둘러싼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역사적─개인적이든 집단적이든─조건들을 인간의 본질적 정체성이 아닌 가변적이고 ‘우연적인’(contingent) 것으로 간주하는 추상적 인간관은 서구 계몽주의 시대 이후 처음 등장한다. 이처럼 고도로 추상적인 인간관이 전 세계로 전파되면서 인간의 보편적 존엄성과 인권, 자유와 평등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민주주의의 이념적 기초가 된 것이다. 보편적 인권개념의 바닥에는 인간에게서 일체의 구체적이고 우연적인 요소를 배제한 이른바 ‘보편인’(universal man), 즉 탈맥락적 자아(disengaged self) 또는 탈연고적 자아(disencumbered self) 개념이 깔려 있다.
학자들에게 요구하는 엄정한 가치중립성도 바로 이러한 추상적 인간관과 궤를 같이한다. 인식주체(subject)를 둘러싼 온갖 우연적 요소, 특히 연구자가 자신의 가치관을 배제하고 연구대상(object)을 있는 그대로 파악하려는 학문적 자세는 ‘인간은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존엄하다’라는 도덕적 자세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한다. 둘 다 동일한 인간관과 동일한 사고방식을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보편적 인권에 기초한 민주주의와 근대 학문은 이러한 추상적 인간관에 근거하고 있다. 엄정한 가치중립성을 지킨다는 것은 사람에 대해 품을 수 있는 온갖 편견을 버리고 사람을 단지 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존중하는 매우 성숙한 보편적 인권의식과 도덕성을 요구한다. 혈연, 지연, 학연 등 각종 연줄에 매여 사는 한국인들이 공적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저지르는 비리 중 많은 경우가, 개인주의 사회에서 성장한 서양인들이 저지르는 비리와 달리, 이런 연줄을 악용한 데서 비롯된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모든 현대학문의 상식적 규범으로 자리 잡은 가치중립성은 매우 미묘한 문제로서, 인문학의 소외라는 부정적인 면을 지니지만, 동시에 전통적인 학문과는 다른 차원의 새로운 가치와 자세를 요구한다.
4. 지평융합의 인문학
18세기 계몽주의 이래로 서구의 학문연구는 인식·지식의 규범으로 자리 잡게 된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의 명확한 구별과 둘 사이의 거리를 전제하게 된다. 이러한 연구가 인간 문제를 다루는 인문학 전체로 확대되자 이에 대한 반발과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19세기로 들어오면서 서구의 문학, 철학, 신학, 종교학 등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낭만주의(Romanticism) 운동, 인간 감정(feeling, Gefühl)의 독자적 인식에 대한 특권을 인정함으로써 인간 내면의 세계를 이해하려는 상상력과 공감(Einfühlung, empathy)의 인문학, 자연현상을 ‘설명’하는(explain, erklären) 자연과학과 차별화하여 텍스트와 저자의 배후에 있는 인간의 삶의 경험(experience, Erfahrung)을 이해하려는(Verstehen) 해석학적 인문학, 그리고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보다는 개인의 실존적 자기이해와 결단을 강조하는 실존주의(existentialism) 인문학 등은 모두 주객의 분리와 거리두기 식 소외의 인문학에 대한 비판에서 나온 운동들이었다.
그러나 20세기 후반에 이러한 움직임마저 과감하게 뛰어넘는 하나의 주목할 만한 변화가 인문학계에서 일어났다. 바로 하이데거의 현존재(인간 존재, Dasein) 분석의 영향 아래 출현한 가다머(Hans Gadamer)의 철학적 해석학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위에 언급한 낭만주의 인문학이나 해석학적 인문학도 여전히 연구주체와 연구대상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객관주의적 인식의 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의 철학적 해석학은 텍스트와 독자 사이의 거리와 소외를 극복하고 텍스트의 자연적 독법을 복권하는 길을 제시함으로써 현대 인문학이 나아가야 할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다. 공감이나 이해를 강조한 슐라이어마허나 딜타이식의 해석학도 텍스트의 객관적 의미가 독자와 별도로 존재한다는 잘못된 전제 아래 객관주의적 인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사회과학과 매한가지라는 것이 그의 비판이다. 가다머에 따르면, ‘이해’란 인식이나 의식(Bewusstsein)의 문제이기 이전에 인간 존재(Sein)의 문제로서, 인간의 역사적 유한성(제약성)은 현존재(Dasein,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일 뿐 아니라 오히려 모든 이해의 필수조건이 된다. 따라서 인문학에 종사하는 사람은 자신이 처한 역사적 상황은 물론이고 그의 가치관이나 ‘편견’마저도 텍스트 이해의 지평(Horizont)이기 때문에 굳이 피하려 하거나 배제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연구자와 텍스트 사이에 자연스럽게 형성되는 두 지평의 융합(Horizontverschmelzung) 속에서 텍스트를 이해하는 것이 인간으로서 극히 자연스럽고 당연한 일이라는 것이다.
지평융합 속에서 이루어지는 이해를 강조한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텍스트에 대한 ‘자연스러운’ 독법을 복권시켰다고 나는 평가한다. 거리두기와 가치중립성의 인문학 때문에 무력화되었던 텍스트가 시간과 공간의 장벽을 넘어 오늘의 독자들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을 되찾도록 새로운 인문학의 길을 열어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동서양의 고전들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지금 여기서 나에게 말을 걸도록 한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텍스트의 언어 배후에 감추어진 의미를 밝히고 폭로하는 마르크스, 니체, 프로이트 유의 이른바 ‘의심의 해석학’(hermeneutics of suspicion)과 달리 ‘신뢰의 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텍스트의 진리주장이나 가치 주장을 처음부터 나와 무관한 남의 얘기를 듣듯이 타자화하거나 의심하는 연구 태도의 한계를 과감히 돌파한다는 점에서 현대 인문학계에 새로운 길을 제시한 것이다.
그렇다고 지평융합의 인문학이 현대학계에서 상식화된 역사학적 연구나 어학적 연구 등을 무시하고 독자가 자의적으로 텍스트를 해석해도 좋다고 하는 것은 아니다. 뜻이 안 통할 때는 고어사전을 찾아보거나 텍스트의 시대적 상황을 알아보아야 한다. 하지만 때로는 텍스트에 대한 ‘오해’가 텍스트의 깊은 뜻을 더 잘 읽어내기도 하며 창조적 해석의 원천이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사상사에서 종종 목격한다. ‘격물치지’(格物致知)의 개념을 중심으로 한 주자의 『대학』 해석이 아마도 가장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가다머의 철학적 해석학은 주체와 객체, 독자의 지평과 텍스트의 지평, 전통과 현대가 대화하고 화해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다는 점에서 아직도 전통성이 강하게 남아 있는 우리나라 인문학계에 시사해주는 바가 매우 크다. 과거와 현재 사이의 거리두기를 넘어서는 가다머 식 인문학과 텍스트 읽기는 과거의 것을 현재와 무관한 것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오늘의 삶 속에서 이해함으로써 ‘현재적 과거’로 만든다. 이런 연구에서는 더 이상 “지나간 과거의 것을 공부해서 무엇하냐?”라는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미래 또한 단순히 아직 오지 않은 세계가 아니라 이미 현재화되어 현재를 움직이는 ‘현재적 미래’가 된다. 결론적으로 ‘지평융합의 인문학’은 가르치고 연구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 모두에게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변화시킬 힘을 되찾아 줄 수 있다. 종래의 거리두기 식 인문학, 지식과 이론 위주의 인문학, 인간의 자연스러운 삶의 태도인 가치지향성을 무시한 인위적인 가치중립적 인문학을 극복하는 새로운 인문학의 길이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거리두기 인문학, 가치중립적 인문학이 필요 없다거나 무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특히 우리는 동양사회와 문화 그리고 한국문화를 타자의 시각에서 연구한 서구학자들의 업적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동양학이나 한국학이 서구 제국주의의 일환으로 발달했고 동양인들의 주체적 자기인식보다는 동양사회와 문화를 대상화하고 타자화하는 성격이 강하다는 문제점이 있음에도 동양의 학자들이나 지식인들이 무시할 수 없는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바로 이 ‘타자적인’ 시각 때문이다. 동양학이나 한국학을 통해 타자의 눈을 빌린 아시아 지성인들은 전통에 대한 맹목적 집착에서 벗어나 자신들의 사회와 문화, 종교와 사상을 비판적 안목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어학적 연구와 역사적 연구는 서구의 동양학과 한국학의 기초이며, 이제는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인문학의 공동자산이다. ‘거리두기의 인문학’, 지평융합적인 ‘신뢰의 인문학’ 그리고 앞으로 좀더 고찰하게 될 비판적인 ‘의심의 인문학’은 어느 것 하나 무시할 수 없는 현대 인문학의 자산으로서 배타적이기보다는 보완적 관계로 보아야 한다.
5. 인문학과 동양사상
끝으로 나는 우리나라 인문학계가 유교, 불교, 천도교 등 풍부한 전통사상에 새롭게 주목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차원에서 다음 몇 가지 사항을 지적하면서 이 글을 마치고자 한다.
첫째, 우리 인문학계는 한국사회에 아직도 유교적 전통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비판 못지않게 긍정적 자산으로 삼을 필요가 있다. 가령 우리 사회가 여전히 대학교수들에게 기대하고 있는 전통적인 교사상, 즉 인생의 교사나 스승의 역할을 거부하지도 못하고 수용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태도에서 벗어나 인문학자들만이라도 그것을 자신을 위한 정신적 자산으로 삼아 살려나가는 분위기를 조성해나갈 필요가 있다. 적어도 인격과 분리된 인문학이 바람직하지 않다면 그렇다. 대학도 어디까지나 교육기관임을 무시해서는 안 되고 어떠한 교육도 교육자의 인격을 떠나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정치가 도덕성의 기반을 가져야 한다는 유교의 덕치주의의 이념이 여전히 유효하다면, 교육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도덕을 법이나 제도로 강제해도 좋다는 말은 아니다. 어떤 사회든 모든 문제를 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고 또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 유교전통은 그런 것을 법가(法家)적이라고 해서 배척해왔다. 인간사회에는 법으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되는 차원의 문제가 허다하다. 도덕은 근본적으로 법 이전과 법 이후의 차원에 속한다. 바로 이 차원에서 유교 전통이 보이지 않는 힘을 발휘할 수 있도록 우리 인문학계가 주도적인 역할을 해 나가야 한다. 정치와 교육 그리고 인문학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존재하는지, 그 본질과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우리 인문학계는 끊임없이 묻고 성찰해야만 한다.
둘째, 이미 지적했듯이 소외를 전제로 하고 조장하는 거리두기와 가치중립성의 인문학은 궁극적으로 극복되어야 하지만, 동시에 학자라면 누구도 그것을 무시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다. 특히 동양의 사상적 전통과 우리사회의 문화를 타자적인 시각에서 관찰하고 연구해온 외국 학자들이 이룩한 동양학과 한국학의 성과를 우리 인문학계는 결코 도외시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자기 문화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스스로를 객관화할 줄 모르는 폐쇄적 지성이나 전통에 갇힌 인문학은 현대 세계에서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근대 서구문명과 학문의 본질적 한계를 아무런 비판이나 도전 없이 당연한 것으로 간주하고 맹종해서도 안 된다. 특히 사실의 세계와 가치의 세계가 화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분리되고 사실판단과 가치판단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괴리를 당연시하는 현대적 상황을 인문학계는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 우리는 또 지식인 사이에 유행하다시피 하고 있는 역사적 상대주의나 문화상대주의 그리고 가치상대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해서도 안 된다. 진리의 보편성과 객관성을 상정하고 추구하는 근대 학문이 진리의 문제에서 상대주의를 쉽게 수용할 수 없듯이, 나는 현대 인문학이 무분별한 역사적 상대주의나 문화상대주의 그리고 가치상대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성리학(性理學)에서는 천리(天理)를 논하면서 ‘그렇게 되는 이유’(所以然之故)와 ‘그래야만 하는 이유’(所當然之故)를 구별하지만 결코 이 둘을 분리하지는 않는다. 사실 성리학이 소이연지고를 논하는 목적은 도덕을 소당연지고의 천리로 정초하기 위함이다. 유교사상은 ‘하늘’(天)이라는 우주적·자연적 질서의 힘(氣)과 원리(理)에 대한 믿음을 전제로 하지만, 이 천리 개념은 그리스도교의 초자연주의(supernaturalism) 신앙과도 다르고 근대의 과학적·무신론적 자연주의(naturalism)와도 다른 제3의 세계관이다. 나는 이것을 ‘동양적 자연주의’라고 부른다. 동양적 자연주의는 사실판단과 가치판단이 같이 가며 자연의 길과 인간의 길이 날카롭게 분리되지 않는 통전적 세계관이다. 과학적 유물론이 지배하고 있는 오늘의 세계에서 이러한 통전적 세계관을 회복하는 일은 실로 현대문명 전체의 명운이 달린 가장 근본적인 문제다. 한국 인문학계는 물론이고 세계 인문학계가 붙잡고 고심해야만 하는 시대적 과제이자 사상적 과제다. 지금까지처럼 인문학의 길과 자연과학의 길이 다르다고 이원화하면서 안주하거나, 과학으로 하여금 세계와 인간에 대한 진리를 독점하도록 방치한다면, 인문학의 미래는 물론이고 인류 문명의 미래도 점점 더 어두워져 갈 것이다.
셋째, 이와 밀접하게 연관된 문제이지만, 우리는 생물학적 인간관이 지배하고 있는 현대 세계에서 유교의 도덕적 인간관을 되살릴 방도를 함께 모색해야 한다. 특히 ‘욕망의 인문학’으로는 인간 존엄성을 확보할 수 없고 ‘합리적 이기주의’라는 타산적 윤리에 호소하는 길 외에는 도덕적 질서를 세울 수 없다면, 우리는 맹자의 성선설 이래 유학 전통이 일관되게 지켜온 인간성에 대한 믿음과 유교적 휴머니즘을 계속해서 살려나가는 방도를 진지하게 모색할 필요가 있다. 도덕은 최소한의 자제와 금욕 없이는 불가능하다. 문제는 자제와 금욕이 인간성에 폭력을 가하는지 아니면 오히려 진정한 인간성을 실현하는지에 달렸다. 유교적 휴머니즘은 ‘이기적 유전자’로 인간의 모든 문제를 근본적으로 설명하려는 생물학적 인간관과 달리 후자를 따른다. 유학적 인간관은 인간의 자연적 욕망 자체를 악으로 간주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긍정하지도 않는다. 인간의 자연적 욕구는 더 높은 차원의 인간성으로 제어하고 승화시켜야 마땅하다는 것, 그것이 더 높은 인간성을 실현하는 길이라는 것이 유교적 휴머니즘의 핵심이다. 생물학적 인간관이 지배하다시피 하는 오늘의 세계에서 서구식 세속적 휴머니즘(secular humanism)은 점점 더 공허한 구호로 전락해가고 있다. 인간의 ‘짙은’(thick) 정체성을 무시하고 ‘얄팍한’(thin) 정체성만을 강조하는 세속적 휴머니즘은 이제 한계를 드러내고 환경생태계의 위기와 문명의 갈등을 향해 치닫고 있는 오늘의 세계는 그야말로 언제 파국을 맞을지 모를 정도로 불안한 양상을 하다.
이 점에서 나는 약 한 세기 전 비록 간접적이었지만 서구문명과 조우하는 와중에 유교의 전통사상과 윤리를 과감하게 재해석하고 개혁한 동학·천도교의 사상적 전통, 특히 인내천(人乃天), 시천주(侍天主)·양천주(養天主), 사인여천(事人如天), 경천·경인·경물의 삼경(三敬) 개념 같은 놀라운 사상을 세계 인문학계와 사상계가 주목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넷째, 나는 유교적 덕의 윤리와 공동체적 윤리(communitarian ethics)가 지닌 장점을 적어도 한국과 동아시아의 인문학계에서만이라도 소중한 자산으로 삼아 발전시켜나가야 한다고 본다. 이런 점에서 나는 정의(justice)를 우선시하는 윤리보다는 선(good)을 우선시하는 동서양의 윤리적 전통을 선호한다. 이 둘이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고 둘이 결합된 형태의 윤리가 가장 바람직하겠지만, 나는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 어디에 있고 인간이 추구해야 할 지고선(the highest good, summum bonum)이 무엇인지의 문제를 더 이상 개인적 선택에만 맡기지 말고 공론의 장에서, 특히 대학 인문학에서,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대학과 학문의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 인문학은 도대체 무엇 때문에 하며 무슨 가치를 위해 존재하는지에 대한 우리 인문학계의 끊임없는 물음과 성찰을 촉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