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1편~
무등산 산유화
추연구/ 수필가
우리 집은 1974년 초에 고향 장흥을 떠나 광주로 올라온 뒤, 40년 넘게 열세 번 정도 옮겨가며 살았다. 1990년까지는 동구 학동 일원에서, 이후로는 북구 문흥동과 매곡동에서 살았다.
그중 여섯 번째로 이사한 집이 ‘배고픈 다리’라고 부르는 학동 홍림교 근처 증심천 가의 독채 전셋집이었다. 거기에서 1979년 3월부터 1980년 12월까지 살았다.
홍림교는 통일신라시대(860년)에 창건된 무등산 계곡 고찰 증심사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다. 무등산 신림골에서 발원한 증심천(증심사천)은 광주천과 합류해 영산강으로 흐른다.
1979년은 내가 재수한다며 공부는 제대로 하지 않고 외곬으로 교회에 몰입하던 때였다. 안구 형은 바쁜 학업 중에 장문의 편지로써 나의 앞날을 염려하며 성심으로 조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처지와 주위에 미치는 영향을 생각하라’고 고언했다. 특히 아버지가 저녁에 담배를 피우면서 어머니에게 나에 관해 물으면, 어머니는 안심시켜 드리려고 애쓰는 나날이라고 전했다. 기대에 대한 실망과 상심, 그것을 지켜보는 할머니나 가족의 마음 그늘이 짙었다.
한 번은 막냇동생 길구와 둘이 식사할 때였다. 동생이 “형, 교회에 갈 거야?” 하고 물어서 나는 순간 동생에게 심하게 대했다. 어린 막내도 걱정스러운 분위기를 알고 그런 것이다. 그런데 그걸 헤아리지 못하고 과민했던 것을 생각하면 지금도 미안하고 가슴 아프다.
우리 집에서 증심천 건너편을 바라보면 넓게 버티고 서 있는 산 하나가 있었다. 주변에서 ‘통일동산’이라고 불러서 호감이 가서 올라갔다. 무등산 남서쪽 줄기의 끝단인 지원동 뒷산이다. 지금은 그 뒤로 제2 순환도로가 나 있는데, 그때는 호젓한 산간이었다.
진달래와 온갖 봄꽃이 만개했다. 청명한 날 봉우리에 오르면, 동산은 서북향으로 서서 시내를 널리 굽어보고 있었다. 잠시나마 구름 위를 나는 듯한 벅찬 기운이었다. 형형색색의 자연 풍치가 반기고 산새들도 화응하듯 해서 나도 모르게 손 흔들어 화답하곤 했다.
학동(鶴洞)은 무등산 줄기가 학처럼 내려와 앉은 구릉지라고 해서 학강(鶴崗)이라고 하다가, 1947년 학동으로 바꿨다고 한다. 지도상 지형은 비상하는 학의 형상으로, 그 머리 자리가 조선대학교 뒤 깃대봉으로 보였다. 미래가 불투명한 때였지만, 나의 시선은 깃대봉을 넘고 먼 데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곳에 보내주시면 일생 헌신하겠다’는 서원을 올렸다.
목표는 신학교 진학이었고, 무작정 간구하는 산 기도는 어느 날부터 40일간 이어졌다. 비 오는 날이나 늦은 밤에도 올랐다. 교회에 있다가 자정을 안 넘기려고 광주천과 증심천을 따라 바삐 걸어 산에 올라 기도하고 돌아가기도 했다. 밤에 동네 골목을 지나면 개들이 짖어대고, 산길에는 파묘하고 정리 안 된 무덤도 있어 소름이 돋았다. 그래도 기어이 약정한 기간을 마쳤다. 하지만, 막상 목표를 이뤄낼 별다른 대책은 없었다.
당시 그 산마루 독자 기도회 순서에는 〈산유화〉 노래가 있었다. 곡과 가사는 나의 심층 저변을 그대로 서정하듯 적중해서 절절한 일체감에 잠겨 불렀다.
본래 〈산유화〉 노래는 두 가지가 있다. 그중 가곡 〈산유화〉는 1920년대 초 김소월의 시에 김성태가 곡을 붙였다. 소월은 ‘산유화(山有花)’를 ‘산에 있는 꽃’ 정도로 썼는데, 학자들은 ‘산에서 피고 지는 모든 꽃’으로 봤다. 문선명 선생이 1974년 미국 뉴욕 매디슨 스퀘어 가든 대회 때 그 〈산유화〉를 불러 장내 분위기를 평정한 전설 같은 일화를 이미 듣고 있었다.
또 하나, 트로트 가요 〈산유화〉는 반야월이 김소월의 여러 시를 연상케 하는 시적인 가사를 짓고 이재호가 작곡해 1957년경 발매됐다. 이재호는 이 곡으로 ‘조선의 슈베르트’라고 불렸다. 원곡 가수 남인수는 늘 앙코르곡으로 빼놓을 만큼 아꼈다고 한다.
가사는 이렇다.
“산에 산에 꽃이 피네. 들에 들에 꽃이 피네. 봄이 오면 새가 울면 임이 잠든 무덤가에 너는 다시 피련마는 임은 어이 못 오시는고.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산에 산에 꽃이 지네. 들에 들에 꽃이 지네. 꽃은 지면 피련마는 내 마음은 언제 피나. 가는 봄이 무심하냐, 지는 꽃이 무심하려뇨. 산유화야 산유화야, 너를 잡고 내가 운다.”
내가 만난 〈산유화〉는 이 곡이었다. 나는 노래하는 자기 음색과 곡조에 동화돼 가슴 아리도록 흐느꼈다. 아련한 열망과 갈구 속 깊은 고독과 무상함으로 몹시 애달팠다. 오죽하면 ‘임이 잠든 무덤가’는 너무나 가혹해서 ‘임이 가신 그 길가’로 개사해 부르기도 했으나, 여전했다.
스스로 고집해 가려는 험로를 예감한 가슴앓이 눈물이었을까. 오랜 질곡과 격동의 역사 속 선대의 애환에서 유래한 곡절의 비애일까. 이는 내 안에서 누가 울려주는 듯한 애통이었다.
평소 수줍음 많던 나는 모임에서 퍽 의연하게 〈산유화〉를 불렀다. 근래 어떤 식구는 “그렇게까지 슬프고 애달픈 노래를 좋아했나?”라고 묻기도 했다. 그로써 나는 원초의 고독과 외로움으로 찾아오신 근원의 아버지, 만유 부모님의 심원한 눈물과 만나고 있었다.
그 가운데 열망의 기도는 먼 데를 향했어도, 하늘은 결국 가장 가까운 곳을 통해 선처하셨다. 부모님의 눈물겨운 사랑의 지원으로써 불초한 나는 이듬해 신학교에 진학했다. 기숙사는 경기 구리 수택리에 있었고, 수업은 서울 청파동 본부교회에 오가며 했다.
내가 구리로 떠나고 석 달 만에 광주 5·18 시민 항쟁이 일어났다. 그때 배고픈 다리 일대에서 시민군이 방어망을 구축하고 계엄군을 총격전으로 물리치기도 해서, 5·18 사적 13호로 지정돼 있다. 당시 다리 인근에 살던 우리 가족은 공포의 나날을 숨죽이며 겪어냈다고 한다.
일평생 자손들의 무사 안위를 빌었던 할머니는 오랜만에 찾아뵐 때마다 진한 눈물로 맞아 줬다. 떠날 때는 굽은 허리로 문밖까지 나와 애써 차비를 쥐여 주며 눈물로 전송해 주셨다.
나는 신학교에서도 〈산유화〉를 불렀다. 전교생이 청평 천성산, 지금의 천정궁 터에서 야영할 때도 불렀다. 문선명 선생 말씀 사도로서 한의 하나님 신학을 설파하던 이요한 목사와 둘러앉은 성산에서 ‘무등산 산유화’를 부르는 건 꿈만 같았다. 그리고 그해 10월 귀국한 문선명 선생을 본부교회에서 처음 맞았을 때, 애끓는 한의 불덩이에 닿은 듯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 시절 청평 출신 최정호 학우가 있었다. 어느 날 함께 단벌 양복으로 멋 부리고 사진관에서 찍은 사진이 남아 있다. 최정호 동문은 일찍 입대한 뒤, 성심 담긴 편지를 종종 보내줬다. 내게 ‘아름다운 꽃송이, 향기 나는 산유화’라는 과한 애칭으로 청초한 목소리의 〈산유화〉가 듣고 싶다며 전선의 애틋한 정담을 전하곤 했다.
그 소중한 인연들이 오간 세월은 어찌 그리 못다 한 애석함만 남는 것일까. 그런 몇 해 전 기도하는 한 식구가 내게 와서 하늘의 말씀이라며 내 손을 부여잡고 한참 울어준 적이 있다. 사실상 〈산유화〉는 그렇듯 나를 두고 울어온 임들의 애절한 달램의 노래였다. 이제는 봄꽃 피고 지고 들새들 노래하는 임들의 산천에서 내 마음도 피어나는 화사한 찬가로 화답하련다.
~2편~
저 언덕 넘어
추연구/ 수필가
하늘의 뜻길을 가는 나날에 심정으로 깊이 공감하며 부른 은혜의 성가와 찬송가가 많다. 〈산유화〉 등 가요도 그에 버금하게 소중한 소재였다. 그중 문선명 선생과 한학자 여사 내외분 앞에서 처음 찬양한 노래는 디튼(Deaton) 작사·작곡의 합창곡 〈저 언덕 넘어〉였다.
넘어야 할 숱한 고개가 기다려도, 예비 된 아버지 나라 집에 이르러 영혼까지 자유 할 꿈의 쉼터를 향한 염원. 그 절실한 간구의 찬양을 직접 현현하신 실체를 맞아 올리는 것은 상상보다 일찍 다가온 특혜의 은총이었다.
1980년 10월 16일 목요일 오전 7시에 내외분이 미국에서 귀국한 뒤, 오전 10시경 서울 용산구 청파동 2가 9-1, 본부교회 2층 대성전으로 왕림했다. 지금의 Y-space 건물이다. 당시는 청파동 1가 전본부교회에서 가까운 작은 공관에서 거하시던 때였다.
그날 본부교회와 서울교구 연합 귀국 환영 예배는 성가 〈영광의 은사〉와 이요한 목사의 기도로 분위기가 고조됐다. 그 가운데 우리 신학교 합창단의 찬양 〈저 언덕 넘어〉와 〈찬양하세〉가 이어졌다.
“저 언덕 넘어 바다 기슭 나 편히 쉬일 곳. 나 위해 예비하신 곳 주 나를 기다리시네. 저 언덕 넘어 집 아름다운 자유의 집. 저 언덕 넘어 집 아버지 날 기다리시네”
나는 테너 파트였다. 내외분의 상기된 용안을 대하며 지휘자의 지휘에 따라 몇 음절을 하다가 그만 눈물이 터지고 말았다. 그때 누구랄 것 없이 모두가 그랬다. 그 순간 몹시 당황해하던 지휘자의 모습을 잊을 수 없다. 선화예술학교 음악부장으로서 본부교회 성가대를 지도하고 있는 준 식구였다. 그런 특유의 돌발이 어느 성가대에서 있을 광경이겠는가. 진정해 주기를 신호하는 지휘자의 절실한 눈빛을 받으며 우리는 오래 준비한 만큼 찬양을 이어나갔다.
“들리는 하늘 위의 노래 주님의 말씀이. 무거운 짐 진 자들은 주 앞에 오라 하시네. 저 언덕 넘어 집 아름다운 자유의 집. 저 언덕 넘어 집 아버지 날 기다리시네. 나 주님 만나 뵙고 그 곁에 있으리. 뭇 성도들과 함께 길이 나 편히 쉬리라. 뭇 성도들과 함께 길이 나 편히 쉬리라.”
감사 반 걱정 반의 찬양이 가까스로 끝났다. 내외분은 그런 장면을 더 귀히 보신 듯 귀엣말을 나눴다. 곧, 김영휘 협회장의 환영사에 이어 꽃다발 증정 후 문선명 선생이 등단해 ‘뜻을 중심한 한국의 위치(한국과 세계)’를 주제로 말씀하고 축도해 줬다.
그해 가을은 그렇듯 실감 나지 않는 특별한 은혜로 들뜬 날들이었다. 내외분은 주일 새벽과 초하루 새벽 6시 경배식 때마다 나와서 말씀해 줬다. 10월 19일 주일은 ‘통일교회와 나’, 10월 26일 주일은 ‘나와 섭리역사의 회고’, 11월 9일 주일은 ‘나와 세계’였다. 전체 섭리가 각자 ‘나’로 결실되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때마다 폭포수처럼 쏟아내는 주옥같은 말씀은 그대로 심정 깊이 박혀 들었고, 필기첩에 깨알 같은 글씨로 받아 남겼다.
그 사이 11월 8일 토요일 오전 10시에 전국 목회자와 중심 식구 한 명씩 동참한 가운데 제21회 자녀의 날 기념 예배가 있었다. 그날 ‘자녀의 날과 재생’이라는 주제로 말씀해 줬다. 우리는 본부교회 성가대 일원으로서 〈엘리야의 하나님〉을 찬양해 올렸다. 전보다는 음정과 화음이 안정됐으나, 제어하지 못한 서툰 표정들은 여전했을 것이다.
말씀 도중 도착한 박보희 사장이 나와서 「뉴스월드」 중심으로 레이건 당선을 이끌어낸 일 등 생생한 미국 활동 보고를 했다. 갖은 노고로 거둔 승리의 쾌거에 몹시 흐뭇하게 보람차 하시는 모습이 역력했다. 저녁 7시부터는 협회 문화부 주최 축하의 밤 행사가 열렸다.
그 무렵 문선명 선생은 전국 기관 기업체를 방문 지도하면서 전국 교구장 회의, 777가정 축복 10주년 기념 총회, 전국 약혼자 전도 대원 교육에서 말씀했다. 국제승공연합 전국자문위원회 회장단 회의와 오찬회, 전국 목회자 총회와 승공 교육, PWPA와 초교파기독교협회 초청 만찬회 등에서도 말씀하는 분주한 일정을 감당했다.
그중 특히 11월 17일에는 평북 정주 출신으로서, 유효원 전 협회장과 초등학교 동기이며 1955년 입교해 뜻길을 따라온 원로 김주화 여사 약혼과 축복을 해 줬다. 그분은 우리 신학생 오르간 실습과 음악 지도를 했는데, 그때 독일 프로 조각가 오토 반더(Otto wanlder) 선생과 특별축복을 받은 것이다. 며칠 뒤 우리에게 지난 생애 간증을 했다.
그해 리틀엔젤스 예술회관 신축 공사에 구미 요원들이 참여했다. 그때 네덜란드 식구 오페라 가수인 테너 행크 레머스(Henk Lemmers)가 와 있었다. 한번은 본부교회 주일 밤 음악 예배에서 여러 곡을 선사했다. 건장한 체구에 온몸이 악기처럼 울리는 장중한 음성으로 마이크 없이 장내를 감동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그런 분이 짬 내어 한때 우리 합창단원들에게 발성 훈련을 시킨 적이 있다. 그러면서 기왕에 지휘자를 키울 요량으로 기초 테스트를 거쳐 서너 명을 뽑았다. 그때 뜻밖에 나도 그중에 뽑혀 얼마간 지도받았다. 나는 평소 악보 보기에 서툴러 가사를 보려고 악보집을 들고 있다시피 했다. 그런데 소리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물론, 여러 일정 탓으로 결실은 못 봤다. 김주화 선생은 수줍음 많고 소심한 나를 보고 멋진 지휘자가 될 거라고 격려하며 마음을 기울여 줬다. 그 내외는 독일로 떠나 왕성하게 활동하며 지낸 것으로 안다.
아무튼, 그런 와중에 문선명 선생 내외분은 귀국 36일 만인 11월 21일 도미 출국했다. 그날 우리 신학생들은 최정창 교수 중심으로 본부교회 대성전에 모여 〈저 언덕 넘어〉를 부르며 눈물로 석별을 준비했다. 공항 가시는 길에 교회 앞을 지날 때 도열해서 손 흔들어 전송했다. 우리는 허전한 마음을 가누며 학업에 매진했다.
통일신학교는 전교생 청평 캠프가 자주 있었다. 방학 때 몇 사람이 어울려 청평에서 정성 기간을 갖기도 했다. 거룻배를 타고 천심호를 둘러보고 산행도 했으며, 저녁에는 수련소 건너편 천유장에서 묵으며 좌담회를 갖기도 했다. 그 기간 금식하는 동기도 있었다. 나는 그때 “새 세계가 온다.”는 하늘의 메시지를 받고, 개강 후 모임에서 보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섭리 상황은 1960년 출발한 제1회 3차 7년노정 승리적 종결과 제2회 3차 7년노정 새 출발이 선포되면서 전체 기반을 혁신하는 일대 변화가 왔다. 부모님 중심한 영적 승리 노정 위에 자녀들과 함께 실체적 노정을 출정하는 호령 소리가 세찼다.
그런 가운데 1981년 4월 12일 본부교회에서 두 번째 맞는 내외분 귀국 환영 예배 때 신학교 합창단이 찬양을 올렸다. 그 뒤 주일 새벽 경배식과 협회창립 제27주년 기념식 등에서 말씀해 줬다. 그리고 10월 18일 세 번째 귀국 환영 예배 후에도 말씀해 줬다.
그렇듯 신학교 2년 생활의 주맥은 그리던 참부모님을 실체로 영접한 사건이었다. 그때는 앞날에 험한 언덕과 고개를 넘게 될 심정적 원동력과 뿌리의 자원을 얻는 충전기였다. 그처럼 민족과 인류를 위해 불같이 뜨거운 열정으로 헌신하며 남기신 사랑과 진리의 생명력은 언제나 뛰는 심장처럼 우리 삶을 추동하는 중추가 된다.
~3편~
남평 문바위
추연구/ 수필가
나는 문선명 선생 어록 중에 “태양은 곡절이 많다. 고로 빛나는 것이다.”라는 구절을 좋아해서 종종 묵상한다. 이 명구를 강한 감흥으로 만난 것은 성화 고3 때인 1978년 나주 남평 드들강 솔밭 유원지에서 가진 야유회 때 상품으로 받은 노트 글에서였다.
그곳 강 건너 길가 암벽에는 남평 문 씨(南平文氏) 시조 유허비가 있고, 뒤편 원암마을에는 시조 탄강지인 문바위(文巖)와 장연서원 등이 있다. 그때 어렵사리 따라갔다가 기념상을 받고 소감 발표도 재밌게 해서 웃음꽃을 피운 기억이 난다.
점차 그 구절이 함축한 뜻을 깨달아가는 중 남평에 대한 애정도 각별했다. 나중 섭리사 집필이나 강좌 때도 첫 장에 문 씨 문중사에 관해 정리해서 다뤘다. 전국 유적을 답사하면서 문 씨 혈족을 예비하신 섭리 현상에 전율어린 감동을 받곤 했다. 아내와 아들의 부산 임지 시절에도 시간 내어 함께 사적지를 탐사했다. 그런저런 탐구의 결실로써 근래 『충의애민의 혈맥』, 『문암천손』, 『동이대한』 등을 펴내 두루 공유하고 있다.
나주는 일찍이 기원 전후로 대륙 동북지역과 중원을 지배하다가 오랜 기간 한반도 서남해로 이주한 동이(東夷) 세력의 주요 정착지로서 그 성씨들의 관향이기도 하다. 특히 반남면 일원은 고대 삼한시대 마한(馬韓) 제국 황도였다. 나주와 영암 등 일대에 산재한 480기가 넘는 거대한 고분과 국보 금동관 등은 그 대표적 사적이다.
족보 『무진신보(戊辰新譜)』(1808) 등은 원조인 무성공(武成公) 문다성(文多省, 472~578)의 문바위 탄강과 신라 왕실 입양 사실을 전한다. 이는 격동의 시대 마한의 황족이 신라에 혈맹관계로 망명 귀화한 역사와 깊은 연관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자비마립간(제20대 왕) 당시 예부시랑인 박이부(박문량)가 왕명으로 서남 지역을 시찰하다가 문바위에서 문다성을 발견해 왕에게 이양했다. 왕은 “하늘땅이 화응하고 어울려 보내준 아이”라고 탄복하며 문 씨로 사성하고 왕족 혼을 시켰다. 문다성은 6대 왕조를 통해 화랑도 창설을 주도하는 등 병사, 정치, 예학, 도의, 육영 분야에 걸쳐 업적이 지대했다.
박이부의 아버지인 박제상(363~419)은 일찍이 『부도지(符都誌)』에서 ‘부도 복건(符都復建)’을 역설했다. ‘부도’는 상고시대 한민족 통치 이념인 ‘천부(天符)’, 즉 ‘하늘 뜻’을 받드는 도읍지라는 뜻으로, 태고 지상천국 마고성을 회복하는 복본(復本)의 이상이다. 박이부를 통한 문다성의 신라 입성은 그 이상 전승과 깊이 연관돼 있었다. 마고할미의 장손 황궁 씨 후예인 동이 주류 혈맥에 뿌리를 두고, 이상과 꿈은 태고 하늘 뜻 복건에 닿아 있었다.
원조인 신라 문다성 이후 430여 년의 상계를 지나 기록상 동명이인의 시조가 고려 개국 공신으로서 역사에 등장해 그 후세들이 고려조에서 명성을 떨쳤다. 『신해보(辛亥譜)』(1731) 등은 시조가 28세(또는, 18세)에 삼한벽상 이등공신이 됐다고 한다. 옛 마한의 본토 기반을 되찾은 호족의 신진 수장으로서, 후백제 점유권인 나주 동부 세력임에도 900년 초 후백제와 격돌한 왕건의 영산강 전투 지원을 통해 고려 개국과 삼한통합에 공헌했다.
탄강설화에 관한 원시 자료인 『송암세보 사성강목(松巖世譜四姓綱目)』(1597, 이노)에는, 문다성이 ‘높은 절벽 위 바위틈’의 ‘돌 상자(석함)’에서 났다고 했다. 군주가 ‘강’에서 뱃놀이를 즐기다가 울음소리를 듣고 사람을 시켜 올라가 돌 상자를 굵은 끈으로 묶어 내렸더니, 옥설처럼 피부가 하얀 어린아이가 있었다고 한다.
『파주보』(1629)는 군주가 ‘큰 연못(池, 지)’에서 뱃놀이하고 있을 때 연못 곁의 ‘천 길(千丈, 천 장) 되는 우뚝 솟은 바위(巖, 암)’ 위 ‘돌 상자(석갑)’에서 발견됐다고 했다. 『신해보』에서 장소를 ‘바위 아래’로 표기하고 ‘택(澤)’을 사용한 뒤, 오늘의 장자못 문바위로 전승됐다.
탄강설화는 불이 솟고 붉은빛이 모인 큰 바위 위의 돌 상자에 붉은색 글씨의 ‘글월 문(文)’ 자가 새겨져 있었다고 전한다. 이는 성서 섭리사 맥락에서 신성성 충만한 의미를 계시한다.
일찍이 이스라엘 민족의 모세는 하나님이 두 석판에 불로 새겨주신 십계명을 지성소 법궤에 모시고 성막을 건축했다. 이것은 장차 실체 성전 된 말씀 완성의 주인공으로 오실 메시아를 상징했다. 예수님은 “돌로 떡이 되게 하라”는 사탄의 시험에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응수했다. 말씀 석판과 법궤, 돌과 말씀, 바위와 석함 ‘글월(文)’의 오묘한 상관성은 하나님 혈통과 진리의 주인공인 재림메시아의 한반도 강림 섭리를 예시한다.
특별히 이런 유서 깊은 문바위 일대 성역화 및 관광 자원화 사업을 위해 최근 10년 넘게 헌신 봉사해 온 신천운 티월드 대표이사가 있다. 나는 앞서 문중 문평래 회장으로부터 이분을 소개받았다. 그리고 2023년 6월 나주가정연합 이병화 목사의 연락을 받고 남평으로 내려가 함께 만나서 그간의 경과를 듣고 요지를 둘러봤다.
신 사장은 옛날 초등학교에 다닐 때 문바위 아래까지 물이 출렁여 바위 위에 올라가서 장자못에 다이빙도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장자못을 안고 도는 산세는 와룡이 누운 형국이며, 그 머리 쪽에 닿은 문바위가 여의주(如意珠)라고 말했다. 그런데 문선명 선생의 원리 말씀과 명성이 오대양 육대주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으니, 그 여의주를 문 선생이 물었다고 단언했다.
일찍이 문선명 선생 태중 시절 생모가 친정에 갔다가 현시에 산정으로 승천하는 한 쌍의 황룡을 목격했다. 아명도 ‘용명(龍明)’이었다. 그런데 말씀 중에는 “용이 하늘나라에 가려면 여의주를 물어야 하는데, 남자는 여자라는 여의주를, 여자는 남자라는 여의주를 영원히 물고 가야 최고 귀중품이 된다. 진짜 참된 선의 핵, 씨 중의 씨는 두 쪽이다.”(2006.8.5.)라고 설파했다. 이는 하나님의 상대 창조이상을 역설한 것으로써, 성함 ‘문선명(文鮮明)’도 말씀(文)으로 바다와 육지(魚+羊)와 하늘(日+月)을 총괄하는 뜻이다. 이러한 근본 사명은 인류 참부모 참가정 축복 역사와 평화통일 운동으로 ‘선명’하게 구현됐다.
신 사장은 남평 국제화 관광자원은 문바위뿐이라고 지목했다. 국가 지정 문화재 승격을 목표로 시·군에 제안하면서 역사공원 조성 사업 등을 추진해 왔다. 문 씨나 가정연합 식구도 아닌데 이렇듯 문바위 찐 사랑으로 헌신하면서 소통하는 성심에 크게 감동하며 교류하고 있다.
1,500년 넘는 아득한 세월의 풍상을 겪어온 문바위의 천손 혈족, ‘부도 복건’의 이념과 비전으로써 동서 화친과 삼한통일의 근간이 된 충의애족의 문중, 그 토대에서 동방의 태양 빛으로 문선명 선생이 현현해 일생 찬연한 성업을 일궈냈다. 공교롭게 그 탄생 3년 전 반남 신촌리 고분에서는 오랜 세월 잠들었던 금동관이 발굴돼 깨어났다.
우주의 뭇 광원은 자신을 태우는 치열한 곡절의 희생으로 모두를 빛 되게 한다. 인류 자녀를 위한 곡절 많은 하나님 섭리사는 문바위 혈손을 통해 해·달·별빛 같은 영광의 광채로 천지를 길이 빛내게 될 것이다. 문바위는 장자못 못물을 정화수 삼고, 그날을 숙망하는 치성으로 숭엄한 태동의 신성 터를 아득히 지켜오고 있다.