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 정귀임
나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였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그 사실조차 모르고 자랐다. 아버지는 전쟁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았다. 어디에서 싸웠는지, 얼마나 힘들었는지, 무엇을 잃었는지 묻지 않으면 말하지 않았고, 물어도 짧게 대답할 뿐이었다.
어린 시절의 내게 아버지는 그저 성실한 가장이었다. 새벽이면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고, 어려운 이웃이 있으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자신이 한 일을 드러내지 않았고, 도움을 주고도 생색내지 않았다. 그런 모습이 너무도 자연스러워 나는 그것이 아버지의 성품인 줄만 알았다.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아버지가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며 전쟁을 겪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전우들이 하나둘 쓰러지는 모습을 보았고, 살아 돌아온 것이 기적이라 할 만큼 참혹한 시간을 견뎌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자신의 과거를 훈장처럼 내세우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억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살아갔다. 이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잊어서가 아니라 너무 아팠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의 딸인 나는 일본 사람과 결혼하여 일본으로 건너왔다.
지금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는 일이 흔하지만 당시에는 달랐다. 식민지 시대를 겪은 어른들이 여전히 살아 계셨고, 전쟁의 상처도 완전히 아물지 않은 때였다. 딸이 일본으로 시집간다는 소식은 가족에게 적지 않은 충격이었다.
어머니는 두 달 가까이 밖에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동네 사람들의 시선이 두려웠고, 수군거림이 마음을 아프게 했다. “애국자의 딸이 일본으로 시집간다더라.” 하는 말도 들렸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도 무거웠다.
나는 잘못을 한 것이 없는데도 어딘가 미안했다. 부모님이 겪어온 세월을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아렸다. 특히 나라가 가장 어려웠던 시절 청춘을 바쳤던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다.
혹시 실망하거나 서운한 마음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 앞에서 고개를 들기 어려운 순간은 없었을까. 나는 여러 번 그런 생각을 했지만, 아버지는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반대하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흔쾌히 찬성한다고 말하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딸의 선택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내가 일본에서 살아가는 동안에도 변함없이 딸을 걱정하고 응원해 주었다.
일본에서 살아온 세월이 어느덧 수십 년이 되었다.
이곳에서 나는 남편을 만나 가정을 이루었고 아이들을 키웠다. 기쁜 날도 있었고 눈물 흘린 날도 있었다. 낯선 땅에서 외로움에 흔들릴 때도 있었지만 따뜻한 이웃들의 도움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 과정에서 나는 깨달았다.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은 과거의 침략자가 아니었다. 그들 역시 가족을 사랑하고, 이웃을 아끼며, 평범한 행복을 꿈꾸는 사람들이었다.
그 깨달음은 오히려 아버지를 더 깊이 이해하게 만들었다.
아버지가 지키고자 했던 것은 일본을 미워하는 일이 아니라, 다시는 그런 전쟁이 일어나지 않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누군가를 증오하기 위해 싸운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가족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아버지는 딸의 선택 앞에서 자신의 상처보다 딸의 행복을 먼저 생각했는지 모른다.
이제 아버지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가끔 생각한다.
만약 지금 아버지와 마주 앉을 수 있다면 무엇을 물어볼까.
아마도 전쟁 이야기가 아니라 그날의 마음을 묻고 싶다.
“아버지, 제가 일본으로 간다고 했을 때 어떤 심정이셨어요?”
그러면 아버지는 예전처럼 잠시 침묵하다가 빙그레 웃으며 말씀하실 것만 같다.
“네가 행복하면 됐다.”
돌이켜보면 아버지는 평생 말보다 삶으로 가르친 분이었다.
나라를 사랑하는 법도,
사람을 사랑하는 법도,
용서하는 법도,
묵묵히 견디는 법도.
나는 이제야 알 것 같다.
전쟁은 한 세대의 몸에 상처를 남기지만, 사랑은 그 상처를 넘어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는 것을.
한국의 딸로 태어나 일본인의 아내로 살아온 내 삶은 어쩌면 두 나라 사이에 놓인 작은 다리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다리의 첫 기둥은, 전쟁의 기억을 가슴에 묻은 채 딸의 행복을 위해 침묵해 주었던 아버지였음을.
나는 오늘도 그 침묵 앞에 조용히 고개를 숙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