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경 작업 속에 태어난 천일국 국가 외 1편-최홍길

작성자최홍길|작성시간19.12.02|조회수817 목록 댓글 1

수기

 

천성경작업 속에서 탄생한 천일국 국가

-통일가 비상(飛翔)을 위한 신호탄

 

 

 

15기 순전단을 수료한 후 광주(光州)에서 목회활동을 하다, 19931월부터 협회의 통일세계에서 5년 가까이 일한 적이 있다. 그 때 청파동 사무실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참부모님께서 주관하는 행사가 있으면 무조건 달려 나갔다. 참부모님의 순회 노정에 따라 협회 영상팀과 같이 전국을 누비기도 하고, 수택리와 한남동에서 행사가 있으면 말씀을 듣고 취재하기를 여러 번. 기사를 쓰는 건 기본이었고, 사진을 찍은 후 사무실에 와서는 편집까지 했다. 인쇄소로 넘기기 며칠 전부터는 오탈자를 잡아내려고 밤하늘의 달을 보며 퇴근한 적도 많았다. 마침 20대 중후반의 청춘이었기에 물불을 가리지 않고 섭리의 현장을 누비며 심정문화세계를 선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 그때였다.

그 후 금천교구 독산교회장으로 시무하다가 1999년부터 은평구 소재 재단학교인 선정중학교에 근무하게 되는 영광을 얻었다. 주지하다시피 선정(善正)은 참어머님께서 직접 다니셨던 전통의 학교이다. 애천애인애국의 건학정신을 필두로 정직순결친절봉사라는 교훈 아래 어린 학생들을 착하고 바르게 인도하던 가운데 상급학교인 선정고등학교로 근무처를 옮기게 되었다.

인문계 고등학교는 대학입시를 우선시하는 곳이어서 방과후수업에다 야자 감독을 해야 하는 등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연일 강행군이 이어졌다. 그에 걸맞게 학생들이 유수의 대학에 입학하자 가르친 보람으로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러다가 인문고가 특목고와 특성화고, 자사고 등에 밀려 찬밥 신세로 전락했다. 공부와 담을 쌓은 학생들이 인문고로 몰려든 것이다.

설상가상이랄까, 20131월 초순에는 겨울방학 보충수업 신청자가 많지 않아 고등학교에 근무한 지 10여 년 만에 방학 중 수업을 하지 않고 처음으로 방학다운 방학을 보내게 되었다. 그동안 등한시하던 각종 연수를 받고, 고향에도 다녀오는 등 내외적인 충전을 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던 차에 천성경작업에 동참해 달라는 전화를 받은 것이다. 협회 기관지인 통일세계 편집장을 했던 경력이었을까, ‘심정문학편집 등에 동참하고 있는 경력 때문이었을까? 한 개인의 출판물도 아닌, 천주사적인 작업이기에 무조건 그리고 기꺼이 응했다. 계획했던 연수 등은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20128월부터 시작된 천성경 증보판(增補版) 작업은 쉽지 않았다. 기존의 천성경은 신앙의 조국인 한국에서 직접 제작한 것이 아닌데다가 최근 말씀이 가미되지 않는 등의 이유로, 참부모님의 말씀을 받들어 기원절 봉헌을 목표로 증보 작업에 돌입한 것이었다. 이와 동시에 강연문집인 평화경편찬 작업도 진행되었다. 내가 맡은 일은 교정과 교열 등이었다. 주술 구조가 맞지 않은 비문(非文)을 고친다거나,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어긋난 것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때에 따라 중간제목을 뽑기도 했다. 협회 통일세계 때 해본 노하우가 있어서 큰 어려움은 없었으나, 시간이 발목을 잡았다.

13편으로 된 천성경 교정을 13일에 일단 해야 했다. 1편은 보통 2백여 페이지로 돼 있었는데 이걸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살펴야 했다. 눈으로만 보면 놓칠 수 있기에 소리를 내어 훈독하면서 교정해야 한다는 지시 또한 새겨들어야 했다. 밥을 먹자마자 그 상 위에서 작업을 시작했다. 1페이지가 2단으로 돼 있고, 글씨가 비교적 작기에 하루에 4백 페이지를 봐야 하는 힘든 노정이었다. 양반 자세로 앉기도 하고, 무릎을 꿇기도 하고, 엎드리기도 하면서 읽어나갔다. 눈이 피로하면 안약을 넣고 눈을 감을 채로 성가를 들으면서 쉬었다. 집중력이 떨어지면 밖에 나가 심호흡을 잠시 하는 등 하루종일 매달렸다. 이후 집중과 몰입은 지속되었다.

늘 해오던 뉴스 시청도 접어두고, 지인들의 만남도 뒤로 미뤘다. 밥 먹고 잠 자는 일만 빼고 온종일 천성경에 매달린 것이다. 천성경 작업이 1차 끝나자마자 바로 이어서 평화경 작업을 했다. 다른 것은 모두 차치해 두고서 1월 한달내내 참부모님 말씀집과만 호흡한 것이었다. 감동적인 말씀 대목에서는 눈물을 훔치고, 이 땅의 한민족을 택해 오실 수밖에 없었던 당신을 떠올리며 회한에 잠기기도 했다. 자만(自慢)으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1월 한 달의 삶은 말씀만 존재했다. 말씀이 육화(肉化)된 상태였다.

천성경 마무리 작업을 하다 천일국가가사를 모집한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기원절을 맞아 천일국 시대에 부합하는 내용으로 새로운 국가(國歌)를 제정해야 한다는 참어머님의 말씀을 전해들은 것이다. 천지인 참부모님을 찬양하고, 천일국의 비전과 소망이 한반도는 물론이려니와 전 세계를 넘어 천주까지 가득하기를 기원하는 내용을 담아야 한다는 지침까지 받았다. 성가 2성려의 새 노래에 가사를 덧입히는 작업이라고 했다. 음원은 다시 편곡할 예정이라며 경쾌하고 밝은 느낌의 시()와 같은 글이 필요하다는 설명이었다. 복음성가인 조국찬가가사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거라고도 들었다.

통일세계에서 기사를 작성했고, 취미생활로 수필과 동화 작품을 계속 써오고 있지만, 시를 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즉 작시(作詩)는 처음이었지만, 그래도 왠지 모르게 도전해 보고 싶었다. 천성경과 평화경을 작업하고 있어서인지 나름대로 자신감도 생기는 것 같았다. 뇌리에는 말씀과 관련된 수많은 어휘들이 자리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톡 튀어나올 분위기였다. 3일 동안의 기간이 주어졌다.

행사 후 만세삼창 때 자주 언급되는 억만세관련 인터넷을 검색했다. 천세를 누리소서 만세를 누리소서// 무쇠 기둥에 꽃피어 열매 열어 따드리도록 누리소서// 그밖에 억만세 외에 또 만세를 누리소서// 임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는 시조 한 수를 음미해 보았다. ‘조국찬가를 여러 번 들으며 흥얼거리기도 했다. 찬송가와 성가를 붙들고 씨름하기도 했다.

현재 천일국가인 성가 2성려의 새 노래를 불렀다. 부르고 부르고 또 불렀다. 그러자 어렴풋이 천일국의 국화와 국조 그리고 국기가 생각났다. 천일국 국화가 장미와 백합이기에 3절보다는 4절로 하는 게 좋겠다는 느낌이 자연스레 들었다. 작업을 하다 집중이 안 되면 허공을 보며 누울 때가 많았다. 문득 애국가 가사가 생각나기에 조용히 불러보았다. 애국가는 4절이고, 각 절의 3-4구가 전부 후렴구인 점을 착안했다. 겁도 없이 한 편이 아닌 두 편을 만들기로 작정했다. 하나는 개인-가정-민족세계-천주의 흐름으로, 다른 하나는 천일국과 관련해 장미-백합--천일국 깃발의 흐름으로 가닥을 잡았다.

3-4-5라는 음절수를 생각하며 다양한 조합을 시도했다. 처음에 쓴 후렴구 펼치세를 앞의 시조를 참고해 억만세로 바꾸기도 했다. 1절에서 4절까지 노래의 시작을 자음 ''으로 통일했다. 힘든 작업이었으나 희망을 잃지 않았다. 어느 정도 가닥이 잡히자 결과물이 나왔다. 지인들에게 결과물을 메일로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특히 지방의 한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후배와는 장시간에 걸친 전화 대화를 통해 도움을 받았다. 평소에는 잘 오지도 않던, 우리 교회를 아직 잘 모르는 조카가 찾아왔기에 불쑥 내밀어서 평을 들었다. 하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2% 부족한 상태였다. 이번에는 천성경의 '천일국' 편을 읽어나갔다. ‘천일국 백성의 7대지침이라는 중간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분의 일생은 어머니의 복중에서 10개월, 지상계에서 공기를 호흡하면서 100, 영원한 천상세계에서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중략) 여러분의 지상생활은 다음 단계의 삶인 영계의 삶을 위해 철저하게 준비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은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지라도 영계의 조상들이 여러분과 함께하고 있음을 잊지 말고 영계와 보조를 맞추어 사는 삶이어야 합니다. 정성과 기도로 영계와 교통을 해야 할 것입니다.”

, 천성경 말씀처럼, 정성과 기도가 부족했구나! 성초를 켜 놓고 성가를 틀어놓았다. 잠들기 전에는 하늘 향해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역시 하늘은 모종의 응답을 주셨다. 나의 권유에 따라 생전에 성주(聖酒)를 마셨던 할머니가 웃는 얼굴로 나타났다. 밤중인지 새벽녘인지 얻게 되었던 가르침, 바로 이런 게 영적인 감각이리라. ‘숭고영생그리고 '순정'이라는 귀한 단어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천일국 찬가

1) 보내신 인연으로 원리를 찾고

믿음이 새록새록 따스한 마음

양심의 지향대로 본연의 모습

펼치세 누려보세 참사랑세상 천일국세상

 

2) 참사랑 중심으로 행복한 가정

소망이 모락모락 움트는 행복

본연의 창조이상 심정의 터전

펼치세 누려보세 참사랑세상 천일국세상

 

3) 천지인 참부모님 영원한 생명

삼천리 방방곡곡 손에손잡고

오색의 형제들과 만물까지도

펼치세 누려보세 참사랑세상 천일국세상

 

4) 그토록 하늘부모 소원하시던

통일기 휘날리는 천정의 동산

오대양 육대주와 천주까지도

펼치세 누려보세 참사랑세상 천일국세상

 

 

천일국 찬가

1) 수려한 꽃봉오리 사랑의 장미

희망의 새소식이 만발하도다

오대양 육대주와 천주까지도

억만세 누려보세 길이빛내세 영원하도록

 

2) 숭고한 하늘빛깔 순결한 백합

선하고 빛난정신 이어가도다

오대양 육대주와 천주까지도

억만세 누려보세 길이빛내세 영원하도록

 

3) 순정의 기품있다 천년학 나래

영생의 이상향을 나타내도다

오대양 육대주와 천주까지도

억만세 누려보세 길이빛내세 영원하도록

 

4) 사계절 휘날리는 천일국 깃발

천지인 참부모님 소망하도다

오대양 육대주와 천주까지도

억만세 누려보세 길이빛내세 영원하도록

 

위의 두 편을 메일로 송고했다. 내가 만든 가사의 두 번째 작품이 최종적으로 확정되었다는 소식을 130일 저녁에 듣게 되었다. 그때 보낸 원고가 일부 수정됐음을 알았다. 후렴구 '누려보세''태평성대', ‘영원하도록자유천일국등으로 바뀌었음도 전해 들었다. 또한 2절의 '순결한''순결의'로 바뀌었다. 그 시각은, 우여곡절 끝에 나로호가 발사에 성공한 시각과 엇비슷했다. 우주로 가는 하늘길이 이제야 열린 것이다. 이번 나로호의 성공은 대한민국의 쾌거임에 틀림없다. 나로호가 대한민국의 경사라면, 천일국가 확정은 통일가 비상을 위한 신호탄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영광'인 셈이다.

가사가 적힌 천일국 국가의 악보를 받고 싶으면, 마포의 도원빌딩으로 오라고 해서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며칠 전부터 오른쪽 눈썹 부위에 자리잡은 부스럼이 세수를 빠른 속도로 세게 하자 떨어져 나가면서 피가 나오기 시작했다. 곧 그칠 거라고 생각한 나는 주체할 수 없이 뿜어 나오는 그 피를 화장지로 닦고 지압을 거듭했다. 두루마리 화장지 하나가 거의 소진될 즈음, 피는 멎었다. 눈썹에 밴드를 한 채 도원빌딩에 가서 그 연유를 말하자, 나쁜 피의 타락성근성을 빼버리고 새롭게 출발하라는 의미일 것이라고 설명해 주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여태까지 살아오면서 그렇게 많은 피를 흘린 적이 없었는데, 천일국가에는 사탄이 끼어들 틈이 없어야 함을 알았다.

우연 속의 필연! 유일하게 보충수업이 없었던 20131월에 하늘은 나를 불렀고, 나는 그 부름에 호응하여 시력이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말씀에 매달렸다. 말씀을 읽으면서 울고 웃으며 내 삶을 점검했다. 그 사이 천일국가 작시와 자연스레 연결되었고, 감히 함부로 얻을 수 없는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천일국 가사는 나 혼자 만든 게 아님을 잘 안다. 천성경에서 힌트를 얻은 후 영계의 협조 속에서, 영계를 치리하시는 참아버님의 사랑 속에서 나온 것이라 생각한다.

지금 내 컴퓨터 바탕화면에는 내가 작시한 천일국가가 깔려 있다. 인터넷에 접속해 개인적인 업무를 보기 전에 나는 반드시 천일국가를 듣는다. 왠지 모를 희열을 체득하면서 그토록 갈망하던 천일국이 바로 코앞에 다가올 것만 같다. 암울했던 80년대 대학 시절, 용봉골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놓아 외치며 자유와 민주화를 갈망했던 내가, 이제는 천일국가를 부르며 하늘 아버지가 그토록 바라시는 이상의 세계가 어서 속히 오기를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단편소설

 

장산댁네 두 아들

 

 

대율리 마을회관에 동네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전에 대율리 이장은 마을회관 사무실에 있는 마이크를 잡고 안내방송을 했는데, 이장의 목소리가 나가자마자 동네의 두 군데에 설치된 스피커로 전해들은 사람들이 회관 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벌써 오래 전에 입에서 입으로 알려졌기에 이장의 방송이 채 끝나기도 전에 신발을 신은 사람들도 더러는 있었다. 허리 굽은 아흔 노인에서부터 예닐곱 먹은 어린이까지 속속 도착했다. 대율리 열여섯 가구를 구성하는 가족들 가운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회관 앞 공터로 모여든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최근에 갓 태어난 애기가 없어 이날 참석률은 100%였다. 이들도 부족한지 동네 개들마저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며 한 몫 했다. 평소에 넓디넓게 보이던 공터가 비좁을 지경이었다.

마을회관 옥상의 태극기가 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대율리 마을회관이라고 쓰인 입구가 중앙이 되어 연설용 탁자 하나가 자리했다. 누구한테 빌린 게 아니고 회관 안쪽에 있는 걸 밖으로 옮겼을 뿐이다. 의자 두 개가 단상 양쪽에 각각 하나씩 배치되었다. 이 의자도 회관 안쪽에 있는 걸 밖으로 옮긴 것이다. 이장의 명령을 받은 마을 청년 셋은 엉덩이에서 휘파람 소리가 날 정도로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부인회에서 준비한 음식들은 부인들이 손수 회관 안쪽으로 날랐다. 도와줄 만한 젊은 사람들이 없어서 그랬다. 땀 흘리는 마을 청년이라고 해야 30대 후반의 송뚜겅 씨와 40대 아저씨들 둘, 나머지는 전부 50대 이상이다. 음식을 나르는 대율리 부인회라고 해야 30대는 없고, 40대 이상이다. 대율리에 사는 여자들은 모두 부인회 회원들이다. 아니다, 결혼 안 한 여자들은 예외다. 대율리에는 청년회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따라서 청년회장도 없다. 대개 지금의 농촌은 그러하겠거니와 40대 아니 50대까지는 청년 축에 들어가고, 겨우 60대에 접어들어야 동네의 궂은일에서 손을 뗄 정도로 젊은 사람들의 씨가 말랐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단상 왼쪽의 의자에 앉았던 이장이 일어섰다. 핸드 마이크를 잡고 아아 마이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마이크를 시험하고 있습니다 하며 반응을 기다리다 어이 괜찮네 하는 마을 사람의 소리를 듣고 빙긋이 웃는다. 이번 결혼식의 책임자이면서 사회자인 이장은 북치고 장구까지 치고 있었다.

지금부터 우리 마을 대율리 총각 송점술 씨 결혼식을 시작하겠습니다.”

이장의 달뜬 목소리가 울려 퍼지자 동네 사람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개들도 눈 올 때보다 더 요란스레 달려 다녔다.

식순에 따라 신랑 입장이 있겠습니다. 지가 그냥 신랑 입장 하면 앞으로 걸어오면 되겠습니다. 그럼 신랑 입장.”

이장은 사회를 보다가 먼 발치에서 양복 차림으로 단상을 쳐다보며 어색하게 서 있는 점술 씨를 향해 손짓을 했다. 이장의 사인을 눈치 챈 점술 씨는 씩씩하게 걸어왔다. 바그너의 결혼행진곡은 생략되었다. 읍내에 있는 피아노를 옮기기는 불가능했고, 음악을 녹음해 그걸 트는 것도 귀찮아 생략하기로 했다. 양복 걸쳐 입은께 사람이 영 달라보이네, 점술이 보고 누가 촌놈이라고 하겠어, 대율리에서 인재 났어 인재 나온 거야, 동네 사람들은 입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다. 그 칭찬이 끝나기도 전에 점술 씨는 단상에 당도했다.

그러면 식순에 따라 이번에는 신부 입장이 있겠습니다. 신부 측 부모님이 사정 때문에 못 오셔서 구() 이장께서 신부 측 아버지를 대신하겠습니다. 신부 입장!”

마을회관 이장 집무실에 대기하고 있던 신부가 쪽문으로 나오자 모두 시선이 한 곳으로 쏠렸다. 구 이장이 신부의 손을 잡고 들어오다 점술 씨에게 신부의 손을 넘겨주었다. 뜨거운 박수가 나왔다. 신랑과 신부가 단상 앞에 섰다.

식순에 따라 주례사가 있겠습니다.”

이장이 핸드 마이크로 말했다. 주머니에서 쪽지를 꺼내 단상의 탁자 위에 놓았다.

화창한 1111일 오전 11, 대율리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신랑 송점술 군과 신부 응우옌 티 로안 양의 결혼식을 축하하기 위해 왕림해 주신 여러분께 심심한 감사의 뜻을 먼저 올립니다. 신랑 점술 군은...”

이장이 핸드 마이크를 든 채 아까 꺼낸 쪽지를 읽어가며 주례사까지 했다. 구 이장에게 맡겼으면 좋으련만 혼자 다했다. 북치고 장구치고 이젠 그것도 모자라 징까지 울려대고 있는 것이다.

이장의 주례사는 예상보다 짧았다. 주례사를 준비할 시간이 없었는지, 마을사람들만 모였기에 대충 해도 괜찮다고 여겼는지 하여간 짧았다. 의례적인 말을 하다가 검은머리 파 뿌리 되도록 아들 낳고 딸 낳고 부모에게 효도하면서 형제지간에 우애 있는 가정을 만들라고 당부한 뒤 주례사를 가름했다. 동네 사람들은 회관이 떠나갈 듯 박수를 보냈다. 그것은 1년에 한 번 이민과의 대화를 나오는 면장처럼 길게 연설하지 않아서였다.

주로 농한기인 2월에 동네를 찾아오는 면장은 말이 이민과의 대화였지 자기 말만 길게 늘어놓은 다음, 마지막 부분에 가서 여쭤보고 싶은 거 있습니까 하고선 대화를 마무리지었다. 저 연설 언제 끝나나, 빨리 소 여물 줘야 하는데, 영감님 한약 챙길 시간인데, 그렇게 딴 생각을 하거나 또는 졸고 있던 동네 사람들에게 질문을 하라면 무슨 질문을 하겠는가!

동네 사람들은 이장의 주례사가 너무나 일찍 끝나 미처 잡생각 할 겨를이 없었다. 이렇게 우레 같은 박수를 하는 것은 연설이 짤막해서라고 했는데, 결혼식 하는 점술 씨의 앞길이 탄탄하기를 바라는 생각도 있었다고 보는 게 더 좋으리라.

결혼식은 부케 전달도 없이 이장의 주례사가 끝나자 바로 끝났다. 도시에서 하건 농촌에서 하건 다른 결혼식에서 으레 하는 부케 전달식을 왜 생략했느냐? 부케를 받을 만한 신부의 친구가 오지 않았고, 더 나아가 대율리에 처녀가 없었기 때문이다. 읍내에서 온 사진사가 신랑 신부와 그 가족들 그리고 동네사람들의 사진을 찍어주지 않았더라면 대율리 사람들은 점술 씨의 결혼식을 못내 아쉬워했을 것이다. 세상에 15분도 채 안 되어 결혼식이 끝나다니.

대신 사진 촬영 시간은 결혼식 시간보다 훨씬 길었다. 신랑 신부 사진, 신랑과 신부와 신랑 동생과의 사진, 신랑과 신부와 신랑 동생과 그 어머니 장산댁과의 사진, 신랑 신부와 동생과 장산댁과 친척들과의 사진, 신랑 신부와 동생과 장산댁과 친척들과 동네사람들과의 사진을 한 판도 아니고 두 판씩 찍으니 시간이 흐를 수밖에.

읍내에서 온 사진사는 사람들의 표정을 잡아주느라 애를 먹었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가족사진까지는 그런 대로 괜찮았다. 수가 많지 않아서였다. 문제는 대율리 사람들이 총집합한 마지막의 단체사진이었다. 그들은 슬픈 일이 없었는데도 대부분 울상이었다. 게다가 벌 받는 학생처럼 경직된 모습이었다. 김치를 부르고 치즈를 외쳤어도 그때뿐이었다. 어느 정도 그림이 만들어지려 하면, 개들의 꼬리치는 모습이 잡히기에 셔터를 누를 수가 없었다. 이때 이장이 끼어들었다. 한쪽 발을 땅에 소리 나게 대면서 훠이라고 하자 개들이 무리를 지어 길가로 도망을 쳤고, 그 뒤로 마을사람들에게는 힘들어도 김치의 치를 5초 동안만 해봅시다라고 권했다. 이장의 말은 금방 효과가 있었다. 사진사는 웃으면서 이장을 포함한 마을사람들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주었다.

신혼여행은 없었다. 결혼식 이후 점심시간부터 그날 밤늦은 시간까지 동네 사람들은 마을회관에서 노래잔치를 하고, 윷놀이를 하고, 술을 마셨다. 신랑집에서 잡은 돼지고기로 안주를 하며 맘껏 놀았다. 신랑의 발을 달고, 신부의 베트남 노래를 들음은 당연했다. 얼마나 먹어댔는지 공터 가장자리에 오줌냄새는 기본이고, 토악질까지 한 사람도 보였다.

 

점술 씨의 고향 대율리는 법정리(法定里)가 아니라 행정리(行政里)였다. 너무나 외진 마을이어서 군에서 마을회관을 하나 지어주었을 뿐 고개 너머 장고리에 속했다. 대율리 동네이장은 말이 이장이지 장고리 소속의 반장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관례대로 이장님 이장님 하고 부를 뿐이었다. 대율리 이장은 면사무소에서 한 달에 한 번 주관하는 이장회의 참석권한도 부여되지 않았다. 장고리 이장이 회의를 다녀온 그날 저녁, 전화로 대율리 이장(굳이 말하면 반장이다)을 부르면 이장은 자기 오토바이를 몰고 가 지시사항을 하달 받아 대율리에 전달하는 역할이 고작이었다. 따라서 대율리 이장에게는 이장들에게 활동비 명목으로 한 달에 한 번씩 정기적으로 입금되는 게 한 푼도 없었다. 그래도 몽매한 대율리 열여섯 가구 사람들은 이장을 하느님 다음으로 알았다. 이 마을에서 무려 1년 동안이나 외국물을 먹어본 사람은 점술 씨의 아버지 즉 이장이 유일해서였다.

지금 이장이 이장을 하게 된 이유는 지극히 단순했다. 월남전 참전용사이기 때문이었다. 대율리에서는 유일하게 월남에 파병되어 1년 남짓 복무한 사람인데다가 게다가 고엽제 후유증 때문에 국가로부터 매달 일정금액의 수당을 받아서였다. 이장은 지갑 속에 돈은 없을지언정 주민등록증과 월남전고엽제후유증 확인증은 꼭 담아 갖고 다녔다. 겨울과 같은 농한기가 되면 사람들이 마을회관에 모여들어 화투도 치고 TV도 보면서 소일을 했는데 그럴 때면 이장은 월남전 얘기를 가끔씩 들려주었다. 마을 사람들에게 특히 도마뱀 이야기는 절대 잊히지 않을 정도였다. 산의 초입에서나 접하게 되는 도마뱀을 월남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특히 밤에는 수시로 맞닥뜨린다는 것이었다. 이장은 가끔 귀엽게도 보이는 우리의 도마뱀과는 다르게 천정이나 벽으로 돌아다니며 이상한 소리를 낸다고 했다. 야전 막사에서 잠을 자다가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더러 있는데 적의 침임이 아니고 동료의 코고는 소리도 아닌, 도마뱀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도마뱀 소리를 흉내낼 때는 바로 옆에 있는 사람이 흠칫 놀랄 정도로 그럴싸한 표정까지 지어보였다. 도마뱀이 옷속으로 들어오거나 사람을 물지 않는다고 말할 때는 듣는 사람들 대부분 안도의 한숨을 쉬기도 했다.

그렇다면 왜 동네이름은 대율린가? 큰 대자에 밤 율자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동네 사람들은 대율이라고 하지 않고 한배미라고 부른다. 인근 다른 동네 사람들도 한배미라고 부르는 건 말할 필요 없다. 동네 초입에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밤나무가 대여섯 그루 있었는데, 밤꽃 피는 6월이 되면 그 밤나무에서 뱉어놓은 밤꽃 향기가 이 마을을 뒤엎고 심지어 장고리에까지 퍼지게 되면서 이렇게 불리게 됐다고 군지(郡誌)에서는 밝히고 있다. 독자들은 이의를 달 수도 있다. 왜 한밤이가 아니고 한배미인지. 발음을 편하게 하기 위한 모음 역행동화 현상이다. 밤나무 몇 그루 때문에 한배미, 대율이라고 불렀으나, 그 밤나무가 지금 대율리에 없다.

대율리 사람들은 밤농사를 지어 살아가는 게 아니라 밭농사를 지으며 살아간다. 대대로 물려받은 밭에 마늘과 깨, 콩 등을 심어 그 소출로 살아간다. 논도 몇 마지기가 있지만, 자급자족 정도다. 최근에는 몇 가구에서 소를 집중적으로 키운다. 소를 키워 적기에 출하를 하면 떼돈을 번다는 소문은 무성했지만, 대율리 사람들은 소를 키워 떼돈은 못 벌고 자녀들 학자금과 가용으로 보태 썼다. 주 소득원은 마늘이었다. 이 지역 마늘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아주는 명품이었다. 육지에서 온 마늘 장사꾼들은 겨우내 차가운 바닷바람을 맞고 견디면서 자라왔기에 최상품으로 쳐준다고 했다. 이들은 여름철 수확기가 되면 대율리 마늘을 사러 들이닥쳐 밭뙈기로 흥정을 해서 트럭으로 싣고 갔는데, 트럭이 겨우 들어와 빠져나갈 정도로 도로사정은 나빴다. 마을에는 물건을 파는 가게도 없었다. 생필품은 장고리 가게에 가서 사오든지 아니면 그냥 없는 대로 살았다.

 

중학교를 마치고 고향집에서 일손을 거들다 때가 돼 군대까지 다녀온 송점술 씨는 영농후계자로 선정돼 그 자금으로 소를 사들였다. 처음엔 열 마리였다가 스무 마리로 늘렸다. 그 소가 새끼를 낳고 하니 마릿수는 산술급수적으로 늘어났다. 마릿수는 늘어났지만, 살림은 그대로였다. 소값파동을 거치고, 이따금씩 찾아오는 소 전염병 같은 게 돌아 살림살이가 나아진 게 별로 없었다. 처음엔 혼자 했으나 로안 씨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40두가 넘어서자 동생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세 채의 대형 우사를 관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끼니 때 사료를 줘야 하고, 배설물을 받아내야 했으며, 병색이 보일라치면 육지의 수의사를 불러야 했다. 정말 다행히도 이웃 면까지 들이닥친 구제역은 대율리를 비켜갔다.

로안 씨의 시어머니인 장산댁은 평소에는 과묵한 편이지만, 막걸리가 한 잔이라도 목구멍에 들어가면 달변가로 변했다. 하루 세 끼의 식사를 거르는 날이 없었어도 체중은 늘어나지 않았는데, 동네 아낙들은 그 밥이 입심으로 다 갔다고 했다. 글을 읽을 줄 몰라도, 자기 이름은 제대로 쓸 줄 몰라도 장산댁의 말재주는 남달랐다. 점술 씨 어머니와 일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그 날 하루는 배꼽을 몇 번 잡아야 한다. 그녀의 입심이 거침없어서였다. 아마 그럴 듯한 옷을 입고 사투리로 재미있게 말하기 대회를 연다면, 입상권 내에 무난히 들어가고도 남을 만한 사람이 장산댁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우리 동네 같은 깡촌에서 실지 일어났던 일이야. 여름 휴가철에 자기 아들이 차를 몰고 왔어. 그 차는 안이 부인네 넙턱지같이 넓었고, 바깥도 그럴싸하게 삐까번쩍했는가 봐. 그 차 이름은 소나타였어. 촌놈이 성공한 거제. 이 아들이 동네 친구랑 얘기하는 걸 자기 엄마도 옆에서 듣고 있었어.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다 그 아들친구가 요새 소나타 비싸지하니까 이때 아짐씨가 불쑥 끼어들어 야 너는 요새 소값이 을마나 비싼디 그라냐. 소 안 타도 겁나게 비싸단다한 거야. 가만히 앉아서 듣고만 있어도 중간은 갈 것인디. 그래서 그 아짐씨 별명이 소나타가 된 거야.

같이 일할 때면, 우스갯소리만 지껄인다고 여겼던 아낙들은 언제부터인가 그녀를 예사롭지 않게 보기 시작했다.

인자 을마 안 가서 논에 나락 심는 사람들은 굶어죽게 생겠어, 뼈빠지게 농사 지어봤자 본전도 본 건지게 생겠당께, 일 하다가 뜬금없이 장산댁이 말했다. 그것이 당최 무슨 소리당가, 일하던 동네 아낙이 물었다. 도시 사는 젊은것들이 바쁘다고 핑계댐시롱 아침밥을 안 묵고 빵하고 커피만 마시거든. 장산댁이 말했다. 아따 그래도 점심 저녁 두 끼니 정도는 밥을 안 묵겄소, 다른 아낙이 말했다. 그래 밥을 묵더라도 우리 한배미 사람들같이 고봉으로 안 퍼. 그라고 밥을 묵을 때는 젓가락으로 밥알 숫자를 하나둘 시면서 입에다 넣거든. 이런디 쌀이 잘 폴리겄는가? 장산댁이 말했다. 근디 장산댁은 도시 사람들을 으띃게 그러코롬 잘 아는가, 동네 아낙이 끼어들었다. 아 집에 텔레비전은 뭣 땜시 있는가, 노래만 들으라고 있단가, 그것이 잘만 들어보면 정보의 바다여 바다 이 사람들아, 장산댁은 쏘아부쳤다. 근데 방법은 있어, 장산댁은 또 말했다. 아낙들의 대꾸는 없었다. 장산댁의 말이 이어졌다. 농약 안 치고 유기농으로 쌀을 재배하면 판로가 있단 말이시, 대도시 아파트 부녀회랑 연결되믄 기똥차게 폴린닥 하네, 우리 땅에서 난 무공해 쌀을 누가 싫다고 하겄어, 장산댁은 쉬지 않았다. 그라고 앞으로는 그냥 쌀이 아니라 검은쌀 삘간쌀 같은 유별난 농사를 지어야 돈을 벌어. 누구 하나 대꾸하지 않았으나 묵묵히 듣고 있을 따름이었다.

동네 사람들은 놀랐다. 이 일이 있고 열흘 후쯤, 장대 같은 비가 쏟아지자 모두들 집안에 들어앉아 TV를 보다가 장산댁이 일하면서 말했던 것과 비슷한 내용들이 농업전문가들의 입에서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이처럼 오지 대율리에 들어온 로안 씨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악착같이 농촌생활에 적응하려 노력했다. 마트도 없는 외진 마을, 재래식 화장실, 일 때문에 고된 일상사 등 역경을 헤쳐 나가려 로안 씨는 마음을 다잡았다. 힘들 때는 이를 악물었다. 교회 목사님이 그랬지? 남편과 시댁 식구들을 하늘같이 모시라고. 아무리 어려운 환경이라도 그 자리를 딛고 일어서면 바로 그곳이 천국이라고. 천국은 가정에서부터 출발한다고.

밥을 먹으려고 자리를 잡으면 개미들의 행렬이 시야에 들어왔다. 평상시에도 개미들은 부지런히 어디를 왔다갔다 했겠지만, 자리에 얼마를 앉아 있으면 개미들은 어김없이 보였다. 개미들은 밥상에도 많았다. 이 집 사람들은 개미를 잡으려고 하지 않았다. 로안 씨는 처음에 동물까지 사랑할 정도로 마음씨가 넓은 줄 알았다. 그게 아니었다. 바빠서 개미에게 신경 쓸 여력이 없어서였다. 사실 이곳 대율리 사람들은 바빴다. 이른 시간 일어나서 일하고, 아침 먹고 또 일 나가고, 점심 무렵이 되면 다시 먹고 일하고, 저녁이 되면 밥 먹고 잤다. 이 같은 동작을 1년 내내 되풀이하다 나이를 한 살씩 먹으면서 늙어가고 있었다. 개미가 사람을 귀찮게 한다면 비가 많이 오는 날, 할 일이 없을 때 잡을 수도 있으련만 대율리 사람들은 그대로 두었다. 개미들도 그것을 즐기는 듯 했다. 아마 대율리 사람들 가운데 대부분 개미 몇 마리씩은 밥을 먹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개미까지 입에 넣었을 것이다. 대율리 사람들이 개미를 보고 하는 말이 더 걸작이었다. 아 개미도 사람처럼 움직이는 동물인디, 뭣이라도 묵고 살아야 할 거 아니겄어.

로안 씨의 고향 베트남 하이퐁은 남편의 고향과 별 차이가 없었다. 수도 하노이에서 버스를 타고 네댓 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었다. 고향에서 대대로 농사를 짓고, 오리를 키우며 살았다. 물론 학교도 다녔다. 로안 씨는 하노이에서 대학을 다니며 교회를 알게 되었고, 졸업 후 교회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하다 그 교회가 국제결혼을 주선해 주어 오늘의 남편을 만나게 된 것이다. 사람의 삶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로안 씨는 하노이에 있는 교회본부에서 교육을 담당하면서 찾아오는 미혼여성들에게 한국어 강좌를 실시했다. 이 강좌를 하기 전에 본부 책임자의 권유에 따라 시내 한 대학의 야간과정으로 개설된 한국어강의를 듣게 되었음은 물론이고. 로안 씨는 한국어강의를 하면서도 한국사람과 결혼할 거라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다. 다만 꿈속에서 몇 번씩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면 베트남 남성이 아닌 다른 나라 남성이 보일 때가 있었지만 그냥 개꿈이겠지 했다. 그녀의 바람은 교회 안에서 대학원까지 졸업한 베트남 남성을 만나 하노이에서 사는 거였다.

뚜겅이는 뚜껑이의 사투리다. 다시말해 솥뚜껑을 뜻한다. 왜 뚜껑을 뚜겅이라 부르느냐? 일에 파묻혀 다른 데 신경 쓸 여유가 없는 시골사람들 대부분은 단순하고 간단하고 편한 것을 좋아한다. 뚜껑보다 뚜겅은 발음할 때 편하다. 남들 세 끼 먹을 때 두 끼밖에 못 먹었고, 보릿고개가 오면 두 끼로 연명할 때 한 끼를 먹은 부모들이었기에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 되라고 이름에 뚜껑을 썼다. 한참 있다가 호적에 이름을 점식이라고 올렸다. 장산댁 둘째이자 송점술 씨 동생 송점식. 동네사람들은 점식이라는 호적이름 대신 뚜겅아, 뚜겅아 하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다. 그것은 일종의 습관과도 같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전화를 받을 때 보통 왼손으로 왼쪽 귀에 수화기를 갖다 대는데, 오른손으로 오른 귀에 수화기를 대고 통화를 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우습겠는가! 애기 때부터 계속 그렇게 불러왔기에 대율리 사람들은 점식이보다 뚜겅이가 더 마음에 들었다. 대율리 사람 가운데 몇은 점식이란 한자말 이름이 있다는 것 자체도 모른다. 심지어 뚜겅이가 한자어인지 우리말인지 구별 못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문제는 뚜겅이가 그랬다는 데 있다.

뚜겅이도 남들 다니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의무적으로 다녀야 했기에 그 의무를 충실히 했다. 문제는 졸업하도록 자기 이름 송점식을 제대로 쓸 줄 몰랐다는 데 있다. 별명인 뚜겅이란 단어도 물론 쓸 수 없었다. 비슷하게 따라 그리기는 했어도 못 썼다. 이건 사실이다. 서울이 아니고, 대도시도 아니고, 중소도시도 아닌 오지에서 학교를 다닌 적이 있는 사람들은 점식 씨 아니 뚜겅이와 같은 사람이 한 학교에 한둘이 으레 있었다는 사실에 고개를 흔들지 못하리라. 때문에 당시 국민학교 2학년만 돼도 마음대로 줄줄 외운다는 구구단을 외우지 못했다. 그래도 뚜겅이는 학교에서 주는 급식을 잘 먹었고, 체육시간에는 누구보다 열심히 참여했다. 친구들과 대화도 부담없이 했으며, 수업시간에 선생님이 가르쳐주는 내용 가운데 일부는 무슨 의미인지도 대충 짐작했다. 문제는 쓰기였다. 해를 바꿔 학년이 올라갈 때 뚜겅이를 맡은 담임 선생들은 학기초에 따로 불러서 공부를 시켰으나 얼마 안 가 손을 들었다. 능률이 오르지 않아서였다. 아마 선생들은 글을 쓸 줄 몰라도 학교생활, 사회생활 하는 데 별 지장이 없을 거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뚜겅이는 지각은 있을지언정 결석이나 조퇴 같은 건 그의 사전에 없었다. 학교 다니는 걸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았던 그였다. 더더군다나 자기 이름 못 쓰는 걸 그다지 불편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점술 씨가 결혼하기 전까지 뚜겅이는 자기 이름은 쓰지 못해도 친구들이 다 있는 핸드폰을 갖고 다녔다. 문자만 보낼 수 없었지 남들이 쓰는 핸드폰을 따라서 그대로 썼다. 뚜겅이는 신체조건이 양호해도 학력 때문에, 자기 이름을 못 쓴다는 사정까지 가미된 결과 제2국민역 판정을 받았다. 말이 그럴 듯해 제2국민역이지 방위병도 아니고, 3주 정도 단기간 군대에서 교육을 받고 병역 의무를 했다는 미필자도 아니고, 군대에서도 받아주지 않은 존재, 민방위였던 것이다. 행동반경이 고작 대율리, 장고리, 읍내 정도인 뚜겅이는 읍내에서 또래 친구들인 백수들과 노닥거리며 세월을 보냈다. 술은 둘도 없는 그의 친구였다. 사정이 급해지면 뚜겅이는 핸드폰의 뚜껑을 열어 형을 찾았다. 점술 씨는 경험상으로 대번에 알아차렸다. 야심한 시각, 동생 목소리가 들리면 돈 갖고 나오라는 뜻이었고, 친구 목소리가 들리면 혼자 갈 수 없으니 데려가라는 뜻이었다. 뚜겅이는 술을 안 마시면 유순한 농촌총각이었으나 술이 들어가면 특유의 마각을 드러냈다.

형님, 너무 형수를 감싸고도는 것 아니요?” “, 감싸고돌다니 나도 니 형수가 잘못한 걸 보면 이렇게 잘못했으니 이렇게 고치라고 한단 말이야.” “그래요? 세상에 식사 준비 하면서 집에 혼자 있다고 그렇게 크게 카세트를 틀어놓으면 어떡해요? 그것도 하루이틀도 아니고 날마다!” “.......” “그것까지는 이해한다고 쳐줍시다. 저번에 하도 배가 고파 집에 왔더니 참말로 가관입디다. 형수란 사람이 베트남 노래인지 몰라도 카세트 크게 틀어놓고 혼자 춤을 추는데... 집이 안 날아갔기에 망정이지. 세상에 음식 만들면서 춤추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복 달아나게! 내가 형수 형수 하고 한 열 번은 더 불렀을 거야, 어떻게 겨우겨우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춤을 멈추고 카세트를 끄고, 그때 형수가 얼굴이라도 붉히지 않았으면 아무리 형수라고 해도 귀싸대기를 한 대 올려 부칠라고 했어. 그게 말이 되는 거요?” 동생 점식의 말을 듣고서 점술 씨는 입을 닫았다. 장산댁의 며느리 대하는 태도도 만만치 않았다. 이럴 경우 옳다 잘 됐구나 하며 싸움판에 가세하는 장산댁.

그래, 느그 동상 한 말이 틀린 것 하나도 없다. 살림 잘하고 고분고분한 건 내 마음에 든다. 그라고 딴 나라에서 와 버스도 안 다니는 이 마을에 살라고 하니 얼마나 마음 고생이 심하겄냐, 그것도 이해한다. 너 언제 느그 집사람하고 목포 시내 나이트크럽 갔었지? 우리 면 사람이 니 집사람 춤추는 것 보고 혀를 내둘렀다고 하더라. 농촌에 시집 온 신부가 조신하고 다소곳해야지 머리 흔들고, 젖통 흔들고, 넙턱지 흔들면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시골서는 소문이 무서운 벱이야. 점술이 너도 한 번 생각해 봐라. 이 소문 금방 안 퍼지겄냐? 너도 니 아내라고 감싸지 말고 잘못된 거 있으믄 따끔하게 말해 고치라고 해라. 사람은 습관이 중요한지를 너도 알 것이다. 송충이가 솔잎을 먹어야지 단풍잎을 갉아먹으면 그게 이치에 맞는 이야기냐?” 그때를 떠올린 점술 씨의 얼굴은 가을철 불 먹은 감처럼 붉어졌다. 다 맞는 말이었다.

이처럼 장산댁의 며느리 보는 시각은 곱지 않았다. 특히, 나이트 얘기를 들은 이후부터는 사사건건 트집을 잡았는데, 집안에 들어오면 며느리와 일체 말 안하는 것으로 화풀이를 했다. 한 집안에 같이 살면서 얼굴을 마주치는 사람끼리 말을 하지 않음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밖에서는 그렇게 입심을 자랑하던 어머니가 집안에 들어오자마자 입을 다물었으니 로안 씨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차라리 이 반찬맛이 별론데 이렇게이렇게 요리하면 더 맛이 있겠구나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지만, 로안 씨의 지옥과 같은 시집살이는 몇 달 가지 않아서 천국생활로 바뀌기 시작했다. 남편 점술 씨의 기발한 아이디어에 말미암았다.

뚜겅이 즉 점식 씨가 드디어 자기 이름을 쓸 기회가 왔다. 학교를 다시 갔다는 뜻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그게 아니다. 집에서였고, 선생님은 한국 사람이 아닌, 베트남 사람 로안 씨였다. 뚜겅이가 한글을 형수에게서 배우게 된 것이다. 점술 씨와 점식 씨는 몇 년 전 폐교 된 모교를 둘러보다 교실 앞면 대형칠판 바로 옆에 붙은 보조칠판을 떼 와 집에 있는 미끈한 나무를 대서 칠판을 만들었다. 분필과 지우개는 읍내에서 샀다. 로안 씨가 선생님이었고, 학생은 뚜겅이와 장산댁 둘이었다. 형의 말을 처음에 듣고 점식 씨는 손을 훼훼 내저었다. 창피해서 어떻게 혼자서만 공부를 할 수 있느냐는 거였다. 어머니까지 학생으로 끌어들이자는 안을 절충점으로 해서 한글수업은 진행되었다. 장소는 집안의 거실이었다. 밤에만 했다. 뚜겅이는 처음에 한글을 형수로부터 배운다는 게 여간 마뜩치 않았다. 혈육인 형도 아니고, 아무리 집안 사람이라고 해도 다른 나라 사람이 자기에게 한글을 가르친다는 게 창피해서였다. 만약 이 소문이 동네로, 읍내로, 군내로 퍼진다면 무슨 창피일까, 소문은 그 속성상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지기 마련인데. 해외토픽 감으로 비칠 수도 있는데. 형의 간곡한 설득과 어머니의 입막음을 전제로 이틀 동안을 심사숙고한 끝에 결정한 결과였다. 혼자가 아니고 어머니와 같이 배우는 건데라고 자위하며.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밤 저녁 먹은 뒤라고 시간까지 정했다. 점술 씨는 강사보조 겸 경비 역할을 했다. 수업 도중 동네 사람이 집으로 찾아오면 재빨리 교실을 거실로 원위치한 것이다.

처음에 뚜겅이와 장산댁은 유치원생들이 배우는 가나다라부터 시작했다. 칠판에 적힌 것을 공책에 그리고, 그린 다음 따라서 읽었다. 그래도 뚜겅이는 국민학교 6년 동안 들은 풍월이 있어서 무슨 뜻인지 대충 알아들었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달랐다. 나이가 있는데다 서당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기에 영 능률이 오르지 않았다. 이럴 때 뚜겅이는 형수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어머니를 가르쳐주다가 닦달하기까지 했다. 뚜겅이 어머니는 뚜겅이의 우격다짐식 설명에 처음에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그래도 이해가 되지 않으면 학교를 6년 동안이나 다닌 놈이 니 분수를 알고 있냐? 이 새끼야!’라며 화풀이를 했다. 그렇다고 해서 뚜겅이의 학습능률이 높은 것은 아니었다. 그 어머니에 비교한다면 그래도 다소, 약간 빠르다는 것뿐.

기역 니은 디귿 이렇게 한글 자음자의 이름을 일일이 다 가르쳐주려 한 선생은 학생들에게 먹혀 들 것 같지 않아 이내 가나다라로만 하기로 했다. 다른 것은 하지 않고 한글 기본자 24자를 익히고 자기 이름을 쓰는 데만 꼬박 세 달 가까이 걸렸다. 숙제를 내주려 했으나 수업시간 외에는 예습 복습을 한 번도 한 적 없는 이들이고, 설령 숙제를 내준다 한들 일에 파묻혀 버린 사람들이 숙제를 제대로 하겠는가!

이름을 쓴 후부터는 노래를 들으며 한글공부를 했다. 본격적인 공부에 들어가기 전, 선생은 학생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무엇인지 물었다. 뚜겅이는 아파트를 꼽았고, 장산댁은 남진이라고 했다. 선생이 다시 노래 이름을 대라고 하자 남진이 부른 노래는 무엇이든 다 좋아한다고 장산댁은 말했다. 선생은 읍내에 나가 아파트와 남진의 시디를 두 개 사왔다. 그 날부터 말이 수업이지 노래를 듣고 따라 부르는 노래방이었다. 읍내 노래방을 옮겨놓은 듯 수업의 분위기는 밝았고,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칠판에는 노래 가사를 적어 놓았다. 세 달 동안 나름대로 기본기를 닦았던 이들이기에 가사를 보고 노래를 부르는 게 공부라고 하자 속으로 웃었다. 그러나 이 방법으로 공부하자 두 달이 채 되지도 않아 자기도 모르게 한글 실력이 느는 걸 스스로 체득하게 되었다. 장산댁은 날마다 님과 함께를 틀어줘야 공부했다. 후렴구나 다름없는 봄이면 씨앗뿌려’, ‘여름이면 꽃이피고’, ‘가을이면 풍년되어’, ‘겨울이면 행복하네사이사이에 으쭈쭈르 쭈르주르라는 여음 같은 것을 되뇌이며 어쩔 때는 저절로 신이 나 학생신분임을 망각한 채 몸을 흔들기도 했다. 장산댁의 이런 모습을 지켜본 아들들은 우습기도 했지만, 행복이 그다지 멀리 있는 게 아님을 간파했다. 장산댁은 읍내에 외출을 하는 날이면, 읍내의 간판 글자를 하나둘 읽어나가는 게 즐거움이었다. 어느 한 날, 그 즐거움에 취해 읍내길을 걷다가 짜장면 배달하는 오토바이와 충돌할 위기도 있었다.

 

점술 씨는 추석을 맞아 고향에 내려온 친구를 통해 국제결혼을 주선하는 교회단체를 알게 되었고, 그 교회가 읍내에도 있다는 사실을 접수했다. 중학교를 마치고 상경해 수제화 공장 직원으로 일하던 점술 씨 친구는 교회를 다닌 게 인연이 돼 베트남 여자를 만났다고 말했다. 점술 씨는 솔깃했다. 결혼을 안 하려고 한 게 아니라 못한 점술 씨였다. 나이가 나이인지라 읍내를 나갈 때면 양복을 걸치고 암내 나는 암캐 찾는 수캐처럼 신붓감을 찾았다. 신붓감 후보들은 심심찮게 눈에 띄었지만, 그 여자들은 자기 분수도 모르면서 사정없이 눈만 높았다. 실속은 없으면서 몸뚱이 하나로 덤벼드는 여자를 경계하라는 친구들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점술 씨는 짚신도 짝이 있다고 했는데 때가 되면 조신한 처녀가 생기겠지 하고 농사를 지으며, 소를 키우며 그렇게 한동안 살았다. 이번에는 설이 왔다. 친구는 애기를 안고 베트남 부인의 손을 잡으며 동네에 또 왔고, 점술 씨 집을 찾았다. 그런 모습이 점술 씨의 머리에 깊이 각인되었다. 친구의 아내가 키는 약간 작지만 눈매가 총명함을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23일 동안 내내 친구와 친구 부인을 주의 깊게 관찰했으나 별종이 아님을 판단한 점술 씨는 친구에게 달라붙지 않을 수 없었다. 마흔을 이미 넘겼던 것이다. 친구는 말했다. 겁먹지 말고 도전해 보라고, 읍내에 있는 교회 목사님이 그 방법을 상세히 알려줄 거라고.

이렇게 해서 점술 씨는 교회를 알게 되었다. 원래 점술 씨는 착하게 살면 되지 교회는 일요일 할 일 없는 사람들이나 다니는 거라고 생각했다. 읍내 중앙에 자리한 교회를 찾아 담당목사와 상담한 이후 점술 씨는 교회관을 바꾸기 시작했다. 거기에서 제2의 인생을 꾸리기로 다잡았다. 국제결혼을 하기 위해서라면 필수코스였던, 목사가 권유한 7일 수련회도 가기로 했다.

수련회 첫날과 둘쨋날은 결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집으로 가고 싶었다. 처음 듣는 소리도 많았고, 때문에 알아듣기에도 벅찼다.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창조했는데, 인간들은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지 못하고 선악과를 따먹어 오늘의 고통을 안게 되었다고 강사는 말했다. 생뚱맞은 소리들만 골라서 하는 것 같았다. 머리에 쥐가 났다. 그러나 점술 씨는 자기와 비슷한 또래의 총각들이 몇 있음을 보고, 그들 또한 자기와 비슷한 표정임을 살피면서 끝까지 동참하기로 했다. 그는 결혼이 우선이었다. 수련회가 중간을 넘어서자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여러 명의 강사들이 헤아릴 수도 없는 말들을 허공에 뿌려놓았다. 그들은 강의 마지막 대목에선 가정의 중요함, 국제결혼의 필요성을 나름대로 언급하며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들은 때에 따라 주먹을 쥐며 열변을 토했고, 기도시간에는 눈물을 철철 흘렸다. 점술 씨도 수련이 끝나는 전날 밤, 강사의 기도내용을 듣고 같이 울었다. 그냥 눈물이 나왔다. 강사는 기도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인간의 삶은 한계가 있다, 많이 살아봐야 고작 100년이다, 그러면서도 아등바등 치고 박고 사는 게 인간들의 현주소다, 그 이유는 사후세계 즉 영계(靈界)가 있음을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는 육신 쓰고 지상에서 양심적으로 살다 영원한 세계인 사후세계에 가서 영생하도록 되어 있다, 이미 많은 우리의 조상들이 영계에 있으면서 지상의 후손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데 우리는 안테나가 고장 나 있어 그걸 모르고 있다, 이제부터라도 정신 차리고 살자, 지상에서 선하게 사는 만큼 그 복은 우리에게 또는 후손들에게 굴러들어오게 돼 있다.

수련 마지막 날, 점술 씨는 소감문에 이렇게 썼다. 구구절절이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행복한 가정이 중요함을 다시 느꼈습니다, 이런 차원에서 귀 단체에서 실시하는 국제결혼에 동참하고 싶습니다라고.

때가 되자 점술 씨와 로안 씨 사이에 아기가 태어났다. 로안 씨는 읍내 병원에 가자는 점술 씨의 권유를 뿌리치고 집에서 아이를 낳았다. 순산했다. 아들이었다. 장산댁은 딸이 아니고 아들이어서 좋았지만, 내심 걱정도 앞섰다. 누런 색 피부가 아니면 어쩌나. 갓 태어난 모든 아기들이 그러한 모습이겠지만, 점술 씨의 애기도 눈 둘에 코 하나, 팔 둘, 다리 둘이었다. 동네 아낙들은 참 그 애기 귀엽고 똘람똘람하네 하며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장산댁은 나날이 자라는 애기가 별 차이 없자 하루에도 몇 번씩 내 강아지, 내 강아지 하며 다독여줬다. 장산댁은 읍내의 작명소에 가서 애기 이름을 받아왔다. 송대용이었다. 대용은 날이 갈수록 눈매가 시원해 강한 인상을 주었다. 애기를 낳은 후 장산댁의 며느리 사랑의 강도는 더해졌다. 무거운 것을 들을라치면 장산댁 손수 해결했으며, 장산댁이 감당하기 어려우면 아들 둘을 불러 며느리를 보호했다.

 

대용이 돌을 지나 점술 씨는 벼르고 별렀던 장인집을 찾았다. 아내와 아들, 동생까지 대동했다. 동생 뚜겅이를 데리고 간 이유는 두 가지였다. 읍내 나들이가 세상 구경의 모두인 동생이 이국 사람들의 사는 모습을 보고 시야를 넓히기를 바랐고, 무학이나 다름없는 동생에게도 교회를 통해 맞춤한 베트남 색시를 소개시켜주려는 차원이었다. 물론 점술 씨는 두 번째 이유를 말하지 않았다.

노이바이 공항에 도착한 그들은 후텁지근한 공기를 가슴으로 맞았다. 오후 늦은 시각, 하노이 시내의 버스터미널에서 미니버스를 타고 시 외곽을 벗어나자 TV에서나 봤던 이국적인 풍물들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다. 혼인신고차 베트남에 이미 한 번 왔던 점술 씨보다 외국여행이 처음인 점식 씨는 차창 밖의 풍광에 취해 있었다. 반 팔과 반바지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뛰어다니는 꼬마들, 누렇게 익은 벼가 있는가 하면 다른 논에는 파릇파릇 자라는 벼의 모습들, 열대과일을 파는 노점상들, 소를 몰고 귀가하는 사람들.

버스에서 내려 다시 택시를 타고 한참이나 가서야 로안 씨의 집은 보였다. 하노이에서 대학을 나와 한국에 시집온 인텔리 집안이어서 자기 사는 것보다 낫겠지 하고 생각한 점식 씨는 기대를 접어야 했다. 집 앞의 논에서는 오리가 꽥꽥거리며 배설물을 쏟아놓았고, 집 옆의 돼지 또한 우리는 있으나 방치된 채로 여기저기를 오갔다. 하지만 집은 2층짜리였고, 비교적 깨끗했다. 동네 사람들은 귀한 손님이 왔다며 집안 이곳저곳을 기웃거렸다. 그들이 나눈 말을 살펴보니 한국말과는 달리 다소 시끄러운 듯했으나 리듬감이 느껴졌다. 동네 사람들의 눈동자는 맑았으며, 얼굴에는 정이 묻어 있었다.

친정집을 떠나면서 로안 씨는 부모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이국 땅으로 다시 딸을 보내는 부모도 덩달아 눈물을 보였다. 새벽밥을 지어먹은 그들은 하노이에 있는 교회에서 여장을 풀고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비행기는 다음날 오후 시간대여서 시내관광에 나서기로 합의했다. 하노이는 더웠고, 시끄러웠고, 공기가 탁했다. 듬성듬성 차가 보였지만 오토바이 천국이었다. 여장을 푼 그들은 사람들이 많이 모인 곳으로 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호수 주위를 걸으면서 베트남 말보다는 영어가 더 많이 들림을 인지했다. 호수 입구의 사당에 들어가 나라를 지켜주었다는 박제된 거북이를 보았고, 수많은 가게에서 파는 다양한 물품을 구경했으며, 갈증이 나자 즉석에서 짠 사탕수수즙으로 해결하기도 했다. 관광객들이 반드시 들른다는 극장에서 전통 인형극을 관람하면서 모내기 장면이 있음도 확인했다. 과일가게에서 망고를 포함한 열대과일이 듬뿍 든 화채를 먹으며 웃음꽃을 피우기도 했다. 덥지만 짜증내지 않고 여유를 즐기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을 본 것이다.

하이퐁에 다녀온 이후 점식 씨의 삶의 방식에 변화의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술 취해 들어오는 횟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쩌다 술에 취해 들어올 때는 전에 없던 버릇이 하나 생겼는데, 로안 씨에게 다가가 읍내 친구들이 권해서 마지못해 한 잔 걸쳤습니다 하고 미안한 어조로 말한다는 거였다. 장산댁과 형에게 퍼붓던 화도 거의 사라졌다. 장산댁은 변해가는 아들을 보고 참 외국물이 좋기는 좋은갑다 하며 속으로 웃어넘겼다. 몇 달 후에 점식 씨는 형을 졸라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흐르자 예전 점식 씨의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입술에 한두 방울씩 묻히고 다니던 술도 끊었다. 점술 씨는 속으로 옳거니 하며 다음 작전에 들어갔다.

 

점술 씨의 둘째가 태어난 해, 점식 씨도 베트남 여성과 결혼식을 올렸다. 장소는 대율리 마을회관이 아니라 읍내 농협 강당이었다. 점식 씨의 술친구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어다니며 열성적으로 결혼식 준비를 도왔다. 대율리 이민들 가운데 거동이 불편한 노인 몇을 제외하곤 농협 강당에 다 모였다.

주례사는 농협장이 했고, 사회는 이장이 봤다. 사회를 하는 점술 씨의 아버지의 눈엔 주례사를 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배어 있었다. 이날 결혼식은 점술 씨의 결혼식순하고는 차이가 있었다. 점식 씨 술친구들이 축가를 엉성하게 불러주기도 했고, 준비된 카세트에서 결혼행진곡도 나왔다. 주례사 내용도 알찼다. 지난 번 점술 씨 결혼식 때와 똑같은 장면이 하나 있었는데, 부케 전달식이 식순에서 빠진 것이다. 도시에서 하건 농촌에서 하건 다른 결혼식에서 으레 하는 부케 전달식을 왜 생략했느냐? 실은 부케를 준비했으나 부케를 받을 만한 신부의 친구가 오지 않았고, 더 나아가 부케를 받을 만한 처녀가 안 나타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결혼한 부인에게 부케를 받게 할 수도, 더더군다나 남자한테 이걸 받으라고 할 수도 없지 않겠는가.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건 베트남 껀터에서 신부의 부모가 와주었다는 것이다. 장산댁은 단상에 앉아 결혼하는 아들을 보면서 이따금씩 눈시울을 훔쳤다. 대율리 사람들은 결혼식장에서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점술이보다 뚜겅이가 더 출세했어.”

각설, 장산댁네 가족은 대율리 역사상 전무한 기록을 남겼다. 장산댁네 두 아들의 부인이 월남댁이라는 것, 아버지는 월남 중부의 나트랑에서 파병 용사로 근무했다는 것, 점술 씨의 부인 로안 씨는 북부의 하이퐁, 점식 씨의 부인은 남부의 껀터가 그 연고지라는 것. 이 기록은 어쩌면 이 섬에서 영원히 깨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최홍길

전남 신안 출생, 선정고 교사

월간 통일세계 편집장 역임

심정문학회 회원, 심정문학상 수상

수필집 : <사랑은 많은데 참사랑이 없다>, 필독서 <한국단편소설 베스트 39>

이메일 : jaeundo@sen.go.kr


첨부파일 문학백서 원고-최홍길 두 편(수기와 소설).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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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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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靑山 /임흥윤 작성시간 19.12.03 최홍길 선생님
    천성경 작업 속에 태어난 천일국 국가 수기
    감명깊게 잘보았습니다
    가문의 영광이기도 하지만
    심정문학에 빛내림 해주셔서
    심정문학의 영광 이기도 합니다
    수고많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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